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서 실비아 크리스텔처럼 순진했던 여인도 서서히 본능에 눈을 뜨게 된다. 급기야 남편과 서로 각자의 다른 사랑을 인정하고 즐기는 수준까지 도달한다. 이 점을 파고들어 졸혼을 했다면 또 다른 사랑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도발적인 질문을 해봤다. 개그우먼 박미선은 “푸하하!” 하고 웃었다.
보통 여자 연예인들은 포털사이트 프로필에서 나이를 알 수 없다. 밝히길 꺼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미선은 버젓이 1967년 3월 10일이라고 생년월일을 모조리 밝히고 있다. 그만큼 꾸밈이 없고 솔직한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다른 어떤 게스트와 인터뷰할 때보다 훨씬 설레었다. 솔직하게 막 털어놓을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이었다. 박미선과는 2014년 TV조선의 라는 프로그램에서 6개월 정도 같이 방송한 경험이 있다. 그때 메인 MC가 박미선이었고 이봉규는 여우팀을 공격하기 위한 늑대팀의 최전방 공격수였다. 제작진의 이 같은 의도와는 달리 보통 여우들이 아닌 구미호들(금보라, 이경실, 현영 등)을 상대하기에 한량 이봉규는 역부족이었음을 회상한다. 여우들의 화풀이, 분풀이, 속풀이 대상으로 그저 얻어터지기만 했다. 최전방 공격수로서 역할을 못한 정도가 아니라 늑대팀의 자살골을 어시스트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까지도 몰렸다. 그때 여우들과 늑대들을 적절히 어루만지며 긴장감과 소통의 고난도 플레이를 능수능란하게 펼쳤던 메인 MC가 바로 박미선이다. 이봉규도 자칭타칭(自稱他稱) 한량이기에 어느 정도 내공이 있다고 자부해왔건만 박미선의 사람 다루는 내공에는 손을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27세에 결혼해 모범 전과 같은 삶을 살다
방송 MC로서의 내공은 상당하지만 사랑이나 섹스에 관해서는 왠지 솔직한 선무당 같은 느낌이 들어서 훅~ 들어갔다. “남편 이봉원과의 결혼생활 만족하나? 이봉원을 아직 사랑하나? 잘생긴 다른 남자를 보면 설레는 마음이 들지 않나?” 등 집중 포화했다.
솔직한 그녀이기에 쇼킹한 답변을 기대하고서다. 박미선은 역시 기대에 부응했다. “평생 한 남자랑 사는 것은 벌칙이다. 봉원과는 친구 같은 감정이다.” 그러면서 개그우먼의 센스도 곁들인다. “남편과 사랑의 감정 대신 인류간의 사랑이나, 동물을 사랑하거나 무엇인가 대상을 찾고 있다.” 상대의 무기를 공격할 바에는 때린 데 또 때리는 전술도 효과적이다.
“결혼 25년 차 아줌마지만 아직 충분히 매력적이고 섹시하다. 바람피운 적 있나?”라고 도발적으로 물었다. 그녀는 “푸하하!” 하고 크게 웃더니 한참 후에 입을 뗐다. 그래도 은근 기대했는데 “맛을 모르면 그 맛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금단의 열매를 안 먹어봐서 바람피우는 게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못해봤다. 스물일곱 살에 결혼해서 모범 전과 같은 삶을 살았다”는 쓸쓸한 고백만이 돌아왔다. 방송이 아무리 늦게 끝나도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에다 시간만 나면 책 보기를 좋아해서 음악 카페에서 책을 읽노라면 남편이 채워주지 못하는 빈자리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박미선은 늘 재밌게 살고 있다.
어지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여자
모범생일지라도 발칙한 상상은 하는 법. 그리고 EBS의 에서 졸혼(혼인관계는 유지하지만, 부부가 서로의 삶에 간섭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개념)에 대해 “각자의 삶을 존중하는 것이 졸혼이라고 생각한다”며 의견을 밝힌 적이 있고 “현재 이봉원과는 설레는 감정이 없다”라고 대답한 적도 있기에 치정 전문가 이봉규가 또 깊숙하게 들어갔다.
프랑스 영화 에서 실비아 크리스텔처럼 순진했던 여인도 서서히 본능에 눈을 뜨게 되고 급기야는 남편과 서로 각자의 다른 사랑을 인정하고 그걸 오히려 즐기는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파고들면서 “졸혼을 했다면 각자 서로 다른 사랑을 찾을 수 있지 않나?”라고 도발적으로 물었더니 박미선은 “이봉원이 상남자라서 내가 실비아 크리스텔이 되긴 어렵다”고 말한다. “이봉원은 박미선이 바람을 피우면 즉시 이혼 도장을 찍는다”는 부연 설명도 한다. 워낙 사슴보다 큰 눈을 가진 사람으로 겁이 많기 때문에 그러고 살았으리라! 게다가 박미선은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성품이라 결혼을 깰 정도로 흐트러지기가 매우 어려운 사람이다. 인터뷰 도중에도 다음 녹화 준비에 대해 매니저에게 시시콜콜 체크하며 철저히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눈치 챘다. 이 여인은 어지간해서 무너지지 않겠구나! 이봉원이 전생에 나라를 여러 번 구했나보다. 처복(妻福)이 넘쳐난다. 내가 진행했던 방송 에서 부인 덕을 본 남자 순위를 매긴 적이 있는데 이봉원이 상위에 랭크됐었다. 완벽주의자 박미선이 결혼한 지 25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남편을 상남자로 대접해주는 걸 보면 이봉원에게 뭔가 필살기가 있다고 봐야 한다. “이봉원이 빚을 많이 져서 박미선이 그걸 갚느라고 방송을 많이 한다” 등의 얘기가 방송가에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봉원은 자기가 버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쓴다. 내가 번 돈을 축내지는 않는다”고 해명한다. 이봉원도 한 방송에서 아내 박미선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라는 별명에 발끈했다. 이봉원은 SBS의 에 출연해 빚에 대해 밝힌 적이 있다. “박미선에게 돈을 빌린 적은 없다. 갚는 것은 내가 다 갚았다. 다만 생활비를 안 줬을 뿐. 돈이 없으니까, 있으면 줬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정말 요즘 보기 드문 간 큰 상남자다.
박미선은 이봉원의 이 같은 배짱을 좋아하고 존경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봉원과 끝낸다고 생각조차 안 해봤다”는 그녀의 말 속에는 남편에 대한 존경심이 묻어난다. 그렇다면? 25년 같이 살아온 부인으로부터 상남자로 인정받고 있는 이봉원은 멋진 남자 아닌가? 이 대목에서 한량 이봉규도 슬쩍 위축된다. 재혼한 지 1년이 조금 넘었으니까 아직은 마누라에게 인정받고 있지만 만약 25년 후 늙었을 때도 나를 존경해줄까? 왠지 어깨가 오그라드는 느낌이다.
여든 살이 넘어도 흰머리로 방송하고 싶다
완벽주의자로 준비성 많은 박미선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놓았단다. 몸짱 실천/ 아프리카봉사/ 아무 생각 없이 친구들과 떠나기/ 배낭 메고 세계 유명 미술관 다녀오기/ 마지막 불꽃 태워보기/ 올해 30주년 기념 디너쇼 등이 그녀의 버킷리스트다. 크게 어렵지 않아 보인다. 버킷리스트를 봐도 역시 그녀는 허황함이 없다.
‘마지막 불꽃 태워보기’에 귀가 솔깃해서 “아직 몸매도 예쁘고 매력이 있으니까 더 늙기 전에 빨리 마지막 불꽃을 태울 상대를 찾아라!” 하며 부추겼다. 중년 여성들에게 몰매 맞을 각오하고 조언한다면? 여성의 섹시함은 수명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박미선이 지금처럼 섹시함을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은 앞으로 10년을 넘지 않으리라는 판단이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여자는 남자에 비해 육체적인 섹시함이 빨리 사라진다. 예를 들어 남자 60세는 잘만 관리했다면 상당히 섹시할 수 있다. 숀 코네리는 1930년생으로 88세이지만 아직도 섹시하다. 그의 60대 시절은 섹시함의 전성기였다. 숀 코네리보다 두 살 아래인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아름다움의 대명사였지만 2011년 사망하기 한참 전인 60대에 이미 섹시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드리 헵번도 마찬가지다. 물론 58년 개띠 마돈나는 60세에도 여전히 섹시하지만 대체로 여자는 남자에 비해 섹시함을 빨리 상실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의 이 같은 분석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면? 박미선이 지금의 섹시함을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은 10년도 채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 점을 용감하게 지적했더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인정하면서도 마지막 불꽃을 태울 엄두를 내지 못한다. 상남자 이봉원이 겁이 나서일까? 아니면 대중의 시선이 무서워서일까? 아니면 새로운 사랑의 위험이 무거워서일까? 이것도 저것도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박미선은 버킷리스트에는 그렇게 적었어도 이생에서는 이봉원을 떠날 용기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 않을까? 그만큼 만족스런 생활을 해왔던 것은 아닐까? 이봉원과의 결혼생활도 그럭저럭 만족스럽고 지금의 방송활동이나 책을 읽고 영화 보는 취미생활까지 더 이상 바랄 게 없는지도 모른다.
