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시간 앞에서는 누구나 인턴일 수밖에 없다

기사입력 2019-02-14 09:28 기사수정 2019-02-14 09:28

[동년기자 페이지] 시니어 인턴에 대한 단상

2년 전 나는 전업주부 30년 경력자로서 사회에 첫발을 딛고 이것저것 무섭게 흡입하던 초년병, 즉 사회생활 인턴이었다. 요즘은 집밥활동가들이 있어 주부 경력도 쓰임새가 많지만 여전히 경력단절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이전의 내 경력이 무엇이었든 환대받을 만한 특출한 경력이 아니라면 주부 30년 경력은 대부분 쓸모없었다.

이력서를 쓰다 보니 불만이 생겼다. 주부로서 아이를 잘 키우는 게 결국 애국하는 길이라고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주부야말로 온갖 재능을 필요로 하는 직업 아닌가. 아이들을 보살피고, 진로를 찾아주고,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성장시켜 내보내니 각종 컨설턴트의 일과 다를 것이 없다. 다양한 능력을 요구하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전문가인 것이다.

다행히 요즘은 경력을 물으면 “집에서 살림만 했어요”라고 말하며 주눅이 들던 사람들도 ‘집밥활동가’라는 멋진 이름으로 곳곳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사실 나는 이들처럼 집밥 전문가는 아니다. 시어머니가 늘 해주셔서 김치도 제대로 못 담근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넙죽 받아만 먹던 전통 장이 떨어졌을 무렵 배우게 된 ‘장 담그기’가 인연이 되어 ‘집밥활동가’를 알게 되었고 코디네이터로서 수익이 생긴 나의 첫 사회생활이 되었다. 계기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언니 장 담그기 수료했지? 요즘 일하는 거 있어요?”

“아니 왜?”

“아, 그럼 됐네. 그분에게 언니 연락처 전해줄게. 그쪽에서 연락할 거고 언니가 해본 일이라 잘할 수 있을 거야.”

후배의 전화 한 통으로 영문도 모른 채 ‘서울시장독대아카데미’ 팀에 합류했다. ‘서울시장독대아카데미’는 서울시 주관으로 24개구 주민들에게 전통 장과 바른 먹거리에 대한 중요성을 전문 강사를 통해 알려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서울시 지역구를 인접한 구끼리 서부, 남부 등으로 묶어 진행했는데 실무진이 대개 집밥활동가나 장 담그기 장인들이었다. 공석이 된 서부의 종로구 담당 코디네이터가 내 역할이었다. 일반 코디네이터 역할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장독대아카데미라니 생소했다. 잘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다.

부랴부랴 내가 담당해야 할 정확한 역할을 알아봤다. 우선 날짜를 정하고 종로구에서 수강생 40명 이상을 수용할 만한 강의실을 찾아야 했다. 연고도 없는 종로구에서 장소 섭외라니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수강생 모집을 위한 웹자보 만들기도 할 일이었다. 강사는 서울시에서 검증한 전문가들이 있었지만 다른 곳과 중복되지 않도록 스케줄을 짜야 했다. 그밖에 강의가 원활히 진행되도록 사전 체크까지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능력을 필요로 했다.

예상대로 40명 이상이 강의를 들을 수 있는 큰 공간은 부족했다. 가까스로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서울시50플러스도심센터’에서 알맞은 강의실을 구할 수 있었다. 신청할 때만 하더라도 유료였는데 서울시에서 공문을 보내준 덕분에 무료로 사용할 수 있었다.

강의실이 정해지자 이번엔 일정에 맞게 강사를 섭외해야 했는데 팀장이 해결해줬다. 강사가 정해진 뒤에는 우왕좌왕하며 이전에 있던 자료를 참고해 웹자보를 만들고 홍보를 시작했다. 그동안 전혀 해보지 않은 일들이었다. 요령이 없으니 생각만큼 성과가 나지 않았다. 40명 인원을 다 채우지 못한 채 강의 첫날이 됐다. 사전 체크를 해야 했으므로 한 시간가량 먼저 도착해 수강생들이 지하에 있는 강의실을 잘 찾아오도록 입구부터 포스터를 붙이고 팀장과 함께 현수막도 걸었다.

강의는 4주 동안 8회에 걸쳐 이어졌다. 강사는 매번 바뀌었는데 하나같이 유익한 내용의 강의를 해줬다. 마지막 수업에서는 팥장 만들기 체험이 있었다. 실습 후에는 자신이 만든 것을 가지고 갔다. 수강생들도 그랬겠지만 수십 년 주부로 살았던 나도 많은 정보를 얻은 시간이었다.

모든 일정이 끝난 날 팀장은 수고했다며 서부 지역을 담당한 코디네이터들에게 맛있는 밥을 사주었다. 이렇게 나의 좌충우돌 첫 코디네이터 활동이 끝났다. 올해는 종로구를 맡을 예정이다. 한 번 해본 경험으로 이번엔 마음이 느긋하다. 수강생을 모으는 방법도 알았다. 아무리 낮선 일들이 생긴다 한들 어떤가. 어차피 다가오는 시간 앞에서는 누구나 인턴일 수밖에 없다. 살아보지 않은 인생은 다 처음이다. 내민 손을 맞잡을 용기만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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