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는 입학시험을 치르던 1960년대 중반이었다. 시골이긴 했어도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때는 지역 내 4개 초등학교가 모여 경쟁을 했다. 필자는 운 좋게도 전체 차석(次席)으로 입학시험 결과통지서를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은 잠시, 8남매 중 끝에서 두 번째인 필자가 입학시험을 치르던 해에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빚쟁이들이 몰려와 집은 물론이고 그 많던 전답을 팔아 빚잔치를 하고 말았다. 당연히 중학교 입학금을 낼 형편이 안 되어 등록을 못하고 말았다. 차석이어서 수업료 절반을 면제받았는데도 나머지 3300원을 내지 못해 포기했던 것이다. 뒤늦게 집안 사정을 알게 된 교장선생님이 입학금 전액 면제라는 특별 혜택까지 줬지만 결국 중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었다.
이후 아버지는 입도 하나 덜고 배곯지 말라고 이웃 마을 부잣집으로 필자를 머슴살이 보냈다. 훗날 어머니는 필자를 볼 때마다 “남들 다 보내는 중학교에도 못 보냈는데, 기죽고 풀이 죽어 있을 아이를 어쩌자고 한 입 덜겠다고 머슴살이를 보낸단 말이냐. 그것도 바로 이웃 마을로…”라며 미안하신 마음을 표현하시곤 했다.
어린 마음에 창피하기도 했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님 곁을 떠나야 했던 필자는 두려웠다. 하지만 그 시절 아버지의 말씀은 거역할 수 없는 지상명령이었다.
다행히 초등학교 특별활동 시간에 주산을 배워뒀던 필자는 집주인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 집으로 들어간 후 과수원과 큰 농장에서 일하는 일꾼들과 함께 밥을 먹었는데 집주인이 가끔 식사를 마친 필자에게 “김군은 잠깐 남아 있어라” 했다. 그리고 일꾼들이 나가면 주판을 주고는 장부책을 펼쳐놓고 숫자를 쭉 불렀다. 그러면 필자는 주판알을 굴리며 열심히 계산을 했다. 며칠에 한 번씩 하던 이 일을 통해 어린 나이임에도 집주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사모님도 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 보면 수북하게 담긴 흰 쌀밥이 필자 앞에 놓여 있곤 했다.
어머니는 평생의 한처럼 말씀하셨지만 그때 처음으로 공동체 생활을 경험했고 이를 통해 소중한 교훈도 얻었다. 어떤 환경이든 다 자기 할 탓이었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자 3개월이 금세 흘러갔다.
하루는 점심 무렵 닭 모이를 물지게에 지고 닭장으로 가던 중 초등학교 친구와 마주쳤다. 먼발치에서도 친구임을 단번에 알아차린 필자는 창피한 마음에 지고 가던 지게와 닭 모이통을 내동댕이치고 숨어버렸다.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친구가 부럽기도 했고 지게를 지고 있는 모습이 너무 창피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도회지로 나간 필자는 주경야독으로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를 했고 마침내 수업료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사관학교에 당당하게 입학했다.
밥이라도 배불리 먹으라고 필자를 머슴 보냈던 아버지의 처사를 두고두고 원망하셨던 어머니는 말끝마다 “네 아버지의 주책!”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그 주책(?) 때문에 살아야 했던 3개월의 머슴살이가 필자에게는 오히려 많은 힘이 되었다. 오늘 문득 그 시절이 참으로 그립다. 그리고 부모님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