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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사촌이 보험이다
- 아들이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며느리가 급성 맹장염이어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아이 셋을 당장 맡길 곳이 없다는 것이다. 고양시 일산에 살고 있는 아들네는 요즘 보기 드물게 아이가 셋이다. 맨 위의 손녀가 7세이고 그 밑에 4세 손자와 2세 손녀가 있다. 하나같이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이다. 급한 김에 수원에 살고 있는 딸한테 전화를 했다. 딸은 전업주부이기는 하지만 돌이 갓 지난 아들이 하나 있다. 움직이려니 기저귀, 우유병 등 짐이 한 짐이고 밖에는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려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하소연만 하고 있다. 아이들의 할머니인 필자의 아내는 몇 달 전 새로 얻은 직장에 나가고 있는데 몇 사람이 서로 팀을 짜서 일을 하기 때문에 빠질 수가 없는 상황이다. 결국 불똥은 필자에게로 튀었다. 하지만 필자도 직장에 나가야 해서 손주들을 돌보려면 휴가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런데 아들은 필자가 아이들을 제대로 돌볼지 믿지 못하는 눈치다. 결국 아내가 회사 눈총을 받아가며 아이들을 돌보기로 결정했다.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전철로 이동을 하는데 아들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파트에서 같은 교회를 다니는 이웃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돌봐주기로 했으니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일단은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고 그분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 집도 또래의 아이 셋을 둔 가정이란다, 동병상련이라고 사로의 사정을 잘 이해하기 때문에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선 것 같다. 며칠 뒤 그 집 아이 셋과 우리 손주 셋이 함께 생활하는 사진을 보내왔다. 꼭 어린이집 같은 분위기라서 안도감과 함께 웃음이 나왔다. 물론 아들이 휴가를 내고 아내 간호도 하고 틈틈이 집에 와서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찾아오는 일을 해야 한다. 아들이 집을 비우고 병원에 가는 시간에는 이웃집 아주머니가 틈새관리를 해줄 것이다. 맹장염 수술법이 발전해 예전처럼 오래 병원에 입원해 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도 3일은 걸릴 텐데 흔쾌히 도움을 주겠다고 승낙해주신 분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 그지없다. 도시의 현대인들은 거미줄처럼 꽉 짜인 스케줄대로 너 나 할 것 없이 바쁘다. 갑자기 계획에도 없는 일이 생기면 당황하고 우왕좌왕하게 된다. 도와줄 일가친척이 멀리 떨어져 살면 도움을 주기도 어렵다. 이런 시대를 반영하듯 예전에 없던 산후조리원이 생겨나고 간병인, 요양보호사라는 직업도 생겨났다. 그전에는 이런 일들을 모두 가족들이 해줬다. 도시인들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 이번 일을 겪다 보니 친한 이웃이 멀리 있는 형제들보다 백번 낫다는 생각이다. 살다 보면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던 일들이 닥치기도 한다. 가까운 이웃을 가까이 알아두는 것은 마치 보험에 가입하는 것처럼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 2017-07-06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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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랍 속 어머니 사진
- 어머니가 생전에 당신의 사진 중 괜찮은 포즈의 사진을 몇 장 인화해 서랍에 넣어두었다. 식구들이 자주 열어보는 서랍이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어느 날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투로 한마디 하신다. “엄마 보고 싶다고 사진 달라는 놈들이 있을까봐 몇 장 뽑아놨는데도 아무도 달라는 놈이 없다,” 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영화 포스터 문구가 참 그럴듯했다. ‘세상에서 슬픈 여자는 버림받은 여자, 버림받은 여자보다 더 슬픈 여자는 죽은 여자, 죽은 여자보다 더 슬픈 여자는 잊혀진 여자’ 라고 했다. 죽음보다 더 비참하고 슬픈 일은 목숨처럼 소중했던 자식들로부터 잊혀지는 것임을 어머니 돌아가시고 한참이 지난 후 이해를 했다. “죽으면 내가 살던 흔적이 하나도 없으면 좋겠다. 사진 다 태우고 영원히 잊혀지기를 원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진심일까? 옛날에 할아버지가 맏손자에게 “내 제사를 지내줄 놈” 하며 애지중지한 것은 귀신이 되어 제삿밥을 얻어먹겠다는 욕구보다는 자신이 죽은 날을 후손들이 잊어버릴까 두려워한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분은 어머니가 이제 저승길 갈 때가 됐다고 그동안 보관하던 앨범 사진을 불에 태우며 눈물 흘리신 내용을 글로 썼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속으로만 안타까워했다고 했다. 이럴 때 필자라면 “엄마! 엄마 사진 태우지 말고 그냥 두세요, 엄마 보고 싶을 때 꺼내봐야지요” 했을 것이다. 그러면 부모님이 얼마나 좋아하실까! 젊은 세대들은 컴퓨터를 잘 다룬다. 컴퓨터 안에 앨범 사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정돈해둔다. 어떤 분이 아들 집에 가서 컴퓨터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고 한다. 손자와 손녀가 출생할 때부터 지금까지 성장하는 동안 수백 장의 사진이 글과 함께 잘 정리돼 있었는데 부모인 자기 사진은 없더라는 것이다. 손자 손녀와 같이 찍은 사진 속에서만 어쩌다 모습이 보이더란다. 그렇게 자식은 눈으로는 부모를 보면서 마음으로는 잊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나 부부 사진은 자동차에도 걸고 거실에도 걸면서 부모님 사진은 한 장 없는 집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깔끔한 성품인 분들은 저승길 들기 전에 자신이 쓰던 물건을 버리고 태우고 정리하면서 감정에 격해져 우시는 분들이 많다. 법륜 스님은 돌아가신 분의 유품 정리는 자손의 몫이라고 했다. 자손이 선친이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면서 버릴 것은 버리고 간직할 것은 간직하면 되는 것이지 살아 있는 사람이 자신의 물건을 마치 죽은 사람 물건인 양 정리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언제 다가올지도 모르는 죽음을 예상하고 눈물을 흘리며 궁상을 떨 필요는 없다. 살아 있는 동안은 즐겁고 신나게 살면 된다.
