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행위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글쓰기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정확히는 필진, 기자라는 명함이 생기면서 바람직한 쓰기를 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수년 전부터 생긴 명함인데 이제와 새삼? 왜? 누군가 묻는다면 이유는 있다. 대상이 없어도 좋았던 자발적 쓰기에서 대상을 의식하는 정보성 쓰기로 방향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한동안은 기자로 혹은 필진으로 글을 쓰면서도 독자를 의식하지 않고 큰 부담 없이 썼던 것 같다.
지난해 모 포탈 필진으로 활동하면서 쓴 글에 백 개 넘는 하트와 댓글이 달렸을 때 깨달았다. 누군가 내 글을 읽는다는 것. 읽은 글에 평가를 내린다는 것. 이 글은 다행히 평가가 좋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 유튜브처럼 ‘싫어요’ 버튼이 있다면 ‘싫어요’가 백 개쯤 달릴 수도 있는 것이다. 아, 이쯤에서 알게 된 게 얼마나 다행인가. 고마운 일이다.
기자로서 글을 쓰는 것은 확실히 조심스럽다. 개인 SNS에 편하게 쓰는 것과는 다른 무게감이 있다. 읽는 대상의 범위와 성격이 있고 노출된 후엔 돌이킬 수가 없다. 내가 쓴 글에 책임을 져야 한다. 생각 없이 쓰면 나뿐 아니라 내 글을 실어준 단체까지 낭패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소신껏 써야 하지만 대중의 기호도 무시할 수 없다. 글이 좋으면 한 사람의 독자가 생기는 게 아니라 파도를 탄 독자가 따라 올 수도 있다. 혹평을 받으면 수십, 혹은 그 이상의 독자를 잃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섬뜩하다. 그동안 의식 없이 하소연하듯 쓴 글도 많았을 텐데 거둬들일 수 없으니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감동을 주는 글을 쓰고 싶다
나는 언제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을까? 주부로 지내면서 정신 건강을 위한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시작된 건 분명하다. 아내로 엄마로 소소한 부딪힘으로 속상할 때마다 그때의 감정을 글로 썼다. 쓰고 나면 어느 정도 기분이 나아지곤 했다. 남에게 보이기 싫은 글은 비공개로 설정했다. 욱 해서 썼던 글을 시간이 지나 다시 읽고 삭제한 적도 많다. 그 당시 나의 글쓰기는 말하기 힘든 불만을 표출하는 방법이었다.
하소연성 글쓰기가 줄어들면서 생긴 변화는 남의 글을 읽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 다른 이의 글을 읽는 것이다. 객관성과 사실을 기반으로 한 공감과 정보를 제공하는 글을 쓰기 위함이다. 좋은 글 한편을 읽었을 때 받는 감동의 크기는 말로 설명이 어렵다.
이제는 단지 좋아하는 것에서 벗어나 감동을 주는 글을 쓰고 싶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의 내용이 너무 좋아서 결국 소장하게 만드는 책처럼, 한 번 읽고 훅 날아가는 글이 아니라 다시 읽고 싶은 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다 읽은 후에도 여운이 남아 마지막 페이지를 계속 읽게 되는 그런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