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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랄 일만 없으면 된다
- 노년 생활 지침이라고 할 수 있는 소노 아야코의 에세이 독후감을 쓴 필자의 블로그를 보고 어느 분이 댓글을 달아 주셨다. “이제는 더 바랄 것도 없고, 살면서 놀랄 일만 없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맞는 얘기 같아 필자 입장도 그렇다며 회신 댓글을 보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다’라는 말이 있다. 평소 형제들이나 자식들과 왕래가 많지는 않은 편이다. 자주 연락을 안 하고 산다고 원망을 듣지만, “무소식이 희소식 아니냐?”고 답한다. 이 나이에는 안부 전화 한다고 연락 해봐야 “바쁜데 별 것도 아닌 일로 신경 쓰게 만들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연락이 없다면 당연히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보는 것이다. 이 나이에는 대부분 연락은 카톡이나 메시지 등 문자로 주고받는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전화나 편지를 받으면 우선 불안해진다. 범상치 않은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전화는 대부분 귀찮은 보험 가입 권유 전화가 많다. 부동산 중개소에서 오는 전화는 전세 준 아파트에 문제가 생겼을 때이다. 하수도가 막혔다거나 공사를 해야 한다든지 돈이 들어가는 내용이다. 또는 누가 쓰러져 입원했다거나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도 있다. 편지도 청구서 같은 공문이 대부분이다. 등기 우편은 대부분 내용 송달이 목적이므로 등기 우편이 왔다고 하면 가슴이 철렁한다. 세입자가 은행에서 전세 대출을 받았으니 전세 보증금을 세입자에게 주면 안 되고 대출은행에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 등이다. 내성이 약해진 탓도 있다. 젊었을 때는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았다. 워낙 주변에 벌어지고 있는 일에 관여도 많이 하고 해서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니어가 되고 나니 그럴 일이 많이 적어졌다. 그러다 보니 내성이 약해진 것 같다. 작은 일에도 심장이 떨리는 것이다. 분명히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일도 그전처럼 강하게 반발하지 않는다. “스트레스 받느니 차라리 내가 좀 손해 보면 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약간의 스트레스는 있는 게 좋다”는 얘기가 내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기 위해서 맞는 것 같다. ‘놀랄 일만 아니면 된다.’는 말은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산다는 얘기이다. 조용히 차분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으므로 이대로 좋고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이 들면 안정을 원하고 보수적으로 변한다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러니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자꾸 집으로 기어 들어간다. 새로운 환경에는 피곤해 하니 모임에도 안 나온다. 연애도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전에는 영화도 액션 영화나 호러 영화를 즐겼다. 남성들에게는 때리고 부수고 죽고 죽이는 영화가 대리 만족을 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달하고 따뜻한 감성의 영화가 좋다. 남성도 나이가 들면 남성호르몬이 줄어 중성화 된다는데 그 영향이 있는 모양이다. 내용도 모르고 영화관에 들어갔다가 초입부터 끔찍한 장면이 나오면 잘 못 들어 왔다는 후회가 앞선다. 놀랄 일이 많으면 심장이 쿵쿵 뛰고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정신 사납다. 영화 보면서 남모르게 눈물이 줄줄 나는 영화가 좋다. 확실히 그럴 때가 많아졌다. 이제는 흐르는 눈물을 숨기지도 않는다. 그게 정신 건강에 좋단다.
- 2017-11-15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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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세대 재미교포 여성운동가, 그레이스 김의 망부가(忘夫歌)
- 미주 한인 사회에서 지식인의 멘토로 불렸던 노부부가 있었다. 정신과 전문의로 UC데이비스 의과대학에서 35년간 교수로 근무했던 故 김익창 박사와, 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 25년간 교사로 일했던 그레이스 김(한국명 전경자·86)씨다. 부부는 평생 소외받는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힘썼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싸웠다. 53년을 함께하는 동안 그들은 최고의 동지이자 친구였으며 연인이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아내는 여전히 열심히, 행복하게 살고 있다. “You should keep going.” 당신은 계속 그렇게 살아 달라는 것이 남편의 바람이었다. 사랑스러운 사회운동가 “동호회에서 주최하는 클래식 음악회 준비로 정신이 없어요. 오후에는 신문사에 음악회 기사를 전달하러 가야 해요. 오늘도 너무 바쁘네요!” 그녀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친다. 3년 전, 애너하임의 한 노인병원에서 김익창 박사와 그레이스 김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김익창 박사는 파킨슨병으로 상당히 힘들어하면서도 아내와의 인터뷰를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당시 인터뷰 주제는 ‘부부’였는데 김 박사는 “부부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젓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남편은 나를 커뮤니티 액티비스트(사회운동가)라고 별명처럼 불렀어요. 조용하고 신중했던 그와 달리 나는 말도 많았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곤 했는데 남편은 그런 내 모습을 사랑해줬지요. 우리는 6·25전쟁을 눈앞에서 겪은 세대입니다. 모두가 못 배우고 가난한 시절에 그래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우리는 그것을 갚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소외받는 곳,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늘 관심을 두게 되었어요.” 1931년 중국 상해에서 나고 자란 김씨는 해방이 되던 해 부친의 고향이었던 평안북도로 돌아왔고, 남북으로 갈리게 되자 다시 38선을 넘어 왔다. 이 과정에서 막내 동생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때 거침없이 행동하는 것은 그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상해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은 임시정부에 돈을 보내며 독립운동을 도왔고, 주위에 고학을 하는 한국 유학생이 있으면 장학금을 내놓기도 했다. 어머니 역시 그 시대에 평양신학교를 나온 신여성으로서 이웃과 나누는 것을 평생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고. “여고 시절 내 꿈은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가서 슈바이처 박사와 함께 일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화여대 의대로 진학했지요. 그런데 입학한 그해 6·25전쟁이 터졌어요. 산속으로 피난을 갔다가 와 보니 집이며 모든 것이 폭격으로 사라져버렸더라고요. 너무 화가 나서 당장 군에 입대해 총 들고 싸우겠다고 고집을 부렸죠. 어린 아가씨가 얼마나 맹랑했겠어요. 그때 영락교회를 다녔는데 목사님이 하루는 보여줄 곳이 있다면서 저를 데리고 가신 곳이 있어요. 바로 고아원이었죠.” 폭격을 맞고 부서진 학교 건물에 임시로 마련된 고아원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밤낮으로 울부짖었고 아프고 굶주린 아이들을 돌봐줄 손길은 없었다. 그렇게 김씨는 여군 대신 고아원 선생님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김씨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재입학한다. “등록금을 댈 형편이 아니었어요. 서울대 사범대가 등록금도 싸기도 하고 모자라는 교사를 길러내기 위해 장학금도 많이 준다고 하니 좋았지요. 또 고아원 선생을 하면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도 알게 되었고요. 