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하와 홍순의 ‘맛있는 겨울’

입력 2025-12-02 06:00

[세대를 잇는 맛, K-푸드 '한식'] 요리로 인생을 배우다

같은 재료로 같은 메뉴를 만들어도 집집마다 고유한 맛이 나는 건, 정성과 손맛이 개성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성년이 되자 대학 진학 대신 ‘할머니의 요리학교’ 학생이 되기를 자처한 손녀가 있다. 그는 2022년부터 지금까지 할머니가 오랜 세월 몸으로 익힌 손맛을 다시금 되새기며 인생을 사는 지혜를 배우고 있다. 계절과 해가 바뀌며 쌓인 맛있는 이야기는 책 ‘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학교’라는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냈다. 할머니와 손녀가 함께 만든 음식 이야기는 보는 이들의 마음의 허기까지 달랜다. 손녀 예하 씨와 할머니 홍순 씨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나누고 싶은, 계절에 순응하며 사는 지혜를 담은 세 가지 요리를 선보인다.


▲완성한 시금치 고구마 부침개.(‘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학교’)
▲완성한 시금치 고구마 부침개.(‘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학교’)

맨날 먹던 나물 말고, 시금치 고구마 부침개

따뜻한 햇살 아래 커다란 고무 통, 그 안에 소복이 쌓인 겨울 시금치, 어릴 적 이야기를 노래해주시는 할머니. 오늘은 무쳐 먹는 나물이 아닌 시금치로 부침개를 만들어볼 거예요. 시금치 다듬는 법, 계절을 느끼는 법부터 배워갈 예정이니, 본인의 속도에 맞춰 따라오세요. 이곳엔 느린 사람도, 빠른 사람도 없답니다.

▲잘 손질한 시금치와 고구마를 반죽에 버무렸다.(‘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학교’)
▲잘 손질한 시금치와 고구마를 반죽에 버무렸다.(‘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학교’)

➊ 시금치는 뿌리 부분에 흙이 많아서 다듬는 과정이 중요해요.

시든 이파리를 정리하면서 흙이 묻은 부분은 칼로 살살 긁어줍니다.

[홍순 씨의 지혜] 귀찮다고 뜯지 말고 꼭 긁어야 해. 뿌리가 제일가는 영양 덩어리야~. 좋은 건 원래 다 손이 많이 가. 꾀부리지 말고, 나를 귀중히 대하며 살라는 뜻이겠지.

➋ 뿌리 쪽에 십자로 칼집을 내면 씻을 때 흙을 더 꼼꼼히 뺄 수 있어요. 이것만 할 줄 알아도 시금치를 맛있게 먹을 수 있어요.

➌ 손질한 시금치를 물로 씻은 후 물기를 털고 채 썬 고구마, 양파와 섞어주어요.

[홍순 씨의 지혜] 씻고 나서 물을 따라 버리잖아? 그때 조금 남은 물을 조금씩 따르면서 보면 남은 흙이 보여. 안 보이면 잘 씻은 거야.

➍ 부침가루와 감자전분을 3대1 비율로 섞어 ➌에 골고루 묻힙니다.

[예하의 도움말] 재료에 가루를 먼저 묻히면 최소한의 반죽으로 얇은 부침개를 만들 수 있어요.

➎ 차가운 물을 조금씩 추가하며 반죽이 시금치에 고루 묻을 정도의 묽기로 만들어줍니다.

➏ ‘이게 잘 뒤집어질까?’ 싶을 정도로 적은 양의 반죽으로 만드는 시금치 고구마 부침개. 예열된 팬에 기름을 두르고 지글지글 노릇하게 구워주면 끝.

[홍순 씨의 지혜] 너무 센불로 구우면 고구마가 안 익을 수 있어. 중약불로 천천히! 빠르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여. 다 때가 있는 거여.

겨울 햇살 아래서 전하는 이야기

겨울에 자라난 시금치는 얼지 않기 위해 단맛을 저장해서 그 맛과 영양이 풍부해요. 겨우내 얼어붙은 내 몸에 선물처럼 챙겨줄 수 있는 재료지요. 달달한 고구마 하나 넣어보자는 홍순 씨의 빛나는 아이디어 덕을 본 오늘. 추운 겨울바람을 이겨낸 시금치와 고구마가 어찌나 달고 맛있던지. 사는 행복이 이런 거라며 홍순 씨와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제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할머니는 전을 구울 때면 식구들 먼저 먹이느라 한두 입 먹고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기 바빴어요. 처음으로 그런 할머니를 붙잡고 나는 말해요.

“우리 천천히 먹자. 음식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우리 둘만 있으니. 한 장씩 구워서 가장 맛있을 때 천천히, 따뜻하게 먹자.”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가만히 전을 바라보다, 이내 나를 보더니 맑게도 웃어요.


