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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 브랜드 ‘ㄹ’로 한복의 힘 보여주다
- 색다른 분위기를 자랑하는 상점이 많기로 유명한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평일 점심시간이었지만 가로수길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듣던 대로 각양각색의 개성들이 넘치는 상점들이 즐비했다. 그중 ‘한복 팝니다’라는 네온사인이 기자 눈에 들어왔다. 유리창 너머로 갓을 쓰고 곰방대를 문 흑인 모델 사진이 보였다. 외국인과 곰방대 그리고 한복과의 조화라니. 이곳의 이름은 ‘ㄹ(리을)’, 전통 한복이 아닌 ‘네오(NEO, 새롭다는 뜻) 한복’을 판매하는 매장이다. 21세기 한복을 만들기 위해 의기투합 “저희는 대학교 선후배도, 원래 알고 지내던 사이도 아니에요. 예전에 다른 사업으로 팀이 꾸려졌는데 그때 알게 된 분이 유지연씨예요. 아쉽게도 그 사업이 흐지부지되면서 팀은 해체됐지만, 이후 ‘ㄹ’을 기획하게 되면서 다시 연락하게 됐어요.” ‘ㄹ’은 김종원(25)·유지연(27) 대표가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김 대표는 20세 때부터 사업을 시작한 5년 차 CEO, 패션을 전공한 유 대표는 ‘ㄹ’을 위해 다니던 교복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다. 다른 누구와 함께 뜻을 맞추고 공동으로 작업한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김 대표는 유 대표와의 만남을 운명이라고 표현했다. “사업가 중에선 혼자 일하는 걸 편해하는 사람이 많아요. 저도 그렇고요. 하지만 유 대표랑 일하면서 느낀 건 ‘정말 잘 맞는다’는 거예요. 말하지 않아도 잘 통하는 그런?(웃음)” 두 대표가 함께할 수 있었던 이유는 ‘ㄹ’이라는 브랜드를 통해 한글과 한복을 세계적으로 알리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매장을 열기까지 순탄치 않은 일들이 많았다. “처음엔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어요. 사업하지 말고 공무원 준비를 하라면서요.” 어느 날 갑자기 자식이 잘 다니던 학교를 휴학하고 사업을 하겠다고 하면 대부분 김 대표의 부모 같은 마음일 것이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께 걱정은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한 능력껏 준비했죠. 저희 브랜드 취지에 공감해주신 분들이 투자를 해주시는 덕분에 자본금 0원으로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들의 독특한 아이디어에 매료된 것일까. 매장을 연 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스타일리스트 사이에서는 소문이 자자하다. 그 명성에 힙입어 벌써 10곳 넘게 협찬 의뢰가 들어왔고, 얼마 전에는 가수 솔비의 뮤직비디오 촬영 의상을 협찬하는 등 꽃길을 걷고 있다. 문득 왜 브랜드 이름을 ‘ㄹ(리을)’로 정했는지 궁금해졌다. 만약 자음을 고집했다면 ‘ㄹ’이 아닌 다른 글자를 선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예를 들어 ‘기억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ㄱ(기역)’을 쓸 수도 있고 사람 인(人)을 닮은 ‘ㅅ(시옷)’을 고민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브랜드 이름으로 외국인에게 한글을 알리는 동시에 ‘ㄹ’이라는 브랜드는 한복을 판매하는 곳이라고 알리고 싶었어요. 해외에 나가서 외국인과 대화하다 보면 훈민정음의 우수성을 아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하지만 아직 외국인한테 ‘ㄹ’을 보여주면 숫자 ‘2’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외국인이 저희 매장을 들르거나 브랜드가 유명해진다면 다음부터는 2가 아닌 한글 ‘ㄹ(리을)’로 봐주시겠죠.” 한복의 변신은 무죄 이제 한복은 한국인도 잘 입지 않는, 실용적이지 못한, 옛날 옷이 되었다. 최근 서울시에서 ‘일상 속에서 한복 입기’ 장려책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경복궁이나 인사동 주변으로 대여를 해주는 매장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을 뿐이다. 참 씁쓸한 풍경이지만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외국인 친구가 한복을 대여해 입어보더니 ‘예쁜데 실생활에서 입기엔 불편해. 너희도 불편해서 안 입는 거 아니야?’라고 물어보더라고요. 현대인들에게 19세기 옷을 겨우 알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저 체험에 불과한 일이 되어버린 거죠. ‘우리나라 사람들도 불편해서 안 입는데 과연 외국인이 한복이 예쁘다고 살까? 그리고 입고 다니기는 할까?’ 이런 질문을 해보고 트렌드에 맞춘 한복이 필요하다는 답을 찾았죠. 최종적으로 저희가 선택한 건 한복의 원단을 선택해 옷을 만들자는 거였어요.” 실제로 매장 안에서 본 그들의 옷은 놀랍게도 모두 한복 원단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심지어 청재킷인 줄 알고 만져봤던 옷 또한 말이다. “만져보시면 아시겠지만, 한복 원단이에요. 자수도 직접 디자인하고 있고요!” 자신 있게 말하는 유 대표의 목소리에서 ‘ㄹ’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저희가 디자인한 정장의 경우 두루마기처럼 겉옷을 만들 때 사용하는 양단을 사용했고, 미니스커트는 옛날 속치마나 치마 안감으로 사용한 깨끼원단으로 제작했어요. 이렇게 서양 옷 패턴에 한복 원단을 사용함으로써 동양과 서양 문화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동시에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네오 한복’이 탄생되는 거죠.” 디자인에 있어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무엇이냐고 물어봤을 때 돌아온 답변은 다소 의외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만드는 한복은 한복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디자인에 있어서 신경 쓰는 부분은 없어요. 저희는 옷의 패턴에 그냥 한복 원단을 사용할 뿐이거든요. 원단을 보다가 ‘아, 이 색의 원단으로는 반바지를 만들면 예쁘겠다’라는 생각이 들면 반바지를 만드는 식으로요. 물론 처음 딱 보면 한복으로서는 약간 낯설게 느껴질 수 있겠죠. 근데 그거 아세요? 김치도 처음엔 백김치였는데 고춧가루가 들어오면서 지금 우리가 먹는 빨간 김치가 됐죠. 한복의 이미지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을 알리는 국가대표 ‘ㄹ’이 되고 싶다 수입이 생기면 돈에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ㄹ’의 대표는 달랐다.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에요(웃음). 저희는 돈을 버는 게 목적이 아니라 한국을 알리는 브랜드가 되자고 했거든요. 사실 지금 인기를 끌면서 수입이 생기다 보니 어떤 디자인으로 똑같이 대량생산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우리가 처음 일을 시작할 때 맞춤제작 옷을 많이 만들기로 다짐했어요. 돈 때문에 브랜드의 목적을 잃고 싶지는 않아요.” 이들의 초심을 최근에 다시 한 번 다잡을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ㄹ’의 인스타그램 계정으로 한 혼혈인 학생이 감사 인사 메시지를 보내왔다는 것이다. 해외에 거주하는 이 학생은 혼혈인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친구가 ‘ㄹ’의 옷을 보더니 “너희 나라 옷이냐?”고 물어보면서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줬다는 내용이었다. “뿌듯했죠. 우리가 만든 브랜드로 인해 관심을 받고 또 한복을 알린 거니까요.” 김 대표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고 한다. “저는 원래 검도를 했었는데 국가대표가 되지는 못했어요.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축구나 농구 같은 스포츠 종목에 출전하는 것도 국가대표이지만 제가 생각하는 국가대표의 의미는 조금 더 넓어요.” 김 대표는 20대 초반에 국가에서 지원금을 받아 해외에 많이 다녀왔다고 한다. 이런 활동도 국가대표라고 생각하는 그는 사회 공헌 프로젝트 국가대표로서 해외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ㄹ’ 브랜드의 한복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해외에서 유명인사나 높은 분들을 만나면 ‘내가 국가대표로 이 자리에 왔는데 한국을 알리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며 고민한 적이 엄청 많아요. 그래서 한국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 저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 사연을 받아 ‘ㄹ’의 옷을 선물하고 싶어요. 그분들 한 분 한 분이 특별한 국가대표가 되길 희망하면서요.”
