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학중 한국가정경영연구소 소장은 대교 대표이사라는 안정된 자리를 내려놓고, 인생 2막을 ‘가정’이라는 본질로 돌아갔다. 그는 말한다. 노년기 행복의 핵심은 돈도 건강도 아닌 ‘관계’라고. 부부는 작은 조직이고, 가족은 경영의 대상이며, 소통은 노력으로 길러지는 능력이라고.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있는 시니어들에게 그는 “행복한 가족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리더십도 필요하고, 대화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전한다.
가족을 선택한 남자, CEO에서 연구소장으로
강학중 소장은 대교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나 2000년 1월 1일, 한국가정경영연구소를 설립했다. “대표이사라는 자리에 앉아보니 평생을 목매달며 지킬 자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연구소를 설립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교 대표이사 재임 시절 1만 5000여 명의 조직을 이끌며 기업의 전성기를 경험했어요. 겉보기엔 화려한 자리였지만 이 일은 내가 꿈꾸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나한테 더 맞는 일을 찾기 위해선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고민 끝에 글쓰기, 강의, 책 읽기처럼 내면의 에너지를 충전하며 타인과 연결할 수 있는 일이 내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아이들과 식사 한 끼도 함께할 수 없었던 바쁜 삶을 돌아보며, 일과 가족을 병행할 수 있는 삶의 방식도 절실히 필요했단다. 결국 아이들의 “아빠랑 저녁 먹고 싶다”는 말이 그의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강 소장은 배우자와 함께 ‘한국가정경영연구소’를 운영하며 ‘부부, 가정 경영’이라는 새로운 삶의 형태를 꾸렸다. 이는 경력을 지운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옮긴 것이라 할 수 있다.
“부부는 파트너입니다. 서로를 챙기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게 경영의 핵심이에요. 가족을 경영처럼 생각하고 실천하면, 그 힘이 위기의 순간마다 가족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됩니다.”
가족은 지옥일 수도, 보금자리일 수도 있다
“가족은 두 얼굴이 있어요. 따뜻한 보금자리이자 지옥일 수도 있죠.”
이는 가족이 포근한 기억이 되는 동시에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기는 존재가 되기도 함을 의미한다. 강 소장은 가족 안에서 시니어가 느끼는 고립감의 본질은 ‘역할의 상실’에 있다고 진단했다. 자녀를 다 키우고 손주의 관심마저 줄어들면, ‘내가 이 집에서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흔들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는 시니어들이 “나는 집 안의 투명 인간”이라고 고백할 때, 그 말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본다고 했다. 자녀를 키워내고 가족을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필요 없는 사람처럼 느끼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존재해요. 그런데 관계는 역할이 있을 때 유지됩니다. 역할을 잃었다고 우울해하지 말고, 다시 역할을 설계해야 해요. 가족들이 다가오길 기다리지 마시고요. 먼저 인사하고, 대화하고, 내가 여기 있음을 알리세요.”
부부관계도 마찬가지다. “부부 농사에 먼저 투자해야 한다. 자식 농사는 그다음”이라며 “관계의 순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부가 서로에게 무심하거나 갈등이 깊어지면, 그 여파는 자녀에게도 그대로 전해진다. 사랑이 식은 부부 사이에서 자란 아이가 온전히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면, 그 아이의 부모부터 챙기세요. 부부가 서로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함께한 식사 한 끼, 무심한 듯한 배려 하나가 가족 전체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습니다.”

가정도 경영이 필요하다
강학중 소장은 “가정을 하나의 유기체이자 ‘경영의 장’으로, 부부를 공동 대표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행복한 가정은 저절로 굴러가지 않는다. 지속 가능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경영처럼 의식적인 설계와 관리가 필요하다”면서 연말이면 자신만의 ‘가정 연말 결산서’ 쓰기를 권했다. 가족 간 소통은 어땠는지, 경제적 균형은 잘 유지됐는지, 각자의 건강과 정서는 어떤 상태였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라는 말이다. 그 기록을 통해 다음 해의 작은 목표를 세울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싸우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예요. ‘밥 먹었어?’, ‘커피 한잔하자’ 등 일상적인 말이 부부관계의 큰 다리가 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말아야 해요. 안 해봐서 쑥스러울 수 있겠지만 연습해보세요.”