“여든 살이 넘어도 흰머리를 하고 방송하고 싶다. 나이 들수록 일하는 게 즐겁다”고 말하는 박미선의 큰 눈이 더 커진다. 박미선의 버킷리스트는 전부 다 이루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심지어 그녀의 버킷리스트 중에 가장 어려워 보이는 ‘마지막 불꽃 태워보기’도 이뤄질 것 같다. 그런데 혹시 그 상대가 이봉원이 아닐까? 완벽주의자 박미선이 결혼한 지 25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남편을 상남자로 대접해주는 걸 보면 이봉원에게 뭔가 필살기가 있다고 봐야 한다. “봉원과 끝낸다고 생각조차 안 해봤다”는 그녀의 말 속에는 남편에 대한 존경심이 묻어난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열심히 살아온 당신. 그 훈장 같은 세월을 굳이 감추려 하지 말라.
“2008년인가 새해 결의 중 하나로 정한 게 염색 안 하기였어요. 본모습을 뭔가로 가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일하고 있는 제네바는 워낙 다양한 인종에 머리 색깔이 천차만별이라 제 반백 머리에 아무도 개의치 않아요.”
하얀 단발머리에 무테안경을 끼고, 작은 진주 귀고리로 멋을 부린 여자는 의외로 핸드백이 아니라 백팩을 메고 있었다. 본모습을 ‘뭔가’로 가리고 싶지 않다는 의지는 그녀의 패션 곳곳에서 드러났다.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외교부장관 강경화다. 모든 장단점을 차치하고 오로지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모습의 강경화는 단연 멋있다. 유리천장을 뚫은 그녀는 넥타이를 맨 보수적인 남자들을 따라 과하게 남성화가 되는 것을 택하거나, 아름다움을 위해 억지로 세월을 흐름에 역류하는 짓도 하지 않았다. 워딩 그대로 본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파뿌리처럼 센 흰머리마저도 강경화에겐 세월의 훈장이고 자신의 역사였다.
요즘 염색이라는 인위적인 방법 대신 자연스럽게 늙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강경화를 비롯해 IMF 총재인 크리스틴 라가르드, 영국 총리 테리사 메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인 재닛 옐런 같은 다국적 롤 모델들이 거울 앞에 서서 나이 든 모습을 한탄하는 대신 하얗게 센 머리마저 사랑하라고, 당당해지라고 외치고 있다. 묘하게 예로 든 여인들에게는 공통점이 많다. 하나같이 ‘사상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성공한 여성들이다. 또 그녀들은 머리를 염색하지 않는다고 패션에 관심 없는 이들이 아니며, 마크 저커버그처럼 큰일을 하느라 자신을 꾸미는 것에 소홀한 사람들도 아니다. 오히려 능력을 돋보이게 해주는 취향과 감각을 갖추고 있다. 회색 집업(zip-up)만 주구장창 입는 젊은 청년이 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두 부류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한쪽은 나를 사랑하지만 거짓으로 포장하지 않고, 다른 한쪽은 포장된 나의 모습을 사랑한다. 우린 전자의 모습을 백발의 시니어들에게서 발견한다. 백발에 대한 인식이 변한 건 불과 몇 년 사이의 일이다. 얼마 전만 해도 흰머리를 그대로 두는 건 게으름이나 자기 방치와 같은 상징으로 읽혔다. 부모의 센 머리에 염색약을 발라주는 자녀의 모습은 가슴 뭉클한 가족 광고의 클리셰와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자녀라면, 부모의 흰머리를 가리는 대신 훈장과도 같은 흰머리를 부러워할 것이다.
흰머리는 단순히 머리의 컬러가 아니다. 그건 때때로 당당함의 상징이고, 연륜의 기록이며, 노년의 철학까지 내포하고 있다. 머리에서 이어지는 패션, 액세서리, 에티튜드에도 그 모든 것이 묻어난다. 흰머리 여인들의 공통점은 패션 스타일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들은 그 흔한 ‘아줌마 펌’을 하지 않는다. 강경화나 크리스틴 리가르드처럼 짧게 자른 단발은 누군가처럼 올림머리를 하느라 몇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이효리보다 앞서 자연주의를 추구해온 여배우 문숙 역시 흰머리를 염색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자란 머리는 인위적인 올림머리를 하기보다는 툭툭 말아 묶는다. 그리고 정갈한 주얼리를 더한다. 손톱만 한 진주 귀고리가 적당하겠다. 자연스러운 멋과, 그냥 자연스럽기만 한 건 다르다. 앞서 예를 든 여인들 역시 주얼리나 스카프, 브로치 등으로 멋을 부린다. 흰머리의 담백함이 오히려 주얼리의 힘을 살려준다.
이 흐름은 옷에서도 드러난다. 과한 프린트보다는 심플한 컬러 위주의 옷을 택한다. 흰머리와 대조되는 화려한 옷차림은 당신을 삐에로로 만들어버릴지도 모른다. 백발의 여인뿐 아니라 백발의 신사 역시 과거에 비해 늘고 있다. 백발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배철수다. 20대의 배철수도 청바지에 스니커즈를 신었고, 60대 중반의 지금도 여전히 그 차림이다. 자신의 ‘본모습’이 뭔지 20대부터 알았고, 주름이 늘고 엉덩이 살이 빠진 지금의 배철수 역시 자신의 노화된 ‘본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만일 누가 나에게 백발에 어울리는 패션이 뭐냐고 묻는다면 길게 얘기할 생각이 없다. 지금 당신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스타일, 그걸 그대로 유지하면 된다고 말할 것이다. 백발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순리대로 사는 삶, 그 자체이므로.
서울 지하철 1호선 대방역 근처 좁은 골목 끝, 작은 이발소 하나가 있다. 이발소 딱 하나 말고는 그저 사람 사는 오래된 집들이다. 간판도 떼버리고 없는 이 안은 늘 손님으로 가득 차 있다. 후미지고 주위에 상점 하나 없는 이곳을 어떻게 알고들 찾아갈까. 전철이 오가는 바로 옆, 노래 후렴구마냥 ‘달그락, 철컥’ 전철 지나는 소리가 잊을 만하면 들린다. 이발소에 들어선다. 그 순간, 어린 시절 아빠 따라 들어갔던 옛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10년 단골은 기본
요즘 동네 이발소를 본 적이 있던가. 대형 미용실이 생겨나더니 상남자의 성지와도 같던 이발소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젠 필요가 없어 간판도 떼버렸다는 이곳은 ‘역전이용소’. 굳이 간판이 있을 이유가 없다. 그냥 봐도 ‘역전 이발소’이니 말이다. 앉아 있는 손님마다 물어보면 이발소와 10년 넘는 우정을 과시한다. 이 동네 남자들만 이용하는 곳이 아니다. 손님들이 사는 곳도 다양하다. 멀리서는 충남 예산에서도 오는 손님이 있다. 37년 단골손님을 자처하는 정우석(89)씨는 경기도 의왕시에서 왔다.
“여기에 다닌 지 30년이 넘었어요. 공화당이 망할 때부터 오기 시작했지. 내가 공화당에 있었거든. 오늘은 을지로에서 설렁탕 먹고 소주 한잔 하고 와서 힘들어 죽겠어. 여기 오면 반드시 이거(믹스커피) 한 잔 먹어. 이게 딱 낙이여.”
정우석씨는 고등학교 친구를 따라 처음 이곳을 방문했다. 친구들과 모여 이발소를 이용했는데 지금 혼자 남아 백발 머리를 다듬는다.
“고등학교 동창 중에 치과의사가 있었는데 죽은 지가 오래됐어. 아마 7~8년은 된 것 같아. 친구가 여기를 다니더라고. 그래서 한번 와봤는데 잘해주데. 한 번 두 번 왔는데 언제든 잘해줘. 그러니 30년 넘게 올 수밖에. 염색 안 한 지는 10년 됐어. 내가 한 40년 가까이 염색을 했어. 30대 후반부터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거든. 그런데 눈도 좀 안 좋아서 안 했어. 젊어 보이는 거 말짱 헛거예요.”
이발소를 나가는 정우석씨에게 “예뻐지셨다”고 말을 건넸더니 “나이 90까지 살면서 예쁘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면서 웃는다.
“이발하고 나면 여기 사장이 모자는 들고 가라고 하는데, 난 모자 쓰는 게 좋아요.”
15년째 그때 그 가격
권오복(81)씨는 한 달에 한 번 꼭 이곳에 와서 머리를 자르고 염색을 한다. 친절하고 무엇보다 머리를 잘자른다. 가격도 저렴해서 다닌 지 10년 됐다.
“머리 자르고 염색하면 9000원입니다. 머리를 잘하시고 가격도 싸고 손님이 많아. 여기 오면 두세 시간은 기다려야 해요.”
이정학(62)씨도 역시 10년 넘은 단골. 아내가 말하길 지금까지 머리를 자르면서 최고로 잘 자르는 곳이라고 말해준다고.
“마지막 마무리가 정말 깔끔해요. 한번 맛 들리면 다른 곳에 못 가요. 올 때마다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걸려요. 전화 예약하고 오면 순번이 조금 빠르기는 해요. 여기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나서 좋아요. 사실 세면기도 완전 옛날 거였는데 몇 년 전에 새로 바꿨어요. 뜨거운 물도 잘 나오고요.”
죽음, 대화의 흔한 주제가 되다
“이 자리에서 처음 이발 기술을 익혔습니다.”
50년 된 이 역전이용소의 주인인 임근묵(59)씨. 25년 전 원래 이곳 주인이었던 고모부로부터 이발소를 인수했다.
