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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에게 행동으로 대답할 차례
- 얼마 전 유치원에 다녀오는 외손자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 “훌륭한 아빠·엄마가 사랑해 주시니 좋겠다.”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아빠·엄마가 무엇을 하는지 줄줄 말하면서 기분 좋아하였다. “그럼, 할아버지 할머니도 훌륭하지?”라고 너무 앞서고 말았다. “응, 그런데 할아버지는 무엇을 하시는 줄 모르겠어!” 뭔가 궁금한 것이 폭발하였다. 행동으로 대답하여야 할 차례가 되었다. 무엇을 하는가 딸 가족이 근무관계로 세종시로 이사한 지 한해가 되었다. 덕분에 아내와 교대로 가끔 그곳에 가서 유치원에서 하교하는 외손자를 마중한다. 오후 6시가 지나자 여느 때처럼 태권도학원 버스가 앞에 섰다. 손자 녀석이 반갑게 품에 안겼다. “왜 정장 입었어?” 할아버지의 평소와 다른 복장모습이 낯선 모양이었다. 이 녀석이 세 살이 되던 때 사회를 은퇴하였다. 할아버지의 모습은 간소복이나 운동복 차림을 대부분 기억할 터이다. “오늘은 정장 입고 자원봉사하였어!” 설명을 하였으나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오전에 창업 멘토 활동현장에서 정장 차림으로 찍었던 사진이 생각났다. “할아버지 무엇 하시는지 보여줄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진을 쳐다보았다. “알았어! 할아버지도 훌륭한 사람 맞아!” 비로소 손자에게 인정받는 것은 사진을 통한 실체 확인이었다. 아는 것이 무엇인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쌍둥이 손녀·손자는 학교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아파트에 산다. 아내와 함께 아이들의 어린이집·유치원 등원을 종종 도왔다. 목마가 되어 무등 태워주고 동화책을 재미있게 읽어 주었다. 씨름상대가 되어 넘어져 주기에 땀을 흘렸다. 하지만 초등학생이 된 올해부터 그것은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아이들이 책 일기를 좋아한다. 폭풍처럼 늘어나는 독서량에 따라 질문도 엄청 늘었다. 어느 누가 대답할 수 있겠는가? 넉 달 반 차이인 세 녀석이 모이면 어린이의 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자라면서 자기들의 세상이 더욱 넓어질 것이다. 아는 것이 궁색해진 할아버지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멀어질 터이다. 요사이 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치면서 체스를 배우고 있다. 늦기 전에 아이들과 이야기할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 말보다 행동으로 대답하라 가까이 사는 쌍둥이의 등교를 돕고, 세종시를 왕복하면서 외손자의 유치원 하교를 돕는 일이 매우 즐겁다. 어릴 적 조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회상하면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여야할까 많은 생각을 하였다. 아이들의 등하교 보살피는 일을 누가 하면 좋을까? 부모가 제일 좋겠지만 현실은 이를 감당하기 어렵다. 차선책으로 손주에 대한 사랑이 깊은 조부모가 맡는 것이 좋다. 조부모의 건강, 사는 집과의 거리 등 고려해야 할 문제점도 많다. 하지만 손주 보살핌이 조·손이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의 하나이다. 조부모의 건강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가족관계를 화목하게 하는 효과도 크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할아버지·할머니를 보고 배운다. 훈계하지 말고 솔선수범하여야 한다. 책 읽으라고 다그칠 필요가 없다. 조용히 책을 읽으면 된다. 조그만 잘못을 나무라지 말아야 한다. 칭찬을 자주하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더 따뜻한 가슴으로 몸소 실행을 보여라.
- 2016-10-24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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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과 사람 PART 08-2] 내 이야기, 책으로 출간해볼까?
- 내 이름으로 된 책이 나온다면. 누구든 한 번쯤 꿈꿔 본 일이 아닐까. 더군다나 그 책들이 서점에 비치되고, 사람들이 책에 나온 내 얼굴을 알아 본다면.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꽤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일도 아니다.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되었든, 전문분야의 저서가 되었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출간이 가능하다. 그 방법을 알아 보았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책을 출판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가 흔히 출판사에서 ‘책을 낸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업계에서는 ‘기획 출판’이라고 한다. 쉽게 이야기하면 ‘팔릴 만한’ 원고나 내용이 있다면 그것을 책으로 만들어 전국 서점 등 유통망을 통해 판매하고, 그 수익을 출판사와 저자가 나눠 갖는 형태다. 흔히 ‘인세’라고 부르는 것이 여기서 나온다. 문제는 전제조건이다. 팔릴 만한 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 요즘 세태를 생각하면 더더욱 힘들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와 관련해 골치 아픈 경우도 많다. “분명 관심 갖는 독자가 많을 것”이라며 막무가내로 책을 내어 달라는 사람들이 적잖다는 것. 하지만 현실은 냉정하다. 자서전 ‘자비 출판’ 형태가 대부분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자비 출판’이다. 즉 출판사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고, 저자가 모든 비용을 책임지는 형태다. 요즘 유행하는 회고록이나 자서전은 대부분 이 형태로 제작된다. 전 국민이 알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자서전을 내어 주겠다고 뛰어드는 출판사는 없기 때문이다. 자비 출판이라고 해서 서점 유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만약 서점에서 내 책이 팔리길 원한다면 많은 수량을 제작하면 된다. 보통 200권 이상 제작하면 전국 유통은 가능하다고 한다. 자비 출판과 기획 출판의 중간 형태도 있다. 비용을 저자와 출판사가 분담하고, 대신 책이 팔렸을 때 수익을 나눠 갖는 형태다. 보통은 건강 관련 의학서적 등 전문 분야에 대한 기술서적들이 이에 해당한다. 실제로 회고록을 준비하는 시니어들이 많을까? 자비 출판에 대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밥북’(www.bobbook.co.kr)의 주계수 대표는 “물론”이라고 단언한다. “시니어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이 있고, 후대에 교훈이 된다며 판매를 원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에, 지인들에 대한 홍보에 소극적인 경우가 많아요. 저자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간혹 원고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책의 형태로 편집하는 경우도 있는데, 어차피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새롭게 해야 하는 부분이라 그럴 필요 없습니다.” 출간비용 얼마나 될까? 출간비용은 사실 천차만별이다. 출간을 위한 예산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일반인들이 흔히 실수하는 것 중 하나는 전체 비용에서 ‘수량’이 차지하는 부분이다. 물론 많이 제작할수록 비용이 들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 어느 출판사의 홈페이지에 게시한 비용을 살펴보면 200페이지 정도의 평범한 책을 50부 만드는 데 90만원이 들지만, 100부를 만드는 데는 100만원이 필요하다. 200부는 125만원, 300부는 150만원이다. 1000부를 제작하는 데 290만원이 소요된다. 이런 견적이 나오는 것은 기본적으로 책을 제작할 때 들어가는 디자인, 교열 비용이 제작비에 포함되어 있고, 인쇄소에서 한 번 기계를 돌리는 데 기본비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출판사에 따라 교열은 별도 비용을 받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전자책만 만드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좀 더 저렴하게 제작할 수도 있다. 보통 100만원 이하로도 제작이 가능하다. 이렇게 책이 만들어져 서점에 유통되면 저자는 얼마를 받을 수 있을까. 종이책은 정가의 40~50% 정도, 전자책은 50% 정도가 저자의 몫이 된다. 과거에는 자서전이나 회고록 이외에 시니어들이 문학적 재능을 바탕으로 시나 수필을 엮어 문집을 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근에는 본인의 전문분야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을 책으로 내놓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특히 은퇴 이후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시니어들이 많다고 업계 관계자는 설명했다. [ 자서전 출간 A to Z “이것만 알면 쉽다” ] ** 원고와 기획안 준비 ** 원고는 책의 내용을 이야기 하고 기획안은 책의 의도나 목차, 줄거리, 저자의 약력과 집필 배경, 타깃 독자 등을 표기한다. 기획 출판이나 시중 판매를 고려한다면 기획안은 필수다. 일부 출판사에서는 출판을 원하는 시니어를 대상으로 ‘책 쓰기 코칭 교실’을 운영하기도 한다. ** 책의 규격과 디자인 ** 서점에 나가 책의 크기나 용지, 표지의 형태, 디자인, 인쇄나 제본 방식 등을 유심히 살펴본다. 마음에 드는 형태의 책이 있다면 샘플로 지니고 있는 것이 좋다. 내지가 컬러냐 흑백이냐에 따라, 종이의 종류나 크기에 따라 제작비용이 크게 달라진다. ** 출판사 상담과 선정 ** 준비된 원고와 기획안을 바탕으로 출판사 측과 상담한다. 몇 군데 출판사와 비교 상담하는 것이 좋고, 원고가 넘어간다고 유출되거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일이 많지는 않으니 큰 걱정할 필요는 없다. 본인이 꿈꿨던 출간과 현실에서의 출판은 괴리가 있을 수 있으니 세세한 부분까지 상담하는 것이 좋다. ** 출판과정 ** 출판사에서 조언이나 지적 없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되레 의심해 봐야 한다. 아마추어가 준비한 원고가 문제없을 리가 없다. 특히 책 제목이나 표지 디자인은 책의 수준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이므로 출판사 쪽의 의견을 듣도록 한다. ** 발행 후 유통 ** 책의 홍보, 마케팅 실력은 출판사의 역량이 나타나는 척도 중 하나다. 신문의 신간소개나 단신 등에 책이 등장하는지 꼼꼼하게 살피고, 없다면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것도 방법이다. 저자도 지인 등을 통해 책 홍보에 공을 들이는 것도 방법 중 하나다.
