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이야기를 하기는 무척 조심스럽다. 진정성을 헤아리기보다는 얄팍한 호기심으로 남의 집 창문 들여다보는 일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기에.
그러나 야학 시절 우리 가족을 가장 살뜰히 사랑해주셨기에 지금도 필자에게 따뜻한 난로가 되어주는, 그러므로 가장 소중한 의미가 담긴 청춘의 빛깔 고운 커튼을 조심스럽게 걷어 올려본다.
“얘 네가 뭐 잘난 게 있다고 J선생님께 그렇게 쌀쌀맞게 굴었니?”
“선생님이 너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니? 그것도 모르고….”
요즘 만나는 야학 동급생들은 우연히 화제에 오른 J선생님 얘기를 하다가 필자를 무차별 공격했다. 인간이란 얼마나 오만한 동물인가. 상대방이 조금만 잘해주면 자기 분수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기고만장하지 않는가.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 때 배웠다>라는 책 제목처럼 필자도 연애감정의 알파와 오메가를 10대인 야학 시절에 이미 다 터득했다. 순수한 선생님으로서 보여준 사랑이었는지, 약간은 감정이 있는 마음이었는지 지금도 아리송하지만 당시 필자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셨던 J선생님께 차갑게 굴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를 J선생님께 두고두고 죄송할 따름이다.
가난 때문에 다니게 된 야학교였지만 필자는 그 시절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과 선을 만났고 그 감동은 단지 추억으로만 그치지 않고 살아오는 동안 필자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힘이 돼줬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시절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모든 것에 우선한 아름다움이 오염되지 않은 순백의 영혼이다. 그 자체가 큰 감동이라서 사람들을 정화시키는 힘이 있다. 야학 시절 그런 분들을 알았기에 이후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애를 먹기도 했다. 그렇게 좋으신 분들을 한두 분도 아니고 몇십 분을 알고 있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운인가.
달빛이 교교한 어느 10월의 밤이었다. 가을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고 길섶 댑싸리에 내려앉은 달빛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코끝에 스치는 바람도 달콤 상큼했다. 그날은 야학 수업이 끝난 뒤 J선생님이 필자를 집까지 데려다주시는 길이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교복을 입지 않지만 당시 서울대 농대생들은 날이 선선해지면 감색 교복을 입고 다녔다. 그리고 가슴에는 라틴어로 ‘진리는 나의 빛’이라고 새겨진 배지를 달았다. 다들 어려운 때라서 사복 입을 형편이 못 되는 학생들도 많았겠지만 들어가기 힘든 서울대 교복이었으므로 상당한 애착 내지는 긍지도 있었을 듯싶다.
우리 집에 거의 도착할 즈음 J선생님은 교복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시더니 필자에게 내미셨다.
“애란아 이거 내가 쓰던 건데 너 가져라.”
“싫어요.”
그 시절 겨우 연필 아니면 볼펜 정도나 쓸 수 있었던 필자로서는 쉽게 갖기 힘든 필기구였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해서였다.
“그러지 말고 받아라.”
“싫어요.”
“제발 받아라.”
싫다는데 계속 받으라고 하자 짜증이 나버린 필자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싫다니까요.”
몇 번 그렇게 거절하자 J선생님은 그만 땅바닥에 정중히 무릎을 꿇고 그 만년필을 두 손으로 바치시는 것이 아닌가? 그때 만년필 위에 내려앉아 반짝이던 교교한 달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세상에! 맙소사!’
순간 필자는 너무 당황스럽고 황송해서 얼른 두 손으로 만년필을 받았다. 자신이 존경하는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하시는데 제자인 필자가 더 이상은 버틸 재간이 없었다.
선생님과 헤어져 집으로 들어온 뒤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그 만년필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얀 달빛이 노니는 마루 끝에 앉아서 선생님의 모습을 자꾸 생각하는 밤이었다.
‘아! 너무나도 낭만적이고 황홀한 밤이었어!’
그 후 필자는 두고두고 그날 밤 그 장면을 떠올리며 황홀해했다. 17세 때였고 어느덧 3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날 그 장면이 선명하게 기억된다.
달빛이 찬란히 빛나던
아름다운 젊은 날의
내 소중한 추억이여!
제도권에서 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자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무리가 있을 것이다. 자존심만 시퍼렇게 돋아 있는 제자의 속내를 최대한 배려해주신 J선생님. 현실 속에서는 비록 비참한 신분일망정 상상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고고한 공주였던 필자의 정신세계를 잘 알고 계셨기에 그날 기꺼이 최초의 기사님(?)이 되어주셨던 것이다.
이런 일은 결코 흔치 않으며, 필자만큼 환상적인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많은 추억 속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주인공은 단연 J선생님이다. 이 로맨틱한 멋진 기사님(?)을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어찌 잊을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