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무대에 선 배우 정동환(鄭東煥·69)을 만나면 단연 그 에너지에 압도될 것이다. 곧 칠순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쏟아내는 힘과 광기에 가까운 열연은 그가 어째서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그의 인터뷰는 정동환을 최근 화제의 중심에 올려놨던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야기로 시작됐다. 1000페이지에 달하는 도스토옙스키의 방대한 원작을 국내 연극 사상 가장 긴 일곱 시간짜리 연극으로 만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그는 무려 4개의 배역을맡았다. 너무 길어서 1부와 2부로 나누고 중간에 인터미션까지 있는 이 상상하기 힘든 프로젝트가 그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내가 아는 기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연극은 두 시간짜리 압축판이었어요. 그런데 연출자인 나진환 교수가 이걸 일곱 시간짜리로 하자니까, 진짜 마음만 있는 건지 능력도 있는 건지 처음에는 의심도 했지. 요즘 그런 사람 많아요. 생각을 갖고 시작하는데, 하다 보면 자기도 이걸 왜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 만약 그러면 참 복잡해지는 거지. 말이 일곱 시간이지 공연을 일곱 시간을 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니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하기로 최종적으로 결정했을 때도 정동환의 고민은 여전했다. 막상 잘하지 못해서 ‘굳이 할 이유가 있었나?’ 하는 얘기를 듣게 된다면, 고생은 몇십 배 하고 듣는 게 비난이면 무슨 가치가 있나 걱정이 된 것이다.
“그런데 당장 나에게 떨어진 배역들을 보니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싶었어요(웃음). 시간이 쏜살같이 막 지나가는데, 한 시간 지나가면 자지러질 것 같은. 재미있는 걸 느꼈어요.”
‘재미있다’는 그의 말 한마디에서, 그가 가진 연극의 혼이 훅 들어왔다.
아직도 재미있는 것을 찾는다
“연습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열한 시쯤 되는데 ‘아니, 내일 아침까지 열 시간도 안 남았단 말야? 뭐부터 분석하고 뭐부터 외워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은 웃으며 얘기하지만 정신적 압박에 하루가 가는 게 너무 아까워서 큰일 났네 했죠(웃음).”
자신의 모든 걸 던져야 하는 극한 상황. 바닥을 치고 거울을 보며 정동환은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했다.
“치열하게 했죠. 그럴 수밖에 없었고. 충분한 여건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무조건 두 시간짜리 연극의 세 배 분량을 해야 한다고 했을 때 오는 문제가 있었어요. 그리고 배역이 네 개로 쪼개져 있으니 머리가 한쪽으로 안 가는 거예요. 지난번 <햄릿> 공연에서는 클로디어스를 했는데, 그건 고통을 많이 겪어도 한 인물로서만 고통스러우면 되는 거니까 괜찮아요. 그런데 이건 한쪽에만 정을 줄 수도 없고, 시간을 줄 수조차 없어서 하나도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새삼 칠순을 앞둔 연극인이 겪은 그 지독한 모험에 대한 경외감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압박감 속에서, 연극 시작하기 전날 밤 기분이 어땠을지 궁금했다.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는 다 포기했지. 이젠 죽었다 하고 포기했어요.”
누군가는 해야 했던 일
정동환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하면서 겪은 고통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말해도 알아들을 사람도 없고 말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내 마음을 아무도 알 수 없었죠. 다만 ‘내가 조금 잘못하면 내 인생은 끝난다’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3m 탑 위에 올라가서 대사 한마디만 빠져도 전체가 어그러져서 아무것도 될 수 없다, 그럼 난 내려올 수밖에 없다. 네 시간을 했든 일곱 시간을 했든, 네 개의 역을 했든 일곱 개의 역을 했든, 아무런 의미가 없는, 어느 순간이 나를 추락시킬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마지막 공연을 끝내고 내려올 때까지 했어요. 그런 절대고독 속에서 ‘그 무모한 짓을 왜 했어?’라고 누가 물어오면 ‘누군가는 해야 하는 거였으니까’라고 대답했을 거예요.”
‘누군가는 해야 했던 일’이라는 말은 연극인으로서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그 말 한마디에 담긴 힘에 자신을 싣고 스스로 가시밭길을 걷는 배우다.
“저는 이 작품이 굉장히 좋았어요. 처음에는 많이 우려했죠. 그러다가 우려가 오히려 작품에 대한 확신으로 바뀌었고 보는 사람도 틀림없이 만족감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관객들도 제 가족들도 만족했고, 그 점에 대해선 안도합니다. 그래서 일곱 시간이 아니라 더 길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왔는가, 뭐하러 왔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정동환에게서는 연극인을 넘어서 연극 그 자체가 삶으로 체화된 듯한 인상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런 그도 건강은 쉽지 않은 숙제였다.
“시골에서 살다가 서울로 오가게 된 것도 건강 때문이에요. 한때는 운전을 못할 정도로 공황장애가 심했어요. 몇 년 지나니 이제는 괜찮아요. 그런데 항상 걱정되죠. 나는 그 상태를 일종의 과부하 상태로 봐요. 자꾸 새롭게 뭔가를 벌이다 보니 내 능력이 한계를 보이는 거고 정신적으로 혼란이 오는 거겠다 싶었어요. 이제 좀 편하게 살아야 하는데 자꾸 어려운 일, 새로운 일을 찾아서 하니….”
“그럼 더 이상 도전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기자가 말하자 그가 긍정했다. 그러나 이내 “그런데 그러면 재미가 없으니…”라고 한다.
