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가 최악의 불황이라는 상황에서 영화 ‘좀비딸’은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올해 최고의 성적을 냈다. 그런데 ‘좀비딸’에는 이른바 ‘K-좀비’라 불리며 전 세계인을 열광케 한 한국 좀비물의 특별함이 엿보인다. 어떤 차별점이 있는 걸까.

‘좀비딸’, 좀비를 바라보는 가족의 시선
‘워킹데드’ 같은 전형적인 서구의 좀비 장르에서는 좀비와 사람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존재한다. 좀비에게 물려 좀비로 변한 존재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심지어 그게 가족이라 해도 그렇다. 따라서 그들은 순식간에 제거 대상이 된다. 총에 맞아 죽고 폭탄이 터져 사지가 찢기고 차에 부딪혀 뼈가 부러져도,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책임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존재다. 그래서 서구의 좀비 장르를 보면 무차별 대량 살육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는 대상으로 좀비라는 괴물을 만든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전 세계를 매료시킨 한국형 좀비 장르는 이른바 ‘K-좀비’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서구 좀비 장르와는 차별되는 점이 있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을 보라. 부산으로 가는 KTX에 창궐한 좀비들의 무차별 공격에 맞서는 시민들의 사투는 ‘워킹데드’의 장면과 그리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영화가 전개될수록 좀비를 향한 연민 가득한 시선을 보탠다. 내 옆에서 함께 싸웠던 동료가 좀비가 된다. 딸을 살리기 위해 좀비가 된 아빠는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다. 처음에는 한 떼의 무리이자 집단으로 뭉쳐 있어 개별적 존재는 무감하게 느껴졌던 좀비들이 뒤로 가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누군가의 아빠였고 엄마였다는 걸 알고 그 좀비를 다시금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포로 시작해 액션으로 펼쳐졌던 영화는 뒤로 갈수록 가족드라마와 휴먼드라마의 색깔이 더해진다. 좀비에게까지 따뜻한 가족적인 온정을 느끼다니! K-좀비의 독특한 차별점이다.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올해 최고 성적을 거둔 영화 ‘좀비딸’은 좀비라는 이색적인 존재에게도 던지는 가족주의적 관점을 코미디로 풀어낸 좀비물이다. 좀비 바이러스로 아비규환이 된 세상에서 좀비가 된 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아빠의 코믹하면서도 눈물겨운 사투를 그렸다. 동물원 맹수 전문 사육사인 정환(조정석)이 좀비가 된 딸 수아(최유리)의 ‘사회화 훈련’을 시킨다는 황당하지만 웃음이 빵 터지는 설정이나 이 사실을 알게 된 할머니나 아빠의 친구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이를 돕는 훈훈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슬아슬한 상황을 슬쩍 넘어서는 순간 긴장감이 풀리며 웃음이 터지듯이 좀비의 공포를 애써 부정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특별한 가족과 이웃의 이야기로 공포는 웃음으로 바뀌는데, 이것이 ‘좀비딸’의 기발한 코미디 공식이다.

좀비라고 다 같은 좀비가 아니다
‘좀비딸’에서 정환이 좀비가 된 딸을 끝까지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딸이 살아 있다는 증거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평소 춤을 좋아했던 딸이 음악이 나오자 어색하게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다. 그걸 춤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아빠는 반색한다.
“기억이 있으면 좀비가 아냐. 살아 있어.” 애써 딸이 살아 있다고 강변하는 정환의 모습은 우습지만 한편으로는 짠하다. 갑작스러운 좀비 세상에서 좀비들은 의식을 잃은 채 누군가를 물어뜯는 본능만 살아남은 괴물처럼 보이지만, 아빠에게 딸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좀비가 된 딸을 변화시키려 하고, 이런 노력으로 딸이 변화한다. 여기에는 물론 정환으로 대변되는 아빠의 부성애를 강조하고 있지만 사회적인 의미도 담겨 있다. 바이러스에 감염돼 좀비 같은 이상 증세를 보일지라도 그것만으로 섣불리 괴물이라는 낙인을 찍을 수 없다는 이야기. 오히려 낙인을 찍음으로써 괴물이 된다고나 할까. 이 지점에서 ‘좀비딸’ 같은 코미디는 사회극 혹은 부조리극의 색깔을 띠게 된다.

