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슬플 때도 울지 않는다새의 몸짓을 내밀하게 관찰해 보라 새가 운다고 하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새는 슬플 때도 울지 않는다 다만, 무엇에도 묶여 있지 않는 가벼운 몸이라는 것을, 가벼운 몸으로 이 세상의 구석구석을 볼 줄 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임을 소리로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날개를 접고 진득한 고독 속으로 침잠하는 새는 울지 않는다 다만, 가고 오는 시간이 깃털의 흔들림처럼 가볍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 어딘가에 가변운 몸을 눕힐 수 있는 평안의 섬이 있다는 것을 소리로 알리고 싶은 것이다
시집 (2013.시와문화 刊)
최근 정부의 정책 지원으로 과거보다 창업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중장년층의 창업도 늘어나는 추세다.
과거 창업은 일반인에게 주류의 핵심 관심사도 아니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소비시장은 위축됐고 고용불안이 심해지면서 중장년층도 투자적 관점에서 창업을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들어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시작됨에 따라 노후 준비를 위한 생계수단으로서 창업을 고려하는 중장년층이 늘어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창업시장에 들어온 중장년 창업자들이 과거보다 더 치열한 시장경쟁에 내몰리게 되었으며, 시장 경쟁력이 낮은 많은 베이비부머 창업자가 경영악화로 시장퇴출 위기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창업은 기본적으로 시장 안에서 작동되는 경제적 시스템으로, 시장의 소비 사이즈와 밀접한 연관관계를 갖고 있다.
창업은 기본적으로 소비를 기반으로 작동되며 소비가 증가함에 따라 전체 창업시장의 크기가 커지는 것이 정상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2009년 이후 소비시장은 불황기 국면으로 돌입해 위축되고 있지만 과거보다 창업자가 크게 늘어 파이가 줄어들고 있다. 최근 고유가와 맞물려 기초적인 원가상승과 인건비 상승은 기본적인 수익과 마진율을 더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장년층의 폐업자가 늘어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은 안정형 구매를 선호하고 지출을 통제하는 불황기다. 이 시기에 사업적으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현장 중심의 운영관리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사업적으로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운영 면에 있어서도 장기적 관점으로 운영비용을 통제할 수 있는 탄력적인 관리 전략을 세워야 한다. 또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고객 수요에 적합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즉 가격이 높은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저렴해야 시장에서 유리하며 기본적으로 품질력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창업을 한다고 무조건 돈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시장 친화적인 창업이 돈을 버는 것이다. 지역과 시장에 밀착된 생활 아이템으로 경쟁이 치열한 과밀 업종은 피해서 진입하는 것이 좋으며, 충분한 사업적인 준비를 갖추고 창업을 해야 한다.
향긋함을 품은 꽃망울을 터트리는 봄이 성큼 다가온 가운데, 겨우내 웅크렸던 몸을 공연장으로 향해 보자. 3월에는 고전 연극부터 창작 뮤지컬까지 다양한 작품이 활짝 기지개를 켜고 관객을 맞이한다.
서울 충무아트홀이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직접 제작에 뛰어든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은 블록버스터급이다. 생명 창조를 고뇌하는 빅터의 광기와 고독을 유준상, 류정한, 이건명이 각기 다른 매력으로 펼쳐내는 가운데, 박은태, 한지상, 리사 등 실력파 배우들이 포진했다. 국내에서 처음 시즌제로 선보이는 뮤지컬 ‘셜록 홈즈2: 블러디 게임’은 대극장으로 옮겨 전 편의 인기행진을 이어간다. 이번 2편은 긴장감이 짙게 깔린 추리로 스릴러 장르를 완성했다. 현대문학의 거장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이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원작 속에서 한국전쟁 시절 비운의 삶을 살다간 두 형제의 이야기를 통해 묵직한 주제를 드러낸다. 온라인 인기 연애 상담 블로그 운영자인 최정의 실제 이야기로 꾸며낸 뮤지컬 ‘미친 연애’도 신선한 감각을 안겨준다.
