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야산 자락에 옛집 한 채가 있다. 현대식 건물 일색인 도시에 남은 옛날 한옥은 그 존재만으로도 신선하다. 저만치 홀로 핀 들꽃처럼 자존감으로 당당하다. 고미술품 수집가로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간송미술관을 설립한 간송 전형필(1906~1962)의 자취가 서린 집이다. ‘전형필 가옥’이라 부르는데, ‘간송 옛집’으로도 통한다.
이 집은 1890년대에 전형필의 양아버지였던 대지주 전명기가 원근 도처의 농장에서 나오는 소출을 관리하는 사무소 용도로 지었다. 전명기의 거대한 재산은 양아들 전형필에게 상속됐다. 불과 20대 때 전형필이 일약 거부로 부상한 것. 전답만 해도 여의도 10배 면적인 800만 평이었다. 왕족을 빼면 조선 10대 부자에 들었다고 하니 말 다했다. ‘전형필 가옥’ 뒤편엔 묘 2기가 있다. 전명기와 전형필 부부의 합장묘가 나란히 있다. 생시나 사후나 전명기와 전형필이 이렇게 도타운 인연으로 동행한다. 전명기의 묘가 들어서면서 이 집은 재실로 그 용도가 바뀌었으며, 제사 때는 물론 평소에도 전형필이 수시로 찾아와 머물렀다.
가옥을 볼까. 살짝 들린 처마가 시원스러운 멋을 풍긴다. 처마엔 낙수를 모아 흘려보낼 수 있는 양철 수로를 매달았다. 이건 툇마루에 설치된 유리 창문들과 함께 전통한옥과는 다른 근대한옥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집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망가졌다가 현대에 이르러 복구됐다. 종로에 있었던 전형필 본가에서 가져온 고재를 이용해 보수했다. 그런데 고재의 거죽을 너무 살뜰하게 대패로 깎아내 고풍스런 정취마저 밀려나갔다. 마치 최근에 지은 집처럼 새뜻하다. 전형필의 손때 묻은 유물이 없다는 점도 아쉽다. 집 안에 걸린 서화들은 모두 모사품이다.
집은 안방과 건넌방, 누마루와 대청으로 이루어졌다. 어느 공간이나 창호가 흔해 외부 경치를 차경으로 즐길 수 있게 했다. 이 한옥이 살림집 용도로 지어진 게 아니라는 걸, 재실이자 별서의 역할을 겸했다는 걸 알 수 있는 장면이다.
누마루에 걸린 편액 옥정연재(玉井硏齋, 맑은 물로 먹을 갈아 글을 쓰는 집)는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위창 오세창이 쓴 글씨다. 오세창과 전형필의 관계가 각별하다. 전형필은 휘문고보 출신이다. 이 학교를 다닐 때 그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스승 고희동을 만났다. 고희동은 스승 오세창에게 전형필을 소개했다. 이렇게 시작된 오세창과의 인연은 길게 이어졌다. ‘산골의 물과 소나무’라는 뜻의 호 간송(澗松)을 지어준 이도 오세창이다. 전형필을 첫 대면한 날, 오세창은 이런 말을 했단다. “젊은 그대가 흰 두루마기 차림으로 들어오는 순간, 깊은 산골짝에 흐르는 물을 보는 것 같았네.” 오세창이 매우 흡족해하며 내친김에 호까지 지어줬던 거다.
