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속으로] 아날로그 감성의 숲, LP의 동굴 ‘장안레코드’

기사입력 2014-03-03 18:40 기사수정 2014-03-04 07:56

▲'장안레코드'에 들어서면 장르별로 분류된 LP판들을 볼 수 있다. 양용비 기자 dragonfly@

음악에 장르는 있어도 시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60년대를 풍미했던 영국 록 밴드 비틀즈(The Beatles)의 음악이 현재까지도 사랑을 받는 이유다. 시대를 막론하고 음악 안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 희로애락은 음악의 장르에 따라 달콤하게 또는 담백하게 때로는 소소하게 표현 된다.

서울시 황학동에는 이 모든 희로애락이 보관돼 있는 곳이 있다. 음악의 연대와 장르를 불문한 엘피(LP)음반과 씨디(CD)가 마치 동굴을 연상케 하는 곳. 황학동의 ‘장안레코드’다.

가나다순, 장르별, 종류별로 깔끔하게 분류된 음반들. 수많은 음반 숲 사이에서 내가 찾는 음반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닌 듯하다. 장안레코드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1층에만 있는 음반이 모두라고 생각하면 오산. 건물의 지하와 2층 창고에도 LP음반들로 빼곡히 들어차있다.

장안레코드의 박임선(55)대표는 1979년에 문을 연 이 후 35년 동안 황학동을 꿋꿋이 지켜왔다.

지난 달 6일 오후. 황학동 골목에는 각종 중고가전과 잡동사니를 파는 가게가 줄지어 있었다. 고장 난 라디오, 멈춰버린 시계 등을 판매하지만 꽤나 활기 넘치는 곳이다. 그 가운데서 존 윌리암스(John Williams)가 연주한 아랑페즈 협주곡이 ‘장안레코드’에서 흘러나왔다. 황학동 골목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했지만, 전성기를 훌쩍 넘긴 물품들과 교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곡처럼 느껴졌다.

구시대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LP. 디지털음반시장이 비약적으로 커지면서 LP 시장은 사양 산업의 길로 접어드는 듯 했다. 그러나 박 대표의 ‘장안레코드’는 이를 빗겨갔다.

“LP시장뿐만 아니라 음반 시장 모두 힘들다던데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꾸준하게 손님들이 찾아오고 계시죠. 그리고 우리 LP 시장에서는 손님의 수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떤 손님이 어떤 음반을 구매하시느냐가 매출에 더 큰 영향을 줍니다.”

실제로 이곳에서 판매하는 LP의 가격은 그 희귀성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천원부터 희귀한 음반은 500만원까지. 손님 한명이 한 장의 LP음반을 산다 하더라도 희귀음반 하나를 팔면 결국 남는 장사인 것이다. 500만원이나 하는 LP음반이 어떤 음반인지 궁금해 귀띔 좀 해달라는 요구에 박 대표는 “우리 가게만의 영업 비밀”이라며 정중하게 손사래를 쳤다.

▲'장안레코드' 내부에 진열된 LP 음반들. 이곳 뿐만 아니라 지하 창고와 2층 창고에 더 많은 LP 음반들이 쌓여있다. 양용비 기자 dragonfly@

◇ 이 음반을 추천합니다. – 샤데이(Sade), 명혜원

“박 사장님 이 계통에서 최고입니다. 모르는 음악이 없다니까요.”

이 날 ‘장안레코드’를 찾은 한 중년남성은 ‘샤데이(Sade)’의 앨범을 구매했다. 박 대표에게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음반을 추천해달라고 하자 그가 추천한 것은 ‘샤데이’의 음반. 이 이야기를 들은 남성이 갑자기 샤데이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며 음반을 달라고 한 것이었다.

“저는 여자 재즈 보컬을 좋아해요. 그 중에서 명반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한국에서는 명혜원, 팝은 샤데이에요. 명혜원은 다소 생소할 수도 있지만 블루스 리듬의 노래를 부른 가수인데 목소리가 굉장히 매력적이에요. 샤데이는 모델 출신이어서 실루엣 또한 대단한데 허스키한 목소리까지 더해져 곡이 감미롭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 음반들은 세대를 막론하고 좋아할 만한 음반이라고 생각해요.”

샤데이와 명혜원을 추천한 박 대표였지만, 그는 사실 섣부르게 음반을 추천 하지는 않는다. 사람마다 음악적 취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추천을 해달라는 손님이 있으면 음악 취향을 먼저 물어본 뒤 적절한 음악을 추천해준다. 그는 음악 초보를 자처한 사람에게는 사이먼 앤 가펑클(Simon&Gafunkel), 비틀즈(The Beatles), 비지스(Bee Gees)의 음반을 가장 먼저 추천한다고 했다.

▲'장안레코드' 안쪽 구석 벽에 붙여진 LP판 표지들. 양용비 기자 dragonfly@

◇ "저에게 딱 맞는 천직입니다…너무너무 행복합니다"

음악적 조예가 깊은 박 대표 때문에 이곳에 발걸음을 하는 이들이 많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들었던 수많은 음반들. 그리고 ‘장안레코드’를 찾는 ‘숨은 고수들’에게서 배운 음악적 지식들이 이제는 그의 재산이 됐다.

‘음학(音學)이 아닌 음악(音樂)’이라는 인식을 자식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특정 음악을 권유하거나 추천 한 적이 없는 그였다. 그러나 피 끓는 음악 마니아의 열정은 숨기기 힘들다. 음반가게 대표가 아닌 음악을 즐기는 마니아 중 한 사람으로서 ‘숨은 고수’의 알짜 명곡을 배웠을 때 느끼는 기분도 남다르다.

“저는 이 일이 너무 좋아요. 아주 딱 맞는 천직입니다. 음악이라는 기억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박 대표는 지금 이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인터뷰 초반 물었던 ‘왜 레코드가게를 하게 됐냐’는 질문에 그는 여섯 글자로 대답했다. 평범한 대답이었지만 인터뷰의 모든 내용을 알려주는 함축적인 복선이었다.

“그냥 좋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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