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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파랑길 트레킹으로 인생 리셋", 조정선 前 MBC 라디오 PD
- MBC FM 개국 때부터 라디오를 들었던 조정선(62) PD는 37년간 라디오 PD로 활약했다. ‘이종환의 디스크쇼’,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 ‘배철수의 음악캠프’ 등 MBC 대표 라디오 프로그램을 도맡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일터이자 놀이터였던 라디오 부스에서 빠져나와, 지난해 퇴직을 맞이하며 해파랑길 트레킹을 다녀왔다. 신간 ‘퇴직, 일단 걸었습니다’는 그 여정의 기록인 동시에 37년간의 삶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 책은 그의 단짝이자 고등학교 동창 해정 군과 함께 오른 해파랑길의 여정을 기록한 에세이다. 첫 책의 주제로 ‘음악’이 아니라 ‘여행’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틈틈이 써왔던 음악에 관한 원고를 바탕으로 음악 에세이를 내려고 했는데, 해파랑길 트레킹을 다녀온 후 출간 계획을 미뤘다. 매일 원고를 쓰던 버릇이 있어서 그런지 여행하는 동안 기록을 하고 싶더라. 보통 아침 여섯시에 시작하면 오후 세시나 네시쯤 하루 일정이 끝난다. 이른 저녁을 먹고 잠들면 새벽 한시나 두시에 깨더라. 옆 친구한테 방해될까 봐 말도 못 하고, 조용히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꾹꾹 눌러가며 그날의 감상을 SNS에 올렸다. 의외로 반응이 좋았고, 음악 관련 책 대신 이 기록을 먼저 출간하기로 했다.” 은퇴 기념 첫 번째 프로젝트로 ‘해파랑길 트레킹’을 선택했다. 부산에서 고성까지 770km 거리에 달하는 해파랑길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리셋 버튼을 누르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과거에 대한 끝내 못 이룬 아쉬움이나 미련을 털어버리고, 앞으로의 길을 위해 마음을 다잡고 싶었다. 원래는 해파랑길이 아니라 산티아고 순례길 코스 중 하나인 프랑스길에 가려고 했다. 사전 교육도 다 받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려고 했지만, 팬데믹이 심해지면서 결국엔 못 갔다. 차선책으로 비슷한 길이의 코스인 해파랑길이 눈에 들어왔다. 갔다 온 친구의 추천도 한몫했다. 차선(次善)으로 택했지만, 돌아오고 나서 보니 오히려 그 선택이 최선(最善)이었던 것 같다.” 나서기 PD의 도전 라디오 PD의 DNA는 사라지지 않는 법. 여행 에세이지만 음악이 빠지지 않았다. 물론 37년간 함께 달려왔던 스태프와 곁에서 지켜봤던 뮤지션에 관한 얘기도 담겼다. “라디오는 삶의 동반자였다. MBC FM 개국부터 라디오를 듣던 꼬마가 실제로 듣던 그 라디오 부스에서 일했다. 음악과 라디오는 내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코드였다. 라디오 PD로 일하면서 잊을 수 없는 일들이 많았지만, 그중 하나를 꼽자면 숨은 명곡의 발견이 아닐까? 라디오 PD는 결국 소리로 말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가령 김수희의 ‘애모’가 그런 경우다. 본인은 ‘서울 여자’를 더 밀었는데, 난 ‘애모’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당시 라디오에서 ‘애모’가 소개된 이후 큰 인기를 끌었다. PD로서 참 뿌듯했다.” 그는 ‘PD’라는 역할에 갇히지 않았다. 주로 작가들이 쓰는 원고를 본인이 직접 쓰고, 게스트로 출연하거나 라디오 DJ로도 활동했다.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일하고 싶었다. DJ에 도전한 것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다. 하나의 라디오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나만의 생각과 진심을 오롯이 청취자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반사체로서 마음을 전달하는 것보다 스스로 발광체가 되어 다가가고 싶었다. 물론 첨엔 대본 읽는 게 서툴렀는데 점점 나아지더라. 게스트로 출연하거나 DJ로 활동하는 나더러 한 후배는 ‘나서기 PD’란 별명을 붙여줬다.(웃음)” 그가 변신을 시도하는 동안 라디오란 매체도 숱한 변화를 겪었다. 한때 문화의 전령사로 통했던 라디오의 영향력은 예전보다 줄었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매체다. 그 사이 ‘배철수의 음악 캠프’는 지난해 30주년을 맞이했다. “배캠은 일하는 스태프의 노고를 비롯해 배철수 선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가 가진 팝에 대한 전문성과 해박함은 이미 해외 아티스트에게도 정평이 났다. 또한 선배에게 일하는 마음가짐을 많이 배웠다. 매일 2시간 전부터 와서 원고도 읽고, 노래도 직접 들어본다. 프로그램에 지장이 있는 스케줄을 애초에 잡지 않는다. 30년간 꾸준히 그랬다. 배캠이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선배의 성실함과 책임감 덕분인지도 모른다.” 두 번째 꿈은 히트곡 작곡가 37년간 몸담았던 일터를 떠나, 그간의 삶을 돌아보고 정리하기 위해 떠난 해파랑길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 그 전과 무엇이 달라졌을지 궁금했다. “여행 도중에 가방의 무게를 줄이려고 필요 없는 짐을 택배로 보내는 것이 일이었다. 문득 이제껏 아등바등 살았던 것이 부질없는 욕심처럼 느껴지더라. 또한 좋은 아빠, 좋은 남편, 좋은 상사라는 답안지에 후한 점수를 줄 자신이 없었다. 유명한 소설가는 친절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는데, 모두에게 친절하지 못한 사람으로 기억에 남은 것 같아 못내 아쉽다. 이제는 욕심을 내려놓고 더 베푸는 삶을 지향하고 싶다.” 끝으로 계획하고 있는 두 번째 프로젝트에 관해 물었다. “라디오는 여백을 채우는 상상력의 상자다. 내 삶도 비슷했다. 라디오 부스란 한정된 공간 안에서 늘 새로운 시도와 방향을 고민했다. 동시에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듣고, 재미난 일을 많이 했다. 정말로 행운아였다. 이제는 부스 밖 넓은 세상에서 새롭고 재미난 일을 해보고 싶다. 가령 작곡가로 데뷔해서 히트곡을 만들고 싶다. 두 번째 꿈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고, 변주는 밋밋한 반주를 다채롭게 한다. 그의 37년은 알을 깨는 변주였다.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운 길로 나섰다. 그는 반경 안에 갇히지 않았다. 주도적인 PD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했다. 나서기 PD란 별명은 그 노력의 결과다. 한 시인은 “길은 걷는 자의 것”이라고 했다. 결국 길은 나서는 자에게 열린다. 또 다른 도전을 앞둔 그의 새로운 여정을 응원하며 마친다.
