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 아침 목소리 훈련으로 하루를 여는 사람들이 있다. 단어가 바로 떠오르지 않거나 말끝이 흐려지고, 긴 문장을 끝까지 이어가기 힘들어진 나이. 누군가는 이런 변화를 ‘늙었다’는 신호로 받아들이지만, 누군가는 그 순간을 ‘말을 다시 배우는 계기’로 삼는다. 중앙대학교 미래교육원 명품성우 과정은 이렇게 모인 시니어들이 다시 마이크 앞에 서는 곳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은퇴 이후에도 목소리로 세상과 연결되고 싶다는 마음.
이 나이니까 할 수 있는 일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서울 모처의 녹음실을 찾은 날, 중앙대학교 미래교육원 ‘명품성우’ 과정 수강생들은 대본집을 펼쳐놓고 연습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방금 녹음을 마친 오디오 파일에 귀를 기울이며 서로의 연기에 칭찬과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2020년 처음 문을 연 이 과정은 ‘시니어 명품성우’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점차 연령대의 폭을 넓혀왔다. 성우 경력 30년 이상인 홍승표 대표강사를 비롯해, 목소리만 들어도 “아, 이 사람!” 하고 알 만한 최수민 성우, 배한성 성우, 이연희 성우 등이 특강을 맡아왔다.
처음 이 과정을 ‘시니어’를 중심으로 운영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나이 들수록 말하기 습관이 굳어 개선이 어렵고, 발음·호흡 및 순간적인 단어 선택의 어려움이 일상 대화에서 자신감을 떨어뜨린다는 문제의식이다. 홍승표 강사는 “나이 들수록 말하기 습관이 굳어져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이 시기에 의식적으로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성우 교실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나 말하기의 문제점을 고치려는 사람들 또는 평소 목소리나 발음이 좋다는 칭찬을 들어봤던 사람들이다. 대부분 자신의 목소리를 도구로 삼아 사회에서 새롭게 쓰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찾아온다.
인터뷰에 응한 수강생은 대부분 4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이다. 수강생 이명희 씨는 지난해 환갑을 지났다. 동화 속 먹구름과 냄비 등 생전 생각해본 적도 없는 캐릭터가 되어 목소리를 연기하는 경험은 주부로 살아왔던 그에게 새로운 자극과 활력이 됐다. “우리 나이 또래도 괜찮지만, 더 어린 분들부터 훨씬 선배들까지 다양한 세대가 섞여야 수업이 더 재미있다”며 활짝 웃었다.
이번 기수의 최고령 수강생은 김영아 씨다. 1948년생인 그는 무용을 전공한 교사 출신으로, 학창 시절에는 학교 방송반에서 활동하며 마이크와 친했던 학생이었다. 그는 “요즘은 기억이 가물가물할 때가 있다”고 털어놓는다. 마침 딸이 건넨 한마디가 이 과정을 찾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됐다. “엄마, 낭독이 치매 예방에 좋대. 엄마 목소리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딸이 직접 강좌를 찾아 신청해준 덕에 그는 다시 대본을 들고 마이크 앞에 서게 됐다.
그에게 시니어 성우 수업의 가장 큰 장점은 ‘좋은 글을 찾아 읽는 것’이다. 그날그날 낭독할 글을 고르기 위해 책을 뒤적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맑아지고 생각이 또렷해진다고 했다. 젊은 시절 방송반 마이크 앞에서 느꼈던 설렘이 이제는 좋은 문장을 고르고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는 조용한 기쁨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목소리의 시작에 서 있다우리는 처음 목소리를 믿고 이곳에 섰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할 수 있을지 확신도 못 하면서
그저 ‘해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마이크 앞에 섰을 때
내 숨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릴 줄은 몰랐습니다.
한 문장을 읽는 데도 이렇게 많은 두려움이 따라올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조금씩 두려움을 발성으로 바꾸는 연습을 했습니다.
떨림을 호흡으로 숨기고 부족함을 반복으로 채우며
조금씩 ‘목소리’라는 이름의 나를 만들어왔습니다.
