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미국인 친구

기사입력 2018-10-30 16:42 기사수정 2018-10-30 16:42

스포츠 장갑을 제조 수출하던 회사에 근무할 때 바이어로 만난 미국인 친구가 있다. 미국 시장을 처음으로 노크했을 때 반겨주고 첫 주문까지 해줬던 고마운 친구이다. 내가 직장을 퇴사하고 개인 사업을 할 때에도 많은 도움을 줬다. 근년에는 아예 일 년의 절반은 생산지 근처인 상해에 머물면서 한국에도 봄·가을로 한번 씩 온다.

하던 사업을 접은 지 꽤 오래됐기 때문에 이제는 그를 접대해야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도 그는 한국에 올 때마다 꾸준히 연락했다. 몇 해는 그런대로 만났으나 그를 위해 따로 시간을 내야하고…, 솔직히 경비가 부담됐다. 저녁 식사도 제대로 해야 했고 2차 장소로 옮기다 보면 만만치 않게 돈을 써야했다. 초기에는 친구 혼자 들어 왔지만 점점 데리고 들어오는 사람이 늘었다. 작년에는 그의 중국인 여자친구, 대만 공급업자와 그의 가족까지 대 부대를 이끌고 온다고 연락이 왔다. 결국 이메일로 솔직한 내 입장을 밝혔다. 만나는 것은 좋으나 너무 많은 비용 지출이 있으니 이제는 본인이 부담하라고 했다. 그는 회사 경비를 여행비로 쓸 수 있는 입장이고 회사에서 나오는 일정한 수입이 없는 나는 힘들다고 솔직 고백을 했다. 답이 없었다. 그래서 마침 폴 포트 공연을 꼭 보고 싶고 바빠서 못 만나겠다고 다음을 기약하고 피했다. 그대로 그와의 인연이 끝나는가 싶었다. 그런데 미국인 친구와 만날 때 경비와 관련해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동대문에 있는 몇몇 스포츠 용품회사에 해외 영업 관련 부분을 자문하고 있는데 내 상황에 대해 털어놓으니 앞으로는 걱정 말라며 그 중 한 업체 대표가 법인카드를 손에 쥐어줬다. 사업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30년이나 된 친구가 연락을 하는데 어떻게 연락을 안 받을 수 있느냐고 했다.

이번에도 그 친구가 한국 방문을 한다고 연락을 해왔다. 동대문 업자가 준 카드를 가지고 그가 30년간 늘 묵던 남산에 있는 한 호텔로 시간 맞춰 갔다. 그런데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아 프론트 데스크에 물어보니 그런 손님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싶어 스마트폰으로 메일을 다시 보니 같은 체인의 강남 쪽에 있는 숙소였다. 친구의 전화번호도 모르고 일단 그 친구가 묵은 호텔 프론트에 메시지를 남기도 택시를 잡아탔다. 금요일 저녁이라 길이 막혀 도저히 갈 수 없었다. 중간에 내려 전철을 몇 차례 갈아타고서야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객실에 없었다. 인근 음식점들을 몇 군데 들어가 둘러보다가 못 찾고 무거운 발걸음을 집으로 옮기려던 순간, 프론트에서 연락이 왔다. 그와 연락이 닿아 만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 한국인 업자 부부까지 일행이 6명이었다. 비싼 쇠고기 대신 돼지고기 숯불구이로 메뉴 수준을 낮췄고 한국인 업자 부부가 밥값을 지불했다. 2차도 비싼 호텔 바 대신 근처 치킨 집에서 생맥주를 마셨다. 그간의 오해는 풀고 부담 없이 계속 만나자고 했다. “30년이나 만난 사이인데 앞으로 몇 년이나 더 보겠느냐”며 “이미 주변에서 고인도 많이 생기고 남은 우리라도 이렇게 만나는 재미로 여생을 보내자”고 했다. 동대문 업자가 쥐어 준 카드는 쓰지도 못했으나 돌아오는 발길은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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