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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돌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인천 홍예문
- 가을은 하늘에서 먼저 온다더니 며칠 전부터 부쩍 높고 푸르다. 바람도 제법 서늘하고 창밖 숲에 내리는 볕도 달라졌다. 어디든 내달리고 싶은 날씨다. 오후에 잠깐 인천에 다녀왔다. 오래전 살았던 곳이다. 인천을 갈 때는 늘 아는 이들이 살고 있는 이웃 마을 마실가는 듯한 기분이다. 내게 인천은 추억의 장소가 아니라 늘 내 주변에 있었던 것 같은 편안한 이웃 동네다. 이곳에 살았을 때만 해도 나는 한창 젊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빨빨거리며' 쏘다니던 때였다. 그렇게 인천 구석구석 내 발자국을 남겼다. 그러다 보니 유치원과 초등학교 시절 한때를 보냈던 내 아이들도 마치 고향인 듯 생각한다. 아이들의 기억 속에도 자리 잡고 있는 모양이다. 서울로 떠나와서도 틈이 날 때마다 잠깐 다녀와야겠다 하면서 핸들을 돌리게 한 곳이다. 신포동 쪽에서 인성여고를 지나 전동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홍예문이 있다. 이 터널을 지나 제물포고등학교 쪽으로 자동차가 빠져나갈 때마다 어린 두 아들은 굴속을 지나가는 기분이 드는지 “와, 터널이다” 하며 좋아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아주 짧은 시간인데도 아이들은 함성을 질러댔다. 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긴 시절에 만들어진 홍예문은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둥글다. 그래서 한자 무지개 ‘홍’ 자와 무지개 ‘예’ 자를 써서 홍예문, 또는 무지개 문이라 불렀다. 사실 일본인들은 구멍 ‘혈’ 자에 문 ‘문’ 자를 써 '혈문‘(穴門)이라고 했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산허리를 잘라 구멍을 뚫었지만 인천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보이는 모습 그대로 무지개문이라고 했고 지금껏 홍예문은 무지개문으로도 불린다.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이곳에 지름길을 만들기 위해 응봉산 마루턱이 무지막지하게 폭파당했다. 1905년 일본 공병대가 착공했고, 중국의 유명 석수장이들까지 불렀다. 부족한 시공비용과 힘든 노동은 조선인들의 몫이었다. 결국 우리 국민들의 피땀으로 3년 만에 홍예문이 만들어졌다. 화강암 석축으로 쌓은 높이 약 13m, 폭 약 7m의 석문(石門)은 112년 전 일본인들이 물자 소송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광복 후엔 우리 시민들에게 유용한 공간이 되었다. 양옆으로 고급 주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젊은 연인들에게는 멋진 데이트 코스가 되었다. 홍예문 석문 위로는 늘 영화 광고판이나 표어와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학생들이 졸업 앨범 사진을 찍던 인기 포인트이기도 했다. 지금은 많이 낡아 오랜 시간의 흔적이 가득하다. 그래도 인기는 여전해서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활용되기도 하고 외부인들이 자주 찾는 명소가 되었다. 홍예문 양옆으로 난 돌계단을 천천히 올라가 봤다. 담쟁이덩굴이 늘어진 화강암 석축에 세월의 더께가 묻어 있었다. 고즈넉한 언덕길을 걸어 석문 위로 올라서면 탁 트인 풍광이 펼쳐지고 멀리로는 인천항까지 보인다. 옆길은 자유공원과 송월동 벽화마을로 이어진다. 맞은편 계단을 이용해 내려오는데 몇 군데 예쁜 카페가 눈에 들어온다. 구조가 독특한 적산 가옥의 공정무역 찻집과 브런치 카페, 그리고 전통찻집의 독특한 외관이 멋지다. 그래서 이 부근이 홍예문 카페길이라 불리나보다. 담쟁이덩굴 담장 따라 이어지는 사계절의 운치 덕분에 제법 핫한 곳이다. 도심에서 이렇게 고풍스러운 멋과 함께 수수함을 간직한 곳이 있다는 게 좋다. 고갯마루에는 비록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지만 각자의 추억을 안고 홍예문을 찾는 발걸음은 의미 있다. 이날은 코로나19 여파 때문인지 온 동네가 숨죽인 듯 고요하다.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가는 세상에서 석문만은 그 자리에서 여전하다. 이럴 때 부쩍 조용해진 옛길을 호젓하게 돌아보는 여유로움을 누려본다. ◇홍예문(虹霓門):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 20번지 외 4필지 / 인천 유형문화재 제49호
- 2020-09-14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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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은 나에게 흙처럼 살라 하네!
- 지난봄부터 주말농장을 시작했다. 그동안 황무지에 씨 뿌리고 가꾸면서 행복했다. 생명이 탄생하고 커가는 과정이 신비로웠다. 봄에 심을 수 있는 상추며 고추, 가지, 토마토, 감자, 오이, 깻잎 등 20여 가지 품종을 손바닥만 한 땅에 뿌리고 가꿨다. 그 수확물은 풍부했다. 갖가지 상추가 푸른 잎을 자랑하며 쑥쑥 자랐다. 가지 고추, 오이 등 열매 식물은 꽃이 피고 지며 열매를 맺었다. 날이 다르게 열매는 크기를 더하며 여물어갔다. 토마토가 붉고 노랗게 익어가며 식단은 더욱 풍성해졌다. 흙은 참 신비로웠다. 뿌린 씨앗은 어떤 것이든 싹을 틔워내고 길러내었다. 마치 컬러프린터가 감춰둔 색깔을 뿜어내는 것과 같았다. 손으로 움켜잡았을 때는 그냥 한 줌의 흙이었다. 흙이 태양 빛과 합작하며 만들어내는 색깔은 신비롭고 조화로웠다. 그 놀라움은 마치 밤하늘의 별들과 다르지 않다. 어린 시절 고향 집에, 어두운 밤이 되면 하늘은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했다. 지구보다 더 큰 별들이 바닷가 모래알보다 많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내가 별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러한 경이로움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놀라움을 주말농장을 하면서 또다시 체험하고 있다. 이 기적 같은 현장에 내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축복받은 인생이 아닌가 싶다. 기적은 또 있다. 그렇게 자란 농작물은 끝없이 수확을 계속할 것 같았다. 그러나 한여름이 지나니 하나둘 수명을 다해갔다. 그 많던 상추는 더위에 녹아 더는 잎을 키워내지 않았다. 열매채소도 더위에 지쳐버린 듯 줄기며 가지가 마르고 시들어갔다. 마치 다들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익숙한 농부들은 벌써 마지막 열매를 따고 줄기를 뽑고 밭을 갈아엎기 시작했다. 다음 순번을 위한 기초 작업이다. 가을 수확을 위해 한여름 폭염에 뿌려야 할 씨앗이 기다리고 있다. 초보 농사꾼이 하는 일은 그저 익숙한 농사꾼을 보고 따라 하는 일이다. 흙을 새로 다듬고 골을 내어 두둑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두둑에 무와 배추씨를 뿌렸다. 흙은 또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인다. 흙은 말이 없고 모든 걸 묵묵히 받아들인다. 세상에 가장 마음 좋기는 흙이 최고인 것 같다. 있는 대로 뿌린 대로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키워낸다. 인간의 세상처럼 ‘병원에서 신생아가 바뀌었다’는 말도 ‘장례식장에서 시신이 바뀌었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 한 번도 어떤 종류이든 뒤바뀜 없이 원칙을 지켜낸다. 그래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는 듯싶다. 인간세상은 원칙을 지키지 않고 사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역설적인 말이기도 하다. 주말농장을 하면서 흙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밭이 시멘트 콘크리트 바닥이었다면 단 하나의 생명이라도 키워낼 수 있을까? 인공물의 한계다. 생명을 키워내는 것은 오직 흙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이제 뿌린 씨앗에서 다시 싹이 나 자라고, 흙은 그 일을 또 묵묵히 수행할 것이다. 한 번도 거부하거나 싫다는 내색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씨앗을 키워 가을에는 예쁜 처녀처럼 속이 노란 배추를 키워내고, 장성한 총각처럼 미끈하고 통통한 무를 키워낼 것이다. 흙을 보니 부모의 마음도 흙을 닮은 것이 아닌가 싶다. 바람처럼 빠른 세월 속에서 흙은 나보고 ‘흙처럼 그렇게 살라 한다.’