▲완성한 무떡의 모습(‘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학교’)
▲완성한 무떡의 모습(‘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학교’)

단단한 무의 달콤한 변신, 무떡

“무를 쫑쫑 썰어서 떡에 넣고 팥 살살 뿌려 쪄 먹으면 입에서 살살 녹아. 가을무 나오면 해줄게.”

할머니의 요리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떡집 30년 차 내공을 지닌 할머니가 무떡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그때 그 한마디가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무떡이 너무 먹어보고 싶었거든요.

▲무떡 만드는 과정.(‘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학교’)
▲무떡 만드는 과정.(‘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학교’)

➊ 쌀가루(약 7컵)를 눈을 만지듯 손으로 잘 비벼 풀어줍니다.

[홍순 씨의 지혜] 방앗간에서 소금 넣고 빻아온 거라 따로 소금을 넣진 않아. 많이 뭉쳤으면 중간 굵기의 체로 한 번 쳐주면 좋고~.

➋ 무를 채 썰어 네 줌 정도 넣어주세요.

➌ 무를 사랑하는 만큼 설탕을 넣어 잘 버무려줍니다.

“사랑하는 만큼이면 얼마큼이여?” “나도 몰라. 즉당히~.”

[홍순 씨의 지혜] 모든 떡의 설탕은 마지막에 넣어야 해. 찌기 직전에 휘리릭. 안 그러면 녹아서 안 좋아. 한 꼬집 먹었을 때 살짝 달달하다 싶으면 간이 맞는 거니 차차 감을 만들어보라고~.

➍ 찜기에 면포를 깐 후 팥고물을 빈틈없이 고르게 펼칩니다. 왠지 낯선 무와 떡의 만남을 상상하면서요.

➎ 펼친 고물 위에 버무린 무를 올리고 위에 다시 팥고물 이불을 덮어주어요.

[홍순 씨의 지혜] 고물을 뿌릴 때는 내 손이 분무기다~ 생각하고 뿌려. 골고루 적당하게.

➏ 사이사이 깊은 정성이 숨어 있는 떡을 불 위에 올려 중강불로 20~25분 정도 쪄줍니다. 젓가락으로 폭 찔렀을 때 가루가 묻어나지 않으면 잘 쪄진 거랍니다.

[홍순 씨의 지혜] 이 무떡은 잘 상하지도 않아. 요상하지. 요상하기야 듬뿍 넣은 무는 또 어떻고! 많이도 넣었다 싶었는데, 숨이 죽어버리면 다 어디 갔나 싶어~.

나다운 모습을 찾아가는 길

“나를 닮은 채소가 있을까?”라는 질문에 갖가지 채소를 떠올리다 끝내 제 머릿속에 남은 건 ‘무’였어요. 매운맛이 강한 여름무는 맛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냉장고에 하나씩 쟁여두는 채소이고, 인삼보다 좋다는 가을무는 겨우내 저장해서 먹는데 단단하고 달콤함이 진해요. 여름에 매웠던 그 맛이 어디 갔나 싶을 정도죠.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있어도 계절 따라 익어가는 무가 저와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대단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나아가는 일. 걸으며 올려다본 하늘과 땅에서 요리를 상상하고, 단단했던 무가 달콤해지는 계절을 느끼는 일. 겉보기엔 그대로이고,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도 사실은 나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우리네 삶과 무가 닮지 않았나요?


▲늙은 호박국을 올린 한상차림.(‘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학교’)
▲늙은 호박국을 올린 한상차림.(‘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학교’)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맛, 늙은 호박국

“늙은 호박으로 국을 끓여 먹었다고?” 죽도 아니고 떡도 아니고 늙은 호박국이라니. 늙은 호박처럼 슴슴한 맛일까, 지나온 시절의 빛바랜 향이 날까.

“그럼! 할머니가 자주 해주셨던 음식인데 갑자기 생각이 나더라. 포옥 끓여서 밥이랑 비벼 먹었어”라고 말하는 홍순 씨의 두 눈이 늙은 호박에 머물러요.

“정말 먹어보고 싶어. 알려줄 수 있을까요, 홍 선생님?”

“내가 직접 만든 적이 없어. 하도 어릴 때이기도 하고.”

머쓱한 표정의 할머니에게 “그 맛을 더듬으면서 해보는 거지 뭐. 나는 할머니의 그 시절 그 맛이 궁금한 거거든. 완벽한 요리법이 아니라!”라고 말했어요.

▲늙은 호박국 만드는 과정(‘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학교’)
▲늙은 호박국 만드는 과정(‘할머니와 나의 사계절 요리학교’)

➊ 냉장고에 숨어 있던 늙은 호박을 꺼내 물러진 부분은 도려내고, 껍질을 벗겨 먹기 좋은 크기로 깍둑썰기를 해주세요.