- 2017-07-03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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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 예찬
- 하짓날 새벽 곁에서 자고 있는 아내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언제 저렇게 잔주름이 있었던가. 매일 매 시간 다른 어느 누구보다 많이 자주 본다고 자부하며 곁을 지켜왔어도 몰랐는데 갑자기 눈에 띄다니 서 있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바뀐다는데 혹시나 하고 발치로 옆구리로 옮겨 가며 바라봐도 보려고 해서 그런지 역시나 보인다. 가시덤불로 막아도 지름길로 온다는 흰 머리칼이 이겼구나. 오랜 연애 끝에 문서에 도장 찍고 맏며느리로 들어와 아이 셋 낳고 지지리 고생하는 자체를 아이 키우는 즐거움으로 퉁 치며 살았던 아내. 자신들이 좋다는 배필 토하나 달지 않고 승낙 해 아직 잡음 없이 무난한 삶 갖게 해줘 며느리 사위들에게 사랑 받으며 자주 찾아오는 휴일을 기다리는 엄마. 중학생 셋 초등학생 하나인 손자 손녀들에게 늘 공부하고 열심히 배우는 자세를 몸소 본이 되어주는 정신적 지주면서 절대 멘토인 스승 할머니. 두 식구 살면서 꼰대가 될 것이냐 어르신이 될 것이냐 물어보는 동반자. 친구들 연락에 순서 지켜 골고루 만나주고 함께 울어주는 듬직한 친구. 무엇하나 소홀한데 없이 묵묵히 중심 지키며 세상에 순응하고 철저히 준비하는 삶의 표본인 아내. 모든 게 부족하고 팍팍한 생활 속에서도 잠시 누가 무얼 하면 좋다는 말에 귀가 팔랑대 한눈팔려는 기미만 보이면 아이들 다 키워 보낼 때까지만 참으면 그 다음은 마음대로 하라며 오로지 아이들 건사하기에 올인 한 엄마. 이제 모든 걸 다 해 줬으나 단 둘이 남아 정작 기운도 없고 우리 몫은 없지 않느냐는 물음에 나를 못 찾은 것은 후회되지만 다시 그 일을 한다 해도 또 후회할 줄 뻔히 알아도 나는 다시 그 일을 하고 이렇게 후회하겠다는 아내. 인생의 정답이라는 게 있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잘 키웠지 않느냐 그거면 됐다 이 세상에 태어난 소명 중 내 일은 다 한 듯하다. 내 짧은 생각에 내게 또 다른 욕망은 욕심이니 가자 부르시면 기쁜 마음으로 가겠다는 아내. 내게는 아재나 꼰대가 아닌 어르신으로 사는 첫 걸음은 얼굴과 매무새가 정갈해야한다며 늘 양복과 넥타이를 추천한다. 시대를 리드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말수는 적게, 잔잔한 미소로 불치하문의 겸손을 갖추는 태도와 행동이 어르신일 것이란 확고한 개인소견. 상대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경청해 주고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잘 감지해 젊은이들 보다 한참 떨어지지 않도록 공부하며 어느 누구도 내가 아는 분야를 제외하곤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나서지 말라. 아재 꼰대 어르신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나에 대해 느끼는 것이니 답답하고 안타까워도 상대가 물을 때만 대답해 주도록 하라. 주름지고 쳐진 얼굴이야 흐르는 세월에 어쩔 수 없지만 그나마 가꿔야한다 나를 대신하는 게 내 얼굴이고 누구에게나 보여 지는 내 자신이다. 나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의외로 나를 모르는 경우가 대단히 많으니 거울 앞에서 얼굴을 자주 봐라. 한번 보고 두 번 세 번 볼 때마다 다른데 자주 볼수록 내 자존감이 커지고 보는 시간도 짧아진다. 찡그린 얼굴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밝고 맑은 얼굴을 만들자 한다. 아내 얼굴에 잔주름이 생겼다. 거울을 자주 보니 본인이 먼저 알 텐데 그 흔한 주사 한 방 안 맞았다. 더 자주 바라봐야겠다.
