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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투어] Part 1-1. 지구 별을 함께 여행하는 부부
- 김 현 (전 KBS 방송연구실장ㆍ여행연출가) 우리 부부가 함께 배낭을 메고 여행을 다니게 된 것은 1989년 1월 1일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부터였다. 그 후 27년 동안 아내와 나는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1년에 2회~5회씩 해외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그동안 우리 부부가 여행한 나라만 해도 165개국에 달한다. 이 덕분에 우리 부부에게는 ‘대한민국 부부 배낭여행가 1호’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아내와 내가 오늘날까지 큰 탈 없이 부부여행가로 활동한 데는 무엇보다 가족들의 도움이 컸다. 생전의 부모님은 언제나 공항까지 배웅을 나오셔서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고, 두 아들 역시 부모의 배낭여행에 열렬한 응원을 보내주었다. 가족들의 이러한 이해와 양보가 없었더라면 결코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참으로 운 좋게도 서로 좋은 배필을 만나 어언 47년을 해로하였고, 그중 절반에 이르는 세월을 ‘부부 배낭여행가 1호’ 소리를 들으며 살아왔으니 정말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내는 인생의 반려자인 동시에 여행의 동반자인 셈이다. 그런데 내가 수많은 여행 중에서도 유독 배낭여행을 고집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한마디로 배낭여행이야말로 ‘복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배낭여행 경비는 패키지 상품의 3분의 2 정도면 충분하다. 게다가 모든 일정과 방문지 등을 여행연출가가 되어 직접 설계해 완벽한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부부가 함께 준비하는 과정에서 대화가 늘어나 금실도 좋아질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낭여행은 젊은이들만의 전유물로만 여기고, 나이가 들면 편안하고 우아한 여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부부의 생각은 좀 다르다. 오히려 나이 든 사람들이 배낭여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직은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이런 묘미에 이끌려 아내와 함께 배낭여행을 즐기기 시작한 것이 벌써 27년이 넘었다. 우리 부부는 여행을 하는 것은 ‘개안(開眼)’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한 번 여행을 다녀오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며 기회 닿는 대로 여행을 다녀와야겠다는 말들을 한다. 나 역시 여행을 통해 우리와 다른 문화를 접하고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좀 더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여행이야말로 자신의 인생을 가꾸는 것임과 동시에, 타인의 인생을 엿보면서 식견을 넓히는 창구이자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여행이 사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이 어려운 때 무슨 여행이냐고 되묻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행의 진정성이란 그런 단순한 가치를 뛰어넘는 것이다. 어느 시인이 여행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린 게 기억난다. “여행은 두 개의 앨범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나는 여행 중에 찍은 사진을 엮는 앨범이 될 것이고, 또 하나는 여행자의 가슴과 머릿속에 간직해 오는 앨범이 될 것이다.” 또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들도 한다. 그렇다. 나는 그중에서도 특히 부부가 함께하는 여행을 추천하고 싶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부부간에 대화할 시간이 적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대화라고 해봐야 아이들 걱정과 사회의 갖가지 사건 사고에 대한 스쳐 지나는 얘기 등이 전부일 테니까. 그런데 부부가 함께 여행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대화가 많아진다. 같은 시간에 같은 사물과 풍물을 대하게 되니 대화할 내용이 많아지는 것이다. 같은 대상이라 하더라도 여행을 다녀온 배우자로부터 일방적으로 듣는 것보다, 부부가 함께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는 것을 나는 여러 번의 여행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 부부가 함께 여행을 다니다 보면 저절로 정겨운 분위기 속에 빠져들게 되고, 나중에는 신혼과 같은 달콤한 느낌에 젖어들게 되니, 더 이상 부부여행의 장점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더욱이 가장 좋은 점은 여행을 통해 견문도 넓힐 수 있다는 점인데, 부부가 함께 견문을 넓히게 되므로 서로를 바라보는 시야와 이해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늘 좋을 수야 있겠는가. 부부여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아내는 남편을 위하고, 남편은 아내를 위하는 여행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는 점이다. 부부가 기껏 비싼 돈 들이고 귀한 시간 내서 온 여행인데, 다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먹거리나 볼거리에서부터 자신보다 배우자가 원하는 것을 해주려고 노력하다 보면 다툴 일도 많이 줄어들고, 어떤 면에서는 부부애가 더 돈독해진다고 볼 수 있다. 여행을 망설이는 부부에게 우리 부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여행은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못 간다고만 하지 말고, 꼭 한번 도전해 보라. 산다는 것은 즐겁게 사는 것을 뜻하지 않는가. 여행이야말로 인생을 즐기며 우리네의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해주는 활력소가 돼 줄 것이다. 또한 부부가 함께하는 여행을 통해 서로를 위해 투자하면서 낭만 속에서 몸과 마음을 살찌우다 보면 당연히 부부의 사랑도 자라게 될 것이다.”
- 2016-02-23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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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한류스타 ‘나’라고 전해라!
-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가수 이애란(예명·53)씨를 두고 하는 말이다. 작년 말, 전국을 ‘전해라’ 열풍에 빠트린 죄(?)를 물어 방송사와 광고계가 그에게 잇단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떴다’하는 순간 방송사 특집 프로그램, 휴먼다큐멘터리, 심지어 대한민국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까지 접수했다. 25년 무명생활을 한방에 날려버린 ‘백세인생’ 이애란의 2016년 소망을 브라보가 만난 사람이 들어봤다. “요즘 들어서 인기를 조금씩 실감하고 있어요.” ‘백세인생’ 가수 이애란씨의 하루는 바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무명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이제는 어딜 가나 말 그대로 스타급 대우다. SBS 아침방송 고정 리포터는 물론 인기 아이돌만 모신다는 MBC 설날 특집 ‘2016 아이돌스타 육상·풋살·양궁 선수권대회’에 초대돼 노래도 불렀다. 길거리, 식당 어디에서도 ‘어머, 이애란이야!’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듣는다. 인기를 얻기 전부터 존재했던 인터넷 팬카페는 매일 꾸준히 회원이 늘고 있다. 회원 수는 1월 현재 1428명이다. 그전에는 이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많이 늘었어요. 한 분, 한 분 저와 노래를 알게 되고 좋아하시는 분들이 가입하세요. 요즘은 자주 들어가 보지 못해서 팬들에게 미안하죠.” 오로지 노래만 생각한 25년 세월 어렸을 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워왔던 이애란. 20대가 되면서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1990년, KBS 일일드라마 주제가 공개 오디션이 있었어요. 거기서 저 포함해서 3명이 마지막 오디션을 봤는데 제가 낙점된 거죠. 그런데 어떤 상황인지 가수가 부른 노래는 나가지 않고 곡만 드라마에 사용하더군요. 정작 제 목소리는 전파를 타지 못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실망할 법도 한데 지금까지 노래를 부르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소소한 아르바이트도 노래가 아니면 안 했다. “그래도 노래할 곳은 꽤 있었어요. 풍물 장터 야시장이라고 겨울만 빼놓고 동네마다 많았어요. 서울에도 있었고요. 야시장에서 초대해주시면 가서 노래를 불렀죠.” 당시 야시장마다 기본적으로 노래 반주를 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가수를 초대하면 그 사람 음정에 맞춰 연주해줬다. 뭐든지 생음악으로 불렀던 때다. 길고 긴 ‘백세인생’과의 인연 이애란이 노래 ‘백세인생’ 가락을 처음 접한 것은 1995년 한 국악학원에서다. 그때 녹음을 했지만 상업적인 목적은 아니었고 장구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정도였다. “장구가 배우고 싶어서 국악학원에 갔었어요. 그때 선생님이 장구랑 민요도 같이 가르치던 분이신데 선생님이 그 노래(지금의 백세인생)를 민요로 부르는 것을 귀동냥했어요. 저도 장구 치면서 흥얼거리곤 했어요. 한 달 넘도록 장구채 잡는 방법만 가르쳐서 그만뒀는데 노랫가락 하나는 익히고 나온 거죠.” 이애란은 이렇게 알게 된 노래를 1998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무대에서 관객들의 박수에 맞춰 불렀다.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그 모습을 보고 부산 시장거리에서 활동하던 품바 가수 명월이 알려달라기에 노래를 가르쳐줬다고. “그런데 품바라 그런지 왜곡이 많이 되더라고요.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상황에 맞게 다 개사를 해버리잖아요. 2012년에 김종완 작곡가님을 만나 악보를 보고 알았죠. 우리가 왜곡해서 부르고 있었구나. 그 이후 가사 수정도 많이 하고 다시 처음부터 배운 거죠.” 힘든 시절 장구를 치면서 익혔던 노래가 인생을 바꿔주는 열쇠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2012년 사촌 오빠의 소개로 첫인사를 나눴던 작곡가 김종완씨와의 인연도 기막히다. 알고 보니 그가 흥얼거렸던 ‘백세인생’의 원작자이자 데뷔곡이 될 뻔한 드라마 주제가 작사가였다. 현실은 영화만큼이나 극적이었다. 작곡가와 새롭게 노래 녹음을 하기 위해 5, 6개월여 피나는 연습을 했다. 새벽 2시건, 3시건 될 때까지 말이다. “2013년 드디어 노래 녹음을 했어요. 1995년 장구를 배울 때만 해도 ‘백세인생’의 원제목이 ‘저세상이 부르면 이렇게 답하리’ 였는데 2013년에는 ‘저세상이 부르면’으로 바꿨죠. 작년 2월 말 발표 때는 원래 100세까지만 있던 가사를 150세까지 늘려 다시 썼어요.” 제목도 ‘백세인생’으로 완전히 갈아 끼웠다. 고령화 사회, 장수사회로 접어들면서 생겨난 ‘백세인생’이란 말이 저승에서 오라는데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노래 가사와 잘 어울렸다. “제목 안에 가사 내용이 다 담겨 있는 거 같아요. ‘백세인생’에는 한 가지가 아니고 여러 가지가 감정이 있습니다. 나 대신 네가 좀 내 마음을 좀 전해줄래? 하는 것도 있고, 또 덩실덩실 리듬도 있고, 우리가 노래 가사처럼 정말로 150세까지 살 수 있다면 하는 욕심도 담긴 노래입니다.” 가장 많이 생각나는 사람은 아버지 인기몰이가 시작되고 하루하루가 바빠질수록 먼저 떠나신 부모님 생각이 부쩍 많이 난다. 다른 매체에도 소개됐지만, 작년에 이애란씨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애란의 영원한 팬이자 버팀목이었던 아버지를 생각하니 목소리가 애잔하게 깔린다. “아버지는 이 노래를 처음부터 좋아하셨어요. 작년 2월에 음반이 ‘백세인생’으로 나왔다고 하니 제목이 좋다고도 하셨어요. 좋아하시기만 했지 제가 방송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늘 가슴이 아파요. 그리고 빨리 못 보여드린 게 가슴에 한이 남았다고 할까요? 맺혔다고 할까요?” 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가끔 아버지 팔을 베고 누워서 ‘백세인생’의 한 구절을 불러드리기도 했다. “90세에 저 세상에서 또 데리러 오거든……. 재촉말라 전해라.” 달리 아픈 곳이 없어서 100세까지는 사실 거라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게 운명하셨다. 지방행사 때문에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게 못내 죄스럽다. 노래하는 이애란에게 아버지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도전이 아름다운 거지 후퇴는 하지 마라. 그리고 네가 후회할 일은 절대로 하지 마라” 라며 항상 응원을 해주던 한 사람이다. 젊은이들의 유희 ‘전해라~ 짤방’, 인생역전 견인차 이애란의 인기는 젊은이의 기발함이 빚어낸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짤방이란 ‘잘림방지’의 준말로 내용에 상관없이 사진이나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을 말한다. “2014년 11월 말에 ‘백세인생’ 노래 영상을 만들어서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조회 수가 빠르게 올라가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눈여겨봤던 최준원씨가 소속사에 얘기한 거죠. 제 영상으로 짤방이라는 걸 만들고 싶은데 만들어도 되느냐고요.” 최씨는 한국방송예술진흥원 학생이면서 이애란과 같은 소속사의 트로트 음악 작·편곡을 겸하고 있는 전문 작곡가다. 지금은 이애란씨와 이모, 조카 하는 사이라지만 짤방을 만들 당시에는 안면만 있는 정도였다고. 소속사에서도 최씨의 얘기를 들으니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 생각해 흔쾌히 승낙했다. 작년 7월, 인터넷에 첫 번째로 유포된 짤방은 ‘간다고 전해라, 못 간다고 전해라’였다. 이애란의 감정 실린 표정과 ‘전해라’라는 궁서체 자막은 묘하게 어울리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특이하고 재미있는 것에 관심 두는 젊은이들, 신선한 것을 찾아다니는 방송 작가, 기자들의 눈에 띄면서 마침내 세상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전해라~ ‘백세인생’이 됐다. 이애란의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 결혼에 관해서 물어보려 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애란씨. 살아생전 아버지도 묻지 않던 질문이다. 노래하다 보니까 결혼을 해야겠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단다. 노래를 벗 삼아 버텨온 삶이다. 그래도 이상형은 있다. 자상하고 정말 착한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사람은 다 착하지만, 자신을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2016년을 맞이하는 각오도 함께 물어봤다. “제 욕심이겠지만 트로트를 발판으로 한류 스타가 되고 싶어요. 바람이고 욕심이죠. 작년은 여러분들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2016년도에는 보답을 하는 한 해를 만들어야죠. 드라마에 출연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드라마에 노래교실이 나올 때도 있는데 초대해주시면 좋겠어요(웃음).” 한류스타를 예약해두고 있는 인기가수답게 이애란씨와의 인터뷰는 사실 쉽지 않았다. 그녀의 일정대로라면 아직도 만날 수 없는 상황. 이동하는 차 안에서, 식당에서, 걸어가면서 틈틈이 이애란씨와 인터뷰했다. 방송 촬영 모습도 지켜봤다. 힘들만도 한데 사진을 찍겠다고 길게 줄을 선 팬들 하나하나 웃으면서 사진을 찍어주고 악수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독자에게도 한 말씀 부탁했다. “무조건 힘내시고 파이팅하라 전해라~!” 100세 인생은 60세부터 시작이기 때문에 꽃중년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60세는 너무 어리다는 것. 이애란의 인생도 이제부터 시작이니 모두 젊은 마음으로 100세 인생 살아가기 바란다고 전했다.