- 2020-09-0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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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영화 '비밀의 정원'
- 8월 셋째 주인 지난주 화요일과 토요일, 일주일에 두 편이나 영화를 봤다. 코로나 정국에 일주일에 두 번씩 극장행(?). 아무리 대책 없는 인간이라고 취급을 받아도 어쩔 수 없었다. 한 편의 독립영화는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고 싶었고 또 한 편의 영화로부터는 화면 가득한 초록 영상을 보며 안구를 정화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솟구쳤다. 근데 이게 무슨 우연일까.화요일에 본 영화는 한국 독립영화 ‘비밀의 정원’. 토요일에 본 영화는 외국 판타지물 ‘시크릿 가든’(The Secret Garden)이었다.의도하고 본 것은 아니었는데 보고 나니 우연찮게 두 편의 영화가 제목은 같고 내용은 완전히 다른 영화였다. 먼저 한국 독립영화 ‘비밀의 정원’을 소개한다. 비밀의 정원… 10년 전 그날 스포츠센터 수영 강사로 일하는 정원과 남편 상우는 젊은 부부다. 좁고 낡은 아파트에서 살다 상우의 부모님이 물려주신 역시 낡은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가기 위해 짐 정리에 바쁘다. 포장이사를 할까 반포장 이사를 할까 빠듯한 돈 계산을 하며 이삿짐 싸기에 바쁜 와중에 정원에게 걸려오는 낯선 전화. 정원은 형사로부터 10년 전 사건의 범인이 붙잡혀 새롭게 조서를 써야 하니 경찰서로 와달라는 전화를 받는다. 10년 전 여고생일 때 정원은 늦은 밤 갑자기 아픈 동생을 엄마와 함께 병원으로 데려갔다. 동생을 돌보기 위해 엄마는 병원에 남고 정원은 다음 날 등교를 해야 해서 새벽에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모르는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만다. 당시 DNA를 증거로 채집했던 경찰이 10년이 지나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을 전한 것이다. 가까스로 상처를 다독이며 결혼해 남편과 살고 있는 피해자에게 조서를 다시 써야 한다며 무덤덤하게 전화를 해댄 형사. 정원이 전화를 잘 받지 않자 형사는 집까지 찾아온다. 말하고 싶지 않았던 정원의 비밀이 ‘수사기록’이라는 서류로 형사에 의해 남편에게 까발려지는 황당한 상황은 스크린 너머의 관객들까지 당황하게 만든다. 부부의 평화로웠던 결혼생활은 이렇게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소통이 단절된 채 메말라간다. 아니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 하는 남편 상우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정원의 위태로운 일상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정원의 상처는 그 나이에 걸맞지 않게 모든 것을 경험한 듯한 관조적인 자세로 마음에, 수영복 슈트를 입을 때마다 언뜻언뜻 비치는 목 뒤의 칼로 베인 듯한 자상의 흔적으로 몸에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정원은 서울에 시험을 보러 온 동생을 고향 태안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남편 상우와 함께 밤 운전을 해 고향집에 도착한다. 그리고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과거의 장소들을 찾아간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들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정원과 자신 때문에 언니에게 그런 일이 생겼다고 자책하며 의기소침하게 지내며 언니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동생 소희는 그곳에서 과거의 상처와 기억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태안 바닷가에서 옅은 미소를 띠며 함께 걷는 이들 부부의 마지막 장면을 지켜보며 그 후는 어떻게 됐을까 나름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함께 상처를 어루만지며 일상으로 돌아왔을까? 아니면 한 번 벌어진 균열이 점점 더 벌어졌을까? 영어 제목 ‘Way Back Home’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족은 깊은 상처를 받고 물 위를 떠도는 듯 부유하는 정원에게 든든한 두 다리가 돼주고 너의 잘못이 아니라며 어깨를 내어주고 토닥여줬을까? 하지만 영화 속에서 정원의 가정은 그리 하지 못했다. 10여 년이라는 시간을 엄마와 동생과 떨어져 서울에서 사는 이모와 이모부와 함께 지내며 이들을 더 가족으로 느끼며 살아왔으니 말이다. 2017년에 발표해 각종 단편영화제 수상을 휩쓴 ‘미열’을 약 3년 만에 장편영화로 제작한 박선주 감독의 작품이다. 연극계에서 튼튼한 연기를 밑바탕으로 드라마 및 영화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유재명(이태원 클라쓰, 장대희 회장 역), 염혜란(동백꽃 필 무렵, 홍자영 변호사 역), 전석호(미생, 하대리 역) 등의 배우들이 신예 감독의 독립영화에 출연해 힘을 보탰다. 코로나19로 영화 개봉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공들여 제작한 신예 감독의 작품이 쇼케이스로만 끝나지 않고 빠른 시간 안에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
- 2020-08-28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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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혼과 애국의 일념 불태웠던 '무성서원'
- ‘정읍’ 할 때 ‘내장산 단풍’만 떠오른다면 올가을엔 무성서원에도 한번 발길을 돌려볼 일이다. 지난해 한국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의 서원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서원이 발원됐다는 안동 지역 3곳을(소수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거쳐 전라도로 넘어왔다. 정읍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25년 전, 서울역에서 마지막 기차를 타고 정읍에 내려 고창을 간 적이 있다. 마중 나온 친구 차를 타고 고창으로 넘어가는 길은 줄곧 산등선을 따라가는 도로였다. 그때 깊은 밤이었는데도 유별나게 환했다. 옆을 보니 환한 달이 빛을 밝히며 열심히 차를 따라왔다. 그 달을 보자 학창 시절에 배웠던 백제 가요 정읍사가 불현듯 떠올랐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 데를 드데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논 데 졈그랄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정읍의 달이 얼마나 밝던지… 그날 우리 차를 따라 달리던 달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정읍은 내게 이렇게 환한 빛을 밝히는 달의 고장으로 기억돼 있다. 그런데 정읍에 위치한 무성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됐단다. 서원 취재를 핑계로 정읍을 방문하기로 했다. 무성서원이 위치한 곳은 앞으로는 천이 흐르고 뒤로는 성황산을 등진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이다. 원촌마을 한가운데에 무성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안동의 소수서원이나 도산서원, 병산서원은 마을과 뚝 떨어져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에 비해 무성서원은 외양상으로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언제든 마을 주민들이 찾아와 툇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눠도 될 만큼 친근하고 격의 없어 보인다. 