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열심히 살아온 당신. 그 훈장 같은 세월을 굳이 감추려 하지 말라.
“2008년인가 새해 결의 중 하나로 정한 게 염색 안 하기였어요. 본모습을 뭔가로 가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일하고 있는 제네바는 워낙 다양한 인종에 머리 색깔이 천차만별이라 제 반백 머리에 아무도 개의치 않아요.”
하얀 단발머리에 무테안경을 끼고, 작은 진주 귀고리로 멋을 부린 여자는 의외로 핸드백이 아니라 백팩을 메고 있었다. 본모습을 ‘뭔가’로 가리고 싶지 않다는 의지는 그녀의 패션 곳곳에서 드러났다.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외교부장관 강경화다. 모든 장단점을 차치하고 오로지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모습의 강경화는 단연 멋있다. 유리천장을 뚫은 그녀는 넥타이를 맨 보수적인 남자들을 따라 과하게 남성화가 되는 것을 택하거나, 아름다움을 위해 억지로 세월을 흐름에 역류하는 짓도 하지 않았다. 워딩 그대로 본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파뿌리처럼 센 흰머리마저도 강경화에겐 세월의 훈장이고 자신의 역사였다.
요즘 염색이라는 인위적인 방법 대신 자연스럽게 늙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강경화를 비롯해 IMF 총재인 크리스틴 라가르드, 영국 총리 테리사 메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인 재닛 옐런 같은 다국적 롤 모델들이 거울 앞에 서서 나이 든 모습을 한탄하는 대신 하얗게 센 머리마저 사랑하라고, 당당해지라고 외치고 있다. 묘하게 예로 든 여인들에게는 공통점이 많다. 하나같이 ‘사상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성공한 여성들이다. 또 그녀들은 머리를 염색하지 않는다고 패션에 관심 없는 이들이 아니며, 마크 저커버그처럼 큰일을 하느라 자신을 꾸미는 것에 소홀한 사람들도 아니다. 오히려 능력을 돋보이게 해주는 취향과 감각을 갖추고 있다. 회색 집업(zip-up)만 주구장창 입는 젊은 청년이 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두 부류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한쪽은 나를 사랑하지만 거짓으로 포장하지 않고, 다른 한쪽은 포장된 나의 모습을 사랑한다. 우린 전자의 모습을 백발의 시니어들에게서 발견한다. 백발에 대한 인식이 변한 건 불과 몇 년 사이의 일이다. 얼마 전만 해도 흰머리를 그대로 두는 건 게으름이나 자기 방치와 같은 상징으로 읽혔다. 부모의 센 머리에 염색약을 발라주는 자녀의 모습은 가슴 뭉클한 가족 광고의 클리셰와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자녀라면, 부모의 흰머리를 가리는 대신 훈장과도 같은 흰머리를 부러워할 것이다.
흰머리는 단순히 머리의 컬러가 아니다. 그건 때때로 당당함의 상징이고, 연륜의 기록이며, 노년의 철학까지 내포하고 있다. 머리에서 이어지는 패션, 액세서리, 에티튜드에도 그 모든 것이 묻어난다. 흰머리 여인들의 공통점은 패션 스타일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들은 그 흔한 ‘아줌마 펌’을 하지 않는다. 강경화나 크리스틴 리가르드처럼 짧게 자른 단발은 누군가처럼 올림머리를 하느라 몇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이효리보다 앞서 자연주의를 추구해온 여배우 문숙 역시 흰머리를 염색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자란 머리는 인위적인 올림머리를 하기보다는 툭툭 말아 묶는다. 그리고 정갈한 주얼리를 더한다. 손톱만 한 진주 귀고리가 적당하겠다. 자연스러운 멋과, 그냥 자연스럽기만 한 건 다르다. 앞서 예를 든 여인들 역시 주얼리나 스카프, 브로치 등으로 멋을 부린다. 흰머리의 담백함이 오히려 주얼리의 힘을 살려준다.
이 흐름은 옷에서도 드러난다. 과한 프린트보다는 심플한 컬러 위주의 옷을 택한다. 흰머리와 대조되는 화려한 옷차림은 당신을 삐에로로 만들어버릴지도 모른다. 백발의 여인뿐 아니라 백발의 신사 역시 과거에 비해 늘고 있다. 백발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배철수다. 20대의 배철수도 청바지에 스니커즈를 신었고, 60대 중반의 지금도 여전히 그 차림이다. 자신의 ‘본모습’이 뭔지 20대부터 알았고, 주름이 늘고 엉덩이 살이 빠진 지금의 배철수 역시 자신의 노화된 ‘본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만일 누가 나에게 백발에 어울리는 패션이 뭐냐고 묻는다면 길게 얘기할 생각이 없다. 지금 당신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스타일, 그걸 그대로 유지하면 된다고 말할 것이다. 백발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순리대로 사는 삶, 그 자체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