무엇보다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으니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요?” 서울대학교 캠퍼스에서 그녀는 남학생들이 데이트 신청이 쇄도할 만큼 인기가 있었지만 모두 퇴짜를 놓아 별명이 ‘NO’였을 정도로 콧대가 높았다고 한다. 그중 유일하게 ‘YES’를 한 것이 남편 김익창 박사의 오페라 데이트 신청이었다고. 생전 김익창 박사는 인터뷰 때마다 첫눈에 반할 정도로 ‘탁월한 미모의 소유자’였다고 아내를 향한 무한 애정을 드러내곤 했다. 1956년, 김익창 박사가 미국 유학을 떠난 이후 6년 동안, 두 사람은 장거리 연애를 시작한다. 그 사이 김씨는 숭의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후 거리를 배회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용산직업학교를 세워 불우한 형편의 아이들을 지도했다. “6년 동안 우리는 떨어져 있으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어요. 그때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편지로 주고받았는지 몰라요. 삶에 대한 가치관, 철학, 문학, 음악, 예술, 종교에 대한 생각을 나누면서 우리가 서로 얼마나 닮아 있는지 알게 되었죠. 그 시간 동안 다져진 신뢰는 남녀의 사랑 그 이상이었어요.” ‘Dear, Grace’ 1962년, 마침내 두 사람은 미국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김익창 박사가 샌프란시스코 마운트 자이언(Mt. Zion) 병원에서 인턴십을 하는 동안 두 아들 데이비드와 다니엘이 태어났고, 남편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병원 응급실에서 일해야 했다. 잠을 잊고 살아야 했던 고된 시절이었다. “대단한 정신력이 아니면 견딜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렇게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3년 만에 박사과정을 끝내더라고요. 레지던트를 마칠 무렵 남편이 내게 공부를 해보라고 제안했어요. 너무 기뻤죠. 내가 너무나 원하던 거였으니까요.” 김씨는 그 길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원에 진학, 1969년 상담학과 아동발달학으로 교육 석사학위를 받는다. 캘리포니아의 진취적인 교육 도시 데이비스에 정착하면서 부부는 본격적으로 소수민족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게 된다. 김익창 박사는 임상정신과 의사로서 평생 소수민족의 정신의학에 관심을 두었다. UC데이비스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문화가 다른 환자들에 대한 의료진들의 이해’를 강조하며 대학에 강좌를 만들고 끊임없이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다문화 정신의학 분야의 권위자로 자리 잡았고 그의 노력으로 현재 미국 정신의학협회에는 ‘화병’이 정식 병명으로 등록되어 있다. 김씨는 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언어와 문화 차이로 어려움을 겪는 소수인종 학부모들과 학교를 잇는 가교 역할을 자청했다. 특히 인종차별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어떤 차별도 받지 않도록 앞장섰다. 특히 1980년부터 시작했던 미주 한국일보의 질문과 응답 형식의 칼럼 ‘Dear, Grace (그레이스에게)’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어느 날 신문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부모들이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려움이 많다고요. 흔쾌히 하겠다고 했죠. 궁금한 것을 편지로 보내면 답을 주겠다고 했는데… 세상에, 편지가 어마어마하게 와서 너무 놀랐어요. 궁금한 것은 많은데 어디에 물을 곳이 없었던 거예요. 한국말을 하는 선생님이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부모와 자녀 간의 갈등, 학교와의 마찰, 인종문제를 비롯해 마약, 섹스, 가출 문제까지. 그레이스 김은 한인 학부모와 청소년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고 칼럼은 1990년까지 계속됐다. 나눔, 그 위대한 유산 이들 부부에 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부’에 대한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입양아 단체, 아시안 청소년 장학재단 등에 적지 않은 기부를 하고, 무료 진료와 상담 등의 봉사활동을 해왔던 부부가 은퇴하면서 제대로 일을 치른 것이다. 2006년 김익창 박사가 35년간 몸담았던 UC데이비스 대학에서 나왔을 때, 이들은 캘리포니아 실비치의 한 은퇴촌에 작은 집을 마련한 뒤 나머지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 20여 개 단체에 전달한 기부금은 적게는 5만 달러, 많게는 25만 달러에 이르렀다. 모두 익명으로 한 기부였다. 이 놀라운 기부는 당시 UC데이비스대학에서 이들이 내놓은 기부금 25만 달러로 ‘다문화정신의학센터’를 만들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사실 그만한 목돈이 생긴 데는 숨은 사연이 있어요(웃음). 젊은 시절 내가 하도 많이 기부를 하고 다니니까 남편이 매달 월급의 반만 받고 나머지는 은퇴연금으로 저축을 하자고 한 거예요. 은퇴할 때 그렇게 돈이 쌓인 줄 몰랐어요. 평소 돕고 싶었던 단체 리스트를 적어 내려가는데 얼마나 신이 나던지. 남편과 아주 펑펑 잘 썼어요!” 고마운 것은 부모의 결정을 기쁘게 받아들여준 두 아들이었다. “그때 아이들이 한 말이 잊히지 않아요. 돈이 필요하면 지금 이야기하라고 했죠. 두 아이 모두 자신들을 키워준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다며 원하는 곳에 다 쓰라고 하더라고요. 아, 우리가 아이들을 잘 키웠구나. 갑절로 행복해지더라고요. 두 아들 내외 역시 어려운 곳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기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아요.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2009년 데이비드 김씨가 지난 오바마 정부의 교통부 차관보에 임명됐을 때, 그가 남긴 말이 있다. 부모님은 늘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마음만 있다면 언제나 남을 도울 힘이 있다고요.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또 다른 방식으로 도울 수 있다는 거죠. 바로 그 나눔의 정신이 우리 가족을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고개 들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아시아인은 돈을 많이 벌어도 미국 주류 사회에 들어가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님의 삶은 제 미래를 위한 최고의 투자였습니다. 부모님의 기부가 저를 성공적으로 키운 셈입니다. 상해에서 독립운동가와 유학생을 돕던 부모에게서 김씨에게로, 이것이 다시 김씨의 아들들에게로 이어진, 참으로 위대한 유산이다. To my forever love… ‘김 여사의 해피 에너지’는 은퇴촌에서도 빛을 발했다. 김씨는 입주한 은퇴촌 실비치 레저월드의 한인회 회장이 되어 커뮤니티 간 화합에 앞장섰다. 한인 노인들을 위해 각종 세미나와 교양 프로그램을 속속 만들어내는가 하면 지역구 선거에 한인 후보자가 나오면 발벗고 나서서 선거운동을 도왔다. 물론 그 뒤에서 묵묵히 김씨를 돕는 사람은 남편 김익창 박사였다. 이 무렵 김익창 박사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면서 부부에게는 예상치 못한 슬픔이 찾아왔지만 이 또한 차분히 받아들였다. “한동안 멍했지요. 왜 이런 병에 걸리게 됐을까. 젊었을 때 잠을 너무 못 자고 힘들어서였을까…. 하지만 남편은 곧 받아들이고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어요. 파킨슨병은 관리만 잘하면 당장 어떻게 되는 병이 아니라면서요. 그렇게 8년을 투병했지요. 그 사이 자신의 인생을 덤덤히 돌아보며 두 권의 자서전도 집필했고요.” 병세가 악화되어 노인병원에 입원하고 2년 동안, 부부는 다시 연애를 시작하는 기분이었다고. 아내는 매일 아침 예쁘게 화장을 하고 직접 구운 쿠키를 만들어 남편을 만나러 갔고, 남편도 눈을 뜨면 아내를 기다렸다. 전립선암이 발병했을 때는 상당히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김 박사는 항상 웃는 얼굴로 아내를 맞아주었다. 병원 스태프에게 ‘She is my forever love’라고 소개해 사람들을 웃게 만들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편지 한 장을 건네더라고요. ‘결혼해줘서 고맙고 행복했다. 아파서 미안했고 먼저 가서 또 미안하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까지처럼 계속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슬픈 삶을 살까봐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어요. 