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5일은 UN이 정한 ‘노인 학대 예방의 날’이다. 그러나 학대는 여전히 가정과 시설의 문 안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보호는 있었지만 권리는 없었고, 존중은 말뿐이다. 초고령사회를 살아가는 지금, 단지 ‘노인을 돌본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왜 학대가 반복되는가’보다 중요한 질문은 ‘왜 노인의 권리가 사라졌는가’다. 노인 학대를 예방하려면 복지의 관점에서 인권의 관점으로 전환해야 한다.

통계 너머의 침묵, 반복되는 고통
UN은 2011년, 6월 15일을 ‘세계 노인 학대 인식의 날(World Elder Abuse Awareness Day)’로 공식 지정했다. 노인 학대가 단지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발생하는 중대한 인권침해라는 점에서, 국제사회가 공동의 대응을 촉진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노인을 향한 학대와 차별은 더 이상 은폐된 ‘개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 책임의 영역이 되었다. 특히 UN은 학대의 대부분이 가정 내에서 침묵 속에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노인에 대한 인권 감수성 고양과 인식 전환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날을 기점으로 전 세계는 노인의 존엄과 권리를 되새기고, 제도적·사회적 예방 체계를 강화해나가고 있다.
2022년 기준 보건복지부와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노인 학대 신고 건수는 1만 9083건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6774건이 실제 학대로 판단돼 조치가 취해졌다. 피해자 10명 중 8명 이상이 여성 노인이며, 평균 연령은 78세로 나타났다.
학대의 유형은 신체적 폭력(14.7%)보다는 정서적 학대(42.1%), 방임(11.4%), 경제적 착취(9.9%)와 같은 보이지 않는 형태가 많았다. 가해자는 배우자(31.4%), 자녀(30.3%) 등 가장 가까운 가족이며, 장소는 가정 내(87.7%)가 대부분인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재학대 건수도 전체 학대 사례의 10.8%를 차지해 지속적으로 학대가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통계로 드러난 수치가 ‘빙산의 일각’이라는 점이다. 특히 요양병원이나 요양시설, 정신요양원 등 폐쇄적 공간에서는 학대 사실 자체가 외부에 알려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원민경 법무법인 원 변호사는 “시설 내 인권침해는 피해자가 말할 수 없고, 가족도 접근이 어렵다 보니 증거 수집이나 신고가 더딜 수밖에 없다. 결국 방치되고 은폐되기 쉬운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코로나19 시기 코호트 격리로 수많은 노인이 외부와 단절된 채 생명을 잃었지만, 사회는 이를 인권의 시선으로 다루지 못했다.
노인에 대한 혐오와 연령 차별도 학대의 토양이 된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20~30대의 46.7%가 ‘노인은 이기적이다’라는 편견에 공감한다고 답했다. ‘키오스크가 불편하면 집에 있어야지’, ‘아프면 병원비는 본인이 책임져야지’라는 시선은 노인을 사회의 ‘불편한 존재’로 낙인찍고, 결국 학대로 이어지게 만든다.

방치가 학대라고 인식 못해
대한민국은 2025년 현재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6%를 차지하는 초고령사회다. 하지만 건강수명은 평균 기대수명인 84.7세보다 훨씬 낮은 73세에 불과하며, 저소득층의 경우 65세 전후에 이미 건강수명이 끝난다. 특히 지역별·소득별 격차는 심각하다. 건강수명과 소득수준에 따라 노인의 삶의 질은 크게 갈린다. 소득 상위 20%와 하위 20%의 건강수명 차이는 무려 8년. 같은 대한민국 시민이라 해도 어디에,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따라 ‘삶’의 가치 자체가 달라진다. 예컨대 과천시의 건강수명은 74.2세이지만 부산 영도구는 64.8세로 10년에 가까운 차이를 보인다. 이는 단순한 의료 인프라나 경제 수준의 차이를 넘어, 사회적 돌봄 체계의 밀도와 관심이 지역별로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돌봄의 공백이 커질수록 노인의 삶은 더 쉽게 고립되고, 제도 밖으로 밀려난다. 하지만 노인을 보호의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사회적 태도는, 결국 노인을 수동적인 존재로 고정시키고, 선택권, 참여권, 자기결정권마저 앗아간다. 원민경 변호사는 “방치도 학대”라고 단언했다.
학대 예방은 인식의 전환부터
노인 학대를 예방하기 위해 우리 사회는 다양한 노력을 시도 중이다. 국가 차원에서는 보건복지부와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이 ‘노인 학대 예방교육’을 법정 의무로 지정하고, 각 요양기관 종사자를 대상으로 연 4시간 이상 교육을 실시하도록 하고 있다. 2023년 기준 노인보호전문기관을 통한 예방교육 참여자는 4만 2000여 명에 달하며, 노인 학대 상담 건수는 22만 5589회로 전년보다 10.6% 증가했다. 이는 지역 현장에서 학대 예방 및 조기 대응 역량이 점차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노인 학대 전담 인력(노인보호 전문요원)도 2022년 257명에서 2023년 282명으로 확대됐으며, 지자체 단위에서 노인 학대 예방과 대응을 위한 전담 조직 및 조기 발견 시스템(지역 보건소, 노인복지관 등과 연계) 구축을 점차 확대 중이다. 특히 2023년 한 해 동안 전국 37개 노인보호전문기관에서 1만 9000건 이상의 학대 신고가 접수됐고, 그중 7000여 건이 실제 학대 사례로 판정되어 조치됐다.