[홍순 씨의 지혜] 껍질 벗길 때는 꼭 면장갑 끼고 해. 씨앗은 잘 씻어서 볶아 먹어도 좋아.

➋ 연한 채수와 생수를 부어 섞어줍니다.

[예하의 도움말] 할머니의 기억대로라면 맹물로만 끓여야 하지만, 연한 채수(무말랭이, 양파, 버섯)로 은은한 밑바탕을 칠해주었어요. 정해진 게 없다는 게 요리의 매력이니까요.

➌ 끓는 물에 늙은 호박을 퐁당! 주황 보석들을 와르르 쏟아줍니다.

➍ 뚜껑을 닫고 한 김 폭 끓이면 되는데요. 10분 정도 끓이면 숟가락이 푹 들어간답니다.

[홍순 씨의 지혜] 숟가락 들어간다고 다 으깨지 마. 끓이다 보면, 먹다 보면 금방 으깨져. 추억 속 호박국은 먹으면서 으깨는 재미가 있었거든.

➎ 호박이 어느 정도 익었다 싶으면 다진 마늘 1큰술과 적당량의 소금으로 간을 맞춥니다.

[예하의 도움말] “할머니, 국이니까 간장을 쓰면 안 돼?” “호박죽에 간장 넣는 거 봤어? 안 어울리자네. 음식마다 어울리는 짝꿍이 있는 겨.” 소금으로 간을 맞춰주세요!

➏ 대파도 한번 넣어보라는 홍순 씨의 말에 따라 송송 썰어 넣고, 다 끓은 국 위에 들기름을 사르르. 그리운 음식에 그리운 향을 녹여내요.

[홍순 씨의 지혜] 나 어릴 때는 할머니가 가마솥에 호박을 엄~청 많이 넣어서 폭폭 끓여주셨어. 그 냄새가 나.

잊어가던 기억을 나눈다는 건…

요즘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음식들과 비교하면 존재감 없고 심심한 늙은 호박국.

하지만 호박의 은은한 달콤함과 깔끔한 맛은 얼마든지 먹어도 된다고, 마음도 속도 편한 음식은 이런 거라고 말해주는 기분이었어요.

꼭 몇 번이고 봤던 것처럼, 이날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맛있게 그릇을 비웠어요.

“옛날엔 마늘도 파도 없고 그냥 호박 몇 덩이, 소금이 전부였어. 이따시만 한 냄비에 국을 끓이다가 마지막에 주걱으로 팍팍 으깨서 한 접시씩 주시더라고. 이걸 너랑 먹어볼 줄은 몰랐는데…. 멋진 일이구나, 잊어가던 맛을 나눈다는 건.”


▲할머니 홍순씨와 섬에 놀러가서 찍은 사진. (이예하)
▲할머니 홍순씨와 섬에 놀러가서 찍은 사진. (이예하)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들에게…

추운 날씨에 잘 지내고 계신가요? 할머니와 1년만 지내려고 생각했던 저는 어느새 네 번째 겨울을 진주에서 맞이하고 있어요.

“음식은 마음으로 빚어야 해.”

할머니는 혹시라도 제가 잊을까 봐 걱정인지 “아무리 좋은 재료라도 정성이 들어가지 않으면 음식이 완성되지 않는다”고 매번 말씀하세요.

마음으로 빚어 더욱 든든한 음식으로 배를 가득 채우고 바뀐 계절에 맞춰 옷장을 정리합니다.

지난 한 해도 돌아보고 다가올 한 해도 부탁하는 의미로 말이죠. 옷은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친구잖아요. 매년 혼자 호다닥 해치우던 옷장 정리를 올해는 할머니와 함께 했습니다. 도와주시진 않았고요. 제 옆에서 쇼핑을 하셨어요. 여기가 예하네 옷 가게냐고, 공짜라는 소문을 듣고 왔다나요. 한 겹, 두 겹, 세 겹…. 할머니의 몸에 두른 옷이 두툼해질수록 저희 웃음소리도 커졌습니다.

할머니와 지내다 보면 이런 순간이 많아요. 할머니와 손녀가 아닌, 그냥 소녀들의 시간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요. 주름이 지는 건 몸이지 마음이 아니라는 걸 시간이 지날수록 깨닫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도 저희와 같은 마음이길 바라요.

-진주에서 예하 드림

*추신 : 홍순 씨가 그러시는데 잘 늙고 싶으면 좋은 친구를 만나고, 또 좋은 친구가 되어주랍니다. 복은 주고받는 거라 언젠가는 돌아올 거래요. 밥 잘 챙겨 먹고 건강하시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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