- 2016-02-1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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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T8 2막에서 이룬 꿈] 성악가로 제2의 인생을 향해 한 걸음 내딛다
- “대학생일 때는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던 환경이었죠. 고등학교 때는 시골에 있었으니 좀 여유 있게 놀 수 있었죠. 노래를 좋아했어요. 주위에서 목성이 좋다고 하고 발음도 명확하다며 성악을 하라고 하더군요.” 한영섭(韓永燮·61) 인간개발연구원 원장은 성악이라는 자신의 오랜 꿈을 더듬어보기 위해 10대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갔다. 그만큼 오래된 꿈을, 그는 50여 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비로소 이루게 됐다. 지난해 12월 10일 꿈에 그리던 무대에 서서 그간 갈고닦은 자신의 실력을 선보인 그에게 꿈을 이룬 제2의 인생 담론을 들어본다. 운동에 재능이 있고 배짱이 있었던 한영섭 인간개발연구원 원장은 얼떨결에 교련 과목에서 연대장을 맡게 됐다. 당시 교련은 굉장히 비중이 큰 과목이었다. 그래서 방과 후에 교련 연습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구령을 하려면 목소리를 키워야잖아요. 산에 가서 차렷, 열중쉬어를 많이 외쳤어요. 마이크 없이 질러대는 거예요. 그때 목이 많이 개발됐죠.” 대학교를 다니면서는 레코드를 자주 사게 됐는데, 특히 가곡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가 인생의 노래로 꼽는 곡도 그때 만나게 됐다. 양명문의 시에 변훈이 곡을 붙인 가곡 ‘명태’였다. “다른 가곡들도 좋았지만 ‘명태’를 듣는 순간 이런 노래가 있구나 싶었어요. 엄청나게 따라 부르면서 외우곤 했죠. 학교를 다닐 때도 부르고 버스 안에서도 부르고. 그렇다고 성악의 길을 간 건 아니고 그보다는 좋은 공부를 해서 직장을 가야겠다 싶어 전경련에 들어갔어요.” 여기까지 살아온 내공이 있는데 그걸 못하랴 그가 전경련에서 맡은 건 CEO 교육이었다. 그래서 연사를 초청하다 보니 당연히 그중에 성악가들도 있었고, 그들과 자연스럽게 친하게 됐다. 그런데 그들의 공연을 보다가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런 무대에 서봤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내가 혼자서만 불렀지 교육을 받은 건 아니잖아요. 노래는 사사를 받아야 하더라고요. 우연한 기회에 감성CEO 오페라 과정에 들어가서 성악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명태’를 부르는 걸 보고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1막에 나오는 ‘Non piu andrai(더 이상 날지 못하리)’를 부르라는데 다른 사람은 다 2분 내에 끝나는 노래인데 이 노래는 5~6분 되는 거예요. 악보가 일고여덟 장 돼요. 다 이탈리아죠. 처음에는 자신 없었는데 그래도 여기까지 살아온 내공이 있는데 그걸 못하랴 싶었어요.” ‘더 이상 날지 못하리’가 한 원장 손에 쥐어진 건 2015년 5월 중순. 연습 시간은 한 달. 그는 집에서 엄청나게 연습했다. 횟수로 세진 않았지만 천 번은 거뜬히 넘었다고 한다. “재미도 있지만 외우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다행스러운 게 비슷한 패러그래프가 반복된다는 거였는데, 그게 또 헷갈려요. 반복이 정기적으로 되면 되는데 엇박자로 가는 게 있더군요. 그리고 노래가 경쾌하다보니 템포가 굉장히 빨라요.” 안 좋은 기억이 생기면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연습을 하다보니 자신감이 생겼고, 지난해 7~8월 휴가 때 제주포럼에 가서 한 번 불러본 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한 달 뒤에 그를 가르치던 분 앞에서 자신 있게 이 노래를 다 불렀다. 그러나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그걸 노래라고 불렀어요?’ 그러더라고. 충격 먹었어요. 자신 있게 했는데 어째서 그렇게 말을 할까. 상처가 됐죠. 일주일 정도 지난 다음에 선생님에게 ‘그렇게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얘기해야 합니다. 부정적으로 얘기하면 학생에게는 상처가 됩니다’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아, 그렇게 해야 다시 노력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대답하더군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런 질책은 잘못한 거죠.” 그러나 예순 살의 나이에 겪게 된 그런 강렬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한 원장은 자신의 노래를 계속 가다듬었다. 혼자 알아서 해야 했던 연습이기에 박자가 안 맞고 숨을 엉뚱한 데서 쉬는 등의 실수를 나중에 가르침 받았다. 감정에 치여 좌절하지 않은 것이다. “과거에 제가 평행봉을 잘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손에 땀이 너무 나니까 평행봉을 하다가 떨어졌어요. 하필 비탈에 떨어지면서 배를 쫙 긁혔죠. 보통은 그런 일이 벌어지면 운동을 단념해요. 철봉이 꼴도 보기 싫어지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때 더 열심히 했어요. 안 좋은 기억이 있을 때, 그 지점에서 더 열심히 하면 이겨낼 수 있는데 쇼크를 받아서 안 하면 완전히 멀어지는 것 같아요. 이번 경우에도 그런 쇼크를 받았어도 계속 코치를 받고 발전하려고 노력했죠.” 잠재력을 증명한 열정의 무대 “하고 싶은 노래를 하니 좋은 점이, 내가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증명했다는 거죠. 그리고 전경련을 나와서 인간개발연구원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데 취미를 하나 만들 수 있었다는 것도 굉장히 좋은 일입니다.” 나이를 들어서 꿈이 없으면 추하다는 말이 있다. 지금 그가 꾸고 있는 꿈의 모습은 무엇일까? “올해 5, 6월즈음 개인 발표회를 하려고요. 한 곡 한 곡 사사를 받아 날 좋을 때 발표를 해야겠다 싶어요. 제가 바리톤으로 7~8곡은 부르고 소프라노 한 분, 테너 한 분 모셔서 함께 공연하는 식으로 진행하면서 단독으로 개인 발표회를 해보고 싶어요.” 그는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가동하고 있다고 느낄 때 살아 있음을 감지한다. 그 잠재력을 모두 동원해 자신의 꿈을 향해 점점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때 행복해한다. 그는 노래를 할 때 행복감이야말로 사는 이유라는 것을 알았다. 노래는 혼자 있어도 그를 행복하게 해주었고 그의 영혼을 풍요롭게 해줬다. 이렇게 꿈을 이룬 그에게 꿈에 대한 다른 시선을 물었다. 그는 꾸준한 노력이 함께하지 않는 꿈은 몽상에 불과하다고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발을 움직여 스스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며 꾸준히 노력하고 직접 몸으로 맞서 꿈을 이룰 것을 조언했다. “간절하지 않으면 꿈꾸지 마세요. 간절히 바라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 간절함은 분명하지 않으면 안 돼요. 막연한 간절함이 아닌 ‘반드시 이렇게 하고 싶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의지와 다짐이 분명한 간절함이 필요해요. 24시간 먹고 자는 것을 잊을 정도로 간절하게 바라면 어느 순간 불현듯 자신도 모르게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일과 즐거움이라는 두 마리 토끼 그는 전경련에서 33년 3개월을 보냈다. 초년기 중년기를 거기서 다 지낸 것이다. “산업사회에 기여하는 조직으로서 훌륭한 직장이었죠. 송충이는 솔잎만 먹는다고 저는 다른 데서 다른 걸 할 수가 없어요. 조찬회를 만들어 회사를 좋은 방향으로 가게끔 하는 훌륭한 경영자 스토리를 교육하고 정치, 외교, 통일 안보에서 훌륭한 사람을 데려와 그쪽 교육도 진행했습니다. 인간개발연구원이 저에게 그 장을 마련해준 거죠. 혼자 그걸 만들려면 엄청나게 어려워요. CEO지혜산책을 만드는 등 제게 그런 지식과 기회를 만들어준 곳입니다.” 인간개발연구원은 30여명의 기업인이 1975년 조찬 공부 모임으로 창립한 인간개발경영자연구회를 모태로 설립돼 지금까지 사람 중심의 가치관을 전파하기 위한 세미나 등 각종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그는 인간개발연구원 경영대상 시상식 준비에 바쁜 와중에도 공연에 대한 열정이 샘솟는다. 일과 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하는 그의 인생 2막의 다음 무대가 기대되는 이유다. 한영섭 원장과의 1문1답 꿈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 어렸을 적부터 성악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취업과 생활을 위해 바쁘게 살아야 했습니다. 꿈에 다시 도전하게 된 계기? 성악가들의 공연을 자주 접하게 되면서 부러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CEO를 위한 오페라 과정에 참여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노래를 배우게 됐습니다. 어릴 적 꿈 vs 중년의 꿈? 어릴 적 꿈은 운동선수였으나 지금은 꿈을 이루고 나니 나만의 개인 공연을 했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로맨틱한 서정시를 음악으로 낭송하는 행위가 얼마나 멋집니까. 완전히 몰입된 감정 상태의 시인이 돼 노래하고 싶습니다. 꿈을 이루기까지 어려웠던 점? 노래에 빠져 있는 동안 저는 훌륭하게 부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선생님(스승)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서 호된 질책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난 이후부터가 어려움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신의 꿈은 무슨 색? 성악을 색깔별로 표현하면 노래마다 다르긴 한데, 특히 가을에 부르는 성악은 완전히 익은 갈색 같아요. 그런데 모차르트의 노래는 경쾌하고 파릇파릇한 게 초록색 같습니다. 꿈을 이루고 난 뒤 좋은 점? 자신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 자체가 좋았습니다. 그저 잠재력이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걸 증명해냈다는 거죠. 그리고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데 취미를 하나 만들었다는 것도 굉장히 좋은 일입니다.