끝에는 늘 하던 말, ‘my forever love’라고 적어놓았더군요. 마지막 러브레터였어요(웃음).” 김익창 박사가 떠난 후, 그녀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며칠을 먹지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문득 자신이 이렇게 될까봐 걱정하며 병실에서 간신히 손을 움직여 편지를 썼을 남편이 떠올랐다. “아니다. 남편이 가장 좋아했던 내 모습으로 끝까지 열심히, 즐겁게 살자. 그렇게 결심했어요. 나는 지금 아주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은퇴촌에서 음악회도 열고 노래도 부르고 세미나도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어요. 그러다 남편이 너무 그리울 때는 조용히 말합니다. ‘하나님 나는 준비되었으니 이제 데려가셔도 됩니다. 루크를 만나게 해주세요…’ 라고요(웃음).” 오랜 대화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열심히 포즈를 취해주는 그녀의 미소가 캘리포니아 햇살만큼이나 화사하다. 누구에게나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하는 이런 모습을 남편은 사랑했으리라. “Good to see you!” 쿨하게 인사를 남기며 보무당당히 사라지는 ‘유쾌한 그레이스씨’. 그녀와의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
- 2017-11-13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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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위사랑이 대단했던 장모님
- 아내와는 연애결혼을 했다. 서로 결혼을 약속하고 장차 장인장모가 될 어른들에게 인사 가기로 했다. 서울근교라 하지만 당시만 해도 시외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한 시간이나 가야하는 거리였다. 시골동네라 결혼 안한 남녀가 같이 다니는 것이 금기시 되었던 시절이다. 혼자 찾아가야 했다. 아내를 통해 어디서 무슨 버스를 타고 어디쯤 내려 어떤 집으로 찾아오라는 약도 까지는 받았다. 처음 방문인지라 잔뜩 긴장하고 어색한 양복에 백화수복 정종을 한 병 들고 갔다. 동네사람들이 밭에서 일하면서 저 총각이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지 눈 여겨 보고 있었다. 나는 동네사람들의 시선은 아예 모르고 약도를 몇 번 드려다 보면서 장차 처갓집이 될 집을 찾는데 열중했다. 시집갈 과년한 처녀가 있는 집에 총각행색의 남자가 찾아가니 누구네 집 곧 혼사가 있을 모양이라는 소문이 금방 동네에 돌 것은 뻔했다. 장모님이 서둘러서 소문을 진정시키기 위해 서울조카가 다녀갔다고 거짓말을 했다. 아직 부모님들이 만나서 정식 약혼을 하지 않았기에 혹 결혼이 성사되지 않으면 딸의 혼사 길이 막힌다고 애써 소문을 차단하려고 했다. 동네사람들이야 새신랑감이 다녀가는 것 같다는 의심은 들었지만 당사자가 아니라니 그렇게 믿는 척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양가 부모님이 만나서 혼인하기로 결정하기 전까지는 예비 사위의 출입을 금지 시켰다. 물론 밖에서는 아내와 자유롭게 데이트를 즐겼지만 처갓집 동네에는 얼씬도 할 수 없었다. 결혼하고 장모님은 아내가 외동딸이기에 사위인 나에게 신경을 많이 썼다. 사위 몸보신 해준다고 개를 한 마리 잡아서 통째로 들고 왔다. 혼자서 한 달간 개고기를 먹는데 큰 고역이었다. 한번은 처갓집에 갔는데 사위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자 온 동네를 뒤져서 어느 집에서 박카스 한 병을 구해 와서 나보고 먹으라고 주기도 했다 또 다른 사건은 아내의 외할머니 즉 장모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일이다.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는 교통이 불편한 곳이었고 자가용차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문상을 갔더니 우리사위 차 태워 보내야 한다고 문상객들에게 자가용차를 갖고 온 사람을 찾아다녔다. 장모님 정성에 고맙기도 했지만 자가용 없는 사위 체면에 참 창피하기도 했다. 장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장모님 사랑이 하나하나 떠오르면서 슬픔이 복 받혀 올라왔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나왔다. 돌아가신 장모님 손을 잡고 한참을 울었다. 세상에 사위가 저렇게 슬피 울다니! 문상 온 동네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모자식 간은 하늘도 어쩌지 못하는 천륜이 있다. 자식으로서 또는 부모로서 해야 할 도리가 있지만 그보다 앞서 사랑과 존경심이 있어야 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무한한 사랑과 존경심은 손익계산서가 필요 없이 그냥 주고 느껴야 한다. 자식을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매질하여 죽이기도 하고 부모를 모시기 힘들다고 버리기도 했다는 신문방송을 보면서 사랑과 존경심이 메말라 가고 있음을 한탄 한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부모기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베풀어준 사랑에 목 놓아 울어야 한다.
- 2017-10-2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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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를 더더욱 사랑하리라
- “여보, 이제부터라도 당신이 나에게 훨씬 더 잘해야겠어요.” “응?” “왜냐하면 내가 당신보다 다섯 살이 어리잖아요? 당신이 나보다 먼저 치매를 앓을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말이에요.” “내가 지금도 잘해주고 있지 않소!?” “그렇긴 하지만 당신이 내게 더 잘해주면 속 깊은 사랑과 추억이 켜켜이 쌓이게 되겠지요? 그러다가 만약 당신이 치매에 걸리면 내가 당신에 대한 사랑과 소중한 추억을 기억하면서 당신을 더 잘 돌볼 수 있지 않겠어요?” 아내가 어느 날 불쑥 건넨 말이다. 결혼 40주년이 다가오는 우리 부부에게 그동안 미운 정 고운 정이 그득할 터인데 아내는 고운 정은 잊어버리고 미운 정만 남아 있는 걸까? 아내의 마음속에 태산같이 버티고 있을 미운 정을 해소하고 고운 정만 쌓이도록 해줄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일까? 치매 걸린 필자를 돌봐주는 데 필요한 질 좋은 추억들은 또 얼마나 되어야 하는 걸까? 아내의 말에 머릿속이 갑자기 복잡해졌다. 그동안 이 나이 되도록 치매는 남의 일로만 치부하고 살던 우리 부부 아닌가. 아내의 제안을 받은 순간 번쩍 정신이 들면서 ‘나도 예비 치매환자일 수 있다?’는 깨우침과 함께 마음이 아득해왔다. 우리 부부는 연애결혼을 해서 젊은 날은 제법 깊은 연정으로 살았다. 전쟁 치르듯 자식들을 키울 때는 여유 없이 살기도 했지만 거친 세월을 잘 이겨왔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새 노인이 되어 있다. 고교 시절 국어선생님은 “부부가 늙으면 습관과 연민으로 산다”고 하셨다. 오래 같이 산 부부는 습관이라는 관성으로 살면서 서로를 측은히 여기는 인간애, 자비심이 버팀목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습관과 연민의 무게만으로 치매 걸린 상대가 감당이 될까? 그보다 더 임팩트 있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내는 알고 있는 것이다. 언론보도 중 필자가 유난히 관심이 많은 분야는 ‘암’과 ‘치매’의 정복 소식이다. 암 정복 관련 기사가 열 개라면 치매 관련 기사는 한둘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미스터리한 질환인 것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필자가 어느 날 치매에 덜컥 걸려 아내도 몰라보는 생소한 존재가 될지라도 그런 필자를 돌봐주겠다는 아내의 따스한 제안은 그 어떤 치매 정복 소식보다 반갑다. 치매의 40~50%는 유전과 상관이 있다는데 필자의 친가, 외가 모두 치매를 앓다 가신 분은 없다. 절반은 안심이지만 그렇다고 치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아내가 사랑과 좋은 추억들을 양분 삼아 필자를 돌볼 수 있도록 잘해주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아직 가늠이 되질 않는다. 하지만 정신이 온전할 때 이토록 착한 아내를 잘 대하고 나아가 더 잘 섬겨야겠다는 생각은 분명하다. 돌봄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치매 걸려도 돌봐주겠다는 착한 아내에게 감동을 주는 일상을 안겨주겠다는 것이다. 아내의 이런 마음을 알아차린 이상 필자도 아내가 치매에 걸린다면 잘 돌봐주리라. 무엇보다 어설픈 치매 예방을 하는 것보다 평소에 서로를 잘 섬겨, 일상에 감동을 심고 또 심는 착하고 건강한 아내와 남편이 되기만 한다면 일석이조, 황혼의 사랑도 깊어지고 치매도 극복하지 않겠는가!