- 2016-10-14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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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의 ‘인생 이모작’ 도전기
- 60세에 정년퇴직을 해도 몸과 정신은 아직 더 일할 여력이 있습니다. 친구는 직장에서 부장으로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서울 강남의 번듯한 아파트에 삽니다. 120만원의 국민연금으로는 생활비가 부족하지만 오피스텔 두 채에서 임대수입이 나오고 은행예금도 몇 억이 있어 이자 수입도 꽤 됩니다. 돈 나오는 구멍이 여럿이라 살아가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친구도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퇴직한 후라 처음에는 편안한 여생을 보내려고 했습니다. 아침 10시경 느긋하게 일어나 계란 프라이에 토스트 혹은 해동된 인절미 한 조각에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대신합니다. 조간신문을 보고 11시경 아파트 내의 헬스장으로 갑니다. 러닝머신에서 30분 정도 걷고 달리기를 합니다. 몸이 더워지면 역기 들기, 아령 등 기구 운동을 합니다. 거꾸로 매달리기, 윗몸일으키기 등 하체 단련운동도 약 30분 정도 합니다. 몸에서 땀도 나고 컨디션이 최고조에 도달할 때 집으로 와서 간단히 샤워를 하고 점심식사를 합니다. 물론 저녁도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대부분 집에서 먹는 삼식이입니다. 오후에는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고 도서관에도 가고 주민 자치센터에 풍물놀이 장구반에도 등록을 했습니다. 이런 생활이 6개월 정도는 잘 이어졌습니다. 처음에는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삶의 목적이 없는 세월 죽이기가 싫어졌습니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성과물에 울고 웃던 과거 직장생활이 그리워졌습니다. 마치 자신이 식충(食蟲)이 같고 세월을 허비하는 사람으로 느껴졌습니다. 건강한데도 이렇게 하루하루 늙은이처럼 사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친구는 나이든 사람들이 도서관이나 헬스클럽, 주민 자치센터에 나오는 이유가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대부분 시간을 보내려고 온 사람들인 것을 알고 실망했습니다. 친구는 죽음으로 가는 인생 열차에 탑승한 채 시간만 죽일 것이 아니라 도전하는 삶을 살아보기 위해 재취업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나 귀 기울여주는 곳이 없었습니다. 결국 재취업을 포기하고 화물을 실어 나르는 소형 용달차를 구입해서 화물 운송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3년간 경력을 쌓은 후 개인택시 운전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친구는 자신에게 두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운임을 낮춰가면서 남의 일감을 뺐지 않는다는 약속이었고 또 하나는 무리하게 일감을 맡지 않고 하루 한두 번 정도만 운행한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처음 용달차 운전을 하겠다고 아내에게 말하자 아내가 펄쩍 뛰었답니다. 벌써 노망이 들었냐고 하면서 돈은 더 벌어 뭐하려고 그러느냐, 이런 고급 아파트에 살면서 용달차 운전수가 웬 말이며, 늙은 아버지가 용달차 운전한다 하면 자식들 혼삿길을 막는 일인 줄 모르냐는 말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건강한 사람이 그저 세월만 보내는 것이 한심해서 하려는 일이니 이해해달라고 사정해서 결국 아파트 1km 밖 주차장에 용달차를 두고 남들에게는 비밀로 하는 조건으로 일하기로 아내와 합의했다고 합니다. 친구는 늙어도 자기 일이 있다는 것이 즐겁다고 합니다. 내가 물어봤습니다. 이제 돈 그만 벌고 사회봉사활동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습니다. 친구는 봉사활동 교육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쓰레기나 줍고 허드렛일이나 하는 봉사활동이 성에 차지 않는다고 합니다. 봉사활동은 좀 더 나이 들면 하겠다고 합니다. 친구는 돈 때문이 아니라 사회에 기여하는 일을 하면서 기쁨을 느끼고 싶다고 합니다. 남들의 눈높이가 아니라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목표를 찾아 도전하는 친구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 2016-10-11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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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회원들의 인생 2막을 책임지겠다는 삼성노블카운티 고준호 원장
- 체계적인 의료 서비스, 문화센터, 스포츠센터에 어린이집, 뇌 건강센터까지. 경기도 용인에서 만난 삼성노블카운티는 스포츠와 문화 서비스와 함께 지역 주민과의 공존, 가족적 연대까지 추구하고 있는 하나의 마을공동체였다. 또한 자연과 도시의 장점을 혼합하여 이상적인 융합형 시니어타운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래의 시니어타운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모종의 해법으로 제시될 수 있는 곳이었다. 고준호(高準浩·59) 삼성노블카운티 원장이 직접 말하는 노블카운티의 특별한 강점을 확인해 봤다. 고준호 원장은 출근하면 항상 확인하는 일이 있다. 호숫가에 산책 나온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어머님, 잘 주무셨나요?”, “아버님, 오늘 날씨가 참 좋습니다”, “아드님은 잘 다녀가셨나요?” , “불편한 곳은 없으신지요?”, “오늘은 패셔니스타 같아요” 살갑게 건네곤 한다. 매일 회원들을 살피고 이것저것 살뜰히 챙겨 주는 것이 몸에 배었다. 가끔씩 나누는 일상의 안부는 회원들에게 힐링이 되기도 한다. 이제는 가족들보다 더 가까운 친구가 됐다. 회원들은 남 보다 못한 자식들보다 고 원장이 때로는 든든한 안식처다. 누군가에게, 무언가에 애정을 쏟는다는 일은 참 즐거운 일이다. 회원들이 더 활기차고 행복한 제2의 인생을 누릴 수 있도록 일조하고 있는 고 원장은 세상 살아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시니어타운은 부자들만 간다’는 말은 좀 과장된 거죠. 부유한 어른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열심히 벌어 안정적인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정도면 부부가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저렴하게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거든요. 다양한 동호회가 잘 조직돼 있어 회원들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요. 그래서 이 안에서는 교우관계가 왕성해요. 여기서는 어머님들의 활동이 활발하고요. 합창단, 당구, 사진, 탁구도 새로 배우시고, 회원들끼리 인생의 선후배로서의 교우관계로 행복한 시간을 채워 나가고 계십니다. 노블카운티 정원에서 서로 부축해 가며 다정하게 걸어가는 회원부부를 볼 때면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더 편하게 해드려야지 싶어집니다.” 열심히 일하고 은퇴한 분이라면 큰 걱정 없이 비교적 품위 있게 노후를 보낼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경제적,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건강하며 취미와 사교활동으로 행복을 누리면서 노후를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존엄이 아닐는지. 이러한 삼성노블카운티는 2001년 5월 삼성생명 공익재단이 설립, 운영하고 있는 시니어타운이다. 건강하고 활력 넘치는 시니어가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일반세대(타워A, B동)와 일상생활에 도움이 필요한 시니어를 위한 프리미엄 세대로 구분되는 노블카운티에는 총 553세대가 입주해 있다. 지상 20층, 지하 3층 규모의 건물 2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실의 면적은 30평형대, 40평형대, 50평형대, 70평형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또한 타운 내 시설들은 지역 주민들에게도 개방되어 함께 이용하는 장소로 운영되는 등 도심형 시니어타운의 이점도 있는, 세대 간 소통으로 대표적인 시니어타운이다. 도심과 자연의 만남, 세계적으로 이런 시설은 드물다 “15년이 넘은 곳이라 여기는 외국 분들이 자주 방문합니다. 우선 외국 분들은 조경을 보며 아름답다며 놀랍니다. 그리고 지역민과 함께 쓸 수 있는 센터들이 같이 운영된다는 것에도 놀라죠. 일본도 도심형 시니어타운이 있는데 아주 도심에 있지 않으면서 자연 환경을 갖추고 지역 주민과 어울리는 곳은 거의 없어요. 노블카운티는 도심과 자연의 장점을 갖춘 시설이죠. 설립할 때부터 이런 취지로 개발한 시설은 드물어요.” 삼성노블카운티의 원장으로 취임한 지 1년 6개월이 되는 고준호 원장은 국내 최고 수준의 시니어타운 중 하나로 손꼽히는 노블카운티에 대해 세계적으로 봐도 이런 시설은 드물다고 소개했다. 그렇다고 노블카운티를 국제적으로 키우겠다든지 하는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노블카운티 안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 더 편하고 더 만족하며 살 수 있게끔 해야겠다는 생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밝혔다. “와서 보니 실버타운의 경영자는 반은 호텔 지배인이고 반은 아파트 관리소장이더군요. 