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덜아 내 죽거든 태워서 물치 바다에나 뿌려다오”

기사입력 2018-07-02 10:15 기사수정 2018-07-02 10:15

[부치지 못한 편지]

어머니, 대추꽃이 여물고 원추리꽃이 피었어요.

그간 잘 계셨는지요.

지난해 추석 지나 애들이 집을 장만했다고 해서 보고도 할 겸 찾아뵙고는 꽤 여러 달이 지났어요. 그때 선산에는 검불이 내렸고 큰 소나무 가지에서 부엉이가 귀를 쫑긋거리며 내려다보고 있었지요.


두 분이 생전 그렇게 불화했는데 나란히 누워 산천을 바라보고 계시는 걸 보면 많은 생각이 나지요. 끌끌한 아들을 삼형제나 두었고 전답도 있었고 당시 농가치고는 제법 큰 언덕배기 집에서 동네를 내려다보며 살았는데 두 분은 무엇 때문에 열흘이 멀다 하고 큰 소리를 냈는지요.


싸움이랬자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트집을 잡고 당신은 대꾸를 좀 하시다가 심상치 않으면 옆집으로 피해 가시고는 했는데, 그럴 때면 엄습해오는 불안으로 제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지요. 심한 날은 물 사발이 날아가고 밥상이 엎어지기도 했지요. 대개 싸움은 저녁에 시작되었는데 아버지의 언성이 높아지면 형들은 슬그머니 숟가락을 놓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저만 남았지요. 저는 늘 두 분 사이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는 했지요. 유사시 어머니를 보호해야 했으니까요. 아버지의 재떨이를 씻어온다든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물을 떠다 드리는 등 어떻게든 아버지 비위를 맞추려고 애를 쓰곤 했지요.

손찌검이라도 당하신 날 저녁에는 혹시 어머니가 저를 버리고 집을 나갈까봐 마루 끝에 앉아서 부엌일을 다 마칠 때까지 기다리곤 했지요. 막무가내로 밀려오는 졸음에 벽에다 머리를 찧기도 했는데 그런 나를 마구간의 소가 푸우푸우 하품을 하며 건너다보곤 했지요. 어떤 날은 어머니의 치마끈을 손목에 감고 잤는데 당신은 그런 저를 꼭 안아주곤 했지요. 당신도 기억하시겠지만 제가 한참 커서도 당신 젖을 만지며 자는 버릇이 있었지요. 어머니는 한창 바쁜 가을거두미할 때 낳아 젖을 충분히 못 먹여서 그렇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당신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애착이자 막내의 권리 같은 것이기도 했지요.

어려서는 아버지가 죽어버리거나 집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었어요. 형들에 대한 원망도 대단했지요. 두 분이 싸우거나 말거나 저만 남겨두고 사라져버렸다가 아침이면 아무렇지도 않게 저를 대하는 형들이 얼마나 미웠던지요. 그러나 열 살 위인 큰형과 덩달아 한패가 된 작은형은 그게 별일 아닌 두 분의 일상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겠지요.


사서를 읽고 주역까지 공부해 근동에서는 유식자로 소문난 아버지가 당신을 왜 그렇게 못살게 굴었을까요? 아버지는 늘 당신을 소처럼 미련하다고 했는데 일테면 붓끝처럼 예민한 아버지와 일자무식인 당신 사이에 요즘 말로 하자면 소통이 안 되었던 걸까요? 아니면 우리가 알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요? 그래서 당신은 늘 이런 말씀을 했지요. “난 죽어도 경주 이 씨네 산엔 안 간다. 똑때기 들어두거라” 하고 당부하셨지만 우리는 그 말씀을 지켜드리지 못했고 그런 일로 훗날 저는 ‘성묘’라는 시를 쓴 적이 있어요.


야덜아 내 죽거든 태워서 물치 바다에나 뿌려다오.


어머니는 살아생전 늘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선산이 수만 평이나 있고 아들자식이 이름 석 자는 쓰고 사는 집에서 될 법이나 한 일이냐고 감동골 솔밭 속의 아버지와 합장을 해드렸습니다.

30촉짜리 전등이나 하나 넣어드릴걸,

평생 어두운 집에서 사시던 분들.


그때는 스님들 아니면 화장도 안 할 때였는데 아무튼 아버지와는 무덤 속에서라도 같이 있고 싶지 않다는 말씀인 줄은 알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죽고 없는 사람의 말을 누가 들어주겠습니까.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두 분 다 돌아가시고도 아버지를 미워했던 감정은 오래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시기에 이르러 제 시 속에 당신의 이야기는 여러 번 나오는데 아버지 이야기는 한 번도 안 했다는 걸 알았어요. 그리고 저도 아이들을 낳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의 삶과 인생에 대한 슬픔과 고통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요. 그리고 아버지에게 죄송하고 미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 후로는 일부러라도 작품 속에서 아버지를 만나곤 했지요.


제가 어머니에게 제일 죄송한 것은 결혼을 늦게 한 것이지요. 제가 방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면 늘 환쟁이 하면 비렁뱅이 된다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환쟁이와 유사한 글쟁이가 되어 오래도록 동가식서가숙했지요. 정처를 못 얻고 어쩌다 집에 들르면 “야야, 돈 아껴서 장가가라” 하시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저는 술이 점점 맛있다고 말벌처럼 웅웅거리곤 했지요. 저는 당신이 세상 버리고 10년도 더 지나 아주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어요. 당신의 막내며느리가 된 제 아내는 시부모 얼굴도 한 번 못 보고 결혼을 한 셈이지요. 그리고 애들이 태어나고 친가나 처가의 왕래가 있을 때마다 제게 있어야 할 커다란 배후가 없다는 것을 실감하곤 했지요. 그리고 결혼이든 뭐든 인생이 거쳐야 할 과정에 있어서 정상이 아닌 것은 많은 비정상을 낳는다는 것을 생각하곤 했지요.

그리운 어머니. 그동안 남의 나라를 다녀보기도 하고 하늘같이 높은 집에서 살아도 보고 맛있는 것들을 먹어보기도 했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든 저는 아직 당신 품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때 먹은 음식보다 맛있는 음식도 없었고 어머니가 깔아주던 이부자리의 포근함, 그때 맡은 어머니 냄새보다 더 좋은 냄새도 없었어요.


이제 편지를 마쳐야 해요, 어머니. 아무도 없는 산중에 같이 계시는 세월이 얼만데 이제는 아버지가 뭐라 하시든 아무 대꾸도 하지 마시고 불쌍하게 여기셔요. 남자가 늙고 힘 빠지면 갈 데가 어디 있겠어요. 딸애가 결혼하면 모두 데리고 뵈러 갈게요. 편히 계셔요.


이상국(李相國)시인

강원도 양양 출생. 1976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뿔을 적시며’, ‘달은 아직 그 달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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