- 2017-10-19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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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도 길었던 긴 추석 연휴동안
- 올해 추석 연휴는 오래전부터 관심의 초점이었다. 몇십 년 만에 나타난 개기일식이라도 되는 양 소문은 무성했고 언론은 떠들썩했다. 온갖 이유를 붙여 중간에 낀 2일을 휴일로 지정해야 한다는 압력이 줄을 이었고 결국 그 소망은 실현되었다. 결혼을 앞둔 신부들은 무려 열흘이나 되는 기나긴 추석 명절을 시댁에서 보낼 수는 없다며 결혼을 연기했고, 예측대로 공항은 역대 최대의 여행객을 감당해야만 했다. 늘 틈만 나면 함께 여행할 것을 제안하던 딸애가 이번에는 아무 말이 없다. 그러면 그렇지! 드디어 연애가 시작된 것이다. 빨리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라고 압력을 가해왔지만, 막상 여행 제안이 없으니 왠지 섭섭하다. 그래서 이번엔 본의 아니게 역대급 긴 휴일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집에만 박혀 있게 되었다. 짧은 휴가에도 어딘가를 가야 직성이 풀리곤 했는데 이게 뭐람! 기나긴 날을 독수공방이라니. 원래 집에 있는 성격이 못되어 틈틈이 외출을 감행하며 모처럼 한가해진 도심을 쏘다녔다. 연일 북한의 핵무기 협박에도 기어이 100만을 넘긴 해외 여행객만 보면 이 나라의 경제가 매우 흥겨운 듯이 보였다. 그러나 많은 자영업자는 추석 당일에도 한 푼이나마 벌어보려고 문을 열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동네 시장 상인들은 추석 경기가 이럴 수는 없다며 우울한 얼굴들이었다. 일해야 그날그날 밥을 먹는 일용직 노동자들은 모처럼 휴가를 얻었지만, 돈이 없으니 남는 시간이 쓸모가 없다. 버스 기사와 지하철 기관사들은 연휴와 아무 상관이 없다. 평일이라면 무료급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독거노인들도 긴 휴가가 오히려 난처하다. 그래서 그런지 도시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다니는 것도 이내 싫증이 난다. 그렇지! 우리 삶의 실상이 잠시 해외여행으로 눈 감는다고 감춰지지 않는다. 남은 기간은 편하게 거실에 앉아 TV와 친구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그곳도 돌아가는 상황이 썩 좋지는 않은 모양이다. KBS, MBC 노동조합의 파업으로 대부분 재방송으로 땜빵에 여념이 없었다. 예능은 거의 ‘먹방’으로 때우고 있었고 유명인들이 해외에 나가 하루종일 대여섯 끼를 먹는 엽기적인 프로까지 전파를 탄다. 뭔가 정상이 아니다. 어쩌면 모두 암울한 현실을 잊고자 도피하는 것은 아닐지. 결국, 역시 재탕이나마 영화라도 보는 수밖에 없다. 킬링타임용 영화가 대다수였지만 개중에 관심 가는 영화도 있다. 철 지난 지 한참 되는 낡은 영화인데 왠지 보고 싶은 영화가 눈에 띈다. 톨스토이 원작의 다. 지금 시국이 그래서인지 아니면 그나마 제일 품위가 넘쳐서인지 모르겠으나 무려 밤 두 시에 끝나는 긴 시간을 졸지 않고 연속 5일간 버티며 끝까지 보아냈다. 대학 때 책으로 읽다가 몹시 지루해했었고 그나마 영화로 본 기억이 선명한데 근 40년 만에 다시 보니 새롭게 읽힌다. 그동안 머릿속에는 영화의 주인공이 안드레이로 각인되어 있었는데 다시 보니 톨스토이가 사랑한 인물은 의외로 피에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는 보이지 않던 미천한 농민으로 포로 생활 시 피에르에게 영향을 미친 플라톤이 바로 작가를 대변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왔다. 긴 추석 연휴의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그동안 보지 못하던 여러 가지를 느낀 것은 뜻하지 않은 수확이었다. 나이 탓일까? 안드레이보다 피에르를 다시 보게 된 것도 기나긴 휴일에 얻은 작은 기쁨이었다.
- 2017-10-14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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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인의 애인 ‘주모’를 만나다, 부산포 주모 이행자
- 아침 6시 40분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덜컹덜컹 몸이 흔들린다. 바깥 풍경은 오랜만에 선명히 잘도 보인다. 세련되지 않지만 뭔가 여유롭고 따뜻한 느낌이랄까? 한국 예술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부산포 주모(酒母) 이행자(李幸子·71)씨를 만나러 가는 길. 옛 추억으로 젖어들기에 앞서 느릿느릿 기차 여행이 새삼 낭만적이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들어간 부산포. 작은 낙서, 그림 하나, 스치는 공기까지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다. 부산의 마지막 주모를 만나다 부산 지하철 1호선 중앙역에서 용두산 공원 방향으로 걸어가는 길은 깨끗하고 단정하다. 신식으로 잘 닦인 거리. 오래된 주점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오른쪽으로 난 작은 골목에 釜山浦(부산포)라고 쓰인 간판이 보인다. 이곳에 우리나라 예술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주모 이행자씨가 있다. 깡마른 체구에 걸걸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행자씨는 중앙동 바로 옆 동광동에서만 42년째 주모로 살고 있다. 혹자는 이행자씨를 부산의 마지막 주모라고 말한다. 남들 다 떠나갈 때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옛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주막은 현재 부산포 하나다. 의미를 모르면 동네 흔하디흔한 주막, 조금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값진 역사와 예술가의 정이 흐르는 곳, 부산포다. 주막의 분위기는 주모가 잡는다 부산의 중앙동과 남포동 일대는 10여 년 전만 해도 부산의 굵직한 화랑들과 함께 인쇄 골목이 형성돼 있어 문인과 화가들이 넘쳐나는 이른바 예술의 거리였다. 지금은 해운대 일대로 예술 관련 사업이 옮겨가 작가들의 발길이 뜸해진 지 오래다. 외딴섬처럼 덩그러니 남겨진 부산포지만 그 안에는 옛 예술가들의 체취와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낙서 하나하나, 벽에 펜으로 휘갈긴 듯 그린 그림 속 인물은 한국 문단과 화단을 주름잡던 일류 작가군단이다. 매일 문지방이 닳도록 부산포를 오간 문화 예술인만 수백은 될 것 같다. 부산포 주모 이행자씨가 이토록 작가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내 고집대로 한 거지 뭐. (화장) 진하게 하고 나와서 하하 호호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그러니까 손님은 없어. 옛날이야 줄 섰지만. 내 성질이 개떡 같아. 손님들도 내쫓아요. 욕하는 사람, 슬리퍼 신고 오는 사람 다 쫓아내. 슬리퍼는 점심에 밥 먹을 때는 괜찮은데 저녁엔 옛날 어르신들 계시고 이라니까. 분위기도 내가 만들어주는 거지. 그냥 손님들이 만드는 게 아니야. 그래서 뺨때기도 때리고 젊을 때는 말 못해. 마대자루 들고 패지, 물바가지로 퍼붓지. 소문이 났어. 좋게 날 리가 없지.” 베테랑 주모의 애틋한 고객 관리(?)는 바로 어르신들을 제대로 알아보고 보살피는 게 전부였다. 이행자씨가 말하는 그 어르신들이란 1900~1920년생 한국 예술계 전설적 인물이 줄을 잇는다. 독립운동가이자 예술인 먼구름 한형석을 비롯해 오제봉, 김정한, 김종식, 오영재, 천재동, 공초 오상순, 하인두, 시인 구상까지 평생을 살아도 만나 뵙지 못할 귀한 인물들을 주모로서 극진히 맞이했고 술동무로 가시는 날까지 정성을 다해 모셨다. 손님을 가려서 받게 된 것도 문화계 원로 선생님을 모시는 일종의 방법이었다. “손님들이 이상한 행동 하는 꼴을 내가 못 봐. 들어왔는데 뭔가 느낌 이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장사 안 한다고 하고, 소주 보여도 소주 없다고 하고. 보면 알지. 매너가 엉망인 사람이 보인다고. 술 먹고 변할 사람들도 보이고.” 그런데 이행자씨에게는 철칙 하나가 있다. 절대 욕은 안 한다. “내는 고함은 지르는데 욕은 하지 않아. 근데 누가 나더러 욕쟁이 할머니래. 와? 내가 욕하는 거 봤나. 내가 욕하면 쫓아내는데. 욕하는 사람이 나는 제일로 혐오스럽다. 나도 욕할 줄 알거든. 그런데 안 할 뿐이야.”