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 자서전]우물 안 개구리 세상 구경한지 50년 되던 해까지의 얘기

기사입력 2016-08-19 19:01 기사수정 2016-08-19 19:01

▲3세 때 사진.(육미승 동년기자)
▲3세 때 사진.(육미승 동년기자)
▲초등학교 1학년 모습. (육미승 동녀기자)
▲초등학교 1학년 모습. (육미승 동녀기자)
▲대학교정에서. (육미승 동년기자)
▲대학교정에서. (육미승 동년기자)
▲일본 학부모들. (육미승 동년기자)
▲일본 학부모들. (육미승 동년기자)

나는 수원이란 작은 동네 서둔동에서 살았다. 초등 1학년부터 결혼할 때 까지 이사 한 번 안 하고 컸다. 서둔동에는 서울 농과대학과 진흥청이라는 우리나라의 중요한 곳이 자리하고 있는 관계로 오랫동안 수원의 교육열이나 교육관계의 문제라면 모두 통계로는 전국 1위권이었단다. 수원에서 자라는 동안 연습림이라는 하늘이 안 보이게 빼곡하게 들어선 소나무 밭을 놀이터로 뛰어다니며 그 왼쪽으로 달려가면서 산속에서 나는 따먹는 앵두, 보리수, 오디, 산딸기... 건 다 우리들 것이었고 버섯이라든지 나물들은 우리의 밥상 반찬이었고 화가 나도 서러워도 산 속을 돌아다니며 목청껏 노랠 불러가며 풀었다. 학교 자연시간에 배우면 뭐든지 다 실험할 수 잇는 선이었다. 예를 들어 개미에 대해 배운 날, 나는 쇠로 된 긴 꼬챙이 하나를 들고 산으로 가서 개미 집 구멍에 그걸 깊이 끼워서 위로 세차게 올려 보면서 개미들이 만든 집 구조를 열심히 공부했다. 내 공부를 위해 놀란 개미들이 번데기를 입에 물고 질서정연하게 도망가는 걸 어리석음에 공부하는 거라고 불쌍히도 안 여겼으니... 언딘가로 이어지는 행렬은 대답했고 작은 구멍은 작은 집이었고 큰 구멍은 으리으리한 대궐이었다. 어른이 되어서 ‘개미’ 란 책을 읽으면서 혼자 많이 슬퍼했었다. 하나 밖에 모르는 단순한 애였었다.

그러한 나는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고 서울대학 축산학과 교수가 아버지로 형제는 5이었고 딸이 넷인 딸부자 집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화산 목장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외갓집에서 출산 주비를 하고 있었다 한다. 임신한 내내 입덧이 심해 고생은 했지만, 낳을 때는 별로 큰 아픔도 없이 세상 구경을 나온 나는 무럭무럭 잘도 자라줬다고 한다. 날짜도 안 잊어버린다며 7월 13일에 사과가 먹고 싶다하니 아버지가 그 당시 근무하던 사리원 중학교 학생들이 익지도 않은 풋 사과를 어디서 구했는지 가져왔더라나? 아마도 아무리 찾아도 사과를 구할 수 없으니 학생들에게 말한 듯하다며, 어머니가 먼 하늘가를 가끔 바라본다. 너무 일찍 가버린 낭군님이라도 생각하는지...‘뭐가 그리 바빠 정년도 못 채우고 갔는지...’ 하며 요즘엔 입버릇이 되었는지 더욱 더 자주 중얼거리곤 한다.

하얀 칼라를 반듯하게 다려 입고 귀밑 2센티미터의 머리로 자르고 다녀야 하는 중학생이 되자 제일 큰 사건은 우리 집 우편함에 연애편지가 다발로 배달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집배원 아저씨는 노끈으로 묶은 편지 다발을 뒤흔들면서 내 동생들과 일하는 언니를 기쁨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며 소리 지르게 했다. 밤에 그걸 읽어대며 쿡쿡 거리고 신나할 생각으로 달뜨게 하는 편지다발이었다. 정작 읽어야 할 본인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 그래서 벌을 받는 기분이 가끔 들기도 한다. 내게 중, 고등학생 시절은 길에 다니는 남자들은 나를 그냥 보내면 섭섭했던 듯...했다. 그 당시 내가 친구들에게 즐겨 하는 말은 ‘내가 자기들 말에 홈빡 속아 넘어 갈 듯 순진하게 보이나봐. 병신같이 쉽게 생긴 거지 뭐~~’ 대학에 갈 목적이 서 있던 나는 공부에만 전력투구했다. 정직하게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일엔 눈도 안 돌렸다. 제일 바보라는 모범생으로 6년을 보냈다. 시시콜콜 재미있는 일도 있었겠지만 그저 배우고 공부하면서 먹으면서 지냈던 기억이다.