호텔 지배인은 뭐랄까, 고급스런 고객을 모시고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역할이죠. 아파트 관리소장은 서민들이 사는 문제, 예를 들어 수도 흙탕물이 나온다, 왜 쓰레기 제때 안 치우냐, 관리비 왜 비싸냐 등등 소소한 불편 사항을 해소해 주는 역할입니다. 저는 그 롤들에 충실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고 원장은 회원들을 편안하게 모시는 게 목표라고 말하는 것처럼 특유의 소박한 분위기가 있어 보였다. 회원들 생활의 작은 것부터 다듬어 주자는 생각은 겸손함도 있지만 보다 회원들의 주거만족도를 높여 주자는 현실적인 차원도 있었다. “우리나라 실버산업의 문제점들이 흔히 지적되는데 그런 것에 관심 갖는 것보다 왔다 갔다 하다가 마주치는 한 분 한 분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거죠. 대부분의 회원님들이 ‘여기가 천국이야’라고 말씀하시는 게 여기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받는다가 아니라 그런 시스템에 만족하시는 것이라고 봅니다.” 나이 들면 모여서 살아야 한다 고 원장은 자신이 와서 새롭게 한 건 하나도 없고, 이미 구축된 시스템이 훌륭하게 움직이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병철 회장님은 노블카운티를 어떻게 지으라고 말씀은 안 하셨고 복지의 사각지대인 의료, 육아, 여성, 노인 문제에 뭔가 기여할 수 있는 걸 하라고 공익재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도적으로 만들어진 게 삼성의료재단이고 두 번째는 어린이집이었으며 다음이 노블카운티였죠. 노블카운티를 지을 때는 이건희 회장님이 선대 회장님의 마인드를 갖고 노인 복지 사업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노블카운티를 지으면서 이건희 회장님이 지시한 게 하루 종일 어린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고 원장은 노블카운티에 오기 전에는 시니어 주거시설에 대해 호감이 없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개인적으로 여러 사람이 모이는 시설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블카운티와 함께 시니어타운을 접하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나이 들면 모여서 살아야겠구나 싶어요. 안전에 관한 문제가 가장 큽니다. 의료적인 안전도 있고 생활 안전, 보안 등의 문제도 있어요. 시니어들 집은 방범에 다소 허술하기 때문에 범죄 등에 취약하고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도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전철역까지 가는 게 다 건강 면에서 리스크가 돼요. 한마디로 안전 리스크에 항상 노출돼 있는 게 시니어입니다. 특히 낙상이 문제죠. 넘어져서 다치면 그로부터 노환이 시작돼요. 삶의 질이 떨어지고 의료비 지출 커지고 운동을 못 하니 건강도 나빠지고…. 특히 80세가 넘어가면 그런 리스크가 항상 있게 됩니다. 아파트에 살아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 관심이 있나요? 그런데 여긴 식사할 때 다 같이 모여요. 산책할 때도 모이고. 그리고 직원들이 항상 보고 있고. 그래서 혼자 살 때 발생하는 리스크가 없어요. 단체 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모여 사는 게 유리할 수 있는 겁니다.” 노후인구 급증, 이들의 주거를 충족시킬 방안 조성해야 노블카운티의 입주회원들 나이 평균은 83.5세. 부부는 35%정도고 65%가 싱글이다. 남녀 비율은 7:3으로 7이 여자다. “당뇨병을 가진 분들이 많아요. 이분들 식단은 별도로 차려 드립니다. 그 외에는 집 밥처럼 만들고 있어요. 건강식만 챙기는 게 아니라. 제일 인기 있는 메뉴는 냉면이죠. 그 외에도 다양한 메뉴를 제공해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외부에서가 아니라 영양사, 주방장 등을 직접 고용하여 자체적으로 만드는 음식들입니다.” 노블카운티에서 일하는 스태프는 총 450여 명에 달한다. 이 많은 숫자는 노블카운티에 다른 시니어타운과는 다르게 지역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스포츠센터 등의 시설들이 있기 때문이다. 시설 관리 감독 및 프로그램 제공과 강사 등을 위한 다양한 인력들이 노블카운티에서 일하고 있다. “시니어타운을 경험해 보니 어른들에게 권할 만한 시설이 전국에 얼마 되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전국에 수없이 많은 요양시설들이 있는데, 시니어타운 같은 양로시설도 많이 만들어야 하지만 요양시설은 정부에서 정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민간부문도 계속 활성화되어서 시니어들이 믿고 갈 수 있는 곳이 많아져야 한다고 봅니다. 노블카운티는 비싸니까(웃음). 그런데 그 숫자가 너무 적어요. 양로시설은 신뢰도가 확실한 곳이 20곳도 채 안 될 거예요. 양로시설은 요양시설과 달리 초기 투자가 필요한데 정부를 탓할 건 아니지만 대기업들이 투자를 하게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기업들은 안 그러면 안 해요. 특히 요즘 기업주들은 젊어져서 이런 데 신경을 잘 안 쓰거든요.” 고 원장은 사회공헌도 좋지만 그보다는 기업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명분은 창대하되 운영은 기업답게 하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걸 사회공헌이라고 하면 할 기업들이 없어요. 그렇게 접근하면 안 되고 기업 활동으로 하게 해 주면서 경영 이념을 공익사업으로 하면서 운영하게 해 줘야지 공익사업이라고 하면 누가 합니까. 정부에서도 지원해 주고, 운영이 정상화되면 그 다음부터는 민간 사업자들도 좋은 뜻을 가진 사람들은 할 수 있도록 유도해 주고 해야죠. 공익사업으로만 생각하면 안 되는 게 개인들도, 기업들도 이윤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움직이거든요. 과거 기업 1세대들은 국가에 기여해야 한다는 마인드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닌 거 같아서 더 그렇습니다.” 공부와 함께 인생 2막 설계해요 고 원장은 삼성생명에서 전무로 은퇴한 후, 삼성생명에서 운영하는 재단으로 다시 와서 일하고 있는 셈이다. 일종의 재취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제2의 취업에 성공한 셈이죠. 솔직히 인생 2막이라고는 생각은 안 하고 1막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시작한 직업이 과거에 비해 다른 점이 있을까? “일은 현업에 있을 때보다 적죠. 다른 부서랑 협업하고 경쟁한다든지 하는 일은 없으니까요. 그런 면에선 업무강도는 높지 않은데 끊임없이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입주자들의 불편이 늘어나고 시설은 노후화됩니다. 그런 면에선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습니다.” 인생 2막을 보다 청년다운 마음으로 준비하고 싶다고 말하는 고 원장은 나이 듦에 대하여 ‘좋다’라고 표현했다. “청춘예찬이란 말도 있지만 20대, 30대 시절의 청춘이 아름다운 건 아닌 거 같아요. 투쟁적이고 경쟁적이라서 힘든 시기죠.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과 피해의식도 많고. 다시 돌아가면 절대 그때로 가고 싶진 않다는 말이 맞는다니까. 피곤한 시대였으니까요.” 나이 듦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고 원장의 생각에는 시니어타운의 관리자를 호텔 지배인이자 아파트 관리소장이라고 칭한 그 특유의 담대함이 있었다. “나이 들면 성공에 대한 부담, 자녀교육에 대한 부담, 가장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나이 먹으면 의욕이 없어지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세상을 다 알고 달관할 줄 알았는데, 끊임없이 공부해야 해요. 그런 면에서 좋아요. 말하자면 나이 들었다는 건 진짜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거예요. 학교 다닐 때는 쓸데없이 뭘 배운 건지 모르겠어요(웃음). 대부분의 지식은 사회에 나와서 배우게 되잖아요. 정작 학생일 때는 정말 필요한 공부를 못 했던 거죠. 나이 든다는 게 그래서 좋은 거 같아요. 앞으로 나이 듦으로써 겪는 또 다른 낯선 경험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어요.” 소중한 삶을 위한 새로운 시도가 더 큰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고 원장의 그 기다림은 더욱 뜻 깊은 것이리라. >>삼성노블카운티 삼성노블카운티는 약 22만4000㎡(6만8000여평) 부지 위에 독립생활이 가능한 타워 동(2개동 553세대, 30~72평)과 치매·중풍 등의 노인성 만성질환이 있는 경우 24시간 간호와 간병을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요양센터인 너싱홈(178 베드, 1, 2, 4인실)을 운영하고 있다. 입주에 필요한 비용은 입주 거실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타워 동 36평(전용 18평)에 입주하는 경우 보증금은 3.5억~4.8억원, 월 생활비는 독신 210만원, 부부 340만원 정도이다. 보증금은 퇴소 시 전액 반환되며, 생활비는 회원 전용 식당에서 맛과 영양, 건강을 고려한 식사, 청소 및 침구류 세탁, 부대시설 이용, 세대 관리비 등이 포함된 금액이다.
