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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식이 만난 귀촌 사람들] 충남 금산군 제원면 시골에 사는 김미경·강희 부부
- 삶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면? 아마도 누구나 현재의 삶과 다른 쪽으로 ‘나’를 데려갈 것이다. 금쪽같은 여생을 진정 자신이 원했던 방식으로 누리고자 할 것이다. 절박하면 길을 바꾸게 마련이다. 중년 이후의 귀촌은 머잖아 닥쳐올 노년, 그 쓸쓸한 종착에 대한 대책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절박한 기색을 머금는다. 노후의 안정과 평안을 성취하려는 의도엔 ‘거사’라고 할 만한 결연한 포부가 서려 있기 십상이다. 김미경(54)씨는 수려한 강변에 산다. 금강의 초록 물살이 살갑게 여울지는 시골에 둥지를 틀었다. 동갑내기 남편 강희씨와 함께 살아간다. 귀촌 이전엔 죽 서울에서 살았다. 남편은 가구를 손수 만들어 파는 사업으로 가장 역할을 했으며, 김씨 역시 직장인으로 서울이라는 각축장을 열심히 누볐다. 이채로운 건 부부 공히 연극판에서 활약한 이력. 남편은 무대조명이나 무대감독으로, 김씨는 배우로 활동했단다. 젊었던 날의 근 15년쯤을 극단에서 뛰었다지. 짧지 않은 세월이다. 하지만 이 부부에겐 이미 강 너머로 고스란히 사라진 과거사일 뿐이다. “다 잊었어요!” 연극인으로 살았던 옛일을, 그녀는 그저 그렇게 덤덤하게 돌이킬 따름이다. 연극에 빠졌던 나날들의 열성과 꿈이라는 게 이젠 무의미한 한 줌 기억으로 잔존한다는 투로. 현재의 삶 속으로 온전히 파고드는 게 현명하다는 투로. 김미경씨 부부는 10년 전에 이곳으로 귀촌했다. 서울에 더 이상 애착도 미련도 없어서였다. 이게 단순한 이유처럼 들리지만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으리라. 서울에서 겪은 파란과 애환에 지친 나머지 전원생활의 목가적 풍미를 선망했을 수도 있다. 서울에서 품었던 인생의 목표를 시급히 수정해야 할 필요에 직면했을 수도 있겠지. 아무려나 절이 싫어 떠나는 중처럼, 이점도 매력도 많은 서울과 선선히 결별하는 일엔 특유의 절박한 고심이 선행되었을 게다. 그녀의 얘기를 들어볼까. “서울생활에 의욕과 재미를 잃었어요. 수많은 차량과 인파, 경쟁과 긴장과 스트레스로 점철되는 게 서울이잖아요. 복잡하고 답답한 대도시에서 저희 부부가 원하는 좋은 삶을 추구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죠. 서울의 혼탁한 공기도 너무 싫었어요. 서울에서 인생을 탕진하고 싶진 않았어요. 차츰 노년기에 접어들 텐데, 원하지 않는 공간에서 노후를 맞이할 수는 없단 생각을 했지요. 노후엔 시골의 자연 속에서 편하게 살자! 그런 결심이 섰던 거예요. 이왕이면 한 살이라도 더 젊은 나이에 귀촌을 해 시골생활을 익히는 게 가장 충실한 노후 준비라는 생각을 했던 거죠.” 노후 준비라는 것. 과거엔 없었던 숙제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시절엔 모두들 그냥 살았다. 열심히 살다가 일찍 조용히 죽으면 그만이었다. 부양할 자녀들도 많았다. 그러나 100세 시대엔 다르다. 60세쯤의 은퇴 이후 긴긴 세월을 자력으로 살아갈 갖가지 채비를 미리 해두려고 모두들 용을 쓴다. 무엇보다 노후자금 마련에 관한 강박감으로 현재를 만족스럽게 즐길 소비와 기회마저 가급적 보류한다. 자금으로만 안전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는 없다. 자기 계발, 인간관계, 여가, 소일거리, 건강 등도 노후의 안락을 위해 미리 북돋워야 할 종목들이니까. 이 모든 과제들의 완수가 귀촌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김씨 내외 말이다. 이제 귀촌 10년. 그들의 귀촌은 어느 고지에 올라섰을까. 한동안 곤궁에 시달려 “서울을 벗어난 건 좋은 선택이었어요. 여러 면에서 만족할 만한 경험을 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일례를 들자면, 제가 서울에선 피부질환에 늘 시달렸어요. 아무리 약을 써도 낫지를 않았죠. 과중한 스트레스가 가져온 질환이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시골에 살며 피부가 깨끗하게 회복됐어요. 잔병치레도 사라졌고요. 귀촌을 통해 지독한 스트레스를 크게 줄여나갈 수 있었던 거죠.” “대체로 도시의 아내들은 귀촌에 거부감을 느끼죠. 불편 요소들이 많다고 보기 때문에. 남편의 강권에 이끌려 귀촌했다가 끝내 적응을 못하고 홀로 도시로 돌아가는 사례도 있어요.” “우선은 시골과 취향이 맞아야겠죠. 저는 그게 맞았어요. 원래 제가 도시적 풍물보다 산골의 자연 풍경에 마음이 더 편해지는 성향입니다. 서울에 살면서도 화초를 많이 길렀어요. 이사할 땐 한 트럭 분량의 화분들을 싣고 내려올 정도였죠.” “자연만 바라보고 살 수만은 없는 게 인생이죠. 경제활동은 순탄했나요?” “전혀 순조롭지 않았어요(웃음). 사람과의 관계도 자연과의 관계도 도시보다 한결 만족스러운 쪽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게 시골이라는 건 분명해요. 심지어 나만의 지상 천국을 누릴 수도 있다고 봐요. 하지만 경제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란 도시나 마찬가지로 시골에서도 만만치 않다는 걸 실감했어요. 아아, 초기 3년 정도는 정말 힘들었어요. 저희는 고작 시골집 한 채를 지을 정도의 자금만 지니고 귀촌했는데, 3년여가 지나고 나자 자금이 바닥나더라고요. 진땀을 흘려야 했어요.” 가령 고매한 정신세계조차 최소한의 물적 토대가 갖춰지고서야 지속 가능하다. 지겹고 힘겹지만 면제받을 길이 없는 게 돈벌이다. 세상은 우습게 돌아가지만 결코 우습게 여길 수 없는 게 또한 그것이다. 부(富)를 경멸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는 이미 가진 자이기 십상이다. 김씨는 마치 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난 듯이 한동안 난처한 곤궁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어쩌면 귀촌을 낭만적으로 가늠한 탓에 빚어진 사단일지도 모를 일.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부부가 열심히 일을 찾아 덤볐어요. 남편은 이 지역의 한 대안학교에서 목공 강사로 일했어요. 하지만 박봉에다 적성이 맞질 않아 그만두고 읍내에 목공 공방을 차렸어요. 저 역시 읍내에 나가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죠. 어휴, 눈물 나던걸요. 이러자고 내가 귀촌을 했나? 서울로 다시 돌아갈까? 슬픔과 회의가 마구 몰려들더라고요.”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을 해도 역경이 쉬 물러나지 않도록 각본을 짜둔 이는 누구일까. 그런데 말이죠, 시골에선 소득이 너끈하지 않더라도, 소박한 방식으로 원만히 살아갈 여지가 있진 않나요?” “그런 얘기, 귀촌 이전에 많이 들었어요. 시골에 내려가 살면 생활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그게 귀촌의 장점 가운데 하나라고. 그러나 살면서 겪어보니 현실은 달랐어요.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더라고요.” “저런! 제가 만났던 귀촌자들은 흔히 생활비 절감 효과를 귀촌의 최대 이점으로 꼽았어요. 특별한 경우이겠지만, 월 지출 50만원으로 무탈하게 사노라는 부부도 만났어요. 그들은 소비 욕망의 관성에서 벗어난 검박한 생활이 더 만족스러운 삶일 수도 있다는 걸, 사람이 물질의 노예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놀라워요. 저희는 힘들었어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읍내나 인근 대전을 드나들어야 하는데요, 남편 차와 제 차, 두 대의 차량이 필요했어요. 군내버스는 하루에 두 차례 운행할 뿐이라서 이용하기 어려웠죠. 대중교통망이 발달한 서울에선 교통비 부담을 느끼지 않고 살아도 되지만 시골은 달라요. 차량 유지비 비중이 너무도 커요. 아무튼, 귀촌 3년째가 숨 가쁜 고비였습니다. 경제상의 한계로.” “귀촌 3년쯤을 경과하면 보통 풍월을 읊을 시점이죠. 비로소 시골생활 물정에 익어 정착이 가능해지는 시기라는 거죠. 3년까지는 버거운 수련기간이라는 얘기이기도 할 테고.” “귀촌을 만만하게 여겼구나,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충분치 못했구나, 반성이랄까 깨우침이랄까 그런 게 몰려들었어요. 3년이나 지나고서야 말이죠. 뭔가 확실한 다른 방식을 찾아야만 했어요. 읍내에 나가 허드렛일이나 하는 식으로는 미래가 보이질 않는다는 것, 우리만의 집중된 일을 찾자는 것, 남편과 숙의 끝에 내린 결론이 그랬어요.” 낡은 지도 버리고 새 지도에서 찾은 좌표 귀촌 3년 어간에 맞닥뜨린 ‘깔딱 고개’. 목표는 좋았으나 방법을 잘 몰랐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셈이다. 화급히 해결하고 조속히 극복해야 할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상황. 사람의 저력이나 진면목은 대체로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드러난다. 김미경씨 부부는 낡은 지도를 버리고 새 지도에서 좌표를 찾았다. 부부는 이제 농사를 통해 갑갑한 터널을 벗어나기로 작심했다. 와송(瓦松) 재배에 돌입했던 것. 이는 썩 적절한 선택이었다. 시골생활에 비로소 탄력을 붙일 힘으로 작용했다. “와송에 함유된 약성이 알려지면서 재배 바람이 막 불기 시작하던 즈음이었어요. 승산이 있다 봤지요. 농토를 빌려 비닐하우스를 조성하고 재배에 나섰어요. 제가 농부의 딸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난감하게도 농사엔 완전 초심자였지만 금산군농업기술센터나 이웃 농가들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기술을 배웠어요. 결과는 좋았습니다. 재배 첫해부터 쏠쏠한 수익을 올렸으니까.” “농사는 작목 선정이 관건이라 하죠. 