- 2017-05-2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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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세 김형석 교수가 100세를 말하다
- 오랫동안 교육 책임을 맡아오면서 후회스러운 일이 있다. 20대를 맞이하는 젊은이들에게 학교 성적이나 공부에 열중하는 것보다는, 너희들이 50세쯤 되었을 때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모습의 사회인이 되기를 바라느냐는 문제의식과 삶의 목표를 설정하도록 권고하고 이끌어주는 것이 더 소중한 과제였다는 사실이다. 그런 문제를 갖고 인생의 목표가 확실했던 학생들은 대부분 성공했고 보람 있는 장년기를 맞이했다. 그러지 못했던 젊은이들은 자기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방황하기도 하고 삶의 진로나 직업을 바꾸는 어려움과 세월의 낭비에서 오는 불행과 성공의 문을 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사회교육에 참여하면서는 후배들에게 꼭 권고해야 할 사항이 있었다. 당신이 80세를 앞둔 나이가 되었을 때는 부끄럽지 않고 보람을 느끼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스러운 지도자의 모습을 갖고 살았다는 자부심을 갖출 수 있을까를 물어야 한다는 충고다. 구체적으로 지적한다면 확실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갖고 50대부터 사회생활을 마감할 때까지 일과 더불어 정진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런 인생의 목표도 세우지 못하고 사회생활을 위한 가치의식도 없이 장년기 30년을 다 보낸다면 그것은 인생의 상실이며 사회적으로는 무가치한 인생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실패했다는 일로 그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관과 가치관이 없이 살았기 때문에 지도자로서의 기대와 존경심까지도 배신당하는 과오를 범한다. 70 평생의 업적과 노고를 부끄럽고 창피스럽게 마무리하는 사람들이 언론에서도 자주 보도되는 때가 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그런 유혹과 실망스러운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갖출 수 있다면 나는 누구나 행복하고 보람 있는 인생의 탑을 쌓아올릴 수 있다고 믿는다. 내 인생의 탑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볼 필요는 없다. 나는 내 인생에서 보람과 행복을 찾으면 된다. 나이 들면 나에게는 나의 인생의 길과 목표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또 그 사람의 길이 있다. 왜 나와 같은 길을 걷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 잘못인 것이다. 사회 속에 살면서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는 나이가 60쯤이라고 본다. 그리고 75세쯤까지는 누구나 인간적인 성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75세쯤까지 성장한 자세와 위상을 언제까지 연장하는가 함이다. 내 주변의 친구들을 살펴보면 10년 정도는 연장된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그러니까 80대 후반기를 맞이할 때까지는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고 보람 있는 인생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기간은 60에서 80대 후반기까지가 아닐까 하고 기대해본다. 기대가 가능으로 채워질 것으로 믿는다. 내 주변의 친구들도 그렇게 살았고 나 자신도 체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생의 마라톤 경기를 위해서는 90을 목표선으로 삼고 누구나 열심히 달려도 좋다고 믿는다. 또 그것이 100세 시대를 맞는 우리들의 인생설계여서 타당하다고 본다. 가장 먼저 찾아드는 어려움은 건강이다. 많은 사람이 50대쯤부터 관리했다면 유지할 수 있었을 건강을 소홀히 여기거나 방치했다가 뒤늦게 발견하고는 후회하기도 한다. 또 평소부터 잘 조절했다면 충분히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장·노년기를 질병과 함께 보내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80이 넘으면 건강이 최고 제일이라고 해서 건강을 위한 건강이 인생의 전부인 듯이 살기도 한다. 그러나 일을 포기한 건강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유·소년 기간을 병약하게 자랐기 때문에 항상 열등의식과 조심스러움으로 살았다. 50이 되면서 건강의 자신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들을 찾아왔다. 산책과 수영이 건강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이 되었고 그때그때의 정신적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짤막한 휴식이나 오수시간을 갖는다. 나는 운동은 건강을 위해서, 건강은 일을 위해서라는 신념을 갖고 산다. 그래서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일을 즐길 수 있고 일이 다시 내 건강을 이끌어준다고 믿는다. 건강 이외에도 문제가 있다. 가족을 비롯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고 어떤 때는 손아래 가족들의 죽음에서 오는 어려움을 담당해야 한다. 그 고통과 불행은 경혐해본 사람이라야 안다. 그런데 80을 넘기면서는 누구나 비슷한 곤경에 빠질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자녀들의 사업이나 인생의 실패 때문에 그 짐을 분담하는 노년기를 보내기도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 때는 오랜 세월과 많은 사람의 체험을 거울삼아 지혜로운 판단과 선택을 해야 한다. 체념할 것은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했으면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너그러움이 필요하다. 운명에 따른다는 것은 나의 노력의 한계 이상의 사건들을 대하는 지혜다. 나는 90의 나이를 넘기면서 누구나 겪는 시련을 받아들였다. 아내가 먼저 갔기 때문에 혼자 남는 어려움도 겪었다. 평생을 함께 일해오던 존경하는 친구들도 다 떠나갔다. 나 혼자 남은 것 같은 고독이 그렇게 힘겨운 줄 몰랐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아직 일할 수 있는 건강이 남아 있고 정성스럽게 쌓아올렸던 학문과 인생의 교훈이 유지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적인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어 감사히 생각한다. 사람은 아직도 여러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는 세월만큼 행복한 때가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모든 시련과 난관을 극복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봉사와 섬김의 열매가 일을 통해 사회와 겨레에까지 미칠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간절히 기원해왔던 평생의 소원이기도 하다. 나는 최근에도 나와 함께 같은 일을 해왔던 두 친구의 생애를 잊지 못한다. 우리 셋은 60이 될 때까지는 공부하는 일과 학문적인 일에만 열중해왔다. 그러다가 60을 넘기면서부터는 언제나 사회와 겨레를 위한 대화와 걱정을 나누곤 했다. 그런데 사회와 겨레를 위한 관심과 걱정 때문이었을까? 셋이 다 90이 될 때까지 열심히 일했다. 사회가 요청해왔기 때문이다. 김태길 교수가 먼저 떠나면서, 우리 세 사람이 50년의 우정을 계속하면서도 셋을 위한 즐거운 시간도 못 가졌지만 이제는 갈 나이가 되었으니까 조용히 서로 마음으로 위해주다가 차례가 오면 가자고 말했다. 이제 다시 정을 쌓았다가 한 사람씩 가게 되면 남은 사람이 힘들지 않게 남은 몇 해를 보내자고 말했다. 찾아올 이별을 슬픔 없이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던 김 교수가 먼저 떠났다. 몇 해 지난 후에 안병욱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용은 너무 간단했다. “김태길 선생을 보내고 힘들었는데 아무래도 김 선생이 혼자 남을 것 같아”라는 얘기였다 건강이 힘드냐고 물었더니, “왜 그런지 그렇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라면서 말을 끊었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이다. ‘나까지 가더라도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는 당부다. ‘우리가 못다 한 일의 마무리를 위해 수고해주시겠기에 …’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 선생도 세상을 떠났다. 두 분이 다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인생을 살았다. 그 이상의 인생을 산 사람도 많지 않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두 분을 보내드릴 의무가 있다. 그런데 안 교수를 보내면서 슬프지는 않은데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행복한 눈물이었다. >>김형석(金亨錫) 연세대 명예 교수 올해 97세인 김형석 교수는 평남 대동에서 태어나 일본 조치(上智)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 철학과에서 30여년간 후학을 길렀고 지금은 저서활동과 강의를 병행하고 있다. 30년 전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수영을 하고 아침 식사로 계란, 사과를 먹는 게 건강 비결이다. 후배들과 신촌 카페에서 담소를 즐기는 따뜻하고 다감한 한국 철학계의 아버지이다.