서원을 알리는 홍살문도 주민들이 거주하는 대로변에 떡 버티고 있다. 원촌마을이 곧 무성서원이고 무성서원이 곧 원촌마을인 듯싶다. 이런 마음을 읽었던 걸까? 해설가가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무성서원의 특징은 특별한 사람만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신분 차별 없이 수학의 기회를 제공한 데 있다”며 해설을 이어갔다. 또한 이곳은 항일 의병운동의 첫 시작지였단다. 원촌마을에는 2원5사, 즉 서원 두 곳(무성서원, 용계서원)과 사당 5곳(남천사, 송산사, 필양사, 시산사, 도봉사)이 있는데, 구한말 일본 제국주의의 강탈에 맞서 저항한 항일의병운동이 이곳 서원을 중심으로 처음 일어났다고 한다. 항일의병 선봉장으로 알려진 면암 최익현 선생이 무성서원에서 1906년 첫 의병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강연회를 했다는 해설가의 설명에 새삼 원촌마을의 역사적 유산이 위대해 보였다. 무성서원에서 항일의병을 일으켰던 최익현 선생은 결국 일본군에 의해 체포돼 대마도에 감금됐는데, 단식 투쟁 끝에 1907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무성서원이 기리는 인물 중 대표적인 이는 최치원이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해 천재로 이름을 떨친 신라시대의 학자다.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6년 만인 18세에 빈공과(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한 후 학자와 정치가로 이름을 날리다가 고향이 그리워 신라로 돌아온다. 하지만 통일신라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결국엔 태산(현 정읍) 지역 향리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자신의 뜻을 현실정치에 펼쳐 보이지도 못하고 깊은 좌절만 한 채, 이곳 정읍에서 학문에 심취하고 백성들의 존경을 받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최치원. 그가 이룩한 학문의 경지는 높았으나 견고한 신분제 사회를 구축한 신라의 권력층은 그의 능력을 시샘하며 지방으로 떠돌게 만들었다. 이외에도 무성서원은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표작 ‘상춘곡’을 지은 정극인도 기리고 있다. 정극인은 최치원 등과 함께 무성서원의 사당인 태산사에 위패가 있고 무성서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정극인의 묘소와 재실이 있다. 다들 전라도를 예술의 고장이라 부른다. 단순히 근현대사의 예술가들만 배출한 건 아닌 것 같다. 면면한 역사의 흐름 속 문학과 예술의 고장이라는 이름답게 걸출한 문인과 학자들을 배출한 것이다. 역시 남다르다. 마을 한편에는 큰 연못이 있어 연꽃이 한창이다. 안동 지역 서원들이 만든 연못이 서생들의 휴식공간이었다면 이곳 무성서원이 위치한 원촌마을의 연못은 마을 주민들의 휴식공간이다. 연꽃을 즐기며 이곳저곳 산책할 수 있다. 한국의 서원을 엘리트 교육의 산실이라고만 할 수 없는, 마을 교육의 현장이 바로 무성서원이다 무성서원(武城書院) 신라시대 말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사적 166호). 무성서원은 최치원이 태산군(정읍 지역의 옛 지명) 태수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고 떠나자 백성들이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제를 올렸던 생사당(生祠堂), 태산사가 뿌리다. 이후 조선시대 중종 때 태인현감으로 부임한 영천 신잠의 생사당이 태산사와 합해져 태산서원으로 불리다가, 1696년(숙종 22) 사액을 받아 무성서원이 됐다. 무성서원은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효시인 ‘상춘곡’의 작가 정극인, 눌암 송세림, 묵재 정언충, 성재 김약묵 등을 추가로 배향하며 성장했고, 흥선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 철폐에도 살아남아 역사적·학문적 가치를 증명했다. 무성서원의 입구는 현가루(絃歌樓)로 불리는 두리기둥을 쓴 정면 3칸, 측면 2칸 기와집이며 안으로 들어가면 명륜당이 있으며, 오른쪽에 4칸의 강수재(講修齋), 왼쪽에 3칸의 흥학재(興學齋)가 있어 동·서재(東西齋)를 이룬다. 3칸인 신문(神門)을 지나면 사우(祠宇)인 단층 3칸의 태산사가 있는데, 그 안에 최치원을 북쪽 벽에, 같이 모신 사람들의 위패(位牌)는 좌우에 봉안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844년(헌종 10) 중수한 것이며, 명륜당은 1825년(순조 25)에 불탄 것을 1828년에 중건하였다. 특히 이곳 무성서원에는 중요한 서원 연구자료가 있다. 1968년 12월 19일 사적 제166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여행 이야기, 두산백과)
- 2020-08-12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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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 위의 파라다이스 '외도보타니아'
-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어렵게 되자, 이국적인 국내 여행지가 주목받고 있다. ‘바다 위의 식물 낙원’이라 불리는 경남 거제도의 외도 보타니아도 그중 한 곳이다. 사실 외도 보타니아의 인기는 새삼스럽지 않다. 1995년 개장 이래 누적 방문객 수가 2000만 명이 넘는 거제 대표 명소이니 말이다. 나만 해도 그 방문자 수에 ‘4’를 더했다. 이번 방문 때는 비가 왔다. 비 오는 날의 섬 여행도 꽤 낭만적이었다. 바깥 섬이 식물의 낙원이 되기까지 거제도 남쪽 외딴 섬 외도(外島)는 미운 오리 새끼였을까. 마음 심 자를 닮아 ‘지심도’, 보배에 비길 만한 풍광을 지녀 ‘비진도’라 불리는 거제도의 다른 섬들에 비하면 이름조차 초라한 섬이었다. 그랬던 외도가 부침개처럼 운명이 뒤집히는 일이 벌어졌다. 50여 년 전 이창호(1934∼2003) 씨가 낚시하러 외도에 들른 것이 인연이 되어, 몇 년에 걸쳐 외도를 매입한 것이다. 이창호 씨와 그의 아내 최호숙 씨는 1969년부터 외도를 해상식물원으로 가꾸기 시작했다. 무시로 닥치는 태풍과 거친 파도에 맞서며 척박한 땅에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웠다. 외도는 기후가 따뜻하고 물이 풍부해 종려나무, 야자나무, 선인장 같은 아열대 식물이 자라기에 적합했다. 첫 삽을 뜬 지 26년이 지난 1995년에 이르러서야 세상에 외도 보타니아를 선보일 수 있었다. ‘보타니아’(botania)는 ‘botanic’과 ‘utopia’의 합성어로서 바다 위 ‘식물의 낙원’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외도는 ‘보타니아’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름답고, 이국적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마치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된 것처럼. 국내 최초 해상식물원의 인기는 개장한 지 25년째인 지금도 여전하다. 외도행 유람선 선착장이 거제도에 7곳이나 있으며, 유람선이 매일 여러 차례 외도 보타니아를 왕복한다. 바람의 언덕과 더불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하는 ‘2019~2020 한국관광 100선’에도 들어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해금강 유람선 타고 바다 위 정원으로 외도 선착장 7곳 중에 도장포를 애용한다. 도장포 가까이에 외도 보타니아와 인기 쌍벽을 이루는 바람의 언덕과 신선대가 있어서다. 외도로 가는 길에 즐기는 해금강(海金剛) 유람은 덤이다. 선실 밖으로 나가 출렁대는 유람선에 몸을 맡기고, 파도를 가르며 달리는 기분이 상쾌하다. 해금강은 강이나 바다가 아닌, 바다 위로 솟은 바위섬이다. 금강산처럼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여 ‘바다 위의 금강산’이라 부른다. 