- 2021-12-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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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궁화 닮은 예술가의 집 새이용원
-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기 이틀 전이었다.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아.” 수화기 너머의 퉁명스러운 한마디 믿고 나선 길. 곧 추워질 날씨를 생각해 홍삼 음료수를 샀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10분쯤 걸었을까. 낡은 간판 옆 느리게 돌아가는 삼색등과 빈 의자 네 개를 발견했다. 손님이라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국 최초 여성 이용사의 특급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곳, 바로 성북동 새이용원이다. 구성진 트로트 가락, 엇박으로 어우러지는 가위 소리 대신 크게 틀어둔 TV 뉴스, 문 앞에 길게 늘어진 주렴 대신 칠이 떨어진 낡은 문. 이용원 내부는 상상했던 모습과 조금 달랐지만 세월이 그득 배어 있었다. 새이용원의 주인장, ‘명랑 이발사’ 이덕훈(87) 씨는 주 고객층 연령대에 한참 못 미치는 기자에게 앉아 계시던 자리를 권했다. “여자는 하체가 따뜻해야 해. 이리 와서 앉아.” 장녀, 아내, 엄마, 그리고 이용사 권유에 못 이겨 자리에 앉았을 때 손님이 찾아왔다. 최근 전파를 탄 유명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찾아왔다고 했다. 이 씨가 이용사의 상징인 흰색 가운을 걸치고, 손님 목에 보자기와 두루마리 휴지를 두르는 동안 4평 남짓한 공간을 둘러봤다. 큼직한 거울 위 빛바랜 이용사 면허증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이발 준비를 마친 베테랑 이용사가 손님에게 싱겁게 물었다. “여기 처음 왔어요? 나 유명한 사람이야. 방송도 많이 탔어.” 이윽고 이발을 시작하는 대신 서랍에서 누렇게 바랜 사진을 꺼내 들었다. “이 양반이 우리 서방님. 얘들은 우리 아들들이야. 인물이 아주 좋지?” 잘 짜인 각본처럼 이야기가 줄줄이 엮여 나왔다. 5남 2녀 중 장녀인 이 씨는 일제강점기 때 군부대 이발 담당관으로 차출됐던 아버지를 보며 이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려면 한 명이라도 손을 보태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는 국민학교만 졸업하고서 이발 기술을 배우며 동생들을 뒷바라지했다. 이발소 허드렛일과 집안일을 전부 도맡으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은 덕분에 1958년 이용사 면허시험에 합격해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이발사가 됐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김두한이 ‘성북동 아줌마’를 찾아 머리를 맡길 정도로 솜씨도 좋았다. 돈을 벌기 시작했지만 삶은 여전히 녹록지 않았다. 남편에 아들들, 시부모까지 먹여 살리느라 하루에 스무 시간을 일했다. 이발소 안의 여자를 원숭이 보듯 하는 사람들의 시선도 견뎌야 했다. 하지만 몸이 고된 것보다 가족을 먼저 보낸 아픔이 더 컸다. 스무 해 전 먼저 가버린 남편이 아직도 그립고 애달프지만 그는 새로운 해가 뜨면 다시 이용원 거울 앞에 선다. 제 몸보다 아꼈던 남편, 딸 하나와 아들 셋을 보내며 무던히 살아내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또다시 가위와 빗을 쥐었다. 한 달에 1cm, 열흘에 1mm 자라는 150만 개의 머리카락을 만진 지 60년 세월이다. 처음 보는 손님 가르마를 보고 고지식한 원칙주의자임을 파악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다. 위험을 감수하는 진짜 예술가 지난해 여름엔 셋째 아들마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냈다. 꽃을 좋아했던 아들은 어머니에게 형형색색 꽃 사진이 가득한 휴대폰을 남겼다. 평생을 거울 앞에서 마네킹처럼 일하는 엄마를 생각하며 찍은 아들의 꽃 사진. 그는 매일 꽃 사진 너머로 아들을 만난다. 수백 종류 꽃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건 무궁화다. “오늘 하루만 살아. 내일이 어떻게 될 줄 알아?” 매일 피고 진다는 무궁화는 휴무일인 화요일을 빼고 매일 손님을 맞았던 이용원을, 이용사 이덕훈 그 자체를 닮았다. 시대가 변하면서 이용원을 찾는 손님들이 줄었다. 아쉽긴 했으나 그는 불평하는 대신 이용원을 찾는 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손님이 없을 땐 일기를 썼다. 아들들이 사준 18년 된 철제 드라이어와 25만 원짜리 사감 선생님 안경, 아버지가 물려준 100년 된 바리캉을 앞에 두고 펜을 잡았다. 어느 날은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적었고, 어느 날은 죽은 남편과 아들들을 향한 그리움, 가난해 제대로 먹이지 못했던 딸에 대한 미안함을 토해냈다. 그렇게 이용원 거울 앞 서랍장 속에, 탁자 위에 먼지 묻은 삶의 추억이 겹겹이 쌓였다.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만이 진짜 예술가다.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나아가라.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럼 당신은 정말로 잃을 게 없다.” 빈 페이지 없이 빽빽한 공책 속 한 구절이 눈에 띄었다. 갈망하며 우직하게 나아가는 이, 잃을 것 없이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글귀 속 예술가의 정의가 그와 겹쳐 보였다. 여든일곱 나이에 가위를 쥐고도 흐트러짐 없는 손아귀 힘, 손님들이 찾아오는 한 이 일을 계속하겠다는 굳건함이 예술가의 것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부쩍 짧아진 해가 기척 없이 저물었다. 비워뒀던 이용실 의자 위에 보자기를 덮고, 잘린 머리카락을 쓸어다가 버린다. 인터넷에 고지된 영업 마감 시간 오후 7시가 채 되기 전. “요즘은 해 지면 닫아. 어차피 손님도 안 오는데.” 분주히 움직이던 그가 다른 편 보자기를 들춰 자양강장 음료수와 두유, 과자를 가득 쥐여줬다. “사랑해. 조심해서 들어가.” 마지막 인사와 함께 그날의 삼색등이 꺼졌다.
- 2021-11-2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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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이 된 네 사람… “내 아내를 부탁해”
-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오늘은 남편의 1주기, 그와 함께 남편에게 왔다. 그와 함께 찾아온 내가 남편한테 어떻게 비칠까. 옆에 선 그에게는 어떤 마음일까. 서운하고 괘씸할까? 분노하고 절망할까? 체념하며 인정할까? 거짓 없는 마음을 듣고 싶지만 유골함 옆 사진 속 남편은 여전히 속없는 웃음을 보일 뿐 아무런 말이 없다. 그도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죽은 자의 방 앞에 목례한 후 조용히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내 뒷모습을 응시하고 섰을 것이다. 내가 추모를 마칠 때까지. 나도 역시 말이 없다. 그를 의식해서도 그렇지만 남편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올 때마다 매번 말을 잃게 된다. 미안함, 사실 그것으론 미진하다. 뭐라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사가 정체 모를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차라리 혼자 올걸. 그와의 동행이 남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뒤미처 든다. 그를 의식하지 않고 남편과만 있고 싶다. 남편 곁에 좀 더 머물고 싶다. 그러나 불편한 감정이 휘저어지기 전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곳을 벗어났다. 봉안당 마당을 걸어 나오는 동안 우리는 여전히 말이 없다. 늦가을 바람에 날리는 빛바랜 낙엽만이 둘 사이에서 수런댔다. 나도 그도 세상 떠난 남편에게 면목이 없어서일까. 그에게 죽은 남편은 어떤 마음, 어떤 존재인지, 나는 죽은 남편과 관련하여 그를 어떤 마음, 어떤 존재로 여기고 있는지 지금껏 한 번도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회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환갑이 되던 지난해 11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암 판정 3개월 만에.