“제가 공부를 잘 못해서 고등학교 떨어지고 충남 공주 집에서 빈둥거릴 때였어요. 야간학교에라도 들어가라며 고모부가 저를 서울로 불렀어요. 제가 공부 머리는 아니라서 시골집으로 도망갔죠. 그런데 또 잡으러 오시고요.”
처음에는 이발기술을 안 배우고 2년 동안 공장에 다녔다. 잠은 지금 이발소 바닥에서 직원들과 같이 자며 생활했다.
“공장은 일요일에 놀지만 이발소는 바쁘잖아요. 그러니까 일요일에 일손이 부족하니까 손님 머리 감겨주는 방법을 배운 거예요. 몇 년 뒤 공장이 망해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명절에 이발소가 바쁘다면서 고모부가 자꾸 저를 서울로 오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어요. 나 스무 살 때. 그때부터 마음먹고 이발을 배웠어요. 5년 머리 감기고, 면도 배우고 정말 하나씩 밟아서 올라갔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서 제가 일한 지도 40년이나 됐네요.”
이곳에서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 이유인즉은 손님 대부분이 70을 훌쩍 넘은 시니어이기 때문이다. 1년이면 단골손님 스무 명은 세상과 인연을 다해 더 이상 얼굴을 볼 수 없다.
“오늘 오전에 의왕에서 아흔두 살 된 단골손님이 왔어요. 대방역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20분이나 걸렸다 하시더라고요. 젊은 사람 걸음으로 5분이면 되는 거리죠. 다리가 무겁다고, 이제 그만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거동 못하는 손님들을 위해 가끔 머리를 잘라주러 집으로 병원으로 간다는 임근묵씨. 취재 당일도 못 오는 손님의 머리를 자르러 여의도에 가야 한다며 시계를 몇 번이고 쳐다봤다.
“아파서 못 오시는 분이 계셔요. 제가 가요. 병원에도 가고요. 연세들이 많으시니까 매년 달라요. 몸이 힘들어 못 나가니 집에 좀 와달라고 하십니다. 그러다 돌아가시고 그래요.”
혹시 이 지역이 재개발된다면 이발소를 그만둘 생각이라면서도 불편해진 분들을 생각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고. 이발을 배우는 사람은 거의 없고, 손님들은 점점 나이 들어가는 상황. 그래서 임근묵씨는 옛날 방식의 정통 이발을 해온 대한민국 마지막 이발사를 꿈꾼다.
“저를 찾으시는 분들이 있잖아요. 제가 없으면 불편해할 분들이 있으니까요.”
미국은 세계에서 실버타운이 가장 발달한 나라다. 자녀가 성인이 되면 독립하고 결혼을 하더라도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 독립적인 가족문화 때문일 것이다. 은퇴 후 자식에게 의존하기보다는 내 스스로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시니어들의 의식도 한몫했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에 이미 실버타운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현재 전국적으로 이름난 대규모 은퇴 단지만 3000여 곳, 이 중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의 작은 해안도시에 있는 라구나우즈 빌리지는 한인들에게는 꿈의 은퇴촌으로 불린다. 365일 따뜻하고 화창한 날씨, 입맛대로 골라 즐길 수 있는 클럽활동,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동년 친구들, 무엇보다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는 곳이다. 서로를 ‘아름다운 동행자’라 부르는 이곳, 라구나우즈 빌리지의 한인들을 만나봤다.
미스터&미세스 손
“입구를 잘못 들어왔네요. 거기서 기다려요. 미스터 손한테 나가보라고 할게요~”
은퇴촌이라고 만만히 봤다간 낭패다. 라구나우즈 빌리지의 총면적은 2100ac(약 250만 평). 라구나우즈 시(市)의 90%를 차지한다. 여의도 전체보다도 크다.
알려준 9번 출입구를 못 찾아 8번 출입구로 들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9’에서 ‘8’이 멀어봤자 얼마나 멀겠냐 했지만 결국 길을 잃었고 기어이 80세의 주인장을 마중 나오게 만들고 말았다. 나무 그늘 밑에 자동차를 대놓고 5분 정도 기다리자 언덕 위에서 골프카트 한 대가 바람을 가르며 달려왔다. 흐트러진 흰머리를 단정히 하며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는 노신사. 미스터 손이었다. GPS를 손에 들고도 길을 잃은 젊은이(?)에게 위로의 말도 잊지 않는다.
“여기가 원래 넓어서 찾기가 좀 힘들어요. 하하하.”
손기용(80), 손종숙(75) 부부. 빌리지에서 이들은 미스터&미세스 손으로 불린다. 두 사람은 캘리포니아와 정반대 쪽에 있는 오하이오에서 40년 넘게 소아과 의사, 병리과 의사로 각각 일하다 은퇴를 했고 6년 전 캘리포니아로 이주, 라구나우즈 빌리지의 주민이 됐다.
“오래 살았던 오하이오가 익숙하긴 했지만 겨울이 추웠어요. 따뜻한 플로리다로 갈까, 아들이 있는 캘리포니아로 갈까 고민하던 중에 집이 덜컥 팔려버린 거예요. 어디로든 떠나야 했죠. 일단 아들 집과 가까운 이곳 라구나우즈 빌리지에서 월세로 살면서 천천히 결정해보자 했는데, 두 달 만에 집을 샀습니다. 여기가 바로 우리가 찾던 파라다이스였어요!”
부부가 살고 있는 집은 2300ft2(약 65평)의 크기로 거실과 주방, 그리고 두 개의 침실과 화장실이 있는 예쁜 단층집이다. 2011년 당시 80만 달러에 구입했다. 라구나우즈 빌리지에는 손씨 부부가 살고 있는 단독주택 외에도 콘도와 아파트가 있는데 한인들이 선호하는 어바인이나 플러턴에 비해 주택 가격은 다소 낮은 편이라고.
캘리포니아의 화창한 날씨는 부부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여름엔 더워도 습도가 낮아 상쾌했고 겨울엔 눈이 내리지 않아 운전하기가 좋았다. 10분이면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라구나 해변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갈 수가 있었다. 인근 플러턴과 어바인에는 한국 식당과 상점이 넘쳐나니 한국 음식이 그리울 틈도 없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여유 넘치는 빌리지의 라이프스타일이었다.
“한마디로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환경이었어요. 골프, 수영은 물론이고 젊은 시절부터 취미였던 사교댄스도 더 본격적으로 할 수 있는 분위기였죠. 빌리지에는 200개가 넘는 클럽(동호회)이 있어요. 원하면 어떤 클럽이든 가입할 수 있고 직접 만들 수도 있어요. 여기서는 심심할 일이 없어요.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서로 얼굴도 못 보는걸요. 젊은 시절보다 더 바쁘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합니다.”
남편은 독서와 골프를 즐기고 아내는 하이킹과 합창을 좋아한다.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는 부부는 각자 활동하는 클럽이 다르지만 이것만큼은 꼭 같이하자고 정해놓은 세 가지가 있다. 손을 잡고 거니는 저녁 산책, 같은 침대 쓰기, 그리고 벌써 20년을 함께해온 볼륨댄스가 그것이다.
빌리지 안에서 손씨 부부는 춤꾼으로 유명하다. 경력 20년의 수준급 솜씨다. 특히 아내 손종숙씨는 전국 경연에도 참가할 만큼 프로급 댄서다. 어느 해 연말파티에서 백인들도 울고 갈 정도로 멋들어지게 춤을 추는 부부의 모습을 보고 이웃에 사는 한인 부부들이 배움을 자청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미세스 손의 댄스교실은 현재 40명이 넘는 학생들이 늦은 춤바람으로 열공 중이다.
부부는 라구나우즈에 들어오기를 두고두고 잘한 일이라 여긴다. 아내에 비해 조금은 소극적인 성격인 손기용씨는 이곳에서 동년 친구들과 격 없이 어울리며 사는 재미를 알게 됐다고 한다. 평생 쓰고 싶어도 못 썼던 모국어를 원 없이 할 수 있는 것도 신나는 일이다.
“저녁은 주로 아내가, 아침은 내가 준비합니다. 내가 내린 커피를 마시며 행복해하는 아내의 모습을 매일 아침 볼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지요. 우리는 현재 생활에 아주 만족해요. 둘이 있어서 좋고 친구가 많아서 즐겁습니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몰랐을 즐거움이지요. 아내와 나는 이곳이 마지막 종착역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강해야지요. 스트레스가 건강에 제일 안 좋다는데 여긴 그럴 일이 없어요. 이곳에 살고 있는 최고령 한인은 90이 넘은 분이에요. 10년은 문제없겠지요? 하하하.”
라우나우즈의 이장님, 한인회 김일홍 회장
라구나우즈 빌리지에 한인회가 만들어진 것은 지난 1998년. 당시 회원은 30명 정도였다. 타향살이 이민자들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형님 동생이 되었고 주말이면 다 같이 한집에 모여 바비큐를 먹고 친목을 다졌다. 이후 7명의 한인 회장이 배출되었고 그동안 빌리지의 한인은 700여 가구 1200여 명으로 늘었다. 옛날처럼 오손도손한 분위기는 없어졌지만 한인의 위상은 커졌다.
