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60년대 어두웠던 우리 사회상을 되돌아보면 볼수록 우리 사회가 ‘현기증’을 느낄 만큼 변했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필자도 분명 그들 중 하나이다.
이와 관련해 특파원으로 10년 넘게 우리나라에서 지내며 활동한 한 영국 언론인의 글이 생각난다. 그는 1990년대 한국 경제의 위상을 보고 1960년대의 한국을 생각하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며 놀라워했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놓고도 1970년대에 한국이 이처럼 민주화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고 회상했다. 필자도 이 특파원의 얘기에 실로 동감한다.
특히 1960년대를 전후해 한국을 떠났던 많은 교포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유엔군들도 우리나라를 방문하고는 천지개벽을 본 듯하다고 놀라워한다.
1960년대를 유학생 신분으로 독일에서 지낸 필자가 어쩌다 접하는 고국 소식은 보고 듣기도 민망한 뉴스가 대부분이었다. 이를테면 대표적인 저개발국형 뉴스라고 할 수 있었다. 요즘도 몇몇 국가에서 고향에 가기 위해 열차에 무질서하게 탑승하는 장면이 뉴스를 타곤 하는데, 1960년대에 필자가 대했던 고국의 뉴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기다 195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필자 세대는 식민 사상이나 식민 역사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우리가 직접 일본의 식민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가르쳤던 대부분의 교사들이 일제강점기하에서 식민 교육을 받은 세대였기 때문이다.
그 시절 역사 수업 시간에 고려자기(高麗瓷器)에 대해 처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역사 교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그 아름다운 청자색이 조선시대에 갑자기 사라진 것은 우리 도공(陶工)들이 청자에 사용할 안료(顔料) 제조와 배합의 비밀을 자기 자식한테도 전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 민족은 옹졸하다.” 당시 필자는 그 교사가 말한 ‘옹졸한 우리 민족’들에 대한 아쉬움보다 자괴감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962년 필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한국문화유산 전시회’에서 우리 고려청자에 대한 큰 깨달음의 기쁨을 얻었다. 당시 전시회 관리 감독의 책임을 맡고 있던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 1916~1984, 국립중앙박물관장 역임) 선생을 만났을 때였다. 전시된 고려자기를 보고 필자가 물었다. “학교에서 저 아름다운 비취색이 전해지지 못한 것은 도공들이 그 비법을 자식들한테도 전수하지 않아서라고 배웠습니다.”
그러자 선생은 “그것은 일제 식민 교육의 결과이지” 하면서 “고려시대 우리 선조들이 저 우아한 청자색을 선호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해. 우리 선조들이 즐겨 입었던 한복의 마고자(조끼)나 바지의 색깔이 연한 비취색이라는 것도 우연이 아니지.” 그리고 이렇게 결론지었다. “청자의 쇠퇴는 조선시대 개막과 더불어 도입한 유교사상이 순백색인 백자(白瓷)와 맥을 같이한 결과라고 봐야 하네.” 필자의 우문에 대한 혜곡 선생의 현답이 아닌가 싶었다.
>>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