- 2016-10-11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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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낙 그림 이야기] 고려청자에 얽힌 우문현답
- 1950~60년대 어두웠던 우리 사회상을 되돌아보면 볼수록 우리 사회가 ‘현기증’을 느낄 만큼 변했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필자도 분명 그들 중 하나이다. 이와 관련해 특파원으로 10년 넘게 우리나라에서 지내며 활동한 한 영국 언론인의 글이 생각난다. 그는 1990년대 한국 경제의 위상을 보고 1960년대의 한국을 생각하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며 놀라워했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놓고도 1970년대에 한국이 이처럼 민주화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고 회상했다. 필자도 이 특파원의 얘기에 실로 동감한다. 특히 1960년대를 전후해 한국을 떠났던 많은 교포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유엔군들도 우리나라를 방문하고는 천지개벽을 본 듯하다고 놀라워한다. 1960년대를 유학생 신분으로 독일에서 지낸 필자가 어쩌다 접하는 고국 소식은 보고 듣기도 민망한 뉴스가 대부분이었다. 이를테면 대표적인 저개발국형 뉴스라고 할 수 있었다. 요즘도 몇몇 국가에서 고향에 가기 위해 열차에 무질서하게 탑승하는 장면이 뉴스를 타곤 하는데, 1960년대에 필자가 대했던 고국의 뉴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기다 195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필자 세대는 식민 사상이나 식민 역사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우리가 직접 일본의 식민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가르쳤던 대부분의 교사들이 일제강점기하에서 식민 교육을 받은 세대였기 때문이다. 그 시절 역사 수업 시간에 고려자기(高麗瓷器)에 대해 처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역사 교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그 아름다운 청자색이 조선시대에 갑자기 사라진 것은 우리 도공(陶工)들이 청자에 사용할 안료(顔料) 제조와 배합의 비밀을 자기 자식한테도 전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 민족은 옹졸하다.” 당시 필자는 그 교사가 말한 ‘옹졸한 우리 민족’들에 대한 아쉬움보다 자괴감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962년 필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한국문화유산 전시회’에서 우리 고려청자에 대한 큰 깨달음의 기쁨을 얻었다. 당시 전시회 관리 감독의 책임을 맡고 있던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 1916~1984, 국립중앙박물관장 역임) 선생을 만났을 때였다. 전시된 고려자기를 보고 필자가 물었다. “학교에서 저 아름다운 비취색이 전해지지 못한 것은 도공들이 그 비법을 자식들한테도 전수하지 않아서라고 배웠습니다.” 그러자 선생은 “그것은 일제 식민 교육의 결과이지” 하면서 “고려시대 우리 선조들이 저 우아한 청자색을 선호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해. 우리 선조들이 즐겨 입었던 한복의 마고자(조끼)나 바지의 색깔이 연한 비취색이라는 것도 우연이 아니지.” 그리고 이렇게 결론지었다. “청자의 쇠퇴는 조선시대 개막과 더불어 도입한 유교사상이 순백색인 백자(白瓷)와 맥을 같이한 결과라고 봐야 하네.” 필자의 우문에 대한 혜곡 선생의 현답이 아닌가 싶었다. >>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 2016-10-10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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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황의록 화가협동조합 이사장의 꿈 “따뜻한 세상을 위한 인내심 싸움, 즐기고 있다”
- “투기나 투자가 아니라 누구나 하나씩 그림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저변화되어야 그림이 팔린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그림이 팔리지 않습니다.” 오랜 경영학자로서의 삶이 뒷받침해 주는 것일까. 황의록(黃義錄·68) 화가협동조합 이사장이 지향하는 목표는 매우 뚜렷하고 분명했다. 그것은 예술가의 기질이라기보다는 경영자의 기질에 가까워 보였다. 희미하고 열악한 한국 미술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기질이란 그러한 분명함과 뚜렷함이 아닐까. 이미 미술계에서 놀랍다는 반응을 얻고 있는 황 이사장의 과감한 실험, 그리고 꿈을 들어 본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사진을 좋아해서 사진을 전공하고 싶었죠. 그러나 가정 형편 때문에 사진을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유학하면서 한국에 생활비를 보내야 할 정도였기에.” 베테랑 경영학 교수로서 오랜 세월을 보낸 황의록 화가협동조합 이사장은 노년이 되면서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행복한 일을 찾다 다시 사진을 만나게 됐다. 중앙대 사진 아카데미에서 3년을 공부했다. 그러나 워낙 일이 바쁘다 보니 사진 동호회에서 어울릴 시간도 없어서 혼자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 혼자 출사를 가기도 하고(웃음). 그런데 사진을 얼마 하다 보니 사진이 발전이 없는 게 보이더군요. 그러다보니 고민을 하게 됐는데…. 사실 고민하는 게 싫었습니다. 사진은 즐기려고 시작한 거였으니까. 친한 사진작가에게 사진이 나아지지 않아서 즐겁지 않다고 털어놨어요. 그가 심미안이 달라지는 게 좋겠으니 이제부터 얼마 동안은 사진을 하지 말고 그림을 보러 다니라고 말해 줬습니다. 그때까지 겉멋이 들어서 국내 작가는 보지 않았는데, 그후부터 일주일에 이틀은 그림을 보러 다녔어요.” 중견 화가가 물감 사려고 ‘야간 경비’… 충격이었다 황 이사장은 전시회를 가게 되면서 작가들과 자연스럽게 얘기하게 되고, 친한 작가가 하나둘 늘어나고, 초대까지 받게 됐다. 그리고 화가들이 힘들게 산다는 것과 개인적인 문제들도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한 중견작가가 작업하다 말고 알바를 나간다는 거예요. 물감이 떨어져서, 건설 현장에 야간 경비를 하러 나간다고. 여자 작가는 전화했더니 이젠 그림을 안 그린다고 말하더군요. 너무 수입이 없어서 간호조무사 학원에 등록했다고. 연말에 시험에 통과하면 내년부터 간호조무사로 근무하면서 몇 푼이라도 받아서 먹고살면서 짬짬이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하더군요.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그는 미술계의 열악한 현실에 맞닥뜨리고 고민하게 됐다. 명색이 경영학 교수인데 이걸 보고 넘어간다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무슨 방법이 있을까 해서 미술계 사람들을 만났는데 다 말렸다. 그들은 두 가지를 말했다. 실패한다, 그리고 돈을 벌 수 없다. “전 돈 버는 건 관심 없었어요. 밥은 먹고사니까. 밥 먹고사는 내가 또 돈 벌려고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실패한다는 부분만 성공하면 되는 거겠죠. 여러 가지를 검토한 결과, 전 된다는 판단을 했어요. 그림이 안 팔리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파는 쪽에서 잘못해서지 사람들이 그림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구매 능력이 되는 사람도 많아요. 그러나 그 사람들조차 그림을 안 삽니다. 왜냐면 미술품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는 불안감, 불신 때문이에요. 저 작가가 정말 좋은 작가인지 모르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미술품이 뉴스를 타는 것은 투기나 투자 목적으로 사는 극소수 사람의 얘기들뿐이다. 미술품을 문화적 향유품이 아니라 돈벌이로만 여기니 미술품에 과도한 금액이 매겨지고 투기와 투자로만 쓰이는 현실은, 결과적으로 소수의 작가들만 빼고 대다수의 작가들은 생활 자체가 열악한 현실을 만들었다. “국내 작가로서 작품을 팔아 생활하는 사람들은 투잡을 뛰는 사람들이 많아요. 교수라든지로 일해서, 그 네임밸류 덕분에 비싸게 팔리는 경우도 많고. 아니면 다른 영향력 있는 미술 관련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서 팔리죠. 그걸 비웃을 이유는 전혀 없어요. 그건 그거대로 존재하는 거고, 옥션 등에서 비싸게 팔리는 것도 그것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례들을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미술을 나와 관계없는 세상으로 압니다. 그들에게 미술 소비자가 되어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면 화가들에게는 작업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길 거라고 확신했어요.” 시장을 키워야 작가도 갤러리도 소비자도 행복해진다 황 이사장은 그래서 2015년에 화가협동조합을 출범시켰다. 조합은 후원자 조합과 작가 조합으로 나뉜다. 그는 먼저 후원자 조합을 모았다. “후원자 조합원이 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세 가지 조건이 있어요. 첫 번째로 기본적으로 1000만 원 이상 출자해야 한다는 겁니다. 협동조합 중에서 이렇게 많이 내는 데는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 정도 출자해도 삶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여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리라면 행복하지 않을 수 있으니. 두 번째는 이 미술운동이 실패할 수 있다는 걸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1000만원이 사라질 수 있는데, 그래도 하이파이브하고 좋은 꿈 꿨다 하고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과 시간으로 이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조건들로 조합원을 선별해서 받았고, 현재 그분들이 도와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황 이사장이 의도하고 있는 조합원 선발은 후원자에게 쉽지 않은 엄격함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은 작가 조합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반 소비자들이 그림을 가까이하고 친해지면 사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불안과 불신을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무엇보다도 소비자가 그림을 잘 몰라도 안심할 수 있게 해 주자는 게 첫 번째입니다. 정말 좋은 작가를 엄격하게 선발할 테니 마음놓고 사도 된다는 걸 조합에서 보증해 주는 거죠. 그래서 작가 선발에 엄청나게 공력을 들이고 있습니다.” 엄격한 조합원 선발로 소비자의 신뢰 보장 까다로운 작가 조합원 선정 과정은 총 3차에 걸쳐 이뤄진다. 심사위원은 평론가, 원로 작가, 갤러리 관장 등으로 총 10명이 있다. 이 10명은 서로의 존재를 모른다. 1차 심사는 블라인드 리뷰다. 흡사 TV 프로그램 처럼 작품만 보여주고 작가는 감춘 채 오로지 미술시장의 대중화, 세계화에 적합한가가 심사 조건이다. 