그러나 어떤 작물이 유망하다 싶으면 모두들 덤벼드는 통에 몇 해 안 가 과잉생산, 가격하락이라는 악조건에 봉착해요.” “와송 농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괜찮다 싶어 농장 규모를 1600평까지 늘렸으나 해가 갈수록 수익구조가 악화됐어요. 그걸 타개하기 위해 생초나 건초 판매보다 가공에 주력, 와송 발효액을 만들어 팔았어요. 농장 규모도 400평으로 줄이고 고품질 소량 생산으로 채산성을 도모했어요. 음, 아무튼 와송 농사를 계기로 생활상의 맥락을 잡아나갈 수 있었습니다. 일의 영역과 활동 반경을 넓혀나가기 시작했죠. 자신감이 붙고 재미있고 즐겁고, 비로소 저의 성향에 맞는, 본성에 부합하는 활달한 차원으로 삶이 전환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면서 말이죠.” “얼어붙었던 강물이 훈풍에 다시 녹아 쾌활하게 흐르듯이? 일테면 그런 거예요?” “일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세상 속으로 활기차게 뛰어들어 산다는 실감으로 즐겁습니다. 귀농인들과 연합해서 갖가지 활동을 펼치고, 프리마켓을 기획해 판매를 위한 공연 연출도 하고, 유쾌한 팜 파티도 즐기고, 이젠 할 일도 너무 많고, 오라는 곳도 가야 할 곳도 많아졌어요. 남편이 하는 말은 이래요. 아니, 당신이 그토록 활동적인 여자였어? 거참, 물 만난 고기 같네!(웃음)” 우왕좌왕, 전전긍긍의 시간을 거쳐 이젠 안도할 만한 궤도에 올라섰다. 즐길 만한 삶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불 지필 희망을 가지고 산다는 건 일종의 경사! 그녀는 기껍다. 순순한 성정 그 반대 기슭에 깃들인 자신의 활달한 외향성을 밖으로 끄집어내 삶의 동력으로 삼게 됐다는 사실에. 그것으로 귀촌의 나날들에 긍정과 낙관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제야 여전히 궁하지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 2017-11-13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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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식이 만난 귀촌 사람들] 충남 금산군 제원면 시골에 사는 김미경·강희 부부
- 삶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면? 아마도 누구나 현재의 삶과 다른 쪽으로 ‘나’를 데려갈 것이다. 금쪽같은 여생을 진정 자신이 원했던 방식으로 누리고자 할 것이다. 절박하면 길을 바꾸게 마련이다. 중년 이후의 귀촌은 머잖아 닥쳐올 노년, 그 쓸쓸한 종착에 대한 대책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절박한 기색을 머금는다. 노후의 안정과 평안을 성취하려는 의도엔 ‘거사’라고 할 만한 결연한 포부가 서려 있기 십상이다. 김미경(54)씨는 수려한 강변에 산다. 금강의 초록 물살이 살갑게 여울지는 시골에 둥지를 틀었다. 동갑내기 남편 강희씨와 함께 살아간다. 귀촌 이전엔 죽 서울에서 살았다. 남편은 가구를 손수 만들어 파는 사업으로 가장 역할을 했으며, 김씨 역시 직장인으로 서울이라는 각축장을 열심히 누볐다. 이채로운 건 부부 공히 연극판에서 활약한 이력. 남편은 무대조명이나 무대감독으로, 김씨는 배우로 활동했단다. 젊었던 날의 근 15년쯤을 극단에서 뛰었다지. 짧지 않은 세월이다. 하지만 이 부부에겐 이미 강 너머로 고스란히 사라진 과거사일 뿐이다. “다 잊었어요!” 연극인으로 살았던 옛일을, 그녀는 그저 그렇게 덤덤하게 돌이킬 따름이다. 연극에 빠졌던 나날들의 열성과 꿈이라는 게 이젠 무의미한 한 줌 기억으로 잔존한다는 투로. 현재의 삶 속으로 온전히 파고드는 게 현명하다는 투로. 김미경씨 부부는 10년 전에 이곳으로 귀촌했다. 서울에 더 이상 애착도 미련도 없어서였다. 이게 단순한 이유처럼 들리지만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으리라. 서울에서 겪은 파란과 애환에 지친 나머지 전원생활의 목가적 풍미를 선망했을 수도 있다. 서울에서 품었던 인생의 목표를 시급히 수정해야 할 필요에 직면했을 수도 있겠지. 아무려나 절이 싫어 떠나는 중처럼, 이점도 매력도 많은 서울과 선선히 결별하는 일엔 특유의 절박한 고심이 선행되었을 게다. 그녀의 얘기를 들어볼까. “서울생활에 의욕과 재미를 잃었어요. 수많은 차량과 인파, 경쟁과 긴장과 스트레스로 점철되는 게 서울이잖아요. 복잡하고 답답한 대도시에서 저희 부부가 원하는 좋은 삶을 추구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죠. 서울의 혼탁한 공기도 너무 싫었어요. 서울에서 인생을 탕진하고 싶진 않았어요. 차츰 노년기에 접어들 텐데, 원하지 않는 공간에서 노후를 맞이할 수는 없단 생각을 했지요. 노후엔 시골의 자연 속에서 편하게 살자! 그런 결심이 섰던 거예요. 이왕이면 한 살이라도 더 젊은 나이에 귀촌을 해 시골생활을 익히는 게 가장 충실한 노후 준비라는 생각을 했던 거죠.” 노후 준비라는 것. 과거엔 없었던 숙제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시절엔 모두들 그냥 살았다. 열심히 살다가 일찍 조용히 죽으면 그만이었다. 부양할 자녀들도 많았다. 그러나 100세 시대엔 다르다. 60세쯤의 은퇴 이후 긴긴 세월을 자력으로 살아갈 갖가지 채비를 미리 해두려고 모두들 용을 쓴다. 무엇보다 노후자금 마련에 관한 강박감으로 현재를 만족스럽게 즐길 소비와 기회마저 가급적 보류한다. 자금으로만 안전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는 없다. 자기 계발, 인간관계, 여가, 소일거리, 건강 등도 노후의 안락을 위해 미리 북돋워야 할 종목들이니까. 이 모든 과제들의 완수가 귀촌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김씨 내외 말이다. 이제 귀촌 10년. 그들의 귀촌은 어느 고지에 올라섰을까. 한동안 곤궁에 시달려 “서울을 벗어난 건 좋은 선택이었어요. 여러 면에서 만족할 만한 경험을 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일례를 들자면, 제가 서울에선 피부질환에 늘 시달렸어요. 아무리 약을 써도 낫지를 않았죠. 과중한 스트레스가 가져온 질환이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시골에 살며 피부가 깨끗하게 회복됐어요. 잔병치레도 사라졌고요. 귀촌을 통해 지독한 스트레스를 크게 줄여나갈 수 있었던 거죠.” “대체로 도시의 아내들은 귀촌에 거부감을 느끼죠. 불편 요소들이 많다고 보기 때문에. 남편의 강권에 이끌려 귀촌했다가 끝내 적응을 못하고 홀로 도시로 돌아가는 사례도 있어요.” “우선은 시골과 취향이 맞아야겠죠. 저는 그게 맞았어요. 원래 제가 도시적 풍물보다 산골의 자연 풍경에 마음이 더 편해지는 성향입니다. 서울에 살면서도 화초를 많이 길렀어요. 이사할 땐 한 트럭 분량의 화분들을 싣고 내려올 정도였죠.” “자연만 바라보고 살 수만은 없는 게 인생이죠. 경제활동은 순탄했나요?” “전혀 순조롭지 않았어요(웃음). 사람과의 관계도 자연과의 관계도 도시보다 한결 만족스러운 쪽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게 시골이라는 건 분명해요. 심지어 나만의 지상 천국을 누릴 수도 있다고 봐요. 하지만 경제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란 도시나 마찬가지로 시골에서도 만만치 않다는 걸 실감했어요. 아아, 초기 3년 정도는 정말 힘들었어요. 저희는 고작 시골집 한 채를 지을 정도의 자금만 지니고 귀촌했는데, 3년여가 지나고 나자 자금이 바닥나더라고요. 진땀을 흘려야 했어요.” 가령 고매한 정신세계조차 최소한의 물적 토대가 갖춰지고서야 지속 가능하다. 지겹고 힘겹지만 면제받을 길이 없는 게 돈벌이다. 세상은 우습게 돌아가지만 결코 우습게 여길 수 없는 게 또한 그것이다. 부(富)를 경멸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는 이미 가진 자이기 십상이다. 김씨는 마치 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난 듯이 한동안 난처한 곤궁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어쩌면 귀촌을 낭만적으로 가늠한 탓에 빚어진 사단일지도 모를 일.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부부가 열심히 일을 찾아 덤볐어요. 남편은 이 지역의 한 대안학교에서 목공 강사로 일했어요. 하지만 박봉에다 적성이 맞질 않아 그만두고 읍내에 목공 공방을 차렸어요. 저 역시 읍내에 나가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죠. 어휴, 눈물 나던걸요. 이러자고 내가 귀촌을 했나? 서울로 다시 돌아갈까? 슬픔과 회의가 마구 몰려들더라고요.”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을 해도 역경이 쉬 물러나지 않도록 각본을 짜둔 이는 누구일까. 그런데 말이죠, 시골에선 소득이 너끈하지 않더라도, 소박한 방식으로 원만히 살아갈 여지가 있진 않나요?” “그런 얘기, 귀촌 이전에 많이 들었어요. 시골에 내려가 살면 생활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그게 귀촌의 장점 가운데 하나라고. 그러나 살면서 겪어보니 현실은 달랐어요.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더라고요.” “저런! 제가 만났던 귀촌자들은 흔히 생활비 절감 효과를 귀촌의 최대 이점으로 꼽았어요. 특별한 경우이겠지만, 월 지출 50만원으로 무탈하게 사노라는 부부도 만났어요. 그들은 소비 욕망의 관성에서 벗어난 검박한 생활이 더 만족스러운 삶일 수도 있다는 걸, 사람이 물질의 노예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놀라워요. 저희는 힘들었어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읍내나 인근 대전을 드나들어야 하는데요, 남편 차와 제 차, 두 대의 차량이 필요했어요. 군내버스는 하루에 두 차례 운행할 뿐이라서 이용하기 어려웠죠. 대중교통망이 발달한 서울에선 교통비 부담을 느끼지 않고 살아도 되지만 시골은 달라요. 차량 유지비 비중이 너무도 커요. 