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까지, K무속의 탄생

입력 2025-09-03 07:00

[영상 속 세상] 무속은 어떻게 전 세계를 매료시켰을까

최근 전 세계에서 가장 화제인 콘텐츠는 바로 ‘케이팝 데몬 헌터스’다. 미국 소니 픽처스에서 제작한 작품이지만, K팝과 무속 같은 한국 문화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무엇이 이런 열광을 만들어낸 걸까.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걸그룹 ‘헌트릭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걸그룹 ‘헌트릭스’.


‘케이팝 데몬 헌터스’, K팝과 K오컬트 묶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헌트릭스’를 외치는 들뜬 관객들의 환호성으로 시작한다. 관객들은 저마다 손에 응원봉을 들고 곧 막이 오를 K팝 걸그룹 헌트릭스의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 환호하는 관객 중에는 ‘미나 내꼬’ 같은 한글로 적은 플래카드를 든 이들도 보인다. 그 위로 깔리는 내레이션은 헌트릭스라는 걸그룹이 사실은 ‘데몬 헌터스’라는 걸 드러낸다.

“세상은 너희를 팝스타로 알겠지만 너희는 훨씬 더 중요한 존재가 될 거다. 너희는 헌터가 될 거야.”

그런데 이어지는 다음 장면은 놀랍게도 KBS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서 봤을 법한 한국의 옛 마을과 그 마을을 덮치는 악령들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극의 배경이며, 악령들도 방망이를 든 도깨비와 갓을 쓴 저승사자 같은 존재다. ‘귀마’가 보낸 악령들에 의해 사람들이 영혼을 빼앗기며 고통받을 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데몬 헌터스가 등장한다. 이들 역시 우리에게 익숙한 무녀의 모습이다. 무녀의 옷을 입고 굿을 할 때 쓰는 무구들을 들었다. 그들이 악령을 물리치는 방법은 다름 아닌 굿을 하는 것인데, 마치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악령이 깃들어 고통받는 자들을 춤과 노래(굿)로 치유하고, 사람들의 염원을 묶어 세상을 지킬 방패 ‘혼문’을 만들어내는 일. 데몬 헌터스가 해온 일은 고스란히 이들이 현재 위장해 살고 있는 K팝 걸그룹의 일로 연결된다. 춤과 노래로 관객들을 하나로 묶고, 삶에 지친 그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민화 ‘호작도’에서 영감을 얻은 캐릭터 ‘더피’.
▲민화 ‘호작도’에서 영감을 얻은 캐릭터 ‘더피’.


이처럼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한국의 무당이 등장해 귀신들을 물리치는 이른바 K오컬트에, 최근 전 세계적으로 열광하는 K팝을 하나로 묶어냈다. 무녀의 굿을 통해 영혼을 치유하는 이들을, K팝이라는 세계에 들어와 유대감을 통해 스스로 구원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팬덤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공개되자마자 글로벌 OTT 순위 사이트 플릭스 패트롤에서 글로벌 1위를 기록하며 넷플릭스 사상 가장 많이 본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영화로 기록됐다. 소재가 된 K팝 OST의 반응도 폭발했다. 영화 속 걸그룹 헌트릭스가 부른 ‘골든(Golden)’이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100에서 2위를 차지했고(8월 3일 기준), 총 8곡이 3주 연속 핫100에 동시 진입했다. 블랙핑크처럼 실제 K팝 걸그룹도 이루지 못한 성과를, 무속을 재해석한 콘텐츠 속 ‘가상의 걸그룹’이 만들어낸 것이다.


▲헌트릭스의 라이벌 그룹 ‘사자보이즈’.
▲헌트릭스의 라이벌 그룹 ‘사자보이즈’.


무속과 한국 귀신의 독특함, K오컬트의 매력

무속은 최근 K콘텐츠 업계에서 뜨거운 소재로 떠올랐다. 서구의 오컬트와 차별화된 K오컬트라는 장르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건 최근 약 10년간 벌어진 일이다. 나홍진 감독의 ‘곡성’(2016)이 무속인들의 굿이 가진 에너지를 영화 속으로 옮겨오면서 K오컬트의 문을 본격적으로 열었고, ‘손 the guest’(2018) 같은 시리즈가 무속과 범죄 스릴러를 엮어내는 색다른 시도로 주목받았다. 이후 연상호 감독의 ‘방법 : 재차의’(2020), 김은희 작가의 ‘악귀(2023), 그리고 일찍이 한국형 오컬트를 ‘검은 사제들’(2015)로 시도했던 장제현 감독이 무속인과 풍수사, 장의사까지 등장시켜 천만 관객을 동원한 ‘파묘’(2024)까지 그 계보가 이어진다.

K오컬트의 연원은 더 위로 가면 ‘전설의 고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여름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TV를 보게 만들었던 구미호 이야기나, “내 다리 내놔”로 유명한 덕대골 이야기, 고을 원님이 억울한 귀신의 한을 풀어주는 아랑 전설 같은 것들이 독특한 K오컬트의 유전자다.

K오컬트가 독특한 매력을 갖는 건 그저 무속인 같은 토속적인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한국인이 갖고 있는 사후 세계나 귀신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이 진짜 매력이다. 기독교적 선악 구도 세계관을 가져온 서구의 오컬트 장르는 악령을 퇴치해야 할 존재로 여긴다. 하지만 우리에게 귀신은 그런 퇴치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원’을 풀어줘야 할 대상으로 그려진다. 아랑 전설에서 새로 부임한 사또가 원귀의 한을 풀어 저세상으로 보내주는 이야기는 한국의 귀신 이야기가 현실과 얼마나 밀착해 있는지 잘 보여준다.

