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매 어르신의 하루는 흔히 잿빛으로 묘사된다. 기억은 희미해지고, 식사는 점점 줄어든다. 그 식탁 앞에서 가족과 돌봄 종사자들은 불안과 무력감을 동시에 느낀다. 하지만 일본의 만화가 사쿠라 이사미는 바로 그 순간을 다른 시선으로 포착했다. ‘하루와 추억을 함께하는 밥(ハルと思い出めぐりごはん)’은 음식을 통해 되살아나는 기억, 그리고 존엄을 회복하는 노인의 삶을 따뜻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하루와 추억을 함께하는 밥’은 치매 어르신이 생활하는 그룹홈(요양원)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새로 부임한 신입 조리사 아마노 하루키. 그는 원래 식당에서 일했지만, 고령자 시설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일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한 번에 많은 양을 내놓는 요식업과 달리, 이곳에서는 “많이 먹지는 못해도 맛있게 먹고 싶다”는 어르신들의 작은 소망을 존중하는 일이 중요했다.
작품 속 ‘추억의 밥상’은 누구나 한 번쯤 먹어본 적 있는 익숙한 가정식이다. 어르신들의 남은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식탁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따뜻한 매개체다. 가족과 돌봄 종사자의 “조금이라도 더 드셨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리고 음식을 먹는 즐거움을 되살리기 위한 조리법의 작은 배려들이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이 이야기는 신입 조리사가 어르신과 교감하며 성장해 가는 이야기이자, 식탁 위에서 존엄과 기억을 되찾는 사람들의 기록인 셈이다.
작품의 주인공 이름은 아마노 하루키다. 현장에서는 친근하게 ‘하루(ハル)’라 불린다. 일본어로 ‘하루’는 ‘맑음, 청명함’을 뜻하며, 동시에 ‘봄’을 연상시키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이름과 같이 봄 바람처럼 어르신들의 기억과 삶을 따뜻하게 비추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 작품은 단순한 한 사람의 창작이 아니라 협업의 산물이다. 작가 사쿠라 이사미(佐倉イサミ)가 그림과 이야기를 맡았고, 영양사 사나다 이쿠코(真田育子)가 레시피와 영양학적 검토를 담당했다. 여기에 출판사 메디컬 케어 서비스社 편집부가 치매 케어 현장에서 얻은 경험을 더했다.

작가 사쿠라 이사미는 전작인 ‘공주 할머니와 기사’가 이 작품을 제안 받은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노년의 할머니와 그녀 곁을 지키는 반려견 ‘나이트’의 일상을 그린 작품으로,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시선으로 노인과 반려동물의 유대를 담아냈다.
“이 작품을 제안받았을 때, 자신이 어릴 적 고향에서 느낀 설렘을 떠올랐어요. 빽빽하게 진열된 과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거든요. 영양가가 많은 음식은 아니겠지만, 마음을 채우기에는 충분했죠. 그래서 ‘음식에 얽힌 추억’은 나이를 불문하고 힘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편집부는 음식이 치매에 많은 긍정적 영향을 준다고 믿고 있었다. 치매 케어에서 활용되는 ‘회상법(回想法)’은 추억을 자극해 환자의 기억과 정체성을 지켜주는 심리요법이다. 편집부는 “음식이 회상을 불러올 때, 입소자의 삶은 새롭게 색채를 띤다”고 했다. 이 때문에 작품 속 ‘추억의 레시피’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기억을 연결하는 열쇠로 등장한다.
이 영향력을 뒷받침하는 실제 사례도 있다. 편집부는 평소 식사량이 거의 없던 80대 후반 여성 어르신이 초밥 생일상을 받자, “정말 좋아한다”며 청년도 힘든 초밥 20개를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먹어치운 광경은 매우 인상적이라고 했다. 추억의 음식은 삶을 깨우는 힘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사쿠라 씨는 이런 장면들을 포착하면서도 무겁게 다루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치매라는 소재는 자칫 독자에게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치매에도 여전히 자기만의 기억과 이야기가 있다는 걸 존중하며 그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언제나 노인의 ‘귀여움’이 배어 있다. 장난기 있는 표정, 천진한 웃음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영양사 사나다 씨는 치매 어르신의 식탁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다. 그는 “많이 먹을 수는 없지만 맛있게 먹고 싶다”는 욕구가 음식을 통한 돌봄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작은 소망이라도 존중하는 것이 돌봄입니다. ‘맛있었다, 또 먹고 싶다’라는 말은 그 자체로 삶의 활력이 되고, 건강 수명의 연장으로 이어집니다.”
편집부도 비슷한 의견을 덧붙였다. “외적 요소, 예를 들어 식사를 남기지 않는가, 식욕이 있는가는 당연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요리 자체를 공들여 준비하면 식욕을 불러일으키고, 식사 경험이 즐거워집니다. 실제로 저희 시설에서는 직원이 입소자와 함께 음식을 만들기도 합니다. 요리라는 경험을 함께하는 것이 돌봄의 핵심이라고 믿습니다.”