아무튼, 귀촌 3년째가 숨 가쁜 고비였습니다. 경제상의 한계로.” “귀촌 3년쯤을 경과하면 보통 풍월을 읊을 시점이죠. 비로소 시골생활 물정에 익어 정착이 가능해지는 시기라는 거죠. 3년까지는 버거운 수련기간이라는 얘기이기도 할 테고.” “귀촌을 만만하게 여겼구나,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충분치 못했구나, 반성이랄까 깨우침이랄까 그런 게 몰려들었어요. 3년이나 지나고서야 말이죠. 뭔가 확실한 다른 방식을 찾아야만 했어요. 읍내에 나가 허드렛일이나 하는 식으로는 미래가 보이질 않는다는 것, 우리만의 집중된 일을 찾자는 것, 남편과 숙의 끝에 내린 결론이 그랬어요.” 낡은 지도 버리고 새 지도에서 찾은 좌표 귀촌 3년 어간에 맞닥뜨린 ‘깔딱 고개’. 목표는 좋았으나 방법을 잘 몰랐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셈이다. 화급히 해결하고 조속히 극복해야 할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상황. 사람의 저력이나 진면목은 대체로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드러난다. 김미경씨 부부는 낡은 지도를 버리고 새 지도에서 좌표를 찾았다. 부부는 이제 농사를 통해 갑갑한 터널을 벗어나기로 작심했다. 와송(瓦松) 재배에 돌입했던 것. 이는 썩 적절한 선택이었다. 시골생활에 비로소 탄력을 붙일 힘으로 작용했다. “와송에 함유된 약성이 알려지면서 재배 바람이 막 불기 시작하던 즈음이었어요. 승산이 있다 봤지요. 농토를 빌려 비닐하우스를 조성하고 재배에 나섰어요. 제가 농부의 딸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난감하게도 농사엔 완전 초심자였지만 금산군농업기술센터나 이웃 농가들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기술을 배웠어요. 결과는 좋았습니다. 재배 첫해부터 쏠쏠한 수익을 올렸으니까.” “농사는 작목 선정이 관건이라 하죠. 그러나 어떤 작물이 유망하다 싶으면 모두들 덤벼드는 통에 몇 해 안 가 과잉생산, 가격하락이라는 악조건에 봉착해요.” “와송 농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괜찮다 싶어 농장 규모를 1600평까지 늘렸으나 해가 갈수록 수익구조가 악화됐어요. 그걸 타개하기 위해 생초나 건초 판매보다 가공에 주력, 와송 발효액을 만들어 팔았어요. 농장 규모도 400평으로 줄이고 고품질 소량 생산으로 채산성을 도모했어요. 음, 아무튼 와송 농사를 계기로 생활상의 맥락을 잡아나갈 수 있었습니다. 일의 영역과 활동 반경을 넓혀나가기 시작했죠. 자신감이 붙고 재미있고 즐겁고, 비로소 저의 성향에 맞는, 본성에 부합하는 활달한 차원으로 삶이 전환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면서 말이죠.” “얼어붙었던 강물이 훈풍에 다시 녹아 쾌활하게 흐르듯이? 일테면 그런 거예요?” “일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세상 속으로 활기차게 뛰어들어 산다는 실감으로 즐겁습니다. 귀농인들과 연합해서 갖가지 활동을 펼치고, 프리마켓을 기획해 판매를 위한 공연 연출도 하고, 유쾌한 팜 파티도 즐기고, 이젠 할 일도 너무 많고, 오라는 곳도 가야 할 곳도 많아졌어요. 남편이 하는 말은 이래요. 아니, 당신이 그토록 활동적인 여자였어? 거참, 물 만난 고기 같네!(웃음)” 우왕좌왕, 전전긍긍의 시간을 거쳐 이젠 안도할 만한 궤도에 올라섰다. 즐길 만한 삶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불 지필 희망을 가지고 산다는 건 일종의 경사! 그녀는 기껍다. 순순한 성정 그 반대 기슭에 깃들인 자신의 활달한 외향성을 밖으로 끄집어내 삶의 동력으로 삼게 됐다는 사실에. 그것으로 귀촌의 나날들에 긍정과 낙관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제야 여전히 궁하지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 2017-11-06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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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원식이 만난 귀촌 사람들] 충남 금산군 제원면 시골에 사는 김미경·강희 부부
- 삶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면? 아마도 누구나 현재의 삶과 다른 쪽으로 ‘나’를 데려갈 것이다. 금쪽같은 여생을 진정 자신이 원했던 방식으로 누리고자 할 것이다. 절박하면 길을 바꾸게 마련이다. 중년 이후의 귀촌은 머잖아 닥쳐올 노년, 그 쓸쓸한 종착에 대한 대책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절박한 기색을 머금는다. 노후의 안정과 평안을 성취하려는 의도엔 ‘거사’라고 할 만한 결연한 포부가 서려 있기 십상이다. 김미경(54)씨는 수려한 강변에 산다. 금강의 초록 물살이 살갑게 여울지는 시골에 둥지를 틀었다. 동갑내기 남편 강희씨와 함께 살아간다. 귀촌 이전엔 죽 서울에서 살았다. 남편은 가구를 손수 만들어 파는 사업으로 가장 역할을 했으며, 김씨 역시 직장인으로 서울이라는 각축장을 열심히 누볐다. 이채로운 건 부부 공히 연극판에서 활약한 이력. 남편은 무대조명이나 무대감독으로, 김씨는 배우로 활동했단다. 젊었던 날의 근 15년쯤을 극단에서 뛰었다지. 짧지 않은 세월이다. 하지만 이 부부에겐 이미 강 너머로 고스란히 사라진 과거사일 뿐이다. “다 잊었어요!” 연극인으로 살았던 옛일을, 그녀는 그저 그렇게 덤덤하게 돌이킬 따름이다. 연극에 빠졌던 나날들의 열성과 꿈이라는 게 이젠 무의미한 한 줌 기억으로 잔존한다는 투로. 현재의 삶 속으로 온전히 파고드는 게 현명하다는 투로. 김미경씨 부부는 10년 전에 이곳으로 귀촌했다. 서울에 더 이상 애착도 미련도 없어서였다. 이게 단순한 이유처럼 들리지만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으리라. 서울에서 겪은 파란과 애환에 지친 나머지 전원생활의 목가적 풍미를 선망했을 수도 있다. 서울에서 품었던 인생의 목표를 시급히 수정해야 할 필요에 직면했을 수도 있겠지. 아무려나 절이 싫어 떠나는 중처럼, 이점도 매력도 많은 서울과 선선히 결별하는 일엔 특유의 절박한 고심이 선행되었을 게다. 그녀의 얘기를 들어볼까. “서울생활에 의욕과 재미를 잃었어요. 수많은 차량과 인파, 경쟁과 긴장과 스트레스로 점철되는 게 서울이잖아요. 복잡하고 답답한 대도시에서 저희 부부가 원하는 좋은 삶을 추구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죠. 서울의 혼탁한 공기도 너무 싫었어요. 서울에서 인생을 탕진하고 싶진 않았어요. 차츰 노년기에 접어들 텐데, 원하지 않는 공간에서 노후를 맞이할 수는 없단 생각을 했지요. 노후엔 시골의 자연 속에서 편하게 살자! 그런 결심이 섰던 거예요. 이왕이면 한 살이라도 더 젊은 나이에 귀촌을 해 시골생활을 익히는 게 가장 충실한 노후 준비라는 생각을 했던 거죠.” 노후 준비라는 것. 과거엔 없었던 숙제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시절엔 모두들 그냥 살았다. 열심히 살다가 일찍 조용히 죽으면 그만이었다. 부양할 자녀들도 많았다. 그러나 100세 시대엔 다르다. 60세쯤의 은퇴 이후 긴긴 세월을 자력으로 살아갈 갖가지 채비를 미리 해두려고 모두들 용을 쓴다. 무엇보다 노후자금 마련에 관한 강박감으로 현재를 만족스럽게 즐길 소비와 기회마저 가급적 보류한다. 자금으로만 안전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는 없다. 자기 계발, 인간관계, 여가, 소일거리, 건강 등도 노후의 안락을 위해 미리 북돋워야 할 종목들이니까. 이 모든 과제들의 완수가 귀촌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김씨 내외 말이다. 이제 귀촌 10년. 그들의 귀촌은 어느 고지에 올라섰을까. 한동안 곤궁에 시달려 “서울을 벗어난 건 좋은 선택이었어요. 여러 면에서 만족할 만한 경험을 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일례를 들자면, 제가 서울에선 피부질환에 늘 시달렸어요. 아무리 약을 써도 낫지를 않았죠. 과중한 스트레스가 가져온 질환이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시골에 살며 피부가 깨끗하게 회복됐어요. 잔병치레도 사라졌고요. 귀촌을 통해 지독한 스트레스를 크게 줄여나갈 수 있었던 거죠.” “대체로 도시의 아내들은 귀촌에 거부감을 느끼죠. 불편 요소들이 많다고 보기 때문에. 남편의 강권에 이끌려 귀촌했다가 끝내 적응을 못하고 홀로 도시로 돌아가는 사례도 있어요.” “우선은 시골과 취향이 맞아야겠죠. 저는 그게 맞았어요. 원래 제가 도시적 풍물보다 산골의 자연 풍경에 마음이 더 편해지는 성향입니다. 서울에 살면서도 화초를 많이 길렀어요. 이사할 땐 한 트럭 분량의 화분들을 싣고 내려올 정도였죠.” “자연만 바라보고 살 수만은 없는 게 인생이죠. 경제활동은 순탄했나요?” “전혀 순조롭지 않았어요(웃음). 사람과의 관계도 자연과의 관계도 도시보다 한결 만족스러운 쪽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게 시골이라는 건 분명해요. 심지어 나만의 지상 천국을 누릴 수도 있다고 봐요. 하지만 경제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란 도시나 마찬가지로 시골에서도 만만치 않다는 걸 실감했어요. 아아, 초기 3년 정도는 정말 힘들었어요. 저희는 고작 시골집 한 채를 지을 정도의 자금만 지니고 귀촌했는데, 3년여가 지나고 나자 자금이 바닥나더라고요. 진땀을 흘려야 했어요.” 가령 고매한 정신세계조차 최소한의 물적 토대가 갖춰지고서야 지속 가능하다. 지겹고 힘겹지만 면제받을 길이 없는 게 돈벌이다. 세상은 우습게 돌아가지만 결코 우습게 여길 수 없는 게 또한 그것이다. 부(富)를 경멸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는 이미 가진 자이기 십상이다. 김씨는 마치 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난 듯이 한동안 난처한 곤궁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어쩌면 귀촌을 낭만적으로 가늠한 탓에 빚어진 사단일지도 모를 일.