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 이행자씨는 서른 초반이던 1970년대 말 ‘대구집’으로 문을 열었다. ‘골목집’이란 이름을 지나 1994년 지금의 부산포로 주막 간판을 바꿨지만 주모도 그대로 추억도 그대로다. 그렇다고 마냥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3년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몸에 이상신호가 왔다.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믿고 지냈던 사람에게 보증을 서줬다가 건물이고 가게고 순식간에… 30여 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것을 한 번에 다 날렸으니 난 어땠겠어.” 며칠씩 잠도 안 자고 하루 종일 담배만 3갑씩 피웠다. “1세대 선생님들은 동동주하고 맥주하고 타서 ‘동맥’이라고 하시면서 섞어 드셨다 아이가. 그게 맛이 괜찮아. 30~40대부터 그렇게 술을 먹었는데 일 터지고 한 달 내내 그렇게 마셨어. 돈이고 뭐고 다 귀찮고. 술도 안 받는데 계속 그렇게 먹었어. 결국 몸이 고장 난 기지.”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한 달도 안 돼 치아가 빠지기 시작했다. 위암 초기였다. 그때 이후로 술은 끊었지만 담배는 손에서 떼지 못했다. 그렇게 쓰러진 주모 이행자를 위해 부산 예술인들을 주축으로 대단한 일이 벌어졌다. 판화가 주정이가 주축이 돼 주모 이행자씨를 돕는 특별전을 펼친 것. 그게 바로 ‘누부야 누부야 그냥 갈 수 없잖아展’(2009. 7. 14~8. 31)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른들을 내가 잘 모셨어. 부산포를 살려야 한다 그라셔서 살려주신 거지. 대학에 있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 전업 작가들이시고. 정말 십시일반 해서 도와주셨어.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 하시던 이두식 선생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작품을 내주셨고.” 이 전시회를 통해서 3000만원이 훨씬 넘는 자금이 모였다. 그래서 현재의 부산포 자리로 옮겨 명맥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다. 새로운 곳으로 이전해 다시 활기차게 생활을 하지만 몸은 성한 곳이 없다. 예전에는 일하는 사람을 뒀지만 지금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주모 이행자씨의 손을 거친다. 이렇게 한 것이 6년째. 손가락에는 류마티스가 왔고 복숭아뼈 양쪽에 물이 차 추석쯤 병원에 가 치료를 받을 생각이다. 위암 정기검진을 받아야 할 시기가 지났는데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나는 지금 병원에 가면 눕혀서 못 나와. 병원 가면 문 닫아야 해. 그래서 안 간다 아이가. 한 1년 넘었어. 병원에서 전화 오면 ‘괜찮소. 나 아직 빨딱거리고 잘 돌아다니거든’ 이런다(웃음)! 약만 먹고 안 간다.” 젊었을 때부터 그렇게 좋아하던 산도 다리가 좋지 않아 갈 수 없다. 지리산이고 설악산이고 선생님들과 많이 오르고 종주도 했다. “그 대신에 용두산 공원은 좀 걸어. 시간 있으면 올라가. 이제 아픈 것도 모르겠어. 이러다 병도 친구 삼아서 함께 같이 있다가 같이 죽자 한다(웃음).” 부산포 주모, 문화계 원로와 어깨를 나란히 “그림 작품 같은 거 잘 보시겠어요?” 이 질문에 피식 웃으면서 짧게 대답한다. “살다 보면 눈에 보이지 뭐. 세월이 40년인데 좀 안 보이겠어?” 문화계 원로에 대한 얘기를 듣다 보니 주막 주모가 아니라 화랑 관장님과의 대화라 해도 믿을 것 같다. 이행자씨도 그런 얘기를 여러 사람에게 들었다. 주모가 아니라고. “많이 배우지. 좋은 얘기를 많이 듣고 해서 가끔 보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입으로만 떠드는 사람들도 보여. 자기 스스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 시인들한테도 이게 시냐? 편지 썼냐? 그런다(웃음).” 문화계 인사는 물론 방송국, 신문사 등 언론인, 대학 총장, 의사 등등이 주모 이행자씨의 고객이자 친구, 모시는 선생님들이었다. “여행도 그런 분들이랑 많이 다녔어. 1993년도에 러시아에 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러시아 가는 게 쉽지 않을 때잖아. 근데도 갔었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레 을 봤는데 정말 너무 잘 봤어. 진짜 값진 인생 살았다. 돈 주고도 못 사는 삶을 살았어. 결혼? 안 해도 돼. 외로워? 뭣 때문에 외롭노?” 결국 이 특별한 주모는 선생님들의 사랑에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고 일평생 결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안 갔어. 그때 당시만 해도 희귀동물 같은 사람이었어. 드레스를 입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 해본 적이 없어.” 행여나 프러포즈를 해오고 연애하자는 자가 있으면 이행자씨한테 걷어차이기 일쑤였다. “내가 깡패가 됐잖아. 우리 집에 옛날에 왔던 손님들, 어르신들 빼고 내 발로 팔꿈치로 안 차여본 사람이 없다. 어른들 말고는 다 맞았을 거다. 하도 집적거리니까.” 이행자씨는 어떤 누구를 만나는 것보다 매일 찾아오는 어르신과 대화하고 이야기 듣는 그 시간을 기다리고 사랑했다.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대가라는 사람들이랑 대화라도 하려면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신경 써야겠어. 아닌데도 맞다고 해줘야 하고 달래줘야지. 문인들이 아주 잘 삐진다. 붙어 싸우다 술 먹으면 또 화해하고 그랬다.” 당시에는 거의 가족이었다. 옛날 1세대 어르신들이 한창 부산포에 드나들 때는 젊은 사람들은 들어와 앉을 자리도 없었다. “그 시절에는 흥이 나서 놀다 누군가 지명하면 무조건 노래를 불러야 했어. 근데 절대로 젓가락 숟가락 못 두드리게 했다. 여기는 그냥 막걸리집 아니라고 절대 못하게 했다. 끝나면 박수치고 흥 나면 소리 안 나게 박수쳤지.” 이렇게 부산포 안을 가득 채우는 작가들이 많았지만 지금처럼 정확하게 돈을 받을 수 없을 때였다. 가난한 시절 라면값도 없던 분들이 많았다. “대학교수도 있었지만 작품 활동만 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그래서 그때부터 감자 주고 우거지 주고 그럼 술 마시고 잡숫고 그냥 가셨다. 어른들이라 외상값 장부도 없었다.” 그냥 술만 팔면 될 텐데 스스로 예술가의 가치를 흠뻑 느꼈기에 정성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르다고 했잖아. 요즘은 택도 없다(웃음). 주는 만큼 받아야지.” 주막이니까 주모로 불러야지 지금도 주모로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모로 불리는 건 싫다. 누군가 무심코 그렇게 부르면 “내가 느그 이모도 아닌데 왜 그리 부르노!” 하며 부산 사투리가 강하게 터져 나온다. 주모라고 불리는 게 그럼 왜 좋을까? “옛날에 동동주 팔고 그러던 곳을 주막이라고 했잖아? 어르신들이 있었던 곳. 그러니까 주모지. 원래 여기 세 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거 하나 남았어. 강나루는 시인 마누라가 하는 곳이었는데 거기도 어려울 때 시인들이 시화전도 열어주고 했던 곳이야.” 그렇다고 모두가 주모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부산 사진의 역사라고 불리는 김탁돈(동아대 전 신문방송학과 교수) 정도는 돼야 부를 수 있단다. “내가 올해 일흔두 살이니까 한 10년 더 살면 될까?” 갑작스러웠다. 아직도 젊고 생생한 주모의 입에서 그리움이 느껴졌다. “어른들 참 많이 모셨지. 부산 세관장, TBC 사장, 대학 총장, 회장. 안 온 사람이 없어. 근데 이제 다 돌아가셨다. 나도 선생님들 따라갈 때가 얼마 남지 않았네. 지금도 선생님들 모여서 동맥 한잔씩들 하시겠지?” 부산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물려주고 싶은데 아직 물색 중이라고 했다. 술 팔고 밥 팔면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이 자리를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정말 부산포를 다 접고 나면 뭘 하고 싶은지 물었다. “옛날에 건물 있을 때는 시골 들어가 살려고 했는데 그건 안 되겠고. 슬슬 산책하고 살 수 있을까 몰라. 성질이 급해서 뭘 할는지. 뭐 일하면서 살겠지.”