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그와 나를 더 가깝게 끌어당긴 건 아니다. 남편을 잃은 나를 그는 세심하게 위로하며 다정한 의지처가 되어주었지만 내 마음은 되레 그에게서 멀어졌다. 남편과 함께 만날 때의 그와 남편이 없는 상태에서 보는 그가 내게는 달리 비쳤기 때문이다. 처절히 슬프고 공허했지만 왠지 그에게 기대고 싶진 않았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것 같아 오히려 그를 멀리하고 싶어졌다. 남편은 세상 뜨기 3일 전, 그에게 나를 부탁한다고 유언을 남겼다. 자신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보살펴달라며. 그렇게 해준다면 편안히 눈을 감겠다면서. 죽어가는 사람의 말에는 거짓이 없다고 했던가.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남편의 진의, 속내가 궁금하다. ‘나 죽으면 너희 두 사람 어차피 함께 살 거니까 차라리 내가 선수를 치마. 그래야 두 사람도 맘 편히 살 거 아니냐’는 식의 자포자기적 선의였을까. 아니면 그렇게 말함으로써 정말 함께 살게 되었을 때 흐릿하나마 그와 나의 가슴에 죄책감의 주홍글씨를 새기고 싶었던 걸까. 그와 나는 잘 지내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나는 마님, 그는 돌쇠로. 그에게 나는 얼마간의 환상적 존재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 남편이 가고 나니 둘 사이의 관계가 점점 더 그렇게 굳어지고 있다. 그는 이혼남이다. 5년 전 아내의 외도로 갈라섰다. 그가 이혼하기 전 우리는 부부가 함께 만났다. 그런데 지금은 그와 나만 남았다. 내 남편은 죽고, 그의 아내는 떠나고. 우리는 대학 선후배 사이로 그는 남편의 후배고, 그의 아내는 내 후배다. 지인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우연히 합석한 후 서로 마음이 맞아 자주 만났다. 관계가 어색해진 것은 그가 나를 좋아하면서부터였다. 선배의 아내를 연모하는 후배,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가 나에 대한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의 아내와 내 남편을 불쾌하게 했다. 물론 그와 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어느 날 과음한 그가 술잔의 술을 흘리듯 나에 대한 마음을 흘렸을 뿐이다. 나를 좋아한다고. “저도 좋아해요”라고 농담조로 대꾸하며 어색해진 자리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못했다. “ΟΟ 씨를 사랑한다고요. 왜 제 마음을 몰라주시는 거예요. 저 정말 슬퍼요”라며 이번에는 내 이름까지 넣어가며 속내를 드러냈다. 아무리 술기운이라 해도 취중진담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그가 늘어놓는 고백 아닌 고백에 남편은 나를 흘기며 마뜩잖은 눈길을 보냈고, 그의 아내는 나와 그를 번갈아 보며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붉혔다. 나중에 들었는데 당시 그의 아내에게 따로 만나는 남자가 있었다고 한다. 아내의 외도로 인해 괴롭고 외롭던 그가 시나브로 내게 끌린 것이리라. 그걸 빌미로 그의 아내가 상황을 제대로 이용했다. 그 일을 꼬투리 삼아 적반하장으로 자기 연애를 합리화하며 냉큼 이혼을 요구한 것이다. 가눌 수 없이 무너진 그는 아내가 하자는 대로 했고, 그렇게 혼자가 된 그를 우리 부부는 보듬을 수밖에 없어 셋이 만남을 이어갔던 것이다. 이후 우리 부부와 그, 이렇게 세 사람이 만나는 동안 전과 같은 민망한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깍듯했고 과묵했다. 남편은 별다른 내색 없이 선배로서 혼자 된 후배를 묵묵히 챙겼고, 나는 나대로 어떤 틈도 보이지 않고 남편 옆에서 깔끔히 처신했다. 남편이 원하지 않았다면 그 만남은 진즉 깨졌을 테지만, 그렇게 갑자기 훌쩍 떠날 예감이 있었던 걸까. 결과적으로 나를 그의 곁에 둔 것이다. 게다가 그 무렵 남편이 하던 일이 잘되지 않았던 것도 그를 떨쳐내지 못한 현실적 이유였을 거라 짐작한다. 남편은 자그마한 개인 사업을 하고 있었고, 워낙 성실한 사람이라 빠듯하나마 자력으로 꾸려가고 있으려니 했다. 그에게 빌린 자금이 윤활유가 되고 있었던 것을 나만 몰랐다. 물론 그가 돈으로 남편을 조종하거나 심리적 압박을 가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남편의 입장은 또 달랐을 것이다. 자기 아내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시는 얼씬도 못 하게 단속하지 못했던 것은 그래서였을까. 나는 내심 불쾌했다. 남편이 나보다 사업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를 좋아하는 그의 마음을 이용해 나를 볼모로 모종의 거래를 한 것 같아 원망 어린 마음이 배어 나왔다. 어쩌면 그가 희생을 하고 있었을지도. 나에 대한 호감 하나로 본인 또한 그리 넉넉지 않은 형편임에도 선배에게 돈을 빌려줘야 했으니. 그게 사실이라면 그렇게라도 해서 내 언저리에 있고 싶었을 그가 안쓰럽기도 했다. 남편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더구나 속속들이 사정을 아는 상황에서 내가 그에게 뭘 해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우리는 한 가족으로 지냈다. 그는 정서적으로, 우리는 그에게 재정적 도움을 받으며. 그랬는데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에게 나를 돌봐달라는 부탁까지 남긴 채. 처음엔 네 사람이 세 사람으로, 세 사람이 두 사람으로 만남을 달리하는 동안 마음 또한 상황 따라 변했을 것이다. 한 가지 공통점은 멤버가 하나둘 떠나도 만남은 이어져왔다는 것이니, 이제 우리 두 사람은 언제까지 이 만남을 이어가게 될까. 그리하여 그와 나 둘 중 하나가 하늘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함께하게 될까. 그는 여전히 내 마음 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문고리가 안으로만 있어서 자신은 감히 당겨볼 엄두도 내지 못하는 듯이….
- 2021-11-23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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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김성동, "이젠 소설 쓸 엄두가 나지 않는다!"
- 긴긴 산중 살림을 정리하고 충주 시내 복판에 있는 아파트를 정처로 삼은 것도 어쩐지 그답지 않지만, 술을 자못 꺼리는 기색이야말로 이변이라면 이변이다. 마주 앉자마자 술부터 목으로 털어 넣는 게 김성동(75)의 관습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객이 들고 간 술병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6, 7년 만에 재회한 참이다. 완연하기론 무자비한 세월이 그를 훑고 지난 뒷자리의 스산함이다. 백조 털처럼 희디흰 머리칼이야 개결한 느낌을 주지만, 눈빛에 실린 기운은 예전과 딴판이다. 억병으로 취하고도 몽롱해지는 일 없이 시퍼렇던 눈빛에 이젠 우수와 피로가 반반씩 얹혀 있다. 김성동은 시대가 낳은 소설가다. 시대를 대표할 지경으로 이름을 드날린 작가이기도 하지만, 질곡의 한 시대가 그를 문학의 바다에 밀어 넣었던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양친이 살았던 시대의 파랑이 그에게까지 엄습해 평생의 족쇄로 작용했다. 소설가가 되지 않았다면, 문학이라는 쪽배를 얻어 타지 않았다면 벗어나기 어려웠을 굴레였다. “나 같은 출신이 정상적으로 살 수 있었겠나? 좀도둑, 부랑아, 또는 알코올중독자로 전락하기 십상이었다. 나에겐 그나마 재능이라는 게 있어 타락하지 않고 소설가로 살아온 셈이다.” 김성동이 말하는 ‘출신’이란 실로 광기에 찬 시대의 산물이며 천형처럼 가혹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빨갱이’의 자식, 불온한 씨앗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좌익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는 한국전쟁 와중에 처형됐고, 남편의 이념과 이상을 공유했던 어머니 역시 지역의 여성동맹 위원장으로 활동한 죄목으로 옥살이를 했다. 할아버지와 큰삼촌 역시 좌익 간부였다. 집안이 통째 소용돌이에 뛰어들었으니 이후의 풍비박산과 후유증의 크기와 깊이에 대해선 두말하면 잔소리. 김성동은 철들기 전부터 철창 없는 감옥 같은 세상에 던져졌으며, 철들고 나서는 두려움과 외로움 외에 자신의 내면에 들어 있는 정서가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저주와도 같은 붉은 낙인. 삐딱한 시선들. 전망 부재의 미래. 무엇보다 괴로운 건 연좌제의 사슬이었단다. “연좌제에 묶여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웠다. 공무원으로 취직할 수 없었고, 군인이 되더라도 장교가 될 수 없었으며, 사법고시에 붙을 경우에도 임용의 길이 막혀 있었다. 이게 연좌제에 따른 ‘삼불(三不)의 덫’이다. 