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전주시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바로 비빔밥, 콩나물국밥, 한옥마을이다. 옛것을 중심으로 도시가 이어지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른바 ‘핫’한 도시로 거듭난 지도 오래. 살 뽀얀 아가씨들의 화려한 한복 차림을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전주만의 매력이다. 떠들썩, 사람 넘쳐나는 한옥마을을 지나 ‘도란도란 시나브로길’이란 표지판이 서 있는 구
먹을 것이 넘치는 세상에 산다. 우리 시니어들이 모두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서 먹을 것이 넘쳐, 덜 먹으려고 고민하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저녁 모임은 으레 술을 겸한 자리다. 술을 마시려면 저녁 식사 겸 안주를 푸짐하게 주문한다. 처음엔 배가 고프니 허겁지겁 먹지만, 이내 주문한 안주들이 남아돌기 시
영등포에 있는 당중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오목동에 있는 화산목장으로 봄 소풍을 가던 길이었다.
목적지에 거의 다 왔을 무렵, 간밤에 내린 비가 논둑을 넘쳐서 도로 위로 흐르고 있었다. 난감했다. 우리들이 주저주저하며 선뜻 건너지 못하고 있자 구두 또는 운동화를 벗고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남자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당신들 등을 내미셨다. 당신의 구두와
어느덧 3년 전 일이다. 그해에 작은 딸이 마침내 취업을 했는데 그동안 애쓴 엄마에게 보답을 한다며 함께 홍콩 여행을 가자고 했다. 필자도 내심 따라나서고 싶었지만 직장에 얽매어 있던 터라 오붓하게 모녀간의 여행을 즐기라며 응원했다. 걱정하는 아내에게는 자신만만하게 "괜찮아, 염려 말고 잘 다녀와"라고 했다. 하지만 아내와 딸이 여행을 떠난 날 당장 저녁밥
1978년, 필자는 아이 둘을 데리고 남편을 따라 영국으로 갔다. 동경 경유, 알래스카에서 기름 보충, 그리고 비행기를 갈아타느라고 드골공항에서 두 시간이나 기다려야 해다. 그곳에서 만국 인간박람회에 온 듯 온갖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을 봤다.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당시 필자는 호기심이 철철 넘치는 눈으로 다가온 동전 수집가
그 때 참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해서 벌어 온 돈으로 일곱 식구의 입에 풀칠하기 바빴습니다. 사실 우리 집만의 일이 아니었죠. 그땐 다 그랬죠. 아니 다 그렇게 사는지 알았습니다.
이밥에 고깃국이 최고인지 알았던 그 시절에는 학교에서는 흰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냐고요? 쌀이 부족해서였죠. 그러니 쌀
주말 퇴근길 혼자 터벅터벅 걸어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다, 인기척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텁텁한 공기만 꽉 차 있는 실내, 순간 엄습해오는 불안감. 거실은 물론 방마다 불이란 불은 죄다 켜본다. 또 양쪽 화장실에, 베란다까지 구석구석 다 훑은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오늘은 창문을 모두 닫아걸자. 왜? 나 홀로 집이기 때문이다.
“썰렁하니 음
눈이 크고 얼굴이 까무잡잡한 동급생 보배가 소풍날 흥겹게 부르던 노래였다.
서둔야학은 매년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소풍을 갔다.
가까운 칠보산이나 반월저수지 혹은 화산목장 등으로 걸어서 갔다.
소풍날이 오면 비가 오면 어쩌나 싶어 밤잠을 설쳤는데 막상 날이 밝아서 보면 온누리에 햇살이 하얗게 부서지곤 했다. 소풍날 아침의 햇님은 왜 그렇게도 사랑스러워
하루는 남편이 필자를 조용한 찻집으로 불러냈다.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해서 석연찮은 생각이 들었다. 얼마 만에 오는 찻집인가. 그래서일까 전혀 모르는 사람과 앉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커피 향을 맡으며 한 모금 마시려는 순간 남편은 다짜고짜 “나 집을 나가볼까 해, 며칠만이라도 나가서 살아볼래” 하고 말했다. 막상 그런 말을 듣고 보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지인 중에 환갑나이가 되어 남편과 1년간 별거를 선언하고 원룸으로 옮겨 생활하는 분을 만난일이 있다. 그 당시에는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가 봐도 부러워할 정도로 잘사는 집안으로 큰 아들은 변호사이고 작은 아들은 의사다. 남편도 잘 나가는 고위공무원 출신으로 연금만 해도 3백만 원 이상을 탄다. 황혼이혼도 생각해보았으나 단지 남편이 보기 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