현재 8대 한인 회장을 맡고 있는 김일홍(79)씨는 초기 한인회가 한인들 간의 친목을 다지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지금은 커뮤니티 내 타 인종과의 화합과 클럽활동을 통한 자기계발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지난 5년간 이곳에 한인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어요. 이대로 가면 빌리지의 한인 비율이 전체의 10%를 차지하게 될 겁니다. 그만큼 커뮤니티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면 좋겠습니다. 매년 빌리지 내에 한국전 참전 용사들을 초청해 기념식과 만찬을 열고 있는데 참으로 뿌듯합니다. 4년 전 만든 한국어 클래스도 아주 인기가 좋아요. 얼마 전에는 아리랑 코리안 문화축제를 열었는데 주민들의 호응이 대단했어요.”
라구나우즈 빌리지에는 동호회 활동을 위한 대규모 연회장인 클럽하우스가 10여 개 있다. 소규모 모임을 위한 크고 작은 미팅룸은 예약만 하면 10~20달러(1만~2만원) 선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한인들이 주축이 된 클럽도 20여 개나 된다. 김일홍 회장은 클럽활동을 단순한 여가생활에서 더 발전시키려 애쓰고 있다.
“목표를 정하고 도전해보자는 거죠. 그 예로 글사랑모임 클럽에서는 2014년부터 라는 수필집을 발간하고 있어요. 회원들의 필력뿐 아니라 편집이나 사진 실력이 매년 발전하는 것을 보며 성취감과 자부심을 느낍니다.”
김일홍 회장은 라구나우즈에서 늘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 한인회 관련 일은 물론이고 동호회 활동, 관리사무소나 빌리지 내 시설 사용 등 민원 업무도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앞서 만난 손기용씨는 김 회장을 알뜰살뜰한 마을 이장님 같다고 했다. 빌리지 안에서 운전하며 가다가도 아는 얼굴을 만나면 꼭 차를 세우고 이름을 부르며 안부를 묻는다. 짬을 내어 아프거나 홀로된 노인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도 살펴야 맘이 편하다. 때로는 라구나우즈 빌리지 가이드가 되어 투어 서비스도 한다.
미국 전역에서 톱 10에 속하는 명성에, 한인이 많이 살다 보니 은퇴자라면 한 번쯤 꿈꾸어보는 라구나우즈 빌리지. 입주 문의는 늘 이어진다. 라구나우즈 빌리지에 입주하기 위해서는 주택 종류에 따라 3만6000달러(약 3600만원)에서 4만2000달러(약 4200만원)가량의 연수입이 있어야 한다. 일정 금액의 자산도 증명되어야 한다. 월 관리비는 650달러로 골프장, 수영장, 헬스클럽, 클럽하우스 등 빌리지의 모든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물론 시설관리, 조경, 가스, 수도, 케이블TV 등이 모두 포함된 금액이다.
김 회장은 빌리지 입주는 어느 정도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지만 미리미리 은퇴 계획을 세운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조언한다.
“재력이 은퇴생활의 필수조건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죠. 100세 시대에 은퇴하고 20년, 30년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미리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국인들은 자식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경향이 있죠. 지나친 헌신으로 은퇴 후 자신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경우를 주위에서 많이 봅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죠. 솔직히 우리 나이가 되면 자식보다 배우자, 친구가 더 소중합니다.”
김 회장은 건강과 재력 외에 성공적인 은퇴생활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은퇴 후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라고 말했다.
“은퇴 후 시간을 어떻게 쓸지 몰라 난감해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은 돈만이 아닙니다. 평소 좋아하는 운동이나 취미를 준비해놓는 것도 중요해요. 라구나우즈가 최고의 은퇴촌으로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열정적으로 살 수 있는 환경을 완벽하게 만들어놓고 있기 때문이죠. 이곳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다들 바빠요(웃음).”
라구나우즈 빌리지의 많은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이웃들의 소소한 일상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포토그래퍼 박성원 작가, 성악가의 꿈을 라구나우즈에서 이루고 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소피아 최 회장, 춤을 사랑하는 동호인들을 모아 7년째 고전무용 춤방을 열고 있는 김영옥씨, ‘김중배의 다이아 반지가 그리 좋더냐’ 훈남 이수일로 변신한 연극반 채한경씨, 고등학교 미술선생님에서 이제는 라구나우즈 미술선생님이 된 이상락씨, 그리고 여전히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고 배려하며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미스터&미세스 손까지….
라구나우즈 빌리지가 꿈의 은퇴촌으로 불리는 이유는 기막힌 골프코스와 수영장, 럭셔리한 클럽하우스 때문만은 아니다. 이곳에는 여전히 꿈을 이루며 살아가는 열정적인 사람들이 살고 있다. 라구나우즈 빌리지가 아름다운 이유다.
라구나우즈 빌리지는?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남서쪽에 위치해 있는 ‘라구나우즈 빌리지’는 라구나우즈 시 안에 있는 은퇴 마을이다. 현재 1만2736세대, 3만6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빌리지 안에는 5개의 수영장과 36홀의 골프코스, 테니스코트, 도서관, 극장, 우체국 등 각종 편의시설이 있다. 라구나우즈에 입주하려면 조합(HOA – Home Owner’s Association)에 가입해야 하는데 크게 협동조합(Co-Op)과 상호조합(Mutual)으로 나눠져 있다. 협동조합의 경우는 조합이 소유주로서 입주자는 집이 아닌 조합회원권(Stock Certificate)을 구입하면 된다. 상호조합의 경우는 콘도 내부 수리와 관리를 소유주가 책임지고 해야 한다.
상호조합과 협동조합의 가장 큰 차이는 구입한 집을 임대해줄 때다. 협동조합의 경우는 1년 동안 6개월 이상 임대를 줄 수 없다. 상호조합은 임대에 대한 제약이 없다. 따라서 투자를 위한 임대 목적으로 은퇴촌 주택을 구입하는 경우는 상호조합 콘도를 구입하는 것이 유리하다.
라구나우즈에 입주하려면 배우자 중 한 사람이 반드시 55세 이상이어야 하며, 집값은 일시불로 지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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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나우즈 빌리지 웹 사이트 lagunawoodsvillage.com
한인회 웹사이트 lagunawoodskac.com
해마다 5월이면 줄줄이 이어지는 행사가 많아 분주한 느낌이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지나고 한숨 돌릴 즈음이면 스승의 날이 이어진다. 이날이 되면 의례적으로 하게 되는 일일 명예교사 일을 빠뜨릴 수 없었는데, 그해 아들의 5학년 교실을 생각하면 자동적으로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그날, 약속된 시간이 되어 아들 녀석의 학교로 갔는데 교실 복도에 다다르자 왁자지껄 우당탕 개구쟁이들이 장난치는 소리가 교실 밖까지 들렸다. 필자는 담임선생님을 잠깐 만나 일일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뒤 수업 시작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도무지 멈추지 않았다. 그때 이 소란을 잠재우려는 듯 선생님께서는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풍금 앞에 앉으셨다. ‘갑자기 음악을 들려주시려는 걸까?’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데 이내 마치 파도소리 같은 반주가 시작되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각자 자기 자리에 앉아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 없던 이곳에
세상 사람들 하나 둘 모여들더니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바위섬과 흰 파도라네
바위섬 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다시 태어나지 못해도 너를 사랑해~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아무도 없지만
나는 이곳 바위섬에 살고 싶어라~~~♬
마치 아기새가 어미새 앞에서 먹이를 받아먹으려 입을 크게 벌리듯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듯한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 창밖으로 보이던 싱그러운 오월의 하늘도 마냥 푸르렀다. 아이들의 노래는 가슴이 시원하도록 온 교실 안에 울려 퍼졌다.
조금은 쓸쓸한 가사였지만 아이들이 노래 부르자 예쁘고 유쾌한 노래가 되었다.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날의 수업은 더없이 흐뭇하고 즐거웠다.
인간적인 풍모가 느껴지는, 흰머리 희끗희끗했던 그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에게 교과서에 나오는 노래 외에도 특별한 장르의 음악 또는 민중적이거나 대중성이 짙은 여러 노래들을 가르쳐줘서 필자도 아들에게서 종종 그런 노래들을 듣곤 했다.
그 선생님은 해맑은 얼굴로 필자에게 이런 말도 했다.
“제 나이가 쉰셋이에요, 요즘은 아이들이나 부모님들이 나이 많은 선생은 싫어한다는데 나는 아이들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아무래도 얼마 동안은 더 하려고 해요.”
회갑이 지나고 또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순진무구함을 끝까지 간직할 것 같은 그 선생님은 그 후 인천의 어느 섬에 있는 학교로 옮겼고 중학생이 된 아들이 그 섬으로 한 번 찾아갔던 적이 있다.
요즘에도 이렇게 참 좋은 선생님들이 있을 텐데 김영란법 대상이 되어 일단 생각을 해보고 찾아봐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고단한 인생길에서 단비처럼 가끔 기억나는 스승들이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고마운 마음도 그리운 마음도 조심하고 계산해봐야 하는 현실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오래오래 아이들과 지내야 할 참 좋은 선생님이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해마다 이맘때만 되면 생각이 난다. 여전히 풍금소리 울리며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여생을 멋지게 보내고 계시리라 믿는다. 마음과 영혼에 기쁨과 감사가 넘치고 욕심에서 해방되어 한껏 즐기는 자유로운 영혼이 참 아름다운 사람. 나이 듦과는 무관한 그 해맑음이 떠오르는 날이다.
