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정부가 지난 6월 공표한 '고령사회백서'는 고물가 압박 속에 은퇴를 미루고 일터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일본 시니어들의 팍팍한 현실을 압축해 보여준다.
백서에 따르면 2025년 기준 일본의 고령화율은 29.4%로, 75세 이상 인구(17.3%)가 65~74세(12.1%)를 크게 웃도는 '후기고령자 중심' 구조가 완전히 고착화됐다. 특히 주목할 점은 백서 내 국제비교조사 결과다. 은퇴 후 일에서 손을 떼려는 미국·독일·스웨덴 고령자들은 7할 이상이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답한 반면, 일본은 고령자 10명 중 4명이 "수입이 나오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답해 강한 근로 의지를 드러냈다. 노후자금 수명 연장을 위해 경제 활동의 끈을 놓지 못하는 생계형 근로 세태가 정부 공식 통계로 증명된 셈이다.
지갑 닫히는 일본, 가구당 소비지출 4개월 연속 하락
이런 근로 의향의 배경에는 물가 부담이 자리한다. 일본 총무성이 발표한 최근 물가 동향에 따르면, 신선식품을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일본은행(BOJ)의 관리 목표치인 2%를 수개월째 상회하며 장기 인플레이션 국면이 지속되고 있다. 특히 고령층의 가계에 직격탄을 날린 것은 식료품과 이란발 에너지 가격 폭등이다.
실물 시장의 가격 분석 기관인 데이코쿠데이터뱅크의 '식품 주요 195개사 가격개정 동향조사'에 따르면, 4월 한 달간 가격이 오른 가정용 중심의 음식료품 품목만 2,798개에 달했다. 엔저 장기화와 원자재 가치 상승이 고스란히 장바구니 물가에 반영된 결과다.
치솟는 물가는 가계 소비를 완연한 침체국면으로 밀어 넣고 있다. 총무성의 3월 가계조사 결과, 일본의 2인 이상 가구당 월평균 소비지출은 33만4,701엔으로 집계됐다. 이는 물가 변동분을 제외한 실질 기준 전년 동월 대비 2.9% 감소한 수치로, 4개월 연속 하락세를 이어갔다. 수입은 제자리인데 물가만 뛰다 보니 고령층을 비롯한 일본 전 세대가 지갑을 닫고 있다는 것을 수치로 보여주고 있다.
고령 소비자, “외식 줄이지만 건강은 포기 못해”
시니어 전문 마케팅 플랫폼 '코스모랩'을 운영하는 코스모헬스가 지난 5월 공개한 조사에서는 부담 증가를 체감하는 분야로 '식료품'(93.0%)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광열비'(58.7%), '교통비(휘발유·대중교통)'(44.0%)가 뒤를 이었다. 생활 필수 지출일수록 체감 부담이 크다는 의미다. 행동 변화도 뚜렷했다. 물가 상승으로 '변화가 있었다'는 응답이 67.8%에 달했고, 구체적으로는 '특가·묶음 구매 증가'(58.7%), '외식·배달 횟수 감소'(45.4%), '전기·가스 사용 절제'(44.0%) 순이었다.
무엇을 줄이고 무엇을 지킬지에 대한 판단도 명확해지고 있다. 가장 먼저 줄이는 지출은 '식비'(23.8%)와 '외식·오락'(22.8%)이었지만, 반대로 지키고 싶은 지출로는 '식비(품질·안전·영양)'(36.5%)와 '건강·의료'(30.6%)가 높게 나타났다. 싼 것을 찾되 건강과 안전만큼은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중적 소비 심리가 표현된 것이다.


시니어 매거진 '하루메쿠'를 발행하는 하루메크홀딩스가 6월 10일 발표한 '식(食)에 관한 의식·실태 조사 2026'도 비슷한 흐름을 보여준다. 20~89세 남녀를 대상으로 한 이 조사에서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가격보다 '맛의 좋음', '국산', '영양 균형', '안전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특히 80대 여성층에서는 단백질, 식이섬유, 칼슘 등을 의식적으로 섭취하는 노쇠 예방 성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지갑은 얇아졌지만 '먹는 것'에 대한 마지노선만은 지키려는 시니어 세대의 소비 태도가 확인되는 대목이다.
"공포에 올라타자" 일자리·자산관리로 쏠리는 산업
역설적으로 이 같은 생활고는 고령층의 소득 창출과 자산 방어를 돕는 새로운 비즈니스의 폭발적인 성장 동력이 되고 있다. 단순히 비용을 아끼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지갑을 채우려는 시니어들의 공포가 시장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가장 뚜렷한 변화는 시니어 일자리 매칭 플랫폼과 단기 일자리 시장에서 감지된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는 초단기 일자리 플랫폼 '타이미(Timee)'가 대표적이다. 최근 일본 60대 이상 시니어들은 스마트폰 앱을 통해 하루 2~3시간씩 슈퍼마켓 상품 진열이나 식당 보조 등 체력적 부담이 적은 일자리를 찾아 나서고 있다. 깎인 식비와 광열비를 노동으로 직접 보전하려는 생계형 근로다.
고령자 전문 구인 플랫폼 '마이나비 미들시니어' 역시 5060 세대의 은퇴 전 전문 지식과 경력을 살려 중소기업의 자문역이나 파트타임 관리자로 연결해 주는 매칭 서비스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 기업은 만성적인 인력난을 해소하고, 고령자는 유연한 일자리를 얻는 구조가 고물가 국면에서 더욱 탄력을 받는 모양새다.
노후자금 수명 연장을 위한 금융업계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기존에 쥐고 있던 예·적금만으로는 현금 가치 하락을 막을 수 없게 되면서, 고령층을 대상으로 한 자산관리 컨설팅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특히 일본 정부가 파격적인 비과세 혜택을 내걸며 개편한 신(新) NISA(소액투자비과세제도)가 기폭제가 됐다.
다이와증권, 노무라증권 등 대형 금융사들은 60대 이상을 타깃으로 '물가 상승기 시니어 자산 방어 전략'이나 '인플레이션을 이기는 배당주 투자법' 등을 주제로 한 오프라인 세미나를 매주 쏟아내고 있다. 과거 자녀 세대에게 자산을 물려주는 상속이나 증여에 치중했던 금융 비즈니스가, 이제는 당장의 생활비 방어를 위한 '안전한 자산 수명 연장' 중심으로 급격히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일본 고령층은 고물가에 맞서 필수 지출을 줄이는 '선택적 절약'과 함께 노동 시장 재진입으로 소득 보전에 나서고 있다. 이는 시니어 비즈니스의 중심이 단순 여가·돌봄을 넘어 일자리 매칭과 자산 방어 등 '경제적 자립' 지원으로 이동함을 뜻한다. 생활고라는 위기가 고령층을 다시 경제 주체로 이끌며, 실버 시장의 외연을 넓히는 촉매제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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