- 2016-02-18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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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 투어]세상에서 가장 ‘환상적인 항해
- 북유럽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핀란드의 겨울은 아주 길다. 겨울이 일찍 찾아들고 오후 3시만 되어도 어둠컴컴해지는 추운 나라. 추워서 핀란드 사우나를 일상으로 즐기는 이 나라는 한겨울이면 산타클로스, 요정, 루돌프, 오로라, 이글루 등으로 여행객을 유혹한다. 그것보다 더 재밌는 것은 헬싱키~스톡홀름을 잇는 실자라인 크루즈 여행이다. 800년간 스웨덴·러시아 지배받아 핀란드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항구도시로 한반도의 약 1.5배 크기다. 유럽 중에서도 사회복지가 잘 되어 있는 나라이며, 잘살기로 유명한 나라지만 1914년까지는 약 100년이나 러시아의 속국으로 살았다. 아직도 핀란드에 입국하려면 비자를 받아야 한다. 러시아 지배를 받기 전, 12세기부터 1809년까지 약 700년 동안이나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스웨덴의 지배시절 러시아와의 잦은 전쟁으로 핀란드는 황폐했다. 이후 러시아가 핀란드를 장악하자 알렉산드르 1세는 스웨덴이 세운 수도 투르쿠(Turku)를 싫어해 1812년 러시아에 가까운 헬싱키로 수도를 옮겼다. 이때부터 헬싱키는 급속히 성장했다. 1904년, 러시아 총독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보브리코프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러시아가 러일 전쟁(1904~1905)에서 패배함으로써 강압정책이 다소 완화되었다. 러일 전쟁 패전 이후 러시아 국내 정세가 불안한 상황을 이용해 1906년에 입법기관을 민주적인 단원제 의회로 개혁했다. 그러니까 핀란드가 속국에서 벗어난 것은 110년이 조금 넘어났을 뿐이다. 헬싱키 랜드 마크는 원로원 광장 헬싱키 시내 여행은 어렵지 않다. 걷거나 트램을 타면 된다. 헬싱키의 가장 중심부는 원로원 광장(세네트 광장, Helsinki Senate Square)이다. 스웨덴의 지배가 끝나고 러시아의 속박이 시작된 1818년부터 30여 년에 걸쳐 독일 건축가 카를 루트비히 엥겔(Carl Ludvig Engel)에 의해 이 광장이 조성된다. 넓은 광장에는 약 40만개의 화강암 포석이 깔려 있고 중앙에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Aleksandr II)의 동상이 있다. 핀란드를 하나의 독립국가로 인정해 의회의 구성과 핀란드어 사용을 허용했던 황제다. 이곳에 핀란드를 상징하는 대표 건축물인 루터란 대성당(Tuormiokirkko)이 있다. 왕궁 스타일로 지은 이 건물은 바다에서 바라볼 때 한층 더 아름답다. 그 주변에는 사우멘 판키(Suomen Pankki, 1812년 설립)라는 중앙은행이 있다. 세계에서 네 번째로 오래된 은행이다. 건물 앞에는 핀란드의 민족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철학자이며 정치인이었던 요한 빌헬름 스넬만(1806~1881)의 동상이 있다.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핀란드의 독자적인 화폐 발행(1860)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바로 앞 1891년에 귀족의 집으로 건립된 사아티탈로는 현재 핀란드 정부기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화려한 건축 양식이 눈길을 끈다. 또 카우파토리(Kaupatori) 광장 앞쪽으로는 대통령관저 및 집무실, 헬싱키 시청, 스웨덴 대사관이 있다. 대통령관저 및 집무실은 근위병이 보초를 서지 않으면 눈여겨보지 않을 정도로 소박하다. 바닷가 옆 길을 따라 가면 러시아 정교회인 우스펜스키 성당(Uspenskin Cathedral)이다. 이 성당은 핀란드가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1868년, 러시아 건축가 알렉세이 고르노스타예프(Aleksei Gornostaev)가 19세기에 비잔틴 슬라브 양식으로 세운 곳이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정교회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그리스도와 12사도의 그림, 돔탑, 파이프오르간 등이 있다. 안온한 느낌이 드는 성당 내부다. 영화 에서 주인공들이 순록고기를 사러 간 하카니에미 마켓(Hakaniemi Market)도 걸어갈만한 거리다. 2층짜리 벽돌건물 안에는 식품코너 말고도 아울렛과 구제숍, 공예품 숍이 있다. 헬싱키 중앙역 주변 볼거리 가득 헬싱키 중앙역 주변에도 볼거리가 산재해 있다. 중앙역사의 건물이 예사롭지 않다. 공모전에서 우승한 핀란드 건축가 엘리엘 사리넨(Eliel Saarinen, 1873~1950)이 설계해 1919년에 완공된 역사다. 아르누보 양식이 가미된 적갈색 화강암 건물로 정문의 멋진 대형 아치와 높이 49미터의 시계탑, 벽면에는 램프를 들고 있는 네 개의 거대한 조각상이 있다. 19개의 승강장을 갖추고 있는 초고속 열차 노선인 펜돌리노(Pendolino)를 비롯해 다양한 등급의 열차가 있다. 역사 지하에는 헬싱키 지하철, 라우타티엔토리 역(1982년 완공)이 있다. 중앙역 주변으로도 멋진 건축물이 즐비하다. 그중 1902년에 개관한 핀란드 국립극장의 건축물이 눈길을 끌어 당긴다. 건축가 온니 타르야네(Onni Tarjanne)가 설계했으며, 당대 북유럽에서 유행하던 국가적 낭만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국립극장의 시작은 핀란드 극장(1872년 설립)에서 비롯되었다. 핀란드에 설립된 최초의 핀란드어(Suomi) 연극 전문 극장이었다. 스웨덴과 러시아 제국의 오랜 지배에 저항하는 핀란드 민족주의 문화운동의 일환이었다. 1954년과 1976년에 소극장 시설이 추가되었다. 855석 규모의 대극장과 2개의 소극장, 스튜디오, 회의실 등의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영화거장 카우리스마키 흔적없어 아쉬워 극장 앞에는 핀란드의 대표적인 작가 알렉시스 키비(Aleksis Kivi)의 동상이 있다. 알렉시스 키비는 누르미야르비 출생으로 가난한 시골 양복점 아들로 태어났다. 헬싱키 대학에 입학했으나, 대학도 중퇴하고 일생 동안 심장병과 정신병으로 고통을 겪다가 38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겨우 10년간의 창작활동밖에 하지 않았지만, 핀란드 문학의 창시자로 인정받고있다. 그의 작품은 핀란드 문학사상 최초의 고전이 되었다. 대표작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소설 가 있다. 핀란드에서는 다음으로 치는 고전적인 작품이다. 무엇보다 필자는 핀란드의 영화 거장, 아키 카우리스마키(Aki Kaurismaki)의 영화 포스터가 눈에 띄길 바랐다. 국내 영화 마니아들은 이 감독을 모르는 이 없을 것이다. 는 칸영화제를 비롯 많은 상을 휩쓸었다. 그 외에도 가 있고 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에는 항상 그만의 특유의 스타일이 존재한다. 인물들은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무성영화를 연상시키듯 대화가 없는 장면이 부지기수다. 얼굴이 익숙한 유명 배우들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만든 작품속에는 카티 오우티넨(Kati Outinen)이라는 여배우가 등장한다. 결코 예쁘지 않고, 차라리 못생긴 편에 드는 이 여배우는 감독과 늘 함께 한다. 비록 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으나 그가 숨쉬고 있는 이 도시에 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그 외에도 주변에는 아테네움 미술관, 키아스마 현대 미술관이 있다. 멀지 않은 곳에 나무로 만든 캄피(Kamppi)교회도 주목할 만하고 암석교회(Temppeliaukio Kirkko)도 유명하다. 또 국립박물관(Kansallismuseo)과 핀란디아 홀(Finlandia Hall), 올림픽 스타디움도 관광 목록에 빠지지 않는다. 또 유명한 관광지가 시벨리우스 공원(Sibelius Park)이다. 민족음악파인 얀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1865~1957)를 기리기 위해 만든, 600개의 철제 파이프로 제작한 기념비가 있다. 실자리안 나이트 클럽 체험 잊지 못해 여행의 백미는 헬싱키~스톡홀름으로 떠나는 선상 여행이다. 오후 3시 30분 경, 올림피아 터미널에는 사람들이 몰려 든다. 실자라인(siljaline) 여객선은 어마어마한 크기다. 1991년에 건조한 이 배는 약 6만 톤으로 선상에서의 높이만도 6층이다. 자동차 400대와 버스 60대를 탑재 할 수 있으며 탑승인원은 3000명에 육박한다. 2002년에 새롭게 리모델링한 배다. 배 안으로 들어서면 신천지다. 3인조 젊은 클래식 밴드가 연주하면서 환영한다. 일반 식당 여러 개, 뷔페 식당, 면세점, 옷가게, 바와 가라오케, 카지노, 나이트클럽, 사우나 등. 오후 5시에 출발한 배는 그 다음날 오전 9시 30분경에 스웨덴 스톡홀름에 도착한다. 이 선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체험은 나이트 클럽이다. 환히 불이 켜진 무대에서는 올드 팝송이 울려 퍼진다. 목소리가 흐느적거리는 에릭 클랩튼의 ‘원더풀 투나잇', 이럽션(Eruption)의 노래지만 우리나라 가수 방미가 불렀던 ‘원 웨이 티켓’, 일본인들이 많이 타는지 일본 노래도 부른다. 주변을 둘러보면 거의 다 노년층이다. 플로어에서는 나이든 커플이 춤을 춘다. 넓은 무대에 새로운 무희와 가수가 등장하면 조명은 더 화려해진다. 밤이 깊어가도 클럽을 떠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이 발산되는 곳. 분명코 어느 누구라도 이 크루즈 여행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Travel Tip! 항공편 핀에어(www.finnair.com/kr)가 인천~헬싱키 구간에 직항 편을 운항 중이다. 소요시간은 약 9시간 30분으로, 오전 10시 20분에 인천에서 출발하면, 당일 오후 2시에 헬싱키에 도착한다. 현지교통 핀란드 교통카드를 이용하면 된다. 장거리 여행을 하려면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운행 시각이 정확하며 열차 환승도 편리하다. 예약사이트 www.tallinksilja.com, 한국사이트: www.siljaline.co.kr 통화 유로 전압 220v 언어 핀란드어와 스웨덴어가 공용어, 어디서든 거의 영어로 대화 가능. 시차 한국보다 7시간 늦다. 서머타임 적용 시에는 6시간 느리다. 기온 헬싱키는 12월~3월 평균 기온이 영하 5도를 웃돈다. 때로는 4월 초까지 눈이 내리기도 하며 매서운 바람이 불기도 한다. 물가 헬싱키의 물가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지역의 국가들 중 가장 낮다. 특히 헬싱키 카드와 ‘가족 요금 제도(Family Tickets)’는 핀란드 배낭여행의 부담을 줄여주는 좋은 제도다. 쇼핑 정보 헬싱키의 주요 쇼핑지역은 에스플라나디 공원, 알렉산터린카, 구시가지 등이며 상점은 보통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연다. 음식 정보 헬싱키 에스플라나디 광장과 원로원 광장 근처에 레스토랑과 카페가 많다. 헬싱키 마켓광장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생선요리를 맛볼 수 있다. 살미아키(salmiakki)라는 투명한 검은색의 단단한 젤리가 나름 유명. 단, 특유의 암모니아 향 때문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숙박 정보 요금과 운영기간이 시즌마다 천차만별이다. 단 헬싱키의 호스텔은 시트비를 따로 받지 않는 것이 장점이다. 주변 볼거리 시간이 많다면 오로라를 볼 수 있는 라플란드(Lapland) 이발로(ivalo)나 산타 마을 로바니에미(Rovaniemi)를 찾아도 좋을 것이다. 그 외 사우나의 본고장에서 리얼 사우나 체험도 해 봄직하다. 핀란드에는 약 250만여 개의 사우나가 있다고 한다. 사우나 카페, 사우나 바, 사우나 아일랜드, 사우나 버스 그리고 심지어 곤돌라 사우나까지 있다. 글·사진 이신화(의 저자, www.sinhwada.com)
- 2016-02-12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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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61년生, 방황하던 청춘, 문학서 길 찾고 책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든다
