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그린 수묵화

기사입력 2019-01-04 09:41:22기사수정 2019-01-04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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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용도 동년기자가 대로변 자전거 보관대 플라스틱 덮개에서 포착한 '바람이 그린 수묵화'(변용도 동년기자)
▲변용도 동년기자가 대로변 자전거 보관대 플라스틱 덮개에서 포착한 '바람이 그린 수묵화'(변용도 동년기자)

금강산 1만2000봉을 그린 걸까? 산봉우리마다 흑백의 조화, 여백의 미(美)가 담겨 있다. 붓에 먹물을 묻힌 화가가 하얀 화선지 위에 힘 있는 필체로 그린 수묵화 한 폭이 연상된다. 일산 신도시 대로변에 설치된 자전거 보관대 위에 비를 막기 위해 비스듬하게 올려놓은 투명 플라스틱 덮개에 생긴 형상이다. 흙먼지가 비바람에 밀리고 깎이며 만들어진 자국이다. 화가 그렸다 해도 저리 정교할 수 있을까? 근처를 지나던 바람[風]이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붓을 들고 숱한 나날 한 획 한 획 그리다 이제야 완성했지 싶다. 자주 지나던 길이었으나 오늘에야 이 모습을 발견했다. 때마침 석양이 덮개 위에 내려앉는 시간이어서 호롱불 켜진 창문에 비치듯 아련하게 시선을 끌었다. 자연이 그려낸 작품 한 점이다. 카메라에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눌렀다. LCD 화면에 나타난 화상은 여지없는 수묵화다. 또 한 컷의 이야기를 카메라로 쓴다. ‘바람이 그린 수묵화’.

사진의 소재는 어디에나 있다. 간혹 사진을 찍으려 여럿이 함께 가면 혹자는 찍을 것이 없다고 투정하기 일쑤다. 그럴 수 있다. 그 사람의 눈엔 찍을 거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을 때 아름다운 풍경만을 소재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숲만 보면 작은 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숲속을 헤집고 들어가면 나무와 작은 풀 한 포기도 아름답게 다가온다. 사물을 넓게, 크게 보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작은 부분도 살펴봐야 한다. 다양한 형상들을 만날 수 있다.

수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 옆 자전거 보관대는 관심 밖의 사물이다. 흙먼지가 쌓여 형성된 모습을 수묵화로 보는 사람은 드물다. 일상에서 사진 소재를 찾으며 나는 모든 사물을 신중히 바라보게 됐다. 그리고 이제는 버릇이 됐다. 무엇인가를 갈구하면 이루어진다. 흙먼지가 만들어낸 자국을 수묵화로 둔갑시키는 나는 이 분야의 고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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