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한 정원이 있다. 이름은 ‘천상의 정원’이다. 천상처럼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의미일 테다. 속된 세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삶을 관조하기 좋은 곳이라는 뜻으로도 들린다. 정원을 조성한 이는 목회자다. 그렇다면 모르긴 몰라도 기도의 방편으로 만든 정원일 공산이 크다. 천국을 향한 그리움, 또는 마음 안에 지어놓은 유토피아를 조경의 초석으로 삼아 꾸민 색다른 형태의 예배소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 색채를 대놓고 표출하진 않았다. 그저 정원 뒤편 높은 곳에 한 평 남짓한 초미니 교회를 들어앉혀 살짝 내심을 드러냈다.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도록 작게 만든 정원 입구의 ‘좁은 문’ 역시 천국에서 보낸 초대장을 상징하리라. 예수가 말하길,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천국행 문만 좁으랴. 어머니의 몸에서 나올 때부터 우리는 좁은 문을 비집고 헤매느라 울음을 터뜨린 가여운 존재일 뿐이다. 이후 만나게 되는 세상의 모든 관문 역시 대체로 좁고 가파르고 차갑다.
어찌된 영문인지 삶은 그렇게 고통을 축으로 돌아간다. 나이 들어서도 고통을 처리하는 묘약은 대체 어느 약국에서 파는지 알 길이 없다. ‘이 바보야, 어디긴 어디야? 네 안에 있지 않더냐!’ 성인들의 메시지는 흔히 그렇다. 하지만 내 안을 들여다보면 먼지만 폴폴 날린다. 그래도 삶은 지속된다. 내 안에 있는 먼지와 세상에 미만한 먼지를 겹으로 뒤집어쓰고 휘청휘청 그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때 춤을 추듯이 유유한 걸음새라면 다행스러우리라. 그렇게 태연하게 통과한 문이 돌아보면 좁은 문이었음을 깨닫고 안도할 수 있을 테니까.
‘천상의 정원’엔 검정색의 거대한 바위 군락이 있다. 바다를 지배한 생물이라는 삼엽충이 살았던 약 5억 년 전 고생대 캄브리아기에 형성된 변성퇴적암이다. 정원주는 이 희귀한 암석 구역에 수목을 가꾸어 특별한 공간을 연출했다. 그래도 수목보다 눈길이 꽂히는 건 억겁의 세월을 산 바위다. 사라진 시간의 형해가 견고한 바위를 옷으로 입고 유령처럼 부활한 느낌을 풍긴다. 무뚝뚝한 바위에 귀를 대면 5억 년째 돌고 도는 시곗바늘 소리가 재깍거릴 것만 같다. 길어야 100년도 못 살고 떠날 내가 5억 살 나이를 먹은 바위와 공존하다니.
그러나 우리가 머잖아 소멸할 운명이듯 바위도 언젠가는 우주의 티끌로 흩어지리라. 시간의 길고 짧음은 잠정적인 격차에 불과하다. 꿰뚫어 바라보면 하루살이와 사람의 삶에 하등 차이가 없듯이. 삶과 시간을 편협하게 이해할 일 아니다. 시간에 연연하는 건 삶을 초조하게 만드는 데 쓸모가 있을 뿐이다. 그대여,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져라. 검은 바위가 하는 말이 그렇다.
바위에 뿌리내린 소나무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암송(岩松)이라 부른다. 솔씨는 제 몸을 감싼 얇디얇은 외피를 날개처럼 활용해 바람을 탈 줄 아는 재간꾼이다. 바람에 실려 허공을 날아다닌다. 그러다 바람이 그치면 낙하한다. 낙하한 자리를 주거지로 삼는다. 그렇게 한살이를 시작한 암송은 120년을 끄떡없이 바위와 한 몸으로 살았다. 솔씨가 떨어진 곳이 바위 거죽이니 고생살이는 필연이었을 수밖에. 바위를 끌어안고 발버둥 쳐 간신히 싹눈을 틔웠을 것이다. 햇볕과 비와 습기를 얻기 위해 몸부림쳤을 것이다.
무릇 모든 식물이 그렇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햇살 한 줌, 이슬 한 방울을 기어이 끌어들여 하루하루 목숨을 이어간다. 이러한 식물의 기적적인 재능 앞에서 인류를 만물의 영장이라 할 수 있겠나. 다만 인간도 최선을 다해 살 뿐이다. 살아남기 위해 해볼 건 거침없이 다 해보는 강골이라는 점에서 식물과 인간은 다르지 않다.
‘천상의 정원’을 한국에서 가장 수려한 정원의 하나로 꼽는 이들도 있다. 2만 평 부지에서 자라는 화초와 관목과 수생식물 등 500여 종의 식물이 사계의 순환에 따라 다채로운 경연을 펼치니 환호할 만하다. 더군다나 정원 저 아래로 대청호의 푸른 물이 바다처럼 광활하게 펼쳐져 절경이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자주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물빛은 찬연히 푸르다. 수면 위로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잔물결 일렁인다.
구름을 벗어난 해가 문득 활을 당겨 호수를 겨냥해 햇살을 쏜다. 그러자 수면에 하얀 물비늘이 반짝거린다. 찰나에 반짝이다 찰나에 사라지는 저 시리도록 눈부신 빛의 알갱이들, 저걸 윤슬이라고 한다. 윤슬은 어쩌면 잡아둘 수 없는 시간의 허무한 잔상이다. 생성과 소멸이, 생과 사가 한 몸에 가까움을 일러주는 전령이다. 과욕에 취해 안달복달하며 살 일이 아님을 알려주는 기쁜 신호다. 새 한 마리 물 위를 날더니 순식간에 가뭇없이 사라진다. 그걸 보고 중얼거린다. “야야, 너도 윤슬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