- 2017-05-22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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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소한 인생, 특별하게 찍는 김경수 사진작가
- 사진은 죽음의 흔적과 같다고 한다. 사진을 찍던 그 순간은 돌아오지 않고, 다시 그대로 찍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과거를 사진으로 찍는 이가 있다. 전도유망한 과학자에서 어엿한 사진작가로 전향한 김경수(金炅秀·53)씨다. 한때 현미경을 통해 신약(新藥)을 연구하던 그는 이제 뷰파인더를 통해 자신을 탐구하고 있다. 지난 세월의 파편들을 고스란히 담아낸 사진들은 곧 그의 자화상이다. 1990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26세 나이로 최연소 이학박사 학위를 딴 그는 한국화학연구원의 촉망받는 연구원이 된다. 이후 ㈜카이로제닉스와 ㈜셀트리온화학연구소 대표이사로 활약하며 ‘21세기의 뛰어난 과학자 2000인’, ‘21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성’, ‘21세기 가장 위대한 천재 500인’ 등 세계 인명사전에 20여 차례 등재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과학자로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그는 49세라는 이른 나이에 직장과의 안녕을 고한다. “갑자기 은퇴를 결심한 건 아니에요. 몇 년 전부터 서서히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겠다’ 마음먹고 연구원에서 나와 벤처기업을 운영했는데, 온갖 흥망성쇠를 겪으며 심신이 많이 상했어요. 과도한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시달렸고, 위(胃)에 문제가 생겨 건강이 악화됐죠. 일을 그만둬야 하는데, 퇴직하면 뭘 해야 할지가 고민되더라고요. 그동안 과학자로 23년을 살았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은 30년도 더 남았으니 말이죠.” 어린 시절 그림은 곧잘 그렸지만, 글 쓰는 데는 영 소질이 없던 그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기획안도 작성하고 칼럼도 쓰며 붓보다 펜을 잡는 일이 많아졌다. ‘글을 써볼까?’ 하는 생각에 시를 쓰기 시작했고, 2012년에 에 투고한 시가 당선돼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러나 막상 전격적으로 하려니 피를 토해내는 듯한 정신적 고통이 느껴졌다.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고 퇴직한 거잖아요. 근데 아, 이건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싶었죠. 그러다 사진을 시작했는데 글을 쓰는 것보다는 재미있더라고요. 단국대 사진예술아카데미를 다니며 본격적으로 사진을 공부했죠.” 2013년 그는 만 50세를 5개월 남겨두고 회사생활을 정리한다. 남들보다 이르게 퇴직한 뒤 일상의 어려움은 없었을까? 또 그의 바람대로 스트레스는 없는지 궁금했다. “퇴직하고 공허해하는 사람이 많죠. 그건 출근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목표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현재의 삶이 여유롭긴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쉬는 것은 아니거든요. 작품에 대해 늘 무언가를 생각하고 고민하니까요. 즐거운 고민이죠. 나름 스트레스도 받아요. 그러나 과거의 스트레스가 몸에 해로운 것이었다면, 지금의 스트레스는 삶에 탄력을 주고 의미를 주는 활력소 같은 거죠.” 어릴 적 반짝이던 꿈 ‘별이 빛나는 밤에’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그에게 슬며시 동심이 피어올랐다. 한때는 그도 밤하늘에 총총히 떠 있는 별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소년이었다. 시간이 흘러 소년은 과학을 전공하는 청년이 됐고, 반짝이는 별의 빛깔을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을 만큼 영리해졌다. 아쉽게도 어릴 적 느꼈던 별에 대한 환상과 신비는 그렇게 잊혀졌다. 그리고 30여 년 뒤, 중년이 되고 문득 다시 그 별이 보고 싶어졌단다. “첫 개인 사진전 제목이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2015)’이었는데 어릴 적 밤하늘의 별, 그러니까 유년기의 꿈을 재현한 작품들이었어요. 진짜 밤하늘의 별을 찍은 게 아니라, 그 옛날 환상을 가지고 바라보던 별을 물방울과 빛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거죠. 투명한 유리판에 물방울을 만들고 빛을 입혀 사진을 찍으면 반짝이는 별이 담기거든요. 정말 어려운 작업이었죠. 다시 한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못할 것 같아요. 힘들긴 했지만, 그만큼 다른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하는 저만의 방법으로 작품을 탄생시켰다는 자부심이 커요.” 아름다운 꽃송이에 번지는 별빛들이 어릴 적 꿈처럼 반짝이는 그의 첫 전시 작품들은 전문가와 관람객들에게 호평을 얻었다. 독특한 표현 기법도 눈길을 끌었지만, 과학자 출신 신진 사진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이 감탄을 자아냈다. “사진을 시작할 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했어요. 2013년부터 그룹 사진전에 참여했는데, 좋은 평가를 들으니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또 인정해주는 사람이 많으니 재미있어졌죠. 그렇게 본격적인 사진작가의 길로 전향하게 됐어요. 잘 모르는 사람은 ‘은퇴하고 좋은 취미활동 한다’고 하지만, 나는 ‘사진작가’라고 딱 잘라 말해요. 제2인생의 직업이 된 거죠. 은퇴하고 등산 많이들 하는데, 등산이 제2직업이 될 수는 없잖아요. 수입이 많지는 않더라도 평생 직업으로 삼을 만한 일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내면의 자화상 ‘꼭두각시’ 과학자로, 기업가로, 그리고 사진작가로 무엇을 하든 빠르게 좋은 성과를 거두는 그의 삶이 탄탄대로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김 작가의 속사정은 달랐다. 모든 것이 절정으로 무르익던 40대, 수차례 천당과 지옥을 오갔을 정도로 절망과 실패로 얼룩진 나날을 보냈던 그다. “제 이력만 보면 모르겠지만, 사실 그렇게 순탄하게 살지는 못했어요. 직접 회사를 운영하다 보니 수익에 연연하게 되고, 경기가 안 좋으면 빚을 지고, 그러다 회사가 숨넘어가는 지경에 이르면 정말 악몽 같은 날들을 보내야 했죠.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려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차린 회사인데도 자금 때문에 연구도 제대로 못하고 결국 인간관계도 틀어지더라고요.” 김 작가는 당시의 아픔과 시련을 위로하며 자신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로 했다. 지난 전시에서 별을 표현했지만 진짜 별을 찍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자신이 아닌 피노키오 마리오네트를 통해 감정을 이입했다. “카이스트에서 박사학위 받고 마치 내가 세상의 주인공인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살았는데, 현실에 무너지고 상처받으면서 ‘나는 사회라는 쳇바퀴 속에 갇힌 꼭두각시에 불과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두 번째 전시 ‘꼭두각시(Marionette·2017)’는 그런 슬픔과 절망을 담았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모습을 표현한 거죠.” 아무런 표정이 없고, 생명력도 없는 목각 꼭두각시에 그는 ‘빛’을 이용해 감정을 불어넣었다. 라이트 페인팅(light painting) 작업인데, 푸른빛에서 느껴지는 색의 감정, 붉은빛에서 나타나는 색의 온도 등으로 꼭두각시에 감정을 입힌 것이다. “그냥 꼭두각시만 찍어서는 그런 감동을 줄 수가 없잖아요. 하나의 꼭두각시라도 빛에 따라 다 감정이 달라 보여요. 무언가를 추구하는 모습, 우울한 표정, 위축된 감정 등 새로운 이미지와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거죠.” 삶의 경험이 예술이 되다 빛을 이용하다 보니 그는 주로 어두운 곳에서 작업을 한다. 컴컴한 방 안, 조명과 카메라, 그리고 자신을 마주한 피사체와의 고요한 시간 속에 조바심이 나기도 하고 기대감에 들뜨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찍힌 작품들이 세상의 빛을 보았을 때, 몇몇 사람들은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의 작품이 사진이 아닌 애니메이션이나 컴퓨터그래픽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 작가의 작품은 몽환적이고 이색적인 색감이 두드러져 마치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에 대해 그는 실제로 보이지 않는 것을 찍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무대를 세팅하고 암실에서 카메라 셔터를 열고 빛을 칠하고 셔터를 닫으면 내가 했던 행위예술적 작업이 모여 한 장의 사진으로 담겨요. 분명 사진으로 나오지만 그 비주얼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죠. ‘별이 빛나는 밤’의 별도 실제로는 안 보여요. 촬영했을 때 물방울에 반사된 빛이 결과물로 나오는 거죠. 결국엔 내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것들을 만드는 거예요. 마치 연주하는 것처럼.” 김 작가는 아무리 멋있고 좋은 곳이라도 풍경사진은 찍지 않는다. 누구나 가서 찍을 수 있을 뿐더러, 이미 그보다 더 잘 찍어낼 전문가들이 많기 때문이다. 평범한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것에 열정을 보이는 그에겐 과학자로 살아왔던 인생철학이 담겨 있었다. “화학 분야를 연구하다 보니,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건 내 삶의 논리와도 같고요. 남들이 하는 것은 하지 않아요. 사진도 누구나 찍는 건 안 찍어요. 나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작품을 만들죠. 취미 수준을 넘어 예술을 하려면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과학과 예술이 관통하는 부분이 있죠.” 