출세를 꿈꾸기는커녕 당장의 호구지책이 막막했지. 그래 고3 때 출가해 절밥을 얻어먹고 살았다. 절 아니고는 갈 곳이 없었고, 중 아니고는 할 짓이 없었던 거다.” 승려 생활을 하다가 소설가로 등단했지? 장편 ‘만다라’로 문단과 대중을 사로잡았고. “세상에서 박수를 치더라고. 돈과 명예도 얻었다. 이렇다 할 ‘쯩’을 가지기 힘들었던 나에게 소설가라는 ‘쯩’이 주어진 건 하나의 활로였다. 연좌제가 나를 문학으로 밀어 넣은 셈이다.” 2018년엔 6권짜리 대하소설 ‘국수’(國手)를 출간해 저력을 과시했다. 자그마치 27년간의 집필을 통해 완간한 이 소설로 선생의 존재감이 새삼 부각됐다. ‘국수’를 완간한 감회가 각별했겠다. “일을 좀 해냈다는 안도감과 해방감을 느꼈다. 미심쩍긴 하지만 비로소 말년에 소설을 좀 썼다는 기분, 그런 거.” 미심쩍다? “제대로 된 소설이 아니라는 얘기다. 원래 15권으로 완성을 보려 했으나 미완에 그쳤으니까. 한 시대의 뒤안길에서 이름 없이 살다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장강대하로 펼치고자 한 의도에 미달한 작품이라 만족할 수 없었다. 그보다 아쉬운 건 순수한 조선말을 더 많이 찾아내 문장에 끌어들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국수’를 완독한 평론가가 있을까?” ‘국수’는 조선 말엽의 정치사회적 격변을 민중사적 관점으로 세밀하게 풀어헤친 작품이다. 세월 따라 허공으로 흩어진 전통사회의 토속어들을 푸짐하게 되살려내기도 했다. 고고학자가 유물을 발굴하듯이 지독한 집념으로 수집한 조선말을 문장에 대대적으로 도입했는데, 이는 ‘국수’가 가진 정체성의 핵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휴가 때 손에 든 책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대중의 관심을 사기도 했다. 나는 김성동 소설의 애호가지만 ‘국수’를 다 읽지 못했다. 조선말들의 도도한 행진에 질려서다. 오염되지 않은 순정한 토속어들은 아름답고 고귀하지만 소화하기 어렵더라. 평단의 반응은 어땠나? “반응? 평론? 그런 거 거의 없었다. 평론은 고사하고 ‘국수’를 완독한 평론가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을까? 순수한 우리말들 앞에서 다들 그냥 나가떨어진 것 같다.” 진땀을 빼게 하는 작품이 ‘국수’만은 아니다. 김성동이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는 구도소설 ‘꿈’에서도 조선말을 소낙비처럼 쏟아냈다. 원로작가 서정인은 ‘꿈’에 대해 말하길, ‘이를 악물고 읽었지만 완독에 실패했다’고 했다. 쉽게 읽히면서도 재미와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아니고선 독자들의 환심을 사기 어려운 게 요즘의 독서 시장이다. 조선말을 과도하게 구사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전혀! 조선말에 관한 나의 관심은 신앙에 가까울 정도다. ‘찔레꽃머리’라는 조선말의 뜻을 아나? ‘모내기철’을 뜻하는 단어인데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 조상들이야말로 타고난 시인이었다.” 언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천한다. 시대의 감수성을 반영하며 자생적으로 유전한다. 게다가 한글은 어떤 말이든 흡수하는 포용력을 갖고 있지 않나? “요즘의 우리말은 이미 왜색과 양색에 물들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적어도 시인과 소설가라면 모국어의 원형을 지켜낼 책무를 다해야 하지 않겠나? 순교처럼 치열하게.” 작가라면 다들 개성을 돋우기 위해 방울방울 피를 뿜듯이 글을 쓴다. 한국 작가들의 소설 품질에 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자기만의 빛깔을 내는 작가가 드물더라. 하나같이 영어나 일본어 번역체 문장에 길들여져 개성을 느끼기 어렵다. 저자의 이름을 가리고 작품을 읽어보면 한 사람이 쓴 소설처럼 문체가 다 똑같더라고. 문장 한 줄만 읽고도 누구의 작품인지 대번에 알 수 있는 문체를 구사하는 작가가 하나라도 있던가?” 김성동은 널찍한 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베란다로 들이치는 햇살을 비스듬히 받으며 의자에 고즈넉이 앉은 그의 몸에 음영이 짙게 드리워져 한 점 조각상을 바라보는 것 같다. 벽마다 가득 채워진 책장. 심심파적으로 쓴 서예들. 그가 ‘성자’라 부르는 부모님 사진들. 비승비속(非僧非俗)의 그가 새벽마다 그 앞에 좌정하는 미륵불상 하나. 예전의 산중 살림과 크게 다를 게 없는 집 안 풍경이지만 뭔가 밋밋한 분위기다. 문장의 미화 작업에 도가 튼 반면, 환경미화엔 젬병이라 그저 어질러놓고 사는 건 여전하지만 생기의 함량이 예전과 다르다. 전에는 발이 달렸는지 날개가 달렸는지 책들이 우르르 책상과 방바닥으로 내려와 춤을 추었다. 육필 원고 더미들이 덩달아 생동하는 스텝을 밝았다. 말하자면 전엔 창작 열기로 후끈했다. 그가 사는 곳이 창작의 천국 아니면 지옥임을 알게 했다. 한데 지금은 공기가 다르다. 연좌제와 사찰이 글 쓸 힘을 추동해 내가 아는 김성동은 소설이라는 기저질환을 앓는 이다. 온몸으로 소설의 현(鉉)을 탄주하는 인물이다. 소설이 써지지 않으면 마치 지구에 빙하기가 도래한 듯 몸을 떨며 절규하고, 날밤을 지새워 술을 마시며 뜻대로 풀리지 않는 작품에 사무쳐 각혈과도 같은 넋두리를 토하기를 밥 먹듯이 하던 사람이다. 그의 술타령은 과도해 징그러운 구석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순정한 문학정신엔 경이로웠다. 그런데 이제 소설을 손에서 놓았나? 75세란 물러설 나이? 그가 말하길 “힘이 빠져 소설을 쓸 엄두를 낼 수 없다”는 게 아닌가. “소설은 기운이 있어야 쓸 수 있다. 난 ‘국수’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했다. 나이도 있고, 이제 일을 벌이기보다 정리하는 단계다. 절대적인 에너지를 갖고 소설에 몰입했던 시절은 저문 셈이다. 여전히 글을 쓰긴 한다. 소설 대신 역사 에세이를.” 올해 72세인 하루키는 새벽마다 1시간씩 마라톤을 한다더라. 재능보다 체력으로 승부를 내는 세계, 그게 소설 쓰기의 한 측면일지도. “힘이 달리면 글을 물고 늘어질 수 없다. 단어 하나를 끝없이 파고드는 게 나의 글쓰기인데 그게 되지 않더라고. 몇 날 몇 밤씩 육필 원고를 쓸 수 있었던 과거의 체력은 이제 남아 있지 않다. 술 마시기도 힘에 부치더라. 마시다 보면 어느 순간 필름이 딱 끊기거든. 뭘 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소설을 쓰지 않는 선생을 예상하지 못했다. 죽는 그날까지 펜을 잡을 기세에 충천했었으니까. “요즘 내가 평생 맛보지 못한 안도감을 느낀다. 왜냐고? 연좌제 사슬이 풀렸기 때문이다. 2년 전에 어머니가 타계하면서 끈질기게 따라붙었던 사찰(査察)에서 비로소 해방됐거든. 어머니 작고 전에는 매달 한 번씩 기관원이 찾아왔었다. 그 공적 라인이 사라지자 평온감이 몰려들더라고. 한편으로는 서운하던데!” 후련한 게 아니고 서운했다고? “난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평생 글 감옥에 갇혀 살았다. 목이 조여드는 것 같은 강박감을 가지고 소설을 썼거든. 사방팔방으로 꽉 막힌 유폐의 심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 소설이었으니까. 소설이 아니고선 살 수 없었다. 바꿔 말하자면 연좌제와 사찰이 나로 하여금 글 쓸 수 있는 힘을 추동시켰다고. 그런데 사찰이 끝나자 긴장감이 확 풀리더군. 이게 소설을 쓸 힘을 앗아간 요인이기도 하다.” 비바람의 횡포가 있어야 꽃을 피우는 나무. 그가 체화한 창작의 생태계가 그쯤? 족쇄가 사라지자 맥이 풀려 소설 쓸 맛을 잃었다는 얘기에 삶의 역설이 느껴져 씁쓸하다. 감시와 억압의 공기를 마시며 우울하게 살아온 사람에게 뒤늦게 찾아온 평온과 고통의 산물인 소설의 빛, 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값진 인생의 열매일까. 노년이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좋은 때다. 눈길이 순해지고, 적당한 둔감으로 인생을 더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을 터인데, 김성동의 구름처럼 나른한 눈빛으로 보자면 그는 어느덧 바깥보다 안을 무심히 들여다보는 일에 익숙해졌나 보다. 맵찬 언설을 예사로 쏟아냈던 그의 입에서는 이제 온순한 언어들이 데굴데굴 굴러 나온다. 이런 그를 여전히 기습하는 건 외로움, 또는 허무다. “불경(佛經)은 가르치길 일체가 무상하니 집착을 놓으라 한다. 그러나 무슨 수로 집착에서, 욕망에서 벗어나겠나? 소설이라는 반성문을 통해 정직하게 나를 들여다보기를 거듭했지만 가벼워지기 어려웠다. 끈질기게 들러붙는 건 늘 외로움이라는 놈이었다. 실존의 고독, 이건 어쩔 수 없는 화두다. 더 큰 덩어리에서 보면 인생은 결국 허무한 것이고.” 보이는 것 없는 길 위에서 홀로 앓기. 인생사 그렇게 덧없더라는 얘기다.
- 2021-11-09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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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업도 히트", 잘 나가는 중년 연예인 사업가는?