- 2017-06-2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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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박한 행복
- ‘행복’이라는 타이틀을 넣어 만든 명함이 많다. 이런 분들은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살면서 남들에게 작은 봉사활동을 하는 분들로 대부분 뾰족한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다. ‘행복 전도사’, ‘행복 바이러스’, ‘행복 코치’, ‘행복 아카데미’, ‘당신의 행복을 지켜드립니다’ 대략 이런 종류다. 방문 요양보호원을 운영하는 분인데 이분의 상호는 ‘00 행복 나눔 요양원’이다. 필자가 한마디 했다. ‘기왕이면 통 크게 행복 몽땅 드림 이라고 하지 쩨쩨하게 행복 나눔이라고 합니까?’ 하며 웃은 적이 있다. 누구든지 행복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 정말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 명함에 행복을 드린다는 분들은 행복이 남아도는 진짜로 행복한 분일까? 자신 있게 ‘예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모두가 평생을 행복이란 단어에 매달리며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왜 행복해지지 못할까? 행복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삶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 흐뭇하다.’라고 한다. 즉 주관적이다. 아무리 비단옷에 고기반찬을 먹고 남들이 우러러 보면서 저분은 참 행복할 것이다. 라고 해도 막상 당사자가 ‘너희들은 모른다, 지금 내속이 얼마나 타 들어가는지.’ 하면서 스스로 불행한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많이 가지면 행복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서는 걸로 생각한다. 남들보다 돈이 많고 잘생겼으면 행복할 것이다. 남들보다 건강하고 자식들도 다 잘되어 걱정근심이 없으면 행복할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 돈이 많아도 더 벌고 싶고 자식이 공부를 잘해도 더 잘하는 아이와 비교를 하면서 만족을 못한다. 몇 백억의 돈이 있으면서도 부정한 방법으로 검은 돈을 받아먹다 들켜 쇠고랑차고 재벌들도 형제간 더 가지려고 소송싸움 하는 걸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내에게 아침인사로 ‘잘 잤어?’하고 먼저 물어본다. 쉽고 간단한 질문이다. 아내의 대답은 한결같다. ‘응 잘 잤어.’ 설령 몸이 찌뿌듯해도 ‘아니 잠 잘 못 잤어.’ 하지 않는다. 인사치례이고 잘 잤다고 말하는 것이 서로가 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사를 할 때 ‘안녕하세요?’하면 ‘예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하지 ‘아니요. 안녕하지 못해요.’하지 않는다. 긍정적인 질문을 먼저 해야 긍정적인 답을 돌려받는다. ‘자발적 가난’ 이라는 말이 있다. 스스로 가난을 택하는 것이다. 테레사 수녀님이나 성철스님 같은 분들의 삶이다. 이분들은 스스로 가난의 길로 들어서며 남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본인은 행복한 삶을 마쳤다. 나이 들어가면서 욕심을 줄이기로 했다. 이 정도면 잘 사는 것이고 우리아이들도 이만하면 부모한테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만족스러워지고 행복해진다. 아내와도 가끔씩 행복을 이야기한다. 아직은 건강하고 직업도 있고 게다가 딸, 아들이 모두 결혼해서 손자, 손녀도 있으니 행복하지 않느냐고 서로 물으면 서로 행복하다고 대답을 해준다. 일용할 양식은 풍족하지는 않아도 부족하지 않으면 만족해야 한다. 매사에 이만하면 풍족하고 즐겁고 행복한 삶이라고 자주 말하니 덩달아 행복해진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는 속담을 믿고 포기 할 것은 포기하니 행복하다. 나이 들면서 노욕을 버리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다. 식사 한 끼에 오천 원짜리도 있지만 오십만 원짜리도 있다. 내 마음을 낮추니 오천 원짜리 밥도 감사하고 고맙고 행복하다. 소박한 행복은 느끼는 사람의 몫이다.
- 2017-06-12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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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사진
- 얼마 전 아들이 가족사진을 찍어 벽에 걸자고 했다. 그러고 보니 가족사진이 아들 초등학교 졸업 때 세 식구가 함께 찍은 사진과 유명 사진관에서 세 딸 가족이 친정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밖에 없었다. 액자 하나 끼우는 데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예쁜 손녀도 커가니 하나쯤 만들어 걸어도 좋을 것 같아 그러자고 했는데 아들의 속마음이 따로 있었던 걸 알게 되었다. 남편이 몸이 좀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 더 늦기 전에 가족과의 추억을 사진으로 남겨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으니 우리를 기억해주려는 아들의 마음이 기특하기도 했지만, 가슴이 서늘해지면서 슬픈 마음이 들기도 했다. 우리를 사진 속에서나 봐야 하는 날이 점점 다가오는 걸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래도 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컸다. 지금 거실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은 친정 식구들과 찍은 사진이다. 액자 속엔 그리운 아버지도 계시고 그 옆엔 젊은 시절의 엄마가 웃으며 앉아 있다. 필자의 아들이 10살쯤이니 필자의 나이가 30대, 엄마는 50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미소를 띠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참으로 젊고 싱그러워 보인다. 이제 80대 중반을 넘어선 친정엄마는 자꾸 다치고 아픈 곳이 많아졌다. 친정엄마의 환하고 젊은 모습을 보니 사진은 역시 건강하고 젊을 때 남겨놔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관에 촬영 예약을 했다는 말을 들은 뒤부터 걱정이 되었다. 벽에 걸어놓고 오며 가며 보게 될 텐데 마음에 들지 않게 나오면 어쩌나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뭘 입어야 할지, 화장은 어떻게 해야 할지, 자잘한 것들이 신경이 쓰였다. 아들은 생긴 대로 나올 테니 미리 걱정하지 말라고 너스레를 떨어 필자를 웃겨주었다. 그래도 거실 벽에 걸 건데 실물보다 잘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필자는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카메라를 준비한다. 친구들은 멋진 경치나 예쁜 사물을 찍는데 필자는 필자 모습이 들어가지 않은 사진은 흥미가 없어 꼭 필자를 넣고 찍어달라고 한다. 필자가 예뻐서가 아니고 사진을 보면 그날의 즐거웠던 감정을 고스란히 돌이켜볼 수 있어서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친구들은 언제부터인가 사진 찍는 걸 싫어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모아놓은 사진도 서서히 처분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들이 죽고 없을 때 자식들이 사진 처리에 부담을 가질 것 같아 미리 없앤다고도 한다. 사진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다. 필자는 10여 권의 앨범에 넣어둔 사진 말고도 커다란 상자 안에 정리하지 않은 사진이 가득하다. 시간 날 때 들여다보면 각 사진마다 특별한 기억들이 딸려 나오고 그때를 회상하며 행복에 잠기기도 하니 사진은 필자에게 기억의 보물창고임이 확실하다. 이제는 놀러 가거나 여행지에 가도 친구들에게 기념사진 찍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눈치 보며 찍어달라고 한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요즘은 사진이 예쁘게 나오질 않는다. 나이 먹은 건 생각하지 않고 왜 이렇게 못생겼냐며 한숨이니 참 철도 없다. 그 전에는 10장 찍으면 10장 모두 맘에 들었다. 그러다 점점 마음에 드는 사진이 줄어들었고 급기야 요즘에는 한두 장 건지기도 어렵다. 그래도 그 한두 장 때문에 필자는 아직도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사진은 잊고 싶지 않은, 즐거웠던 일들을 고스란히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예약한 날 우리 가족은 사진을 찍었다. 손주가 플래시 터지는 게 무섭다며 울어대서 애를 먹었지만 무사히 촬영을 마쳤고 한 달쯤 걸려 단란한 모습의 가족사진을 받았다. 이제까지 걸려 있었던 친정 식구와의 사진을 안방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새 액자를 걸었다. 오래도록 기억될 가족사진을 바라보니 마음이 따뜻해지고 미소가 절로 떠오른다.