- 김영아 씨의 명품성우 과정 수료식 낭독사 중 일부

마이크 앞에서 다시 시작한 사람들
이외에도 수강 동기는 다양하다. 손주에게 책을 더 잘 읽어주고 싶어서, 오래전 꿈이었던 ‘성우’를 한 번쯤 해보고 싶어서, 은퇴 후 봉사활동을 준비하기 위해, 남들 앞에서 떨지 않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보고 싶어서, 멀리 강릉에서도 찾아온다고.
김옥련 씨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목소리 봉사’였다. 오랫동안 다니던 성당에서 지인들로부터 “목소리가 차분하고 편안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처음 목소리 봉사를 시작했던 성당에서는 65세까지 활동할 수 있었지만, 이사로 옮긴 새 성당은 입단 연령을 55세로 제한하고 있었다. “봉사하겠다고 하는데 나이부터 묻더라”는 그의 말에는, 나이를 이유로 마이크에서 물러나야 하는 현실을 향한 아쉬움이 담겨 있다. 그에게는 ‘나이 들어도 목소리는 여전히 쓸 수 있다’는 마음이 남아 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중앙대 명품성우 과정이다. 성당에서의 봉사가 막히자, 그는 ‘시각장애인 단체나 필요한 곳에 어떤 식으로든 내 목소리를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성우 수업에 도전했다. 겨울비가 내린 취재 당일 김 씨는 다리에 깁스를 한 상태였지만 변함없이 녹음실을 찾았다. 김 씨의 서사는 ‘은퇴 후에도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시니어 성우들의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 다른 수강생 임영림 씨는 이 과정이 자신에게 ‘두려움을 건너는 통로’가 됐다고 말한다. 직장 생활 동안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순간마다 너무 떨려 목소리가 가라앉았고, 결국 발표와 프레젠테이션을 회피하게 됐다. 스피치 학원 대신 성우 과정을 선택한 이유는 단지 전달의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내 목소리의 가능성’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임금피크제 대상이 됐다. 앞으로 직업적으로 발표할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더 나은 나를 위해 해보고 싶다”는 그의 말에는 직장 문을 나서며 다시 자신을 단련해보려는 떨림이 묻어났다. 어쩌면 또 한 번 사회 초년생이 된 듯한 기분일지 모른다. 처음 녹음실에 들어가 마이크 앞에 섰을 때도 그는 긴장했다. 그런데 “오늘은 안 떨렸다”고 했다. 연습과 경험이 쌓이며 결국 두려움을 이겨낸 것이다.
주변 수강생들도 “나이랑 상관없이 내가 생각하는 것을 뚜렷하게 말할 수 있다는 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나이 들수록 더 중요해지는 것 같다”며 맞장구쳤다. 이 과정이 단지 ‘성우 지망생 과정’이 아니라 ‘말하기 자신감을 회복하는 장’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입을 닫기’보다 ‘말을 다듬기’로
어릴 적 옹알이를 시작한 후로 평생 말하기와 함께 살다 보면 ‘말’의 중요성을 미처 느끼지 못할 때도 있지만, 우리말에는 말과 관련된 속담과 격언이 유난히 많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입이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라’, ‘말은 씨가 된다’ 등 한마디 말이 사람과 관계, 나아가 인생의 방향까지 바꿀 수 있다고 일깨우는 표현들이다.
이 가운데 ‘나이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야 한다’는 속세의 말은 어른이 될수록 말을 아끼고 행동으로 보이라는 뜻으로 자주 인용된다. 1985년생 수강생 임경숙 씨는 이 말에 다른 해석을 덧붙인다.
그는 “나이 들수록 오히려 더 아름답고 젊은 말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앙인인 임 씨는 성경의 시편을 자신의 기도처럼 낭송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다. 캔바와 같은 디자인 도구를 이용해 직접 편집도 한다. 최근에는 점차 구독자가 늘어나는 즐거움을 맛보고 있다. 그러면서 종교적 낭송 못지않게 일상 언어 역시 중요하게 여긴다.