한편 곱씹을수록 다채로운 맛을 내는 고전 연극의 라인업도 일품이다. 영국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탄생 450주년을 맞이해 공연되는 국립극단의 ‘맥베스’는 권력과 욕망에 왕이 된 전쟁 영웅 멕베스의 불안한 심리에서 현대인의 모습을 투영했다. 4년 만에 다시 올리는 극작가 피터 쉐퍼의 대표작 ‘에쿠우스’는 2012년 연극계 주요 신인상을 휩쓴 지현준이 주연으로 새롭게 무대에 선다. 칠레 출신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원작을 각색한 ‘과부들’도 눈길을 끈다. 3시간의 상연 시간 동안 몽환적 연출이 돋보인다. 극작가 피터 한트케의 대표작 ‘관객모독’도 5년 만에 관객과 만난다. 배우는 대사를 제멋대로 띄어 읽는 등 기존 언어의 문법을 깨부순다. 또한 욕설과 조롱을 퍼붓고 공연 마지막에는 객석에 물세례를 퍼붓는다.
끝이 보이질 않았다. 희망이라는 단어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병원에서조차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참으로 암담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2011년 5월, 의례적으로 받았던 종합건강검진에서 위암 진단을 받았다. 더 충격적이었던 수술불가라는 의사 소견. 이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이보다 더 무서운 병이 세상에 또 있을까? 어릴 때 천연두, 뇌염, 장티푸스 같은 병명들은 많이 들어 보았지만 모두 남의 일인 줄 알았다. 그 흔한 감기조차 거의 걸려보지 않고 살아왔던, 정말 건강한 육체의 소유자였던 나였으니까.
인간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그 어떤 단어도 이보다 더 무서울 수는 없었다. 끝이 보이질 않았다.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 서툰 기대는 욕심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병원에서조차 치료를 거부한 나는 죽음과 마주하고 있었다.
가족들의 동고동락이 시작되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힘겨운 나날 속에 가족들은 큰 힘이 되어주었다. 삶에 대한 간절함으로 가득한 시간들이었다. 고향인 경주에 내려가 매일같이 절에 찾아가 참배를 해보기도 하고, 암에 좋다고 소문난 것들을 찾아다니기도 하였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2011년 12월, 기적적으로 상태가 호전되어 모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는 것을 나중에 들어 알게 되었다. 선망 증상이었다. 큰 수술을 한 뒤 나타나는 증상으로 수술 전후의 기억이 또렷이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오직 내 손을 잡아주던 가족들의 따스함이었다.
수술 후 생사의 갈림길에서 사투를 벌였다. 그러던 중 2012년 2월, 사랑하는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긴 잠에서 깨어나 병상에서 불현듯 일어섰다. 그리고 나의 지갑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우리카드’를 집어들고 인근 백화점으로 아들 손을 잡고 달려갔다. 입학 축하 양복을 한 벌 사 입히기 위해서였다.
그때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인가를 내몸에서 인지하였다. 작지만 요동치던 그것은 분명 생명이었다.
환생(還生). 나는 지금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아직 완치는 아니지만 95% 수준의 회복상태를 보이고 있다. 지금부터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또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며 살고 싶다.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절실히 느꼈다.