보리는 올라올 때 밟아줘야 잘 크기 마련이다. 배우 정동환은 그런 보리밟기 같은 과정을 자신의 자아 본연에 심어놓고 있었다. 그는 자기 안에서 끓어오르는 예술가적 기질, 그 꿈틀거림을 현실과 주고받는 훈련에 철저한 배우다.
“인생을 사는 것도 연극하는 것과 같습니다. 연극은 등·퇴장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연극은 ‘왜 왔는가, 뭐하러 왔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로 온통 채워져 있어요. 인생도 마찬가지예요. ‘세상이 이러니까 이런 거지’가 아니라 ‘진짜 필요한 건가, 필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그에 따라 움직일 줄 아는 것. 그게 연극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고 내가 연극과 인생이 같이 가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유예요. 새로운 세상이니까 더욱 숙고하면서 뭔가를 해야지, 그저 세상이 백세인생 시대이니까 그에 맞춰가는 건 아니죠.”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는 길, 가족
그는 어렸을 때부터 연극을 즐겨 보러 다녔다고 한다. 물론 지금처럼 연극 공연이 많지는 않았다. 1년에 한두 편 정도 볼 수 있었던 시절이다.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1965년에 전국남녀연극경연대회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받으면서 연극인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햇수로 따지면 무려 52년이라는 시간이다. 그는 연극을 하지 않았다면 성직자의 길을 걸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젊어서부터 종교에 심취해서, 어머니의 바람은 내가 성직자가 되는 거였죠. 나는 성직자에 뜻이 없었지만, 그래도 연극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신학교를 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실 지금 하는 일이 거기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 아니고.”
성직자와 연극인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그의 말은 연극에 대한 그의 태도가 얼마나 헌신적인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배우 정동환은 매번 작품 속에서 타인이 이해 못할 고독을 마주하며 살고 있지만, 그는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다. 그에게 가족은 무엇보다 중요한 인생의 의미로 작용하고 있다.
“내가 아무리 일이 중요해도 결국은 가족에 맞춰서 사는 게 아닌가, 자연스럽게 맞춰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가족을 위한 어떤 것을 갖춰나가기 위한 거죠. 누구한테 ‘난 이래서 이래’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연히 가족을 중심으로 가족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지 않는 길을 걷고 있는 거죠.”
그에게 가족은 다시 돌아오는 길과 같았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준 가족으로 어머니와 아내를 꼽았다.
“어머니는 어렵게 사셨어요. 저희가 3남 1녀
였는데,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식 교육을 다 시키셨죠….”
그는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침묵했다. 마치 절대고독 속에 들어간 사람처럼 보였다. 기자는 기다려야 했다.
딸의 삶을 바라보는 기준은 행복
화제를 돌려 그의 둘째 딸 정하늬도 그와 같은 연극인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쉽지 않은 연극의 길을 걷는다는 것에, 그는 ‘좋다’고 말했다.
“딸이 어떤 연기자가 되길 원하는 것은 없어요. 나는 치열한 쪽을 택했지만 딸은 그런 생활에 익숙하지 않아요. 그게 틀렸다는 생각은 아니고, 내 세상하고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은 그렇게 사는구나 싶어요.”
딸의 삶을 인정하는 아버지의 모습. 그러나 그저 방임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나 마찬가지인데, ‘난 이거밖에 안 돼’ 하며 포기하는 순간만 없으면 언제든 가능성이 있어요. 저는 고통스럽고 고뇌가 있는 길을 가야 그 뒤에 보이는 길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피해 간다면 그 뒤에 오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거지. 그런데 그 어떤 것을 보지 않음으로써 만들어지는 삶에 만족한다면 그것도 좋다고 봐요.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을 보면 딸도 알고 있겠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이것은 연극인 선배로서의 질책이 아니라 인정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딸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 않나. 틀림없이 그렇다고 보고 있어요. 만족은 자기마술이거든요.”
행복은 질이 아니라 양일 수도 있다. 순간순간에 느끼는 행복이 모아지면 그게 더 큰 의미와 행복이 될 수 있는 법이다. 정동환은 요즘 세상 사람들이 그 생각을 잃었다는 게 엄청난 안타까움이라고 말했다.
“지금이 행복이어야 하는데, 내일을 위해 지금을 희생해야 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잘못된 것인데 갈수록 심해지고 있죠.”
지금을 위해 견뎌온 삶
삶의 우여곡절을 지나, 정동환은 지금이 가장 평온한 시기로 보인다. 그에게 고통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 묻자 ‘지금 같은 때를 위해 견뎌온 것 같다’고 답했다.
“그때는 그런 생각을 못했지만, 어려운 길을 일부러 자초하고 가는 게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냐’라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나는 그게 필요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계속 새로운 것을 찾는 그가 맞이할 미래를 물어봤다.
“별다른 것은 없어요. 연극하자는 제안이 아주 많아요. 그중에서 내가 해야 할 게 무엇인가 분명히 알고 그 작업을 하는 게 중요해졌죠. 결과보다는 작업을 하려는 목표 자체에 대한 가치에 비중을 두고 작업해야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할 필요가 있지요. 요즘에는 그런 생각이 더 들어요. 자신 있게 나가지 못하고 준비가 덜 된 사람이 뭘 하려고 시도하는 것 같은 느낌? 서커스를 하는 듯한 정신적인 위축이 들 때도 있고, 그러다 죽어버리면 마는 거지 싶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뇌하고 견디는 실체의 기쁨은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요. 그래서 후배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큰 의미는 아니더라도 ‘그런 사람이 있었어’라고 얘기되는 사람이 되면 고맙고 좋은 거지. 어렵더라도 조금 더 견뎌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로 정동환다운 대답이고, 정말 말도 안 되는 대답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정동환이다. 한 번 경험하면 누구도 잊기 힘들 ‘그런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