- 우리는 사업을 하는 연예인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연예인이라는 신분으로 사업을 할 때 장점이 많기 때문일 것. 자본도 어느 정도 모아졌고, TV에 사업에 대한 내용이 자연스럽게 노출돼 홍보를 하기 용이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고운 시선만이 존재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우려를 넘어서 자신의 사업에서 성공한 중년 연예인들이 있다. 누군가는 꿈을 쫓아서,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서 등, 그 이유 또한 다양하다. 정보석, 빛나는 빵집 사장님 지난 1986년 데뷔한 연기 35년차의 배우 정보석. 그는 극 중 맡는 역할 때문에 '명품 악역 배우'로 통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성이 좋기로 유명한 배우다. 그런 그가 최근에는 푸근한 인상의 빵집 사장님으로 변신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정보석은 지난 6월 서울 성북구에 빵집 '우주제빵소'를 오픈했다. 18년 전에 지은 자신의 집을 개조한 것. 원래는 카페를 하려고 했는데, 빵이 맛있다고 난리가 나서 빵집이 됐다. 특히 둘째 아들이 제빵사, 아내가 바리스타의 역할을 각각 맡아서 하고 있다. 정보석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스스로 "빵 만드는 일 외에는 다 한다", "허드렛일 담당이다"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정보석은 최근 빵집 사장님으로 변신한 것에 대해서 여러 방송에 출연하면서 알리고, SNS인 인스타그램도 활발하게 운영 중이다. 빵집에서의 일상 사진을 게재하며 호기심을 자극하고 방문으로 이어지도록 하면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정보석은 연기 활동을 지속하면서 가맹점, 프랜차이즈 빵집을 내는 것이 목표다. 임채무, 빚 내면서까지 두리랜드 운영 배우 임채무하면 저절로 떠오르는 그 이름 '두리랜드'. 예전부터 아이들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놀이공원을 만들고 싶었던 그는 두리랜드 사장님이 됐고, 빚을 지면서까지 운영하고 있어 귀감을 사고 있다. 임채무는 지난 1989년 사비 130억 원을 들여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약 3000평에 달하는 테마파크 두리랜드를 오픈했다. 어린이들이 즐길 수 있는 놀이기구 위주로 구성됐고, 임채무는 30년 동안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아이와 함께 온 젊은 부부가 돈이 없어 주저하는 모습을 본 뒤로 입장료를 없애버렸다. 이로 인해 수년 간 적자 상태로 경영난이 일어 2006년부터 약 3년 간은 휴업했다. 그리고 2009년 30억 원을 들여 구조를 바꾼 후 재개장했다. 2017년 10월에는 미세먼지 등 환경적인 문제로 두리랜드를 휴장했고, 2년 6개월 만인 2020년 4월 24일 콘텐츠 복합문화공간으로 리뉴얼한 뒤 다시 문을 열었다. 인건비와 전기세를 감당할 수 없어 입장료도 받기 시작했다. 임채무는 놀이공원 리뉴얼 전 아내와 두리랜드 화장실에서 1년 간 살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더불어 그는 지난 9월에도 "앞으로도 갚아야 할 돈이 140억, 150억이 된다"고 밝혀 이목을 사로잡은 바 있다. 이와 같이 임채무는 자신이 빚을 감당하면서까지 두리랜드를 운영하고 있는 중이다.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하지만, 동심을 지키고자 하는 그의 진심은 많은 응원을 받고 있다. 이무송, 결혼정보업체 대표 우뚝 가수 이무송은 노사연의 남편 혹은 결혼정보업체 대표로 더 유명하다. 이무송은 지난 2010년 결혼정보업체 '바로연'을 론칭했고, 업계에서 손에 꼽히는 회사로 자리를 잡았다. 이무송은 론칭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결혼정보업체 사업 구상은 10년 전부터 해왔다"며 오랜 시간 고심한 결과라는 사실을 알렸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나이나 주변 상황에 못 이겨 결혼한 경우가 많았다. 서로에 대해 좀 더 잘 알고 결혼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서 "우리 부부는 많이 싸웠다. 싸움도 소통의 계기가 될 수 있어 부부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결혼에 대한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바로연이 잘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무송과 노사연이 스타 부부라는 데 있다. 이무송과 노사연은 각각 회사의 대표이사, 홍보이사를 맡고 있다. 그들은 각종 방송에 출연하면서 바로연에 대해서 직간접적으로 알렸는데, 이는 바로연을 이용하면 두 사람처럼 알콩달콩 살 수 있다는 왠지 모를 믿음을 갖게 했다. 여기에 실제로 이용해본 고객들의 만족스러운 후기가 더해져 현재의 위치에 이른 것으로 해석된다.
- 2021-11-0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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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혼 재혼, 상속 문제 막는 '부부재산계약'은?
- 통계청에 따르면 2020년 60세 이상 재혼 인구는 9938명으로 2010년(6349명)보다 56.5% 늘었다. 가족 상담 전문가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혼 커플의 수치까지 계산한다면 통계 수치보다 서너 배는 더 많을 것으로 내다본다. 황혼의 사랑이 이토록 증가하는 이유는 과거에 비해 길어진 평균수명과 황혼 재혼에 대한 달라진 사회적 시선 때문이다. 100세 시대를 맞이해 혼자 외로이 보낼 여생이 길어지고, 노년의 사랑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자유로워지면서 황혼 재혼을 결심하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설명이다. 이에 결혼정보업체에서는 늘어나는 중·노년층 고객 수요에 맞추어 60세 시니어 회원들을 따로 관리하는 추세다. 업계 종사자들은 “황혼재혼을 원하는 고객의 경우 가족관계, 경제력 등 현실적인 조건을 꼼꼼히 따지는 경향이 있다”라고 전했다. 인생 경험이 많은 시니어일수록 금전 문제나 자녀 반대와 같은 갈등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더욱 명확한 배우자 선택 기준을 세우는 것이다. 황혼 재혼을 고려한다면 다양한 현실적인 문제를 직면하게 되는데, 자식과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자녀들이 부모의 로맨스를 응원하면서도 재혼을 반대하는 현실적인 이유는 재산분배 때문이다. 현행 상속법에 따르면 상속인이 별도 비율을 나누지 않는 한, 법정 상속 비율은 배우자가 1.5, 자녀가 각각 1씩이다. 만약 1억 원의 재산을 가진 아버지가 재혼할 경우 새어머니가 6천만 원을, 자녀가 4천만 원을 상속받는 셈이다. 이러한 이유로 자식의 반대에 못 이겨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는 재혼 부부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실혼 관계의 배우자는 상속인의 지위를 갖지 못해, 오랜 시간을 부부로 지내며 배우자의 곁을 지키더라도 재산을 상속받을 권리가 없다. 따라서 사후 지금의 배우자에게 상속재산을 남기기 위해선 반드시 법률혼을 이루어야 한다. 황혼 재혼 부부들이 결혼 전에 상속 문제로 위기를 겪지 않기 위해서는 '혼전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좋다. 우리나라 민법에 규정된 ‘부부 재산의 약정’ 조항에 따르면, 부부가 혼인신고를 하기 전에 결혼 후의 재산관리 방법을 미리 정해 등기할 수 있다. 재혼 전에 자녀들에게 법정상속분 이상으로 증여하고 ‘증여받았으므로 앞으로 재산 문제로 다투지 않는다’라는 내용의 합의서를 작성해 공증 받는 등의 방법이다. 혼전계약으로 불리는 ‘부부재산계약’은 부부의 합의를 통한 계약 사항들을 만들고 공증사무소에서 전문가의 공증을 받으면 완료된다. 안전하고 공정한 계약을 위해서는 가급적 변호사 등 전문가의 도움과 함께 공증을 받는 것이 좋은데, 이때 전문가는 남편이나 아내의 중립적인 위치여야 한다. 유언장을 통해 상속분을 미리 정해두는 것도 방법이다. 법무법인 승원의 한승미 변호사는 “사후 분쟁을 대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유언장을 미리 작성하는 것이다”라며 “재혼 부부와 자식 간의 신중한 상의를 통해, 배우자와 자녀가 상속받을 몫을 각각 정해 유언장에 적으면 된다“고 전했다. 유언 내용과 작성일, 주소, 성명 등을 자필로 작성하고 도장을 찍은 자필증서도 유효하고, 공증사무소에서 유언 공증을 받을 수도 있다. 다만 혼전계약과 유언장을 공증 받았다고 해서 분쟁이 생긴 경우 계약서 내용대로 100% 법적 효력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고, 소송 시 법원에서 중요한 참고자료 정도로 인정된다. 법원 측은 "이혼·사망으로 인한 재산 분할이나 상속은 미리 알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전 계약은 100%로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입장이다.