현실에서 억울한 죽임을 당한 귀신의 사연을 듣고, 그 현실의 정의를 바로 세움으로써 귀신을 천도하는 것. 이처럼 우리는 귀신을 아무 이유 없이 인간을 해코지하는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대신 현실의 잘못된 무언가가 탄생시킨 ‘한의 존재’로 본다.


▲KBS 2TV ‘전설의 고향’.
▲KBS 2TV ‘전설의 고향’.


공포를 넘어 액션·멜로로 확장하는 장르

저마다 인간적인 사연이 있어 귀신을 그저 오싹한 존재로만 보지 않는 K오컬트의 독특한 관점은 새로 탄생한 이 장르가 공포를 넘어 액션, 멜로까지 확장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무녀들과 악령들이 등장해 싸우는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오컬트 장르 특유의 공포보다는 액션과 멜로에 더 가깝게 그려진다. 그것은 물론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적 특성이 더해진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한국인의 귀신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에서 비롯된 면이 있다. 이 작품에 헌트릭스의 라이벌 그룹으로 등장하는, 귀마에 영혼을 판 ‘사자보이즈’의 진우라는 인물을 향한 시선이 그렇다. 진우는 헌트릭스를 위협하는 악령이지만 가난과 굶주림 때문에 악령이 된 사연을 갖고 있다. 그래서 헌트릭스의 리더 루미를 위기에 빠뜨리기도 하고 루미와 달달한 멜로 관계를 이루기도 한다. 끝내는 루미를 위해 희생하며, 이로 인해 구원받는 존재로 그려진다. 귀신을 그저 배척하는 존재로만 보지 않는 우리의 관점을 부지불식간에 투영한 것이다.

귀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만큼 최근 무속인을 소재로 하는 콘텐츠들은 공포를 넘어 멜로로까지 확장되는 발랄함을 보인다. SBS 사극 ‘귀궁’은 영매의 운명을 거부하는 무녀와 그녀의 첫사랑 몸에 갇힌 신적 존재 이무기가 왕가에 원한을 품은 팔척귀와 싸우는 이야기다. 이 과정에서 무녀와 이무기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멜로의 서사가 들어 있다. 즉 무녀와 이무기의 멜로는 거부하던 신을 무녀가 받아들이는 ‘신내림’을 발랄한 사랑 이야기로 재해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방영한 티빙의 ‘견우와 선녀’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악귀에 의해 죽을 운명을 가진 소년과 이를 막으려 스스로 인간 부적이 된 MZ 무당의 오컬트적인 이야기를 발랄한 청춘 멜로로 풀어낸다. MZ 무당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친숙해진 무속은 무속인이 연애의 주인공이 되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게 만들었다. SBS 예능 ‘신들린 연애’처럼 실제 무속인들이 등장해 운명과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독특한 관전 포인트를 만든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나온 배경도 무속을 바라보는 대중의 관점 변화 덕분이다.


▲SBS ‘신들린 연애2’.
▲SBS ‘신들린 연애2’.


한국인 뿌리 다루는 이민자의 독특한 관점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미국의 소니 픽처스에서 제작했으니 엄밀히 말하면 미국 작품이다. 하지만 K팝과 무속은 물론이고 한국 음식이나 거리, 한글, 목욕탕이나 한의원 같은 한국 문화를 진심으로 고증하고 재연해낸 것이 성공 요인이다. 이 점은 이 작품을 그저 미국 작품의 성공으로만 볼 수 없게 만든다.

이 작품을 기획하고 감독한 메기 강이나 아트디렉터 다혜 셀린 김 같은 한국인 이민자 아티스트들의 독특한 관점이 들어 있다. 악령과 헌터의 피를 반씩 물려받은 루미라는 주인공이 탄생한 건 그래서다. 루미가 정체성을 고민하다 “나는 나”라고 자신을 드러내는 장면은, 한국계 캐나다인 메기 강 감독이 이민자로 자라며 스스로 정체성을 찾아냈던 과정이 담겨 있다. 그녀는 이민자로 살면서 한국의 문화를 다뤄보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속인이라는 정체를 숨긴 채 악령과 싸우는 멋진 여성 캐릭터를 구현했고, 정체를 숨기는 존재로 전 세계적인 열광을 만들고 있는 K팝 아이돌을 떠올렸다.

여기서 이민자라는 관점으로 바라본 한국 문화의 독특함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이라면 우리의 문화를 드러내는 데 적당한 거리와 균형을 유지하기가 오히려 어려웠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민자의 관점은 다르다. 그들은 한국 문화를 향한 진심 어린 그리움과 존중을 담으면서도, 지나치게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치우치지 않는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다. 그것이 글로벌한 공감대를 이끌어낸 중요한 요인이다. 그래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공은 현재 늘어나는 글로벌 협업과 이를 어떤 방식으로 전개해야 글로벌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는가에 관한 중요한 사례이기도 하다.

문화 다양성이 시대의 코드가 된 현재, 경계는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벽이 아니라 오히려 두 문화가 교류하는 소통의 장이 되고 있다. 이민자, K오컬트, 무속, K팝…. 경계를 허무는 다양한 존재나 서사, 장르가 최근 유독 주목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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