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6·25 전쟁 납북 피해자 가족이다. 저의 시부모님은 일제 강점기 시절 동경 유학 생활 중에 만나서 당시로서는 드문 연애 결혼을 하셨다. 시어머님은 3남 1녀를 낳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시던 중 6.25 전쟁의 발생으로 시아버님이 납치 되신 것이다.
어머님은 6·25당시 34살의 젊디 젊은 나이에 혼자 되셔서 갖은 고생을 하시면서 자제분들을
어느 날 퇴근 후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함박웃음을 웃으며 맞아주었다.
둘째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팔이 아파서 병원에 다닌다고 필자가 카톡에 근황을 올렸더니 갓김치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반찬을 준비하여 울산에서 서울로 택배를 보내왔다는 것이다.
무엇을 준비하여 보내야 할 지 몰라 평소 시어머니가 즐겨 만들어 준 음식을 생각하며 둘째 며느리는 인터넷에서 래시
시골에 내려가 살기를 원하는가? 그러나 시골에 거처를 마련할 실력이 여의치 않은가? 빈손인가? 걱정 마시라. 찾다 보면 뾰족한 수가 생긴다. 일테면, 재각(齋閣)지기로 들어앉으면 된다. 전국 도처에 산재하는 재실, 재각, 고택의 대부분이 비어 있다. 임대료도 의무적 노역도 거의 없는 조건으로 입주할 수 있다. 물론 소정의 면접은 치러야겠지만 당신이 남파된
지금 생각하면 발칙하기도 했고 직장 동료들이 괘씸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1978년 한창 젊은 나이에 미국 은행 (Bank of America)에 재직하던 시절이다. 아내와 필자는 사내 연애를 했다. 둘이 연애 중임을 알면 사람들이 놀려대서 피곤할 뿐 아니라 결혼하고 나면 둘 중 하나는 직장을 옮겨야 했으므로 비밀 연애를 했다. 그런데 갈 곳이
지난 달 건국대 새천년관에서 재미있고 유쾌한 토크 콘서트가 열렸다. 주제는 성 평등이었다. 깊이 들어가면 그리 유쾌할 수만은 없는 남녀의 차별 문제도 제기되었다. 그래도 시종일관 분위기가 밝았던 건 사회를 본 최광기 여사 덕인 것 같다. 본인의 이름으로도 큰 웃음을 주었고 태어났을 당시 자매들의 출생신고가 아무렇게나 되었는데 딱 하나 아들을 낳자 그날로 출
가난하고 배가 고파서 글을 쓰는 일의 힘겨움을 아는 사람, 대하소설 의 작가 김주영은 요즘 경상북도 청송에서 살고 있다. 의 성공은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어줬지만, 사회적 성공과 별개로 그의 삶은 비로소 아수라장에서 빠져나와 느릿하게 흘러가는 듯 보였다. 덤덤하고 무심하게 작품과 인생에 대해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대한민국의 외로운 아버지들
노년 생활 지침이라고 할 수 있는 소노 아야코의 에세이 독후감을 쓴 필자의 블로그를 보고 어느 분이 댓글을 달아 주셨다. “이제는 더 바랄 것도 없고, 살면서 놀랄 일만 없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맞는 얘기 같아 필자 입장도 그렇다며 회신 댓글을 보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다’라는 말이 있다. 평소 형제들이나 자식들과 왕래가 많지는 않은 편이다.
미주 한인 사회에서 지식인의 멘토로 불렸던 노부부가 있었다. 정신과 전문의로 UC데이비스 의과대학에서 35년간 교수로 근무했던 故 김익창 박사와, 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 25년간 교사로 일했던 그레이스 김(한국명 전경자·86)씨다.
부부는 평생 소외받는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힘썼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싸웠다. 53년을 함께하는 동안 그들은 최고의
가수 진미령은 한 설문조사에서 재혼하고 싶은 여자 1위에 뽑힌 적이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여성이다. 아직도 소녀 같은 진미령이 내 나이와 비슷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 나이에 이토록 섹시한 스타는 가요계 통틀어서도 드물다. 아직도 잘록한 허리에 조막만 한 얼굴과 긴 머리가 잘 어울리는 섹시하면서도 청순한 소녀와 마주하고 가을 냄새를 느꼈다.
가수는 “히
아내와는 연애결혼을 했다. 서로 결혼을 약속하고 장차 장인장모가 될 어른들에게 인사 가기로 했다. 서울근교라 하지만 당시만 해도 시외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한 시간이나 가야하는 거리였다. 시골동네라 결혼 안한 남녀가 같이 다니는 것이 금기시 되었던 시절이다. 혼자 찾아가야 했다. 아내를 통해 어디서 무슨 버스를 타고 어디쯤 내려 어떤 집으로 찾아오라는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