- 허병두 숭문고 국어 교사 예순도 안 된 나이에 자신의 삶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몹시 부담스러운 일이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한 분들이 가득 계신 이러한 공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교사로서 보낸 지난 30여 년을 돌이켜 보는 것은 지금의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가늠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의미를 둘 만하리라. 더구나 최근과 같이 교사라는 직업을 단지 안정성의 측면에서만 평가하는 세태에서는 교직의 진정한 의미를 한 번쯤 돌아보게 하는 의의도 있으리라 싶어 이렇게 글을 쓴다. 그러고 보면 아주 희한하게도 교육자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나름대로 최선의 길을 찾다 보니 어느새 교사가 되었고 교사로서 30여 년을 자연스럽게 살아왔던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유명인이 되었더라 식과는 달리, 어느 순간 문득 돌아보니 교육자가 되어 있더라가 정확한 말이라 하겠다. 원래의 내 꿈은 전투기 조종사가 되는 것이었다. 조국을 지키다가 하늘에서 장렬히 산화하겠다는 꿈은 유치한 꼬맹이 시절부터 품어온 오랜 소망이었다. 38선 이남의 경기도 개성이 친가와 외가의 고향이었던 터라 그 꿈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땅을 벗어나고 싶었다 나쁜 시력 때문에 비록 그 꿈은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그 대신에 국가를 수호하는 항공공학자가 되고 싶었다. 수학을 그리 잘하지 못했지만 항공공학 관련 대학 교재들도 어렵게 구해 공부하며 고교 시절을 보냈다. 고3 늦가을에 놀랍게도 대통령이 부하에 의해 죽었다. 국가가 위기에 빠진 것 같아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1980년 ‘서울의 봄’은 너무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눈 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혼란 그 자체였다. 국가를 지켜야 하는 군인들이 국민을 향해 으르렁대며 총칼을 들이댔고 멀리 남쪽에서는 이미 많은 양민들이 희생당했다는 말까지 들려 왔다. 그때까지 품고 있던 의식과 사고가 모두 붕괴되는 시기였다. 국가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애써 공부해서 항공공학자가 되어 봐야 불의를 도울 뿐이었다. 결코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과감히 포기하고 이 땅을 빨리 뜨고 싶었다. 유학을 빙자해서 도피하고 싶었고, 외국에 눌러 앉아서 결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종로학원에서 재수를 하며 서강대학교가 가장 유학가기 좋다는 친구 아버님(교수님)의 조언에 따라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시는 바람에 집안 형편은 갑자기 어려워졌다. 유학 가기란 점점 더 불가능해지는 것 같아 너무나 화가 났다. 그렇다고 저항할 수도 없었다. 완강한 폭력 앞에서 돌멩이 몇 개쯤 던져 봐야 무기력하고 초라하기만 했다. 견딜 수 없었다. 현실을 슬그머니 외면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었고, 세상에 용감하게 직면하려 해도 그 또한 도대체 쉽지 않았다. 가장 희망에 차 있어야 할 대학 시절은 끝나지 않을 악몽의 시대에 불과했다. 우연히 시작한 야학교사, 국문학 품에서 행복 느껴 우연히 서강대 교내에 있던 이냐시오 야학에서 교사를 찾는다는 공고를 보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무기력하고 어설픈 청춘에게 안성맞춤의 일이었다. 구로공단에서 일하다가 와서 꾸벅거리는 어린 소년과 소녀들, 못 배운 설움을 뒤늦게 풀겠다고 나선 개인택시 할아버지 등, 살아 숨쉬는 생생한 삶의 현실을 접할 수 있었다. 최루탄이 자욱한 밤에 눈물 콧물을 흘리며 얇은 널빤지 가건물에서 밤늦게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고 행복하였다. 야학 수업을 끝내고 신촌으로 가는 길목의 허름한 떡볶이 집에서 늦은 저녁을 함께 먹던 추억들은 아직도 즐겁다. “산다는 것은 싼다는 것이다!” 같은 조악한 낙서가 가득한 야외 화장실의 모습도 너무나 또렷이 떠오르곤 한다. 그때마다 빙그레 웃게 된다. 엉망진창 같았던 대학 시절에 국문학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시간이 남아 여유 과목으로 선택했던 국문학개론이었지만 강의를 들을수록 새로운 진경을 보여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닥치는 대로 많이 읽었고 이과 학생이면서도 국어 과목에 관한 한 전교는 물론 전국에서 손꼽히던 성적을 받았기에 나름대로 품었던 오만함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창피함보다 즐거움이 훨씬 컸다. 세상에 새로 태어나는 기분까지 들었다. 불의의 시대에 절망하는 청춘에게 문학은 영원한 저항, 아름다운 힘으로서 다가왔다. 참여 문학과 순수 문학이라는 이분법을 거부하면서 문학의 바람직한 길을 끝까지 추구해 보고 싶었다. 현대시에 대한 관심은 특별히 더 컸다. 어느새 직접 시를 쓰기 시작했고 대학 신문의 현상공모에 당선이 되었다. 동인 활동을 하며 시화전도 열었다. 우리 문학의 웅숭깊은 품은 상처투성이의 젊은 영혼을 부드럽고도 따뜻하고 넉넉하게 품어주었다. 너무나 감사한 축복이었다. 외국 유학을 가겠다던 마음은 어느새 수그러들었다. 나중에 비교문학을 공부하면 된다는 수준까지 잦아졌다. 대학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부조교를 하며 교양영어조교, 심지어 배구부 학업 조교까지 하면서도 4년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정말 힘들었던 대학 시절이었다. 어느새 교사가 되고 모교로 왔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한 학기를 지낸 뒤에 군복무를 마쳤다. 여전히 집안 형편은 어려웠다. 아무래도 직장을 다니며 대학원 공부를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같이 교직이 인기 있던 때가 아니라 교사 지원서를 내고 이내 교사가 되었다. 학교에는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이 많이 있었고 꼼꼼하게 학생들을 챙기면서 정신없이 생활을 보냈다. 대학원 공부도 병행하고 마침 결혼까지 하였기에 너무나 힘들어 집에만 오면 푹 고꾸라져서 식은땀을 흘리며 자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사립학교도 공채 시험을 보던 때라 수험 준비 또한 열심히 해야 했고 다행히 합격했다. 우습게도 그 다음 해에 이 시험은 없어졌다. 3년 차가 되자, 학교에서 담임을 맡겼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학생들의 이름을 즉시 외웠다. 하지만 첫날 일방적으로 부여된 지시는 학부모 10명에게서 학교 발전 기금을 걷으라는 부당한 명령이었다.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더없이 마음이 편했다. 신혼 2년 차였지만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제 진짜 이 나라를 뜰 때가 된 거야” 되뇌었을 뿐이다. 어딘들 살지 못하랴. 조금이지만 모아 놓았던 봉급도 있었다. 사표를 내고 인계 준비를 하는데 모교인 숭문고에서 연락이 왔다. 고3 때 담임 선생님이셨다.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라는 것이었다. 사표를 낸 것은 어찌 아셨냐고 묻자, 당신은 몰랐으며 그저 오라는 말씀만 되풀이 하셨다. 운명 같았다. 모교에 가서 다시 한 번 교사의 길을 걸어 보자, 그때 유학을 가도 되지 뭐,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기는 이미 사라진 때였다. 막상 모교에 부임하자 모든 것이 힘들었다. 친정에서 시집살이 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들 앞에 끌려 온 것 같았고 동문 선배교사들은 무서운 손윗 동서나 억센 시누이 같았다. 교무실 밖을 겉돌다가 창고처럼 방치된 학교도서관 서고를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학교도서관을 운영하니까 정말 정신이 없었다. 먼지를 닦고 책을 털며 시작한 도서관 일은 이후 18년 동안 계속되었다. 한 푼의 수당이나 보수가 없는 자원봉사 형식이었다. 직접 도서반을 만들고 도서반원으로 학생들을 초대했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훌륭한 동반자다. 학교도서관에 푹 빠져들며 학교를 떠나겠다는 생각, 이 땅을 등지겠다는 생각은 어느새 잊게 되었다. 학교도서관은 환상적인 공간이었고 학생들과 나는 성장하였다. 시인으로 정식 등단했지만 시는 몇 편 쓰지 않았고, 대신에 당장 학생들에게 필요한 ,, 같은 책들을 썼다. 지금까지 쓴 , , , , 등등의 저서들은 모두 학교도서관과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성과들이다.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을 하라고요? 어느날 전화가 걸려 왔다.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한 문민정부 시절이라 교육개혁위원회의 위상은 대단했다. 교육개혁위원회가 정책을 입안하면 교육부는 그대로 수행해야 했다. 고민한 끝에 수락하였다. 나는 전체 위원들 가운데 두 번째 막내였고, 교원은 그나마 달랑 4명에 불과했다. 한국교육을 움직여온, 또한 이후에 움직이는 중요한 분들을 이때 많이 만났다. 무수히 많은 회의에 참석하면서 교육에 대해 좀더 장기적이고 폭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각 시·도 교육청을 평가하는 활동까지 맡으면서 교육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도 있었다. 나는 학교도서관의 멀티미디어화 정책을 입안했고 이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학교도서관에 3천억 원의 예산이 투자되는 근거가 되었다. 이제 학교도서관이 없는 학교들은 대한민국에 거의 없다. 2년간의 교육개혁위원 활동을 마쳤지만 그 후에도 여러가지 역할을 많이도 맡았다. 교육부 쪽으로는 교육정보화위원, 독서교육발전자문위원, 과외교습대책위원 등, 문화부 쪽으로는 독서진흥위원, 공유저작물활성화포럼위원 등, 서울시교육청으로는 독서교육활성화 위원 등등...헤아리기 쉽지 않다. 현재도 교육부 학교도서관진흥위원을 맡고 있으며 마포구청의 마포중앙도서관 건립에 힘을 보태고 있다. 교육개혁위원 임기가 끝났지만 이후에도 교사로서 살아가면서 만나는 제자, 그리고 쉽게 변하지 못하는 학교 현장과 맞닥뜨리며 어떻게 해서든지 올곧고 가치 있는 변화를 시도하고자 노력해 왔다. 교육에서 미래란 곧 학생들에게 다가올 현재였기에 이러한 노력은 너무도 당연했다. 학교도서관을 교실 규모 8개 크기에 인터넷 PC 30여 대가 있는 학교도서관 멀티미디어 센터로 키우고 교육청의 도움을 받아 정식 사서를 초빙하였다. 모교로 돌아와 꼬박 18년이 넘어 거둔 성과였다. 이어서 2010년도부터는 국가와 지자체, 시민단체와 동네 청년 등 학교밖의 다양한 전문가들을 학교로 초빙하여 학생들에게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봉사활동학습을 고안했다. 일명 ‘따봉(따뜻한 봉사활동)’이라 부른다. 이를 ‘숭문 따봉’에만 그치지 않고 어느 학교든지 ‘따봉’을 붙여서 쓸 수 있도록 모델화하고 관련 자료 일체 또한 아무 대가 없이 제공하고 있다. 유니세프 같은 세계적 구호기관도 처음부터 꾸준히 참여해 오고 있는데 이렇듯 모든 자료를 공유하겠다는 약속과 실천 덕분이다. 2015년 현재에는 31개 따봉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고, 이 가운데 11개는 학생 스스로 리더가 되어 활동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경문고와 풍문여고가 따봉 모델을 받아들여 각각 ‘경문 따봉’과 ‘풍문 따봉’을 펼치고 있으며 올해부터는 서울과 지방의 몇몇 학교가 받아들이려 꼼꼼하게 준비하고 있다. 교직은 안정된 직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안정은 과거와 미래를 제대로 이어달라고 보장하는 사회적 뒷받침이다. 그래서 교육은 전통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고, 미래를 현재로 만들어야 하는 점에서 진보적이다. 다시 말해, 기존의 중요한 가치들은 모두 존중해야 하기에 언제나 든든하게 과거를 이어야 하고, 쉽게 파악하기 힘든 잠재적 인재들을 빠짐없이 챙겨야 하기에 언제나 미래를 새롭게 헤아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전력투구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교사이어야 한다. ‘책따세’ 눈부신 성장 가장 보람 교사로서 지난날을 돌아볼 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바로 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이하, 책따세로 줄임)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교육개혁위원 임기가 끝난 1998년에 만든 ‘책따세’는 2007년에 청소년을 위한 비영리 독서문화 시민단체로서 확대되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 독서의 자율성과 다양성, 공익성을 가장 기본으로 추구하는 대표적인 청소년 독서문화 단체로 훌쩍 성장했다. 2013년에는 영국문화원에서 개최한 국제 세미나에서 대한민국의 청소년 독서교육을 ‘책따세’ 중심으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책따세’ 활동은 다양하다. 청소년 대상 추천도서목록 작업과 발표, 책쓰기 교육과 저작권 기부운동, 독서교육 교사연수, 독서방송, 월례 기부강좌, 청소년봉사학교, 독서교육서 출판, 독서문화 관련행사 개최 등등. 나는 ‘책따세’ 대표로서 꾸준히 ‘책따세’의 최전선을 지켜 왔다. 이제는 ‘책따세’ 이사장으로서 법인 업무를 맡으면서도 특히 책쓰기 교육과 저작권 기부운동을 우리나라 공교육에서 시작한 세계적 교육문화 운동으로 자리 잡게 하고자 모든 힘을 쏟고 있다. 감사하게도 ‘책따세’는 2015년에 청소년을 위한 바람직한 활동을 했다고 인정받아 제11회 청소년성장대상(여성가족부)을 수상하였다. 상금 1천만 원은 오로지 청소년을 위한 독서문화 구축을 위하여 사용할 예정이다. ‘책따세’의 전통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퍼준다!”에 맞춰져 있다. 이사장인 나를 포함해서 이사진과 운영진 누구도 일절 금전적인 보상을 받지 않는다. 오직 실무 간사만이 유급 활동을 한다. ‘책따세’는 지금까지 자신의 시간을 쏟으며 청소년 푸른도서관 건립을 위하여 기금을 출연하면서 활동해 왔다는 점에서 언제나 스스로 자부한다. 요즘 새롭게 추진하는 중요 프로젝트도 소개하겠다. 책으로 떠나는 세계 여행 공모전이다. 이는 책을 읽으며 가상의 여행기를 쓰는 활동이다.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과 해냄출판사와 신촌 홍익문고 서점 등이 함께 힘을 모으며 진행하는 행사다. 이 공모전에는 푸짐한 상품들이 걸려 있는데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읽기 쓰기 문화를 시도라 할 만하다. 특히, 이 공모전에 참여하는 글들의 대부분을 모아서 공유저작물 형태의 전자책으로 묶고 선정된 참가자들은 전자책의 저자 대우를 받게 한다. 이는 이야기를 들은 수용자가 다시 누군가에게 전달하면서 창조자가 되는 구비문학의 본질과 맞닿으면서 디지털 차원에서 문학의 본질을 새롭게 새기고 지평을 넓히는 활동이다. 교사들은 푸른 영혼들과 함께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학생들 입장에서도 이러한 활동은 특별히 의미 깊다. 그저 책을 읽고 의미를 파악하려고 전전긍긍대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단지 책을 사는 소비자에서 벗어나 자신이 읽고 쓰는 모든 것들이 남을 위해 더하고 나누는 의미 있는 활동임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 순간, 교육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 순간, 누구든지 교사가 된다. 