해금강 해안 절벽 위에는 거센 바람을 견디며 살아온 노송들과 석란, 풍란 같은 희귀한 난초들이 자생한다. 절벽 아래에는 파도가 오랜 세월 조각해놓은 십자동굴, 부엌굴 등의 해식동굴이 있다. 선장의 설명을 들으며 해금강의 기암을 바라보면 사자, 촛대, 기도하는 소녀처럼 보인다. 30분가량의 해금강 유람이 끝나면 외도 보타니아에 도착한다. 외도 모양을 형상화한 빨간 등대가 맨 먼저 반긴다. 선장이 1시간 반 뒤에 유람선으로 돌아오라고 당부한다. 순환형 산책 코스대로 걸으면 되므로 관람시간 90분이 턱없이 부족하진 않다. 유럽식 정원과 건축물로 꾸민 외도 외도 보타니아 관광은 아치 모양의 작은 정문을 지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세계 각국 방문객을 맞이하는 외도 광장에는 한글·영어·한자로 쓴 ‘외도 보타니아’ 조형물들이 장식돼 있다. 광장을 지나면 향나무 여러 그루를 연결해서 한 몸처럼 다듬어놓은 나무 작품이 보인다. 이곳의 인공미를 대표하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이 나무는 눈이 부리부리한 뿔 달린 도깨비 또는 기세등등한 불꽃을 닮았다. 산책로 입구에 턱 버티고 서 있어 사찰의 사천왕상 같은 존재로 느껴진다. 선인장, 알로에, 용설란 등이 자라는 선인장가든을 지나면 외도 보타니아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비너스가든이 나온다. 지중해풍의 건축물과 고속도로처럼 시원하게 뻗은 정원,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세워진 하얀 비너스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최호숙 씨가 영국 버킹검 궁의 뒤뜰을 모티브로 직접 구상하고 설계한 공간이라고 한다. 비너스가든 끝에 있는 유럽식 사택 ‘리하우스’는 KBS 드라마 ‘겨울연가’(2002)의 마지막 촬영 장소였다. 외도 보타니아를 전국에 소문낸 일등 공신이다. 이탈리아어로 ‘환영합니다’라는 뜻을 지닌 벤베누토정원은 사계절 꽃이 피는 꽃동산이다. 철따라 튤립과 양귀비, 수국, 동백 등이 피고 진다. 이 꽃들은 관람객들의 감탄을 먹고 자란다. 꽃길을 걷다 보면 짙푸른 동백숲길과 대숲길이 나타난다. 밀감나무 3000그루와 편백나무 8000그루가 늘어선 ‘천국의 계단’을 내려서면 야자수 산책로가 기다린다. 프랑스식 연못과 조각상을 배치해 이국적인 정취가 가득하다. 외도 보타니아는 구석구석 아름답다. 귀부인이 그려진 화장실 이정표마저 예쁘다. 화장실 벽 둥근 창으로 보이는 해금강과 외도 등대는 또 어떻고. 바람의 고향 도장포 외도 관람을 마치고 도장포로 돌아와 바람의 언덕에 오른다. 하늘이 맑으면 언덕 아래에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비췻빛 바다가 일렁인다. 바람의 언덕은 바다로 돌출한 곶이라 늘 세찬 바람이 분다. 풀들이 바람 부는 방향으로 일제히 누워 있다. 언덕 위의 풍차는 신나서 춤추듯 바람개비를 씽씽 돌린다. 비바람에 우산이 뒤집혀도 시원한 바람이 그저 반갑다. 만약 이 언덕을 ‘도장포 잔디공원’이나 ‘도장포 민둥산’이라고 이름 지었다면 얼마나 낭만이 없었을까. 풍차 왼쪽, 숲속 계단을 오르면 호젓한 동백숲길이 나온다. 이 숲길이 도장포마을 윗길로 이어진다. 윗길에서 굽어본 도장포마을 전경도 엄지를 치켜세울 만큼 장관이다. 마을 뒤로는 산이, 앞으로는 바다가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다. 도장포마을 남쪽 바닷가에는 신선이 머물렀다는 신선대가 있다. 부안의 채석강과 지형이 비슷하다. 책을 포개놓은 듯 가로지층이 차곡차곡 쌓여 있어 태곳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공룡 발자국 같은 작은 웅덩이도 수없이 많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는 파도가 으르렁대며 들락거린다. 신선대를 본 사람들이 웅장한 기암절벽과 절벽 아래 몽돌해변을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 만하다. ◇이색 명소&맛집◇ 매미성 매미성은 2003년 태풍 매미 때문에 바닷가 경작지를 잃은 백순삼 씨가 자연재해로부터 작물을 지키기 위해 16년 동안 혼자 쌓아 만든 성벽이다. 처음에는 시멘트 벽돌로 쌓아 볼품이 없었다. 점차 네모반듯한 화강암을 쌓고 시멘트로 메우는 방식으로 바꿔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유럽 중세시대의 성을 연상케 해 이국적인 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실제 풍경보다 사진에 담았을 때 더 멋지게 보여 인생사진 명소로 유명해졌다. 경남 거제시 장목면 복항길 외도널서리 외도 보타니아 설립자인 최호숙 씨가 구조라해변에 유리 온실 콘셉트 카페인 외도널서리를 개장했다. ‘널서리’(nursery)는 ‘묘목을 기르는 땅’이라는 뜻으로 외도 보타니아와 통하는 면이 있다. 유럽풍으로 지어 외국에 여행 온 듯한 기분을 낼 수 있다는 점도 같다. 테라스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빛깔 고운 구조라에이드 한 잔 어떨까. 계절에 상관없이 초록 식물을 감상할 수 있는 게 큰 매력이다. 경남 거제시 일운면 구조라로4길 21, 매일 10:00~21:00 예이제게장백반 거제도에서 이름난 무한리필 게장 백반집이다. 본점은 도장포에 있다. 바람의언덕점은 도장포와 가까워 외도 관광 전후에 들르기 좋다. 메뉴는 게장백반 한 가지다. 메인 요리인 간장게장과 꽃게장을 비롯해 불볼락구이, 간장새우, 충무김밥, 조개미역국 등 반찬이 한 상 가득 나온다. 작은 꽃게를 사용하지만, 살이 제법 차 있어 먹을 만하다. 쫀득한 맛이 일품인 간장새우도 리필된다. 경남 거제시 남부면 해금강로 132, 매일 10:30~21:00, 게장백반 1인분 1만5000원
- 2020-08-0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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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뜻밖의 여행
- 동기들과 춘천여행을 했다. 코로나19가 신경 쓰였지만 모든 활동을 멈출 수는 없다. 50+ 세대 열두 명이 4대의 차에 나눠 타고 춘천으로 향했다. 목적지까지 차로 이동하니 조심하면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가을처럼 푸르렀다. 춘천에 들어서기 바쁘게 그 유명한 닭갈비를 먹었다. 춘천에서 제일 맛있는 집이라는데 입맛이 다르니 각자 판단할 일이다. 우리가 간 곳은 2001년도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된 곳이다.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관광지도 아닌 이곳을 찾은 이유는 동기 중 한 사람의 지인이 폐교를 임대해 사용하고 있는데 장소가 넓어 모임하기 좋다는 점이 컸다. 서울이 고향인 나는 이렇게 작은 학교도 있구나? 할 만큼 교실이 몇 칸 안 되는 건물이었다. 신기했다. 주인의 인심을 말하듯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서자 지금은 보기 힘든 옛 물건과 미술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주로 서양화였다. 인수한 지 얼마 안 되어 구상한 인테리어를 조금씩 해나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미완성이라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 더 좋았다. 잔디가 있고 풀과 꽃이 함께 자라는, 예전엔 운동장이었을 너른 공간이 좋았고 차에서 내렸을 때 여기저기 피어 있던 계란꽃으로 불리는 개망초도 많아 좋았다. 낮은 폐교 앞뒤로 보이는 넓은 하늘도 좋았다. 폐교를 사방이 둘러싼 형태라 마치 따스한 엄마의 자궁처럼 느껴졌다. 뜻 모를 그리움도 스멀스멀 피어났다. 불과 몇 시간 전 괜히 나섰나 했던 마음이 떠올라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사실 하루 전만 해도 예정에 없던 일정이었다. 자리가 남아 얹혀간 것이나 다름없다. 때마침 아이와 콩닥대고 마음도 복잡한 상태였다. 집에 있으면 더 나빠질 게 틀림없었다. 피하고 싶었다. 아이도 나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스스로 잘한 선택이라고 토닥이며 나선 길이었다. 결과적으로 아주 잘한 일이었다. 한때는 마을 아이들의 작은 숨소리가 들렸을 교실을 둘러보는 동안 마음이 안정되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짐을 풀고 한동안 주변을 둘러봤다. 