- 2017-10-12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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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이 있는 길]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64학번 동기생의 청춘 스케치
- “거기 선배님들, 저 배고픈데 밥 좀 사주세요!”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64학번 구대열과 이인재가 뒤를 돌아봤다. 두 사람은 학교 정문을 나와 미라보다리를 막 벗어나려던 차였다. “늦게 일어났는데 하숙집 아줌마가 반찬이고 뭐고 치워버려서 밥도 못 먹고 나왔어요. 네?” 처음 만난 여자가 후배 행세를 한다. 난감한 두 남자. 그런데 대답을 듣기도 전에 행동에 들어가는 여자.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팔짱을 꽉 끼고는 목적 달성(?)을 위해 앞으로 전진한다. 이래도 되는 걸까? 에라 모르겠다. 가자, 진아춘(進雅春)으로! 학림에서 만나자더니 진아춘으로 직행하다 혜화동(서울시 종로구)에서 낭만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64학번 동기인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와 이인재 동보항공 회장과 함께 길을 나섰다. 혜화동 일대는 1946년부터 1975년까지 마로니에공원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의 본관과 문리대, 법대 등이 있었던 대학 캠퍼스였다. 이후 서울대학교가 관악 캠퍼스로 옮겨가면서 서울대 혜화동 캠퍼스 시대는 막을 내렸다. 사라진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문리대학이다. 우리 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전설 속의 서울대학교 문리대 출신들과의 데이트라서 그런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첫 번째 만남 장소였던 학림다방 의자에 엉덩이가 닿기도 전에 “옛날 우리 식대로 하자”며 중화요리집인 진아춘으로 향한다. 진아춘에 들어서 앉자마자 시키는 것은 군만두와 배갈. 추억의 음식이라며 그때 느낌을 재연하는 것이란다. 구대열 옛날에 학생이 중국집에 들어온다는 것은 좀 과한 거였어. 겨울에 차가운 도시락 들고 진아춘에 가서 100원인가 주면 뜨끈한 국물을 줬잖아. 거기에 밥 말아 먹고 했지. 성북동 근처에서 하숙을 했던 이인재 회장은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던 구 교수는 그나마 형편이 나은 학생이었다고 입을 열었다. 이인재 그때 1인당 GDP가 100달러 안팎이었거든. 도시락 가지고 와서 데워 먹은 사람은 형편이 나은 사람이었어요. 나는 하숙집으로 밥 먹으러 다녔다고. 주문을 하면 딱 배갈이랑 군만두였지. 옛 진아춘은 지금보다 많이 작았다. 방과 방 사이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놓고 하나의 전구로 빛을 나눠 쓰며 전기를 아끼던 시절이었다. 개구진 친구 한 녀석은 남자와 여자가 한 방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구경을 해보겠다며 틈 사이로 고개를 들어올리기도 했다. 메뉴판도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 오로지 군만두 아니면 자장면을 시켜 먹던 시절 메뉴판에서 그나마 특별한 요리는 탕수육이었다. 이인재 우리 마누라하고 연애할 때 어쩌다 와서 하나 시키는 게 탕수육이었어요. 술은 한 10병은 더 마실 수 있었지만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진아춘은 당시 서울대생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중식당이다. 송형국 사장은 춥고 배고픈 학생들에게 매번 아량을 베푸는 것이 일이었다. 외상도 많았다. 돈 없는 학생들이 뭘 좀 먹겠다며 신분증이며 시계며 열심히 맡겼다. 1996년, 결국 주인을 찾지 못한 시계를 모아 서울대학교 기록관에 기증했다. 지금까지 서울대와의 인연 때문일까. 군만두를 먹고 지불한 돈은 서울대학병원 암센터로 기부된다. 그 시절 시위는 학점 없는 교양과목 당시 서울대학 문리대는 거의 모든 시위의 발원지였다. 64학번과 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은 바로 한일협정 반대 시위였다. 구대열 우리가 입학하고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초년병에다가 시골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서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몰랐어요. 이인재 그 당시의 ‘시위’는 교양과목 같은 것이었어요. 서울대나 고려대, 연세대도 마찬가지고. 다들 거리로 나갔어요. 근데 학점은 없었죠. 출발할 때는 3, 4학년들이 맨 앞에 서서 갔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제일 앞장서서 걷더라고요. 다들 어디 가고 없었어요(웃음). 경찰서로 끌려가 곤봉으로 얻어맞기도 했어요. 척추가 원래부터 안 좋았는데 그 후 시위를 위해 길거리 나가는 것을 자제했습니다. 서울법대 학장 출신이던 유기천 총장 퇴진운동도 문리대학에서 크게 있었다. 구대열 그때는 정치 문제로 시위를 한 게 아니고 그 ‘쌍권총 총장’이라고 유기천 총장 있잖아. 군 정부에서 올려놓은 사람 물러나라고 그땐 그랬지. 1, 2학년 때는 한일협정 반대했고 그다음엔 총장…. 자유와 낭만의 이름으로 남다 사라진 지 꽤 오래된 그 이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세상 많은 학교의 학부와 학과가 생겨나고 사라졌지만 서울대학교의 문리대학만큼만은 아련한 향수 속에 회자된다. 이유는 무엇일까? 구대열 문리대학에는 각 과마다 학생이 10명에서 20명이었어요. 이곳이 좋았던 게 학과 개념이 거의 없었어요. 듣고 싶은 과목은 다 들었어요. 내가 2학년인데 4학년 강의를 들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고 다른 과 수업도 마찬가지였고 문리대학 자체가 전인교육장이었던 거죠. 인격체를 만드는 것이란 자부심이 강했어요. 대신 학점이 형편없었어(웃음). 이인재 머리는 좋은데 가난한 학생들이 모인 곳이 문리대였어요. 먼 길을 돌아서 우리처럼 부산에서 광주에서 많이들 몰려들어 왔어요. 전국에서 별놈들이 다 왔는데 이과와 문과가 갈리지 않아서 그런지 문리대 학생들이 특별한 면이 있었어요. 구대열 학교 정문 미라보다리 앞에서 들어오는 친구들한테 100원만 달라고 해서 300원, 400원 모이면 밥 먹으러 가는 친구도 있었다니까.
- 2017-10-04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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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꿈꾸는 소녀 양수경, 인생 2막을 다시 가수로 데뷔
- 제목만 말해도 그 시대의 풍경이 떠오르는 노래들이 있다.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당신은 어디 있나요’ 등등 발표될 때마다 가요 차트를 점령하며 시대의 유행가로 자리매김한 그 노래들. 특유의 여린 목소리로 그 시절의 애절한 감성을 노래했던 양수경(52)이 무려 27년 만에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긴 세월을 넘어 그대로 도착한 듯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녀는 여전히 꿈을 꾸는 소녀와 삶의 부침을 겪고 거듭난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을 함께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철두철미한 가수였다. 그녀가 인생 2막을 열면서 발견한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가수 양수경의 귀환은 요즘 한창 일어나고 있는 ‘8090’ 가수들의 복귀 붐 속에서도 특별한 느낌을 준다. 작년부터 여러 음악 방송 프로그램에서 무대를 가진 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단독 콘서트를 27년 만에 연 것이다.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었음이 짐작된다. 후회 없이 할 수 있는 일, 답은 노래였다 “준비하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몇 번이나 들었어요. 추억 속에 있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이들 엄마이기에 나만 생각할 수는 없었어요. 사업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어요. ‘내가 잘하는 일이 뭘까’, ‘눈감는 날까지 후회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를 무지 많이 고민했죠. 답은 노래였어요.” 양수경은 공연을 앞두고 2014년 일기를 봤다. 공연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써놓은 자신의 글이었다. 그 막연했던 희망이 3년 정도 지나 이제야 이뤄진 셈이다. 그러나 막상 그런 무대가 찾아오니 갈등과 두려움이 올라왔다. ‘이번만 하고 다시는 못하는 것 아닌가, 무대에 섰는데 노래가 잘못 나오지 않을까, 차라리 안 보여주면 망신이라도 안 당할 텐데….’ 공연 끝나고 다음 날 아침까지 잠 못 자 “요즘 공연 시장도 안 좋지, 음반업계도 안 좋지. 내 나이에 뭔가 시작한다는 것도 두려웠고. 공연 날 표가 백몇 석이 비었다는 얘기를 듣고 무대를 올라갔어요. 그런데 막상 올라가 보니, 객석이 꽉 차 있었어요.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어요. 그리고 노래를 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했는데… 모르겠어. 시작했는데 끝나 있었어요.” 성공이었다. 공연 직전까지 떠올렸던 모든 어둠과 고통을 날려버릴 정도의 성공. 