처음 그를 봤던 그때 그 느낌을 잊을 수 없다. 마치 온몸에 전기가 감돌고 있는 전기맨(?) 같았다. 연극이 끝나고 극장 로비에 나온 젊고 낯선 배우는 차갑고 깊은 까만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바로 MBC 드라마 에서 열연한 배우 한갑수(韓甲洙·48)다. 불꽃 카리스마로 연극 무대를 내달리더니 어느 날 갑자기 TV 속에 나타났다. 그것도 강아지 같은 함박웃음과 함께 말이다. 연기 인생 30년. 그 누구도 몰랐던 반전 연기로 사랑받은 배우 한갑수를 만났다. 아직도 사람들의 시선이 익숙하지 않다는 대세 배우의 삶과 가족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아이고 어른이고 많이도 알아봅니다
“촬영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다가와서 친구 부르듯 그냥 이름을 불러요. 제가 아무리 ‘이놈! 아저씨한테!’라며 무서운 표정을 지어도 신이 나서 그러는 거예요.”
MBC 주말 드라마 는 한갑수에게 드라마 하나 끝난 것 그 이상의 의미 있는 작품이 됐다. 배우로 살면서 처음 가져보는 기분을 안겨줬다고나 할까. 무대에 올라 관객의 박수를 받아왔지만, 조명이 없는 거리로 나서면 박수갈채는 온데간데없었다. 이 드라마는 달랐다. 촬영장에 모인 아이들은 한갑수를 “아바디”를 목 놓아 외치는 또래 친구 대훈이로 대했다. 드라마가 끝난 다음에는 사람들이 알아봐도 너무 알아보니 인기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인생을 바꿔준 대박 드라마가 된 것. 지금 와서 하는 얘기이지만 한갑수는 방송 연기 초반 배우로서 자존심이 상해 고사하는 일이 많았다.
“캐스팅 디렉터들이 제 연극을 봤는지 연락을 해오더라고요. 한 회 잠깐 출연할 수 없냐고요. 그런데 처음에는 기분 나쁘다고 안 한다고 했어요. 내가 연극을 몇십 년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연락을 해오던 디렉터 중 한 명이 한갑수의 마음을 움직였다. 연극은 많이 했어도 카메라 연기는 안 해봤으니 경험해보라 권유했다. 미디어 매체에도 시선을 줬으면 한다고 말해줬다. 연극을 많이 했지만 생각해보니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이후 경찰이건 면접관이건 주어지는 역할은 작건 크건 열심히 해냈다. 한갑수가 시청자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한 작품은 MBC 드라마 과 이다.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특히 이휘향에게 간 이식을 해주는 오빠 역할을 했던 은 인생작 로 가는 도움닫기 역할을 해주었다.
“의 김사경 작가님이 을 보시고 저를 추천하셨어요. 당시 북한 외교관 태영호씨가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제 역할이 그와 비슷한 북한의 고위직이라더군요. 이제는 좀 지성인을 연기하나 싶었죠. 드라마가 시작하고 한참 지나 제가 등장하는 대본이 나왔다며 작가님이 연락하셨어요. 그런데 열 살 아이 연기가 가능하냐고 묻더라고요.”
연극 에서는 피바람을 일으키는 윤원형을, 유진 이오네스코의 잔혹극 에서는 잔인한 방법으로 수학을 가르치는 교수 역할을 했던 그다.
무대 위 선 굵은 배우, 아이를 연기하다
잔인함과 공포를 연기하던 배우가 열 살 아이 지능을 가진 연기라니.
“네? 저는 열 살 연기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어요. 바보냐고도 물어봤어요.”
걱정돼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일상의 언어로 흐르는 드라마에 나이 든 남자가 아이처럼 연기하는 것이 과연 어울릴까 걱정에 걱정을 더해갔다. 이에 김사경 작가는 두 가지를 요구했다. 아이처럼 본능대로 말할 것과 북한 아이만의 순수함을 표현해 달라고 했다.
“순수를 어떻게 하지? 일단은 맑게 웃자는 것이 큰 콘셉트였어요. 내가 눈도 크고 쌍꺼풀도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걸 시청자가 귀엽게 봐줬던 거 같아요. 그리고 이휘향 선배님과 (임)수향이가 너무 악한데 제가 팍팍 시원하게 요즘 말로 사이다처럼 이야기하니까 많이들 좋아하신 것 같아요. 두 분이 잘했기 때문에 제가 덕 본 겁니다. 드라마 속에서는 사이가 나빴지만 평소에 제일 친했어요.”
연기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영역이었다. 시청자에게 이렇게까지 사랑받을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에 자신의 능력보다 함께한 선후배의 도움이 컸다며 겸손하게 공을 돌리는 배우 한갑수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얼굴, 꽤 쓸모 있습니다
경남 거창 출신인 한갑수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지역의 한 청소년 극단에 들어가 허드렛일을 도우며 연극을 시작했다. 무일푼 극단 생활 3년 만에 배우로 무대에 오른 그는 경남에서 열리는 거의 모든 연극제의 연기상을 휩쓸었다. 괴물 같은 연기력을 눈여겨본 연출가 이윤택이 2001년 그를 서울 무대에 올려세웠다. 30대 중반의 한창 물이 오른 남자 배우의 연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의 역할은 늘 실제 나이에 비해 한참이나 많았다. 지금도 주어지는 역할은 실제보다 열 살 이상 많다. 현재 방송되고 있는 KBS 2TV 저녁 일일 드라마 에서도 주인공의 아버지로 등장한다. 나이가 많은 선배 연기자가 아들로 혹은 동생으로 등장하는 일은 이제 다반사다. 본인의 나이와 맞지 않은 역할을 하는 게 서운하지 않을까? 아니라고 했다.
“연출가들이 좋아하더라고요. 이번 드라마를 하면서도 연출가님한테 흰머리가 좀 있는데 염색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어요. 그런데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제 헤어스타일이 좋다면서요. 한 촬영 감독님은 오히려 제가 늙어 보이는 것이 장점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왜냐하면, 실제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면 대사 암기가 좀 어렵고 50대 연기는 남자 배우나 여자 배우나 할 수 있는 배역이 많이 없다더라고요. 제가 사실 많이 하는 역할이 주인공 아버지 역할입니다. 대부분 60대 역할일 수밖에 없죠.”
이번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도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다. 상대 배역으로 등장한 배우가 예순두 살이었는데 한갑수가 오히려 나이가 더 들어 보였던 것. 결국, 상대 배역을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하려고 분장팀이 분주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나는 내가 노안이라는 걸 알아요. 어디 가서 나이 얘기하면 깜짝 놀라더라고요. 변희봉 선생님이 저에게 ‘몇 살이냐’고 물어봐서 ‘오십입니다’ 했더니 ‘애’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또 좋은 건 역할도 역할이지만, 나이가 한참 들어 보이니까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않더라고요(웃음).”
천생 배우 어린 아내의 특급 매니지먼트
한갑수는 소속 회사 없이 아내 변혜경(39)씨와 촬영 현장을 다니고 있다. 아내가 한갑수의 매니저인 셈. 드라마를 하게 되면서 단 하루도 떨어져본 적이 없다. 드라마 촬영 현장에 가면 사람들이 아내 변혜경씨를 더 많이 찾는다. 배우 이휘향도 그랬다.
“미스 변 어디 있느냐고 이휘향 선배님이 그러세요. 밥 먹으러 가야 한다고요. 나랑 가자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랑요. 감독님도 너무 좋아하셨어요.”
아내는 현장 스태프와 친해질 수 있게 해주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잘 웃고, 모르는 사람들한테도 인사를 잘했다.
“만약 저 혼자 다녔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제 스타일이 원래 연기에 집중해야 하니까 누구랑 말도 안 하고, 친해질 수 없거든요. 그런데 옆 사람이 분장이나 의상 스태프랑 친하니까 편안하게 이것저것 부드럽게 부탁합니다. 우리 집사람 덕분에 참 좋죠. 현장에서 저 혼자 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을 아내가 해주고 있습니다.”
배우 한갑수의 아내로 매니저로 사는 변혜경의 직업 또한 배우다. 그것도 천부적인 연기실력을 갖춘 몇 안 되는 배우. 무대 위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관객과 호응하던 모습이 생생한 멋진 배우였다. 열 살 차이 어린 여배우는 2001년 무대에서 연기 연습을 하는 한갑수를 보고 반해버렸다.
“거창에서 연희단거리패로 옮겨서 연극을 할 때였는데 밀양에서 합숙생활을 했어요. 아내는 연희단 소속 배우였고요. 아침마다 단원들이 조별로 다 모이는데 한 달 내내 아내가 ‘한갑수 내 꺼다’ 하고 소리치는 겁니다. 정말 장난인 줄 알았어요. 저리 가라고도 했어요.”
장난 같던 아내 변혜경의 고백은 사실이었다. 결국 연극의 주인공으로서 공연을 닷새 앞두고 아내는 사랑의 탈출(?)을 하고야 말았다. 장례가 촉망되는 여배우의 결혼을 극단은 반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혼하고도 극단 대표인 이윤택 선생님 마음에 우리가 남으셨나봐요. 진주에서 신혼살이할 때 그 지역으로 강연을 오신 적이 있었어요. 강연하시다가 ‘한갑수 저놈이 우리 혜경이를 훔쳐갔어요’ 그러셨답니다(웃음). 이 선생님이 아내를 딸처럼 예뻐해서 상심이 크셨을 거예요.”
최악의 궁합을 이기고 최고 부부가 되다
“결혼 전에 저희가 결혼하면 아내가 죽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애를 못 낳거나 낳아도 불구가 될 거란 말을 들었어요. 다행히 애도 낳고 별일 없는가 싶었는데 아내가 아이 낳고 100일 만에 쓰러졌습니다.”