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부부가 열심히 일을 찾아 덤볐어요. 남편은 이 지역의 한 대안학교에서 목공 강사로 일했어요. 하지만 박봉에다 적성이 맞질 않아 그만두고 읍내에 목공 공방을 차렸어요. 저 역시 읍내에 나가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죠. 어휴, 눈물 나던걸요. 이러자고 내가 귀촌을 했나? 서울로 다시 돌아갈까? 슬픔과 회의가 마구 몰려들더라고요.”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을 해도 역경이 쉬 물러나지 않도록 각본을 짜둔 이는 누구일까. 그런데 말이죠, 시골에선 소득이 너끈하지 않더라도, 소박한 방식으로 원만히 살아갈 여지가 있진 않나요?” “그런 얘기, 귀촌 이전에 많이 들었어요. 시골에 내려가 살면 생활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그게 귀촌의 장점 가운데 하나라고. 그러나 살면서 겪어보니 현실은 달랐어요.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더라고요.” “저런! 제가 만났던 귀촌자들은 흔히 생활비 절감 효과를 귀촌의 최대 이점으로 꼽았어요. 특별한 경우이겠지만, 월 지출 50만원으로 무탈하게 사노라는 부부도 만났어요. 그들은 소비 욕망의 관성에서 벗어난 검박한 생활이 더 만족스러운 삶일 수도 있다는 걸, 사람이 물질의 노예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놀라워요. 저희는 힘들었어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읍내나 인근 대전을 드나들어야 하는데요, 남편 차와 제 차, 두 대의 차량이 필요했어요. 군내버스는 하루에 두 차례 운행할 뿐이라서 이용하기 어려웠죠. 대중교통망이 발달한 서울에선 교통비 부담을 느끼지 않고 살아도 되지만 시골은 달라요. 차량 유지비 비중이 너무도 커요. 아무튼, 귀촌 3년째가 숨 가쁜 고비였습니다. 경제상의 한계로.” “귀촌 3년쯤을 경과하면 보통 풍월을 읊을 시점이죠. 비로소 시골생활 물정에 익어 정착이 가능해지는 시기라는 거죠. 3년까지는 버거운 수련기간이라는 얘기이기도 할 테고.” “귀촌을 만만하게 여겼구나,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충분치 못했구나, 반성이랄까 깨우침이랄까 그런 게 몰려들었어요. 3년이나 지나고서야 말이죠. 뭔가 확실한 다른 방식을 찾아야만 했어요. 읍내에 나가 허드렛일이나 하는 식으로는 미래가 보이질 않는다는 것, 우리만의 집중된 일을 찾자는 것, 남편과 숙의 끝에 내린 결론이 그랬어요.” 낡은 지도 버리고 새 지도에서 찾은 좌표 귀촌 3년 어간에 맞닥뜨린 ‘깔딱 고개’. 목표는 좋았으나 방법을 잘 몰랐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셈이다. 화급히 해결하고 조속히 극복해야 할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상황. 사람의 저력이나 진면목은 대체로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드러난다. 김미경씨 부부는 낡은 지도를 버리고 새 지도에서 좌표를 찾았다. 부부는 이제 농사를 통해 갑갑한 터널을 벗어나기로 작심했다. 와송(瓦松) 재배에 돌입했던 것. 이는 썩 적절한 선택이었다. 시골생활에 비로소 탄력을 붙일 힘으로 작용했다. “와송에 함유된 약성이 알려지면서 재배 바람이 막 불기 시작하던 즈음이었어요. 승산이 있다 봤지요. 농토를 빌려 비닐하우스를 조성하고 재배에 나섰어요. 제가 농부의 딸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난감하게도 농사엔 완전 초심자였지만 금산군농업기술센터나 이웃 농가들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기술을 배웠어요. 결과는 좋았습니다. 재배 첫해부터 쏠쏠한 수익을 올렸으니까.” “농사는 작목 선정이 관건이라 하죠. 그러나 어떤 작물이 유망하다 싶으면 모두들 덤벼드는 통에 몇 해 안 가 과잉생산, 가격하락이라는 악조건에 봉착해요.” “와송 농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괜찮다 싶어 농장 규모를 1600평까지 늘렸으나 해가 갈수록 수익구조가 악화됐어요. 그걸 타개하기 위해 생초나 건초 판매보다 가공에 주력, 와송 발효액을 만들어 팔았어요. 농장 규모도 400평으로 줄이고 고품질 소량 생산으로 채산성을 도모했어요. 음, 아무튼 와송 농사를 계기로 생활상의 맥락을 잡아나갈 수 있었습니다. 일의 영역과 활동 반경을 넓혀나가기 시작했죠. 자신감이 붙고 재미있고 즐겁고, 비로소 저의 성향에 맞는, 본성에 부합하는 활달한 차원으로 삶이 전환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면서 말이죠.” “얼어붙었던 강물이 훈풍에 다시 녹아 쾌활하게 흐르듯이? 일테면 그런 거예요?” “일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세상 속으로 활기차게 뛰어들어 산다는 실감으로 즐겁습니다. 귀농인들과 연합해서 갖가지 활동을 펼치고, 프리마켓을 기획해 판매를 위한 공연 연출도 하고, 유쾌한 팜 파티도 즐기고, 이젠 할 일도 너무 많고, 오라는 곳도 가야 할 곳도 많아졌어요. 남편이 하는 말은 이래요. 아니, 당신이 그토록 활동적인 여자였어? 거참, 물 만난 고기 같네!(웃음)” 우왕좌왕, 전전긍긍의 시간을 거쳐 이젠 안도할 만한 궤도에 올라섰다. 즐길 만한 삶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불 지필 희망을 가지고 산다는 건 일종의 경사! 그녀는 기껍다. 순순한 성정 그 반대 기슭에 깃들인 자신의 활달한 외향성을 밖으로 끄집어내 삶의 동력으로 삼게 됐다는 사실에. 그것으로 귀촌의 나날들에 긍정과 낙관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제야 여전히 궁하지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 2017-11-02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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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릴 것 없는 건강식물 연꽃
- 가을이 되면 식물은 열매를 맺고 동물은 이 열매를 먹고 겨울을 대비한다. 우리의 주식인 벼가 그렇고, 다른 과일들도 그렇다. 그런데 다른 식물과는 다르게 물에서 나는 열매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연자육이다. 땅에서 자라 올라오는 식물의 열매와 물속에서 자라 올라오는 식물의 열매는 다를 수밖에 없다. 옛날에는 농사를 지을 때 저수지, 연못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데 물이 고여서 흐르지 못하면 썩게 마련이다. 이럴 때는 연못에 동식물을 서식하게 해 순환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연못의 물이 생명력을 유지한다. 연꽃을 연못에 심어놓으면 연못 바닥의 진흙을 잡아주고 진흙 속에 산소를 공급해준다. 또한 커다란 연잎이 펼쳐지면 그 밑에서 다양한 식물과 물고기, 곤충, 동물이 서식할 수 있다. 연꽃은 이렇게 물이 살아 있도록 도와준다. 연꽃은 수질 정화에 가장 많이 이용되는 부레옥잠보다 2~3배의 수질 정화 효과가 있다. 불교에서는 연꽃이 더러운 진흙에 뿌리를 내리고 살지만,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모습에 착안해, 연꽃을 중생이 번뇌가 가득한 사바세계에서 살지만, 이에 물들지 않고 깨달음을 얻고 정화되는 과정에 비유한다. 그래서 절 인근에는 연꽃이 많이 심어져 있다. 연꽃은 연못의 물을 정화하듯, 사람의 몸과 마음도 정화시킨다. 그래서 예로부터 약초, 음식으로도 많이 사용되어왔다. 연뿌리, 연잎, 연꽃, 연자육, 연화예 등 연꽃은 버릴 게 없는 식물이다. 모든 자연물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그라져 흩어지기 마련이다. 인간은 100년을 버티기 힘들고 집도 수백 년을 버티지 못한다. 그런데 연꽃의 열매인 연자육은 연못 속 수심 1m 진흙 속에서 2000년을 흩어지지 않고 열매 상태로 생존한다. 오랫동안 진흙 속에 파묻혀 있다가 싹을 틔우기도 하는데, 일본 후쿠이현 류코우지(龍興寺)에서는 2000년 된 연자육을 캐내어 꽃을 피우기도 했다. 연자육의 껍질은 돌처럼 딱딱한데, 이렇듯 단단한 껍질 속에 강한 생명의 힘이 담겨져 있다. 연꽃이 수정되면 연밥통이 되는데, 하나의 연밥통에는 수십 개의 연자육이 맺힌다. 연자육이 다 익으면 1.3m 물밑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진흙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이것은 밀도가 굉장히 높고 단단하기 때문인데, 이런 힘은 콩팥 기능을 강화하고 소변을 잘 내보내는 효과로 나타난다. 즉 비뇨기계에 좋다. 연자육의 달고 떫은맛은 몸에서 진액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아준다. 불안한 심장을 안정시켜주고, 설사를 막아주고, 정액이 소변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아주고, 여성의 냉을 멎도록 해주는 연자육은 불면증, 단백뇨, 절제가 안 되는 성욕에도 좋다. 연자육은 몸의 엑기스가 빠져나가는 것을 끌어당기므로 노인, 허약자에게 더욱 좋다. 진흙 속에서 2000년을 버티는 연자육의 힘은 장수에도 도움이 된다. 진흙 속에서 싹이 트기에 황토의 기운을 머금고 있다. 쪄서 먹으면 소화가 잘되게 하고 설사를 치료한다. 연자육은 껍질이 매우 단단한 견과류라서 뇌수를 채워주고 겨울을 대비해 몸을 단단하게 해주고 심신을 안정시켜준다. 뇌수를 채워준다는 것은 치매를 예방해주고 눈과 귀를 밝게 해준다는 말이다. 연자육은 이처럼 좋은 효과가 많아 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그렇지만 변비가 심하거나 속이 답답할 때는 피하는 것이 좋다. 연자육은 9월부터 수확하는데, 시중에서는 덜 익은 연자육을 따서 껍질을 벗겨 파는 경우가 많다. 