과학자로서의 경험은 그만의 독특한 작품세계 속에도 숨어 있었다. 물방울로 별을 표현하는 작업에서도 표면을 동그랗게 만들거나, 크기를 크게 만드는 등 화학적 원리를 이용한 방법들이 쓰였다고 한다. 남들에게는 어렵지만, 화학을 전공한 그에게는 별것 아닌 소소한 과정이라고. 그는 자신처럼 지난 경험을 무기로 활동하는 중장년 예술가들의 저력이 대단하다고 했다. “요즘 은퇴하고 평생교육원이나 기관을 통해 글, 그림, 사진 등을 공부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젊어서는 돈벌이가 되지 않아 직업으로 삼지 못하다가, 나이 들고 생계의 고충에서 벗어나 예술활동을 하는 거죠. 그중에 잘하는 분들의 작품을 보면, 지난 경험들이 다 녹아 있어요. 문학이든 예술이든 진정성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그동안 축적해놓은 자기 이야기와 감정을 풀어놓으니 엄청난 무기가 되는 거죠.” ‘아바타’, ‘나는 나무로 살고 싶다’ 과거 어린 시절의 꿈, 그리고 청년기와 중년기의 좌절을 담은 두 번의 전시를 마친 그는 이제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을 준비하고 있다. 세 번째 전시는 ‘아바타’, 네 번째 전시는 ‘나는 나무로 살고 싶다’라고 이미 제목도 지었고, 작가노트도 작성했다고 한다. 보통 작가들은 작업을 마친 후에 작업노트를 쓰는데, 벌써 마쳤다고 하는 것을 보니 그만큼 뚜렷한 작품세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아바타’는 장년기의 소회를, ‘나는 나무로 살고 싶다’는 미래에 대한 삶의 고민을 담을 예정이에요. 제 작품들을 보면 비주얼은 특별하지만, 스토리는 소소한 제 삶을 이야기하잖아요. 그 덕분에 주제가 명확해 작품노트도 일찍 쓸 수 있었고요. 이제 어떤 방법으로 표현할지가 관건이에요. 한 가지 고민이 있다면, 지금 작업실을 따로 두지 않고 집에서 작업을 하는데, 작품 스케일이 점점 커지다 보니 불편한 점이 있어요. 아직은 제 작품을 알고 사가는 분들이 많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나아질 거라 생각해요. 그런 부분도 기분 좋은 스트레스라 여기고 현명하게 잘 헤쳐나가야죠.”
- 2017-05-2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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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 엄마 3인방의 연기와 삶
-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김혜자(76), 나문희(76), 고두심(66).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다양한 성격과 문양의 한국적 어머니를 연기해 ‘국민 엄마’라는 타이틀을 얻은 명배우라는 점이다. 그리고 45~56년 동안 시청자와 관객을 만나온 ‘우리 시대 최고의 연기파 여배우’라는 것도 이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최고의 연기력을 인증하는 연기대상 수상자라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그래서 대중과 전문가는 이들에게 ‘연기의 신’, ‘연기 9단’, ‘연기 거장’, ‘연기의 달인’이라는 수식어를 거침없이 부여하고, 후배 연기자들은 이들을 닮고 싶은 롤모델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김혜자, 나문희, 고두심은 ‘최고의 배우’라는 상징적 신화에 머물지 않고 여전히 드라마와 영화, 연극을 통해 대중과 왕성하게 만나는 현재진행형의 최고 연기자다. 이들에게 연기는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삶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프랑스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은 저서 에서 “신인은 몸을, 스타는 영혼을 보여준다”고 했다. 영혼을 보여주는 스타가 바로 김혜자다. 그녀의 연기에 혼이 담겨 있기에 그렇다. 드라마 의 일상성이 짙게 배어 있는 어머니에서부터 영화 에서의 강렬한 엄마에 이르기까지 일상성과 강렬함이 깃든 다양한 캐릭터를 오가며 시청자에게 영혼이 깃든 연기를 보여준 배우가 김혜자다. 이 때문에 작가 김정수는 김혜자를 가리켜 “연기 9단의 입신 경지”라고 표현했고 봉준호 감독은 “김혜자 연기는 접신 수준”이라는 찬사를 했다. 1962년 KBS 1기 탤런트로 연기생활을 시작한 김혜자는 드라마 , , , 영화 , , 연극 등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연극을 통해 대중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했다. 천부적인 재능과 끼 그리고 후천적인 성실함과 노력으로 입신의 경지에 이르는 연기력을 보이는 스타로 우뚝 선 김혜자는 “연기는 직업이 아니라 삶이며 모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녀의 삶도 연기만큼 아름답고 치열하다. 스타로서의 명성과 영향력을 기부와 봉사 등 소외된 사회적 약자를 위해 활용하며 의미 있는 삶을 일구고 있기 때문이다. “제가 한 것은 없어요. 힘든 사람들의 손을 잡으면서 내 삶이 더 행복해지고 더 많은 것을 배웠으니 제가 은혜를 받은 것이지요.” 연기자로 살면서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해 자녀들에게 늘 미안하지만, 자녀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항상 기도한다는 김혜자는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긍정적인 희망과 밝은 꿈을 선사하는 아름다운 어머니다. “누가 배우 나문희를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저는 세상에서 가장 욕심 많은 배우라고 말할 겁니다. 그리고 또 누가 인간 나문희를 말하라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화면에 단 한 컷도 거짓이었던 적이 없었던 인간이라고요.” 에서부터 까지 수많은 드라마에서 나문희와 함께 작업한 드라마 작가 노희경의 말이다. 그렇다. 화면의 단 한 컷도 거짓이었던 적이 없고 드라마와 영화, 연극 속에서 진정으로 소생하는 배우가 바로 나문희다. 그래서 ‘70대의 나이에도 영화와 드라마에 주연으로 나서는 유일한 연기자’, ‘영화감독과 드라마 PD, 작가들이 가장 캐스팅하고 싶은 배우’, ‘믿고 감동하는 배우’라는 수식어가 나문희에게 헌사된다. 라디오가 인기 매체였던 1961년 MBC 성우 공채 1기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한 나문희는 드라마와 영화, 연극으로 활동무대를 넓히면서 대중과 만나왔다. 나문희가 우리 시대 최고의 연기력을 가진 배우로 부상한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주어진 배역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온 힘을 다해 개연성과 진정성을 부여하는 연기자의 자세다. 노역, 비중이 작은 캐릭터 등 온갖 배역을 맡으면서 다양한 연기의 문양을 체득해 최고의 연기자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작은 배역은 있어도 작은 배우는 없다’는 말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연기자가 바로 나문희다. 화장실에 가는 순간에도 대본을 놓지 않는 엄청난 노력과 연습도 오늘의 나문희를 만든 또 다른 힘이다. 영화 에서 나문희와 함께 작업한 후배 연기자 설경구는 “나문희 선생님의 대본이 너덜너덜한 것을 보고 얼마나 연습하고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었지요. 후배들에게 연기자로서의 방향을 제시하는 최고의 선배 연기자입니다”라고 말한다. 나문희는 “연기는 내가 하는 전부이자 전부를 거는 분야입니다. 전부를 거는 것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시청자와 관객은 돌아서지요. 그래서 대본을 받는 순간에서 녹화를 끝낼 때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어요. 저는 연기가 너무 좋아요. 그리고 연기가 이전보다 좋아졌다는 말을 듣기 위해 노력해요. 저에게는 지금도 연기 늘었다는 말이 가장 큰 찬사예요”라고 말하며 웃는다. “엄마(나문희)의 삶은 가족들에게 헌신적이고 생활은 담백해요. 연기밖에 모르는 분이지요.” 연극과 뮤지컬 공연장에서 가끔 만나는 나문희 딸들의 말 속에서 나문희의 삶의 문양을 엿볼 수 있다. 연기대상은 평생 한 번 받기도 힘든 상이다. 최고의 연기력과 인기, 드라마 시청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수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1972년 MBC 공채 탤런트로 연기를 시작한 고두심은 45년 연기생활 동안 KBS 연기대상 세 번(1989년 , 2004년 , 2015년 ), MBC 연기대상 두 번(1990년 , 2004년 ), SBS 연기대상 한 번(2000년 ) 등 총 여섯 번이라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연기대상 수상기록을 세웠다. “처녀 때도 늘 아줌마, 할머니 역을 해 근사한 멜로드라마 주인공 한번 하지 못했다”는 고두심은 탤런트가 된 후 한동안 가정부, 술집 종업원 등 단역에 머물거나 그나마 배역도 없이 녹화장 주변을 서성거리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무역회사 근무와 탤런트 생활을 병행해야만 했던 신인 시절을 지나 다양한 작품과 캐릭터를 맡으면서 연기력의 스펙트럼을 꾸준히 확장하며 최고의 연기자로 부상했다. 로 고두심에게 연기대상을 안겨준 장수봉 PD는 “고두심은 천부적인 연기자다. 고두심이 연기하면 캐릭터가 진정한 생명력을 얻는다”고 찬사를 보냈다. 고두심은 드라마 촬영장에선 놀라울 정도로 캐릭터에 몰입하는 집중력을 보인다. 그리고 촬영장 밖에서는 드라마 캐릭터에 관련한 인물을 지속해서 연구한다. “작품이 주어지면 항상 그 인물의 형상을 그린다. 양치질하다가도 거울을 보면서도 캐릭터를 생각한다.” 이처럼 철저한 고두심이기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배역에도 자신을 맞출 수 있고, 모든 행동을 믿을 만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로 꼽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고두심은 인생의 두 가지를 아름답게 피워낸 보기 드문 사람이다. 하나는 연기에 대한 열정이고, 하나는 삶에 대한 진지함이다”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고두심은 “엄마로서, 아내로서 삶은 아쉬움이 있지만 지난 46년 동안 제 꿈이었던 배우로 살아서 행복했어요. 앞으로도 열심히 하는 배우로 살아갈 겁니다. 인생이 그러하듯 배우로서 오르막길을 올라왔으니 내려가는 일도 지금처럼 잘했으면 합니다”라며 특유의 환한 웃음을 짓는다.