저녁에는 바비큐 파티를 했다. 영업을 하는 곳이 아니어서 오는 길에 장을 봤던 터라 음식이 푸짐했다. 고기는 양껏 먹어도 줄어들지 않았다. 나중에는 집주인이 기르는 두 마리의 풍산개도 거들어야 했다. 직접 담근 된장을 풀어 끓인 된장국은 두부와 호박과 파만 듬뿍 넣었을 뿐인데 세상 어느 요리보다 꿀맛이었다.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밥을 먹어선지 행복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장구를 챙겨온 동기들이 있어 돌아가며 장구의 기본을 익혔다. 잠시 몰두했는데도 등줄기로 땀이 흘렀다. 장구를 치면 절로 체중이 줄 것 같다. 한번 해볼까? 자꾸 마음이 동했다. 역시 여행은 마음의 여유를 준다. 춘천에 있다는 사실이 집에서의 북적임을 잠시 잊게 해줬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별이 보인다는 말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르르 운동장으로 나갔다. 커다랗게 빛나는 샛별 하나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우리 집 베란다에서 밝게 보이던 샛별 하나가 “너였구나? 나야 나” 하며 아는 체하는 것 같았다. 불빛에서 좀 더 벗어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더 많은 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밤하늘 가득 보석이 박혔다. 누군가 한 줌 집어 뿌린 것 같았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었던 북두칠성이 고개를 들 때마다 보였다. 그저 별을 본 것뿐인데 가슴 밑바닥에서 울컥하며 찌릿함이 올라왔다. “별은 늘 그 자리에 있다”는 어느 영화 대사가 떠올랐다. 센스 있는 동기가 준비한 폭죽으로 운동장은 금세 파티장으로 변했다. 폭죽을 하나씩 손에 든 어른들이 까만 운동장을 콩콩 뛰어다녔다.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다시 아이가 된 것 같았다. 저마다의 행복이 몸을 뚫고 까만 세상에 퍼져나갔다. 불쑥 떠난 여행인데 오래 계획한 여행보다 좋았다. 마음에 말을 걸 듯 ‘둥둥’거리던 장구소리도 잊히지 않았다. 춘천에서 돌아오는 내내 장구를 배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 마침내 장구를 시작할 것을 알았다. 다시 춘천을 찾을 것도.
- 2020-07-24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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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친구 임철수
-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오랜만에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 전하며, 코로나 때문에 집에만 있으니 별 생각이 다 들고 옛 친구들이 그리워지고 보고 싶어지네! 이제는 다들 70이 다 되어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적다는 생각에 허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어! 전에 본 프로필 사진은 옛날 친구의 모습은 아닌 것 같아, 세월의 흔적이 너무나 우리의 마음에 쓸쓸함만 맴돌게 하는구만! 허긴 나도 늙어 머리는 올 백이고 살은 돼지처럼 쪄서 80키로가 넘어. 옛날의 날씬하던 철수는 아니지.” 철수가 날씬했었나? 카톡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80kg이 넘는 ‘돼지’의 모습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긴 많이 흘렀구나, 이런 생각만 하게 됐다. 철수는 내 초등학교 짝꿍이다. 나는 임철순, 갸는 임철수. 한자로 성은 다르지만 ‘ㄴ’ 하나 차이인 우리는 충남 공주군(지금은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2구 되찬이, 동네도 한동네다. 마을에 들어서면 철수네 집을 지나야 우리 집에 닿는데, 그리 먼 거리도 아니다. 나이는 철수가 한 살 더 많다. 그러니 벌써 올해 칠순이다. 이렇게 이름도 비슷하고 사는 곳도 같은 녀석들을 선생님은 무슨 맘을 먹고 한 책상에 앉혔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은 음악 시간에 자기는 절대로 노래를 하지 않고 “여기 다시 불러” 그러면서 풍금만 치던 분이다. 장난삼아 둘을 일부러 짝 지웠을 리 없다. 아마도 순전히 가나다순이었나 보다. 그 선생님을 내가 전병선이라고 했더니 철수가 전병석이라고 바로잡아주었다. 섭섭한 게 있어서 이름을 확실히 기억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그런 일이 있으면 더 정확하게 기억하게 되지. 철수는 군인 아저씨들에게 위문편지를 쓰라고 했을 때 “늬들 춥지? 추우면 산에다 불 놔.” 이렇게 썼다가 그 선생님한테 뒤지게 혼난 일이 있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고, 다른 일이 더 있었나보다. 철수와 나는 중학교에 들어갈 때 갈라진 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살았다. 간혹 내가 고향에 가면 얼굴을 보긴 했지만 긴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다. 이번에 알고 보니 철수는 스물다섯 살에 결혼해서 큰애가 45세, 작은애가 42세에 손자녀가 넷이나 되는 완전 할아버지였다. 한동안 몸이 안 좋아 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별 걱정 없이 대전의 그 집에서만 30년째 살고 있다고 했다. 내가 어릴 때 좋아했던 철수의 누나도 인근에 살고 있다니 우애가 여전히 좋은가보다. *누나 이야기는 다음 글 참고. https://blog.naver.com/fusedtree/70085320452 내가 남들의 말[言]꼬리나 붙잡고 늘어지며 살 때, 철수는 열차 기관사로 30여 년간 철마의 말[馬]머리를 돌리며 살았다. 지금 큰돈은 없지만 그냥 놀러 다니고 건강에만 신경 쓰며 노년에 사람답게 살기 위해 “참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전도서 12장 13절)라고 한 성경의 교훈대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서로 건강 이야기, 병 자랑을 하다가 “나는 지금도 약을 술에 타서 마신다”고 했더니 철수는 “전에 나도 유조차로 한 대 분량은 마셨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쩌다 취하지 않을 정도로 소주 반병 정도만 마신다고 한다. 모든 것이 다 헛되고 헛되다는 생각에서 창조주를 섬기며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살려고 노력하는 중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름의 순 자 때문에 어려서 기집애 이름이라고 놀림도 많이 받았지만, 지금은 그 ‘ㄴ’이 좋다. 조현용 경희대 교수(한국어교육 전공)도 ‘니은 이야기’라는 글에서 니은은 따듯하면서도 오래 계속되는 느낌을 주는 소리인 것 같다고 했다. “사람을 나타내는 말에 니은이 많이 쓰이는 것은 사람도 이렇게 따뜻하게 오래 지속되어야 함을 은연중에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궁금해졌다”는 것이다. 나랑 이름이 같은 사람 중에 이철순이라는 유명 인사가 있다. 양평 군립미술관장을 거친 문화행정가인데, 만날 적마다 나는 “어려서 미음도 못 먹고 자란 사람”이라고 놀리곤 했다. 그러니까 내 이름에는 니은도 있고 미음도 있는 것이다(장하다!). 철수는 “코로나 끝나면 언제 시간 한번 내서 만나자”고 했다. 좋지. 근데 그놈의, 아니 요놈의 코로나가 언제나 끝나나? 여섯 살 먹은 아이가 “코로나는 맨날 밖에서 노는데 나는 왜 못 나가?”라고 외치며 흐느꼈다던데, 그 아이 마음이 정말 잘 이해된다. 철수는 “건강에 한층 더 신경 써서 건강을 유지하며 행복한 노년이 되길 바랄게~~~!”라고 인사를 마무리했다. 나도 철수가 늘 그렇게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영어로 “The same to you!”다. 이게 말이 되나? 되겠지, 뭐.