덜 익었을 때는 손으로도 껍질을 벗길 수 있지만, 다 익으면 딱딱해져서 망치나 돌로 내려쳐야만 껍질을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덜 익었을 때는 녹색이고, 다 익으면 껍질이 검게 변한다. 연자육은 단단함을 수렴하는 힘을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 익어서 단단하고 검게 된 연자육의 약효가 좋다. 바로 돌처럼 딱딱한 석련자(石蓮子)가 유명한 이유다. 물밑으로 떨어져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발아하지 않고 견딘 연자육의 약효가 더욱 좋다. 깊은 물속에 있으면 물의 침투를 막는 방어력과 정기신혈(精氣神血)을 수렴하는 힘이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연자육의 약효는 성분이 아닌, 1.3m 수중에서 더 단단해지고 물의 침투를 오랜 시간 버틴 힘에서 나온다. 중국 명대의 고서 는 연자육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지금 조주(趙州) 영진 현에서 나는 석련자는 모두 진흙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인데,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지역 주민들이 진흙을 파서 종종 채취하고 있는데, 그 껍질은 쇠나 돌처럼 단단하고 속살은 향내가 여전히 생생하다. 이 석련자를 물에 던져두었더니 연잎이 솟아났다. 이 석련자를 사람이 먹었더니, 몸이 가벼워지고 장수하며 설사, 이질 등 여러 질병이 치료되었다. 그런데 지금 의사들은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갓 자란 연자육을 쓰고 있다. 갓 자란 연자육은 쓰고 떫고 비린내가 나서 씹어보면 구역질이 나는데, 어떻게 사람을 보익할 수 있겠는가?” 연꽃에는 백련과 홍련이 있는데 이 둘은 약간 다르다. 에는 “야생 연꽃과 홍련은 연밥통이 많이 맺히고 연뿌리가 작다. 재배한 연꽃과 백련은 연밥통이 적게 열리고 연뿌리가 크며, 겹꽃으로 피는 연꽃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백련의 뿌리는 홍련의 뿌리보다 굵고 단단하다. 연자육은 수렴하는 힘이 기본이다. 수렴하는 힘은 백련이 홍련보다 강하기 때문에, 연자육 역시 백련의 연자육이 좋다고 한 것이다. 연뿌리를 식용으로 쓸 때는 홍련이 먹을 만하다. 그래서 시중의 연근 요리는 홍련을 쓴다. 백련의 연근은 바로 먹지 못하고 가루를 내어 쓴다. 또한 어혈을 푸는 데는 홍련 뿌리가 비교적 우수하고 토혈, 코피를 멎게 하는 데는 백련 뿌리가 홍련 뿌리보다 낫다.
- 2017-09-2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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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조은병원 위례신도시로 … 종합병원급 의료서비스 추진
- 더조은병원 본원이 서초구에서 위례신도시로 확장 이전했다. 더조은병원은 지난 16일 성남시 수정구 위례서일로에 본원 이전을 마치고 본격적인 진료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더조은병원 관계자는 “위례신도시의 새 본원은 3500평 규모로 지하 4층, 지상 11층에 160개 병상을 갖춰, 기존 본원의 시설부족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종합병원급 치료 서비스가 가능해졌다”며 “신경외과와 정형외과, 내과, 마취통증의학과, 영상의학과 외에도 일반외과, 부인과 등이 신설되며 소아청소년과, 치과, 피부과, 한의원 등도 입정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정확한 진단을 위한 저선량 CT와 고해상 MRI 등 새로운 장비도 도입됐다. 새로운 시설과 함께 의료진도 보강됐다. 대한최소침습척추학회 회장을 역임한 도은식 대표원장 외에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척추 수술을 담당했던 이승철 병원장이 합류했다. 도은식 대표원장은 “척추질환은 환자마다 증상과 정도가 달라 각 분야 의료진의 경험과 의견을 통해 환자에게 맞는 최적의 치료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며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통해 대한민국 척추질환 치료의 표준을 만들어 나가는 데 앞장서겠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 2017-09-18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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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영환 AJ가족 인재경영원장 “가족을 고객처럼, 가정은 회사처럼 경영했죠”
- 조영환 AJ가족 인재경영원장(62)은 ‘가정도 회사처럼, 가족은 고객처럼 경영하라’고 말한다. 그는 “가정은 기업의 축소판”이라며 “가족에도 회사 경영 마인드가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실제로 1990년부터 가정경영계획을 수립해, 27년여 실행해온 성공적 가장이기도 하다. 삼성그룹에서 26년간 인사조직 분야를 담당했다. 이후 5년간 강연, 집필 등을 하며 프리랜서로 활동했고 현재는 AJ가족 인재경영원 원장으로 3막의 인생을 경영하고 있다. 보통 베이비부머 세대의 직장인은 입사~퇴직이라는 한 우물의 인생이 일반적 코스입니다. 조 원장께선 55세에 퇴직해 5년간 프리랜서, 3막 기업인으로 재기와 변신을 거듭하셨는데요. 먼저 퇴직 후 프리랜서로의 변신 스토리가 궁금합니다. “퇴직 후 충격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원래 자유로운 영혼의 피가 흐르고, 역마살 체질이 있어서 물 만난 고기 같다는 생각이 곧 들더군요. 특히 생활 리듬은 깨뜨리지 않으려고 유의했어요. 새벽 5시에 일어나 운동하고, 아침식사는 집사람과 같이하는 등으로요. 퇴직한 지 3개월 만에 책을 냈습니다. 5년 동안 책을 13권 썼으니 그야말로 왕성한 활동이라고 할 만하지요. 그때 저는 삼성출신 전직 임원보다 작가라는 호칭으로 불러달라고 했지요. 태국에서 2종, 중국에서 2종이 번역됐고요. 김구라, 이경규 등이 진행하는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강의를 위해 전국 팔도를 돌아다녔습니다. 머리도 기르고, 넥타이도 매지 않고요. 모범 직장인의 전형인 삼성 스타일에서 벗어난 것이 자유로움을 줬습니다. 강연, 집필 외에 젊은이들을 위한 무료 취업 코칭 등의 재능기부를 했어요. 그러다가 커플이 생겨 주례도 서고… 심지어 아파트 동대표 회장까지 맡아 지역 봉사활동을 하는 등 보람이 많았습니다(웃음).” 직장을 그만두고 자유인으로 생활하시는 동안 특별히 명심하신 사항이 있었나요. “회사 다닐 때, 하루 종일 밖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가족 간의 문제점, 약점이 눈에 들어왔어요. 같이 있을 시간이 많아지니 잔소리가 늘어났던 겁니다. 당연히 식구들이 점점 불편해했지요.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집사람에게 슬쩍 물어보더래요. ‘아빠, 언제까지 집에 계실 거냐’고. 그 말을 듣고 가까운 헬스클럽에 등록해 2시간 운동하고 점심과 저녁 약속 억지로라도 만들면서 집에 있는 시간을 줄였습니다. 잔소리하고 싶은 것 있으면 꾹 참고요. 좋은 점, 칭찬거리만 보고 말하려 애썼지요.” 프리랜서 생활 5년 만에 다시 새장(?) 안으로 들어가 AJ가족 인재경영원 원장이 되셨습니다. “(웃음) 바쁜 중에도 모처럼 스케줄이 비는 날이 있잖아요. 어느 날 점심약속이 없어 오피스텔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먹는데 ‘여기서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 하는 처량한 생각이 들더군요. 같이 일할 조직과 구성원이 그리웠어요. 마침 AJ가족의 문덕영 부회장이 제 책을 읽고 스카우트 제의를 해와 응하게 됐지요.” 베이비부머 세대가 ‘퇴직 이후 새로운 2막’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공통의 당면과제입니다. 아직 조직에 있는 사람이든 프리랜서이든 준비해야 할 필수사항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이전 조직에서의 좋은 평판이라고 봅니다. 평가가 실력에 관한 것이라면 평판은 인품을 포함하는 것이지요. 퇴직 후엔 평가보다 평판이 더 중요해요. 술버릇, 말과 행동, 주변과의 교류 등인데,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는 것이 평판입니다. 누구하고 어떻게 살아왔는가가 평생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2막 때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제가 2막 인생에 빨리 적응한 것도 사람농사를 잘 지어놓은 덕분이었어요. 조직생활이 아닌 자신만의 새로운 일을 한다면 가장 잘하는 일,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성공률이 높습니다. 어설프게 다른 사람의 권유로 원하지 않는 영역의 일이나 잘 모르는 일을 할 경우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삼성화재 인사팀,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인사기획, 이론연구, 노사관리업무를 담당했지요. 또 삼성화재 사업부장(상무이사급)을 지내셨지요. 이론연구와 현장 근무의 양수겹장 경력을 갖고 계신데요. 인사조직관리의 요체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무엇인가요. “인간 존중입니다. 저는 리더가 하는 일은 직원들의 일을 대신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군불을 때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말만이 아니라 진정한 인격체로 대해주면 성과는 저절로 따라옵니다. 