그러면서 대학생이 되었다.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 세상에 나와 오만가지 구경에 빠지기 시작한 거였다. 만나는 것, 보는 것들이 다 생소했고 흥미유발에 호기심 난동이었다. 배울 것, 사람 만날 일, 영화와 연극 볼 일, 친구들과 수다를 즐길 일, 숙제할 일, 모르는 곳 찾아다니기...할 일이 너무너무 많아지면서 즐기다 보니 내가 보기에 언제나 오동통했었는데 몰라보게 아주 급 날씬해져버렸다. 더군다나 버스 안에서의 투쟁은 나에게 큰 시련과 고통의 시간이었다. 콩나물시루 버스타기가 다이어트의 주요인이었지만 집에서부터 40여 분을 넓은 대로를 내 맘대로 걸어 다니며 학교를 다녔던 여고 시절 12년간의 여유로움과 조용함을 한꺼번에 몽땅 잃어버렸다. 홍릉과 신촌을 오가는 1번 버스는 S대와 Y대 학생들과 우리들을 가득가득 실어 나르기 바빴다. 완전 짐짝 같았다. 그 속에서의 가지가지 에피소드는 정말로 끝이 없는 얘기 거리다. 그런데 5월부터 데모를 해대는 바람에 휴교령이 내려져 수원 집에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동생들 뒷바라지로 서울로 가고 그 대신 수원 살림을 내가 도맡게 되어버렸다. 엄격하고 규칙적인 아버지 시중드는 것과 처음으로 두 여동생 도시락 준비와 청소 집안 일 그리고 세끼 밥 해 주는 일이 내겐 버거웠고 힘들었다. 어느 면으로 편했던지 가을이 되면서도 어머니는 내 생활을 되돌려 주지 않아 나는 아닌 밤에 홍두깨 식으로 서울로 통학을 하게 되어 버렸다. 처음 하는 통학생 생활에 어리바리 적응도 어려워 힘 드는 판에, 남학생들은 새로움을 맞아 즐기는 속에 나는 밀려들어 쳐 박히게 되었다. 봄(입학시즌)에는 없었는데 가을바람 부는 계절에 새로운 여학생이 나타났다는 뉴스는 첫 칸부터 입으로, 입으로 소문이 바람보다 빠르게 퍼져가기 시작~통근열차기 시끄러워지고 말았다. E 여대 배지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러나 우리의 S대, Y대, E대 생으로 구성된 코라스(지금은 판코라고 함)라는 클럽의 힘으로 보호를 받으면서 지낼 수가 있어 천만 다행이었다. 클럽 남학생들의 관심어린 보호를 받으며 늦게 타도 자리는 언제나 맡아져 있었다. 그 덕으로 심심한 적도 없이, 내가 일학년이니 모두가 선배님들이라 든든했다. 집에서도 여자들이 많은 나는 남자들의 세계를 처음 새색시 방을 몰래 숨어서 훔쳐보듯 하나하나 알아갈 수 있는 환경에 접했다. 여러 가지 성격의 남자들을 한꺼번에 대해 가면서 생소한 경험들을 했다. 남동생은 한참 아래였고 딱 아버지라는 남자 한 사람이 있던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왔던 나에게는 무엇이든 이상하게 느껴졌다. 생각하는 방식이 달랐고, 말도 같은 문장과 단어들이지만 나랑은 완전 다른 반응으로 다가오기도 했고, 이해하기 쉽다가도 어느 순간 완전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보여 ‘으응?’ 하는 날들이 많았다. 점점 약아져 가는 나를 얼핏 발견하고는 웃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나는 어떤 일이든지 면전에서는 아무 것도 트집을 잡는 다거나 이상한 발언을 못하는 성격이라 귀여운 여동생쯤으로 이해해줘서 모든 것들은 다 편하게 넘어갔다. 그렇게 대학 생활은 평탄했고 놀라운 재미는 없었지만 학교에서 교내 활동도 해 가면서 잘 보냈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선생님의 꿈을 가지고 열심히 실력을 닦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졸업이 가까워 오는 9월 정도에 이력서를 넣었다는 소리와 함께 은행으로 발령이 나 버렸다. 초등 담임 교수님께서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빛을 발하며 기대하고 있었는데 왜 은행으로 가는 거냐며 호통을 쳐서 무서웠다. 그때 내가 좀 더 내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따져보는 똑똑 이였으면 그 교수님 심중의 깊은 뜻을 헤아려 좀 더 신중하게 상담을 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그때도 아직 우물 안 개구리였으니 뭘 알았을까? 기껏해야 교수님 말씀을 부모님께 전달하는 정도였으니... 그렇게 선생님 되는 것이 꿈이었으면서도 자기의 갈 길을 부모가 정해주는 대로 걸어가는 멍청이였으니. 그야말로 쉽게 말해서 철이라곤 없는, 쉽게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밥통이었던 나였음이었다. 자기주장이 약했고 남이 살아 주는 듯 강 건너 불 보듯 언제나 우물 안 개구리 시절을 못 벗어난 덜 떨어진 상태로 그때 까지도 정신을 못 차렸던 거 같다.

