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손을 놔주는 것도, 매달리는 것도 사랑이다. 누군가는 극복한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고 말했다.
유디트 크빈테른(Judith Quintern·46), 그녀는 18년 전 독일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지의 땅으로 가는 길이었다. 한 남자와 도저히 헤어질 수 없었던 한 여자는 그 사랑을 극복하기로 했다.
한순간 길을 잃는다 해도 괜찮았다. 그리고 강원도첩첩산중 외딴집에서 된장국을 끓이고 해당화에 빠져 사는 동안 알게 됐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함부로 외롭지 않을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는 일임을….
‘유디트의 정원’이라 했다. 처음 그녀가 운영하는 카페 이름을 듣는 순간 타샤 튜더의 정원이 떠올랐다. “정원에 관해서라면 결코 겸손하고 싶지 않다”고 했던 여자. 문득 그 아름다운(?) 고집스러움이 그녀에게서도 느껴졌다. 그러지 않고서야 유배와 다를 바 없는 먼 이국땅에서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독일에서 정치 철학을 공부한 그녀가 남편 이희원(58) 씨를 따라 한국으로 온 것은 지난 2000년.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와 같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 생각하려 애썼다.
“제 친구를 통해 남편을 알게 됐어요. 당시 독일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있던 그는 매너가 좋고 친절한 사람이었어요. 생각하는 게 비슷해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눴지요. 그러다 자연스럽게 연애를 하게 됐고요. 그런데 독일에서 둘만의 소풍을 다녀오던 어느 날 그가 갑자기 ‘우리 결혼할까?’ 하고 물었어요. 그 순간 딜레마에 빠져버리고 말았어요. 그가 박사학위를 딴 뒤에는 반드시 고향에 돌아가 연로하신 부모님과 같이 살고 싶다고 했거든요. 저랑 만나는 동안에도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자주 했기 때문에 우리의 연애는 종종 무거웠어요. 며칠 생각할 시간을 달라 했어요. 그와 헤어지거나, 그를 따라 한국으로 가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죠. 어느 결정도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와 헤어지는 것은 상상만 해도 견디기 힘들더군요. 그날 이후 제가 그와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됐어요.”
병이 되어버린 그리움
남편 가족들은 그녀를 환영했다. 물론 유학까지 보낸 아들이 외국인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섭섭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10여 년 만에 유학을 끝낸 아들이 돌아와 결혼을 하면 며느리와 오순도순 지내볼까 기대를 했는데 말도 통하지 않는 독일 며느리라니….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 물었을 때 시아버지는 간결하게 한마디만 했다.
“나는 내 아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그것으로 가족의 의견은 정리가 됐고, 두 사람의 결혼은 무리 없이 진행됐다. 시댁과 남편의 따뜻한 배려를 받으며 그녀도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타국에서의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다. 콧마루가 시큰해지는 날이 많아졌다. 결국 그녀는 심한 우울증과 향수병을 앓기 시작했다. 처음엔 매력적으로 보이던 서울도 점점 싫어졌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한국말을 못해 누구를 만나도 바보처럼 앉아 있어야만 했다. 어느새 모국어도 친구도 다 잃어버리고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남편에게는 말도 못하고 혼자 울면서 생각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때로는 마음이 곤두박질치며 당장 독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금은 TV에 외국 사람들도 많이 출연하니까 분위기가 달라졌지만 제가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관광객 취급을 받았어요. 도시 사람들은 지금도 저를 만나면 ‘젓가락 사용 아주 잘하네요’ 같은 말들을 해요. 그런 대화는 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들에게 저는 영원한 이방인인 거죠. 그게 힘들었어요.”
삼척에서 정이 들다
안산 한양대학교에서 독일어 강사로 7년 동안 일하면서도 외로움은 치유되지 않았다. 독일과는 분위기가 다른 교수 사회도 그녀를 힘들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강원도에 집을 마련하자고 했다. 그녀는 시부모님과 함께 갔던 시골을 떠올렸다.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을 환하게 열었던 곳.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에서 생활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던 마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독일을 그리워했던 그녀는 시골로 들어가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영영 힘들어지는 건 아닐까 염려가 됐다. 불안했지만 도시의 일상에 잔뜩 지쳐 있던 터라 시골집을 구하러 가는 남편을 따라 나섰다. 그리고 해발 700m고지 삼척 산중에서 다 쓰러져가는 집 한 채를 발견했다.