일선 직원들과 같이 밥 먹고, 이야기하고, 고충을 처리해주고 산간벽지라도 경조사는 다 찾아다녔지요. 제 자동차 1년 주행거리가 6만5000km로 웬만한 택시 버금갈 정도였어요. 보험사 사업부장 때는 보험설계사 900명의 이름을 석 달 만에 다 외웠어요. 본인은 물론 배우자, 자녀 대소사까지 챙겼지요. 혼자 사는 사람은 반려동물 이름까지 외우고 예방접종 시기까지 먼저 알려주며 인사했습니다. 고성과자에겐 그 사람을 위한 맞춤형 시를 써서 액자에 담아 감사를 표했고요. 그러니 제가 보험 지식은 하나도 없어도 저절로 사기, 성과가 함께 올라가더군요.” 그는 ‘인간 존중’의 핵심은 효율보다 효과를 따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장의 계산으로는 손해보는 것 같지만 결산에서는 남게 돼 있다는 것. ‘작은 진동이 큰 감동의 파동을 일으키게 돼 있다’는 게 그의 수십 년 경험의 철칙이다. 조 원장은 지금도 그때 알고 지내던 직원들과의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 전국 각지에 회원 100여 명의 ‘조사모(조영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운영되고 있을 정도라며 자랑했다. 퇴직 후 그가 고객 감동경영의 노하우를 묶어낸 처녀작의 제목은 다. 인간 감동경영도 배우면 가능합니까? “저절로 할 줄 알면 성인이게요(웃음). 저는 신참 때도 꿈이 임원 승진보다 ‘상사한테는 신뢰, 부하한테는 존경을 받고 싶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현실에선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게 힘들잖아요. 상사한테 인정받으려면 직원들에겐 몰인정한 사람이 돼야 하고, 직원들한테 존경받으려면 상사한테는 무능한 사람으로 무시받기 쉽고…. 그래서 위아래에서 모두 신뢰와 존경을 받는 사람이 누가 있나 찾아봤어요. 롤모델로 삼으려고요. 책은 물론, 조직 내외의 인물들에서 찾아보고 적용하고, 실패하면 수정하고… 그러면서 제 나름의 감동경영 방식을 개발하고 만들어나갔습니다.” 직원 감동경영과 가족경영은 자칫 시소게임이 되기 쉬운데요. 어느 하나에 치중하다 보면 한쪽은 소홀히 하게 됩니다. 가족은 어떻게 감동시키셨는지 궁금합니다. “고객감동 방식과 가족감동 방식은 다르지 않습니다. 가족경영의 어려움을 겪는 것은 가족을 너무 쉽게 대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족도 고객처럼 대하라고 후배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전략과 기획 마인드를 가지고 감동시킬 방법을 연구하라고요. 가족감동도 공짜는 없어요. 연구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꾸준히 기대 이상으로 해주고, 생각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고요. 가족경영도 프로젝트를 세우고 예산을 배정해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점검하고 시정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조 원장께서 실행하신 가정경영의 대표적 히트작은 무엇인지요. “가족경영과 조직 인사관리는 다르지 않습니다. 회사에서는 1년을 어떻게 살 것인지, 회사 운영계획을 자세하게 수립하지요. 그러나 가정에선 그런 걸 잘 안 합니다. 저는 과장으로 지내던 시절인 1990년경부터 집사람, 두 아들 등 온 가족이 참여해 가정경영계획을 매년 세웠습니다. 먼저 가족 모두에게 중요하고 필요한 것들, 예컨대 건강, 재산, 가정, 친족, 문화, 지식 등으로 범주를 정해 각각 실천사항 등을 토의해 결정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노트에 기록해놓고 같이 실행할 것을 다짐하면서 서명, 관리합니다. 다음 해 초에는 결산을 해 잘잘못을 따져서 차기 계획을 수립하고요. 가족 구성원이 참여하고 공감한 것이라 실천하기가 한결 쉽고 실행률도 높더군요. 아이들에게 계획적인 삶을 사는 습관을 키워주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됐어요.” 그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출근 전 1분간 가족과의 포옹 습관도 스스로 자부하는 가정경영의 히트작으로 꼽았다. ‘포옹이 포용’을 낳더라는 이야기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는 거실에서 1주일 1회 온 가족 회식 프로젝트 등을 실행했단다. 덕분에 각각 가정을 이룬 두 아들은 지금도 아버지를 친구처럼 여긴다. 술친구는 물론이고 스크린 골프, 당구도 같이 치고 고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찾는 지피지기 1호다. 둘째 아드님이 내성적이라 친구를 못 사귀자 안방을 최고급 음향, 모니터를 갖춘 피시 장비를 설치해 오락실로 만드셨다고요. 그때 ‘예산 개념 없이 무조건 무한정 지원, 이 방 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라는 글귀를 방문에 써 붙이셨다면서요. “교육은 비용이 아니고 투자입니다. ‘정보화 기기들과 빨리 친해지고, 트렌드를 놓치지 말고, 그리고 즐거운 학창 시절을 만들고, 친구들을 많이 사귀란 취지’에서요. 만일 내가 이것을 말로 수십 번 했다면 아이가 따랐겠어요? 결국 중요한 것은 환경 조성이에요. 왜 안 하느냐, 못하느냐가 아니고요.” 그는 “가정에서 부모도 마찬가지고, 조직에서 상사도 마찬가지다. 왜 못하냐고 질책할 것이 아니라 잘하려면 어떤 환경을 만들어줘야 하는가를 고심하는 게 어른의 의무”라고 강조하면서 “내가 아닌 상대에게서 사고나 행동 규범을 출발시키는 게 필요하지요. 내 사고방식이나 가치체계, 생존 방식을 고객의 수준과 눈높이에 맞추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상대의 언어와 습관, 취미 등을 눈여겨보고 다가가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는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의 소통 방식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은퇴 후 가장 확실한 보험은 배우자와의 금실이라는 시쳇말도 있습니다. 부부경영은 어떻게 하시나요. “가슴에 안아버리는 것입니다. 따지기 시작하면 풀리지 않아요. 다 들어주고, 생각이 정말 다르면 다음에 마음이 편안할 때 다시 의견을 조율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에요. 서로 잘잘못을 따지고 비난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게 부부입니다. 나이 들어선 의식적 노력이 필요해요.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부부애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젊어서야 애정으로 살지만, 나이 들면 인간애로 사는 게 부부 아니겠습니까.” 조 원장은 고객 감동경영을 부인 감동경영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결혼 20주년엔 부인을 위한 글을 직접 써 감사패를 수여했고, 30주년엔 직접 끓인 소고기미역국을 비롯해 정성 어린 생일상을 진상했다. 동시에 30주년 숫자에 맞춰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30가지 이유’를 작성해 헌정했다. 처음엔 ‘쓸 것’이 없을 것 같았는데 막상 쓰기 시작하니 아내의 장점들이 소록소록 떠오르더란다. 이런 패키지 상품을 선사하니 짧게는 한 달 길게는 1년이 술술 잘 풀리더라고. 배우자 몰래 만들어놓은 비자금 내지 비상금이 간혹 문제가 되곤 하는데요. 조 원장께선 어떻게 관리하시나요? “비자금에 대해서는 찬반론이 있지만 저는 찬성 입장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가정살림에서도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거든요. 살다 보면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몰라요. 비자금은 숨겨둔 돈이라는 개념으로 보기보다는 긴급할 때 활용할 수 있어 남자나 여자나 어느 정도의 비자금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나이 들수록 경조사비 부담도 만만찮고, 긴급 용도로 써야 할 경우도 있는데 이 비용을 배우자에게 구구절절 설명해 그때그때 손을 벌리려면 궁색합니다. 구태여 비율로 이야기하자면 총소득의 20% 정도는 비자금으로 비축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말씀 들으니 조직관리의 노하우를 가정경영에도 잘 접목시키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가장 행복하셨을 때는 언제인지요? “후배들이 멘토라고 많이 찾아와줄 때입니다. 책을 출간한 뒤 여기저기서 후배와 친구들이 서점이나 가판대에서 사진을 찍어 보낼 때도 그렇고요.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면접토론 때 참고서적으로 제 책 을 제일 위에 꽂아놓았을 때도 행복하더군요. 다만 이순(耳順)이라는 육십을 지나니 잘났다고 뻐기거나 욕심내는 것은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익어가는 징조인지, 기운 빠지는 징조인지 잘 모르겠지만요.” 그는 앞으로 인생 4막의 꿈은 집필하고 강의하고 코칭하는 생활이라고 말했다. “역사기행이나 문화기행 같은 깊이 있고 의미 있는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젊은이나 후학에게 도움이 되는 선배, 사람부자가 되면 잘 사는 삶 아니겠습니까?”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현재 AJ가족 인재경영원 원장. 삼성화재 인사팀에서 채용-인사기획-노사관리 업무를 담당했다. 삼성경제 연구소 인사조직실 컨설팅 등을 수행했으며 삼성화재 인사담당 임원으로 부임, 상무이사 승진 후 삼성화재 사업부장을 지냈다. 당시 ‘함께 근무하고 싶은 상사’로 뽑혔다. 저서로는 , , 등 다수가 있다.
