[이성낙의 그림 이야기] 여드름, 예나 지금이나 청소년들의 한결같은 고민

기사입력 2017-02-08 18:31 기사수정 2017-02-08 18:31

조선시대 초상화를 보면서 다양한 피부 증상을 확인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조선시대 후기의 걸출한 문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당헌 서매수(戇憲 徐邁修, 1731~1818)의 초상화를 보노라면 심한 여드름 자국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피부과학을 전공한 뒤 그동안 수많은 여드름 환자를 진료해온 필자가 보기에도 서매수 초상화에 묘사된 여드름 자국은 생생하기 이를 데 없다.

서매수 초상화를 처음 봤을 때 필자는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흔히 관찰되는 천연두 자국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얽은 자국’이 코, 입 그리고 턱 주위에 퍼져 있었다. 요컨대 코를 중심으로 마름모꼴 안에 ‘얽은 자국’이 모여 있었고, 이마와 양 볼에는 상대적으로 증상 밀도가 낮았다. 이는 여드름 병변의 교과서적인 분포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여드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피부의 기름샘, 즉 피지선(皮脂腺)이 상대적으로 코와 입 주변에 몰려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피사체인 선비가 청소년 시절 겪어야 했을 심리적 고뇌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어 애잔하기까지 했다.

예나 지금이나 여드름 때문에 겪는 아픔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 날, 한 지방법원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법원에서 뜬금없이 걸려온 전화라 고개를 갸웃하며 받았다. 그런데 첫마디가 “저는 ○○○의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였다. 잘 기억나지 않는 이름이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수화기 저쪽에서 말을 이어왔다. “얼마 전 여드름을 치료해주신 ○○○의 아비입니다.” 그제야 환자의 얼굴이 생각났다.

대학생인 그 환자가 진료실을 찾아왔을 때 필자는 내심 놀랐다. ‘어떻게 얼굴을 이런 상태가 되도록….’ 그 정도로 여드름 병변이 심각했던 것이다. 대학생인 본인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이런 상태가 되기까지 방치한 부모의 무관심을 속으로 탓했다.

다행히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서 환자의 상태는 예상보다 빠르게 호전되었다. 여드름이 치유되자 우울해 보였던 청년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담당 의사로서도 너무나 기쁜 일이라 자연스레 환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환자의 부친은 필자에게 “요즘 아들 방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와서, 너무 기쁜 마음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라고 말했다. 순간 젊은 학생이 그동안 느꼈을 마음고생이 한층 무겁게 다가왔다. 그 무렵 인천에 사는 한 여학생이 심한 여드름 때문에 고민하다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더욱 그랬다.

문득 필자가 전문의 수련 과정을 밟을 때 스승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하찮은 뾰루지 하나가 이마나 볼에 생겨도 힘들어하는 환자가 있다. 의사는 그런 마음을 늘 헤아려야 한다.” 환자의 부친과 통화를 하면서 새삼 스승의 가르침을 한 번 더 마음에 새겼다.

앞서 언급한 초상화의 주인공도 젊은 시절 심한 여드름 때문에 꽤나 마음고생을 했으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누가 여드름을 ‘청춘의 꽃’이라고 했던가. 이 그럴듯한 말에 숨겨진 심리학적 해석을 차치해도, 그동안 여드름 때문에 필자의 진료실을 찾았던 수많은 환자들의 잔영이 기록영화처럼 뇌리를 스치는 날이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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