“운이 좋았어요. 화전민이 살던 땅을 구하고 싶어 했는데 거의 1년 만에 하늘 바로 밑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곳에서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땅을 발견했어요. 남편은 기분이 좋아 ‘와~ 진짜 화전민이 살던 곳이네’ 하고 소리쳤어요.”
화전민 가옥을 구입한 뒤 두 사람은 도시에서보다 일상이 더 바빠졌다. 전기도 끊기고 재래식 화장실밖에 없는, 잡풀과 거미줄이 가득해 쓰레기더미처럼 보이는 집을 치우다 보면 하루가 다 갔다. 지인들은 이런 집에서 불편해 어떻게 사냐며 집을 부수고 새 집을 지으라 조언했지만 부부는 옛집을 살려보고 싶었다. 특히 그녀는 구석구석 쓸고 닦고 광을 내면서 옛 사람들이 살던 모습을 상상하는 게 즐거웠다. 그녀에게는 그냥 빈집이 아니었다.
“독일 사람들은 오래된 집을 좋아해요. 콘크리트로 지은 집보다 훨씬 기품이 있거든요. 삼척에서 산 집이 100년도 더 된 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 집을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를 속속들이 들여다봤어요. 박물관에서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었어요. 옛 사람의 손길과 마음까지 느꼈다고나 할까요. 집을 떠받들고 있는 나무 기둥과 격자형 문틀, 마루, 그리고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이 매일 사용하며 손때를 묻혔을 바가지와 그릇들이 폐허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귀한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기뻤어요.”
두 사람은 한동안 옛집을 복원하는 일에 빠져 지냈다. 몸은 고단했지만 재미있는 놀이에 중독된 것처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잡풀과 먼지 속에 묻혀 있던 가옥이 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부부는 노다지를 찾아낸 양 행복해했다. 마음껏 늘어져 평화로운 시간을 만끽하기에 딱 좋은 집이었다. 8부 능선에 눈이 푹푹 내려 갇혀버리면 마치 세속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사람들처럼 즐거워했다. 봄이 오면 그녀가 좋아하는 해당화를 잔뜩 심었다. 심심할 때는 트로트를 틀어놓고 따라 불렀다. 그새 두 마리의 고양이가 가족이 됐다. 배가 고프면 청국장을 끓이고 산에서 뜯은 나물을 무쳐 밥상을 차렸다. 그렇게 자연 속 맨발의 시간들과 서서히 정이 들었고 그녀는 독일을 떠난 뒤 찾은 ‘새 고향’에서 비로소 안식을 얻었다.
새로운 놀이터
최근 그녀는 또 다른 정원을 가꾸느라 분주하다. 바로 독일식 카페 ‘유디트의 정원’. 5년 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그만두고 경포호 근처에 예쁜 카페를 하나 짓더니 벌써 4호점까지 열었다 한다. 느리게 사는 걸 좋아하는 분이 어쩌자고 일을 자꾸 벌이시냐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웃음) 이곳 강원도에 와서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의외로 유럽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독일 소개도 하고 서로의 문화 차이에 대해 얘기를 나누면 좋겠다 싶었어요. 수다를 떨기에는 이런 공간이 좋잖아요. 또 독일이 그리울 때쯤 핑계를 대고 건너가 가구를 직접 고르는 일도 재미있고요. 그동안 들여온 물건들이 벌써 수백 점이나 돼요. 그러다 보니 자꾸 정원을 넓히게 되네요.”
그녀가 다시 그리는 그림이 어떤 모양새가 될지 슬쩍 궁금해진다. 한국에 와서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는 그녀는 그것들에 더 집중하며 살고 싶다고 했다.
“산책, 독서, 자연, 고양이, 정원….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에요. 산책할 때는 온몸의 감각기관을 열어놔야 해요. 그냥 걷는 건 의미 없어요. 저는 자연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계절의 변화를 예민하게 느끼고 싶어요. 내 마음에 얹힌 무거운 짐을 내려주고 평화를 찾도록 도와주기 때문이죠.”
이만하면 한국 사람 되려고 더 이상 노력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떤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의 풍경과 음식을 사랑하고 좋아하게 됐으니까.
사랑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를 유배한 곳에서 그녀는 이제 낙원을 찾은 것일까. 아마도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