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라는 사람은 “될 대로 돼라.”
B라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겨우 열넷, 열다섯 살이었던 우리들에게 이따금씩 이런 물음을 넌지시 던지면서 조용히 자신을 성찰해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시던 분이 있다. 바로 통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계신 박순직 선생님이다. 필자가 정신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은사님 중 한 분인데 그 후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다’가 필자 생활의 지표가 되었다.
“사과 반쪽이 남아 있으면 A라는 사람은 ‘겨우 요것밖에 안 남았어?’ 하고 B라는 사람은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았네'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겠어요? 이왕이면 부정적인 시각보다는 긍정적으로 보면서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 거울을 볼 때는 얼굴만 보지 말고 마음도 비춰보도록 하세요. 혹시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은 없는지, 터무니없는 욕심을 담고 있지는 않은지 하면서요.”
야학교 동급생 석순이는 부모님을 일찍 여윈 가엾은 아이였으나 어려운 세월을 살아낸 사람 특유의 원숙함과 포용력이 몸에 배어 있다. 필자에게 그녀는 눈 쌓인 고향집이고 품 넉넉한 어머니다. 야학 시절 석순이네 집은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건넌방 책꽂이에는 당시 한창 낙양의 지가를 올리던 ‘설국’, ‘양 치는 언덕’, ‘빙점’ 등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끝끝내 그 책들을 모른 척했다. 그때만 해도 지독한 국수주의자였고 그래서 손해 보는 것은 필자였지만 어쨌든 너무 싫어했던 일본인들의 문화는 접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신적인 지도자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대로 추종자에게 투영되게 마련인데 당시 박 선생님은 배일사상이 아주 투철하신 분이었다.
일본인을 가리켜 ‘쪽바리놈들’이라고 하실 정도로 극도로 싫어했던 박 선생님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민족의 시인 김소월을 좋아했다. 그 덕에 필자도 김소월의 시를 좋아하게 됐다. ‘진달래꽃’, ‘산유화’, ‘가는 길’,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등을 외우고 다녔는데 처음에는 누구나 알고 있는 김소월의 시가 시시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우리 민족의 정서를 너무도 곱게 그리고 섬세하게 그린 그분의 시야말로 진짜 시라는 결론을 얻게 됐다. 특히 ‘진달래꽃’은 어려운 세월을 내색하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이 땅의 여인들의 고우면서도 강인한 심성을 너무도 잘 그려낸 시다.
“우리는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른 아침이면 홀로 깨어 평원에 어리는 안개와 지평의 한 틈을 뚫고 비쳐오는 햇살 줄기와 만나야 한다. 가만히 마음을 열고 한 그루 나무가 되어보거나 꿈꾸는 돌이 되어봐야 한다. 그래서 자기가 대지의 한 부분이며, 대지는 곧 오래전부터 자기의 한 부분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자연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약한 자가 될 수 없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이용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 속에서 세상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배워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대지 전체가 어머니의 품이고, 그곳이 곧 학교이며 교회라고 믿는다. 대지 위의 모든 것이 책이며 스승이고 서로를 선한 세계로 인도하는 성직자들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교회와 책과 스승을 알지 못한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중에서
얼마나 철학적이고 시적인가! 인디언들의 생각을 적어놓은 이 책을 읽은 후 필자 가슴에는 감동의 물결이 잔잔하게 일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서부극에 그려진 대로 그들을 잔인하고도 호전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편견이(평화롭게 살고 있는 인디언들을 침략하고 학살한 것은 미국인들이었다). 필자가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박 선생님을 통해서였다. 얼마 전 안부전화를 드렸는데 필자에게 읽어보라고 권하셨다.
박 선생님은 야학 시절부터 늘 좋은 책을 선정해서 팔자에게 권유해주시곤 했다. 그러면 그 책을 어떻게든 구해서 보곤 했다. 박 선생님은 시간을 최대한 쪼개 쓰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분이기도 하다.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책상머리에서만 외우려 하지 말고 몇 개 적어서 화장실에도 붙여놓고 몇 개는 부엌에도 붙여놓고 설거지할 때마다 한 번씩 들여다보세요. 버스 타고 갈 때도 영어 단어를 외우기에 좋은 시간입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분들이 우리 선생님들이었다.
특히 박 선생님은 학구적이고 의지가 남달랐다. 새우젓 장사를 하시며 어렵게 선생님을 공부시킨 어머님의 기대가 헛되지 않게 부단히 노력하셔서 교수님이 되었다. 선생님에게 야학 활동은 단순히 감상적 차원이 아니라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필자가 농대에 있어봐서 안다. 연구, 실험, 거기에다 학부 학생들 강의까지 대학원 시절이 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것을.
그런데 선생님은 시간, 경제적인 면 어느 것 하나 여유가 없는 가운데서도 학부 시절은 물론이고 대학원 시절까지도 야학 활동을 하셨다.
1985년 봄, 통신대학교 국문학과 1학년에 입학한 필자는 수원시 고등동에 살고 계시던 박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들쳐 업고 간 세 살 난 아들을 방바닥에 뉘어놓은 후 선생님께 마음을 다해 큰절을 드렸다. 진심으로 존경하는 은사님께 고마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표시하고 싶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