- 2017-06-07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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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과 사별한 72세 싱글, 노후설계 위험 요소
- 남편과 사별한 지 8년째인 최영옥(72세, 여)씨는 최근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다. 대기업을 다니다가 3년 전에 명예퇴직을 하고 동료들과 함께 사업을 시작한 큰아들(48세) 때문이다. 부족한 경험과 자본 탓에 시작부터 불안해보였던 큰아들의 사업은 결국 1억원의 부채를 남기고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최영옥씨의 큰아들은 어머니에게 부채탕감에 대한 도움을 요청해왔다. 큰아들의 요청을 받은 후부터 최영옥씨는 거의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돈도 돈이지만 큰아들의 도움 요청이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유독 부모에 대한 의존성이 높은 큰아들 걱정과 함께 아들을 약하게 키웠다는 자책감이 최영옥씨를 더욱 힘들게 했다. 게다가 다른 자녀들의 눈치까지 은근히 신경 쓰이기 시작한 최영옥씨는 노후생활의 가장 큰 위험 요소가 자녀라는 말을 절감하며 재무상담을 의뢰해왔다. 최영옥씨 현재 상황 최영옥씨의 자녀들은 모두 독립해서 각자 가정을 꾸리고 있다. 큰아들은 큰며느리(43세, 회사원), 손자와 경기도 일산에 살고 있고, 작은아들(46세, 회사원)은 작은며느리(45세, 사회복지사), 두 손녀와 서울에 살고 있다. 막내인 딸(43세, 교사)은 사위(45세, 은행원), 손자 손녀와 서울에서 살고 있다. 최영옥씨의 현재 재산 현황은 [표1]과 같으며 월평균 수입은 국민연금의 유족연금 40만원과 임대료 200만원, 그리고 자녀들로부터 60만원을 받아서 합계 300만원이다. 그리고 월평균 지출금액은 생활비와 보험료 및 각종 공과금과 세금으로 250만원을 지출하고 월평균 50만원씩을 저축해두었다가 경조사 등 비정기적 지출에 사용하고 있다. 최영옥씨는 갈수록 돈 문제 같은 민감한 일들을 혼자 현명하게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최근에 큰아들 문제를 겪으면서 남은 생을 위한 준비를 스스로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다음의 고민거리가 해결되기를 원하고 있다. ① 큰아들의 부채 1억원 상환이 자녀에 대한 마지막 경제적 지원이기를 바란다. ② 노화된 건물관리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한다. ③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집을 옮겨 나들이에 대한 부담을 줄이고 싶다. ④ 노후생활비의 위험 요소인 의료비 지출에 대한 대비를 하고 싶다. ⑤ 안정적인 연금소득을 확보하고 싶다. ⑥ 본인 사후에 자녀들이 재산 문제로 다투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최영옥씨 재무진단 제안 건물매각 최영옥씨는 건물관리와 관련된 부담으로 벗어나서 안정적인 연금소득을 확보할 요량을 건물을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양도소득세를 차감하고 난 후 5억5000만원의 금액 중에서 각 자녀들에게 1억씩 해서 3억원을 증여하기로 했다. 성인자녀의 경우 1억원 이하면 증여세율이 10%이며 증여일로부터 3개월 내에 신고납부를 하면 세액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을 공제받을 수 있다. 증여세는 증여를 받는 자녀들이 각자 납부하기로 했다. 그리고 최영옥씨는 친구들이 많이 살고 있고 교통이 편리한 강남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기존의 아파트를 매각하고 건물매각대금 중 잔여금액 2억원을 보태어 시가 6억원의 아파트를 구입하기로 했다. 그리고 남은 5000만원은 이사와 관련된 비용으로 사용할 계획이다. 주택연금가입 최영옥씨는 부족한 연금소득을 확보하기 위하여 주택연금에 가입하기로 했다. 최영옥씨가 서울 강남지역으로 집을 옮겨 주택연금을 개시하기로 결정한 배경에는 생활의 편의성 고려와 함께 다른 경제적 이유도 있다. 최영옥씨가 주택연금을 수령하다가 사망하게 되면 사망 당시에 주택의 매도가격이 연금총액과 이자 등 비용을 상계하고도 남았을 때 자녀들이 그 잔액을 가져갈 수 있다. 반대의 경우가 되어 연금총액과 비용이 주택의 매도가격보다 더 높으면 자녀들이 주택상속을 포기하면 된다. 최영옥씨는 본인이 이사하게 될 지역의 아파트 가격이 상승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재 72세인 최영옥씨가 6억원의 아파트를 주택연금으로 활용하면 매월 200만원가량의 소득을 종신토록 수령할 수 있다. 매월 200만원의 금액은 기존의 건물임대소득과 수치는 같지만 질은 다르다. 최영옥씨는 더 이상 건물의 공실 문제나 건물보수 문제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리고 사업소득이 없어졌기 때문에 월 30만원 가까이 되던 국민건강보험료와 소득세 등을 더 이상 납부하지 않게 돼 실직소득은 더 늘었다. 그리고 직장에 다니는 자녀의 국민건강보험의 피부양자로 등록을 해도 된다. 의료비 지출 위험에 대한 대비 노후생활비의 대부분이 의료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나이가 들수록 의료비 지출이 늘어난다. 의료비는 노후생활의 안정을 위협하는 중대한 위험 요인 중 하나다. 위험관리 전문가들은 위험을 관리하기 위해 4가지의 위험관리 방법을 복합적으로 활용하는데 이를 의료비지출위험관리에도 적용할 수 있다. 최영옥씨의 위험이전 방법 최근에는 피보험자 연령기준으로 75세까지 가입할 수 있는 보험들이 민영보험사에서 출시되고 있다. 현재 별다른 병력이 없는 최영옥씨는 100세까지 암, 뇌출혈, 심근경색 및 골절 시 진단금이 보장되고 입원 시에는 약간의 입원비가 지급되는 보험을 가입함으로써 평소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을 보완했다. 최영옥씨가 매월 부담하는 보험료는 월 10만원(10년 단위 갱신)이다. 최영옥씨의 위험보유 방법 최영옥씨의 의료비 지출에 대비한 자가보험(위험보유)은 납입이 완료된 종신보험의 적립금이다. 