암에 걸린 후부터 치료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시간을 돌아보면 이는 ‘무절제하고 무계획적이었던 나의 삶에 대한 일종의 반성의 기회를 준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병상에 누워 있으며 정말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감사해야 할 많은 분들, 고마워해야 할 수많은 일들, 보답하며 살아야 할 많은 인연들. 이 모든 것에 감사해하고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시(詩) 한 구절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밉게 보면 잡초 아닌 풀이 없고, 곱게 보면 꽃이 아닌 사람이 없으되 내가 잡초가 되기 싫으니 그대를 꽃으로 볼 일이로다.’ 다시 태어난 나의 인생. 정말이지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그대는 때론 가까이 다가왔다가 또, 쉽게 멀어져 갑니다.그대는 때론 제 메라이가 너무나 강렬할 때만아주 짧은 순간만 저를 찾아왔다가또 그렇게 멀어지십니다.제 안에 아무리 큰 그대의 방을 만들고그 방을 아무리 예쁘게 구미고 치장해도늘 비어 있는 그대의 방입니다.그리고, 언제나 우연히 그때가 오면그대 안에도 제 쉴 곳을 만들어 보겠노라고,그 언젠가 만날 그 날이 있을 거라고절 위로하시곤 하지만속절없는 강물만 세월을 따라갑니다.그래도, 전 항상 그대의 지친 삶과 외로움을 위하여제 안에 그대의 쉴 곳을 만들고그대를 기다리렵니다.지금도 그대를 그리면빈 하늘만 바라보이지만…
가만히 웅그리고 앉아흙 한 줌 끌어안고 동토의 경계 넘어왔을이름 모를 풀꽃 하나 본다눈 내리고 찬 바람 부는 겨울두터운 외투 걸친 채혹시 어떤 사내의 흘러내리는 어깨 감싸안으며한 잔의 술에 취해 네 곁 스쳐 지나왔을까 안다, 연연한 마음이야한 줄기 바람의 전언에도 밤 새워 베갯잇 적시며 뒤척이던 것을 잠시 머무르는 순간의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잦아들며 흐느끼기 또는, 삭신이 문드러지도록 살아내기 풀꽃이 꽃대를 세워 한 가계 이루는 일처럼사소한 듯 흔들리지 않는 날들이 반드시 올 것으로 믿는다
웨딩사업을 시작한 지 어느덧 10여 년이 넘어간다. 수많은 신랑과 신부들을 만나면서 결혼을 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작은 생각을 해보았다.
결혼의 뜻은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 관계를 맺음’이고, 부부는 ‘남편과 아내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남편은 혼인을 해 여자의 짝이 된 남자를 상대 여자가 이르는 말이고, 아내는 그 반대다.
이렇듯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짝을 만나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의 결혼은 어떤가.
1차적인 가계도만 보더라도 사위, 며느리, 남편, 아내, 아빠, 엄마 등의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외에도 한국사회에서 결혼을 하면 혼자일 때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결혼해서 누구의 며느리가 되고, 누구의 남편이 되고, 누구의 엄마가 되어 십수 년을 살고 나면 부부의 관계는 멀어지고 언제부턴가 역할놀이를 하고 있는 상황처럼 돼버린다. 결혼이 역할을 늘린 새로운 구속이 돼버리는 셈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의 ‘행복한 결혼’은 무엇일까.
많은 예비신랑, 신부들을 만나면서 느낀 경험을 갖고 판단컨대, 그것은 아마도 아내와 남편으로서의 역할이 아닌 한 사람의 인생 동반자를 만나는 것이 가장 핵심이 돼야 할 것이다. 동반자란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삶을 살든 짝이 되어 함께한다는 것이다.
동반자가 되었을 때, 결혼을 통해 결국 모든 것을 이해하고 서로를 안아줄 수 있는 진정한 부부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노년이 되어 가로수 우거진 공원길을 함께 다정히 손을 잡고 걸어갈 수 있는 동반자. 그런 동반자로서의 짝을 만나 결혼이란 의식을 통해 부부가 된다면, 더없이 행복한 결혼생활이 시작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예비신랑, 신부들에게 웨딩전문가로서 짧은 조언을 덧붙이고 싶다. 결혼이란 역할놀이를 할 짝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어떤 행동을 함께하고 공유할 평생의 동반자이자 짝을 만나는 것이니 주변 누구보다 두 사람에게 집중하라고 말이다.
꽃샘추위로 얼얼한 봄
따끈한 차 한 잔 그리운 날
우암산을 오르다가
노랗게 웃고 있는
생강나무를 만났다
나무는 덜 풀린 가지를 출렁이며
후~ 후~ 하고
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저 나무는 긴 겨울 동안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하였을까?
꽃을 피운다는 건
차갑게 얼어붙은 기억
따뜻하게 풀어 걸어놓는 일
더 멀리 가거라, 후~ 후~
때 이른 계절에 맨 먼저 피어
한 잔의 차 건네고 있는
따뜻한 나무 곁에서
나는 잠시 얼얼한 마음 녹이다 간다
장르 : 코미디, 드라마, 판타지, 멜로/애정/로맨스
제작국가 : 미국
러닝타임 : 82분
감독 : 우디 알렌
출연 : 미아 패로우(시실리아 역), 제프 다니엘스(탐 벡스터, 길 셰퍼드 1인 2역), 대니 앨로(시실리아의 남편 역)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감독 우디 알렌은 타임슬립(시간여행) 판타지를 참으로 현실감있게 풀어나간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타임슬립 영화들이 있었고 숱한 타임 슬립방법들이 연출됐었다.