이는 그림이란 소비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인데 소수만 좋아하는 그림은 안 된다는 관점에서 이뤄진다. 그러면서도 작품성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이 부분에서 심사위원 10명 중 7명 이상이 지지해야 작가가 통과된다. 2차는 현장 심사다.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가서 가진 작품 모두를 확인하여 작품 세계의 집중도와 일관성을 확인한다. 앞으로의 계획, 도움이 필요한 작가인지 등도 확인하는 과정이다. 3차는 공개 심사다. 초대 전시회를 열어 작가의 모든 걸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다. 여기에서 70% 이상이 찬성해야 작가 조합의 정회원이 될 자격이 주어지게 된다. 이러한 엄격한 선발은 상반기와 후반기에 한 번씩 한다. 현재 작가 조합에 속한 작가는 11명. 100명까지 늘리려고 계속 선발 중에 있다. 건강한 미술을 실천으로 보여주고 싶다 황 이사장의 도전에 대한 미술계의 반응은 어떨까? “놀라죠 다들. 지금은 지원서가 상당히 많이 들어옵니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고 부족해요. 그런데 미술계가 너무 어렵다 보니 작가를 위해 해 주는 것도 많고 팔리는 것도 제법 되고 작가를 띄우는 역할을 하니까 놀라는 거겠죠. 아직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도 계실 수 있겠지만, 많이 기적처럼 받아들여주시는 거 같아요.” 황 이사장은 현재 미술시장의 기득권을 가진 이들에 대해선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고 선을 그었다. “건강한 미술에 대하여 입으로 떠드는 게 아니라 실천하여 괜찮은 성과를 내면 사람들이 ‘저것도 괜찮네’라며 평가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데 1년 3개월밖에 안 됐는데 느낌이 와요. 저는 페이스북에다 제가 겪는 일을 다 쓰고 있어요. 이렇게 했는데 실패했다, 이렇게 했는데 효과가 있다 등등. 감추는 게 아니라 투명하게 하겠다, 판단은 당신들이 하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림을 통해 좀 더 따뜻한 세상을 그리다 황 이사장은 70세에 가까운 시간을 교육자로서 살다가 이제 사회와 문화와 공유의 가치를 느끼는 일을 하게 됐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과감한 플랫폼 변화를 시도한 것처럼 보인다. “다르지 않아요. 지금은 현실적인 고뇌고 옛날엔 이상적인 고뇌였고 그 정도의 차이일 뿐이죠. 경영학은 현실 학문이기에 계속 현실을 직시하게 됩니다. 실제 효과를 내서 사람의 삶을 개선하지 않으면 할 이유가 없다는 게 제 생각이었어요. 내가 아는 지식을 접목하여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일을 찾아왔던 겁니다. 지금은 그러한 방법을 적용하는 영역이 달라졌을 뿐이에요. 제가 지금 하는 일은 지금까지 해 왔던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적인 효과와 삶을 바꾸는 일이라는 두 가지 조건. 그러한 방향성은 그의 심미안에서도 드러나고 있었다. “저는 그림을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남달라야 한다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줘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움에도 감동받을 수 있고 신선함에 감동받을 수 있고, 감동 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감동이 있어야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게 제 소신이에요. 살기 힘든 사람도 감동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림을 누구에게나 필요로 하고 즐길 수 있게 만들어야 세상이 따뜻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았다는 확신, 즐기면서 산다 “앞으로 30년 보고 있어요. 당장 그림이 얼마라도 팔려야 작가도 살고 조합도 살죠. 그래서 30년 정도를 초단기, 단기, 중기, 장기로 계획을 잡아보고 있어요.” 그림을 통해 좀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황 이사장은 작가들은 나은 여건에서 작품에 전념할 수 있고 소비자들은 돈이 있든 없든 그림을 가까이 하고 즐길 수 있게 만들자는 분명한 목표의식이 있었다. “인내심 싸움일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 남들은 칭찬해도 저는 계속 불안하거든요. 짧은 성과부터 긴 투자까지 생각해야 하니 쉽지 않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죠. 그런데 여러 가지 반응을 보니 제 예상이 맞았고 전략도 맞았다는 확신이 들어요. 그런데 그게 좀 더 빠르게 나오지 않아서 불안할 때가 있죠(웃음). 하지만 즐기자는 쪽으로 가고자 해요. 지금 상황은, 아주 괜찮은 거 같아요.” >>황의록 이사장 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장 및 기획처장, 한국소비자학회장, 한국유통학회장, 한국마케팅학회부회장, 한국의농학회장을 역임했다. 전경련, 대한상공회의소, 제일제당, 삼성전자,두산그룹, LG그룹의 자문교수로 활동했다. 현재 아주대학교 명예교수 및 GS그룹 자문교수를 맡고 있다.
- 2016-10-1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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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낙 그림 이야기] 고려청자에 얽힌 우문현답
- 1950~60년대 어두웠던 우리 사회상을 되돌아보면 볼수록 우리 사회가 ‘현기증’을 느낄 만큼 변했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필자도 분명 그들 중 하나이다. 이와 관련해 특파원으로 10년 넘게 우리나라에서 지내며 활동한 한 영국 언론인의 글이 생각난다. 그는 1990년대 한국 경제의 위상을 보고 1960년대의 한국을 생각하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며 놀라워했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놓고도 1970년대에 한국이 이처럼 민주화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고 회상했다. 필자도 이 특파원의 얘기에 실로 동감한다. 특히 1960년대를 전후해 한국을 떠났던 많은 교포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유엔군들도 우리나라를 방문하고는 천지개벽을 본 듯하다고 놀라워한다. 1960년대를 유학생 신분으로 독일에서 지낸 필자가 어쩌다 접하는 고국 소식은 보고 듣기도 민망한 뉴스가 대부분이었다. 이를테면 대표적인 저개발국형 뉴스라고 할 수 있었다. 요즘도 몇몇 국가에서 고향에 가기 위해 열차에 무질서하게 탑승하는 장면이 뉴스를 타곤 하는데, 1960년대에 필자가 대했던 고국의 뉴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기다 195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필자 세대는 식민 사상이나 식민 역사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우리가 직접 일본의 식민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가르쳤던 대부분의 교사들이 일제강점기하에서 식민 교육을 받은 세대였기 때문이다. 그 시절 역사 수업 시간에 고려자기(高麗瓷器)에 대해 처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역사 교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그 아름다운 청자색이 조선시대에 갑자기 사라진 것은 우리 도공(陶工)들이 청자에 사용할 안료(顔料) 제조와 배합의 비밀을 자기 자식한테도 전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 민족은 옹졸하다.” 당시 필자는 그 교사가 말한 ‘옹졸한 우리 민족’들에 대한 아쉬움보다 자괴감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962년 필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한국문화유산 전시회’에서 우리 고려청자에 대한 큰 깨달음의 기쁨을 얻었다. 당시 전시회 관리 감독의 책임을 맡고 있던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 1916~1984, 국립중앙박물관장 역임) 선생을 만났을 때였다. 전시된 고려자기를 보고 필자가 물었다. “학교에서 저 아름다운 비취색이 전해지지 못한 것은 도공들이 그 비법을 자식들한테도 전수하지 않아서라고 배웠습니다.” 그러자 선생은 “그것은 일제 식민 교육의 결과이지” 하면서 “고려시대 우리 선조들이 저 우아한 청자색을 선호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해. 우리 선조들이 즐겨 입었던 한복의 마고자(조끼)나 바지의 색깔이 연한 비취색이라는 것도 우연이 아니지.” 그리고 이렇게 결론지었다. “청자의 쇠퇴는 조선시대 개막과 더불어 도입한 유교사상이 순백색인 백자(白瓷)와 맥을 같이한 결과라고 봐야 하네.” 필자의 우문에 대한 혜곡 선생의 현답이 아닌가 싶었다. >>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 2016-10-1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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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이건만 AnF' 이건만 대표, 인생 2막에 펼친 한글 패션 디자인 ‘제1장’
- 이번 한글날은 훈민정음 반포 570주년을 맞는 해라는 데 더욱 의미가 있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기 때문에 특별한 날이 아니면 한글을 인식하며 지내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매일같이 한글을 떠올리고 그 가치와 아름다움에 대해 고민하는 이가 있다. 세계 최초로 한글 디자인 패션브랜드를 세상에 내놓았던 ‘이건만 에이엔에프(LEE GEON MAAN AnF)’의 이건만(李健滿·54) 대표다. 읽고 쓰기 쉬운 우리 한글이지만, 디자인에 접목하는 것에는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한글이기에 더더욱 포기할 수 없다는 그의 다부진 말투에는 남다른 사명감이 스며 있었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한글 디자인 패션브랜드를 세울 수 있었던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유학 생활을 하며 샘솟았던 애국심이 심지 역할을 했다. “해외 나가면 다들 애국자가 된다고 하잖아요. 어느 날 학교 도서관에 갔는데 일본어로 된 책은 많고 한국어로 된 책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방학 때면 한국에 나와 우리 책을 사서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죠. 또, 외국 작가들에게 한국적인 것을 찾으라고 하면 대부분 중국이나 일본 것을 고르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한국의 문화를 디자인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했었죠.” 다양한 한국 전통 문양들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이 역시 중국 문명의 영향 때문에 차별화하기가 어려웠다. 그 어느 나라의 것도 아닌,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언어나 사상 등이 반영돼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맺혔다. 그리고 그 생각의 종착점에 ‘한글’이 있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아티스트로서 화려한 삶을 살 수도 있던 그였다. 