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던 집에 가고 싶다

기사입력 2018-12-12 08:43 기사수정 2018-12-12 08:43

[동년기자 페이지] 눈처럼 아득한 추억들이 흩어지네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 네 쪼고만 발자국을 눈이 자꾸 내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윤동주 시인의 ‘눈 오는 지도(地圖)’의 한 대목이다. 누구든 눈이 내리는 겨울엔 추억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그리움에 가슴앓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 때문에 설레는 연인들도 있다. 내게도 아련한 추억이 있다. 어린 시절, 시골에는 정말 눈이 많이 왔다. 어려서 더 그렇게 보였겠지만 눈이 왔다 하면 무릎, 가슴 높이까지 쌓이는 게 다반사였다. 눈길을 내야 이웃집에도 다닐 수 있었고, 야외활동은 어느 정도 눈이 녹아야 했다. 시골 마을은 온통 눈으로 덮인 세상이 되고, 크리스마스트리 장식 같은 소나무는 계속 내리는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가지를 늘어뜨려 눈을 털어내곤 했다. 대부분 그렇듯 시골 마을이라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눈 내린 하얀 지붕 굴뚝 위로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감나무의 언 홍시에도 흰 털모자가 씌워져 있었다. 아이들은 눈밭을 뒹굴며 눈싸움을 하느라 옷이 젖는 줄도 몰랐고 해질녘까지 망아지처럼 뛰어다녔다. 그러다 손이 시려우면 개구쟁이들은 근처에서 짚단 몇 개를 가져와 모닥불을 피우고 언 몸을 녹이곤 했다. 젖은 옷 말리느라 불 가까이 다가갔다가 그만 바지를 태워 먹고는 ‘앗! 뜨거워!’ 하며 날뛰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엄마한테 혼날까봐 구멍 난 바지를 고구마 통가리 뒤에 꼭꼭 숨겨놓고 며칠 끙끙 앓다가 이내 발각되어 혼쭐이 나기도 했다.

장독대의 크고 작은 항아리 위에 시루떡처럼 흰 눈이 덮이면 참새떼들이 먹이를 찾아 이 집 저 집 울타리를 몰려다니며 시끄럽게 굴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우리 집 뒤뜰 처마 밑엔 소에게 먹일 쌀겨가 담긴 드럼통이 항상 놓여 있었다. 참새들이 울타리로 몰려오는 것은 이 쌀겨 때문이었다. 수시로 드럼통으로 날아와 마음껏 만찬을 즐기고 갔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미리 드럼통 뚜껑을 열고 지지대에 긴 새끼줄을 붙들어 매어놓고 참새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고는 참새가 울타리를 벗어나 쌀겨 드럼통으로 들어가는 바로 그때 새끼줄을 잡아당겼다. 드럼통 뚜껑이 ‘덜컹!’ 하고 닫히는 순간 잽싼 놈들은 재빨리 빠져나가지만 두세 마리는 갇힌 채 ‘후다닥!’ 날갯짓을 한다. 그렇게 어린 팔뚝이 들어갈 만큼 뚜껑을 열고 갇힌 참새를 한 마리씩 꺼내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러한 행운은 눈이 많이 내려야 가능했다. 들판 위에 눈이 덮여 먹을 것이 없어야 참새들이 인가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지금도 가끔 시골집이 그립다. 함박눈이 내려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이던 집, 그 위로 참새, 토끼, 족제비, 너구리 발자국이 다 찍혀 누가 왔다 갔는지 알 수 있었던 집, 부모님과 어린 형제들이 평화롭게 잠들던 초가집, 지금은 재개발로 흔적조차 없는 내 마음속 초가집. 나이 들수록 그 집에 가고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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