진정한 교사란 나눠주며 세상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렇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지만, 선생은 제자로 말한다. 제자들이 자랑스러운 일을 하면 교사로서 내 삶이 한없이 보람 가득하고, 반대로 부끄러운 일을 한다면 무한히 부끄러워진다. 물론 제자의 재물이 많고 적음이나 지위가 높고 낮다는 점이 교사의 자랑과 부끄러움을 판단하는 기준은 결코 아니다. 그저 자신이 배운 것을 아낌 없이 누군가에 나눠주는 제자라면 충분히 자랑스럽다. 최근에는 우리들의 제자들이 ‘책따세’ 모임에 속속 가세하고 있다.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신촌 전철역 근처의 공익 카페 ‘더나더나’에 모인다. 더함과 나눔의 첫 글자를 따서 이름을 만든 이 카페에 가면 남을 돕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가 깨닫게 하고, 다시 책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들고자 머리를 맞대는 청춘들이 있다. 조국의 하늘을 지키는 제자가 며칠 전 오랜만에 연락해 왔다. 제자가 곧 나다. 그렇다. 나는 어린 시절의 오랜 꿈을 비로소 이루었다. 항공공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꿈을 펼치는 제자도 기억난다. 그렇다. 나는 조국을 수호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진정한 과학자다. 피아노는 물론 모든 악기를 잘 다루는 제자도 있다. 그렇다. 이제 나는 언제나 즐거운 악기 연주자다. 제자들은 나의 분신인 듯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날아간다. 그리고 어느새 벌써 수많은 분신이 되어 이 세상 곳곳을 따뜻하게 만들고 있다. 나는 교사다. 앞으로 교단을 떠나도 나와 내 제자들은 이미 교사다.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서 남에게 나눠주는 사람, 우리가 바로 교사다. 그래야 이 세상을 비로소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 △ 허병두 숭문고 국어 교사(책따세 이사장) 서강대 국문학과와 같은 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7년 처음 교단에 섰고, 1989년 모교인 숭문고로 돌아왔다. ‘학생과 함께하는 읽기 쓰기 문화’를 지향하며 지금까지 학교도서관 살리기 운동과 NIE(신문활용교육) 전개, 책쓰기교육과 저작권기부운동 창안 등으로 교육과 현실, 삶을 아울러 왔다. 1998년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책따세(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를 만들고 비영리 청소년 독서문화 시민단체로 확장하여 현재까지 이사장을 맡고 있다.
- 2016-02-12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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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강남스타일은 나눔, 봉사, 참여로 살아가는 것!”
- 자타가 공인하는 노인복지전문가 이호갑(李鎬甲, 59)씨는 이렇게 자기를 소개한다. “10년 삼성의료원 짓고, 10년 삼성 노블 카운티 짓고, 10년 운영했습니다.” 간단하지만 한 문장에 30년 노하우가 들어 있다. 그런 그가 회사를 그만두고 선택한 곳은 또 다른 노인복지의 실험장이 되는 강남시니어플라자다. 30여 년 노인복지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강남시니어플라자는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다. 이호갑 관장과 강남시니어플라자의 인연은 7년 전, 강남구가 노인복지시설 건립을 위해 자문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이 관장은 삼성생명 공익재단 상무로 재직하고 있었다. “강남구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강남은 모든 게 달라야 할 것이다. 다른 지역 노인복지관이 경로잔치를 열어주는 등 혜택만 주는 서비스를 해왔다면, 강남은 노인 나름대로 재능을 펼치고 활동적인 노후를 위해 즐길 수 있는 개념으로 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자문역할을 해줬던 시설이 이 관장이 몸담은 강남시니어플라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곳에 오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삼성생명 공익재단 상무 자리에서 물러나고 6개월 뒤인 2014년 8월 14일. 강남시니어플라자 관장으로 첫 출근했다. “처음 왔을 때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제일 큰 문제가 타성에 빠져 있는 운영방식이었습니다.” 강남시니어플라자의 설립 목적은 노인이 자신의 재능을 펼치고, 활동적인 노후를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인데 와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운영 또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출근 첫날 이 관장 눈에 보였던 것은 융통성 없는 사무실 배치였다고. “조그만 건물에 사무실이 세 개였습니다. 첫날 오자마자 벽을 부숴 사무실을 트고 세 개였던 사무실을 하나로 통합했습니다. 소통이 빨라졌죠. 회원들에게도 눈에 보이는 변화를 드린 겁니다.” “왜 난 자꾸 대기 번호에서 밀리는 거요?” 이 관장의 파격적인 행보는 부임 일주일 뒤에도 이어졌다. 바로 강남시니어플라자 회원들과 가진 간담회였다. “이곳에서는 회원이 즉 고객인데 고객의 소리를 종합적으로 들어본 적이 없더군요. 180개 강좌의 반장과 총무 등 60여 명이 모여 그간 필요했던 것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습니다.” 물리적으로 안 되는 것 빼고 웬만한 의견은 수용했다. 간담회 이후 이 관장의 집무실도 회원과 소통을 위해 개방했다. “회원들 얘기를 들어보니 수업 등록 대기자 관리에 대한 불만이 많았습니다. 언젠가 다른 지역에서 온 노인이 ‘하모니카가 배우고 싶은데 세 번이나 밀려서 배우지 못했다’면서 삿대질을 하고 막 화를내시더라고요. 강남구민은 정회원, 다른 지역 구민은 준회원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그 비율이 각각 85퍼센트와 15퍼센트입니다. 정회원 우선으로 강좌를 들을 수 있게 하고 대기자 관리를 제대로 안 하다 보니 강좌 등록을 몇 번 해도 수강이 어려웠던 거죠. 그래서 대기자에 대한 관리도 제대로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비좁은 공간에 이용할 수 있는 교실이 부족한 것도 큰 문제였다. 생각보다 이 관장이 제시한 방법은 간단했다. 강남시니어플라자 주변 카페나 기타 공간들을 찾아 비어 있는 시간에 시니어들을 위한 교실로 이용했다. “회원들의 소리를 최대한으로 반영해 드렸어요. 그랬더니 회원들도 ‘뭔가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구나’ 생각하시더라고요.” 두바이에서 찾아낸 ‘강남스타일 에이징’ 30여 년 노인복지전문가로 살아온 이호갑 관장. 삼성을 나온 이후에도 노인복지 관련 문의가 끊이지 않았다. 강남시니어플라자 취임 한 달 뒤인 2014년 9월, 아랍 에미리트의 두바이에서 열린 메디컬시티 국제상업학술대회에 초대돼 ‘고령화 현상과 한국의 사례, 삼성 노블 카운티’에 관한 연설을 하게 됐다. “관장 취임 전에 초청됐고 발표자여서 꼭 가야 했습니다. 난생처음으로 40분 동안 영어로 발표했습니다. 영어가 늘 쓰는 언어도 아니고 말입니다. 발표하고 나서 바로 질문받기 전에 무대에서 나오려는데 한 사람이 ‘I have a question.(질문 있습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터번을 두른 아랍사람이었다. 당황도 잠시, 그는 한국말로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한 뒤 질문을 이어나갔다. “한국의 장기요양보험에 관해 물어봐서 답을 해줬더니, ‘감사합니다’라 말하고 앉는 겁니다.” 한국어로 질문했던 사람은 알고 보니 사우디아라비아 국립병원장이었다. 그는 한국인 수간호사 두 명과 함께 일하는 것도 모자라, 아침마다 한국어로 회의한다고 했다. “그때 나를 소개할 때 ‘나는 강남시니어플라자라는 노인시설 CEO고, 강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는 강남에 살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학술대회 끝나고 나왔더니 나를 다 알아봐요. ‘강남 스타일’이라며 말입니다. ‘강남 스타일’이 얼마나 대단한지. 세계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때 문득 ‘강남시니어플라자는 노인종합복지관의 선두주자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개념을 ‘강남스타일 에이징’이라 부르고 이 안에는 ‘나눔, 봉사, 참여’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정의를 내린 것이다. 쉽게 말해 강남스타일로 늙어가려면 나누고, 봉사하고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다. “강남시니어플라자에는 사회에서 득을 크게 본 사람들이 많아요. 자기가 어떤 방법으로 돈을 벌었든지 간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거죠. 나눔을 실천해야 그게 진정한 행복입니다.” ‘강남스타일 에이징’을 확립하고 강남시니어플라자 홍보를 시작하자 반응은 뜨거웠다. 특히 최근에 은퇴한 60대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복지관은 7, 80대들이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비교적 젊은 60대 은퇴자들이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강남시니어플라자가 그 소임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과 사랑, 사랑과 일 이 관장은 ‘관장님과 함께하는 문화산책’이라는 프로그램을 마련해 매월 회원들과 가깝게 만나고 있다. “지난번에는 회원 7명과 함께 영화 을 봤습니다. 영화에서 로버트 드 니로의 첫마디가 ‘Love and work, work and love. That's all there is’입니다. 은퇴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일입니다. 사랑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배우고, 여행하고, 자원봉사 다니는 겁니다. ‘일’은 활동을 하는 거죠. 이렇게 시니어들의 노후에는 그런 사랑과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영화 이 보여주더군요. 그게 바로 나눔, 봉사, 참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관장은 강남스타일에이징에 걸맞은 사업을 펼치기 위해 작년 3월 ‘강남스타일시니어봉사단’을 만들었다. “회원 수가 1만 명이 넘는데 봉사하는 인원은 100명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만들게 된 것이 ‘강남스타일시니어봉사단’입니다. 그리고 버스 두 대를 대여해서 음성 꽃동네 견학을 갔습니다. ‘자원봉사를 진짜 이런 마음에서 해야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음성 꽃동네 견학 이후 봉사단 배가운동을 펼쳐 지금은 봉사단원이 300명에 달한다. 또한 자원봉사단 규모를 1004명까지 늘리자는 의미에서 ‘1004 프로젝트’도 펼치고 있다. “물론 별 관심 없는 분들도 있고 관장이 이상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루아침에 될 문제가 아니고 서서히 의식을 바꿔드리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시니어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확실한 역할을 할 수 있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현재 봉사단을 300명으로 늘려놓기는 했는데 봉사할 곳을 개발해야 한다. 이곳 강좌에서 배운 능력으로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것 또한 봉사다. 봉사의 다양한 방법을 개발하는 것도 요즘 큰 관심사라고 이 관장은 말했다. 롤모델은 언제나 아버지, 아버지 이 관장 주위에는 이렇게 노후에도 자원봉사와 꾸준한 사회 참여로 건강한 삶을 사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아버지다. 이 관장의 아버지 이형재(李衡在, 90)씨는 초등학교 교감선생님으로 은퇴한 이후에도 꾸준히 보험회사에서 일하고 자원봉사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교사 시절 좋아하던 술도 끊고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 관장은 아버지께 용돈을 드려본 적이 없다고 한다. 아들이 삼성 상무였는데 말이다. “언젠가 서울역 근처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데 방송인 송해씨와 아버지가 스쳐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도 BMW(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삶, B 버스, M 지하철, W 걷기)를 실천하며 사시잖아요. 매일 일하고 자원봉사하니까 90세가 되어도 정정하다는 걸 새삼 알았습니다. 노인이 돼서 일하고 자원봉사하는 게 건강에 굉장히 중요한 요소구나, 집에서 느끼는 거죠. 물론 내가 노인복지에 관한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도 있지만 실제로 산 모델이고 그렇게 살아야겠다 생각합니다.” 이 관장은 강남시니어플라자 관장 자리에서 내려와서도 노인복지와 실버타운 전문가로 일하고 싶다고 한다. 실버타운 건설과 운영에 관한 전문 서적을 집필할 생각도 가지고 있다. 고령화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분야가 노인복지 분야가 아닌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노인복지현장을 누빌 이호갑 관장의 미래에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드리는 바이다.