- 2020-07-22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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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 이황과 14대 후손 이육사
- 안동 도산서원을 방문한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안동 시내에서 35번 국도에 올라 도산서원 이정표를 따라 달린다. 도로 오른쪽으로 낙동강 줄기를 이루는 안동호를 끼고 돌다 보면 마치 물 위를 달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 안동호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가르며 마치 신선 물놀이하듯 안개 낀 안동호를 따라 도산서원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갔다. 비가 오는 날은 문화재를 방문하기 좋은 날이다. 평소 왁자지껄한 소음 없이 호젓하게 거닐며 옛 역사를 음미하며 앞으로의 발걸음을 다잡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관광버스 한 대 없다. 오늘의 방문은 무척 만족스러울 듯하다. 입구로 들어가는 길도 오가는 이 없이 고즈넉하게 우리를 맞았다. 지금에야 이렇게 길이 넓었지 퇴계 이황 선생에게 수학하던 서생들은 좁다란 오솔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렇게 학문에 정진했을 모습을 생각하니 참 편한 세상에 산다는 미안함이 든다. 도산서원 입구 오른쪽 강 건너에 작은 정자가 보인다. 안동호로 흐르는 물길 가운데에 있는 작은 정자다. 섬이라 하기에는 작지만 달리 뭐라 부르기도 애매하다. 이 정자가 잘 보이는 곳에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는데 시사단(試士壇)이라 불린다. 1792년 음력 3월에 정조가 도산서원에서 치른 과거시험을 기념해 단을 쌓고 전각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당시 과거에 응시한 이가 너무 많아 장소를 도산서원으로 하지 못하고 그 아래 낙동강 모래강변에서 시험을 치렀다는데 답안지를 제출한 사람만 3632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오늘날 공무원 시험에 너도나도 몰빵하는 모습과 오버랩된다. 시사단으로 가려면 서원 앞 강가로 내려가 나룻배로 건너야 한다. 마을 주민들이 순번을 정해 배를 운행한다는데 비가 내리는 평일이라 그런지 배는 있는데 사공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서원만 보고 가야 할 듯하다. 소수서원이 평지에 세워졌다면 도산서원은 산자락에 위치해 있어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차례로 건물들이 놓여 있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동쪽은 퇴계 이황 선생이 직접 건축해 학생들을 공부시키던 서당이다. 그 옆 싸리문은 아직도 보존돼 있다. 이황 선생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매일 이 싸리문을 밀치고 마루에 올랐을 것이다. 이 문은 유정문으로 불리는데 ‘그윽한 곳에서 수도하는 사람은 바르고 길할 것’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한국의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부쩍 서원을 찾는 관광객이 많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서원의 핵심 공간이라 할 강학당인 전교당이 현재 보수 중이라 진입이 금지돼 있다. 전교당 현판은 선조의 명령으로 한석봉이 직접 썼다는데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도산서원을 느긋하게 살펴보고 나왔지만 사실 오늘 방문의 주요 목적지는 인근에 위치한 이육사 문학관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으로 나오면 퇴계 종택과 이육사 문학관 가는 길 이정표가 나온다. 이육사 본명은 이원록이며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아래는 두산백과가 이육사를 설명해놓은 글이다. “육사(陸史). 본명 원록(源祿).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 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때의 수인번호가 264. 이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썼다. 또한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시 ‘청포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인 1944년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했다. 이육사가 죽은 후, 1년 뒤에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었다. 그 후, 1946년 신석초를 비롯한 문학인들에 의해 유고시집 ‘육사 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고, 1968년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에 육사 시비(陸史詩碑)가 세워졌다.“ 이육사가 이황 선생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학교에서 배웠던가? 선생의 독립운동 여정을 자세하게 배운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오로지 떠오르는 것은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시작되는 ‘청포도’라는 시 구절뿐이다.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빗줄기가 휘몰아쳐 잠시 고민을 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하고는 문학관을 향해 차를 몰았다. 경북 안동에 위치한 이육사 문학관은 산속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2층 건물이다. 잠깐 돌아보고 오자 했던 계획은 어둑해져서야 끝이 났다. 문을 닫을 때까지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며 머물렀다. 우리 일행은, 격렬했지만 여리고 순수했던 이육사의 삶의 흔적을 느끼고 그가 남긴 작품들을 돌아보며 마치 질풍노도의 시대를 보냈던 20대 초반으로 다시 돌아간 듯 흥분하고 목메면서 이육사의 삶을 하나하나 경험했다. 이육사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할머니(80)가 기억하는 아버지 이육사의 모습은 어땠을까? 헤어질 때 3세에 불과했으니 기억이 없는 게 당연할 텐데 어떤 한 순간이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 아버지를 기억한단다. 1943년 아버지가 구속돼 베이징으로 압송되던 날이었다. 포승줄에 두 손이 묶이고 용수(죄수의 얼굴을 볼 수 없게 싸리나무로 만든 둥근 통)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푹 가린 아버지가 건넨 마지막 말, "아버지 다녀오마." 올 초 방영된 MBC 예능 프로그램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에서 안동 이육사 문학관을 찾아 이옥비 할머니를 인터뷰한 영상이 있다. 유튜브에 이 영상이 남아 있어 가끔 들어가서 본다. 문학관에서 선생의 유품들을 돌아보자니 유일한 혈육이었던 딸아이를 용수 속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졌을 아픔이 전해진다. 문학관은 선생의 작품들을 연대기별로 정리하고 전시해놓았지만 작품 활동보다 더 치열했을 독립운동에 대한 기술도 잘돼 있다. 특히 이육사 선생이 당했던 처참했던 고문 현장과 피로 얼룩진 도포, 감옥 수감 도구들도 전시돼 있어 악랄하고 광폭했던 일본 경찰의 만행을 느낄 수 있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던 이육사의 작품들은 시와 평론, 시나리오까지 다채롭게 정리돼 있다. 마지막까지 죽음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지켰던 이육사. 그를 청포도의 시인으로만 기억해왔던 이가 있다면 지금 당장 안동으로 달려가 그의 문학관을 방문해봐야 한다. 연대기로 서술돼 있는 각종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며 가슴이 먹먹하다 못해 목이 메어오는 뜨거운 경험을 하게 될 터이니.