평생토록 보장하는 종신보험의 특성상 종신보험의 적립금은 다른 보장성 보험에 비해 높은 편이다. 2000년대 중반에 최영옥씨가 가입한 종신보험은 유니버설 기능이 있어 보험을 해약하지 않고도 적립금을 인출할 수가 있다. 다만 적립금을 인출하면 인출한 금액만큼 사망보험금은 줄어든다. 대신 이자를 부담하지 않아도 된다. 최영옥씨의 위험축소 방법 최영옥씨는 평소 운동과 식단관리를 꾸준히 하면서 건강을 관리하고 있다. 최영옥씨의 위험회피 방법 고령화에 따른 의료비 지출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면서 연명의료에 대한 새로운 접근들이 논의되고 있다. 연명의료란 환자의 주된 병적 상태를 바꿀 수는 없지만 생명을 연장하는 치료 혹은 치료에 의해서 상태가 좋아지지 않는 환자의 상황이나, 치료에도 불구하고 영구적 무의식 상태나 집중적인 의학적 치료에 의존해야만 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비록 의학적으로 가망이 없다는 전문가의 판단이 있어도 자식이 먼저 나서서 부모의 연명의료를 중단하자고 요구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평소 의식이 있을 때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통해 밝혀둘 수 있다. 우리나라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 통과됨에 따라 2018년 2월부터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법적 효력을 갖게 되었다. 최영옥씨는 의료비 지출 위험을 회피하는 방법으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 2017-06-05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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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혈금장을 받으며
- 드디어 인생의 버킷리스트 하나이던 헌혈 50회를 하고 적십자사 총재로부터 금장을 받는 일을 이루었다. 한마디로 기쁘다. 무엇보다 필자를 건강하게 낳아주시고 별 탈 없이 길러주신 부모님이 제일 고맙고 부모님 생각이 간절했다. 필자는 선천적(?)으로 적혈구인 헤모글로빈이 적게 생성되어 헌혈 50회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피를 만드는 것은 신의 영역이다. 현대 의료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피는 인공적으로 만들지 못한다. 동물의 피를 사람의 몸에 대신 넣어다가는 큰일이 난다. 천년을 산다는 거북이나 학의 피도 사람에게는 소용없다. 오직 사람에게는 사람의 피만 필요하다.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피라하여 다 같은 피도 아니다. A형도 있고 B형도 있다. 사람의 피는 사람에 의해 사람만을 위해 사람의 몸에서만 만들어야 한다. 인체에서 피의 제조는 드라마틱한 종합 예술이고 피를 만드는 것은 인체 창조의 영역이다. 결과적으로 헌혈은 사람에 의해 사람 만을 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람 사랑이다. 피는 인체정보의 보고이며 건강의 상징이다. 혈액형은 유전이 되므로 부모 자식을 알아본다. 피 속에는 50여 가지가 넘는 건강정보가 들어있다. 당뇨, 고지혈증은 물론 간 기능 상태나 각종 암의 생성 여부도 알아낸다. 건강을 평가하는데 깨끗하고 영양소 있는 건강한 피가 온몸을 구석구석까지 잘 순환하면 건강한 사람이다. 피가 몸을 돌지 않으면 살이 썩는다. 피는 혈관을 통해서만 이동해야 한다. 혈관이 터지면 죽거나 병신이 된다. 장수의 바탕은 건강한 피와 혈관이다. 헌혈하기 위해 헌혈의 집에 가면 헌혈자의 건강상태( 체중, 혈압은 물론 헌혈 주기를 적정하게 지키고 있는가? 위험지역(외국과 국내지역 모두 포함)을 방문(숙박)을 하였는가? 를 확인한다. 수 십 개 항목의 문진을 통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의 헌혈은 받아주지 않는다. 건강한 피 인지 전혈비중을 체크하는데 그 수치가 기준치인 1.052에 미달하면 또 불합격이다. 필자는 이 기준치에 미달되어 불합격을 많이 받았고 헌혈하러가서 못하고 돌아올 때의 그 씁쓸함은 송충이 씹은 맛이었다. 불합격된 날은 혈액속의 철분을 보충한다고 시장 통에 가서 동물의 피인 선지를 듬뿍 넣은 선지 순댓국이나 순대를 사먹기도 했다. 병원에 가서 빈혈 원인을 분석한다고 종합 진찰도 받고 철분제도 사먹어 봤지만 효과는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체질문제로 생각한다. 다만 지나친 운동이 빈혈을 불러온다고 믿고 있다. 필자가 헌혈하는데 부적합한 몸이기 때문에 헌혈 금장을 받으려고 더 안달을 하였다. 남들처럼 쉽게 쑥쑥 피를 뽑아서 헌혈이 가능했다면 결코 헌혈을 버킷리스트에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헌혈하기 적당한 몸을 만들기 위해 운동(지나치면 헤모글로빈이 감소한다.)과 균형 잡힌 식사를 하여 건강한 혈액을 만들기 위해 늘 신경써왔다. 먹은 것이 피를 만든다. 남들에게 건강하고 신선한 피를 제공하기위해 좋은 것을 먹으려고 노력했다. 헌혈 금장을 받고 집에 와서 부모님 산소 쪽으로 큰절을 했다. 그리고 우리가족 단체 카톡방에 기쁜 소식을 알렸다. 건강하게 낳아주시고 길러주셔서 부모님께 고맙다는 말을 의식적으로 함께 올렸다. 자식들이 내 본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옛 성인의 말에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불감훼상이 효지시야라》했다. 머리카락 하나라도 자신의 몸이지만 부모로부터 받았으므로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스스로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 효도의 근본이다. 카톡을 보고 눈치 빠른 자식들의 반응이 온다. 손자, 손녀들이 할아버지가 대단하다고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 사진 모습을 보내왔다, 아이들도 아버지처럼 건강관리를 잘 하고 싶다는 부러움을 카톡에 올리면 영웅이 된 듯 어깨가 으쓱해진다. 세상을 살아보면 남을 도울 일도 너무 많고 어른으로서 모범을 보일 것도 많은데 그중 하나가 헌혈이다. 헌혈 금장을 받는 아비의 모습을 자식들이 본받길 희망한다.
