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26

[윤나래의 세대읽기] 학벌은 레버리지, 관계는 손절

입력 2026-10-26 16:48

주식 용어로 삶을 설명하는 청년들, 일상에 스며든 투자의 계산기

(이미지=AI 생성)
(이미지=AI 생성)

친구와의 관계를 끊을 때는 ‘손절’, 좋은 학벌이나 인맥을 활용할 때는 ‘레버리지’, 아직 유명하지 않은 가수나 밴드를 먼저 좋아하게 됐을 때는 ‘저점매수’라고 한다. 주식시장에서나 쓰던 용어가 청년들의 일상에 들어왔다. 관계를 맺고, 진로를 선택하고, 취향을 발견하는 일까지 투자에 빗대어 설명한다.

좋아하는 것을 남들보다 먼저 발견했다는 기쁨도 주식투자의 언어로 표현한다. 무명 가수의 팬이 됐다가 그 가수가 유명해지면 ‘저점매수에 성공했다’고 말하는 식이다. 실제 온라인에서는 인디밴드를 소개하면서 ‘저점매수 종목 추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사례도 찾아볼 수 있다. 이때의 저점매수는 경제적 이익을 기대하는 행위라기보다 자신이 먼저 알아본 대상의 미래를 기대하고 응원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반대편에는 손절이 있다. 손실을 더 키우지 않기 위해 보유한 주식을 처분한다는 뜻의 ‘손절매’에서 나온 표현이다. 이제는 친구나 연인, 직장 동료와의 관계를 끝내는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투자에서처럼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언어가 쓰이는 셈이다.

주식시장 밖으로 나온 투자의 언어

경제용어가 인간관계에 쓰이는 현상은 학술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백정이 서울대학교 연구자와 구영산 충남대학교 연구자가 2025년 학술지 ‘우리말연구’에 발표한 논문 ‘신어를 활용한 대인 관계 표현 - 손절을 중심으로 -’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언어 사용을 분석했다.

연구진은 주식투자의 손절매에서 파생된 ‘손절’이 관계의 종결이나 쇠퇴를 나타내는 신어로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경제적 손실을 줄이는 행위를 가리키던 말이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상황으로 의미를 넓힌 것이다.

삶을 투자에 비유하는 표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투자 대비 수익률을 뜻하는 ROI(Return on Investment)는 돈과 시간, 노력을 들인 만큼 무엇을 얻었는지 따지는 기준이 된다. 이미 투입한 비용에 얽매이지 말라는 ‘매몰비용’은 오래된 연애나 직장을 계속 유지할 것인지 고민할 때 적용할 수 있는 개념이다.

‘레버리지’는 또 다른 차원의 표현이다. 금융에서는 차입 등을 활용해 자기자본보다 큰 투자 효과를 노리는 것을 뜻한다. 일상에서는 자신이 가진 학벌, 경력, 인맥, 평판 등을 발판 삼아 더 큰 기회를 얻는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좋은 학벌을 레버리지로 보는 시각에서는 학력이 배움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산이 된다.

이들 표현에는 공통점이 있다. 인간관계, 시간, 경험, 경력처럼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것까지 개인이 가진 자원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무엇을 얻고, 얼마나 활용할 수 있으며, 언제 정리할 것인지 판단하는 데 시장의 계산법을 빌려온다.

(이미지=AI 생성)
(이미지=AI 생성)

주식투자 대중화와 만난 ‘라이프 ROI’

이러한 언어가 익숙해진 배경으로 주식투자의 대중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예탁결제원이 2021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 말 국내 주식 개인 소유자는 약 914만 명으로, 전년 말 614만 명보다 약 300만 명 증가했다. 당시 주식투자 열풍을 거치며 개인 투자자가 급격히 늘었고, 젊은 층의 투자 참여도 확대됐다.

주식시장의 등락과 투자 전략이 일상적인 대화의 소재가 되면서 손절, 레버리지, 수익률 같은 용어를 접할 기회도 많아졌다. 물론 투자자가 늘어난 사실만으로 청년들의 언어와 가치관이 바뀌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일부 표현은 이전부터 경제·경영 분야에서 널리 사용됐고, 일상에서 농담이나 비유로 쓰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최근의 소비·생활 트렌드는 투자의 계산법이 돈을 넘어 삶의 선택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난도 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펴낸 ‘트렌드 코리아 2027’은 이를 ‘라이프 ROI’로 설명한다. 투자수익률을 계산하듯 인간관계, 직장생활, 결혼 등에서도 투입한 시간과 비용 대비 얻는 결과를 따지는 경향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로테이션 소개팅이다. 한 사람과 오랜 시간을 보내는 대신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상대를 차례로 만난다.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기 위한 시간과 감정적 부담을 줄이고, 제한된 시간 안에 선택의 폭을 넓히려는 방식이다.