- 2020-07-21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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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곡진 인연으로 제2인생에서 홈런을 치다
- 미국 메이저 방송사에서 우리나라 프로야구 경기를 중계하는 시대가 됐다. 코로나19가 변화시킨 세계의 모습이다. 1982년 해태 타이거즈의 창단 멤버로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레전드이자 선수에서 감독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인 김성한(62) 선수를 만난 것은 지금 한국 프로야구의 시대에 다시 발견되어야 할 가치를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2014년 한화 이글스 1군 수석코치직을 마지막으로 프로야구계를 떠난 그는 여전히 피 끓는 선수로서의 열정을 지닌 채 나주에서 새로운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어언 40여 년이 되어가는 프로야구의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자신의 역할을 모색 중인 그를 만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야구에 대한 미련이 아직 있죠. 여전히 야구 해설을 하면 엔도르핀이 돌고 삶의 활력을 느낍니다. 언제든지 현장에 가고 싶은 마음이죠. 그러나 현실이 되지 않기 때문에…. 현장을 떠난다는 게 처음엔 적응이 안 돼서 엄청 힘들었어요. 야구만 하다 보니 세상 사는 법을 몰랐죠. 지금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데 다른 세상을 사는 기분이에요.” 나주에서 만난 영원한 타이거즈이자 프로야구 레전드 김성한은 마치 선수 때처럼 에너지가 넘쳤다. 그는 현재 나주 혁신도시의 명물 맛집으로 소문난 중식당 ‘The하이난’의 오너이자 CMB광주방송 프로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전남 선거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인연으로 얼마 전 총선에서는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였던 정태호 의원의 유세를 돕기도 했다. 이런 그의 제2인생을 돌아보기 위해선, 삶의 결정적 순간이었던 기아 타이거즈의 감독직에서 물러났을 때로 돌아가는 게 맞을 것이다. “감독직에서 물러난 뒤 주로 산을 다녔어요. 제가 중간에 잘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감독까지는 탄탄대로로 가다가 기아로 바뀌고 나서 경질되었죠. 해태 타이거즈의 문화와 기아의 문화는 달랐어요. 거기에 잘 안 맞은 거예요.” 김성한은 오로지 야구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삶의 전부였고, 노력한 만큼 엄청난 성과도 거뒀다. 그렇기에 야구를 시작한 후 처음 맛본 엄청난 좌절에 너무 공허해서 사람들 만나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겁나고 무서웠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안 보이는 산으로 갔어요. 가서 생각 많이 했죠. 그리고 동병상련하듯 좌절 앞에 선 사람들과 만나서 얘기를 하다 보니까 내 일은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이런 정도 일에 공허함을 느껴야 하나 싶었어요. 그때 깨달은 게 좀 있었죠. ‘높은 자리에서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지내느라 나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제2인생 나주에서 열다 김성한은 과거부터 ‘우리 같은 사람들은 팬들의 응원을 받으며 살았으니 그걸 갚을 수 있는 사회공헌활동을 꼭 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그가 기아 타이거즈 감독을 끝낸 후 군산상업고등학교 감독을 맡은 건 그런 봉사를 행하고 싶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단 먹고사는 일부터 해결해야 했기에 광주에 식당을 차렸다. 그렇게 5년을 운영하다가 한화 이글스로 간 김응용 감독의 부름을 받고 그곳에서 수석코치로 1년여 동안 활동했다. 그리고 코치를 끝내고 나와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 나주에 야구팀이 있는 학교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다들 야구 열정은 넘치는데 해소할 방법은 없고, 야구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아이들도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지자체를 찾아갔죠. 야구팀과 야구장을 만드는 조건으로 KBO의 전국 유소년 야구대회 유치를 제안했고 나주시가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이 과정에서 그는 나주 혁신도시의 존재도 알게 됐다. 야구팀이 만들어지면 노후에 여생은 편안하게 보낼 수 있겠다고 판단한 그는 건물을 분양받아서 중식당 ‘The하이난’을 차리게 됐다. 요식업은 절대 호락호락한 분야가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The하이난이 체인점인 줄 알 정도로 성공한 상태. 그러나 김성한은 체인점을 만들 생각이 절대 없다고 한다. “물론 제안은 있었는데 제 철학이 ‘절대 동업은 해선 안 된다’예요. 망해도 혼자 망해야지.” 문재인 대통령과의 첫 인연 김성한은 사업을 하면서 인연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사람은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가 갖게 된 중요한 인연 중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과의 인연이다. 그 일은 그가 우연히 나주 지역 주민자치위원장이 되면서 맺어진 만남으로 비롯됐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주민자치위원장을 해보시라, 동네를 위해 유명하신 분이 일 좀 하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안 한다고 했더니 억지로 주민자치위원에 넣었어요.” 그 후 과정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어쩌다 위원장 선거 자리에 나갔더니 김성한을 알아본 사람들이 ‘위원장을 하려면 저 정도의 네임 밸류는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그 자리에서 박수를 치면서 그에게 위원장직을 맡겨버렸다. “주어진 일인 만큼 적극적으로 활동했죠. 저는 정치에 관심이 정말 없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문재인 당시 대통령 후보가 나주에 온다는 거야. 간담회가 열렸는데, 저는 식당 일이 바빠서 못 간다고 했어요. 난리가 났죠. 부위원장이 혁신도시에 건의할 게 있으니 빨리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건의는 부위원장이 하쇼. 모두 다 아는 내용일 테니까’라고 말했죠.” 그러나 하도 뭐라고 해서 결국 가긴 갔다. 일하다 말고 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대충 빨간 점퍼를 걸치고 갔는데, 막상 도착하니 다른 사람들은 다들 정장을 입어 혼자만 후줄근해 보였다. 그래도 조용히 들어가서 앉아 있었다. “간담회가 끝나고 문재인 후보가 와서 악수를 하는데 저를 알아보곤 깜짝 놀라면서 ‘아니, 여기 사시냐? 주민자치위원장이시냐?’라고 묻더군요. ‘그렇게 됐습니다’ 하고 대답하니 ‘어쨌든 많이 좀 도와주십쇼’ 하더군요. 그때 그분을 처음 봤는데, 며칠 지나 전화가 왔어요. 도와주셨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참 그걸 어떻게 냉정하게 못 도와준다고 그러겠어요. ‘잘 알겠습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했죠.” 광주 금남로에서 홈런을 치다 그러나 그때는 문재인 후보에 대한 호남 민심이 안 좋을 때였다. “김정숙 여사가 먼저 와서 터를 닦기로 했어요. 그리고 내게 ‘여사님을 모시고 다니는 일을 좀 해 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당시 김정숙 여사가 호남 구석구석 안 다닌 데가 없어요. 그렇게 인연이 됐죠.” 그가 호남 민심을 잡은 결정적 순간도 있었다. “호남 민심을 얻을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제가 옛날에 입었던 유니폼이 생각났어요. 빨간색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 그래서 문재인 후보가 광주 유세를 첫 번째로 오게 됐을 때, 일단 김응용 감독님께 SOS를 쳐서 자리에 함께 모셨고, 문재인 후보에게 제 빨간색 유니폼을 입히고 모자도 쓰게 하고 방망이까지 쥐어줬죠. 금남로에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모였는데, 그 모습을 보더니 난리가 났어요.(웃음)” 문재인 후보의 연설이 끝난 뒤 마이크가 그에게 넘겨졌다. 그런데 당시 김성한은 정치 연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그만큼 부담감이 밀려왔다. “정치 연설을 들어보면 정치적인 시그니처 단어가 있어요. 저는 그런 말에 익숙하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누구를 비방하거나 타 후보 얘기는 안 하고, 문재인 후보가 너무 순수하고 사람이 좋더라, 이 정도면 대통령 자질이 충분하다, 그래서 좋아서 지지한다는 식으로 대본 없이 제 소신껏 말했어요. 