공연 전날 불안감에 잠을 못 잤던 양수경은 공연이 끝나고 정반대의 이유로 그다음 날 아침 여덟 시까지 잠을 못 잤다. 공연을 본 사람들에게서 들은 “다시 또 오고 싶어요”라는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울고 웃는 게 상상을 초월했죠. 우리 밴드는 최고의 세션이에요. 최고의 가수들과 해외 공연을 다 해본 사람들이라서 무대에서 설렐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친구들이 나처럼 잠이 안 온다면서 전화를 했어요. ‘누나, 이상해. 아직도 안 가셔. 모르겠어. 어떤 힘인지 모르겠는데 아직은 설레’라고.” 세상의 무수한 따스함과 마주하다 양수경은 이번 공연을 기획하고 추진하면서 자신을 도와주는 따뜻한 사람들을 무수히 만났다. 그 만남들은 그녀로 하여금 지난 시간을 후회하게 만드는 계기도 됐다. “옛날에는 제가 말을 잘 안 했어요. 그게 너무 후회스러웠어요. 좀 어렸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말하고 사귀면 그게 추억으로 남는 건데 그걸 못한 거죠. 어렸을 때는 너무 가난해서 똑바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너무 포장했어요. 지금은 내가 풀어놓으니까, 많은 걸 내려놓고 나니까 세상이 따뜻해요. 전보다 가진 것도 없고, 모든 걸 다 잃은 줄 알았는데 여기 이렇게 따뜻한 분들이 계셨어요.” 그녀가 세상의 따뜻함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과정은 슬픔과 인고의 세월이기도 했다.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 인간 양수경은 내비게이션 아니면 어디에도 갈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자꾸 ‘수호천사’들이 나타나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뜻밖에 누군가가 나타나 나에게 손을 내밀어줄 거라곤 생각 못해봤어요. 단절된 삶, 이슬에 젖어 산 세월이 참 길었지. 해 뜨는 것도 싫고 해 지는 것도 싫었던 때가. 너무나 많은 배신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녀는 사람을 볼 때 눈을 본다고 말했다. 눈은 숨길 수 없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자신에게도 해당되었다. 그녀는 힘든 시간에 ‘제 마음에 분한 게 없게 해주세요, 내 눈에 사악한 게 없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 소원 덕분일까, 그녀의 눈은 30여 년 전처럼 여전히 해맑았다. “아직도 아픈데, 그 아픔이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날 보고 울고 웃고 용기를 얻으면 좋겠어요.” 내년 데뷔 30주년 공연도 하고 싶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서 고통을 보지 않고 힘을 얻으면 좋겠다는 말은 철저한 대중가수로서의 양수경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제2의 인생 또한 첫 번째 인생처럼 가수로서 다시 문을 연 셈이다. 컴백 공연 전에는 조관우의 ‘늪’, 김범수의 ‘약속’을 만든 베테랑 작곡가 하광훈과 손잡고 신곡 ‘애련’을 발표했다. 그것은 과거에만 함몰되지 않는 ‘현역’ 가수로서의 양수경을 증명해주는 의지처럼 보였다. “지금 리메이크 앨범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런데 참 돈이 많이 들어가더라(웃음). 과거에는 음반을 내면 많은 수입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음반이 안 나가요. 그래도 우리 또래 사람들은 CD를 가끔씩 사는데 젊은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죠. 우리의 낭만은 산업에 묻혔어요. 음반이나 예술 하시는 분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시대를 따라가다 보니까 앨범 한 장을 만들면서 생기는 추억이나 낭만이란 게 묻혀서 없어졌어요. 그래도 난 앨범을 만들 거예요.” 그러고 보니 그동안 양수경이 소화한 장르는 굉장히 넓다. 트로트, 발라드, 댄스, 탱고 등등. 자연스럽게 그녀가 어떤 가수가 되길 원하는지 궁금해졌다. “저는 대중가수예요. 그럼 대중이 좋아할 쉽고 편한 노래를 부르면 되죠. 노래는 안 되면 언제든지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내가 노력이라는 걸 잊지 않는 가수면 좋겠고 확실한 내 색깔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전 분명 이선희, 현미 언니와도 다르니까요.” 비굴하게 살지 말자는 다짐 인터뷰를 하면서 양수경은 그 소녀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직업적으로 완고하고 고집이 센, 흡사 장인에 가까운 의식이 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타고난 성정일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굴곡진 삶을 이겨내고 최고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만들었던 힘일지도 모른다. “가수를 딴따라라고 부르는 게 싫었어요. 그런 시선들이 좋지 않았고, 나라도 똑바로 살아야겠다 싶었죠. 연예인은 우리가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계속 쳐다보는 직업이에요. 그럼 많은 걸 포기해야 해요. 외로운 것도 받아들여야 하고요.” 어렸을 때부터 연예계에 몸을 담아야 했기에 체득해야 했던 그 완고함을 도와줬던 것은 책이었다. “어렸을 때는 책을 많이 읽었죠. 맨 연애소설만 읽었지(웃음). 특히 시드니 셀던 소설을 즐겨 읽었는데, 사람들은 그 소설에서 연애를 읽지만 잘 읽어보면 가난한 여자가 상류사회로 진출하면서 변화되는 모습이 나와요. 전 그 여자의 성공 과정에 대한 내용을 계속 읽었어요.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인문학 서적만 찾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시드니 셀던 소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도 발견했고, 과학, 경제, 예술에 대한 이야기들도 읽었어요.” 소설에서 인생을 배웠다는 신선한 관점. 그렇다면 그녀가 삶을 살면서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고 마음먹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비굴하게는 살지 말자. 누군가 내 눈동자를 봤을 때 무엇을 감추려 하거나 비굴하게 보이지는 말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 나이 아름다움은 눈빛에서 나오는 것 양수경은 화가 날 때면 하늘을 보며 웃는다고 말했다. ‘예쁘게 살기도 힘든데’라는 말이 그녀의 반문이었다. 예쁘게 살고 싶다는 희망은 그녀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다. 그녀는 여자로서 당당하게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예쁘게 사는 것 또한 당당한 여성으로서의 삶의 일부였다. “우리 나이의 아름다움은 눈빛에서 나와요. 그러니 잘 때도 웃으면서 자야 해요. 그건 돈으로도 할 수 없고 시술로도 안 되는 부분이죠.” 그녀는 여성의 삶에서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딱 잘라 대답했다. “아, 그건 없어. 내가 신데렐라가 돼야 해요.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만큼 되어야 하는 거예요. 연애? 예전에는 연예인이라서 다 막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어요. 하지만 지금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그리고 내가 타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내 스스로 일어나고 싶은 거죠.” 그녀가 여유가 없다고 말한 이유, 바로 내년이 데뷔 3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른 생각들보다 다음 공연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는 게 더 급해 보였다. “이번 콘서트가 끝나고 다른 가수들의 공연을 본 뒤에 ‘난 아직 좋아할 때가 아니다. 다음 공연을 어떻게 할지 그걸 짜야 한다’ 했어요. 3년 전에 생각한 걸 이제야 한 거잖아요. 그래서 공연 다음 날 바로 다음 공연 기획을 짰어요. 물론 아무리 계획을 세워봤자 우리 뜻대로 되는 건 없죠. 꿈과 희망을 가질 수는 있는데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진 않아요. 그래서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세상이 예뻤으면 좋겠어요” 최근에 양수경은 예능 프로그램인 에 출연했다. 방송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대답은 지극히 ‘가수 양수경’다웠다. “방송? 불러줘야 나가죠. 그런데 방송 욕심보다는 공연 욕심이 더 커요. 그렇다고 방송국에서 절 안 부르는 건 아니에요(웃음). 부르긴 불러요. 하지만 난 대중가수예요. 대중들을 위해 쇼를 하는 가수이고 싶어요.” 가수로서의 삶 외에도 양수경에게는 또 다른 삶에 대한 꿈이 있다. “혼자 사는 여자들, 싱글맘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여유가 생긴다면 그런 삶을 살고 싶은 거죠.” 양수경 본인은 몰랐을지라도, 그녀를 그리워하는 팬들은 항상 있었다. 그들에게는 남편과 사별하고 세 아이의 엄마로서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것이 고마운 선물 같았을 것이다. 힘겹게 먼 길을 돌아 자신의 자리로 다시 도착한 그녀는 그 시절 그때처럼 여전히 꿈꾸는 소녀 같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꿈을 꾸면서 살고 싶었어요. 지금도 꿈을 꿔요. 밝고 맑은 세상에서 그렇게 예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 2017-09-30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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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모르 파티(Amor Fati)