물속으로 빨려 들어간다든가 하늘에 거대한 구멍이 생긴다든가 절벽에서 떨어진다든가 타임머신 기계에 몸을 싣는다든가 등등. 아마도 수많은 작가들이 며칠밤낮 제대로 자지도 못해가면서 고민한 결과물들이었으리라. 어떤 작가들은 ‘웜홀’을 공부해서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애를 썼을 것이고 어떤 작가들은 하늘과 땅의 조화를 따져가며 옛날 서적들을 샅샅히 뒤졌을 법하다.
하지만 우디 알렌은 그저 과거에서 온 자동차 한 대를 지나가게 만들 뒤 펼쳐진 세계를 받아들일지 말지 그 결정을 전적으로 관객들에게 위임한다. 그런데도 그 방식은 상당히 세련되고 또 매혹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그가 성의가 없어서가 아니다. 다만 그의 사고 메커니즘이 특별할 뿐. 오히려 그의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러한 설정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계산된 것인지 확인하며 또 한 번 탄복해마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는 우디 알렌의 그러한 재능이 그 어느 곳에서보다 빛을 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의 배경은 대공황 시대다. 실업자들이 넘쳐나고 일을 해도 쉽사리 돈을 모을 수 없는 팍팍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는 시실리아는 일이 서툰 탓에 매번 주인에게 핀잔을 듣고 실업자인 남편은 시실리아에게서 돈을 받아 딴 짓을 할 궁리밖에 하지 않는다. 삶이 지겹고 재미없는 그녀는 현실이 아닌 가상의 공간, 즉 영화에서 일상의 도피처를 발견한다. 그녀가 한 참 몰두하던 영화가 이 영화의 제목이자 영화 속 가상의 영화인 ‘카이로의 붉은 장미’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대놓고 바람을 피우고 레스토랑에서 해고까지 당해 어떻게 해서든 이 지독한 현실에서 탈피하고만 싶었던 딱 그 순간! 극장 객석에 앉아 있던 시실리아에게 그녀가 보고 있던 영화 속 주인공 탐 벡스터(제프 다니엘스)가 말을 걸어온다.
“맙소사. 정말 이 영화를 좋아하시는 군요. 우리 얘기 좀 해요.”
시실리아가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를 몇 번 씩 반복해서 보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그 영화 속 주인공은 뚜벅 뚜벅 스크린 밖으로 걸어 나와 시실리아의 손을 잡는다.
우디 알렌은 평범한 여자가 영화 속 주인공과 현실 세계에서 만나게 된다는 설정을 위해 이렇게 탄탄한 구성을 하고 있다. 즉, 이 영화에서 판타지는 현실의 아픔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하나의 극적 장치로 기능하게 되는 셈이다.
이후 주인공 탐 벡스터는 스크린 밖으로 걸어 나온다. 물론 번개가 치지도 않았고 주인공이 약을 먹고 자살 시도를 한 것도 아니며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일 따위는 더더구나 없었다. 시실리아가 객석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을 때 그저 뚜벅 뚜벅 스크린 밖으로 걸어 나왔을 뿐이다. 이러한 우디 알렌의 대범함은 일상으로 판타지를 끌고 들어와 관개들로 하여금 쉽사리 판타지에 빠져들도록 유인하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관객들은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분위기 물씬 풍기는 주인공이 영화 밖으로 걸어 나와 열렬하게 사랑고백을 한다는 그 자체에 정신을 놓는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의 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 학교 짱들이 “너 같은 여잔 처음이야. 네 마음에 들기 위해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겠어.”하고 이야기하는 대신 “뒤져서 나오면 10원당 1대!”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현실 세계이니 말이다.