간송미술관 컬렉션엔 추사 김정희의 작품이 많다. 전형필이 추사 작품에 심취, 수집에 공을 들인 덕분이다. 전형필이 추사 세계에 입문한 계기는 평생의 스승 오세창에 의해서였다. 오세창은 추사의 서화와 인장 다수를 전형필에게 증정하기도 했다. 오세창의 아버지이자 추사의 제자였던 오경석이 모은 것들이다. 전형필은 일찍부터 크게 보고 크게 처신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오세창의 가르침으로 얻은 눈썰미와 남다른 배포를 가지고 살았다. 특히 문화보국(文化保國)의 가치를 일깨워준 스승의 뜻을 고이 간직하고서 문화재 수집과 보존에 한평생을 바쳤다. 전통 문화유산의 해외 유출을 차단하기 위해 막대한 사재를 털어 명품 유산들을 사들였다. 간송미술관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견줄 정도로 국보와 보물 다수를 소장하게 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전형필이 수집한 문화재의 총량은 1만여 점에 달한다. 우여곡절과 사건 사고를 숱하게 겪으며 문화재의 바다에 그물을 드리웠다. 그의 어망에 걸린 최고의 대어는 ‘훈민정음 해례본’ 진본이다. 한글의 창제 원리와 용법을 담은 이 세기적 보물이 전형필의 손에 들어간 건 얼마나 다행인가. 한글 창제에 관한 구구한 억측들을 종식시킨 게 이 ‘해례본’이었으니까 말이다. ‘해례본’ 소유자가 부른 매매가는 당시 기와집 한 채 값인 1000원. 그러나 전형필은 1만 원에 샀다. 문화재에 관한 한 그 가치에 걸맞은 값을 치르는 게 당연하다는 신념에 따른 거래법이었다. 가슴이 문득 웅장해지지 않는가? 공정과 배짱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전형필 가옥’ 근처엔 ‘김수영문학관’이 있다. 1960년대의 대표적 시인 김수영(1921~ 1968)을 기리는 공간이다. 도봉구 방학동엔 김수영의 노모와 누이들이 살았던 본가가 있다. 김수영이 이 집에 눌러앉아 시를 쓰기도 했다. 이런 연고로 5층짜리 기념관이 도봉구에 세워졌다. 건물은 자잘한 치레 없이 말쑥하다. 허세를 싫어했던 김수영의 성정을 고려한 디자인일 테다. 내부의 구성과 구색은 방대하다. 김수영의 삶과 문학을 낱낱이 보여줘 실속 있게 관람할 수 있다. 김수영의 서재를 재현한 공간도 있다. 이곳 벽면엔 상주사심(常住死心) 네 글자를 담은 액자가 걸려 있다. ‘늘 죽음을 생각하라’는 뜻으로, 이는 김수영의 좌우명이다. 다른 건 몰라도 그는 늘 죽을 각오로 치열하게 시를 썼다.
김수영문학관에서 유독 머리에 새겨지는 사물은 시인의 원고다. 만지면 바스러질 듯 누렇게 바랜 육필 원고다. 국내 문학관 중 주인공의 육필 원고가 많기로 이곳과 비할 데가 없다.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의 원고도 있어 가슴이 뻐근해진다. 세상을 뜬 시인이 남긴 육필 원고는 그의 뼈 한 조각을 본 듯 자극적인 감흥을 야기한다. 시인이 감정을 쥐어짜 토한 언어들이 누런 종이에 촘촘히 박혀 보석처럼 빛을 뿜는다는 느낌을 주는 게 아닌가. 보석이란 표현은 어폐가 있다. 김수영의 시어는 보석이라기보다 피다. 뜨거운 선혈이다.
원고들엔 대개 펜으로 꿰매고 누빈 자국이 흔하다. 수정과 첨삭을 거듭한, 저 지독한 연마의 궤적을 보라. 김수영은 방울방울 피를 뿜듯이 시를 썼다. 그렇게 쓰인 시는 흔히 세상의 어둠과 모순, 권력의 농간을 향해 쏘아붙인 타격으로 읽혔다. 사람들이 그를 이른바 ‘참여시인’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수영은 이어령을 상대로 문학의 순수-참여 논쟁을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어령은 신문 기고를 통해 ‘에비(무서운 가상의 존재)가 지배하는 문화 풍토’를 지적하며 문학이 치졸한 상상적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수영이 한 방 야무지게 먹였다. 문화를 지배하는 건 ‘에비’와 같은 추상적인 금제(禁制)가 아니라 훨씬 구체적인 현실의 억압이라고 반박했다. 김수영의 문학적 지향이 또렷이 읽히는 논쟁이었다. 소설가 김훈은 김수영의 문학을 일컬어 ‘제정신을 가진 자의 울분’이라 했다. 김수영은 떠났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탐조등으로 남아 시대의 일각을 비춘다.