하지만 그 출발선조차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소통’이다. 많은 이들이 대화를 시도조차 하지 않거나, 대화가 곧 갈등으로 이어질까 봐 회피한다. 강 소장은 “대화는 감정의 쓰레기통이 아니다. 상대의 상황과 준비 상태를 고려해야 한다”며 “대화를 잘하는 사람은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잘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조언했다.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떤 말투로, 누구에게 말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고 툭 던진 말은 때로 관계를 단절시킨다. 가족 간 대화야말로 전략이 필요하다는 그의 말은 낯설지 않다. 특히 부모 세대는 자녀나 며느리와의 대화에서 스스로 움츠러드는 경우가 많다. ‘이제 은퇴해서 나를 무시하나?’, ‘내가 학력이 낮아서 무시하나?’와 같은 생각이 앞서면 어떤 말도 소통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오해나 자격지심이 들어오면 대화는 흐려집니다. 내 감정을 먼저 정리하고,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에서 시작하는 게 좋아요.”
다시 말해 말하는 것보다 ‘말할 수 있는 관계’를 설계하는 것이 먼저라는 뜻이다. 그는 가정 경영의 지속 가능성을 크게 관계, 건강, 정서로 정리했다. 이를 위해서는 가족 구성원 각자의 역할과 기대를 명확히 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수다. “가족이라고 해서 말 안 해도 알겠지, 그런 건 없습니다. 가족이야말로 가장 정교한 소통이 필요한 관계입니다.”
특히 시니어 여성들이 자신을 지우고 가족만을 위해 살아온 삶의 패턴에 대해 “본인이 가장 소중한 존재인데 왜 돌보지 않죠?”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강 소장은 희생이 미덕이었던 시대는 지났으며, 자기 돌봄이 곧 가족 돌봄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시니어가 자신의 건강을 챙기고, 배우자와 감정을 나누며, 친구나 이웃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가정 유지의 동력’이라는 얘기다.
“가정도 경영이고, 나도 경영 대상입니다. 가장 중요한 고객이 나 자신일 수 있어요.”
그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나부터 잘 돌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결국 나이 든 이후의 삶은 관계가 곧 자산이며, 그 관계의 중심에 바로 부부가 있는 것이다.

죽음을 미리 이야기하라
나이 듦은 ‘불가역적 변화’다. 이것이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라면, 저항보다는 더 나은 방식으로 수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돋보기, 지팡이, 보청기를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어요. 그건 남에게 피해 주지 않기 위한 도구잖아요. 변화에 맞는 삶의 방식을 찾는 게 더 현명한 모습 아닐까요?”
그는 배우자와 함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음을 밝히며,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자녀와 일찍부터 나눴다고 했다. 유쾌하지 않은 주제인 ‘죽음’을 미리 이야기하는 이유에 대해선 이렇게 말했다.
“죽음을 말하지 않으면 삶이 어색해져요. 누구나 다 죽는 것인데 왜 터부시하나요. 죽음은 감추는 게 아니라 준비해야 하는 일이죠. 준비 없이 맞이하는 이별은 남은 가족에게 더 큰 상처가 된다고 생각해요.”
더불어 “고립은 나이보다 더 빨리 사람을 늙게 만든다”면서 무엇보다 ‘관계’가 중요함을 분명히 했다. 그는 시니어일수록 관계를 정리할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단언하며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다가오지 않아요. 친구에게 먼저 전화하고, 배우자와 함께 식사하고, 이웃에게 따뜻한 안부를 건네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강학중 소장에게 나이 든다는 것은 ‘감소’가 아니라 ‘변화’다. 신체적 기능은 줄어들 수 있어도, 통찰력과 정서적 깊이는 오히려 풍성해질 수 있다.
“젊어 보이려 애쓰는 대신, 나이에 맞게 성숙해지는 게 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