- 2017-05-19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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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피티 아트(graffiti art )
- TV뉴스를 보던 중 그래피티(graffiti)에 관한 기사가 나왔다. 어떤 호주인이 우리 지하철에 들어가 전동차에 낙서를 하고는 사라졌다는 소식이다. 그래피티는 건물 벽이나 교각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려서 그리는 그림과 낙서를 말한다. 우리 동네 산책길의 다리 밑 한쪽 벽면에도 알록달록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필자는 몰랐는데 손녀와의 산책길에서 아기가 그 벽면의 그림을 보더니 “할머니 원더 볼즈에요!” 라고 해서 그 그림이 어린이용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이라는 걸 알았다. 그림이 있기 전보다 화사해진 다리 밑은 보기에 좋아서 이런 벽화라면 많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들의 미대 시절, 같은 과 친구들과 함께 회사 담장에 그림을 그려주는 아르바이트를 했다며 보여준 사진이 그래피티의 한 종류였을 것이다. 필자 눈에도 수준 높아 보이고 멋져서 그래피티를 예술의 한 장르라 생각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래피티는 함부로 하면 안 되는 일이라고 한다. 밋밋한 담장에 예쁜 그림을 그리면 보기에도 좋을 것 같은데 아무 곳에나 그려놓으면 일종의 범죄라는 말이다. 그래피티를 하는 사람들은 번개처럼 스프레이로 그림이나 메시지를 쓰고는 재빨리 도망을 간다고 한다. 담장이나 평범한 벽면이 아닌 공공장소인 지하철이나 기차역 건물 벽에 낙서해 놓으니 범죄율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과거 뉴욕 지하철은 탈 게 못됐다고 한다. 강력 범죄가 발생하는 대표적인 우범지대로 역무원들이 부스 밖으로 나갈 엄두를 못 낼 정도였다는데 1980년대 뉴욕시 교통국장이 지하철을 가득 채운 낙서에 주목하고 계속 청소를 했더니 지하철 범죄가 75%나 줄었다고 한다. 아마 낙서가 그렇게 아름답거나 깨끗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피티는 60년대 뉴욕 빈민가에서 시작해 세계로 퍼져나갔고 갱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표시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는데 그 후로 차츰 사회, 정치적 비판메시지를 담기 시작했다. 낙서 예술가도 생겼다. 스물여덟 살에 타계한 뉴욕 바스키야의 작품은 경매에서 164억 원이나 호가했다니 그냥 낙서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피티는 원래 그리는 장면을 들키면 안 되는 작업이어서 그 세계에서는 무엇을 그리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어디에 낙서를 하는지도 중요하고 접근하기 힘든 곳일수록 가치를 높게 쳐준다고 하니 재미있다. 낙서꾼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은 지하철이라는데 한밤중에 몰래 숨어 들어가 객차 전체를 통째 낙서로 채운다는 영화도 나왔단다. 외국에서만 일어나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서울에서도 그래피티로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습격 받은 지하철이 17군데나 되었고 전담 수사관까지 생겼다고 하니 좀 걱정이다. 언젠가는 지하철역 세 군데에 그래피티 습격이 있었는데 이들은 힙합 모자와 후드 티셔츠 차림의 백인 4인조였다고 한다. 쇠톱과 절단기로 환풍구를 잘라내고 차고지에 들어가 낙서를 하고는 경찰이 손쓰기도 전에 유유히 호주로 돌아갔다는데 아마 우리나라 지하철이 깨끗하다는 소문이 나서 원정낙서까지 왔을 거라는 분석이 나왔다니 좋아해야 할 일인지 어떨지 모르겠다. 어떤 낙서를 하고 갔는지는 보도되지 않았으나 전담 수사관까지 동원되었다면 좋은 내용은 아니었나 보다. 그런데 그래피티가 우리 눈에 멋지고 예쁘게 보인다면 굳이 막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다. 낙서한 내용이 반사회적이거나 공포를 조장한다면 당연히 막아야 하겠지만 우리 동네 산책길의 벽화처럼 즐겁게 바라볼 수 있다면 괜찮을 것 같다. 언젠가 지하철을 타려고 기다리던 중 들어오는 객차에 예쁜 그림이 그려있어 보기에 즐거웠던 생각이 난다. 그렇게 그래피티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나 아름다운 그림으로 승화시킨다면 범죄라 하지 않고 예술의 한 장르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동네 곳곳에 나쁜 그래피티가 아닌, 보면서 즐길 수 있는 벽 그림이 많아지면 좋겠다.