치매를 무겁지 않게, 그러나 존중하며
작가 사쿠라 씨는 처음 치매라는 주제를 맡았을 때, 깊은 고민에 빠졌다. “너무 무겁게 그리면 독자들이 힘들어하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하지만 돌봄 경험이 있는 편집자와 긴밀히 소통하면서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편집부는 치매가 가진 어두운 이미지를 개선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치매 진단은 흔히 ‘삶의 끝’처럼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여전히 자기답게 살아가는 분들을 자주 만납니다. 우리는 그 현실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치매를 단순히 병으로만 다루지 않는다. 여전히 살아 있는 개성과 존엄을 담아내며, 가족과 독자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치매가 있는 삶’을 이야기로 만든다.
음식이 작품의 메인 매개체인 만큼 요리의 선정이나 재료 소개도 중요하다. 작품에는 전문기관의 조리법 감수가 진해됐다. 편집부는 “영양과 섭취 용이성까지 고려한 레시피를 제공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초반 1~3화에서는 식품회사와 협업해, 고령자에게 부족하기 쉬운 영양소를 채우면서도 슈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했다.
영양사 사나다 씨는 “고령자뿐 아니라 젊은 세대도 ‘만들어 보고 싶다’라고 느낄 수 있는 레시피가 되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는 단지 회상의 장치에 그치지 않고, 세대 간 대화를 이끌어내는 매개가 되었다.
출간 후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작가 사쿠라 씨는 “SNS에서 ‘이런 시설에서 일하고 싶다’는 돌봄 종사자의 메시지를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편집부는 특히 4화 ‘타키오카 씨의 냉국과 유부초밥’을 인기 에피소드로 꼽았다. 작품 4화 ‘타키오카 씨의 냉국과 유부초밥’은 치매 돌봄 현장의 복잡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은 생일을 맞은 입소자를 위해 좋아한다고 들은 냉국과 유부초밥을 준비한다. 그러나 당일 가족은 “그건 본인의 취향이 아니라, 아버지(남편)가 좋아하던 음식”이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한 착오가 아니다. 치매로 인해 ‘내가 좋아하는 음식’과 ‘내가 가족에게 늘 해주던 음식’의 경계가 흐려진 결과다. 시설은 어르신의 추억을 ‘본인의 기호’로 이해했고, 가족은 과거의 기억을 근거로 반박했다. 그 사이의 간극은 과거와 현재, 가족의 기억과 당사자의 현재 욕구가 어긋나는 돌봄의 현실을 드러낸다.
음식은 삶의 흔적 담은 정체성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은 개인의 개성이자 삶의 흔적입니다.”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음식은 단순히 영양을 채우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역사와 정체성, 삶의 흔적을 담고 있다. 그리고 치매라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나’라는 존재를 증명하는 언어가 된다. 영양사 사나다 씨 역시 “원하는 음식을 먹고, 맛있다고 느끼는 경험이야말로 존엄을 지키는 순간”이라고 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돌봄의 본질과 닿아 있다. 돌봄은 화려한 시설이나 제도로만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노인의 ‘작은 바람’을 존중하는 마음, “많이 먹지는 못해도 맛있게 먹고 싶다”는 말에 귀 기울이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사쿠라 이사미의 만화는 독자에게 묻는다. 우리는 노인의 식탁 앞에서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는가. 작은 한 끼의 기억이 삶을 빛나게 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그 기억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라고 말이다. ‘하루와 추억을 함께하는 밥’은 만화지만, 동시에 치매 돌봄 현장을 기록한 르포이고, 음식과 기억이 만들어내는 인간적인 메시지인 셈이다.

▲사쿠라 이사미 작가는?
도쿄에 거주하는 만화가로, 술과 손수건, 동물을 좋아한다. 대표작으로는 노년과 반려견의 따뜻한 일상을 그린 ‘공주 할머니와 기사(원제: 姫ばあちゃんとナイト)’(전 2권), 일상 속 달콤한 즐거움을 담은 ‘거실의 스위츠 가든’(전 3권, KADOKAWA), 캠핑을 소재로 한 ‘포근포근 캠프’(전 5권, 투 버전즈), 청춘의 고독을 다룬 ‘고독 모라토리엄’(소년화보사, 연재 중) 등이 있다.
▲메디컬 케어 서비스社는?
1999년 사이타마에서 창립된 메디컬 케어 서비스社(Medical Care Service Inc., MCS)는 일본 전역 370여 개소의 돌봄 시설을 운영하는 치매 돌봄 전문 기업이다. 그룹홈 ‘아이노이에(愛の家)’를 비롯해 유료 노인홈 ‘앙상블‘, ‘파미뉴’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전개하며, “치매를 넘어선다”를 브랜드 메시지로 내세운다. 2022년부터는 돌봄 경험과 노하우를 살려 출판 사업도 시작했다. 치매·노인복지 관련 도서와 건강·예방 콘텐츠를 발간하며, 일반 독자와 돌봄 종사자에게 실질적인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노인홈 운영과 개발 컨설팅 사업을 펼치며, 글로벌 고령사회 대응에도 나서고 있다.
이번 작품 ‘하루와 추억을 함께하는 밥’에서는 출판과 기획을 맡아 현장의 치매 케어 경험을 작품에 제공했으며, 그룹 내 ㈜그린푸드를 통해 레시피 감수 체계도 마련해 실제 고령자에게 적합한 식문화 콘텐츠로 완성시켰다. 회사 측은 작품 ‘하루와 추억을 함께하는 밥(ハルと思い出めぐりごはん)’은 아마존을 통해 한국에서도 구매 가능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