- 2017-05-1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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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생소한 사진이란 길
- 글ㆍ사진 함철훈 사진가 요즘 나는 나의 뿌리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나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급속히 변하는 주위 환경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다. 최근에 사랑하는 가족의 어른을 잃었고, 같이 일하던 동료 교수의 급작스런 부고도 있었다. 그런 중에도 새로 태어난 손녀와의 해후도 있었다. 또한 국가의 근원인 헌법에 대해 생각하도록 나라가 요동쳤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 그리고 국가와 지도자를 되짚어보다가 내 생업인 사진의 근간과 핵심에 대해 따져보고 있다. 나에게 사진은 ‘예측할 수 없음’ 이다. 학교와 군 복무를 마치고 생활전선에서 10년여를 달리듯 일하다 처음으로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지나온 길도 보이고 이곳에 닿기 위해 가파른 비탈을 오르는 주위 사람들도 보인다.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나와 내 가족의 앞날도 계산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때 난 노후를 계산해보았다. 보통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이민자들이 동경하는 그런 상태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안정된 우리 가족의 앞날이 그려졌다. 쾌적하고 아름다운 해변이 먼저 떠올랐다. 잔잔한 파도와 미풍에 손자들과 함께 조개를 줍는, 겉보기에 평화스런 그림이 머리에 그려졌다. 그런데 난 정말 당황했다. 그건 미리 본 절망이었고, 순간 전율이 일었다. 끝이 보인다는 게 어떤 것이지 알았다. 내일이 예측된다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다. 비록 행복하고 아름다운 미래라 해도 난 거기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멋진 내일보다는 앞이 가려져 보이지 않는 가능성의 가치를 그때 알았다. 그렇게 난 보장된 길보다는 보이지 않는 길을 택했다. 노란색 숲 속으로 향하는 두 갈래의 길 아쉽게도 내가 갈 수 있는 길은 하나 (중략) 아, 저 길은 나중에 걸어보리라 인생이라는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져 되돌아올 수 없음을 알면서도 먼 훗날 저 길 어딘가에서 아쉬워하며 말할지도 모른다. 그 숲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고 그리고 나의 인생은 달라졌다고. 사진은 내게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었다. 그렇게 난 가보지 못한 ‘사진’이라는 생소한 길목에 들어섰다. 지금도 사진은 나와 내 주위에 새로운 환경을 선사하고 있다. 여전히 나는 내년, 후년, 내후년뿐 아니라 내일도 예측 못하며 살고 있다. 사진으로 내 생업에 대입시켜도 사진기에 곧 담길 내 작품을 난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왜 그럴까? 기계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도 많다. ‘사진이 예술인가?’로부터 시작해 끊임없이 말들은 만들어지고 있다. 누구나 마음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예술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진이 무엇이냐고 전문가에게 많이 물어본다. 나도 사진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아왔고 지금도 받고 있다. 그렇게 받은 질문 중에 의미 있는 한 질문의 예이다. 당시 동국대학교 사회학과를 맡았던 조은 교수가 한 책에 정리한 글이다. “…나는 미국 캘리포니아 UC 어바인 캠퍼스에 교환교수로 가 있었다. 그때 어바인에서 활동 중인 사진작가 함철훈을 만나게 되었고 사진을 어떻게 정의하냐는 먹물 냄새나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사진이란 카메라가 찍은 것'이라는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그런 단순 명쾌한 답이 아니었다면 사진을 배울 생각을 안 했을지 모른다. 그때부터 나는 ‘카메라의 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후 이 핑계 저 핑계로 그의 집에 머물면서 사진에 대해 얻어듣고 문하생들에게 사진을 가르치는 것을 훔쳐보았다…. ‘인간’이 보는 빛의 속도가 다가 아니라는 것. ‘인간의 눈’이 담을 수 있는 빛의 양이 다가 아니라는 아주 작은 진실에서 시작된 ‘카메라의 눈’에 대한 통찰은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꿔놓는다. 그의 사진 미학은 그래서 아주 단순하고 맑고 깊다.” 사진은 사진기로 담아내는 예술이다. 사진에 어떤 변수 X도 간섭할 수 없는 근본의 길이 사진기에 있다. 그런데 정작 사진에 대한 넘치는 지식이 쉽고 명료한 그 길을 가린다. 정작 사진의 힘은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어둠에서 발휘된다. 사진을 알려면 그곳으로 가봐야 한다. 아무것도 없는 거기서 사진을 경험해보길 권한다. 사실 사진기라고 불리는 카메라의 어원은 ‘비어 있는 방’이다. 사진은 빛마저 차단된 빈 곳에서 시작된다. 아무것도 없는 빈 방 중 한 면의 극히 일부를 깰 때–작은 핀으로 벽을 구멍 내는 순간, 그곳으로 빛이 시간과 함께 쏟아진다. 그리곤 이내 반대편 벽에 좌우상하가 서로 바뀐 상을 맺는다. 사진 영상이며 완벽한 이미지다. 감히 거기에 토를 달지 못한다. 빛 스스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 놀랍고 섬세한 빛의 기적을 자세히 지켜보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 사진가의 몫이다. 그렇게 작가에게는 정작 아무 일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사진 작업이 내 삶을 풍성하게 해줬으며, 거기서 얻게 된 도전과 경험은 더 좋은 영상과 기획을 만들어내는 변증법적 선순환으로 발전해왔다. 그렇게 방금 내 카메라에 담긴 몽골의 풍광이다. >>함철훈(咸喆勳)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대상 수상. 저서로 , 등이 있다.
- 2017-05-1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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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이 됩니까?
