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18

[윤나래의 세대읽기] 젊은이보다 젊다, 90대 현역

입력 2026-05-18 06:00

90대 현역들이 보여준 장수의 새 기준

(챗GPT 생성 이미지)
(챗GPT 생성 이미지)

초고령사회가 되면서 우리는 ‘오래 사는 삶’을 더 자주 말하게 됐다. 그러나 장수의 기준은 여전히 몸의 나이, 병의 유무, 외모의 젊음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정말 건강하게 나이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최근 주목받는 90대 현역들의 모습은 그 답을 조금 다르게 보여준다. 건강한 장수란 단지 오래 살아남는 일이 아니라, 자기 역할을 계속 갱신하며 사회와 연결되는 일에 가깝다.

아흔 이후에도 계속되는 ‘역할’

대표적인 인물이 이길여 가천대학교 총장이다. 1932년생인 그는 가천대학교 총장이자 가천길재단 회장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대중의 관심은 그의 나이와 외모에 쏠리곤 한다. 그러나 이길여 총장을 90대 현역의 사례로 볼 때 더 중요한 지점은 ‘동안’이 아니라 ‘역할’이다.

의료인으로 출발해 병원과 대학, 재단을 이끌어온 그의 삶은 고령의 리더십이 어떤 방식으로 공적 영역에 남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통념과 달리, 그는 여전히 조직의 이름과 방향을 상징하는 인물로 자리하고 있다.

(MBC '소라와 진경' 2화 갈무리)
(MBC '소라와 진경' 2화 갈무리)

평생의 감각으로 패션을 선도하다

패션계에서는 진태옥 디자이너가 있다. 1934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그는 1965년 서울 명동에 ‘프랑소와즈’를 열며 패션계에 들어섰고, 한국 패션 1세대 디자이너로 활동해왔다. 1988년 서울올림픽 공식 유니폼, 아시아나항공 승무원 유니폼,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공연 의상 등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장면에도 그의 옷이 등장했다.

최근에는 MBC 예능 ‘소라와 진경’ 출연 장면이 다시 화제가 됐다. 5월 3일 방송에서 그는 패션모델 이소라와 홍진경을 만나 93세 현역 디자이너의 일상과 태도를 보여줬다. 특히 “프로들은 나이가 없어요”라는 말은 90대 현역을 설명하는 상징적 문장처럼 회자됐다. 방송과 관련 보도에 따르면 그는 매일 수영 1000m를 하며 몸을 관리하고, 여전히 출근길이 설렌다고 말했다. 또 환갑의 나이에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에 도전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인생 자체가 끝나는 날까지 도전”이라고 후배들을 격려했다.

이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단순히 ‘93세에도 건강하다’는 데 있지 않다. 진태옥 디자이너는 나이를 감추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긴 시간 쌓아온 감각과 태도를 바탕으로 지금의 후배들에게 ‘다시 도전하라’고 말한다. 빠르게 변하는 패션의 세계에서 90대에도 자기 감각을 유지한다는 것은, 단지 오래 일했다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시대가 변할 때마다 다시 보고, 다시 고르고, 다시 판단해온 시간의 결과다. 유행은 젊은 사람만의 언어처럼 보이지만, 오래 축적된 감각 역시 시대를 읽는 또 다른 방식이 될 수 있다.

(소마미술관)
(소마미술관)

오래된 작가가 던지는 새로운 질문

미술계에서는 이승택 작가의 행보가 눈에 띈다. 1932년생인 그는 한국 실험미술의 대표 작가로 꼽힌다. 올해 소마미술관에서 7월 26일까지 개인전 ‘이승택: 조각의 바깥에서’가 열리고 있다. 조각, 드로잉, 오브제, 사진, 설치 등 다양한 작업을 통해 조각의 범위를 확장해온 그의 세계를 조망하는 전시다.

아흔을 넘긴 작가의 전시가 단순한 회고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그의 작업 자체가 여전히 ‘무엇이 조각인가’라는 질문을 현재형으로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 든 창작자의 힘은 새로운 재료를 빨리 받아들이는 데만 있지 않다. 오랜 시간 같은 질문을 밀고 나가면서도, 그 질문을 낡게 만들지 않는 데 있다.

한국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 작가 역시 ‘90대 현역’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1935년 원산에서 태어난 그는 오랜 시간 나무를 비롯한 재료와 마주하며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다져왔다. 호암미술관은 6월 28일까지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 전시를 열고 그의 70여 년 작업 세계를 조명하고 있다.

(호암미술관)
(호암미술관)

디지털에서 다시 피어난 90대의 감각

디지털 세계에서도 90대 현역은 등장한다. 여유재순 작가는 아이패드로 꽃과 나무, 일상의 풍경을 그리는 드로잉 작가다. 1934년생인 그는 SNS에 그림을 올리며 대중과 소통했고, 카카오가 시니어 작가와 협업한 이모티콘 제작에도 참여했다.

이 사례가 흥미로운 이유는 ‘노인도 디지털을 배운다’는 수준을 넘어선 데 있다. 여유재순 작가는 단순한 교육 수강자가 아니라, 디지털 플랫폼 안에서 자기 콘텐츠를 만들고 소비자와 만나는 창작자다. 누군가에게 스마트폰은 어렵고 낯선 기계일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늦은 나이에 발견한 새로운 작업실이 된다.

시니어의 디지털 활용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종종 ‘따라잡기’의 관점으로 접근한다. 젊은 세대가 쓰는 기술을 노년층도 얼마나 익혔는지 보는 방식이다. 그러나 여유재순 작가의 사례는 다른 방향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기술을 젊은 사람처럼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과 이야기를 기술 안에서 새롭게 표현하는 일이다.

장수의 새 기준은 ‘계속 연결되는 삶’

한국은 이미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긴 사회다. 고령층은 더 이상 오프라인에만 머무는 세대도, 변화에서 밀려난 세대도 아니다. 다만 사회가 이들의 가능성을 얼마나 빨리 알아보고, 얼마나 자연스럽게 무대를 열어주느냐가 남아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나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90대 현역은 젊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긴 시간을 살아온 사람이 자기 몸과 속도, 경험을 그대로 지닌 채 지금의 사회와 연결되는 방식이다.

물론 모든 90대가 현역으로 일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건강 상태와 경제 여건, 가족 관계, 돌봄 환경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의 활약을 장수의 모범처럼 내세우는 순간, 다른 노년에게 또 다른 부담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들을 바라볼 때 필요한 태도는 ‘저 나이에도 일하니 대단하다’는 감탄에 그치지 않는 것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 나이 든 사람이 계속 배우고, 만들고, 결정하고, 사회와 연결될 수 있는 환경을 갖고 있는가’다.

젊은 세대가 이들을 보며 배울 점도 여기에 있다. 나이를 이기는 비결을 묻기보다, 오랜 시간 자기 세계를 지켜온 자세와 방식을 물어볼 필요가 있다. 부모와 조부모 세대에게도 마찬가지다. “이제 그만 쉬세요”라는 말이 배려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가능성을 일찍 닫아버리는 말이 될 수 있다. 무엇을 더 해보고 싶은지, 어떤 방식으로 사회와 연결되고 싶은지 묻는 것만으로도 노년의 시간은 달라진다.

90대 현역들은 우리에게 장수의 새 얼굴을 보여준다. 오래 산다는 것은 단지 시간을 견디는 일이 아니다. 계속 배우고, 계속 만들고, 계속 관계 맺는 일이다. 초고령사회가 맞이해야 할 뉴노멀은 ‘젊어 보이는 노인’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도 자기 삶의 주어로 남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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