- 2017-05-1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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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생소한 사진이란 길
- 글ㆍ사진 함철훈 사진가 요즘 나는 나의 뿌리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나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급속히 변하는 주위 환경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다. 최근에 사랑하는 가족의 어른을 잃었고, 같이 일하던 동료 교수의 급작스런 부고도 있었다. 그런 중에도 새로 태어난 손녀와의 해후도 있었다. 또한 국가의 근원인 헌법에 대해 생각하도록 나라가 요동쳤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 그리고 국가와 지도자를 되짚어보다가 내 생업인 사진의 근간과 핵심에 대해 따져보고 있다. 나에게 사진은 ‘예측할 수 없음’ 이다. 학교와 군 복무를 마치고 생활전선에서 10년여를 달리듯 일하다 처음으로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지나온 길도 보이고 이곳에 닿기 위해 가파른 비탈을 오르는 주위 사람들도 보인다.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나와 내 가족의 앞날도 계산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때 난 노후를 계산해보았다. 보통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이민자들이 동경하는 그런 상태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안정된 우리 가족의 앞날이 그려졌다. 쾌적하고 아름다운 해변이 먼저 떠올랐다. 잔잔한 파도와 미풍에 손자들과 함께 조개를 줍는, 겉보기에 평화스런 그림이 머리에 그려졌다. 그런데 난 정말 당황했다. 그건 미리 본 절망이었고, 순간 전율이 일었다. 끝이 보인다는 게 어떤 것이지 알았다. 내일이 예측된다는 것에 대해 알게 되었다. 비록 행복하고 아름다운 미래라 해도 난 거기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멋진 내일보다는 앞이 가려져 보이지 않는 가능성의 가치를 그때 알았다. 그렇게 난 보장된 길보다는 보이지 않는 길을 택했다. 노란색 숲 속으로 향하는 두 갈래의 길 아쉽게도 내가 갈 수 있는 길은 하나 (중략) 아, 저 길은 나중에 걸어보리라 인생이라는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져 되돌아올 수 없음을 알면서도 먼 훗날 저 길 어딘가에서 아쉬워하며 말할지도 모른다. 그 숲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고 그리고 나의 인생은 달라졌다고. 사진은 내게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었다. 그렇게 난 가보지 못한 ‘사진’이라는 생소한 길목에 들어섰다. 지금도 사진은 나와 내 주위에 새로운 환경을 선사하고 있다. 여전히 나는 내년, 후년, 내후년뿐 아니라 내일도 예측 못하며 살고 있다. 사진으로 내 생업에 대입시켜도 사진기에 곧 담길 내 작품을 난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왜 그럴까? 기계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도 많다. ‘사진이 예술인가?’로부터 시작해 끊임없이 말들은 만들어지고 있다. 누구나 마음만 있으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예술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진이 무엇이냐고 전문가에게 많이 물어본다. 나도 사진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아왔고 지금도 받고 있다. 그렇게 받은 질문 중에 의미 있는 한 질문의 예이다. 당시 동국대학교 사회학과를 맡았던 조은 교수가 한 책에 정리한 글이다. “…나는 미국 캘리포니아 UC 어바인 캠퍼스에 교환교수로 가 있었다. 그때 어바인에서 활동 중인 사진작가 함철훈을 만나게 되었고 사진을 어떻게 정의하냐는 먹물 냄새나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사진이란 카메라가 찍은 것'이라는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그런 단순 명쾌한 답이 아니었다면 사진을 배울 생각을 안 했을지 모른다. 그때부터 나는 ‘카메라의 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후 이 핑계 저 핑계로 그의 집에 머물면서 사진에 대해 얻어듣고 문하생들에게 사진을 가르치는 것을 훔쳐보았다…. ‘인간’이 보는 빛의 속도가 다가 아니라는 것. ‘인간의 눈’이 담을 수 있는 빛의 양이 다가 아니라는 아주 작은 진실에서 시작된 ‘카메라의 눈’에 대한 통찰은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꿔놓는다. 그의 사진 미학은 그래서 아주 단순하고 맑고 깊다.” 사진은 사진기로 담아내는 예술이다. 사진에 어떤 변수 X도 간섭할 수 없는 근본의 길이 사진기에 있다. 그런데 정작 사진에 대한 넘치는 지식이 쉽고 명료한 그 길을 가린다. 정작 사진의 힘은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어둠에서 발휘된다. 사진을 알려면 그곳으로 가봐야 한다. 아무것도 없는 거기서 사진을 경험해보길 권한다. 사실 사진기라고 불리는 카메라의 어원은 ‘비어 있는 방’이다. 사진은 빛마저 차단된 빈 곳에서 시작된다. 아무것도 없는 빈 방 중 한 면의 극히 일부를 깰 때–작은 핀으로 벽을 구멍 내는 순간, 그곳으로 빛이 시간과 함께 쏟아진다. 그리곤 이내 반대편 벽에 좌우상하가 서로 바뀐 상을 맺는다. 사진 영상이며 완벽한 이미지다. 감히 거기에 토를 달지 못한다. 빛 스스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 놀랍고 섬세한 빛의 기적을 자세히 지켜보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 사진가의 몫이다. 그렇게 작가에게는 정작 아무 일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사진 작업이 내 삶을 풍성하게 해줬으며, 거기서 얻게 된 도전과 경험은 더 좋은 영상과 기획을 만들어내는 변증법적 선순환으로 발전해왔다. 그렇게 방금 내 카메라에 담긴 몽골의 풍광이다. >>함철훈(咸喆勳)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대상 수상. 저서로 , 등이 있다.