- 필자가 여기저기 활동하며 바쁘게 산다고 하면 “돈 되냐?” 하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돈 안 되는 일에 왜 굳이 뛰어 다니느냐는 것이다. 이쯤 되면 대답이 궁색해진다.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댄스에 관해서 보면, 매주 하루는 댄스 클럽 시니어들에게 무료 강습을 해준다. 돈을 받을 수는 있으나 돈을 받으면 부담스럽다. 시설은 서울시에서 무료로 사용하고 있고 강습실 예약, 회원 관리 등은 클럽에서 회원들이 배분하여 한다. 댄스 강습을 한다고 하여 돈을 받는다는 것은 직업이 된다. 그렇다고 아는 처지에 돈을 많이 받을 수도 없다. 그러니 받아 봐야 큰돈이 안 되는 것이다. 돈을 안 받기 때문에 떳떳하고 수강생들이 고마워한다. 수강생들이 돈을 내고 강습을 받는다면, 결석을 해도 미안 해 하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돈을 냈으니 갑질하는 사람이 없다는 보장도 없다. 돈이란 그런 것이다. 장애인 댄스도 마찬가지이다. 매주 수요일, 일요일 저녁 시각장애인들에게 댄스를 가르치고 일 년에 전국체전을 포함하여 서너 번 같이 경기 대회에 출전하는 것이다. 원래 자원봉사로 되어 있다. 그러니 돈을 요구하면 이상하다. 끼워주지도 않을 것이다. 다행히 연습이 끝나고 나면 수고했다며 밥은 얻어먹는다. 어차피 댄스 계에서 활동할 바에는 서울시 장애인 댄스 연맹에 몸을 담고 있는 것이 유리하다. 연관해서 일반인 대회에도 기여하고 운이 좋으면 좋은 파트너를 만나 경기에 나설 수도 있다. KDB 총동문회 활동도 시간을 많이 빼앗는다. 총동문회장이니 각종 모임에 빠질 수 없다. 원래 이 과정은 KDB 사회연대은행에서 ‘사회 공헌’ 차원에서 시니어들을 모집하여 교육하고 배출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세를 졌으니 갚아야 한다. ‘사회 공헌’이라는 것에 대해 잘 몰랐었는데 이만큼 혜택을 입었으면 또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을 만들어 주는 것이 맞다. 시니어 클럽 활동도 그렇다. 일주일에 두 번 3시간 걷기 운동을 한다. 친목을 위하고 자신의 건강을 위해 하는 것인데 여기 “돈 되냐?”가 개입할 수 없다. 모임도 제 돈 내고 더치페이이다. 물론 돈이 안 되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고 재능 기부를 하는 것을 이해 못할 수 있다. 시니어들을 ‘열정 페이’ 대상이라며 돈도 안 주고 부려 먹는 경우도 지탄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고 돈 되는 일만 찾아 나서고 그렇지 않으면 안 나가겠다면 나갈 일이 별로 없다. 스스로 폐쇄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먹고 살만한 사람은 굳이 돈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잘 벌면 좋겠지만, 시니어들이 본격적으로 나서서 큰돈을 벌기란 쉽지 않다. 좋아하는 일 부담없이 재미있게 하면서 즐거우면 된다고 본다. 보람까지 있으면 더욱 좋고.
- 2017-05-16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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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들레 반 선생님
- 65세 이상 고령자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14%를 넘으면 고령사회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올해 고령사회로 진입한다. 우리나라의 고령화 속도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이렇게 급속한 고령화 사회가 되어가는 이유는 수명연장의 측면도 있지만 출산율 감소도 그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고령화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나라가 침체의 늪으로 빠르게 빠져 들어간다고 할 수 있겠다. 필자는 그동안 건축현장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시니어들에게 주거문제 강의를 하고 있다. 강의장에서 만나는 시니어들 중에는 70대 어르신도 있다. 요즘 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는 무료 교육프로그램이 넘쳐난다. 시간 많고 배움의 열정이 있는 시니어들에게 아주 적절한 실질적 지원이라고 생각한다. 많이 움직이고 전공과 다른 다양한 학문을 탐구하는 것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회 각 분야에서 평생 일했던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강의장에서 만나는 시니어들은 대부분 새로운 만남을 즐겁게 생각하고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해 나가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필자의 아버지는 34년 개띠이시니 올해 만으로 83세가 되셨다. 미술을 전공하셨지만 생계문제로 평생 나염공장에서 도안 일을 하셨다. 주로 여성옷의 다양한 문양 디자인을 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장미 문양이 많았다. 큰 도화지에 같은 크기 같은 모양의 장미꽃을 가지런히 반복해서 그리시던 모습이 아직 생생하다. 공장 한 켠에 마련된 작은 작업실 벽에는 아버지께서 그리신 꽃문양 그림이 빽빽하게 걸려있었다. 필자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미대를 지망하려 하자 아버지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다. 그 때는 원망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염 공장이 사양길에 접어든지 오래 되었지만 아버지는 칠십대 초반까지 일을 하셨다. 그만큼 나염 계통에서는 도안사로서 유명하셨고 다행히 시력도 좋으셔서 가능한 일이었다. 칠십대 중반에 퇴직하시고 나서는 실버택배 일을 하셨다. 소득은 많지 않지만 매일 만보이상 걷게 되므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하셔서 반대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여름날 폭우로 계단에서 미끄러지셨고 장기간 병원 신세를 지셨다. 그 후 동네 노인 복지관에서 일본어, 수채화, 동양화, 서예 등을 배우신다고 하셨다. 서양화를 전공하셨으니 기본이 잘되어있어서 수채화 반 선생님 밑에서 조교 활동을 하셨다. 그러다가 수채화 선생님이 먼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선생님 공모를 하게 되었다. 그 때 학생들이 만장일치로 아버지를 선생님으로 추천하였고 아버지는 조교에서 선생님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그 때 아버지 연세가 80이셨다. 노인복지관의 취미 반은 어떤 분위기일까 늘 궁금했었다. 특히 아버지가 가르치시는 학생들을 만나고 싶었다.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림 그리는 열기가 대단하다. 대부분 할머니 학생이다. 선생님 아들이 왔다고 박수도 쳐 주시고 커피도 타 주시고 토마토도 썰어주신다. 벽에는 학생들이 그린 작품을 빽빽하게 붙여두었다. 저건 내 그림이다, 저건 누구 그림이다 하면서 자랑을 하신다. 반 이름이 그냥 수채화 반이라고 해서 ‘민들레 반’으로 이름을 지어드렸더니 다들 좋아하셨다. 필자가 도화지에다가 민들레 그림을 그리고 민들레 반 학생들의 건강기원 글을 캘리그라피로 써 드렸다. 그림을 그리는 필자 주위로 할머니 학생들이 몰려들어 “부전자전 이네” 하신다. 필자의 그림도 벽에 걸렸다. 참 오랜만에 수채화 붓을 들어보았다. 민들레 반 학생들을 보면서 고령사회를 사는 하나의 좋은 모델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더 멋진 삶을 살고 계신다. 여학생들이 삶의 에너지 지수를 엄청 올려줄 것이다. 민들레 반 분위기를 어머니가 보시면 상당히 질투심이 생기실 것으로 우려된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저녁 어머니께서 전화하셨다. “아니, 그 많은 할머니들한테 뭔 점심까지 다 사주고 그러냐!”