그러나 교수로 활동하던 시절, 결국 심지에 불이 붙고야 말았다. “친구가 어느 날 ‘너 1야드에 실이 몇 개 들어가고 넥타이가 몇 개 나오는지 알아?’라고 묻더라고요. 모른다고 했죠. 미국에서 공부할 땐 그런 걸 배운 적도 없고, 특히 유럽은 브랜드를 중심으로 디자이너가 어떤 창의적인 디자인을 하느냐가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한국 섬유 시장은 OEM형태로 움직이다 보니 그런 것도 가르쳐야 했던 거예요. 내가 공부하고 온 걸 그대로 가르치는 것은 소용이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들에겐 ‘21세기엔 디자이너가 브랜드가 되는 시대가 온다. 너희들의 몸값이 달라지고 디자이너가 경영자가 돼야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근데 그 말을 들은 의대, 공대 다니던 학생들이 전과를 한 거예요. 덜컥 책임감이 생기고 겁이 나더라고요.” 그의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은 자신이 이야기했던 것들은 그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디자이너는 직급이 올라가도 차장 정도에 머무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한마디로 디자인만 해서는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인데, 멀쩡한 전공을 박차고 나온 학생들을 보니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과연 그렇게 되느냐, 내 이야기가 맞느냐 틀리느냐를 증명해 내기 위해 그는 교수직을 뒤로하고 현장에 뛰어들게 된다. 그렇게 제자들과 합심해 만든 것이 지금의 ‘이건만’ 브랜드다. 한글과 패션, 트래디션과 트렌드를 접목하다 2000년, 처음 회사를 설립했을 때도 그랬고 현재까지 가장 힘든 점은 한글을 패션에 접목하는 일이라고 한다. 알파벳처럼 나열문자가 아닌 자음과 모음이 어우러지는 입체문자인 한글을 제품에 효과적으로 입히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특히 한국인에게는 한글이 언어이기 때문에 디자인 요소가 아닌 글자로 읽힌다는 게 문제였어요. 그래서 자음과 모음을 분리하는 과정을 거쳤죠. 한글의 형태적 분석도 하지만, 그보다는 한글이 가진 의미에 대해 공부했어요. ‘한글이 대체 우리에게 뭐지?’라는 물음을 던지고 그런 고민을 디자인에 담으려고 했죠. 디자이너들도 고충이 있죠. 지금까지 디자인한 작업물만 3000개가 넘는데 또 새로운 것을 창작해야 하니까요. 우린 다른 곳처럼 카피할 수 있는 디자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쟁업체도 없으니 오히려 더 힘들죠.” 그렇다고 그들만 한글 디자인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오래 버티지 못하거나 단기적인 작업에 그쳤다고 한다. 이 대표는 그만큼 한글을 패션에 접목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길이라고 설명했다. “한글과 패션, 한마디로 트래디션(tradition)과 트렌드(trend)라 할 수 있죠. 어찌 보면 그 두 가지를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될 수도 있어요. 차라리 한글 디자인으로 패션이 아닌 자개함 같은 소품을 만드는 게 훨씬 쉬울 거예요. 그렇게 하면 그저 인사동에서 사는 관광 상품에 지나지 않거든요. 한국 사람이라면 그런 기념품을 더욱 살 이유가 없죠. 그래서 역설적으로 스카프, 넥타이, 핸드백 제품을 디자인하게 됐어요.” 차별화된 전략 덕분에 이건만 브랜드의 제품은 국내외 인사와 패션 마니아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건만 한글 넥타이는 청와대·정부부처·공공기관의 귀빈 의전용 명품으로 납품됐고, 한국 브랜드 최초로 일본 대형 백화점에 입점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우여곡절도 많고 힘든 점이 많았지만, 이만하면 성공반열에 올랐다 할 수 있지 않은가? 그에게 ‘성공’이란 조금 다른 의미였다. “아마 실패한 것들을 이야기하자면 무척 많을 거예요. 아무래도 추진하던 일이 실패하면 그만큼 금전적으로 손해가 생기거든요. 저는 그걸 수업료라고 해요. 수업료 굉장히 많이 냈습니다(웃음). 그런데 성공의 기준이 뭐냐. 성공과 출세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출세는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해지는 건데, 그렇게 따지면 아직 출세는 못 한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일을 시작하고 대학에 관련 커리큘럼이 생기고, 많은 유통라인에 개인 디자이너 브랜드의 입점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것에 제가 작은 역할을 했다고 봐요. 돈 벌고 유명해지는 출세보다는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있는 성공을 하고 싶어요. 출세는 그 자리에서 내려오면 바로 낫씽(nothing)이지만, 성공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도 역사에 남고 하나의 장르를 열고 패러다임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성공입니다.” 디자이너 경영자가 이어갈 ‘이건만 에이엔에프’ 그는 후배 디자이너들을 위한 디딤돌 역할을 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이러한 점은 ‘이건만 에이엔에프’만의 경영방침에서도 드러난다. 무엇보다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열정을 발휘하는 이 대표는 경력자보다는 신진 디자이너 채용을 우선시하고, 매출의 20%가량을 디자인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있다. 사업을 시작할 때에도 목표로 삼은 것 중 가장 첫 번째가 ‘동종 업계 디자이너 월급의 2배를 주는 회사’였다고 한다. 디자이너 출신 경영자다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회사와 후배들을 향한 애정으로 에너지가 가득한 그에게도 요즘 걱정거리가 생겼다. 나이가 드니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실감한다고. 열심히 운동하며 자기 관리에 힘쓰면서도 디자이너들의 역량 강화에 더욱 힘을 쏟게 된다는 이 대표다. “요샌 나이 드는 게 무섭더라고요. 아,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그냥 이대로 끝나버리는 거 아냐? 그런데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쥐고 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해외만 봐도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명품 브랜드가 오랜 세월 명맥을 유지하고 있죠. 코코 샤넬이 죽었다고 그 브랜드가 힘을 잃은 것은 아니잖아요. 브랜드를 이끌어갈 디자이너를 키웠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우리 직원들에게도 디자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영, 마케팅, 유통, 소비자 심리 등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어요. 제 욕심에 그런 거지만, 아마 다들 엄청 피곤할 거예요. 그래도 우리 브랜드를 물려줄 인재를 만들려면 어쩔 수 없죠.” 그는 한글이 담긴 디자인 브랜드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자신이 아닌 누구라도, 또 더 많은 이들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힘들고 더디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는 사명감도 있었다. “일이 힘들수록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해요. 내가 이 일을 왜 하는가? 돈을 위해서? 돈을 벌려고 했으면 다른 일이 얼마든지 있겠죠. 명예를 위해서? 그럼 대학교수로 남아 있었겠죠. 브랜드를 하나 육성하려면 굉장히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해요. 애초에 요행을 바라고 시작한 일은 아니니까 서두르지 않죠. 남들보다 큰 솥을 만들었기 때문에 밥은 늦게 짓더라도 그만큼 더 많이 지으면 되잖아요. 이미 이만큼 달려왔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어요. 끝도 보이지 않지만 그 시작도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와버렸죠. 그럼 어떻게 하겠어요? 돌아가나요? 일단 달리고 보는 거죠.” 인생 2막, 얻는 게 없어도 일단 달리고 본다!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하는 그의 이야기 속에 어쩐지 순탄치만은 않았을 지난 일들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다사다난했던 지난 10여 년, 한글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혹시 후회하는 마음은 없는지 물었다. “아마 대학에서 교수생활도 하고, 굉장히 유명한 아티스트가 됐을 것 같아요. 하지만 결코 후회는 안 해요. 그 삶은 지금이라도 다 벗어던지고 할 수 있는 것들이거든요. 오히려 공부를 많이 한 건 후회해요. 대학교, 대학원, 그리고 유학까지. 지금 보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겠다 싶어요. 똑똑하고 아는 게 많다고 사업을 잘하고 세상사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러한 후회 역시 이만큼 살아봐서 알게 된 것이라고. 그는 공부하던 30대 중반까지를 인생 1막, 그 이후로부터 현재의 삶을 인생 2막이라고 설명했다. “인생 1막은 어느 정도 계획대로 됐어요. 공부는 열심히 하고 노력하면 점수 잘 받아서 좋은 대학 가고 그것에 만족할 수 있거든요. 근데 인생 2막은 노력한다고 다 이룰 수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왜냐하면 공부는 정량이 있고 그 조건에 맞추면 되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다들 머리 굴리고 있거든요. 변수가 생기죠. 내비게이션이 안 막히는 길을 알려 주면 그대로 가나요? 머리 써서 다른 길로 가는데 또 막히잖아요. 그러니 게임이 안 되죠. 근데 아직은 다 내 것만 같아서 욕심도 내고 그렇기 때문에 실패하더라도 달릴 수 있는 것 같아요. 2막까지는 노력한 만큼 얻는 게 없더라도 일단 해보려고요.” 그는 노력하는 만큼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인생 3막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때가 되면 얼마만큼을 노력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혜안이 생길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간의 수명이 1000년 정도 되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거예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 인생의 룰을 깨닫게 되는 거죠. 아마 인생 3막은 그런 룰을 깨달았을 때 찾아오는 게 아닐까 해요.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알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구분하는 시기인 거죠. 그러면 자연히 무리한 계획을 세우거나 욕심을 부리지도 않을 거고요. 그렇게 욕심을 덜고 농부의 마음으로 늙어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끝으로, 그에게 인생 3막은 언제쯤 오리라 예상하는지 물었다. “글쎄요. 철들면 죽는다잖아요. 아마 저도 그냥 이렇게 살다가 눈 감는 순간에 ‘아휴, 그래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한마디 하고 깨닫지 않을까요?”