- 2021-10-26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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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라도 내게 몰두하는 삶 기뻐" 시니어 유튜버 고정자 씨
- 소담한 집 곳곳에 푸릇한 식물들을 가꾼다. 키가 큰 식물, 이제 막 싹을 움 틔우는 식물, 가구를 감싸 안고 있는 식물 등 각양각색이다. 방 안에는 채 완성하지 못한 그림이 이젤 위에 놓여있고, 완성된 그림은 액자 속에 보관돼 켜켜이 쌓여있다. 카메라 앞에서 말하다가 버벅댄 게 멋쩍어 웃음 짓다가도, 이내 능숙하게 식물과 그림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지난해 유튜브를 시작한 실버 크리에이터 고정자(76) 씨 이야기다. 유튜브 채널명이자 고정자 씨의 활동명인 ‘지고메’는 알파벳 G와 영어 단어 ‘Gourmet’을 합해서 얻은 이름이다. G는 성씨인 ‘고’에서 따온 것이고 gourmet에서는 미식가, 식도락가,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는 뜻을 가져왔다. 유튜브를 시작하면서 새 이름을 얻은 셈이다. 새로 얻은 건 이름뿐만이 아니다. 요리, 플랜테리어(식물 인테리어), 그림까지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게 되면서 창작자로서 새로운 삶까지 얻었다. “창작자로 사는 게 즐거워요. 멈춰있지 않고 끊임없이 잘 흐르고 있는 기분이 들게 하거든요. 생동감 같은 거요. 유튜버 지고메는 저에게 새로운 세상으로의 문을 연 것인데요,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보니 흥미롭네요.“ 비로소 발견하게 된 '나' 젊은 시절에는 식당을 운영하면서 가족들을 돌봤다. 가족이 있어 행복했지만 가족을 돌보느라 정작 자신은 돌보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남편과는 사별하고 자식들은 모두 출가했다. 자식들은 자라 손주를 보고 고정자 씨는 어느새 할머니가 됐다. 자연스레 혼자 집에 남겨졌지만 외로움도 잠시,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며 진짜 자신을 찾아가는 기쁨을 맛보게 됐다. “비록 할머니지만 나이 들수록 '나'와 잘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로 태어났으니 나답게 인생을 사는 게 맞다 싶어요. 가족이 있을 땐 그들의 삶을 돌보느라 나에게 집중하지 못했어요. 가족이 있어 행복한 삶이었지만 정작 나에게 많이 소홀하게 되더라고요. 가족에게 최선을 다했으니 이제 혼자여도 즐거운 삶이에요.” 자신에게 몰두하면서 하나둘씩 좋아하는 일들을 찾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손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고 잘 했다. 결혼하고 나서는 아이들 옷을 만들어 입히고 간식까지 손수 만들어 먹였다. 손으로 만지고 가꾸고 그리는 것. 그것이 고정자 씨를 기쁘게 하는 것들이었다. 요리를 하고, 식물을 가꾸고, 그림도 배웠다. 유튜브가 선생님이었다. 유튜브를 즐겨 보다 보니 스스로의 삶도 기록하고 싶어졌다. “평소 유튜브를 즐겨 보다가 나의 삶을 기록하고 싶어졌어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혼자도 잘 지내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내다 보니 저도 모르고 있었던 저의 모습이 보여서 영상제작이 재미있게 느껴져요. 올해 76세가 됐지만 그런데도 나에게 당당한 삶을 살아내고 싶어서 '싱글라이프'라는 콘텐츠를 생각하게 됐어요.” 크리에이터 ‘지고메’로서의 삶 유튜브는 고정자 씨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모습을 꾸준히 담으니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응원해줬다. 지고메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오히려 잃어버린 ‘나’를 찾고 몰입하게 됐다. “유튜브 채널에 제가 할 수 있고 좋아하는 것들을 소개하고 있어요. 저도 유튜브 채널에 그려진 제가 새롭지만 진짜 '나'를 발견한 것 같아 더욱 애착이 가요. 매일 유튜브 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관심으로 봐주고 응원해주셔 살아가는데 활력소가 되고 있어요. 영상을 완성할 때마다 성장했다는 기쁨도 있어요. 제 삶은 유튜버 지고메가 되기 전과 후가 정말 달라졌어요.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고 몰입하는 시간이 행복합니다. 쉽지 않지만 도전하고 나면 오늘도 잘 살아낸 것 같아 만족감이 커요.” 크리에이터를 전업으로 삼는 이들은 남모를 고충을 겪기도 한다. 과도한 관심을 받아 신분이 노출되기도 하고, 때로는 콘텐츠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하지만 고정자 씨는 크리에이터로서 삶에 만족하는 중이다. 구독자나 조회 수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튜버 지고메는 구독자 몇 명 달성이나 조회 수 몇 회 달성 등 여느 크리에이터 같은 목표를 세우지 않는다. 그저 좋아하는 일로 자신을 돌보고, 때로는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자신의 모습을 반갑게 맞이하며 즐겁게 지낼 뿐이다. “제가 진심이니 사람들도 그걸 알아보는 듯해요. 시작도 하기 전에 걱정이 앞선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예요. 인생은 소중하잖아요. 저에겐 다 좋은 경험이에요. 저는 지금, 이 순간을 잘 느끼고 싶어요. 뒤돌아볼 때 '나에게 미안하지 않게'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그냥 매일 꾸준히 나답게 살려고 합니다. 다만 영상에서 보이는 제 모습이 그렇듯 영상을 시청하는 분들도 좋은 시간 되길 바랍니다.”
- 2021-10-2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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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옥의 진심, “가림없이 내어줘야 공감 얻어”
- 문장옥 수필가의 호는 효재(效在)다. 효재란 ‘누군가 본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보자’라는 뜻이다. 자신은 아직 그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해서 부끄럽게 여긴다고 말한다. 그녀는 교사였다. 그러나 마흔여덟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교직을 내려놓아야 했던 개인적인 아픔이 있었다. 그 아픔을 딛고 수필가로 새로운 인생을 연 그녀의 삶을 한 편의 담담한 수필을 읽듯 들어보았다. 문장옥 수필가가 마흔여덟 살에 교직을 내려놓게 된 것은 그즈음 두 아들이 사춘기를 맞아 방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가정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탓이 아닐까 싶어 지난 삶이 후회되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독립해 나갈 때까지만이라도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막상 그만두고 나니 교직에 대한 아쉬움이 컸고, 내 인생의 후반기를 어찌 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엄습했습니다.” 고민 끝에 시작한 것이 수필 쓰기였다. 선생님이란 호칭으로 살아온 20여 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작가라는 호칭을 갖고 보니, 독자에게 감동을 줄 만한 작품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했다. 그러나 작품을 통해 ‘나 자신의 삶을 정리하며, 내게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자신을 설득한 다음부터는 수필가로서의 생활에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다. 제2의 인생이 마침내 그녀에게 다가온 것이다. 몸짓으로 써내려가는 새로운 인생 수필가로서 문장옥은 두 권의 수필집을 냈다. 첫 번째가 ‘행복정원에 들다’, 두 번째가 ‘내 안에 불꽃’이다. 그녀는 지난 8월에 낸 ‘내 안에 불꽃’을 통해 독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진심 어리게 전달하고 싶다고 말했다. “에세이란 문학의 특징은 다른 문학 장르와 달리 작가의 진솔한 삶이 그대로 녹아내려 인품의 향기를 뿜어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저의 아픔과 회한, 그리고 부끄러운 모습까지 솔직히 드러내어 독자에게 공감을 주고자 했고, 작은 위안과 교훈이라도 함께 나누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독자에게 죽음과 맞닿게 되더라도 삶의 열정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그 열정을 잃어버리는 순간, 삶의 이유도 보람도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잘것없는 작품일지 모르지만 제가 작가로 살아가도록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원동력이라 생각합니다.” 삶의 열정을 잃지 않고 온몸으로 쓰다 자신의 모든 것을 진솔하게 전달하고 싶다는 문 작가의 말처럼 ‘내 안에 불꽃’에는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본인의 암 수술 경험까지, 그녀의 삶에서 죽음은 잔인하게 왔다 사라졌다 다시금 나타나는 실제적 위협이었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 그녀는 죽음 자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님을 보내면서, 저 자신이 네 번의 큰 수술을 하면서 삶의 옆에는 죽음이 항상 함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웰다잉이란 건강한 정신을 갖고 있을 때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가까운 체험은 자연스레 인생에 대한 담담한 관조를 갖게 했다. 그럼에도 인생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기도 하다. “나이가 칠십이나 되었는데도 인생이란 단어를 논하는 것은 자신이 없어요. 아직도 어린애 같은 천진함과 호기심이 남아 있어, 남편에게 가끔 핀잔을 듣곤 합니다. 저는 ‘이 나이에 뭘 한다고?’란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삶의 열정을 잃지 않고 무엇이든 도전해보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뒷방 늙은이’로 전락하는 신세는 면하지 않을까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참다운 나 자신의 말처럼 문 작가는 지금의 삶을 하나의 도전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죽음에 대한 담담한 수용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도전으로서의 작가 인생은 생활적인 면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자신의 서재에 이름을 붙였다. ‘진아당’으로 ‘참 내가 있는 집’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참다운 나’란 어떤 사람일까. “자신에게 정직하고 거짓이 없으며, 진실하고 참되며, 타고난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삶의 근원이자 행복의 근원이 아닐까요? 윤동주 시인이 자신의 인생관을 보여준 ‘서시’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처럼 저 역시 그런 삶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녀는 삶이 좋은 수필의 재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나날이 누군가를 기쁘게 하고, 도움이 되고, 작으나마 행복을 줄 수 있을 때, 소박하지만 감동 있는 삶이 될 때, 그것이 글이 되었을 때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삶은 어떤 사람들의 삶에 남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녀가 교사 생활을 하던 시절의 두 제자가 바로 그들이다. “한 사람은 제가 초등학교 교사 시절 1학년 학생으로 만난 제자인데, 지금은 서울의 모 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있습니다. 제가 은퇴한 후 20년 넘도록 스승의 날은 물론 가끔씩 저를 찾아와 식사도 하고 수다도 떠는 친구 같은 제자예요. 또 한 사람은 제가 중등교사 시절에 만난 문제 학생이었는데, 이젠 어엿하고 반듯한 건축회사 중견 간부가 되었습니다. 헤어진 후 25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어렵게 나를 찾아내 보은하는 고맙고도 잊을 수 없는 제자들이랍니다. 정말 제 인생에서 ‘삶의 보람과 의미’를 알게 해준 귀하고 귀한 사람들입니다.” 남편은 행복을 공유하는 소중한 존재 그녀는 나이가 들어도 절대로 잃고 싶지 않은 것으로 ‘자유로운 삶’을 들었다. 어떻게 보면 작가로서 엄격한 법칙에 속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자신이 원해서 선택한 속박이다. 더 자유로운 삶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주부로서 가족에게 봉사해야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이고 사랑을 품은 가운데 능동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부부는 오래전부터 각방을 쓰고 있지만 누구보다 잉꼬부부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해요. 가급적 서로 간섭을 줄이고, 한밤중 잠이 깨면 언제든지 일어나 독서와 글쓰기, 사색을 즐기며 살아가니,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처럼 그녀에게 남편은 행복을 공유하는 소중한 상대다. 노후의 행복을 꼽을 때 그녀는 무엇보다 먼저 남편을 떠올릴 정도였다. “자녀들이 독립해 집을 떠난 지금은 남편과 한 방향을 바라보며 서로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저희는 동네 공원을 매일 저녁 한두 시간씩 산책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매월 한 번씩 함께 여행을 갑니다. 젊은 시절에 누렸던 낭만적인 느낌은 약해지긴 했지만, 이젠 서로가 익숙한 처지라 같이하는 시간이 편안해요.” 남은 여생 동안 더 많이 사랑하고 베풀 것 문 작가는 회갑이 된 기념으로 첫 번째 수필집 ‘행복정원에 들다’를 냈고, 칠순 기념으로 두 번째 수필집 ‘내 안에 불꽃’을 냈다. 두 권의 책을 냈지만 쓰면 쓸수록 걷고 있는 이 길이 결코 쉽지 않은 여로임을 절감한다. 그녀에게는 여전히 두려움이 있다. 독자에게 큰 감동을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아쉬움이며 동시에 다시 펜을 잡게 만드는 동력이기도 하다. “만약 세 번째 책을 낸다면, 남은 여생 동안 더 많이 사랑을 나누고, 베풀며, 도전하고, 독서와 글쓰기에도 게으르지 않음으로써 푸근한 감동으로 다가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문장옥이라는 수필가 안에 숨길 수 없는 벅찬 감흥이 밀려 왔다. 그녀의 진솔한 민낯이 사랑스럽다.