그래도 이상하게 계속 꿈을 꾸면서 이뤄지리란 것을 확신해 가며 살았던 일이 하나 있었다. 어려서부터 일본어에 관심이 많았다. 고모에게 여러 가지 작문을 지어 일본어로 말하는 것을 배워서 외우면서 언제 일본어를 할 수 있을까를 당연한 일처럼 기다리면서 살았던 것이다. 결혼해서 나의 보물 1호와 2호가 태어났다. 그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그 기회가 온 것이었다. 남편이 일본 주재원으로 발령이 난 것이었다. 마음속에서는 두 가지 갈래 길로 갈팡질팡 이었다. 가자니 4학년이었던 위의 아들이 5,6년 있다가 오면 교육적인 문제로 학교생활 적응문제가 일어날 거라는 우려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일본이란 나라는 어려서부터 ‘왜놈, 아니면 일본 놈..’이라면서 36년간의 설음으로 뭉친 원한 맺힌 선생님들과 부모 그리고 동네 어르신들에게 아주 안 좋은 경험담들을 귀에 딱지 앉을 듯 교육 받으며 살아왔었던 지라 겁도 났었다. 한국을 업신여겨 아이들 마음에 상처라도 입게 한다면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이 서려왔다. 그러나 고집불통인 남편의 우격다짐은 담임선생님과 나는 안중에 없었다. 나의 소원이었던 일본어는 외국인에게 일어를 가르칠 수 있는 일어 교사자격증을 따는 정도의 실력을 쌓게 되었지만, 한국에 왔을 때, 아이들의 학교 문제는 심각했다. 내 꿈은 저절로 이뤄졌지만, 나의 보물 1,2호는 쪽발이라는 수모까지 받아야 할 고생문이 훤하게 열려 있었다.

일본에 있을 때는 오히려 대우를 받아가며 한국인이라는 위상을 빛내며 멋진 형제로 뛰어난 아이들로 칭송 받으며 살아왔는데... 세상에 모국에 와서 더군다나 강남 8학군이라는 학교에 배정을 받았지만 기가 막혔다. 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무식한 선생님들이 쪽발이라면서 구박을 일삼았다나? 동생은 중학생이었는데 선배들이 심심하면 교육시킨다며 데리고 가서 때렸다고... 두 형제는 딱 하루 학교 갔다 와서, ‘엄마 완전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야. 어떻게 자기 나라가 더 어렵고 힘든 거지? 이해가 안 돼’ 라며 귀국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미국으로 가는 게 어떠냐는 말을 거역하고, 한국으로 온 것을 내내 후회하는 두 녀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나 또한 처음이자 마지막 고집을 피워서라도 미국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갈 것을 하는 후회막급한 날들이 쌓여만 갔다. 그때부터 우물 안 개구리가 멋모르고 밖으로 나와 당해 가며 사는 세상은 험악하고 어지러웠다. 어느 것도 상식을 벗어났고, 공중도덕이 없는 세상은 우리 식구를 어느 늪 속에 내동댕이쳐버린 거 같았다. 계속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당하면서 많은 것들을 잃어 갔다. 명랑 발랄 했던 우리들의 웃음을, 언제나 즐거웠던 대화를 잃어갔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아주 놀랍게도 똘똘 뭉치는 가족애를 만들어 갔다.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게 서로를 사랑해 주고, 이해해 주고 아껴가며 일본에서 배워서 익혀 온 좋은 것들을 잃지 않으려 달팽이처럼 속으로 감춰가며 간직해가며 살아냈다. 우리가 겪어낸 것들을 사랑으로 감싸며 <가화성만사성>이란 글을 거실에 걸어 놓고 새겨가면서 서로를 아끼고 굳은 의지로 세상과 타협하는 법을 늦으막하게 나마 익혀 가며 깨달아가며 말이다. 서로를 보살펴 주고, 서로의 안쓰러운 눈물 닦아줘 가며 그렇게 아프게 살아가며 덕을 쌓아오고 있었는데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던 나에게 청천벽력의 같은 사건이 일어났고 우릴 단숨에 무너뜨렸다. 그 일은 우릴 마구 두들겨 팼다. 깡패가 이유를 묻나 불문곡직하고 두들겨 패면 맞아야 하는 그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한 어둠 속 낭떠러지로 밀어 넣어졌다. 우리는 그 나락으로 계속 떨어져 갔다. 나의 1호 보물이 슬어져 갔다. 겨우 남은 2호 보물과 나의 울부짖음 그리고 법이란 것에의 올바름에 억울하기만 한 원통함과 원망, 용서, 거짓말. 진실, 미움, 그리움, 보고픔, 사랑, 하늘, 별, 내 아들.... 내 아들... 나의 인생 50년이 마감되던 날이었다. 1995년 11월 20일 새벽이 나를 개벽시켰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넋 놓고 있기를 거부했다. 세상 밖의 어지러움 속으로 스며들며 이겨내려 발버둥을 친다. 앞으로 다가오는 날들은 조금 더 똑똑하게 살아봐야지...번데기 밖으로 나온 나비처럼 날아 봐야지... 나비야 네가 허공으로 새 삶을 위해 날아오를 때, 나도 나의 새 삶을 위해 네다리 폴짝 거리며 연못으로 뛰어 들 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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