- 2017-09-01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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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 생각해 보라’
- 가깝게 지내던 권사님이 폐암에 걸렸다는 전화를 받았다. 신약을 처방 받아 먹고 있다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지만 전화기 너머로 그녀가 직면하고 있는 두려움이 전해져 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우리 사회에서 암은 가장 무서운 병 중에 하나다. 죽음이 언제 다가올지 몰라 암진단을 받으면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표현을 쓴다. 또 환자나 보호자는 병이 악화되는 과정을 지켜봐야 하고 통증과 싸워야 하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 이런 이중삼중의 고통 속에 있을 권사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안절부절 하다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전화를 끊고 지난 해 읽었던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를 다시 꺼내들었다. 서른여섯 살 젊은 의사가 암이라는 거대한 암초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의연하게 자신의 삶을 걸어갔는지를 보여준 책이다. 외과의사로서 그는 많은 죽음을 보았고 가슴 아파했다. 생사를 가르는 현장에서 의사의 책무는 무엇인지, 무엇이 의사의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지 파악하려 애썼다. 또한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통받는 환자들의 연민을 풀어주려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가 암 진단을 받고 난 후,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에서 죽음 앞에 선 환자가 되었다.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은 환자를 치료할 때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대면하는 일이 이토록 혼란스러울 줄은 미처 몰랐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죽음을 용감하게 마주하고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생존을 향한 끝없는 분투를 통해 ‘죽어가는 대신 계속 살아가기로 다짐’한 것이다. 암진단을 받고도 레지던트 생활을 마쳤고, 체외수정을 통해 아이를 낳고 길렀다. 또한 집필에 필요한 정신력을 유지하기 위해 끝까지 애썼다. 맥없이 죽어가는 모습 대신 자신의 인생을 끝까지 아름답게 그려내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폴 칼라니티가 감동을 주는 건 이런 삶이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인간이 걸어간 빛나는 길이라는 점 때문이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 생각해 보라’는 주치의의 말에 폴은 ‘자신에게 석 달의 시간이 남아 있으면 가족과 시간을 보낼 것이고, 1년이 남아있다면 글을 쓰고싶고, 10년이 남았으면 병원으로 돌아가 환자를 치료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은 자신에게 남아있는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알게 됐다. 평상시에 소중하다고 느껴졌던 일들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 사소한 일이 되버리고, 사소해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사실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권사님을 다시 만나면 그녀의 인생에서 의미있는 일이 무엇인지 얘기해 봐야겠다. 암과 싸우고 있는 그녀는 나보다는 훨씬 단순한 것에 열정을 드러낼 것이다.
- 2017-08-28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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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첩장
- 최근에 남편 친구 자녀의 청첩장을 받고 우리 부부는 깜짝 놀랐다. 이제 부모님들의 나이가 거의 고희를 넘어서 자녀들의 결혼도 거의 끝나 가나 했는데 아직도 시키지 못한 자녀들이 많은가 보다. 요즘은 하도 결혼 연령이 늦어지니까 작은 결혼이라고 해서 부모님 친구들에겐 알리지도 않고 신랑 신부 친구들만 부르기도 한단다. 우리 젊었을 때는 맞벌이가 흔하지 않아서 남자는 물론 돈 벌이를 원칙으로 하지만 여자는 결혼을 하면 가정을 지키기 위해 당연히 사표를 던지던 시절이라, 여직원의 청첩장이 곧 사표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회사에서 혹시 어느 여직원의 결혼설이 있으면 그 자리를 누가 메꾸나 하는 것이 커다란 관심사였다. 그러나 당시의 외국인 회사는 예외였다. 결혼을 해도 여직원이 능력만 있다면 계속해서 직장에 다닐 수 있어서 그 때에도 외국 회사는 여성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았다. 당시 한국에는 일본을 선두로 많은 외국 기업이 한국에 지사를 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일본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고급 여성 인력을 많이 필요로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이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해도 외국인과 실제로 대화해 본 적이 없는 한마디로 교과서 영어라 외국인 지점장들은 맘에 드는 비서를 구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해외 여행 자유화’가 되기 전이라 외국 언어 연수는 커녕 지금은 흔해진 외국 여행 한 번 해 본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외국인은 학교 추천으로 비서를 구했는데 일을 시작해 보니 자기 말인 영어를 거의 못 알아 듣고 웃기만 해서 smile secretary 로 불렀다는 소리도 들었다. 당시엔 스마트 폰은 물론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라 외국인 비서의 중요한 업무는 보스의 영문 편지를 타자로 치는 일이었다. 우선 보스가 자필로 쓴 편지를 타자로 쳐서 깨끗하게 문서로 만들어야 하는데 보스들이 글씨들 흘려 쓰는 일이 많아서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얼마 지나면 그건 익숙해진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오타 하나 없이 편지를 타자로 친다는 건 매우 어려웠다. 치다가 틀리면 다시 치기를 몇 번을 하는 적이 당연히 많았다.. 지금은 워드로 모든 문서를 편집 하니까 편지의 일부를 오리든지 복사하고 고치고 붙여 넣기를 할 수 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때는 하루 종일 타지를 치다 보면 어깨가 너무 아퍼서 진통제를 먹어야 할 지경이었다. 또 겨우 끝을 냈다고 하더라도 보스의 마음이 바뀌거나 상황이 바꾸면 수정을 못하니까, 처음부터 다시 타자를 쳐야 했다.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또 가끔 보스의 말을 잘 못 이해해서 실수를 하는 일도 많았다. 비서 초보자의 경우 보스가 two copy, please 했는데 two coffee 로 알아듣고 커피 두 잔을 가져가는 실제로 발생하곤 했다.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은 외국 생활을 잠깐이나마 하고 돌아온 필자는 그 때 원하는 대로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워낙 자리는 많고 영어 회화를 할 수 있는 여성 인력이 없어 대기업. 외국회사. 대사관 같은 곳 중에서 맘에 드는 조건을 골라서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없어 힘든 시간을 보내는 걸 보면 우리가 살았던 젊은 시절이 태평성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 2017-08-1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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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던져버린 건축허가 서류
- 공무원 시험 열풍이다. 시험은 거의 고시 수준이다.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은 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 노후가 보장되지 않는 나라에서 그나마 안정된 직업으로 인기가 높은 것이다. 공무원은 국가의 녹을 먹고 사는 사람이다. 즉 그들에게 월급을 주는 사람은 국민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과거에는 이러한 사실을 망각한 공무원이 많았다. 하위직, 고위직 가리지 않고 민원인인 국민 위에 군림하는 공무원이 많았다. 선출직 공무원들은 선거기간 동안 가장 선량한 얼굴로 포장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하고 악수하고 친한 척한다. 피해서 지나가려 하면 쫒아와서까지 아는 체한다. 그러다가 당선이 되면 다음번 선거까지는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선거철이 되면 또 나타나 귀찮게 한다. 이런 행태를 수없이 봐온 터라 살면서 피부로 느끼는 불편이 없는 선출직 공무원들의 행태엔 별 관심이 없다. 필자는 꽤 오랫동안 건축설계 일을 하면서 소위 갑(甲)질하는 사람들에게 질렸다. 건축주는 그냥 갑이다. 시공자는 건축주에게는 을이지만 설계자에게는 갑 행세를 한다. 가끔은 시공비를 받고 난 뒤 건축주에게도 갑질을 하는 시공자들이 더러 있다. 시공현장 주변의 민원인 아주머니들은 당연히 갑이다. 그들에게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공무원이다. 특히 건축과 공무원들 중 갑 행세가 몸에 밴 공무원이 많았다. 자기 업무를 하면서 민원인인 건축사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대꾸도 잘 안 하는 공무원을 만나면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곤 했다. 그러나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우므로 그냥 을인 척한다. 상당히 공손한 어투로 재차 관심을 요청 할 수밖에 없다. 좀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속에서 불같은 것이 올라오는 사건이 있다. 주택을 설계해 건축허가를 신청했을 때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건축법 중에 아주 애매한 조항들이 있다. 법규가 자주 바뀌기도 하고 그 많은 사례에 대한 해석을 다 규정해놓을 수도 없으니 최종 판단은 공무원의 재량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그날 주택 건축허가를 접수하러 갔더니 한두 가지 서류 보완을 요청해서 다시 사무실을 왔다 갔다 했다. 두 차례나 사소한 것을 트집 잡더니 세 번째는 입구 구분 면적 계산을 문제 삼았다. 좀 애매하긴 했지만 법적으로나 판례로 봐서 문제될 것이 없는데도 도면을 수정하라고 고집을 피웠다. 트집을 잡기 위한 트집으로 생각되는 순간 더 이상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공무원의 보신과 편의를 위해 계속 서류와 도면을 보완해줘야 하는 ‘을’의 인내에 한계선이 왔다. 필자는 두터운 도면 뭉치를 건축과 사무실 가운데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건축 때려치운다. 너희들도 가만 안 둔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사무실로 들어와버렸다. 사무실에 도착하니그 건축과 공무원이 허가 처리 다 되었다는 전화를 해왔다고 했다. 설명으로 안 되면 힘으로 해야 된다는 걸 실감했지만 뒷맛이 별로 좋지 않은 허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권리를 찾을 수 있는 방법도 학습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이런 방식으로 허가를 받은 적이 있다. 필자의 방법이 좋다고는 할 수 없으나 갑질하는 공무원에겐 특효약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며칠 전 구청 복지정책과에 갔더니 상담 중에 시원한 오미자차를 내왔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세상이 바뀌었다.