- 2016-02-12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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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한과문화박물관 김규흔 관장
- 10여년 전 여름, 한 사내가 한과 공장의 사무실 안에서 비닐 봉투에 든 상추 잎사귀 수십 개를 늘어놓고 살펴보고 있었다. 공장 인부들은 기이한 그의 행동이 이상스럽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내가 사장인 탓에 모두 바라만 볼 뿐이었다. 매번 그런 식이었다. 그의 열정은 남들과는 다른 결과를 불러왔고, 그래서 그는 한과에 미친 한과광인(韓菓狂人)으로 불리기도 했다. 나라에서는 그런 그를 명인(名人)으로 부르기도 했고, 한과명장(韓菓名匠)이란 칭호도 부여했다. 한과문화박물관 김규흔(金圭欣·60) 관장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자취방 집주인의 강권에 나간 맞선자리. 찻집에서 만난 상대는 체구가 자그마한 아가씨였다. 그런 그녀가 신문지에 싼 무엇을 그에게 수줍게 내밀었다. 약과였다. 서울 월곡동에서 한과 공장을 하던 부모 몰래 싸온 것이었다. 처음부터 불타오른 사랑은 아니었지만, 만날 때마다 내미는 약과 뭉치는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게 하는 용매 역할을 했다. 경상북도 영덕의, 한과가 귀했던 작은 바닷가 마을 출신의 청년 김규흔에게 약과는 무척 달콤한 것이었다. 매달 나오는 월급을 아끼려고 크림빵 하나에도 큰맘 먹어야 했던 그에게 그 약과는 강렬한 기억을 남겼다. 김규흔 관장은 어릴적 한과와의 추억을 이렇게 기억한다. “어릴 적 한과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집안에 제사가 있거나 명절 때에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어서, 시장통에서 산 약과나 넓적한 한과, 빨간 옥춘 사탕이 전부였죠. 때때로 배가 아플때 할머니께서 약이라며 과자를 물려 주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한과가 발효식품이라서 그 장점을 체득해서 아셨던 것 같아요.” 한과공장을 하던 처가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그의 운명 속에 한과가 등장하게 만들었다. “공장을 맡아 운영하던 처남이 군대를 가게 되자, 처가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죠. 그래서 다니던 제약 유통회사를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을 해 보니, 한과가 사업성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친 듯이 다른 분야에서 일을 했던 제 눈에 한과 만드는 사람들은 너무 대충 일하는 것 같았어요. 제 계산으로는 검은깨를 하루에 2~3가마는 볶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걸리 마시랴, 담배 태우느라 겨우 1가마만 볶는 식이었죠. 그런데도 대목을 지나면 다들 목돈을 만지던 시기였어요.” 그렇게 한과 시장에 눈을 떠가던 즈음, 처남이 제대해 그의 설 자리가 줄어들었다. 3년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셈이 밝았던 그에겐 충분한 준비시간이었다. 그래서 아내와 직원 한 명만을 데리고 월곡동에서 조금 떨어진 월계동에 공장을 차렸다. 성공한 회사를 보니 모두 궁(宮)이나 왕(王)자가 들어간다는 것에 착안에 회사 이름은 ‘신궁(新宮)’으로 지었다. 1981년의 일이다.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거래처를 확보하는 일이었어요. 다들 큰 공장 눈밖에 날까봐 소규모 업체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죠. 오랫동안 어렵게 안면을 익히고, 신용을 쌓은 후에야 좌판 아래에 한 두 박스를 숨겨두고 몰래 팔아주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중부시장 같은 큰 시장 대신 월계동, 이문동, 장위동, 석관동을 돌면서 구멍가게에 외상 거래를 했죠. 자전거에 박스를 싣고 직접 돌았습니다.” 그의 성공의 원동력에는 이런 성실함과 함께 남과 달라야 한다는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남들과 다르게 만들어야 팔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죠. 시장을 휘어잡던 큰 회사들은 늘 만들던 대로 만들어도 쉽게 팔아치울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럴 처지가 아니었으니까요. 보통은 국화 모양으로 만들던 것을 코스모스, 연꽃, 해바라기, 무궁화 무늬로 바꾸어 만들었습니다. 약과판(藥果板)의 도안부터 제작까지 제 손으로 직접 했습니다.” 제대로 된 디자인 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던 청년사업가였지만, 그에게는 사방 천지가 교실이고 교과서였다. 외화와 함께 외국 문물이 폭발적으로 밀려들어오던 시절, 거리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낮에는 배달하는 자전거에서, 늦은 밤 귀가길 버스 차창 너머로 만나는 세상은 한과 생각으로 가득찬 그에게 다양한 도형과 화려한 색상의 영감을 불어넣었다. 이런 노력이라도 알아본 것일까. 하늘이 도와줬다. 1984년 한과시장의 대목인 추석을 앞두고 마포구 망원동에 물난리가 났다. 그 주변에 밀집돼 있던 한과들이 한강물에 쓸려 내려가 버리자, 시장에 물량이 동이 났다. 덕분에 한과 시장 큰손들에게 외면받던 신궁전통한과가 날개돋힌 듯 팔려나갔고, 그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들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상인들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가장 신경썼던 것은 신용이었습니다. 매년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 역시 일종의 신용이었죠. 상인들이 신제품을 기대하도록 만들고, 거래처들이 다른 상인들과의 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는 무기를 쥐어주려 노력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의 흔적은 그가 2008년 건립한 한과문화박물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무로 직접 만들던 약과틀을 주조방식을 활용해 금속으로 대체하고, 대량 생산을 위해 원형 틀을 만들었던 기록들은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한과문화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것들은 한과의 역사이자 그의 역사인 셈이다. 앞서 언급한 ‘상추 실험’도 답습을 거부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그의 성향을 잘 나타내는 일화 중 하나다. “보통 한과 공장들은 여름에 문을 닫았어요. 1년 매출의 90퍼센트 정도는 설과 추석에 모두 팔려나가기도 하고, 매출이 적은 여름에 한과를 만들어봤자 상해서 돌아오는 것들을 반품받기 바빴으니 아예 생산 자체를 거절한 것이죠. 거래처용으로 돌리는 스티커에 여름에는 만들지 않는다는 문구를 박아 넣었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여름에도 한과를 만들고 유통시키고 싶어, 포장부터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다양한 포장지를 놓고 가장 빨리 시드는 상추로 실험을 했던 것이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핵심은 ‘산소투과율’에 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제대로 알았지만, 모든 공장들이 사용하는 포장재질은 한과를 쉽게 상하게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발견했다. 그리고 유통기간 6개월이라는 혁신적인 한과를 시장에 내놓았다. 이후에는 한국식품연구원에 연구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쌀겨에서 추출한 ‘감마오리자놀’을 한과에 첨가해 기름의 산화를 막고, 신선도를 유지하는 기술을 특허로 인정받기도 했다. 신궁전통한과가 궤도에 오르면서 그가 찾은 곳은 대학이었다. 1995년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시작으로 11개 대학원을 쉬지 않고 다녔다. “대학원서 유통의 변화와 혁신을 미리 체험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통시장이 쇠락하고, 편의점이나 백화점, 대형마트 중심의 유통체계가 도입될 것이라는 것을 배워 대비할 수 있었죠. 늘 우리 것을 따라한 미투상품(모방한 유사제품)으로 괴롭히던 한과공장 사장이 자기네 제품을 유통시켜 달라고 제게 사정할 때 통쾌하기도 하면서,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2013년에는 대학 학부에 대한 미련 때문에 신흥대학 호텔조리학과에 입학해 작년 2월 졸업했다. 아들보다도 어린 학생들과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들었다. 웬만한 교수보다도 많은 나이에 사회적으로 알려진 터라 손가락질이 무서워 대충대충 할 수 없었다. 이 과정은 한과의 세계화를 위한 과학적 지식과 계량화 등의 바탕이 됐다. 김규흔 관장의 한과에 대한 사랑의 집약체는 역시 한과문화박물관이다. 포천 산정호수 인근에 지어진 이 박물관을 한 번 둘러보면 그의 한과에 대한 철학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박물관에 체험을 위한 공간이 많은 것이 인상적이라 하니 반색하며 설명한다. “맞습니다. 경험을 통해 아이들이 한과를 체득하기를 기대했습니다. 어릴적 입맛이 평생을 간다고 믿기 때문에, 아이들이 한과를 외면하면 시장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때문에 단순히 과거의 유물을 전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직접 만들어 볼 수도 있고, 맛볼 수도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박물관을 바탕으로 한과 전문가 교육과정을 만들어 인력 배출에도 앞장섰다. 한과 만드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시장이 커지고, 활성화된다는 생각에서다. “태권도가 세계적 스포츠가 된 것도 결국 태권도 선수들이 세계 각지에서 교육을 통해 그 정신을 보급했기 때문이죠. 한과도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한과 전문가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7년 동안 300명의 전문가를 배출했습니다. 또 박물관 주변에 군부대가 많아 간부 가족을 대상으로 한과 교육을 진행했는데, 한미연합사령부로 전출 간 장교를 통해 미군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까지 진행한 적도 있습니다. 사람을 통해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맞아 떨어진 셈입니다.” 그가 한과를 만들어 오며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도 2000년 서울에서 열린 ASEM(아시아-유럽 정상회의)에서 세계 정상들에게 그의 한과를 맛보게 한 것이다. 이런 세계화의 끝에는 한과의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있다. 한과를 단순한 음식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그의 뜻이 담겨 있다. “한과는 우리 민족의 얼이 담겨 있는 음식입니다. 차례와 제사, 명절 때마다, 우리네 희로애락(喜怒哀樂)과 늘 함께하면서 우리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죠. 조선시대에는 한과의 종류가 254종이나 됐습니다. 그중 지금 저희가 재현하는 것이 160가지 정도 되고요. 이런 풍성한 문화를 세계적으로 알리기 위해서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필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 작년 한과협회를 사단법인으로 설립했고, 올해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해 나갈 계획입니다.” 김 관장의 말을 듣다보니 멋진 외국 호텔의 디저트로, 세계 과자들이 모여든다는 일본의 답례품(미야게, みやげ) 시장에서 우리의 한과가 자리 잡을 날이 머지않았음을 기대하게 된다.