최귀옥 도봉문화원 원장“삶에 문화가 붙어야 행복해”
서울 동북부의 관문인 도봉구는 1973년 성북구에서 분구돼 생성됐다. 도봉구의 명물은 단연 도봉산으로, 예부터 서울의 진산으로 통했다. 산에 가득한 바위들은 지조와 의리의 상징 역할을 했다. 서울 시민들의 레저 공간이기도 하다. 최귀옥 도봉문화원 원장은 ‘도봉산과 함께 도봉의 삶과 문화가 꽃피었다’고 본다. 도봉구의 정체성이 도봉산에 있다는 얘기다.
“과거의 도봉구는 도봉산 아래 있는 한적한 농촌에 불과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지금은 인구가 감소하고 있어 우려를 느낀다. 하지만 발전 가능성은 크다. 한강 이북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씨드큐브(48층)는 도봉구의 성장세를 암시한다. 도봉구의 문화 역량도 날로 커지고 있다. 한편 도봉 문화의 본질은 도봉산, 또는 도봉산의 정신에 있다. 우리 문화원은 도봉산이라는 공간적•정서적 배경을 가지고 살아가는 도봉 사람들의 모습을 조명하기 위한 작업을 부단히 이어가고 있다.”
(주민욱 프리랜서)
문화원 사업의 지향점을 어디에 두었나?
“주민들에게 문화 향유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해 좀 더 행복한 일상을 누리게 하자는 데 방점을 찍어두었다. 따라서 우리 문화원은 다양하고 신선한 콘텐츠를 개발해 보급한다. 주민들이 만족할 수 있는 프로그램 발굴에 주력해왔다. 문화 활동을 통한 경제효과 창출 측면도 중시하고 있다.”
도봉구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을 꼽는다면?
“도봉동에 있는 도봉서원이다. 이 서원은 서울시에 현존하는 유일한 서원으로서 가치가 매우 크다. 조광조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된 서원이다. 선비정신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현재 중건 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서원 앞 계곡 일대에 있는 각석군(刻石群, 글자 등을 새긴 돌 무리)도 특별한 문화유산이다.”
방학동에는 연산군 묘가 있더라.
“원래 강화도에 있던 무덤을 부인 신 씨가 이곳으로 옮겨달라 간청해 만들어진 묘다. 연산군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지만 일부 재조명될 측면도 있다. 문화원으로서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도봉산 관련 역사 명소엔 어떤 게 있나?
“‘도봉옛길’이 있다. 과거 한양과 한반도 각지를 잇는 6대로 가운데 하나인 경흥대로의 도봉구 구간을 말한다. 이 길을 통해 이순신 장군이 귀양을 갔다. 도봉서원을 출입한 선비들이 걸었던 길이고, 보부상들의 발길이 이어졌던 길이다. 많은 역사와 애환이 서린 역사 명소다. 우리 문화원은 이 유서 깊은 옛길의 문화적 가치를 발굴, 매년 ‘도봉옛길문화제’를 펼쳐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도봉문화원만 가지고 있는 문화 콘텐츠가 있다면?
“서울의 문화원들 가운데 유일하게 한글날 축제인 ‘도봉한글잔치’를 개최한다. 올해 축제엔 무려 2만여 명이 참여해 성황을 이루었다. 우리는 전국 문화원 중에 최초로 문체부가 주관하는 문화 인력 양성사업 기관으로 선정돼, 지금까지 500여 명의 전문 인력을 배출하기도 했다. 이에 따른 자긍심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