관계에도 투자한 만큼 돌아와야 한다?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2025년 10월 전국 만 19~59세 성인 남녀 1000명을 조사한 결과, 67.5%는 인간관계도 노력한 만큼 돌아오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74.9%는 요즘 연애도 효율성을 따지는 시대라고 인식했다.

인간관계에서도 무조건 많은 사람을 알고 지내기보다 자신에게 중요한 관계에 집중하고, 시간과 감정의 소모를 관리하려는 태도가 나타난다. 다만 이 조사는 청년층만을 대상으로 한 결과가 아니라는 점에서 세대 전체의 변화로 읽어야 한다.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려는 태도는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 방식과도 맞닿아 있다. 전공과 직장을 선택할 때 당장의 흥미뿐 아니라 미래의 소득과 성장 가능성을 따지고, 자격증이나 경험도 앞으로 얼마나 활용할 수 있는지 고려한다. 시간과 노력의 기회비용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청년들이 인간관계의 가치를 오직 손익으로만 판단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경제적 여유가 부족해 관계를 줄이는 사람도 있고, 넓은 인맥보다 소수의 깊은 관계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손절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해서 실제로 상대방을 투자상품처럼 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학벌도 인맥도 자산…삶을 경영하는 세대

시장의 계산법이 삶에 적용될 때 흥미로운 변화는 개인이 가진 자원의 의미도 달라진다는 점이다. 학벌은 교육 이력인 동시에 사회적 신뢰와 기회를 얻기 위한 레버리지가 될 수 있다. 인간관계는 정서적 유대이면서 새로운 정보와 가능성을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된다. 직장에서 쌓은 경험은 경력 자산이 되고, 개인의 전문성이나 취미는 부업이나 새로운 일자리로 이어질 가능성을 갖는다.

물론 학벌과 인맥을 성공의 발판으로 여긴 것은 청년세대만의 일이 아니다. 기성세대 역시 좋은 학교와 직장, 폭넓은 인맥을 사회적 자산으로 생각했다. 달라진 것은 그러한 선택을 설명하는 언어다. 과거에는 성실함과 노력, 인맥과 기회로 설명하던 일을 이제는 투자, 레버리지, 수익률이라는 말로 풀어낸다.

이 언어에는 현실적인 배경도 있다. 개인이 가진 시간과 돈은 한정돼 있고, 노력한 만큼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는 보장도 없다. 실패했을 때 다시 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이 부담스러울수록 선택의 효율과 미래 가치를 따지게 된다.

다만 모든 사람이 같은 조건에서 삶을 투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벌과 인맥, 부모의 경제력까지 레버리지가 된다면 애초에 활용할 자원을 얼마나 가졌는지가 기회의 차이로 이어질 수 있다. 투자의 계산법으로 삶을 설명할수록 출발선의 차이도 중요해지는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에도 수익률이 필요할까

주식투자에서 좋은 선택은 수익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삶에서는 무엇을 얻었는지 분명하게 계산하기 어려운 일도 많다.

오랫동안 이어온 관계가 당장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소중할 수 있다. 새로운 취미를 시작했다가 금세 그만두더라도 즐거웠던 시간까지 낭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무명 가수를 일찍 발견하는 즐거움 역시 그 가수가 유명해지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흥미로운 점은 청년들이 이런 경험을 설명할 때조차 투자자의 언어를 빌린다는 사실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부터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까지, 삶의 여러 장면을 금융시장의 개념으로 해석한다.

경제적 합리성을 따지는 태도는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고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다만 모든 선택에서 투자한 만큼의 결과를 기대한다면 당장 성과가 없는 경험의 가치를 놓치기 쉽다.

삶을 잘 운영하기 위해 시장의 언어를 빌려오는 시대다. 그렇다면 투자수익률로 설명할 수 없는 시간과 관계는 어떤 가치로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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