- 2016-02-05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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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돈 사용설명서]신동일 KB국민은행 도곡PB센터 부센터장
- 금수저를 가지고 태어났어도 노력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는 게 돈이다. 은행권에서는 금융자산 10억원, 평균 재산 50억원 정도가 있으면 VVIP 자산가로 본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18만2000명이 여기에 속한다. 대체로 서울 강남, 서초, 송파, 양천과 경기 분당, 동탄, 일산에 가장 많은 부자가 사는 것으로 집계됐다. 자산가들은 자신의 수입과 지출을 정확히 파악하고 불필요한 지출은 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신문 잡지를 통해 세계 경제 흐름을 파악하고, 의식주 행락에 대한 관심도 놓지 않았다. 익명을 요구한 자산가는 손주한테 우아하게 지갑을 여는 것보다 경제교육에 소홀히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손주에게 무조건 좋은 선물, 지갑을 크게 여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며 “올바른 경제관념은 손주아이 스스로 미래를 준비하는 힘을 길러주므로 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돈을 벌어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생각하게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자산가들은 분명 일반인들과 다른 공통적 습관이 있었다. 청국장 한 그릇을 먹기 위해 먼 곳을 가는가 하면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을 둘이서 나눠 마시는 등 아낄 때는 최대한 아끼고 써야 할 곳에는 과감히 용단을 내린다. 인생의 오후를 여유롭게 유유자적 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번 돈을 사회적으로 의미있게 사용하는 태도가 강조되고 있는 시점에서 신동일 KB국민은행 도곡 PB센터 부센터장과 4명의 자산가에게 질문, 용돈관리의 결정적 오류에 관한 실체적 담론을 짚어봤다. 신동일 KB국민은행 도곡PB센터 부센터장은 20년 넘게 KB국민은행에서 퇴직연금과 프라이빗뱅킹(PB)을 담당하면서 KB국민은행 최초 국은인상 2회 수상, 카드 2만500장 신규 유치, 보험 700억원 이상 판매라는 누구도 따라잡기 힘든 화려한 이력을 쌓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대한민국 1퍼센트 부자들의 삶에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 자리하면서 돈을 다루는 그들의 마음과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그 경험은 베스트셀러 를 비롯한 다수의 저서로 만들어져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부자를 가장 잘 아는 그가 말하는 ‘부자의 법칙’을 들어보자. 신동일 KB국민은행 도곡 PB센터 부센터장은 인터넷에 ‘신동일 꿈발전소’라는 자신의 사이트를 개설하여 스스로를 꿈발전소 소장으로 부르고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경제독립을 이뤄야 하는 법이다. 그가 운영하는 꿈발전소는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존경받는 1퍼센트 부자와 행복한 부자들을 명예이사로 위촉하여, 그들에게 직접 배우며 부자의 꿈을 현실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50만원을 쓰느냐 50만원을 채워 넣느냐의 차이 “한 회장님이 해주신 얘기가 기억납니다. 그분은 과거에 바이어와 약속을 잡았는데 차가 밀려서 약속 시간 단 5분이 늦어지는 바람에 1년 매출의 절반을 버려야 했던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약속 시간 5분 전이나 10분 전으로 설정하지 않고, 반드시 15분 전으로 해서 여유 있게 사람을 만나는 습관을 가지게 됐다고 하죠.” 부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것으로, 그는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습관은 돈을 대하는 마음에서부터 다르게 접근함으로써 갖게 된다. “한 공무원이 휴가를 내고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월 소득이 적지 않았고 정년이 7년 정도 남아 있었는데 내 집 장만을 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금융자산은 2000만원에 불과했죠. 그동안 푼돈을 소홀히 다룬 게 원인이었던 겁니다. 백 원 단위의 거스름돈을 한번도 받아 본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부자들은 돈을 1원 단위로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푼돈 관리를 잘 못하는 걸 보면, 그런 작은 부분에서부터 부자와 보통 사람은 차이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푼돈 관리뿐만이 아니다. 돈을 만드는 사람과 못 만드는 사람은 큰 돈을 보는 관점에서도 차이가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예를 들어 정기예금을 만들기 위한 950만원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거기서 50만원은 쓰고 900만원을 예금으로 운용하기 마련이란다. 그러나 부자들은 어디서든 50만원을 가져와서 1000만원짜리 정기예금을 만든다고 한다. 간단한 차이처럼 보여도 습관으로 몸에 배지 않으면 실행하기 힘든 일이다. 성공 습관을 장착하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 신 부센터장은 그래서 ‘마이 라이프 북’을 만들었다. 자신의 꿈과 목표를 적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체계적인 도움을 주게끔 도와주는 다이어리다. 다이어리에는 로드맵을 3년, 5년 단위로 작성하는 것과 수입 및 지출 파악, 다양한 종잣돈 마련 계획 설정 등 돈을 모으고 활용하는 데 있어 세부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물론 1퍼센트 부자들을 만나온 신 부센터장의 노하우가 그 안에 녹아들어있다. 그가 다이어리에 적용한 부자들의 성공 노하우는 크게 다섯 단계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수입-지출?1원’ 이상이 되는 것이다. 다양한 지출이 넘쳐나는 현대에 매월 마이너스가 아닌 생활을 하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다. 그는 수입을 늘리거나 지출을 줄이거나 2가지 중 한 가지라도 잘 해야 이룰 수 있다고 단언하며, 현실적으로 당장 소득을 늘리기는 어렵기 때문에 지출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두 번째 단계는 종잣돈 마련이다. 1원이라도 남으면 그 돈을 쓰지 않는 한 반드시 종잣돈이 된다. 그리고 1원도 버리지 않고 살피는 습관이야말로 성공적인 미래를 위한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세 번째 단계는 추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아바타’ 창출이다. 여기서 ‘아바타’란 나를 대신해서 수입을 올려 줄 모든 수입원을 일컫는다. 예를 들어 월세가 나오는 수익형 부동산, 증권 투자를 통한 금융소득을 아바타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 단계는 ‘아바타’ 수입이 현재 수입을 초과하는 단계인데, 신 부센터장은 이를 진정한 경제독립이라고 부른다. 확실한 ‘아바타’가 생겨서 그것만으로도 생활을 영위하는 게 가능할 때, 그때야말로 현직에서 은퇴해도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성공 습관을 장착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습관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습니다. 좋은 습관을 갖기 위한 첫걸음은 뚜렷한 목표를 세우는 것이죠. 특히 뚜렷한 목표를 세우는 일은 스마트폰보다는 종이에 적는 걸 추천합니다. 스마트폰에도 일정 관리 및 메모 기능이 있긴 하지만 경제독립의 꿈을 이룬 부자들은 여전히 종이에 적기를 좋아해요. 손을 움직일 때 가장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기 때문이죠.” 부자는 돈을 대하는 방법이 다르다 신 부센터장의 말을 들을수록 부자들은 일반인과는 다른 관점에서 돈에 접근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다른 관점이란 돈에 대한 마음가짐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부자들이 작은 습관에 집중하는 이유는 그런 작은 습관마저도 무너지면 그보다 더 큰 것들도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낭비가 없으며 최대한 효율적으로 돈을 불릴 수 있는 방법들을 자연스레 모색하게 된다. “샐러리맨은 수입이 월급 통장 하나지만 부자들은 계속해서 다른 수입원을 모색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슈퍼리치들은 투자를 할 때면 3-3-4의 균형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 슈퍼리치들의 자산을 보면 부동산이 70퍼센트에 육박합니다. 부동산은 사실 쉽게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래서 나머지 30퍼센트를 주로 운용하는데, 그 30퍼센트 중 절세 상품에 30퍼센트, 정기예금 같은 상품에 30퍼센트, 그리고 투자 자산에 40퍼센트를 배분합니다. 안전 자산과 투자 자산을 6 대 4로 놓는 거죠.” ‘돈에는 흐름이 있는데 그 길을 막지 말라.’ 신 부센터장이 좋아하는 말이다. 단순히 정기예금으로 쓰일 수 있는 돈도 조금만 발품을 팔면 채권이라든지 펀드 등 그보다 더 효율적으로 돈을 불릴 수 있는 길로 갈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관련 정보에 대한 관심을 갖고 계속 확인하며 기회를 보는 습관을 지녀야 할 것이다. 부자들에게는 ‘통큰’ 확신이 있다 “과거에 한 1000억 원대 슈퍼리치인 회장님은 선풍기를 하나 틀어놓고 생활을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건 습관이라기보다는 신념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아낄 때는 아껴도 쓸 때는 또 통 크게 쓰기도 해요. 사업 기회가 오면 과감한 투자를 선택하고 아무도 모르게 기부하는 것 또한 슈퍼리치들의 특징이죠.” 크게 투자해야 할 때가 오면 크게 투자하는 것, 기부해야 할 곳에 기부하는 것은 자신이 투자할 대상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확신은 오랜 시간 동안의 공부와 경험을 통해 모종의 기술처럼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신 부센터장은 초고액 슈퍼리치로 갈수록 투자와 관련해 두텁고 핵심적인 전문가 집단을 네트워크로 두고 있다고 말한다. 보험 하나를 봐도 전문가 2~3명의 의견이 일치했을 때에야 가입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를 시작하겠다고 마음먹고 계획을 수립하는 것 자체가 50퍼센트는 이룬 것입니다.” 이미 완성된 것만 보면 저걸 어떻게 이뤘지 싶어 먹먹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어야겠다고 다짐한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힘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보다 나은 2016년을 위한 다짐, 아직 늦지 않았다.