- 2017-05-16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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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의미한 삶 거부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 암과 같은 질환 환자의 말기는 무척이나 힘겹다. 진통제가 투여되어도 고통은 잘 가시지 않고, 치료를 중단하고 빨리 죽게 해달라고 빌고 싶어도 말을 꺼내기 힘든 상태가 된다. 그리고 환자 입장에선 무의미할 수도 있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힘든 상황이 몇 달 혹은 몇 년 지속될 수 있다. 올 8월 이러한 악순환을 막기 위해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라는 긴 이름의 법이 시행된다. 그리고 이 법의 중심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라는 한 장의 서류가 있다.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약칭 연명의료결정법은 흔히 ‘김할머니 사건’으로 불리는 사건의 촉발 계기가 됐다. 이 사건은 2008년 세브란스에서 고인의 뜻에 따라 김할머니의 가족이 병원 측에 연명치료 중단을 요청하면서 시작됐다. 병원 측은 연명의료 중단을 거절했고, 결국 1년여에 걸친 법적 공방 끝에 법원은 연명의료(인공호흡기 사용) 중단을 허용했다. 하지만 얄궂게도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이후에도 김할머니는 200여 일을 자가호흡으로 생존했다. 이 사건은 국내 최초로 존엄사를 인정한 사례로 기록되면서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관한 문제와 의료기관이 중단을 결정할 수 있는 연명치료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의문 등이다. 이런 연명의료 거부에 관한 법률은 전 세계적으로 사례가 많은 편은 아니다.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아직 관련 법률이 제정되어 있지 않다. 다만 엔딩노트 등을 통해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의 종류와 여명에 대한 고지 여부, 연명의료와 존엄사에 대한 의견 또는 장기기증, 의학용 시신기부를 위한 등록 유무를 작성해 가족에게 알리도록 유도하고 있다. 연명의료결정법이란? 김할머니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환자의 자기결정권 문제는 연명의료결정법의 제정으로 이어졌다. 보건복지부의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지난해 2월 제정됐고, 올해 8월 4일부터 정식으로 시행된다. 그러나 연명의료 중단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연명의료 중단의 결정을 위한 관리 체계나 이행과 관련한 법률의 일부 조항은 2018년 2월 4일에 시행될 예정이다. 사실상 연명의료 거부는 내년에나 가능한 셈이다. 연명의료결정법을 요약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암이나 후천성면역결핍증, 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 만성간경화로 인해 회복 가능성이 없고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말기 환자가 임종 과정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통해 연명치료 중단을 요청할 수 있고, 담당 의료진은 환자의 의견과 환자 상태 등을 고려해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연명의료는 김할머니 사건에서 핵심이 됐던 인공호흡기뿐만 아니라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등을 의미한다. 통증 완화를 위한 의료 행위나 물, 산소, 영양분 공급은 중단할 수 없다. 연명의료 거절 방법 연명의료결정법에서 규정한 환자의 연명의료 거절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환자가 본인이 치료받고 있는 병원(의료기관)에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을 요구하는 방법이다. 연명의료결정법에서 정한 말기 환자가 담당의사에게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을 요청하면, 의사는 연명의료 중단 결정이나 호스피스 이용 여부 등을 논의한 내용을 포함해 서류를 작성하게 된다. 물론 환자의 서명이나 담당의사의 서명은 필수다. 말기 환자는 아니지만 본인의 신념에 따라 사전에 미리 연명의료에 대한 중단 의사를 정해놓고 싶을 때 등장하는 것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의료기관뿐만 아니라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관한 사업을 수행하는 비영리법인이나 단체에서도 등록이 가능하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는 연명의료 중단에 관한 결정과 호스피스 이용 여부, 작성 일시와 의향서의 보관 방법 등을 기재하도록 되어 있다. 실제로 아직 법 시행 전이지만 일부 사단법인에서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양식을 공급하고, 작성된 의향서를 보관하거나, 의향서 기록에 관한 카드를 제작해주는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다. 비영리기관의 형태를 띠지만 일부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소액의 기부금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현재 운영되는 사단법인이 연명의료결정법의 본격 시행 이후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등록기관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또 등록기관으로 공식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해도 이들이 현재 제공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법에서 정해놓은 규정과 다르거나 시행 전 개정 등으로 인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는 점 역시 주의해야 한다. 의료계에서는 여전히 논란 중 이 법 시행에 대해서는 아직 의료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대상 환자가 사실상 암이나 후천성면역결핍증, 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 만성간경화 환자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외 죽음을 앞둔 많은 환자들의 권리는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논란이 되고 있다. 또한 법에서 정한 임종 과정이나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 등의 표현이 모호해 이를 의료인이나 의료기관이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에게만 적용하는 보수적 태도를 취하면 오히려 연명치료 중단을 원하는 환자의 고통을 늘려 원래의 법 취지를 상실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법의 구조상 환자가 본인의 연명의료 거부를 분명히 밝히더라도 최종 집행에 관한 결정권은 의료인과 의료기관에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원활한 제도의 시행을 위한 여러 가지 보완 노력은 정부 부처와 의료계를 통해 지금도 이뤄지고 있다. 이로 인해 본격적인 시행이 이루어지는 내년 2월에는 시행령이나 시행 규칙에 따라 현재의 예상과 달라질 수 있다. 때문에 연명의료결정법이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확실한 윤곽은 제도의 시행 시기까지 기다려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 2017-05-11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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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 브라보마이라이프 동년기자 2기 출범식에서 의례적인 선물처럼 건네받은 책이 바로 기시미 이치로가 쓴 라는 책이다. 바쁜 일상과 맞물려 책은 한동안 거실 한 귀퉁이에 처박혀 버렸고 잊을만한 시간에 ‘독후감’ 이라는 것을 써야 한다는 당부의 말이 떠올라 먼지를 뒤집어 쓰고 책상밑에 팽개쳐 졌던 책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첫장을 넘기면서 격한 공감과 함께 책 속으로 빠져들면서 단숨에 한 권을 통독해 버렸다. 아들러 심리학의 권위자인 기시미 이치로가 ‘나이 든 부모와 어떻게 지낼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직접 자기 삶에서 체득한 심리학적 고찰을 바탕으로 제시했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며 '나이 든 부모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화두는 개인을 넘어 사회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저자인 기시미 이치로는 젊은 나이에 뇌경색을 앓아 재활 중에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를 목전에서 경험하고 삶의 궤도가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나이를 지나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자신에게 인생이란 어떤 것인지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어떤 것인지 사유(思惟)하는 계기를 경험한다. 부모님 두 분을 병수발 했던 저자이기에 현실에서 직접 맞닥뜨리게 되는 사소한 부분을 언급할 때 크게 공감하게 된다. 별것 아닌 일이지만 우리가 실제로 부딪치게 되는 것은 항상 작고 사소한 것들임을 감안하더라도 경험담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저자는 어머니의 병수발과 아버지의 치매로 인해서 ‘나이든 부모’ 와 살며 그들을 이해하는 일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당부한다. 매우 뻔 한 소리 같지만 실제로 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조언이라는 것을 조금만 읽어보면 알게 된다. 부모님도 몸이 아파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생활하는 것이 처음이고, 그런 부모님을 지켜보며 직, 간접적으로 간호해야 하는 자식들도 처음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일까 고령화 사회로 접어드는 우리 사회에서도 더 이상 병간호에 대한 책임을 가족에게만 지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아픈 사람도 그 사람을 지켜봐야 하는 가족 누구도 죄인이 아니지만 사랑으로 시작한 일이 한 가정을 파탄 내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결국은 가족이라고는 하나 그것 또한 인간관계이다. 후회를 하지 않게 되게끔 ‘하루하루 이 사람과 사이좋게 생활하자’ 라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 존경입니다.(P.104). 병이 든 상태가 가장 낮은 위치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P.117). 자식 눈에 아무것도 안하고 하루를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부모님의 현재가 불행한 것은 아니니까요.(P.127),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일본의 철학자 기요카즈는 그의 저서 『끊을 수 없는 생각』에서 “무언가 하지 않고도 그저 가만히 옆에 있어주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우리 사회는 잊고 있다” 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말에 극히 공감이 가는 것은 나에게 있어 2년 전 10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어머님을 떠올리게 된다. 어머님은 90의 중반까지는 비교적 정신적으로 건강 하게 사셨으나 그 이후에는 오락가락하는 정신과 육체적인 피폐로 인해 병원과 요양원 신세를 지게 되셨다. 불완전한 모습의 어머니이지만 살아 계실 때에는 마음의 많은 위안이 되었고 형제, 자매들을 잇는 끈이 되어주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허탈함에 우울한 감정이 지속되기도 하였거니와 형제, 자매를 이어주던 끈도 끊어지고 말았다. 본문에서 아버지에게 “하루 종일 이렇게 주무시기만 하니 제가 안와도 되겠네요.”라고 하자 아버지는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옆에 있으니까 안심하고 잠드는 거야”(P.147),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생산성으로만 가치를 측정하는 이 사회가 낳은 문제이기도 하다. 부모님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후회’ 다. 언제나 더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해 드려야지 싶다가도 내 기분에 따라 행동은 확연히 달라진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화는 보통 지르고 난 뒤에 후련한 마음이 드는 경우가 있는데 반해, 부모님과의 갈등은 내가 화를 내고 돌아서는 순간부터 후회가 밀려온다는 것이다. 화를 낸 상대는 나지만 속이 후련하기 보다는 “조금만 더 참을걸. 하는 죄책감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순간적으로 화가 끓어오르더라도 부모님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면 가능한 권력 싸움에서 물러나야 한다. 사이가 좋아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P.173). 누군가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다면, 상대의 표면적인 말과 행동만 받아들이지 말고 좋은 의도를 발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P.180). 진지하되 심각해지지 말라 부모님을 간병하는 일은 진지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심각해 질 필요는 없다. 진지한 것과 심각한 것은 다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부모님을 보살필 때에는 다치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해서 배려할 필요가 있다. 간병이 힘들다고 미간에 주름잡고 한숨을 쉴 필요는 없다. 그런 심각한 표정을 짓는데 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간병하는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부모님이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라기 때문이다. 둘째는 다른 형제들이 간병의 고단함을 알아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간병이 큰일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 내색할 필요는 없다. 간병이 힘든 일이란 걸 다른 이에게 과시하기 시작하면 간병하는 사람은 진지해 지기 보다는 심각해지고 만다. 여건상 103세에 세상을 뜨신 어머니께서 생전에 계실 때는 나는 한참 사회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 온종일 두서너 평의 작은방에서 보내셔야 했던 어머니는 가끔씩 전화를 하셨다. 대화 내용은 뻔했다. 어머니의 생각 속에 잠겨 있는 말들을 반복해서 하시곤 했는데, 한창 일처리에 바쁜 상황에서 계속해서 어머니의 얘기를 들어 드릴 수는 없었다. 얼마나 답답하고 아들이 그리웠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은 수없이 했으나 현실은 바쁘다는 핑계로 대충 얼버무리고 끊곤 했다. 그 때를 생각하면 뒤늦게 후회가 참 많이 된다. 그 상황에서 어머니의 얘기를 들어드리는 일 말고 더 급한 일이 무엇이었을까? 뒤늦은 반성을 해 보지만 어머니는 이미 안계시니 그립기 짝이 없다. 이제 어머니의 나이를 향해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다. 그러니 어차피 사람은 늙어 갈 수밖에 없고 ‘나이 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라는 화두는 결국은 나의 문제로 대두 되고 있다. 이 한권의 책을 통해서 나이 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사회는 물론 우리 모두가 자각하여야 할 듯하다.