영화관에서 도망 나온 시실리아와 탐 벡스터는 근처 버려진 놀이공원으로 향한다. 버려진 놀이공원은 그 자체로 상징적인 공간이다. 더 이상 낭만을 찾을 여유가 없어진 사람들은 놀이공원을 황폐하게 버려두었고 그곳엔 쓸쓸한 낙엽만이 뒹군다. 이곳은 황폐한 시대의 상징이자 동시에 현실에 함몰되어 살아야만 했던 시실리아가 버려둔 그녀의 마음 속 마지막 낭만을 상징한다. 무작정 탐 벡스터의 손을 잡고 환상과 낭만의 세계에 들어왔지만 시실리아는 현실에서 떨어져 살아갈 수 없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다시 돌아가야 하지 않아요? 지금은 나라 상황이 좋지 않아요. 불황이에요. 모두가 가난하죠.”
그렇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친 뒤 영화 속에서나 사용하는 가짜 돈을 건네고, 열쇠도 꽂지 않은 자동차 위에 앉아 “영화에선 (열쇠 없이도) 잘 가던데”하고 말하는 남자와 현실 세계에서 영원히 함께 할 순 없는 법이다. 그래서 “(직업이 구해지지 않아도)사랑으로 살 수 있어요.”하고 말하는 탐 벡스터에게 시실리아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한 마디 뿐이다.
“그건 영화 얘기죠.”
탐은 그런 세실리아를 위로하며 부드러운 키스로 그녀를 안심시키려 한다. 하지만 탐은 갑자기 당황스런 표정을 짓는다.
“불은 어디서 꺼지지? 키스가 강렬해지고 사랑을 나눌 때가 되면 불이 꺼지는데....”
현실에서 괴리된 탐의 모습을 보며 조금씩 갈등하던 세실리아의 앞에 영화에서 탐 벡스터를 연기한 배우 ‘길 셰퍼드’가 나타난다. 도망간 탐 벡스터로 인해 영화가 엉망진창이 되어버리자 자기가 직접 탐을 잡으러 온 것. 처음엔 탐인 줄 알고 다가갔던 시실리아는 그가 진짜 배우 길 셰퍼드라는 것을 알고 몹시 흥분한다. 배우로서의 자신을 알아봐주는 세실리아의 모습에 길 세퍼드도 호감을 보이면서 둘 사이에도 묘한 분위기가 흐르게 된다.
그렇게 꿈만 같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 때 시실리아를 둘러싸고 있던 판타지의 공간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남편이 급기야 탐의 존재를 알게 된 것. 남편이 결국 탐과 함께 있는 시실리아를 찾아오면서 탐과 남편 사이에는 몸싸움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하필 탐과 남편이 주먹질을 하고 있는 그 장소가 역설적이게도 교회 안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마치 현실과 이상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이 신 앞에 절규하듯, 인상을 상징하는 탐과 현실을 상징하는 남편이 엎치락뒤치락 싸움을 벌인다. 탐의 주먹에 결국 남편이 쓰러지고 잠시 탐이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넘어진 남편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려는 그때, 남편이 야비하게 공격을 해오면서 결국 탐은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그 후 시실리아와 탐이 나누는 대화에서 이 영화의 주제가 함축적으로 요약된다.
탐, “원래 내가 이긴 건데 반칙 때문에 졌어요.”
시실리아, “그래서 현실은 더 살벌한 거예요.”
시실리아는 탐을 돌려보내 달라고 설득하기 위해 온 길과 우연히 데이트를 하게 되면서 점점 그에게 빠져들게 된다. 시실리아가 연주하는 우크렐라 소리에 맞춰 길이 노래를 부르고 그렇게 그들은 교감하며 급기야 달콤한 입맞춤까지 나누게 된다. 탐의 이상적인 모습과 현실적인 모습을 동시에 겸비한 길에게 시실리아가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그러다 영화관에서 시실리아와 탐, 길 세 사람이 다시 재회하게 되면서 시실리아에게 급기야 선택의 순간이 다가온다. 시실리아를 사이에 두고 길과 탐이 서로 자신을 선택하라고 적극적으로 구애를 한다. 그런 둘 사이에서 시실리아는 어찌할지 모르고 고민하는데... 과연, 시실리아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카이로의 붉은 장미’의 엔딩은 많은 사람들이 가장 훌륭한 엔딩으로 꼽을 만큼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이 영화의 엔딩이 조금만 다르게 그려졌어도 이 영화는 완전히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우디 알렌은 82분간 이 영화를 보여준 이유를 마지막 한 장면을 통해 상징적으로 설명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