민간에서도 변화가 일고 있다. 서울시 ‘찾동(찾아가는 동주민센터)’은 독거노인 밀착형 상담을 강화해 고위험군을 조기에 발견하고 있으며, 노인 돌봄 서비스를 통합한 ‘서울케어’ 체계를 운영 중이다. 지역 공동체와 연계한 ‘마을 돌봄’이나 노인활동지원단, 방문간호 중심의 예방법도 확산되고 있으며, AI 상담 시스템과 ICT 모니터링 기기를 활용한 사후관리 체계도 일부 지자체에서 시범 운영되고 있다.
해외 사례도 눈여겨볼 만하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초고령사회로 진입한 일본은 ‘지역포괄지원센터’를 중심으로 의료·복지·심리 상담을 통합 제공하며, 이웃과 행정의 유기적 연결로 학대 징후를 조기에 포착하고 있다. 덴마크는 ‘노인 학대 제로’를 목표로 모든 노인 요양시설에 인권담당관을 배치하고, 노인 당사자의 권리교육도 병행하고 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는 독립적인 노인 옴부즈맨 제도를 통해 학대 사례를 직접 조사하고, 가해자와 시설에 대해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다.
우리나라 역시 노인 인권 옴부즈맨 제도 도입을 검토 중이며, UN 인권이사회 결의에 따라 ‘국제노인인권협약’ 제정 실무그룹에도 참여하고 있다.
노인 학대를 막기 위해 제도와 처벌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것만으로 완벽한 예방은 어렵다. 반드시 사회 전반의 인식 전환이 동반되어야 한다. 원민경 변호사는 “노인을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 교육, 의료, 돌봄, 법률 전 영역에서 노인을 능동적 시민으로 인정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예방을 위한 방안으로는 요양시설 종사자를 대상으로 의무가 아닌 실질적 인권교육 확대, 노인과 가족의 권리·의무 조정 프로그램 운영, 지역사회 기반의 조기 발견 네트워크 구축, 노인 돌봄 종사자의 처우 개선과 소진 방지 시스템 마련 등이 있다.
지금까지 노인에 대한 대응은 복지 중심이었다. ‘돌봄을 받는 대상’, ‘보호해야 할 존재’로만 규정해왔던 것이다. 이는 복지는 필요하지만 복지의 대상이 되는 순간 인권 주체로서의 존재감이 사라지고, 노인을 돌보면서도 그의 선택권이나 존엄은 묻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원 변호사는 “복지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복지 대상자라는 말에는 ‘권리 주체’의 느낌이 빠져 있다”며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건 배려가 아니라 권리 보장”이라고 꼬집었다.
‘노인인권기본법’, 왜 지금 필요한가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시작된 것이 ‘노인인권기본법’이다. 참여연대, 민변, 여성단체, 지역 시민사회단체 등 50여 곳이 함께한 ‘노인인권기본법 제정 추진연대’는 2024년부터 10개월간 논의를 이어왔고, 지난 5월 국회 라운드테이블에서 초안을 공개했다.
‘노인인권기본법’이 지향하는 것은 단지 노인의 생존이 아니라 ‘존엄한 노년’이다. 이는 현재 노년 세대뿐 아니라 곧 고령기에 진입할 세대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법안은 노인의 기본권을 △존엄성 △독립성과 자주성 △돌봄받을 권리 △참여권과 자아실현권 등으로 구체화했다. 특히 △연령 차별 금지 △자기결정권 보장 △요양시설 내 인권 보호 의무 △노인의 노동권·문화권·주거권 보장 등의 내용이 법조문으로 담겼다.
원민경 변호사는 “지금까지 우리는 노인 보호만을 이야기해왔다”면서 “이제는 존엄한 노년을 위해, 이들이 시민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법적 틀을 바꿔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 법은 노인의 자주성과 참여권, 건강권, 노동권, 교육권, 문화향유권까지 아우른다. 단순히 학대 처벌 강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 통합을 위한 물리적·사회적 접근성 보장, 시설 내 감시체계 강화, 노인 당사자의 정책 참여 보장 등도 포함하고 있다.
사회 전반의 인식 전환을 선언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노인도 권리의 주체이며 우리 모두가 언젠가 맞이할 ‘미래의 나’라는 점을 잊지 않는 일이다. 이제는 단순히 보호하는 시대를 넘어, 존중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