깨소금 냄새나는 신혼생활도 잠시, 시련의 연속이었다. 아이를 낳고 얼마 안 있어 아내 변혜경씨에게 이상한 증세가 나타났다.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고 급기야 상대방의 말도 왜곡돼 들린다고 하다 정신을 잃었다. 뇌전증이라고 했다.
“병원에 다녀도 원인이 나오지 않았어요. 한의원에도 갔었고, 심지어 신병이란 말도 들었어요.”
처가에서 아이를 대신 키워주고 병원비 대부분을 지원했지만, 가족 부양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장인어른이 서울대병원 앞에 가서 시위도 했어요. 딸의 머리라도 한 번 열어봐 달라고요.”
발병 7년 만에 아내 변혜경씨는 뇌 수술을 받았다. 수술 두 번째에 문제의 위치를 찾아냈고, 세 번째 누운 수술대에서 원인을 제거했다. 수술 직후 만난 아내는 딸도 한갑수씨도 못 알아봤다고. 그래도 젊은 사람이라 의료진이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몸이 좋아졌다.
배우가 숙명인 한갑수의 해피스토리
작년 하반기 한갑수는 가족과 함께 경남 진주에서 서울 근교로 이사 왔다. 이곳으로 오고 얼마 안 있어 드라마를 하게 된 것뿐만 아니라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자신의 직업이 가진 숙명적 불안감과 사랑 사이에서 여전히 고민하는 진짜 배우였다.
“배우는 오래가기 쉽지 않습니다. 소모되고 금방 잊히죠. 평생 숙명처럼 배우를 하고 싶다고 해서 무대에 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찾아줘야죠.”
한갑수라는 배우가 지금보다 선명해질 때까지 소속사에 들어가는 일 없이 아내와 함께 일할 생각이다. 지금의 상태로 소속이 되면 다작을 해야 하거나 정체성이 모호해질 것을 우려한다고 했다. 그리고 아내가 다시 배우를 할 수 있었으면 한다.
“우스갯소리로 ‘10년 후에는 나는 일을 좀 쉬고 아내가 열심히 연기했으면 한다’고 말합니다. 이제 몸도 완쾌되고 아이도 다 키웠으니 아내도 연기를 많이 하고 싶어 해요. 하지만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해줍니다.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오히려 혜경이가 나이 들면 연기자로서 더 빛을 낼 것이라고 봅니다. 현장을 같이 다니는 이유가 많이 보고 배웠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거든요.”
현장을 함께 다닌 덕에 아내 변혜경씨도 잠깐이나마 에 얼굴을 비치기도 했다. 매니저 일을 하는 틈틈이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아내가 대견스럽다.
“부부생활 15년을 해보니 조금씩 서로 알게 된 거 같습니다. 힘든 것이 좀 거쳤으니 저뿐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서클 20년 대선배가 결혼 새내기 후배들 앞에서 일갈했다.
“난 남편이 일단 현관을 나서면 내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 집에 오면 그때부터 다시 내 남자야.”
그리고 이것이 평온한 정신세계를 유지하는 비결이라고 했다.
알콩달콩한 연애시절이 가고 신혼시절의 달콤함마저 사라지고 나면 아이 낳고 키우고 며느리 노릇 하느라 거의 전쟁 수준의 강도로 바쁘게 살게 된다. 아내로 엄마로 식모로 찬모로 학부형으로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성격도 거칠어지고 급해진다. 옷도 간편하고 수수한 복장이 편해진다. 당연히 남편이 보는 아내의 모습은 수세미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한참 유행이 지난 낡은 옷을 입은 촌스런 여인네이기 쉽다. 게다가 향긋함과는 거리가 먼 마늘, 된장 냄새에 맨날 찌들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는 사이 남자들은 밖에서 매너 좋고 옷차림이 섹시한 여성들에게 끌리게 되고 아내는 어느 날부터 부엌데기가 돼버린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가면 모두들 자신도 모르게 변해버린 모습에 놀라게 된다. 중년 여자들은 주름살이 늘었다며 사진 찍기를 거부하고 사라져가는 여성성에 우울해지기도 한다.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앞으로 달려가기만 했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이때 느끼는 심리적 공허감, 신체적 위축은 상대적 박탈감으로 이어진다. 서로에게 성적인 매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부부는 남아 있는 마지막 본능을 깨워서라도 젊음을 되찾고 싶어 한다.
남자들은 젊은 여자와 외도하는 방법으로 젊음을 확인하곤 한다. 물론 가정을 깰 의사는 전혀 없고 잠시 오락실처럼 들렀다 오려 하지만 그 결과는 예측하지 못한 참담한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세계 섹스리스 부부 비율은 20% 수준인데, 우리나라는 일본 45%에 이어 35.1%로 2위라고 한다. 남자들은 성매매 같은 정크섹스(junk sex)를 외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성을 쾌락의 도구로 여기는 사람은 배우자와의 성관계에서 갖게 되는 유대감, 안정감, 친밀감에 무게를 두지 않는다. 남성은 아내를 성적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을 불편해한다. 나이 든 여성의 성이 터부시되고 젊은 여성과의 연애와 성을 꿈꾸는 한 중년의 외도는 멈출 것 같지 않다. 외도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성적 기능 상실이 자신의 탓이 아니라 매력적인 여성을 못 만나 그렇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본부인은 서방의 검은 머리만 뽑고, 첩은 서방의 흰머리만 뽑아준다.”
본부인은 서방이 바람피울까봐 늙어보이도록 검은 머리를 뽑고 첩은 늙은 남자와 사는 게 창피해서 흰머리만 뽑는다는 속담이다.
중년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부부가 함께 문제를 인식해야 한다. 규칙적인 성생활을 하는 부부는 그렇지 못한 부부보다 훨씬 건강하고 젊게 산다고 한다. 성을 터부시하는 부부의 관계 개선이 필요한 이유다.
“부부는 낮에 싸우고 밤에 푼다.”
“두더지 마누라는 두더지가 제일이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한다.”
위의 속담들처럼 가능한 한 남편을, 아내를 좋게 바라봐야 한다. 누구나 가끔은 유혹을 당하기도 하고 실수도 한다. 습관적 범죄형이 아니라면 가벼운 외도는 실수로 봐줘야 한다. 서로의 마음에 낮은 담장 하나 정도는 치고 상대의 프라이버시를 인정해주는 것이 지혜가 아닐까 생각한다. 선배가 말했다. 남편의 외도를 눈치 챘다면 다른 데 가서 화 풀고 절대로 아는 체하지 말라고. 반드시 돌아온다고. 돌아오면 아내에게 잘할 기회를 주는 것이 더 현명한 태도라고.
엄마는 그 유명한(?) 58년 개띠다. 수많은 동년배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20대에는 결혼과 출산, 30대와 40대는 지난한 육아, 50대에는 고장 난 몸과 싸웠다. 그리고 지금 엄마의 나이 앞자리는 6을 바라보고 있다. 엄마는 수많은 58년 개띠처럼 형형색색의 아웃도어를 장례식장, 예식장 빼고 거의 모든 자리에 입고 나간다. 뒷모습만으로는 우리 엄마와 남의 엄마를 구분할 수 없는 헤어스타일과 패션. 그렇다고 엄마의 지금 패션에 대해 비난할 수는 없다. 엄마에게는 이름 석 자만큼이나 옅어져버린 ‘자신’. ‘패션은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다’라는 말을 패션을 전공하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남들에게 말했다. 엄마의 이름 석 자와 엄마라는 육체와 정신을 쏙쏙 빼먹고 자란 나는 할 말이 없다. 지금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다는 엄마에게 무작정, “엄마 그 오렌지색 점퍼는 정말 아니지 않아?”라고 말할 순 없다. 우리 엄마와 수많은 남의 엄마에게 패션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자신을 찾는 법에 관한 지도를 내밀어본다. 우선 이 지도의 가이드로 적당한 4명의 인물을 꼽아봤다.
김민정 프리랜서 패션에디터 h98008272@gmail.com
◇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인생 철학이 녹아 있는 옷을 입어라"
“옷을 잘 입은 사람은 옷보다는 그 사람이 기억나요.” 몇 해 전 라는 영화가 개봉될 즈음 실제 주인공인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노라노는 1947년 국내에서 출발한 두 번째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미국 유학을 간 신여성으로,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1956년 한국에서 제일 먼저 패션쇼를 열었으며, 기성복이란 제도를 프랑스보다 앞서 만들었다. 인터뷰를 했던 그때 이미 노라노는 80세를 훌쩍 넘긴 나이였다. 노라노는 심플한 디자인의 캘빈클라인 시계를 차고, 어깨선에 딱 맞는 벨벳 재킷을 입고 있었다. 단정한 커트 머리에 보라색 아이섀도를 바른 모습에서는 바지런함이 느껴졌다. 잘 입었다, 못 입었다가 아니라 참 노라노답다는 생각이 인터뷰 말미에 들었다. 인생을 일부러 ‘루틴’하게 만들었다는 노라노는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혹시라도 더 일찍 깨면 5시가 될 때까지 누워 있는다) 45분간 스트레칭을 하고, 똑같은 식단의 아침밥을 먹는다. 그리고 동네 공원을 45분 걷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9시까지 출근한다. 퇴근은 당연히 6시, 칼 같이 맞춘다. “시계나 다름 없죠. 세상에 생각하고 고민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아요. 생활을 이렇게 루틴하게 만들어놓으면 쓸데 없는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죠.” 그녀의 철학은 패션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스무 살부터 일을 했어요. 직장 여성으로 산다는 게 쉽지 않잖아요. 생활이 단순해야 일에 집중할 수 있어요. 패션도, 생활도,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예요. 복잡하게 만들지 않아요.” 머리를 짧게 유지하는 것도, ‘시그니처 룩’이라고 불릴 만큼 똑같은 스타일로 옷을 입는 것도 모두 이런 패션철학 때문이다. 옷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는 말에 노라노만큼 적당한 사례는 없다. 멋지게 입고, 트렌디하게 입는 것이 답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철학이 스타일에 녹아 있으면 그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이다.
