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한쪽에 늘 담아두고 있는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아래윗집에 살아 눈만 뜨면 만났다. 잘 싸우기도 했지만 금세 풀어져 또 어울려 놀곤 했다.
초등학교는 10여 리를 걸어서 가야 했다. 비 오는 날이면 개울물이 불어나 금방이라도 우리 몸을 집어삼킬 듯했다. 그런 개울을 몇 개나 건너야 학교에 도착했다. 겨울은 우리를 더 혹독하게 단련시켰다. 눈보라치는 벌판의 추위는 살을 에는 정도가 아니라 공포였다.
그렇게 늘 붙어 다녔던 친구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를 따라 이사를 가버렸다. 그날의 서운했던 마음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고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5학년이 되던 해 필자도 고향을 떠났다. 친구가 가끔 보고 싶었지만 헤어진 후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 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어느 날 우연히 친구 소식을 듣게 됐다. 부지런한 한 친구가 누님, 형님 등을 두루 동원해 수소문했던 모양이다. 요즘 유행하는 카톡의 힘이었다. 며칠 뒤 전화가 걸려왔다.
“나 영길인데, 너 종섭이 맞니?”
“뭐? 영길이라고?”
마치 묻혀 있던 유물이 빛을 보는 순간 같았다. 통화를 하며 친구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그 시절 그는 외가가 있는 경기도 안성으로 이사를 했고, 중학교 때 키가 185㎝나 되어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배구선수로 뽑혀 들어갔단다. 그러나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아 국가대표로는 발탁되지 못하고 H중공업에 취업했다. 일을 잘해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에 큰 사업도 맡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건설 현장에서 떨어진 무거운 물체가 그의 머리를 내리쳤고 그 여파로 척추까지 주저앉아 하반신을 못 쓰게 되었다고 한다.
얼마 후 경기도 안산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동안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또 세상이 원망스러웠을 테지. 많은 생각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고통 때문에 얼굴도 많이 상하고 우울증으로 성격도 많이 변했을 것 같은 선입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친구의 모습은 필자의 우려를 한 방에 날려 보냈다. 비록 휠체어를 타고 있었지만 어두운 그림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환한 얼굴이었다.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 성경도 많이 읽고 영어와 한문 등 공부도 하면서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감동스러운 얘기도 들려줬다. 같은 고향에 살던 여자 동창이 아이를 낳고 암으로 일찍 사망했는데 보육원으로 보낸 아이를 데려와 30년 동안 키우고 가르쳐 결혼까지 시켰다는 내용이었다. 지금도 세 명의 아이를 더 돌보고 있다고 했다. 몸이 불편하면서도 장애를 입었을 때 받은 보상금과 산재로 나오는 돈으로 이웃을 돌보며 살아왔던 것이다.
머리가 희끗해진 나이가 되었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은 우리를 단번에 동심으로 돌아가게 했다. 밝게 사는 그의 모습에서 오히려 필자가 에너지를 받은 느낌이었다. 필자가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다고 하니 친구는 “내가 너는 그럴 줄 알았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필자는 지위의 높고 낮음, 돈이 많고 적음의 차이가 아니라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해줬다. 자신도 힘들 텐데 남을 돕고 기쁨을 주면서 긍정적으로 사는 친구야말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힘주어 말해줬다.
돌아오는 길, 휠체어에 의지한 채 멀리서 손을 흔드는 친구에게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고맙다, 친구야! 네가 진정한 영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