- 요즘 나이를 불문하고 유행하는 노래 중 하나이다. 중견가수 김연자가 부르는 폴카 풍의 노래로 신나는 곡이라 젊은 층이 주류를 이루는 클럽 등에서도 인기라는 것이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에서 '아모르(Amore)'는 '사랑'이라는 뜻이다. ‘파티’는 ‘파티(Party)'로 오해 할 수 있는데 파티는 ’Fate‘ 즉 운명을 말한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주장했다고 한다. 아모르 파티는 운명에 대한 사랑, 즉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즉, 운명이란 타고 난 것이므로 운명을 바꾸려고 애써 봐야 소용없으니 운명대로 살면서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건우, 신철이라는 사람이 작사했고 수많은 히트곡을 만든 윤일상씨 작곡으로 되어 있다. 가사를 보면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대중가요의 히트 요소를 고루 갖춘 노래인 것이다. 가사 중에 사람들이 좋아할 요소들을 살펴보면 ‘인생은 지금이야’, ‘가슴이 뛰는 대로 하면 돼’는 요즘 한창 화두인 ‘카르페 디엠’과도 맞닿는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영화에서 소개했듯이 ‘오늘을 즐겨라’는 뜻이다. ‘왔다 갈 한 번의 인생아’, ‘다가올 사랑은 두렵지 않아’ 가사는 요즘 역시 화두인 ‘YOLO(You Only Live Once)’ 즉, 한 번뿐인 인생이니 현재를 즐기며 살자는 의미가 있다. 카르페 디엠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 ‘자신에게 실망 하지 마, 모든 걸 잘할 순 없어’는 오늘의 청년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 위로가 되는 말이다. ‘노오력’이 노력해봐야 안되더라는 자조적인 말로 쓰이는 것을 보면 운명에 대해 좌절하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눈물은 이별의 거품일 뿐이야’, ‘다가올 사랑은 두렵지 않아‘는 요즘 젊은이들의 풍조를 그대로 나타낸 가사이다. 이러니 결혼 안하는 사람이 많고 저 출산으로 이어진다.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가사는 시니어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요즘 취업은 안 되고 따라서 결혼도 못하고 있는데 나이만 먹어간다고 푸념하는 젊은이들도 공감하는 말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다 보니 몸은 늙었으나 마음만은 아직 청춘이라는 시니어들이 많다. 오승근 노래 ‘내 나이가 어때서’가 히트한 것도 같은 배경일 것이다.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라며 거울에 비친 늙은 모습에 눈물이 난다는 것이다. ‘인생’은 사랑, 이별과 함께 대중가요 3대 단골 주제이다. ‘인생’이라는 같은 제목만으로도 여러 가수가 부른 서로 다른 노래가 많다. 안치환의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 주지 않았다’처럼 ‘인생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노래 제목까지 확대해보면 인생 주제의 노래가 정말 많다. 인순이의 ‘인생’이라는 노래에서는 ‘인생이란 잠시 쉬어 가는 우리 여행 길’이라고 했다. 우리가 태어나서 한번뿐인 인생이라며 열심히 살았다. 이제 인순이의 ‘인생’ 가사에서 ‘황혼 빛에 물드는 노을처럼만 아름답게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알 수 있는 거죠. 그게 바로 인생이란 걸’에서 이제 조용히 운명을 받아들이는 시기가 온 것 같다. 다시 아모르 파티 가사에서 ‘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누구나 빈손으로 와, 소설 같은 한 편의 얘기들을 세상에 뿌리며 살지’에 지나간 추억을 아름답게 추억하며 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 2017-09-27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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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함이 최고의 행복이다
- 하나뿐인 아들이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은 여자 친구가 있다고 했을 때 정말 기뻤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오고 직장생활 몇 년째인 서른 살 때였다. 안도감이 컸던 이유는 필자가 결혼적령기를 넘긴 27세까지 시집을 가지 못해 친정엄마가 엄청난 걱정을 하셨던 게 생각나서였다. 그 당시엔 여자가 27세까지 시집을 못 간 건 창피한 일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있어 27세 되던 해엔 엄마의 한숨소리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려왔다. 27세를 넘기기 직전인 12월에 중매를 통해 결혼이 결정되자 안심하던 엄마의 웃는 모습이 지금도 애틋하게 기억난다. 아들이 연애를 하는 것도 못 봤고 여자 친구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아 내심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그 옛날 엄마가 시집 안 가는 딸(필자) 때문에 노심초사했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요즘은 결혼적령기가 따로 없어서 아주 늦은 나이에도 인연을 만나 잘 사는 부부가 많으니 결혼이 늦는다고 그리 큰 걱정들은 하지 않는다. 또한 매우 귀하게 기른 딸이 아까워서 시집보내기를 망설이는 부모도 있다고 한다. 결혼하고도 속 썩을 일 있으면 그냥 이혼하고 돌아오라고까지 한다니 아들 가진 엄마 입장에서는 좋은 며느리 찾는 결혼 문제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고 이런 세태에 순둥이 우리 아들이 결혼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다. 필자는 전형적인 중매결혼을 했다. 전문 중매 아주머니의 소개로 양가가 만나 선을 보고 결혼을 결정했다. 아들이 나이 들어가자 필자도 중매를 통해야 할지 어떨지 고민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좋아하는 아가씨를 소개한다 하니 천만다행이었다.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아들이 그저 고맙고 대견스러웠다. 강남의 모 음식점에서 처음 본 우리 며느리는 참으로 단아하고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연애 한 번 못해본 것 같은 아들이 어디서 이런 아가씨를 만났는지 흐뭇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직장 선배의 소개로 사귀었다고 한다. 둘을 같이 앉혀놓고 보니 얼굴도 눈도 코도 동글동글한 게 서로 닮았다. 결혼적령기를 지나도 결혼하지 못한 딸을 두었던 우리 친정엄마의 노심초사와 필자가 나서지 않고도 사랑스러운 짝을 찾아 필자를 안심시킨 아들이 비교되며 엄마께는 미안하고 아들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흡족한 마음에 기분이 좋았는데 이제부터 결혼시킬 일이 걱정되었다. 필자가 결혼할 땐 모든 것을 어른들이 알아서 해주셨으니 아들 결혼에 필자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가구와 전자제품 등 혼수를 장만하시며 즐거워하시던 친정엄마가 떠오른다. 나이가 찼는데도 결혼하지 않는 딸을 시집보내게 되어서 정말 기쁘셨던 것이다. 시댁에서 준비해주신 패물이 엄청났다. 보석으로 7세트를 받았다. 목걸이가 주렁주렁 걸리고 반지와 귀걸이 팔찌 브로치 등이 7개씩 진열된 커다란 보석함을 사람들에게 구경시키며 흐뭇해하시던 엄마의 모습도 떠오른다. 그렇게 남에게 보이는 걸 중요시했던 필자의 결혼이었다. 우리 며느리에게 그렇게까지는 해줄 수 없어 미안하지만, 성의껏 준비하겠다고 하자 아들이 요즘은 모든 걸 당사자끼리 알아서 한다며 엄마는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정말 일사천리로 웨딩업체를 정하고 반지도 저희끼리 맞추고 예단도 저희끼리 준비했다. 양가 어머니의 한복도 어느 날 몇 시에 청담동 한복집에 가서 맞추시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시어머니가 될 필자는 너무 할 일이 없었다. 필자는 철없이 어른이 해주시는 대로 받기만 했는데 아들은 며느리와 의논해 모든 일을 어른스럽게 결정했다.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신경을 많이 썼던 필자와 달리 실속 있게 알찬 결혼을 한 아들은 알콩달콩 예쁜 손녀손자를 필자에게 안겨주며 잘 살고 있다. 그 모습에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보다는 평범함이 최고의 행복이라는 인생의 진리를 깨달으며 아들네가 항상 건강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이 세상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중매를 통해 어렵게 결혼했던 필자보다 연애로 멋진 결혼을 한 아들이 더욱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2017-09-22 1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