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길었던 긴 추석 연휴동안

기사입력 2017-10-14 11:34 기사수정 2017-10-14 11:34

올해 추석 연휴는 오래전부터 관심의 초점이었다. 몇십 년 만에 나타난 개기일식이라도 되는 양 소문은 무성했고 언론은 떠들썩했다. 온갖 이유를 붙여 중간에 낀 2일을 휴일로 지정해야 한다는 압력이 줄을 이었고 결국 그 소망은 실현되었다. 결혼을 앞둔 신부들은 무려 열흘이나 되는 기나긴 추석 명절을 시댁에서 보낼 수는 없다며 결혼을 연기했고, 예측대로 공항은 역대 최대의 여행객을 감당해야만 했다.

늘 틈만 나면 함께 여행할 것을 제안하던 딸애가 이번에는 아무 말이 없다. 그러면 그렇지! 드디어 연애가 시작된 것이다. 빨리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라고 압력을 가해왔지만, 막상 여행 제안이 없으니 왠지 섭섭하다. 그래서 이번엔 본의 아니게 역대급 긴 휴일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집에만 박혀 있게 되었다. 짧은 휴가에도 어딘가를 가야 직성이 풀리곤 했는데 이게 뭐람! 기나긴 날을 독수공방이라니.

원래 집에 있는 성격이 못되어 틈틈이 외출을 감행하며 모처럼 한가해진 도심을 쏘다녔다. 연일 북한의 핵무기 협박에도 기어이 100만을 넘긴 해외 여행객만 보면 이 나라의 경제가 매우 흥겨운 듯이 보였다. 그러나 많은 자영업자는 추석 당일에도 한 푼이나마 벌어보려고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동네 시장 상인들은 추석 경기가 이럴 수는 없다며 우울한 얼굴들이었다.

일해야 그날그날 밥을 먹는 일용직 노동자들은 모처럼 휴가를 얻었지만, 돈이 없으니 남는 시간이 쓸모가 없다. 버스 기사와 지하철 기관사들은 연휴와 아무 상관이 없다. 평일이라면 무료급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독거노인들도 긴 휴가가 오히려 난처하다. 그래서 그런지 도시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다니는 것도 이내 싫증이 난다. 그렇지! 우리 삶의 실상이 잠시 해외여행으로 눈 감는다고 감춰지지 않는다.

남은 기간은 편하게 거실에 앉아 TV와 친구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그곳도 돌아가는 상황이 썩 좋지는 않은 모양이다. KBS, MBC 노동조합의 파업으로 대부분 재방송으로 땜빵에 여념이 없었다. 예능은 거의 ‘먹방’으로 때우고 있었고 유명인들이 해외에 나가 하루종일 대여섯 끼를 먹는 엽기적인 프로까지 전파를 탄다. 뭔가 정상이 아니다. 어쩌면 모두 암울한 현실을 잊고자 도피하는 것은 아닐지.

결국, 역시 재탕이나마 영화라도 보는 수밖에 없다. 킬링타임용 영화가 대다수였지만 개중에 관심 가는 영화도 있다. 철 지난 지 한참 되는 낡은 영화인데 왠지 보고 싶은 영화가 눈에 띈다. 톨스토이 원작의 <전쟁과 평화>다. 지금 시국이 그래서인지 아니면 그나마 제일 품위가 넘쳐서인지 모르겠으나 무려 밤 두 시에 끝나는 긴 시간을 졸지 않고 연속 5일간 버티며 끝까지 보아냈다.

대학 때 책으로 읽다가 몹시 지루해했었고 그나마 영화로 본 기억이 선명한데 근 40년 만에 다시 보니 새롭게 읽힌다. 그동안 머릿속에는 영화의 주인공이 안드레이로 각인되어 있었는데 다시 보니 톨스토이가 사랑한 인물은 의외로 피에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는 보이지 않던 미천한 농민으로 포로 생활 시 피에르에게 영향을 미친 플라톤이 바로 작가를 대변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왔다.

긴 추석 연휴의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그동안 보지 못하던 여러 가지를 느낀 것은 뜻하지 않은 수확이었다. 나이 탓일까? 안드레이보다 피에르를 다시 보게 된 것도 기나긴 휴일에 얻은 작은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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