- 2021-10-2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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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 만에 재결합한 부부, 두 사람의 속내는?
-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지난달 나는 아내와 재결합했다. 20년 만이다. 지금 내 나이는 70, 긴 외도 끝에 이른바 조강지처의 치마폭으로 ‘기어들었다’. 나는 서울의 명문 치대를 나와 강남에 치과를 개업하고 큰 기복 없이 순탄하게 운영하고 있다. 당시 강남은 지금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선견지명으로 일찌감치 터를 잘 잡았다. 병원에 간호사도 여럿 두었는데 그중 하나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우리 병원의 수간호사 격이라 나이도 제법 있어, 나와는 고작 열 살 남짓 차이 났다. 집이 가난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어린 나이에 간호조무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이 바닥에서는 베테랑에 속했다. 그녀는 40 즈음에, 그러니까 내가 쉰 살 되던 해 우리 병원에 들어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위 말하는 나의 오피스와이프가 되어주었다. 치과 업무를 속속들이 안다는 것은 나의 일과 나의 삶을 동시에 이해한다는 의미였다. 나의 꿈과 나의 좌절을 공감하며 위로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아내한테서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더구나 어린 나이에 사회와 부딪히며 나름 내공을 쌓은 덕에 타인에 대한 이해심도 깊었다. 무엇보다 영리하고 야무졌다. 급기야 나는 그녀와 딴살림을 차렸다. 이혼은 하지 않았다. 아내가 원하지 않기도 했지만 그까짓 절차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자와 살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내겐 더 바랄 것이 없었으니까. 그럼 아내는? 아내는 사랑하지 않았냐고? 아내는 아내고 그녀는 그녀였다. 뻔뻔하다고 나를 욕해도 하는 수 없다. 나도 안다. 나는 욕을 먹어도 싸다. 단순한 바람으로 그쳤다면 차라리 덜 욕을 먹었으려나. 하지만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함께 살수록 뒤늦게 참사랑이 찾아온 거란 믿음이 솟았고, 그녀와 모든 것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랬던 그녀와 헤어진 후 돌이켜보면 아내와 정식으로 이혼신고를 하고, 그녀와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남는다. 그러면 적어도 쪽박은 차지 않았을 테니까. 정식 부부였다면 뭐라도 공동 명의로 남은 게 있었을 테니. 무슨 소리냐고? 그녀는 함께 살던 아파트와 내 전 재산을 독차지한 후 나를 내쫓았다.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그녀 명의로 아파트를 사줬고, 집을 나온 나는 자연스럽게 그 아파트에 들어가서 살았다. 그녀의 아파트였지만 사는 동안은 ‘우리의’ 아파트였던 셈인데, 헤어진 마당에는 엄연히 ‘그녀의’ 아파트란 사실에 나는 치를 떨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치과 수입을 그녀가 관리하는 일도 나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 살림을 하는데 여자가, 더구나 야무진 그녀가 돈 관리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녀는 재테크에도 제법 소질이 있어서 적절한 투자로 돈을 불려나가는 재주도 있었으니까. 20년간 아내에게 보내는 생활비를 빼놓고는 내 돈도 그녀 돈이요, 그녀 돈도 그녀 돈인 줄 진정 난 몰랐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의 20년 생활을 청산하면서 몸뚱이만 남게 된 것이다. 헤어진 후 내 수중에는 생활비를 넣고 빼고 하던 허드레 통장 하나뿐. 잔고라곤 겨우 이삼백만 원. 그 통장과 옷가지만 들려서 나더러 나가라고 했다. 법에 호소하여 찾아올 돈이라곤 전혀 없었다. 실상 나는 돈보다 그녀와 헤어지게 된 것이 더 충격이었기 때문에 재산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왜 쫓겨났냐고? 나도 그걸 모르겠다. 20년을 함께 살았으면 부부와 다를 바 없건만, 지난 20년 동안 그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나와 살았던 것일까. 그 길로 아내를 찾아갔고, 아내는 나를 흔쾌히 받아주었다. 나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병원과 아내의 집, 아니 이젠 내 집을 오가며 지내고 있다. 아내와 나는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는다. 아내가 지난 이야기를 꺼내며 바가지를 긁지도 않는다. 언제 폭탄이 터질지 조마조마하지만 겉으로는 평온이 유지되고 있다. 여기까지가 내가 20년 만에 아내와 재결합한 사연이다. 한 달 전 나는 남편과 재결합했다. 내 나이 68세, 남편이 집을 나간 지 20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나갈 때처럼 올 때도 빈 몸, 빈 손으로. 남편을 선뜻 받아준 나를 주위에서는 등신이라고 했다. 등신 중에서도 상등신이라고 했다. 지난 세월 그 고생을 한 것이 억울하지도 않냐면서.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 인간을 받아줬냐는 거다. 안 할 말로 멀쩡하게 함께 살던 남편도 나이 드니 귀찮아서 떼놓을 궁리를 하는 판에. 혹시 데려다놓고 복수하려는 거냐고까지 했다. 혹자는 남편이 그렇게 좋냐며, 그렇게 사랑했는데 지금까지 어떻게 참고 살았냐고 진심으로 물었다. 사랑? 솔직히 그건 모르겠다. 남편을 사랑해서 받아준 거냐고 묻는다면 ‘내 마음 나도 몰라’라고 할 수밖에. 소설가 이외수의 아내 전영자 씨가 몇 년 전 졸혼했다가 뇌출혈로 투병 중인 남편을 돌보기 위해 최근에 다시 합쳤다지만, 내 남편은 몸이 아픈 것도 아니고 졸혼으로 따진다면 우리 부부는 이미 20년 전에 남남이 되었지 않나. 그런 사이에 무슨 새삼스럽게 사랑 타령…. 그럼 돈 때문이냐고? 나이 70에 손 떨려서 앞으로 얼마나 진료를 더 할 수 있을 것이며, 게다가 이미 소문이 자자하게 났을 테니 환자인들 제대로 올까. 이쯤 되면 내 행동에 대한 명분이 필요하다. 아비투스라는 게 있다. 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제2의 천성을 일컫는 말이다. 한마디로 내가 속한 계층,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즐겨 하는 일 등 타인과 나를 구별 짓는 취향, 습관, 아우라를 일컫는다. 즉 남편을 받아들인 것은 나의 내면화된 천성에 기인한 품위의 문제라는 것이다. 나아가 20년을 함께 살아온 두 사람이 결국 헤어진 것 또한 아비투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천성과 그 여자의 바탕이 다름에서 온. 걸레를 아무리 깨끗이 빨아도 행주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결국 자신의 본색을 드러낸 것이리라. 즉 내가 남편을 받아들인 건 그를 끔찍이 사랑해서도, 나의 현실에 부족함이 있어서도 아니다. 눈물도 말라버린 그 수많은 날들이 곰삭아 이제 독립과 자유로 보상을 얻게 된 마당에 새삼스럽게 그를 위해 밥상을 차리고 속옷을 빨아주는 게 난들 즐거우랴. 아니 그런 것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 무엇보다 나의 내면화된 선비 기질과 인격이 질척함이나 천박함과 함께 뒹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번 재결합은 나의 높은 자존감의 선택이다. 중년에 떠난 남편이 초로의 노인이 되어 내 곁으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낯설지만 코 고는 소리만큼은 그대로다. 부부로 이 남자와 남은 시간을 잘 살아내느냐 마느냐는 나 하기에 달렸다. 나의 아비투스를 신뢰하며!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2021-10-21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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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을 담고 닮은... 남양주 모란미술관