- 2016-10-04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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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김성철 교수
-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 어린 친구들이 쓰는 말로 표현하면 ‘성공한 덕후(마니아)’ 같다고. 다른 분야가 아닌 ‘불교 덕후’. 그러자 웃으며 그가 화답했다. “맞아요. 덕후는 나쁜 표현이 아니에요. 결국 한 분야에 능통하고 깊은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미래를 주도하며 세상을 바꿀 거예요.” 이렇게 스스로를 덕후라 말하고 있는 그는 바로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이자 치과의사이기도 한 김성철(金星喆·58) 교수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들었어? 남일이가 죽었대. 숙명여고 애들이랑 대성리에 갔잖아. 물에서 못 나왔대.” 서울고등학교 1학년 학생 김성철은 친구의 죽음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남일이와 같은 미술반이었던 그 역시 그곳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여학교 클럽과의 비공식적인 교류는 학교에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동행하지 않았다. 그저 혼나는 것이 겁이 났기 때문에. 처음엔 무덤덤했다. 그저 교실에 빈자리 하나만 눈에 띌 뿐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 사고로 인해 그해 여름방학에 떠난 학교 해양훈련은 엄격해졌다. 선생님들은 안전사고가 생길까 노심초사하며 엄하게 감시를 했다. 아이들은 수군거렸다. 모처럼 신나고 재미있어야 할 행사가 힘들기만 한 것이 죽은 남일이 때문은 아니냐고. 그런 일들을 겪으며 어린 김성철은 조금씩 죽음이라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죽음이라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구나 하고. 김 교수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표현했다. ‘마음의 병’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고. “그렇게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무작정 책을 보기 시작했어요. 사춘기 소년이었으니까. 알베르 카뮈의 이나 장 폴 사르트르의 와 같은 실존주의 문학 작품들이었죠. 또 엠마누엘 칸트의 같은 철학책들도 있었어요. 뜻도 잘 모르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죠.” 화가가 되고 싶었던 소년 사실 미술반에 들어갔던 것은 화가가 되고픈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화가를 꿈꾸는 모든 소년, 소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가족에게 그 꿈을 털어 놓는 것은 쉽지 않았다. 치열한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놀고먹는’ 예술에 대한 꿈을 이야기하는 것은 ‘죄악’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좋은 학교에 어려운 시험을 거쳐 들어간 우등생이었기에 주변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고3이 된 김성철 학생은 이과인 전공에 미술이라는 취미를 덧대려면 건축학과가 좋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건축이라면 그림에 소질 있는 손재주도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손재주에 대한 담임선생님의 생각은 좀 달랐다. 선생님이 추천한 것은 ‘치과대학’이었다. 그 추천에 반감이나 저항은 없었다. 무엇보다 치과의사가 되면 근무시간이 짧다는 것이 매력이었다. “치과를 하는 친구는 늦게 출근해서 오후 일찍 퇴근한데, 그리고 골프 치러 간다더라”라는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시간에 그림을 실컷 그리면 되겠다 싶었다. 그림을 그리며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큰 고민 없이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입학했다. “치과대에 입학해서도 그림 그리기는 멈추지 않았어요. 학교에서 그림에 관심 있었던 친구들과 함께 아틀리에를 차렸어요. 대학 입학 후 우리가 다니던 화실에 매달 내는 돈만 모아도 월세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거든요. 그렇게 2년을 열심히 그렸어요. 학교가 있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시작해서, 전공이 다른 친구들 때문에 서대문구 북아현동까지 4번을 옮겨 다녔어요.” 마음의 병에 해답을 얻다 김 교수는 그 와중에서 가슴 한편에 풀리지 않는 무엇이 있었다. 바로 친구의 죽음에서 비롯된 마음의 병이었다. 그러다 만난 것이 이다. 밀교사상과 선종 사상을 설한 대승경전으로, 그는 이 경전을 읽다 죽음에 대한 의문이 조금씩 풀려가는 것을 느꼈다고. “책에서 변치 않고 죽지 않는 것은 무엇이냐는 파사익(波斯匿)왕의질문에 부처는 이렇게 대답해요. 저 흐르는 강의 모습이 어릴 때와 지금이나 차이가 없듯, 그대 역시 외모는 바뀌었지만 보는 성품은 그대로라고. 원래의 나는 멸(滅)함이 없다는 설명을 듣고 하나의 깨달음과 함께 불교 교리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허겁지겁 불교에 관한 책을 독파하기 시작했다. 그의 ‘덕후’적인 기질이 발휘된 것이다. 그래서 시중에 출판된 불교 관련 책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더 이상 읽을 만한 책이 없었다. 서점에 나와 있는 책들을 다 읽고 나니 불교에 관해 더 깊이 알 수 있는 책을 구할 수 있는 곳은 국내에 단 한 곳뿐이었다. 불교학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동국대학교 도서관. 그 도서관을 편하게 들락날락하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은 동국대학교 학생이 되는 것뿐이었다. 불교연구원을 설립한 이기영(李箕永) 교수의 강의를 청강까지 했지만, 그것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1987년 동국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했다. 이 교수가 있었던 인도철학과였다. “치대에서 만난 아내는 처음에 이해를 못했어요. 책 때문에 대학원에 가다니. 그것도 치과의사가 인도철학과에 말이죠. 그래도 2년만 기다리면, 그 이후에는 마음껏 도서관을 다닐 수 있으니 참아 달라고 부탁했죠. 처음엔 학부 출신 학생들에 비해 많이 모자랄 것 같아 걱정했는데, 별 차이가 나진 않았어요. 알고 보니 제가 닥치는 대로 읽었던 책들이 대부분 불교학과 학부생들의 교과서였어요.” 그렇게 대학원을 다녔다. 하지만 불교라는 학문에 대한 갈증은 더 커지기만 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아내는 이번에는 선선히 응해줬다.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당시엔 이미 치과를 차려 개원한 상태였기 때문에, 치과의사와 박사과정 대학원생이라는 두 가지 신분을 유지하게 됐다. 번역서 통해 불교학계에서 ‘주목’받다 그가 불교계에서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번역해 1993년에 발표한 이라는 책 덕분이었다. 은 나가르주나(중국에서는 용수(龍樹)라 불림)라는 1800년 전에 활동한 인도의 고승이 쓴 책으로, 나가르주나가 쓴 책들은 대승불교의 뿌리가 된다. 은 인도철학, 불교철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책이지만, 그동안 이 책은 제대로 번역돼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었다. 그가 번역하기 전까지. “일반 불교학과는 일본어 정도만 할 줄 알면 됐지만, 인도철학과는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까지 할 줄 알아야 했어요. 영어는 기본이고.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언어를 익히는 것을 잘해서, 그간 번역이 안 된 책들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가 불교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씌어진 원전을 직접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다른 학자들이 원전과 비교하며 연구할 수 있도록 해놓았죠.” 어쩌면 이 선택도 가장 ‘덕후’다운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여하튼 그동안 국내의 많은 불교학자들이 해내지 못했던 일을 현직 치과의사가 이뤘다는 점에서 불교계는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5년 대승불교의 공(空) 사상을 체계화한 개론서인 을 번역해 다시 세상에 내놓는다. 인도의 불교학자 무르띠(Murti)가 영어로 저술한 책이다. 그리고 내놓은 세 번째 책 으로 학계의 찬사를 받게 된다. 은 중론을 쓴 나가르주나가 에 대한 비판을 반박한 책이다. 이 책은 현재 산스크리트어 원전과 티베트역본, 한역본이 남아 있는데, 김 교수는 이 3가지 언어를 각각 우리말로 번역해 정확한 뜻과 번역의 배경을 알 수 있게 했다. 물론 후학을 위한 문법적 해설도 잊지 않았다. 3가지 책에 대한 번역이 끝나 있을 때, 그는 이미 불교학계에서 ‘불교에 관심 있는 치과의사’가 아닌 ‘불교학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치과 폐업하고 대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치고 나서 그가 준비한 것은, 치과를 쉬고 인도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었다. 불교 발상지에 가서 좀 더 깊은 공부를 하고 싶은 학문적 욕심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불교학에 대한 욕심’을 멈추게 만든 것은 가족도 치과도 아니었다. 바로 동국대학교였다. “제가 전공한 공(空)사상 분야의 전공교수님이 건강이 나빠져 퇴직하셨다면서, 그 강의를 맡아 달라고 제안이 왔어요. 사실 그 분야는 논리학과 수학이 바탕이 되어야 해서, 일반 불교학자들 중에도 능통한 사람은 많지 않았거든요. 그것을 인연으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물론 치과는 그만뒀고. 단지 강의를 나가는 것이 아니라 치과의사로, 그리고 서울에서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었지만 주저함은 없었어요.” 공사상은 의 ‘색즉시공’을 떠올리면 쉽다. 물질이 곧 비었고 빈 것이 곧 물질이니 감각과 생각과 행함이나 의식이 이와 같다는 뜻이다. 흔히 공(空)을 무(無)와 혼동하기 쉬운데, 공(空)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無)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흔히 우리가 살면서 큰방, 작은방 이런 표현을 하죠. 하지만 어떤 방을 보고 큰방이라고 부를 땐 이미 우리 기준엔 비교할 수 있는 방이 들어서 있는 거예요. 그런 이분법적 생각이 우리를 힘들게 하죠. 게다가 요즘의 승자가 독식하는 신자유주의는 이것을 더욱 부추겨 우리 삶을 어지럽게 하고 있어요. 늘 비교당하고, 경쟁하는 삶 말이에요. 이 신자유주의는 하나의 경제 원리일 뿐인데 우리는 이것을 행정과 교육, 문화에까지 도입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나 같은 프로그램을 보세요. 예술을 도구로 경쟁하고 있잖아요. 그 프로그램을 통한 폐해가 여실히 드러나죠. 결국 크게 소리 지르며, 성량이 큰 사람이 이기는 구도로 변질되잖아요. 노래라는 예술이 큰소리를 내는 시합이 아닌데, 경쟁을 통하다 보니 결국 획일화되는 것이죠.” 이런 사회적 변화 속에서 가장 외면 받고 있는 세대 중 하나가 바로 시니어들이다. 육체적 수명은 점점 길어지는데, 성과주의로 인해 설 곳을 잃고 사회적 수명은 짧아졌다. 그들에게 김 교수는 어떤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을까? 죽음에 대한 공포도 나름의 노력과 수행이 더해진다면 극복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타적인 삶을 사세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종족을 보전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데, 자식이 아닌 다른 사람을 돕는 것도 일종의 종족 보전 본능이에요. 나라는 개체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동족을 보존하면서 그 욕구가 충족되는 셈이죠. 거기에 수행을 통해 내가 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면,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울러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있는 제2의 삶을 살 수도 있고요.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머리로 깨닫고, 수행을 통해 마음에서 욕심, 분노, 교만과 같은 번뇌를 지울 수 있다면 가벼워진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빈자리 채워가며 기여하고파 앞으로 그의 목표는 한국 불교학에서 필요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그가 그동안 번역서들을 내놓으면서 기여했던 것처럼. 그가 2014년에 내놓은 같은 책들이 대표적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진화생물학, 일반적으로 종교와 대립각을 세운다고 여겨지는 ‘진화론’을 불교적 관점에서 해석했다. 최근 각광받는 뇌과학도 불교적 관점에 분석해냈다. “뇌과학에서 밝혀내지 못한 마지막 키워드는 바로 ‘마음’이에요. 뇌파나 뇌의 기능에 대해서 뇌과학자들은 많은 연구결과를 내놓았지만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죠. 하지만 불교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과학적 연구 결과를 모두 포용하면서 마음이나 윤회(輪廻)까지 설명할 수 있어요. 그게 불교학의 힘이죠.”