- 2017-05-11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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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70 액티브 시니어, 이제는 인출에 신경 써야 할 때
- 손성동 한국연금연구소 대표 인출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좋건 싫건 무수히 많은 선택을 한다. 그중에는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선택이 있는가 하면, 어떤 선택은 인생의 양념에 그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지, 어떤 배우자를 선택할 것인지 등은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선택들이다. 반면 오늘 점심을 누구와 먹을 것인지, 이번 주말에는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인생의 양념에 해당한다 할 수 있겠다. 현재의 나는 이런 크고 작은 선택들이 만들어낸 결과일 수도 있다. 인생의 반환점을 돈 5070 세대는 자산관리 측면에서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 이들 세대 중 많은 사람은 현역에서 물러나 여유로운 은퇴생활을 즐기거나 사회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떤 삶을 영위하든 원하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소득이 필요하다. 이미 은퇴한 사람들은 그동안 모아놓은 돈에서 소득을 만들어내야 하며, 여전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동안 모아놓은 자금과 근로 및 사업소득으로 인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안정적인 소득이 창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에 대한 조언은 이미 지난 호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인출(withdrawal)은 이런 소득을 안정적으로 창출하는 것, 즉 노후에 안정적인 소득흐름을 만드는 행위라 할 수 있다. 3040 시절에는 근로 및 사업소득 중 일부를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는 저축을 했다. 이를 적립(accumulation)이라고 한다. 인출은 3040 시절 목돈 형태로 적립해놓은 자금에서 매달 생활비를 안정적으로 빼내 쓸 수 있도록 하는 구체적 수단을 선택하는 행위인 셈이다. 매달 생활비가 들쑥날쑥하면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로 인해 힘든 노후를 보내야 한다. 노후생활 자금을 안정적인 방법으로 관리해야 하는 이유다. 반면 적립 단계에서는 매달 새로운 자금, 즉 저축액이 적립액에 추가되므로 자산을 좀 더 공격적으로 운용해도 큰 문제가 없다. 얼마간의 손실을 보더라도 새로 유입되는 자금으로 손실을 만회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출 전략을 잘 짜야 하는 이유 인출 전략을 잘 짜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노후에 다양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돈을 지출해야 하는 상황, 즉 갑작스런 사고나 중대 질병, 세금폭탄 등에 직면하면 노후생활 전반이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문제는 노후가 길어진 만큼 이런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이를 무시하고 주먹구구식으로 계획을 수립하거나 생활비를 안전하게 조달한다는 이유로 모든 자금을 연금에 넣어두면 예상치 못한 위험에 대응하기 힘들어진다. 인생을 배우고 일하는 전반기와 은퇴생활을 하는 후반기로 구분했을 때 전반기 인생은 그대로이거나 소폭 줄어든 반면 후반기 인생은 아주 많이 늘어났다. 만일 후반기 인생의 재무 전략이라 할 인출 전략을 잘못 짜면 아직 삶은 구만리인데 돈의 씨가 마르는 은퇴 파산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인생 말년에 이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 것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 아침에 마을 어르신을 만나면 꼭 하는 인사말이 있었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또는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이 인사말은 ‘밤새 무탈해서 오늘도 건강하게 살아계시네요’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밤새 안녕!’ 하면 0.5일 정도 수명이 늘어나는 요즘은 어떨까. 똑같은 인사말이라도 그 의미는 다를 것이다. 아마도 ‘수명이 또 늘어났는데, 생활에 문제는 없으신지요?’라는 질문이 아닐까. 희소한 자원을 경제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것도 인출 전략을 잘 짜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경제활동기에 돈을 아껴 열심히 모아도 노후를 안정적으로 보내기에는 부족한 게 우리의 현실이다. 한마디로 말해 노후를 보낼 자원은 희소한데 이 자원을 사용할 기간이 늘어난 것이다. 희소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이유다. 이를 위한 방법 중 하나는 공사연금을 통합적으로 고려해 인출 전략을 짜는 것이다. 공적연금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사적연금 단독의 인출 계획을 수립하면 더 많은 연금소득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우려가 있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의 경우 정상적인 수급 연령보다 최대 5년까지 앞당겨 받거나 늦춰 받을 수 있는데, 앞당겨 받으면 연금액이 1년마다 6%씩 줄어들고 늦춰 받으면 1년마다 7.2%씩 늘어난다. 5년을 앞당겨 받으면 연금액이 30%나 줄고, 5년 늦게 받으면 연금액이 36%나 증가하는 셈이다. 여러 상황을 감안해 국민연금을 5년 늦게 받는 게 유리하다면 은퇴 후 국민연금을 수급할 때까지는 다른 은퇴자금으로 생활비를 조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이를 흔히 가교연금(bridge pension) 전략이라고 한다. 강을 건너기 위해 다리를 건설하듯이 은퇴 후 국민연금 수령 시점까지의 소득공백기를 안정적으로 보낼 수 있는 연금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다. 자신의 노후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시대적 상황도 인출 전략을 잘 짜야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자녀 수가 많고 뒷방 늙은이 신세로 살아야 하는 기간이 짧았던 과거에는 노후를 자녀에게 의지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자녀 수가 적을 뿐 아니라 자녀들이 부모를 봉양할 만한 여유도 없다. 오죽하면 성인 자녀의 생활비를 보태주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절망의 노후가 아니라 희망의 노후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부진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다 쓰고 죽자!’는 말에 그 의미가 잘 녹아 있다. 이제는 부모 자식 간 재산 계정을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경계를 확실히 만들어둘 필요가 있다. 그것이 부모와 자식 둘 다 사는 방법이다. 이상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인출 방식의 하나는 연금 외 저축액을 70세까지 유지하는 전략이다. 남편은 85세, 아내는 90세에 사망한다고 가정했을 때 퇴직 후 70세까지의 생활비는 사적연금(개인연금+퇴직연금)과 근로·사업·자산소득 등으로 충당하고, 이후는 퇴직 전까지 모아놓은 연금 외 저축액과 국민연금(필요시 주택연금 포함)으로 생활비를 조달하는 방식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우리나라 은퇴자의 평균적인 자산 상황을 감안한 가장 단순한 모델일 뿐이다. 각자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전략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 2017-05-08 0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