- 2016-02-05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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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t6 2막에서 이룬 꿈] 어릴 적 꿈이 중년의 새로운 꿈으로 - 문화관광해설사 윤민용씨
- 독일에 한 소년이 있었다. 호메로스의 를 사실이라고 믿어버린 아이는 언젠가 신화 속 도시 트로이를 발견해낼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어른이 되어 러시아에서 사업으로 큰돈을 손에 쥔 소년은 어릴 적 꿈을 잊지 않고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고고학을 공부했고, 그리스로 건너가 고대 유물 발굴에 평생을 바쳤다. 그리고 터키 히사를르크 언덕에서 꿈에 그리던 고대도시 트로이 유적지를 발견한다. 그가 바로 고고학계에서 잘 알려진 하인리히 슐리만(1822~1890)이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竹山)에서 만난 윤민용(尹民鎔·79) 문화해설사의 이야기는 이 슐리만의 이야기와 묘하게 닮아 있다.글·사진 이준호기자 jhlee@etoday.co.kr 그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 모르겠다. 그가 자랐던 고향 죽산에는 유난히 다양한 모양을 한 돌이 많았다. 산과 들을 뛰놀던 유년시절 소년 윤민용은 이 돌들이 왜 만들어졌는지, 어디서 왔는지 궁금했지만 당최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커서 돌들의 유래를 알아내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50년이 훌쩍 넘어서야 겨우 알게 됐다. 그 소년이 봤던 돌들은 통일신라 때 축성돼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죽주산성(竹州山城)의 일부였고, 그의 고향 죽산은 ‘경기도의 경주’로 불릴 만큼 문화유산이 많은 곳이라는 것을. 그가 어릴 적 꿈에 먼 길을 돌아 도착하게 된 이유는 가난이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그는 학비를 벌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는 고향에서 경향신문과 조선일보, 한국일보를 배달했고, 졸업할 즈음에는 죽산지국장이 되어 있었다. 그때 그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신문을 통해 세상에 눈을 뜨게 됐고, 그의 타고난 웅변 실력은 세상이 그를 새 꿈에 다가가도록 종용했다. 정치였다.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로 진학하면서 그 꿈은 구체화되는 듯했지만, 5·16 군사정변을 만나 그의 인생은 큰 변화를 맞이한다. 금배지 대신에 타워호텔의 총무부장 직함을 달았다. 롤링스톤스가 울려 퍼지던 1969년의 일이다. 타워호텔은 1961년 민간에 매각되기 전까지 군사정부의 외빈용 숙소로 사용되었던 만큼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던 곳이다. 남북적십자회담이 1972년에 시작돼 2년간 7차례 진행됐는데, 그 역사적 사건 실무의 중심에 그도 서 있었다. 그렇게 10년간 호텔리어로 생활했다. 다시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한국화학장치주식회사에서 20년간 근무 한 뒤 정년을 앞두고서였다. “당시 퇴직 이후 계획을 세우기 위해 고향을 자주 찾다 보니 칠장사(七長寺)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칠장사의 다양한 유물들을 호기심에서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 유년시절 꿈을 다시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2001년 안성시에서 문화관광해설사제도를 시행한다고 해서 본격적인 교육을 받고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문화해설사로서의 활동은 쉽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공부를 새로 했죠. 관련 역사를 알아보기 위해 한국학중앙연구원 같은 곳에서 밤을 새우기도 했습니다. 문화해설사는 단순히 기록되어 있는 것을 읊는 역할이 아니기 때문이죠. 해설의 흥미와 사실감을 살리려고 정확한 역사 속 날짜와 시대적 배경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뒤따라야 했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간혹 스마트폰으로 내 해설을 확인하는 짓궂은 친구들도 있고, 신분을 밝히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하는 전문가들도 만나는데, 해설을 듣고 나서 칭찬을 많이 해주십니다.” 그가 문화관광해설사 활동을 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두 가지다. 역사적 근거를 통해 주류 사학(史學)과 향토사학(鄕土史學)의 올바른 접점을 찾는 것과 이를 통한 스토리텔링이다. 그런 노력을 통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 중 대표적인 게 조선 최고의 어사로 손꼽히는 박문수(朴文秀·1691~1756)의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 이야기다. “칠장사에는 박문수가 세 번째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다가 이곳에 들러 나한전에 기도를 드린 덕분에 장원급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구전설화로 전해 내려와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죽산에서부터 안성까지 자료가 될 만한 곳을 샅샅이 뒤졌고, 결국 천안 입장면에서 생가로 추정되는 곳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마치 수사를 하듯 박문수의 호 기은(耆隱)이 그의 고향인 천안시 북구 입장면 기로리(耆老里)에서 비롯되었다고 추론하고, 여러 사료 확인을 통해 그의 몽중등과시 중 마지막 구절에 있는 (대나무)피리 적(笛)으로 알려져 있던 글자가 풀피리 적(笛)이라는 사실을 밝혀 공식적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이렇게 2년간 시간의 파편을 수집하고 확인하기를 거듭했고, 결국 어사 박문수의 장원급제에 관한 스토리텔링을 완성할 수 있었다. 고령 박(朴)씨 대종회로부터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안성시에서는 이 이야기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어사 박문수 전국 백일장을 개최하고 있다. 그가 완성한 박문수의 이야기는 이렇다. 그는 어머니의 간청을 흘려듣기 힘들었다. 선비로서 절에 기도를 올리는 것이 마뜩잖았지만, 세 번째 과거시험 도전이었기 때문에 거절할 면목도 없었다. 하루를 꼬박 걸어 도착한 칠장사 나한전에서 그는 유과를 공양하며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켰다. 이날 밤 박문수는 꿈속에서 부처님을 만난다. 부처님은 시험에 나올 시제 7행을 알려주면서 나머지 행은 스스로 완성해야 하며 신중하지 못하면 시를 망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렇게 성균관 과장(科場)에서 박문수가 완성한 시가 몽중등과시다. 그는 이 시로 병과 진사과에 장원급제했다. 최근에 이 시구는 수험생을 둔 학부모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 칠장사로 복사본을 얻으러 오는 일이 많아졌다고 한다. 실제로 그를 만난 당일은 2016학년도 공립 중등교사 임용고시가 있던 날이었는데, 나한전은 기도를 올리는 학부모들로 북적였다. 시의 효험 덕분인지 윤민용씨의 손주는 캐나다왕립사관학교에, 외손주는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 중년의 꿈을 완성하기 위한 또 다른 꿈은 그간 조사하고 연구한 자료와 그의 이야기를 엮어 도록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는 “이 책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주변에 무료로 나눠주고 싶습니다”며 “사람들의 관심을 높여 역사를 소중히 하는 마음을 키우고 싶습니다”라고 밝혔다. >> 브라보 커버스토리 Q&A 꿈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새로운 꿈이 생겨났기 때문이죠. 그러다 새 꿈이 현실이 되고, 천직이 되면서 어릴 적 꿈은 꿈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꿈에 다시 도전하게 된 계기? 중년이 되고 사회적으로 안정이 되면서 고향을 자주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고향의 많은 문화재들을 다시 보게 됐고, 문화재들을 통해 다시 꿈꿀 수 있었습니다. 어릴 적 꿈 vs 중년의 꿈? 어릴 적 꿈이 막연한 희망이었다면, 중년 이후 새롭게 품은 꿈은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 꿈이 호기심에서 비롯됐다면, 중년의 꿈은 베풀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 다른 점인 것 같습니다. 꿈을 이루기까지 어려웠던 점?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기 위해 향토 사학을 공부하는 과정을 꼽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사료를 뒤지고 현장을 오가는 것이 즐거웠지만 쉽지만은 않은 과정이었습니다. 당신의 꿈은 무슨 색? 구체적인 색보다는 밝다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굳이 색을 고르라면 태양빛과 같은 주황색이라 할 수 있습니다. 꿈은 인생에 희망을 주는 빛과 같은 존재입니다. 꿈을 이루고 난 뒤 좋은 점? 늘 긍정적인 태도와 즐거운 마음으로 인생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덕분에 건강과 활력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됐습니다. 잔병치레도 사라졌습니다.
- 2016-01-21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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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정퇴자, 조퇴자, 졸퇴자가 말하는 독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
-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그에 대한 생각들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중년 우리들의 생각도 좋지만 젊은 사람들은 현재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할 때가 있다. 여기 세 사람이 있다. 젊은 사람들과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토론을 한다. 그들이 은퇴와 퇴직 이후 얻은 삶의 즐거움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이 내용들을 이란 책에 담았다. 정퇴자(정년퇴직), 조퇴자(조기 퇴직), 졸퇴자(졸지에 퇴직) 세 명이 모였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모인 그들은 어김없이 전날 토론한 책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어제는 동화책을 읽고 토론을 했는데 새롭더라고요.” 책을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 문을 두드린 곳은 숭례문 옆 ‘숭례문학당’. 책을 내보고 싶다는 꿈을 좇아 모인 것이 이렇게 인생을 바꿔놓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기업연수원에서 기업교육을 담당하다 조기 퇴직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경희대에서 경영학을 가르쳤던 최병일(崔炳一)씨. 그도 책을 내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글쓰기의 기초가 전혀 안 된 자신을 발견하곤 한겨레문화센터의 글쓰기 과정에 등록한다. 거기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그가 소개를 받은 곳은 바로 숭례문학당. 즐거운 인생의 시작이었다. 수산회사, 무역회사, 교육회사 등 중소기업에서 다양한 경력을 쌓았지만, 부도를 맞은 회사와 함께 파산한 윤석윤(尹錫潤)씨. 졸지에 퇴직자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거기에서 무너지지 않고, 교육회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사 활동을 하던 그였다. 동경하던 것은 책을 쓰는 것도 아닌 글쓰기. 그가 찾은 곳도 한겨레문화센터였다. 그곳에서 인연을 맺은 최씨가 비슷한 꿈을 가지고 있던 윤석윤씨에게 숭례문학당을 추천한다. 최씨가 2011년 초 그곳에 들어간 지 한 달 뒤였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토론을 하는 것은 사실 그들에게는 생소한 방식이었다. 생소함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방식에 순응하고 따라가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방식은 그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뽐내 남들에게 생각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석윤씨는 결심했다. 이곳에서 2년만 공부에 투자해보겠다고. 그리고 5년이 지난 현재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젊은 시절보다 더 다양한 영역에서 그들은 빛나고 있다. 국책연구기관과 민간연구기관에서 32년간 연구원 생활을 했던 윤영선(尹永善)씨. 사실 그가 숭례문학당과 인연을 맺은 것은 두 명에 비하면 가장 최근이다. 2014년 12월 31일 정년퇴직을 한 뒤, 지난해 1월 이곳에서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도 두 명과 다르지 않다. 책을 내보고 싶다는 것. 단지 그 꿈을 위한 열정이 발을 이끌었다. 두 명보다는 시작이 늦은 탓에 그들보다는 아직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서서히 활동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 외부활동보다 더욱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는 것은 내면의 변화다. 자신감은 말로 할 수도 없고,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생겼다. 몇 십 년간 사회생활을 하며 굳어진 습관들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는 것. 이들은 모두 신중년들 또한 똑같이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책을 읽으면 말이다. 그러나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읽고, 발로 뛰었을 때 비로소 변화를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자신도 변화하는 것. 그리고 열린 사람이 되는 것. 그것들이 바로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라고 그들은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독서를 하고, 토론을 해야 하는 이유 세 명 모두 숭례문학당에 대해 하는 공통적인 말이 있다. 이곳은 토론을 할 때 정답도 없고, 정답을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 그저 자신이 책을 읽고 느낀 것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곳이라고 말이다. 윤석윤씨는 이곳에서 토론을 할 때 ‘나이와 계급장을 모두 떼는’ 대화의 장이자 아고라라고 얘기할 정도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유독 ‘경청’하려 한다. 20~30대의 사람들과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납득시키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와 살아온 환경과 배경이 달라 생각이 다를 뿐, 틀린 것은 없다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근저에는 ‘인문학’이 있었다. 숭례문학당에서는 대부분 인문학 책을 읽고, 서평을 쓰고 토론을 한다. “인문학은 역사, 철학, 문학이 있죠. 여기에서 많은 문학책을 읽고 공부하니, 세상을 사는 다양한 사람을 이해하려면 문학책을 읽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기상천외한 캐릭터를 간접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죠.”(최병일) 토론의 매력은 소통과 대화다. 그리고 그 속에 배려가 존재한다. 토론은 2시간. 각 10분의 발언권이 주어진다. 꽤 긴 시간 같지만, 막상 토론에 들어가면 토론자들이 느끼는 시간은 10초와 같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은 지혜의 나눔에 목마르다. 그리고 치열하다. “나눔이 없는 독서는 무엇인가 부족하더라고요. 독서토론은 제 생각을 나눠주고, 남의 지혜를 얻을 수 있으니 더욱 좋은 셈이지요. 또 나이가 많거나, 지위가 높다고 발언권이 더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 정말 평등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경청하면서, 제 생각의 깊이가 그보다 깊지 않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겸손해지고, 공부에 더욱 매진하게 됩니다.”(윤석윤) 이들은 독서토론이 신중년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이유를 계속해서 토해냈다. 특히 젊은 사람들과 토론하면서 그들에게서 인정받을 때의 희열은 퇴직 이후 떨어졌던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30세대에게 인정을 받고, 책 친구와 말 친구가 생겼다는 것. 그것은 60년 이상 살면서 굳어진 생각의 패러다임을 깨버릴 수 있는 힘이었다. “저도 처음에는 어색했어요. 토론을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거든요. 상대방의 반응에도 민감했고 말이에요. 나이 먹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실수하는 것 아닐까 생각도 했죠. 그런데 여기서는 평가라는 게 없더라고요. 그저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뿐. 자연스럽게 저도 젊은 친구들의 생각을 수용하게 됐습니다. 어쩔 땐 젊은 친구들이 그래요. ‘선생님, 이번 토론 꼭 나오셔야 된다’고 말입니다. 재미있어요. 그들과 친구가 된 것이.”(윤석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행복해요. 행복해졌어요.”(윤석윤) “은퇴 후 소속감이 없고, 고독감이 와서 두려웠어요. 지금은 그런 것을 느낄 틈이 없습니다. 삶의 자신감도 생겼어요. 밤을 새워가면서 책 읽는 것이 매우 즐거워요. 마음에서 오는 자긍심 때문인 것 같아요. 제 인생의 최고의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윤영선) “예전에는 일이 없으면 초조했는데, 지금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요. 제가 하고 있는 일과 일 사이의 공백기는 책으로 채우면 되니까요.”(최병일) 독서 공부가 인생을 바꿨다 이제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타인에게 독서와 토론의 즐거움을 전한다. 독서토론 강의를 나가기도 하고, 토론 진행자를 양성하는 과정을 열기도 했다. 경희대학교에서 경영학을 가르쳤던 최씨는 과목과 강의 방식을 180도로 바꿨다. 경영학에서 독서토론, 생각과 표현이라는 과목으로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최씨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도 확실하게 바뀌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자유롭게 토론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피드백 정도만 하는데도 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운 것. 이러한 반응에 용기를 얻어 생산성본부, 학교 도서관 등의 초청 강의도 줄을 잇고 있다. “2015년은 태어나서 가장 많이 강의를 한 해예요. 특히 기업에서 강연을 하고 느낀 점은 신중년들이 변화에 대해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책을 권하고, 숭례문학당을 소개했더니 회사 다니는 것도 즐겁고, 책에 지출하는 비용도 늘어났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삶이 조금 더 윤택하게 변했다며 고맙다고 했습니다. 제가 겪었던 것을 똑같이 상대방이 느끼니 이보다 좋은 게 있겠어요?”(최병일)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은퇴 후 인생에서 미래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공부를 하는 은퇴자에게는 정년이 없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부족함을 느끼게 되고, 그 부족함을 채워줄 책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의와 토론을 하면서 느낀 젊은이들은 신중년의 지혜를 얻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게 맞물려 그들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 2016-01-20 1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