- 2017-05-1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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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로 배우는 노년의 지혜 2
- 할머니가 주재하신 식사 모임 감독; 조지 틸만 주니어 주연; 바네사 윌리엄스, 이르마 피 홀 제작연도; 1997년 상영시간; 115분 흑인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아줄 수 있는 영화로 가 빠질 수 없다. 할머니가 구심점이 된 삼대에 걸친 대가족 이야기. 여성의 희생과 헌신이 가정의 평안을 유지시킨다는 할머니의 교훈은 진부할지 모르지만 할머니의 딸들은 직업과 사랑, 자아실현을 위해 고분군투하고 손자에 의해 가정의 전통이 이어진다는 내용이다. 여성이 맡아왔던 화해, 안정의 역할을 손녀가 아닌 손자에게 맡겼음을 신선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성장해가는 아이들 모습을 담은 사진이 죽 나열된 후 소년 아마드(브랜드 하몬드)의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할머니 조(이르마 P. 홀)는 미시시피에서 시카고로 이주해온 후 도박사였던 할아버지가 전 재산을 날리자 홀로 집안을 일으켜 세워 온 가족의 존경을 받고 있다. 할머니가 40년째 주재해온 일요일 저녁식사 모임은 세 딸과 그들의 남편, 아이들이 모두 참석해야 하는 가문의 전통이다. 할머니는 여자가 참고 개척해나가면 집안은 잘 유지되며 인스턴트 대신 손수 만든 음식이 인간의 영혼을 살찌운다고 설교한다. 장녀 테리(바네사 윌리암스)는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변호사이며 남편 마일즈(마이클 비치) 역시 변호사여서 이들 가정은 경제적으로 가장 윤택하다. 테리는 성취욕과 자기주장이 강하며 변호사 일에 만족하고 있는 데 반해, 마일즈는 변호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취미로 즐겨온 음악가로 전업하고 싶어 한다. 아기가 없는 이들 가정은 이래저래 충돌이 잦다. 차녀 맥신(비비카 A. 폭스)은 전업주부로 이해심 많고 자상하며 노동자 계층인 남편 케니(제프리 D. 샘스)도 더할 나위 없이 성실한 가장이다. 맥신 부부는 아마드 외에 딸 하나를 더 두었고, 맥신이 또 임신한 상태. 이들 부부의 문제라면 케니가 테리의 연인이었다는 사실, 자신의 결혼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테리는 맥신에게 시비를 걸어 가끔 다툰다. 미용사인 막내 딸 버드(니아 롱)는 램(메키 파이퍼)과 사랑에 빠져 임신부터 했는데, 램이 전과자여서 변변한 직장을 얻지 못해 속상해하고 있다. 버드는 옛 애인에게 도움을 청해 램을 취직시키는데,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램이 자존심을 건드렸다며 행패를 부린다. 램의 꼬락서니를 보다 못한 장녀 테리는 깡패 삼촌에게 램을 두들겨 패달라고 부탁하고, 램은 총으로 맞서다 다시 감옥으로 끌려간다. 이 때문에 테리와 버드는 으르렁거리게 된다. 할머니의 가치관은 시대 상황 등을 고려해볼 때 당연한 것이고, 음식을 통한 영혼 고양에 대한 설교는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향수를 자극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겐 세 딸의 성격이나 가치관이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감독은 차녀 맥신, 그리고 그녀의 아들 아마드로 이어지는 할머니의 가치관 잇기를 기둥 줄거리로 삼고 있어서, 일견 시대착오적이며 안일한 선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맥신의 생각이나 행동은 여성만의 인내 운운하는 선이라기보다 보편적 선, 중용 정신, 전통 존중 등이므로 편협하게 볼 것이 아니다. 각박한 현대사회, 가족 이기주의, 흑인 사회의 모순을 염두에 둔 인물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가장 끌리는 여성상은 장녀 테리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묘사는 성취욕 강한 여성에 대한 묘사가 우리나라나 서양이나 지나치게 이기적으로 그려지는 습성이 있어, 여성의 성취욕에 대한 몰이해와 한계를 드러냈다. 원만하고 너그러운 성격과 일에 대한 열정을 동시에 지닌 여성들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도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이런 여성들에 대해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 작가의 인물 분석이나 구현력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테리는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환 등 집안 대소사에 들어가는 돈 문제에 댛새서는 테리에게 의존하는 가족들이 테리의 이 같은 처리 방식에 불만을 품는 것은 적반하장이다. 테리에게 금전적 도움을 받는 이들이 “돈이면 다냐”라는 식으로 대드는 것은 경제력 없는 사람들의 비틀린 심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늘 머리를 써야 하고 시간에 쫓기는 테리는 맥신처럼 집안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과 노동력을 제공할 수 없다. 대신 자신의 노력으로 번 돈을 내놓는 것이다. 돈에 관한 인간의 이중적 태도는 테리의 남편과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테리의 남편은 성공과 돈을 위해 뛰는 테리를 인간미 없는 아내로 본다. 그리고 음악에 대한 열망을 잘 이해해주는 테리의 사촌 훼이스(지나 라베라)와 관계를 맺는다. 이모할머니의 딸인 훼이스는 성인 비디오 배우로 집안의 골칫덩어리인데, 갑자기 나타나 온 가족을 불안하게 한다. 음악이 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반대를 하는 테리의 현실적인 태도와 즉흥적으로 아무 일이나 저지르는 훼이스의 유혹.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가. 어느 가정에서나 있을 수 있는 문제와 인간관계, 그리고 흑인 문제까지 얹어 아기자기하게 묘사하는 는 마지막까지 돈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10년째 방구석에 들어앉아 TV만 보던 할머니의 남동생 피트로 인해 찾게 된 돈이 이 가정의 분열을 잠재우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영혼을 살찌울 음식도 돈이 있어 가능한 것 아닌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현실이다. 영화 제목 는 ‘영혼의 음식’이라는 직역보다는 미국 남부지방의 아프로 아메리칸의 전통 음식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겠다. 1960년대 중반부터 ‘soul’은 아프로 아메리칸 문화를 수식하는 단어로 쓰였는데, ‘soul music’이 대표적이다. 에는 보이즈 투 맨의 ‘A Song for Mama’를 비롯해 ‘소울’ 가득 담긴 노래들, 재료의 풍미를 살린 푸짐한 흑인 가정 음식 등 들을 거리 볼거리가 풍성하다.
- 2017-05-11 1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