◇ 사업가 겸 스타일리스트 린다 로딘 차라리 ‘안티’ 안티에이징
“난 60대가 될 때까지 늙었다고 느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종종 젊은 사람들 위주로만 돌아가는 문화 때문에 힘들기도 해요.” 곧 일흔을 바라보는 린다 로딘은 여전히 주말이면 빈티지 시장을 돌아다니고, 종종 ‘중고장터’를 통해 자신의 옷과 탐나는 남의 옷을 교환해서 입는다. ‘패션은 여자들의 창의력을 강물과 같이 흐를 수 있게 도와주는 돌파구’라는 명제에 충실하다. 그래서 가끔 짧은 스커트에 타이츠를 신고(자신의 다리가 예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롤업 청바지를 애용한다. 부엉이처럼 큰 컬러 안경과 새빨간 립스틱도 즐긴다. 물론 한때 그녀도 하얗게 센 머리를 염색할까, 주름진 이마에 필러를 맞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필러를 맞고 마주한 제 얼굴은 제가 아니었어요. 대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할머니가 보일 뿐.” 그녀는 차라리 ‘안티’ 안티 에이징을 외쳤다. 젊어 보이는 것에 포커싱되는 중년의 패션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의외로 젊은이들만의 소유물인 줄 알았던 ‘신선함’을 그녀에게 돌려줬다. 유니클로의 생지 데님을 툭툭 걷어 입고, 바삭한 화이트 셔츠에 빨간 플랫 슈즈를 신은 린다 로딘의 패션에서는 나이라는 코드가 읽히지 않는다. 그저, 린다 로딘이라는 여자가 있을 뿐이다.
◇ 영국 총리 테리사 메이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무언가를 기억하자
자신을 찾는 일에 불특정 다수, 즉 대중의 눈치를 보지 않았던 또 다른 정계 인물이 있다. 얼굴보다 구두로 첫 취임기사를 장식한 영국의 총리 테리사 메이. 그녀의 패션은 한마디로 멋지다. 20대 여자들의 트렌디함과 중년 여성의 묵직함, 워킹 우먼의 단호함이 한 벌에 담겨 있다. 한정판으로 출시된 구두를 사고(입술 모양이 그려진 앙증맞은 플랫슈즈다),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사이하이 부츠를 신는 과감한 여자다. “저는 늘 여성들에게 ‘고정관념에 맞추려 하지 말고, 당신 자신이 되라’고 말해요. 만일 당신 개성이 옷 또는 신발을 통해 보인다면, 그렇게 하세요.” 그 바람에 테리사 메이의 연관 검색어에는 ‘슈즈 마니아’가 뜬다. 우리 엄마는 보라색을 좋아했고, 벨벳으로 만든 무언가에 항상 반했다. 하지만 언제나 손에 들린 건 물세탁이 가능한 실용적인 옷이었다. 테리사 메이에게는 구두 쇼핑이 취미활동이자, 스트레스를 푸는 창고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를 찾는 놀이였다. 내가 좋아했던 그 시절의 무언가를 떠올리자. 엄마에게 보라색 벨벳 슈즈가 필요한 것처럼.
◇ IMF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 ‘나’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자
흰머리에 쇼트커트, 수영으로 다져진 다부진 어깨, 조금의 경사도 느껴지지 않는 빳빳한 허리. 당당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흘러내리는 이 프랑스 여자는 IMF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다. 방탄 가공을 거쳤을 법한 그 단단한 사회의 유리천장을 뚫고 ‘최초’로 IMF 총재 자리에 앉았다. 줄곧 ‘남초’ 직장에서만 생활해온 그녀는 전쟁터 같은 직장생활에서 총을 잡기보다는 립스틱을 잡았다. 무채색의 팬츠 슈트로 넥타이맨들과 경쟁하는 대신 핑크색 스커트로 여자다움의 힘을 강조했다. “생각은 그만하고, 행동 좀 하시죠”라는 말을 자주 해 ‘아메리칸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행동파인 그녀 앞에서, “일이 힘들어서, 이게 편하니깐”이라는 말로 유니폼 같은 무채색 패션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워킹 우먼들은 용납이 안 된다. 그녀는 수년간 IMF 총재 역할을 해오며 능력마저도 스타일리시하다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여전히 스카프 쇼핑을 즐기고 핑크색 트위드 슈트를 입고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60대의 크리스틴 라가르드. 그녀의 지금 룩은 뚝심 있게 지켜온 자기 자신 그 자체다.
>>김민정 프리랜서 패션에디터
남성지 를 거쳐, 와 의 패션 에디터로 10여 년간 일했다.
지금은 프리랜서 에디터로 패션 관련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다시, 다시, 다시!” “그러니까 연습하는 거야. 해남아, 해남아. 연주하다가 틀리잖아? 그럼 다시 해야지 고쳐져. 그냥 지나가면 안 돼!”
학예회(?)를 일주일 앞둔 아현초등학교 졸업생들의 연습실은 시끌벅적했다. 기타와 바이올린, 하모니카 소리와 노래 소리, 키득키득 웃는 소리, 와글와글 수다 떠는 소리에 정신이 없다. 이들 행동과 말투 그리고 동심 깃든 눈빛은 여전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흰머리와 노안(老眼)과 술잔이다. 어린 시절 공기놀이와 고무줄놀이를 함께하던 친구들이 40년 넘어 다시 끈끈하게 뭉쳤다. 이름하야 야매(?)기타교습소. 세월이 많이도 지났다. 그래도 여전한 마음으로 남아 있는 건 친구들뿐이다. 그들이 사는 모습, 유치해 보이는가? 아니다. 신선하다!
아현초등학교 43회 졸업생, 야매기타교습소 문 열다
우연한 기회였다. 정기적으로 만나던 동창모임에서 기타를 배워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마침 김영석씨가 대학 시절 연세대 클래식기타 동아리 오르페우스에서 한 시대를 풍미하던(?) 기타리스트였다. 친구들이 그의 재능을 좀 나눠 갖자며 의견을 모았다.
김영석 작년 1월에 시작했어요. 모일 때마다 친구들 몇 명이 기타를 배우고 싶다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럼 재능기부를 할까? 그럼 해볼까? 그래서 시작했는데 이렇게 잘 운영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죠. 정말 “그럼 해볼게”였죠. “세 명만 모이고 장소만 있으면 해볼게” 했더니 우연히 세 명이 모였고 장소도 마련된 거예요. 친구들과의 약속이니까 “해야지!” 했어요. 그런데 정말 이런 놀이를 재미있어하더라고요. 예전에 누구나 한 번쯤은 기타를 조금씩은 연주해봤겠지만 그걸 다시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거죠. 한 번도 안 쳐본 친구도 있어요. 막연하게 “나도 기타 한번 쳐보고 싶다” 하고 생각한 친구예요. 그 친구는 여기서 처음 기타를 배웠습니다. “야! 내가 가르쳐줄게” 해서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제가 전문 기타리스트도 아니고 그래서 우리 모임 이름이 야매기타교습소 ‘야기소’가 된 겁니다.
이후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기타 연습을 했다. 모임이 재밌다고 소문이라도 난 것일까. 나날이 인원이 늘어났다.
김영석 매달 모여서 연습을 하다가 우리도 발표회라는 것을 한번 해보자고 뜻을 모았어요. 무대 좀 서봐야 실력이 늘잖아요. 그래서 작년 10월에 해봤는데 모두들 너무 좋아했어요. 전부 다 녹화해서 유튜브에도 올렸어요.
작년 10월에 이어 5월과 11월에도 ‘야기소’ 파티를 열었다. 이들은 연주 발표회 날을 ‘ 파티’라고 부른다. 친구들과 만나 기타를 연주하고 먹고 노는 분위기에 발표회보다는 파티라는 말이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유튜브 영상을 보고 미국에서 유권이가 돌아왔다
정말 생각도 못한 일이다. 미국 플로리다에서 17년을 살던 친구 원유권이 귀국했다. 작년에 올렸던 유튜브 영상을 봤단다.
원유권 유튜브를 보고 이 파티에 너무 참여하고 싶었어요. 노래하는 것을 보고 듀엣을 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사실 저는 노래를 잘 못해요. 그런데 노래 잘하고 연주 잘하는 친구 세 명이 있으니까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우선 동창 중에서 노래 잘하기로 소문난 정우섭과 함께 듀엣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반주는 당연히 ‘야기소’의 기타 선생인 김영석이 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김영석 “그래? 그럼 무슨 노랠 부를 거야?” 했더니 ‘내 영혼 바람되어’를 할 거래요. 그래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신지은을 꼬셨어요. 물어보니까 지은이도 흔쾌히 하겠다고 해서 저와 유권이, 우섭이 지은이가 한 팀이 됐습니다.