- 2016-09-28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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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 라이프]스타를 움직인 책은?
- 글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knbae24@hanmail.net 뮤지션으로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연기자로서 최고의 찬사가 쏟아진다. 방송 진행자로서 수많은 고정 팬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8월 출간한 에세이집 를 비롯한 에세이와 소설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바로 우리 시대 최고의 만능 엔터테이너이자 뮤지션인 김창완이다. 김창완은 자신의 창작과 예술 활동의 원동력은 책이라고 단언한다. 책을 직접 쓰기도 하지만 김창완만큼 책을 많이 읽는 연예인은 드물다. 김창완은 책을 통해 상상력을 키우고 인생을 배운다고 했다. 그런 그의 가슴에 강렬하게 울림을 남긴 책은 어떤 책일까. “치열하게 사는 것이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고 예술적인 삶에선 필수적이다.” 바로 미술 평론가 마이클 키멜만의 을 관통하는 주제다. 걸작은 고흐나 피카소만 남기는 것이 아니고 교과서에 나오는 딱딱한 미술사처럼 어려운 것도 아니다. 예술은 우리 자신이 생활 속에서 발견하고 창조하고 또 재창조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사랑하고, 열정을 쏟아붓고, 진심을 쏟으면 아름다운 걸작”이라는 의미를 잘 담은 것이 이다. 김창완은 을 보며 인간으로서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야하고, 뮤지션으로서 활동도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고 권한다. 김창완처럼 다른 스타들도 가슴에 평생 간직하는 책이 있다. 스타들이 감동하고 인생의 좌표로 삼는 책이 있다. 스타들을 움직인 책은 무엇일까. 하루에도 연예계에는 수많은 별이 뜨고 지는 상황에서 최불암은 50여 년을 한결같이 빛을 발산하는 현재 진행형의 큰 스타다. 그가 연기를 통해 내뿜는 빛을 보면서 곤경에 처한 사람은 용기를 얻고, 좌절에 빠진 사람은 위안을 받으며, 절망에 허우적대는 사람들은 희망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는 단순한 연기자를 넘어 삶의 좌표 역할을 하고 있다. ‘국민 아버지’ 최불암에게도 삶의 이정표 같은 책이 있다. 바로 일본 소설가 고미카와 준페이의 이다. 징병으로 끌려가 참전한 저자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남녀 간의 사랑의 절절함을 전하는 한편 전쟁의 비인간성을 질타한 이 소설이 왜 최불암의 마음속에 각인된 책으로 남았을까. 최불암은 “책 한 권이 인생을 좌우한다는 말을 을 읽으면서 절감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읽었는데 감전된 듯 감정의 변화를 느꼈다. 에는 전쟁의 참혹함 속에 사랑을 지키는 순수함이 있고 양심이 있고 인간이 있다. 그리고 남성의 자존심을 강하게 느꼈다. 얼마나 이 책에 감동했는지 나는 가지(소설 속 남자 주인공)처럼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을 정도다”라고 말했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어머니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어머니의 힘은 위대합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를 사랑합니다”라는 2004년 KBS 연기대상 수상소감으로 많은 이에게 감동의 파문을 일으킨 고두심. 그녀 앞에 조건반사적으로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바로 어머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고두심을 떠올릴 때 ‘어머니’라는 단어를 조건반사적으로 연상한다.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연극에서 모든 것을 희생하며 자식을 위해 살아온 이 땅의 어머니를 연기했기 때문이리라. “모르겠어요. 운명이고 숙명인가 봐요. 처녀 때도 어머니역을 했으니까 말이에요. 많은 모습의 어머니가 있는데 제가 맡은 캐릭터는 강인한 어머니의 성격이 강해요”라고 말하는 고두심은 수기공모에 응모한 김인숙 씨를 비롯한 일반 여성들이 자신들의 어머니에 관해 쓴 수필을 모아 책으로 펴낸 를 보고 많이 울었다고 했다. 이 책에는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교사에게 맞고 온 아이를 보고 학교에 가 “아이가 숙제를 안 해왔거나 공부시간에 장난을 쳐서 선생님께 꾸중을 들었다면 이렇게 아프지 않을 겁니다. 부모 잘못 만나서 그렇게 된 것이니 절 혼내 주십시오. 제 손바닥을 때려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어머니 등 평범하지만 위대한 우리 주위 어머니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다. 고두심은 제주 해녀처럼 강한 생명력으로 자식들을 지켜 주던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자식들에게 어떤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지를 마음으로 알게 해 준 책이 라고 했다. 평범한 한 남자가 있다. 길거리에서 만나면 그에게 눈길을 줄 수 있는 흡인력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한 사람일 뿐이다. 그래도 그는 할 말이 없는 사람이다. 흔히 이웃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니까. 그가 화면 속으로, 스크린 속으로, 무대 속으로 들어간다. 평범함은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의 마음에 강력한 파문을 일으킨다. 엄청난 흡인력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빨아들인다. 그의 비범함은 깊은 수렁이 되어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에게 빠져들게 한다. 배우 조재현이다. 드라마와 영화, 연극 등에서 강렬한 캐릭터마저 생명력을 불어넣어 현실 속 인물로 인식하게 하는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배우, 조재현을 움직인 책은 바로 가출과 반항을 일삼던 사춘기 시절 누나가 선물한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이다. “은 내게 반항하는 마음을 다스려 주었고 감성과 사랑에 대해 폭을 넓혀 준 책이다. 그리고 정서적인 연기를 펼치는 데 큰 도움이 된 책이다. 인간과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준 책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조재현은 ‘첫사랑’에서 드러난 인물들의 심리나 감성, 그리고 행동들은 연기자의 길에 들어섰을 때 연기의 원동력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안녕하십니까. 남희석입니다. 요새 저보고 자꾸 변했다고 하시는데 제가 우유입니까? 변하게!” 한동안 남희석에게 전화하면 이 소리가 흘러나와 웃음을 짓곤 한 적이 있다. 한때 최고 MC로 군림했던 남희석은 요즘에도 여전히 존재감을 드러내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제 최고 자리를 후배들에게 물려줬지만 늘 시청자의 시선의 중앙에 서 있는 MC다. TV에 나오는 코미디언 이주일이 너무 좋아 개그맨의 꿈을 안고 열한 살 때 고향 충남 보령을 떠나 서울행 기차를 탔던 남희석은 대본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스러운 프로그램 진행으로 스타 MC가 됐다. 프로그램과 진행, 그리고 삶에 도움이 되는 책이라면 구분하지 않고 책을 읽는 독서광으로 잘 알려진 남희석은 대상과 현상을 다양한 시선으로 볼 수 있게 한 힘을 준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과 이 의미 있는 책이라고 말한다. “과 , 이 두 권의 책은 단순한 용어 정리가 아닌 하나의 트렌드나 현상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측면에서 입체적으로 조명한 책입니다. 그리고 실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인데 지나치기 쉬운 이면의 의미를 알기 쉽고 명쾌하게 정리했습니다.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한국문화와 세계문화에 관한 책도 재미가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여섯 살 때 레스토랑에서 가수였던 아버지(이대현, ‘먼지가 되어’ 작곡자이자 가수)의 공연을 본 적 있어요. 인기가 높지 않았던 아버지 공연에 관객들의 차가운 반응을 보면서 눈물이 났어요. 그때부터 가수가 되려고 했어요. 저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음악 세계를 추구한 아버지를 가장 존경해요. 그런데 무명이셨던 아버지의 공연이 외면 받는 게 슬펐어요. 그때 유명한 연예인이 되고 싶었지요. 이제는 유명한 연예인이 아니라 대중에게 실력으로 인정받는 연예인이 되는 것으로 꿈이 바뀌었지만요.” 독특한 캐릭터의 자연스러운 소화력과 자신만의 향기가 배어나는 연기력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뛰어난 가창력과 작곡실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이하나다. 이하나는 스타의 반열에 올랐어도 여전히 신인 때 보였던 담백한 마음과 연기를 향한 진지한 태도를 견지한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계속 던지는 태도도 버리지 않고 있다. 인기에 속박되는 것이 아니라 인기를 초연하게 바라보는 이하나의 자세는 다른 연예인과 큰 차이점이다. 이하나의 이 같은 태도는 그녀가 좋아하는 책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녀는 로 잘 알려진 파울로 코엘료의 를 참 좋아한다고 했다. “코엘료의 책은 나를 돌아보게 해요. 나는 어디에 와 있고 나는 무엇을 향해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 같아요. 나이가 어려서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못 했지만 코엘료 책을 보면서 삶의 지향점을 생각하고 현재의 나를 반성해요. 그리고 실패와 성공이 순식간에 이뤄지고 경쟁이 치열한 연예계에서 평점심을 찾게 해주는 것이 코엘료의 예요. 이 책을 보면서 좌절했을 때 용기를 얻었고 인기를 얻었을 땐 저를 돌아봤지요.” 이 말을 들으면서 코엘료가 그의 책에서 펼쳤던 “내 속의 헛된 바람들 속에서 길을 잃지 말라”는 잠언적 메시지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이하나를 읽을 수 있다. 스타들은 이처럼 자신의 삶과 인생, 예술적 활동에 영향을 준 책들을 가슴에 아름다운 화인(火印)으로 새겨 놓고 있다. 그것이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힘으로, 예술 활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 2016-09-26 1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