- 2017-08-07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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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멍텅구리 물고기의 부성애
- 모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속초에 갔습니다. 소금내음 물씬한 속초앞 바다에는 다양한 물고기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물고기 중에 참 못생긴 놈이 가끔 눈에 띱니다. 아귀, 삼식이, 곰치 그리고 뚝지가 그렇습니다. 정말 희한하다 싶을 정도로 못생겼습니다. 그 중에도 뚝지는 정말 못생겼습니다. 그래서인지 옛날에는 이런 물고기는 잡았다가도 재수 없다고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속초에 가면 가끔 수조에 복어처럼 생긴 물고기가 달라붙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물고기가 바로 강원도에서는 보통 도치 또는 심퉁이라고도 하지만 경상도에서는 뚝지라 부르는 못난이 입니다. 뚝지에게 또 다른 이름이 있는데 어부들이 다가가도 도망을 가지 않아 멍텅구리라고도 합니다. 언뜻 보면 마치 복어를 연상케 하는데 복어와는 달리 배에 흡반이 있어 암초에 붙어 서식을 합니다. 바위에 흡반을 대고 착 달라붙어 있으니 도망갈 수가 없는 것이죠. 뚝지는 동해의 얕은 바다에서 주로 서식합니다. 눈은 작고 입은 삐뚤어졌으며 배는 복어처럼 툭 튀어나와 못생겼다는 핀잔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해안의 속초 같은 관광지에서는 없어서 못 파는 맛있는 물고기이기도 합니다. 뚝지는 매운탕이나 지리로 끓여 먹으면 제대로 감칠맛이 납니다. 어떤 이는 뜨거운 물에 데친 숙회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기도 하는데 바다를 찾는 이들의 술안주로 손색이 없습니다. 동해안 일대의 주민들은 뚝지를 해초에 섞어 매콤하게 무쳐 먹기도 합니다. 미끈거리지만 단단한 육질 때문에 삶아도 씹는 맛이 있어 입에 넣으면 소금기 짙은 바다내음이 우러나와 식도락가라면 한 번 찾아볼 만한 요리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이 못난이 뚝지에게 가시고기 못지않은 부성애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몇 해 전인가 조창인님의 소설 가시고기가 출간되어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신 적이 있습니다. 미물마저 이럴진대 사람이야 어떠해야 할까 하는 심정으로 소설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과는 달리 사람이 가시고기보다 결코 낫지 않다는 생각 때문인지 소설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다움이는 10살의 어린 나이에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불치병인 백혈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죽음과 맞닥뜨려야 하는 두려움과 공포에 몰려 있지만 아빠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시인일 뿐입니다. 아빠의 적은 수입으로는 다움이의 입원비는커녕 아무 것도 해줄 게 없었습니다. 엄마는 6살 때 다움이와 아빠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다움이를 살리는 방법은 골수이식뿐입니다. 그러나 다움이에게 맞는 골수를 이식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다음이의 고통은 고스란히 아빠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아빠의 선택은 다움이를 데리고 작은 산골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곳은 약초를 먹으며 자연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잠시 좋아지는 것처럼 보였던 병이 재발하였습니다. 다움이에게 작은 희망이 생긴 것은 골수를 이식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 후입니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수술비는 또 다른 고통이었습니다. 돈이 없는 아빠는 결국 신장을 팔기로 했습니다. 설상가상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빠는 간암에 걸립니다. 신장대신 각막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들을 보살필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다움이를 엄마한테 보낸 후 아빠는 한 폐교에서 마치 가시고기처럼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았습니다.(가시고기/조창인, 요약) 가시고기는 큰가시고기과에 속하는 민물고기입니다. 수컷은 산란기가 되면 해초 등을 이용해 둥지를 만들고 암컷을 유인해 번식을 합니다. 새끼가 부화할 때까지 가시고기는 지느러미로 온힘을 다해 바람을 일으켜 신선한 산소를 공급합니다. 마침내 새끼들이 부화했을 때 가시고기는 세상에서의 힘든 여정을 모두 마치고 삶을 등집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가시고기는 부성애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가시고기가 다움이 아빠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어 소설의 제목이 되었을 터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가시고기가 아닙니다. 못난이 뚝지입니다. 그런데 이 뚝지에게 가시고기 못지않은 부정과 부성애가 있다니 놀랍습니다. 시인 이성복님이 말하는 뚝지는 더 이상 멍텅구리가 아닙니다. 못난이도 아닙니다. 울진 앞바다 깊은 바위틈에 바보 물고기 뚝지가 산다 눈도 입도 멍청하게 생긴 수컷이 저만큼 멍청한 암컷의 배를 만지고 쓰다듬고 자꾸 눌러서 희부연 알덩어리가 뭉게뭉게 쏟아지면, 그 위에 수컷은 밀린 오줌 싸듯이 정액을 쏟아 붓는다 엉겁결에 수정이 끝나면 막무가내로 수컷은 암컷을 밀어내고 제 혼자 배를 까뒤집고 끈끈이 주걱같은 지느러미로 흐느적흐느적 산소를 불어넣어준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고 온몸이 쭈그러들어, 쭈그러진 살갗 빼곡히 꼼지락거리는 기생충이 피를 빨아도 떼어낼 생각도 않고, 삼십 일이나 사십 일 斷腸의 세월이 끝나고 올챙이 꼬리 같은 새끼들이 어리광 부리며 헤엄쳐 나오면 그제야 수컷은 깊은 숨 한번 들이킬 여가도 없이 숨을 거둔다 물론 그 전에라도 배 출출한 무적의 무법자 대왕문어가 수시로 찾아와 육아에 바쁜 수컷을 끌어안고 가는 것이다 (이하 생략, 뚝지 中/이성복시인) 그런데 때로 수컷 뚝지가 쫓아내도 떠나지 않는 암컷 뚝지는 왜 그렇게 안 떠나려고 버둥거렸는지 이성복님은 대왕문어의 밥이 된 다음에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갈가리 찢긴 암컷의 아랫도리에 미처 다 쏟아내지 못한 알들이 무더기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바보야, 그러면 그렇다고 말이라도 할 거지, 바보야 (뚝지 中/이성복 시인) 절절한 수컷의 이 한 마디가 바다를 가로질러 귓속을 울립니다. 오로지 종족의 보존과 새끼를 위한 이 헌신적 보살핌은 뚝지를 바보, 멍텅구리로 만들었습니다. 바보, 멍텅구리가 되었기 때문에 바위에 해초처럼 달라붙어 그 생명과 종족을 끊지 않고 이어 나간 것입니다. 오늘도 뚝지는 사람이 다가가도 바위에 붙어 꼼짝하지 않습니다. 멍텅구리 뚝지의 부성애가 꼭 달라붙어 있습니다.
- 2017-05-22 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