실제로 서구의 좀비물이 공포나 액션 스릴러로 그려지지만, 한국의 좀비물은 사회를 풍자하는 부조리극 같은 성격이 짙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배경의 좀비물 ‘킹덤’을 보면, 두 부류의 좀비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권력자가 변한 좀비와 배고픈 백성들이 변한 좀비가 그 두 부류다. 전자가 적통을 따지며 핏줄에 집착하고 그 혈연을 통해 끝없는 권력 욕구를 보여주는 좀비들이라면, 후자는 그저 먹을 것이 없어 끝없이 배고픔을 호소하는 불쌍한 좀비들이다. 이 대비를 통해 ‘킹덤’은 양극화된 사회의 너무나 극단화된 욕망의 괴리를 꼬집는다. 배가 불러도 더 많은 걸 탐하는 권력자들의 욕망과 배가 고파도 먹을 것조차 없어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욕망이 그것이다.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학교를 배경으로 그린 좀비 학원물 ‘지금 우리 학교는’은 좀비로 변한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의 대비를 통해 한국의 치열한 입시 경쟁 시스템을 꼬집는다. 물론 이 작품은 좀비 액션 스릴러다. 음악실, 체육관, 도서관, 과학실 등 학교 곳곳에서 그곳의 특성에 맞는 소품을 활용한 좀비와의 대결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또한 이 작품은 좀비가 되지 않으려는 아이들의 사투를 통해 개성을 잃고 획일화돼가는 청소년들의 입시 경쟁 현실을 풍자한다. 좀비처럼 공부만 하는 아이들이나 엇나가 학교폭력을 일삼는 아이들, 그리고 그 폭력의 피해자들을 보다 보면 그걸 중재해야 할 어른의 부재를 실감한다. 그 속에서 학생들은 생각 없는 ‘입시 좀비’처럼 취급받는다. 누구는 1등이고 누구는 꼴등이며 누구는 일진이고 누구는 왕따지만, 서로 물어뜯는 경쟁 속에서 모두가 ‘평준화된 좀비’로 전락한 것이다. 하지만 ‘절비(절반만 좀비)’라 불리는 최남라(조이현) 같은 ‘무증상 감염자들’을 통해 작은 희망의 가능성을 남겨놓는다. 무한 경쟁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학교폭력을 일삼던 윤귀남(유인수)이 끝까지 타인을 물어뜯으며 좀비보다 더 무서운 ‘진짜 좀비’가 되는 반면, 절비 최남라는 변하려는 자신을 억누르며 친구들 편에서 그들을 돕는다. K-좀비에서 좀비들은 다 같은 좀비가 아니다. 선택으로 달라질 수 있는 존재다. 가족·친구의 선택을 받거나 혹은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진짜 살아 있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가
좀비는 특이한 존재다. 살아 있지만 산 것이 아니고, 죽었지만 그렇다고 죽었다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를 그 존재 자체로 되새기게 만든다. 살아 있다는 건 단지 생물학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움직이고 있다 해도 ‘죽었다’고 볼 수 있는 삶의 형태가 있다는 걸 말해주기도 한다.
좀비는 아이티의 민간신앙인 부두교 전설에서 유래했다. 식민지 점령군에 의해 지독한 노예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들은, 좀비라는 ‘정신을 통제당한 노예’를 가장 혹독한 형벌로 여겼다. 그래서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인물에게 부두교 비밀조직은 ‘좀비 처벌’을 내렸는데, 그건 사실상 공동체로부터 배제되어 영구히 노예화되는 형벌이었다.
공동체로부터 배제되면 사실상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죽은 존재가 되는데, 그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노예의 삶으로 좀비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즉 좀비라는 존재는 그냥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살아 있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지 묻는 대목에서 생겨난 것이다.

1968년 조지 로메로 감독은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으로 좀비를 그리면서, 자본주의 세계에서 노예 상태로 소비에 몰두하는 군중이나 미국에서 당대에 벌어졌던 매카시즘으로 대변되는 집단적이고 비이성적인 광풍에 휘둘리는 군중의 삶을 은유했다. 이를 한국적인 특수한 상황으로 가져와 재해석한 ‘부산행’은 질주하는 KTX에서 벌어지는 좀비 떼들과의 사투를 통해 압축성장의 뒤안길에서 그 속도전에 몰개성화돼 앞만 보고 달려온 한국 사회를 풍자했다. ‘킹덤’은 양극화된 사회를, ‘지금 우리 학교는’은 획일화된 입시 경쟁 시스템을 꼬집는다. 조금씩 다른 변주를 해왔지만, 결국 이 모든 좀비 장르의 질문은 하나로 귀결된다. 당신의 삶은 과연 진짜 살아 있는 것인가.
서구의 좀비물은 대체로(모두 그렇다는 건 아니다) 진짜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을 분리해 살아 있지 않은 것들(좀비들)은 제거해도 된다는 배타적인 관점을 드러내곤 했다. 하지만 K-좀비는 ‘좀비딸’이 보여주는 것처럼 좀 더 ‘선택적’이다. 죽은 것처럼 보여도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버리지 않는다. 여기에는 망자조차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처럼 여기는 한국인 특유의 끈끈한 가족애가 엿보인다. 기억하는 한 살아 있다는 믿음은 한국인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말해준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남는다는 건 죽음을 뛰어넘는 일이다.
또한 집단주의 문화의 결집력을 통해 압축성장을 이뤄낸 한국인들에게 K-좀비는 그 뒤안길에 놓인 많은 희생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몰개성화로 희생됐던 이들을 향한 풍자적 헌사랄까. 그 희생을 애도하면서 K-좀비는 전 세계인에게 말하고 있다. 이제 진짜 살아 있는 삶을 살아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