사실 원유권씨는 몸이 좀 불편하다. 미국에 간 지 3년 만에 쓰러져서 10년은 말도 못하고 누워 있었다.
원유권 그런데 갑자기 동창들 노는 걸 보니까 재밌더라고요. 나도 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국에 나가봐야겠다 했죠.
11월 12일, 동인천 한 카페에서 가진 ‘야기소’의 세 번째 파티에서 원유권씨는 소원대로 친구들과 노래를 불렀다. 멀리 타국에서 오랜 시간 외로웠을 원유권씨에게는 단비 같은 선물이었다.
우리는 음을 즐기는 동창모임입니다
다양한 기억을 가진 친구들이 모인 곳 ‘야기소’. 이곳에서는 반드시 즐기고 행복해야 한다. 왜냐고? 음악을 하려고 만났기 때문이다.
김영석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학문은 ‘학’ 아니면 ‘술’로 이름이 끝나죠. 그런데 음악은 ‘樂’, 즐길 ‘락’ 자로 끝나요. ‘음을 즐기는 것’이 음악의 정의인 셈이죠. 즐거워야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음악입니다. 우리가 즐거우면 계속할 것이고 즐거움이 없으면 그만두자, 깨자. 전제가 그것이거든요.
이들의 연습시간은 시간이 갈수록 열기를 더했다. 연습을 열심히 하는 이유는 더 즐겁기 위해서라고 김영석씨는 말한다.
김영석 우리가 프로 연주자가 될 것도 아니고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갈 것도 아니잖아요. 사실 실력도 안 됩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가올 파티 날의 드레스코드를 정하느라 정신없는 ‘야기소’ 회원들. 고민 끝에 빨간색으로 정했다. 따뜻하고 아름답고 열정적인 파티가 영원하길 기대하며….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라이프@은 독자들과 함께 꾸미고자 합니다. 따뜻하고 특별한 사연이 있는 모임에 가 찾아가겠습니다. bravo@etoday.co.kr
어릴 때부터 늘 궁금했다. 정월 대보름에는 왜 단단한 부럼을 먹는 것일까? 동지에는 왜 팥죽을 먹을까? “메밀묵 사려~ 찹쌀떡!”은 왜 겨울에만 들리고 여름에는 안 들리는 걸까?
겨울은 만물이 얼어붙는 시기다. 식물의 지상부는 시들고, 곰은 동면에 들어간다. 한의학에서는 겨울 3개월을 폐장(閉藏)이라고 한다. 겉으로는 피부를 닫고[閉], 속으로는 열과 에너지를 저장[藏]하는 시기라는 의미다. 사람 역시 웅크리고, 살찌며, 피부는 두터워지고, 따뜻한 집 안으로 숨는다. 겉으로는 찬 공기와 많이 접하기 때문에 수족 냉증이 잘 생기고, 찬 바람에 감기, 폐렴, 중이염, 비염이 많이 생기며 피부가 많이 건조해진다. 속으로는 열이 몰리면서 중풍, 심장마비, 심근경색, 협심증 등 심혈관계 질환이 많이 발생한다.
겨울철에 적합한 음식은 찰진 음식, 따뜻한 음식, 견과류
첫째로 추운 북쪽에서 자라는 곡식(찹쌀, 찰기장, 밀, 메밀 등)은 찰기가 있다. 이런 찰기를 이용해서 면, 빵, 묵, 떡을 만들어 먹는다. 이러한 찰기는 뭉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면, 빵, 묵, 떡을 먹고 속이 뭉쳐 체하는 부작용도 있지만, 피부를 뭉치고 두텁게 해서 추위에 대비하는 효과도 있다. 그래서 “메밀묵 사려~ 찹쌀떡!”이라는 외침은 겨울철에만 들리는 것이다. 동지 팥죽에 새알이 들어가는 것도 같은 이유다.
메밀의 원산지는 바이칼 호, 히말라야, 동북아 등 아주 추운 지역이다. 메밀을 원료로 해서 만드는 메밀국수(소바), 냉면, 막국수는 원래 추운 지역의 겨울 음식이다. 이 음식들이 피부를 틀어막아 추위를 견디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냉면도 함흥냉면, 평양냉면 등 북쪽 겨울 음식이 유명하다. 일본의 소바도 북알프스, 중앙알프스, 동계올림픽으로 유명한 나가노 현의 추운 고산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겨울철에 피부가 두꺼워진 상태에서 옷을 두껍게 입고 뜨거운 음식만 계속 먹다 보면, 내부에 열이 몰려 심혈관계 질환이 발생하기 쉽다. 겨울철에 중풍이 가장 많이 발병하는 이유다. 메밀은 성질이 차가워서 겨울철에 뜨거워진 속의 열을 식혀준다. 겨울철에 가끔 메밀국수와 냉면, 막국수를 먹어주면, 밖으로는 피부를 틀어막아 추위를 이기게 해주면서, 속으로는 열을 식혀주고 기름진 음식으로 탁해진 피를 맑게 해준다. 메밀이야말로 겨울철에 꼭 필요한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설날에 떡국을 먹듯 일본에서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그믐에 소바를 먹는 풍습이 있는데, 떡국처럼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계절과 관련된 식문화가 비슷한 데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 뭉친 음식을 먹으면 잘 체한다. 체할 때는 떡 한 조각, 빵 한 조각에도 체한다. 이런 음식을 먹을 때 체하는 것을 막으려면 팥이나 매운 식재료(생마늘, 생파, 생무, 고추, 차조기 등)를 같이 먹는 것이 좋다. 붕어빵, 동지팥죽, 찐빵, 타이야끼에 모두 팥이 들어가는 것도 밀가루의 독이 뭉쳐 체하게 하는 것을 풀기 위해서다. 팥은 강한 신맛이 있어 뭉친 것을 잘 풀어주고 녹인다. 팥의 붉은 색이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전염병을 예방해준다는 속설이 있어 동짓날 팥죽을 먹기도 한다.
둘째로 체온 보존을 위해 염소고기, 양고기, 보신탕 등 따뜻한 음식들을 많이 먹는다. 중국 북부와 몽골 사람들은 추위에 버티기 위해 양고기를 많이 먹는다. 부추도 속을 따뜻하게 해서 추위를 이기게 해주므로 자주 먹는 것이 좋다. 그래서 겨울에 많이 먹는 만두에는 항상 부추가 들어간다. 부추만두는 콘셉트가 참 좋다. 만두피로 피부를 두텁게 해서 추위를 막아주고, 부추로 속을 데워 추위를 이기게 하는 음식이다.
으슬으슬 추울 때는 생강차나 고추, 마늘 등 매운 음식이 도움이 되지만, 장복하는 것은 좋지 않다. 에는 겨울에 생강, 마늘, 파를 많이 먹으면 봄에 간과 눈이 나빠지고 흰머리가 나며 수명이 짧아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면해야 할 겨울에 매운 음식을 많이 먹어서 땀구멍을 열게 하고 정액, 피를 땀으로 내보내면 봄에 문제가 생긴다는 말이다. 보약 먹을 때 파, 마늘, 무를 먹지 말라는 말은 같은 의미다.
셋째로 견과류의 딱딱한 껍질은 내부의 엑기스는 꽁꽁 응집시켜놓고 외부의 세균, 바이러스 등 이물질은 완전히 몰아내는 역할을 한다. 정월 대보름에 견과류를 먹는 것은 다음과 같은 효과가 있다. ① 딱딱한 견과류는 정액, 진액을 갈무리하고 기침을 멎게 한다. ② 피를 맑게 해 겨울철에 자주 발병하는 중풍, 심장마비, 심근경색, 협심증 등 심혈관계 질환을 예방한다. 피가 맑아지면 부스럼 등 피부 질환도 예방할 수 있다. ③ 이빨은 뼈의 일종인데, 뼈 중에서 유일하게 밖으로 드러난 부분이다. 뼈에 자극을 주면 뼈가 더 단단해지고, 뼈가 단단해지면 기력과 면역력이 높아지고 장수에 도움이 된다. 그래서 기공법에서는 이빨을 서로 부딪치게 하는 고치법(叩齒法)을 자주 실천한다. 딱딱한 부럼을 직접 이빨로 깨서 먹는 것은 이런 효과를 얻기 위함이다. 따라서 겨울에는 연자육, 밤, 호두, 은행, 잣, 아몬드, 피스타치오를 먹어주면 좋다. 그런데 너무 많이 먹으면 오히려 내열이 생길 수 있으므로 적당히 먹어야 한다. 하루에 한 주먹 정도의 분량이면 적당하다.
겨울철은 꽁꽁 얼어붙는 계절이므로, 갈무리를 잘해야 한다. 땀을 많이 흘리는 것도 좋지 않으며, 멀리 나다니는 것도 좋지 않다. 태양의 운행에 맞춰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이 좋다. 새벽에 찬 공기를 맞으며 운동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외면하고 늦게 자고 무리하게 일하곤 한다. 이렇게 겨울을 보내면 봄에 춘곤증이 심해진다. 겨울에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봄에 ‘spring’처럼 튀어 오르지 못한다.
겨울에 너무 따뜻하게만 지내는 것도 여름철 냉방병만큼 좋지 않다. 몸이 추웠다 더웠다 하면서 면역력, 적응력이 높아지는 것인데, 겨울에 춥다고 더운 방에서만 생활하면 면역력, 적응력이 떨어진다. 이런 상태에서 밖에 나가 찬 바람을 맞으면 금방 감기에 걸린다.
>> 최철한(崔哲漢)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