“말이 가장 많이 쓰이는 곳은 결국 가족이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아이들과 가족에게 더 정제되고 아름다운 말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거친 말과 꾸중으로 상처를 주던 과거 어른들의 언어를 떠올리며, 그는 ‘입을 닫아버리는 어른’이 아니라 ‘말을 다듬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했다. 나이 들수록 열어야 하는 것은 지갑만이 아니라, 상대를 살리는 한마디를 건네기 위한 마음과 언어라는 뜻이다.

봉사와 수익 창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
명품성우 과정을 수료한 이들의 꾸준한 활동은 이 수업의 지향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 소모임 ‘소행성’은 대표적인 사례다. 이름 그대로 ‘소소한 행복을 꿈꾸는 성우들’이 모여 만든 이 모임은, 7기 수료생 몇 명이 뜻을 모아 시작했다. 이들은 1년 동안 고양시 미디어센터 녹음실을 사용해 오디오북을 제작하고, 구로나눔장애인자립생활센터(이하 센터)와 연계한 시각장애인 낭독 봉사도 하고 있다. 회원 중에는 상업광고 녹음에 도전하고 꾸준히 개인지도를 받으며 프로의 세계에 한 발짝 다가선 이도 있다.
특히 센터의 예술제에 전래동화 ‘옥황상제에게 복 타러 간 총각’을 낭독극으로 제작해 무대에 올린 일이 인상 깊다. 회원이 각색과 연출을 맡고, 여섯 명이 참여해 6개월 넘게 연습한 끝에 공연을 완성했다. 같은 작품을 오디오북으로도 녹음해, 하나의 스토리를 공연과 음원이라는 두 가지 형식으로 확장했다.
이 모임은 봉사와 창작의 중간 지점을 유연하게 오가고 있다. 정인경 소행성 회장은 “아직 방법을 몰라 따로 유통하지 않고 있지만, 오디오북을 서비스하는 ‘윌라’ 같은 플랫폼을 통해 콘텐츠를 판매할 계획이다. 낭독극이라는 공연 콘텐츠를 초등학교나 유치원에 선보이면 수익이 발생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전했다.
정 씨는 “목소리를 재능 삼아 콘텐츠를 만들고, 이를 수익화하는 것에 기쁨과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나 이를 통해 큰돈을 벌겠다는 욕심은 없다. 평생 안 해봤던 일에 도전하는 감각, 잘 살고 있나 스스로 돌아보는 점검, 가진 것을 나누는 보람이 있어 지치지 않고 활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은퇴 후의 일’이 반드시 직함과 월급에 따라 정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성우 활동으로 생계를 완전히 바꾸기보다, 자신이 만든 작품을 통해 수익과 나눔의 기쁨을 함께 경험하는 방식이 더 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또 일반인으로서는 만나기 어려운 공연, 녹음, 출판의 경험 자체가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준다.
결국 명품성우 과정이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목소리를 얼마나 듣기 좋게 내는가’가 아니라 ‘목소리를 무엇에 쓸 것인가’다. 누군가는 손주와 가족에게 더 따뜻한 시간을 선물하고, 누군가는 지역사회에서 낭독과 동행 봉사로 타인의 삶을 밝힌다. 또 누군가는 오디오북을 만들며 새로운 창작자와 직업인의 길을 상상한다. 목소리를 다시 쓰는 순간, 은퇴 이후의 세계는 더 조용해지는 대신 더 넓어질 수 있다.
시니어 성우가 되고 싶다면?성우 학원을 검색하면 성인반 또는 시니어 취미반 등 관련 교육기관의 정보를 찾을 수 있다. 매봉시니어센터와 구립송파노인 요양센터에서도 시니어 성우 과정을 운영한 적 있으나, 2026년 개강 여부는 따로 확인해야 한다. 조금 더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싶다면 방송국 공채시험 노하우도 교육하는 KBS 방송아카데미나 학점은행제 평가 인정 교육기관인 한국방송예술진흥원의 성우 과정도 찾아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