- 마땅히 쏟아부어야 할 재능을 넘치도록 쏟아붓고서야 존립이 가능한 게 사립미술관이다. 사립미술관 운영, 이는 사실 고난의 장정이다. 열정, 인내, 감각, 혜안, 리더십은 기본이고, 무엇보다 자금력을 보유해야 한다. 극소수 사립미술관 외엔 다들 만성 적자에 시달리는 것이다. 해서 부침과 명멸이 잦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거나 사라질 운명에 처한 사립미술관이 한둘이겠는가. 이런 난처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모란미술관은 파랑을 잘 헤쳐왔다. 개관한 게 31년 전인데 까딱없이 ‘생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 똑똑한 미술관은 국내의 첫 번째 조각 전문 미술관으로 출현했다. 남양주시 화도읍 외곽의 시퍼런 산 아래에 있다. 모란미술관에 닿자마자 만나는 건 작품이다. 미술관 정문이 통째 작품이니까. 제목은 ‘문’(門)이다. 페루 출신의 조각가 알베르토 구즈만이 1994년에 모란미술관을 위해 만들었다. 사각형과 타원형으로 구성한 프레임 안에 세로로 내리지른 문살과 원통형 구멍들을 조합한 이 철대문은 파란색을 입어 세련미로 차분하다. 정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예술을 즐기라고 만든 작품일 테다. 모란미술관의 부지는 넓어 8000여 평에 이른다. 안으로 들어서면 너른 정원 곳곳에서 보기 좋게 자란 나무들과 화초들, 그리고 잔디밭이 뿜는 초록이 눈길에 가득 차올라 상쾌하다. 뒷산의 무성한 숲과 광활하게 펼쳐지는 푸른 하늘, 느릿느릿 평온하게 흐르는 구름 역시 미술관의 안온한 분위기를 북돋운다. 마음 둘 공간 없는 도시에서의 긴장이나 불안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풍경이다. 자연스러운 경관에서 쏟아지는 활달한 기운이 완연하다. 이 미술관을 설립한 이는 이연수(76) 관장이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는 한동안 그림을 그렸다. 한편 해외 미술관 순례를 통해 안목과 조예를 길렀고, 일찍부터 이상적인 미술관의 상을 그려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조용한 숲속에 미술관 하나 만들고 싶다는 염원을 키우게 됐다. 화가의 길을 잠시 걸었으나 마음은 좀 다른 방향으로 흘러 미술관 건립을 인생의 숙원으로 삼게 되었던 것. 그는 마침내 뜻을 이루었다. 국내 최초의 사설 공원묘원인 ‘모란공원’을 설립한 남편 홍석웅(작고) 회장의 전폭적인 지지와 조력을 얻어내고서였다. 조각정원의 물씬한 자연미 모란미술관의 구색을 볼까. 공간 중앙부에는 실내 전시회가 열리는 본관 건물이 있다. 단연 눈에 확 띄는 건 노란색을 칠한 박스형 건물인 수장고와 이마받이로 맞붙은 ‘노래하는 탑’이다. 피사의 사탑처럼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허공으로 치솟은 이 기묘한 노출 콘크리트 탑의 높이는 27m로 시각적 흥취를 자아낸다. 건축가 이영범(작고)의 작품이다. 2003년 미국건축가협회 뉴욕지부가 주는 디자인상을 수상한 건물로, 텅 비운 내부에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7개의 종을 매달아 바람이 불면 종소리가 울려 퍼지도록 설계했다. 현재 ‘노래하는 탑’엔 로댕의 조각상 ‘발자크’가 전시돼 있다. 로댕의 원작을 석고로 주조한 것으로 루브르미술관의 ‘주물 아틀리에’가 제작했다. 모란미술관은 조각 전시를 본분으로 삼았지만 본관 전시장을 통한 다양한 작품전도 동시에 병행해왔다. 회화, 설치, 영상, 사진 등 갖가지 장르를 선보이는 기획전을 꾸준히 펼쳤다. 그래도 초점은 역시 조각 전시에 있다. 이 미술관이 국내 어디에도 없었던 조각 전문 미술관을 표방하며 등장했을 때 미술동네 사람들은 지속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회화의 뒷전으로 밀려 대중성과 관심도가 낮은 장르가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30여 년을 굳세게 버텼다. 야심 찬 일련의 조각 기획전들을 펼쳐 과소 평가할 수 없는 성과를 거두었다. 모란미술관 측이 억누를 길 없는 자부심을 표하며 자랑하는 조각 관련 행사가 하나 있다. 개관 이듬해인 1992년에 펼친 ‘국제조각심포지엄’이다. 국제적인 지명도를 가진 해외 조각가들을 초청해 한바탕의 조각 페스티벌을 벌인 것이다. 이 행사의 백미는 참여 작가들을 3주간 체류시키며 야외 작업장에서 조각을 빚어내도록 한 프로그램이었다. 당시에 완성된 작품들은 곧바로 야외 조각장에 전시됐으며, 현재까지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어모으고 있다. 일개 사립미술관이 저지른 이벤트치고는 당돌하고 알찬 것이었다. 이 행사는 모란미술관이 부상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국내는 물론 국외까지 존재감을 과시했다는 게 아닌가. 길차게 자란 수목들 사이로 난 모란미술관 정원의 길들은 아름다워 산책 삼아 걷기에 좋다. 일부러 애써 단장하기는커녕, 식물마다 가진 제 재능을 알아서 맘껏 펼쳐보라는 듯 방임하기를 능사로 삼은 정원이다. 자연미 물씬한 야생 정원이라 할까. 푸근한 흙길과 잔디밭을 자박자박 밟으며 거닐 때 여기저기서 눈길로 뛰어 들어오는 사물들은 조각 작품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곳엔 국내외 작가들의 조각 100여 점이 산재한다. 미술관의 김유나 큐레이터에 따르면, 가장 인기를 끄는 작품은 백현옥의 ‘장날’이란다. 시골 장에 염소 일가족을 몰고 나온 노인을 조형한 작품이다. 조각이 일쑤 관심을 사지 못하는 건 과도한 추상성으로 골치 아프게 다가와서인데, 이 작품은 쉬워도 너무 쉬워 단박에 감정이입이 된다. 작가는 아마도 대중의 눈높이를 고려했을 것이다. 구본주의 ‘이 대리의 백일몽’도 재미있다. 곡예사처럼 절묘한 재주를 발휘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세속 사회의 풍정을 코믹하고 쾌활하게 표현했다. 한국 추상조각 1세대 작가 최만린의 ‘095-9’는 제목만큼이나 난해한 작품이다. 대지가 지닌 원초적 생명력을 심오한 추상성으로 구현했다. 자연과 예술. 둘 중 힘이 센 건? 이게 우문임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자연을 모방하고 추종하는 신하, 자연의 미와 비밀을 발견하기 위한 모험, 아마도 이게 예술이지 않을까. 예술을 만날 때 마음은 어느덧 자연으로 흘러간다. 사소한 풀 한 포기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모든 은성한 자연이 이미 예술을 품고 있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인데, 이 미술관의 후원엔 웬만한 예술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심원한 연못이 하나 있다. 깊고 서럽고 아름다운 전설이 스멀거리는 것만 같은, 아주 작은 연못이다. 이 연못 하나만으로도 모란미술관은 기억에 새겨진다. 밋밋한 눈길로 바라보며 그저 지나가는 이들이 많겠지만.
- 2021-10-15 0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