그 후 기왕이면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열심히 하게 됐고 유세차에서 지원 유세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어? 말하는 게 괜찮거든? 그래서 막바지 선거방송에도 출연해 22분간 혼자서 찬조연설을 하기도 했죠.” NG 없이 한 번에 끝낸 TV 찬조연설은 문재인 후보도 보고 극찬할 정도로 공감이 가는 연설이었다고 했다. 말하자면 대통령 선거 돕다가 자신도 몰랐던 달변가 기질을 발견하게 됐다. 덕분에 감칠맛 나는, 그리고 사이다처럼 톡 쏘는 스피치 재능을 살려 한동안 강연 활동도 했다. 이후에는 CMB광주방송 해설위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국 야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고민 중 정치 얘기를 잠깐 했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김성한은 철저한 야구인이다. 그가 요즘 생각하는 것도 우리나라 야구의 미래에 대한 일이다. “이승엽, 양준혁, 이순철, 이만수 같은 멤버들이 뭔가 상징적인 일을 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운동하는 사람들 보면 먹고사는 문제에 민감한데, 그것도 중요하지만 부담 없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시급해요.” 그는 선동열 같은 대스타가 국정감사에 나가 수모를 당한 장면을 떠올리며 잠시 분노를 토로하기도 했다. “(그런 일은) 총재가 안고 가야지. 총재가 ‘현장에 있는 대표팀 감독이 무슨 죄가 있소’ 했어야지. 사실 리더십이 그런 곳에서 필요하잖아요. 그때 현장 감독한테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에 너무나 실망했어요.” 사실 우리나라는 정치권과의 교류가 없으면 제도권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혹시 그에게도 공천에 대한 유혹이 있는지 물어봤다. “그건 절대 싫어요.(웃음) 제안을 받긴 했는데, 잘못하면 내 인생이 파괴될 수 있으니까.” 그는 정치인은 사양이지만 야구와 관련된 일이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얼마 전 프로야구 초창기 멤버 몇몇과 만나 야구와 관련된 생각들을 나누기도 했다. “좋은 의견을 많이 들었어요. 팀과 고향을 떠나서 야구 얘기를 하면 다들 공감하니까요. 대한민국 야구 역사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는 거니까요. 지금까지는 다들 개개인의 삶이 바빴지만 이제 시작할 때가 된 거죠.” 너무 많은 사랑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김성한이 은퇴 후 학교에 야구팀을 만든 것도 야구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와 얘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이해가 됐다. 그렇게 학교에 야구팀을 만들어주고 대회도 유치해줬지만 그는 바로 빠져나왔다. 자신이 운영하면 오해가 생긴다는 이유였다. 사람들이 으레 색안경을 끼고 보기에 그는 아예 발을 안 들였다고 했다. 그의 말에는 야구인으로서 순수함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그건 그가 여전히 뜨거운 야구인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야구할 때가 유독 암울한 시대였잖아요? 야구장의 응원 소리도 즐겁다기보다는 좀 우울했죠. 사회와 정치가 그랬으니까…. 응원이 아니라 울분을 토하는 것처럼 들렸다고 해야 하나? 그때는 이기고도 ‘목포의 눈물’을 불렀어요. 가사를 보면 엄청 슬픈 노랜데 그게 응원가였어요. 이겨도 져도 오로지 ‘목포의 눈물’만 불러댔죠.” 요즘은 ‘목포의 눈물’을 안 부른다고 한다.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들의 마음도 달라졌다는 의미다. 그러나 많은 것이 변했지만 야구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랑받는 스포츠다. 그래서 그는 후배들에게 ‘지금 저 환호하는 사람들을 고맙게 생각하고 팬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항상 말한다. “지금 그 많은 팬들의 마음을 진심으로 느끼지 못하는 선수들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알게 될 날이 올 겁니다. 저는 은퇴하고 많이 느꼈어요. 막상 유니폼을 벗고 나니 그제야 못 봤던 것도 보이고 사람들이 엄청 많이 응원을 해줬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제가 정말 사랑받으며 야구를 했구나 싶었죠. 그래서 요즘 사람들과의 만남이 즐거워요.” 인연의 소중함을 믿는 영원한 타이거즈맨, 김성한은 요즘의 삶이 행복하다고 인터뷰 내내 말했다. 그가 심은 인연들이 이어져서 머무르는 모습이 그에게만은 닿을 테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 누구도 아닌 김성한이라는 레전드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일 것이다.
- 2020-07-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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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을 기억하는 아버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 올해는 한국전쟁 7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서 한 TV 프로그램에서 전쟁을 다룬 두 편의 영화를 소개했다. 그중 하나가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스윙키즈’라는 영화다. 포로수용소 얘기라면 아버지에게 열 번도 더 들은 얘기이지만 영화는 어떻게 다뤘을까 궁금해서 찾아봤다.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에는 대규모 포로수용소가 건설되었다. 유엔이 관리하던 이 수용소에는 많을 때는 17만 명이 넘는 포로들이 있었다. 당시 거제도 주민이 10만 명이었다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북한군, 중공군이었는데, 북한으로의 송환을 주장하는 친공 포로들과 남한 정착을 바라는 반공 포로로 나뉘어 서로를 포섭하거나 공격했다. ‘스윙키즈’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수용소에 새로 부임한 미군 소장은 수용소 이미지를 개선해 실적을 쌓으려는 생각으로 전쟁 포로들로 댄스팀을 결성하는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탭댄서였던 흑인 하사 잭슨은, 수용소 내 각기 다른 사연을 간직한 사람들로 5인조 댄스팀 ‘스윙키즈’를 결성한다. 반공과 친공 대립으로 서로 찌르고 불지르는 폭력이 난무했지만, 댄스팀은 이데올로기와 상관없이 춤과 음악으로 소통하며 언젠가 함께 미국 무대에 서는 꿈을 꾼다. 영화는 언어와 인종, 성별과 이념이 다른 다섯 명의 댄서들이 탭댄스를 배우고, 춤추는 장면을 공들여 보여준다. ‘sing sing sing’이라는 곡의 신나는 멜로디에 맞춰 춤추는 배우들의 연기에 어깨가 저절로 들썩였다. 그러나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스윙키즈의 무대가 포로수용소였다는 걸 상기시키기라도 하듯 이념의 갈등과 대결로 수용소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결국 크리스마스 공연장은 피바다가 되고 꿈을 향한 ‘스윙키즈’의 날갯짓은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이 영화에 영감을 준 건 종군기자 베르너 비숍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촬영한 한 장의 사진이었다고 한다. 사진 속 포로들은 커다란 가면을 쓰고 춤을 추고 있었다. 미군은 반공 포로들이 춤을 추며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연출해 친공 포로들을 전향시킬 선전도구로 사용했다. 반공 포로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증명하기 위해 시키는 대로 했지만, 한편으론 반공 포로임이 알려지면 목숨이 위태로워져 봉투를 뒤집어쓰고 얼굴을 숨긴 채 춤을 추었다. 베르너 비숍이 그때의 진실을 사진으로 남겼다면, 아버지는 조금도 바래지 않은 기억으로 수용소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자식들에게 전해줬다. 북한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전쟁 포로로 잡혀 거제도에 수용되었는데 누가 이쪽인지, 저쪽인지, 첩자인지 구별하기 힘든 공포 속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을 이어갔다고 한다. 친공 포로들의 폭동을 진압한 미군은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를 갈라놓았고, 아버지는 당시 포로들을 분류하는 일에 투입됐다. 커다란 강당 한쪽엔 친공 포로, 다른 한쪽엔 반공 포로의 줄이 만들어졌다. 겨우 알파벳 정도 읽었던 아버지는 한글을 모르는 미군을 위해 포로들 이름을 알파벳으로 써주었다. 그때 아버지는 멀리서 강당으로 걸어 들어오던 고향 친구와 사범학교 선생님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이데올로기 따윈 관심도 없었고, 푸시킨이나 투르게네프를 좋아했던 문학청년이었던 아버지는 떠밀리듯 선택을 해야 했고, 그 선택이 생사를 갈랐다. 전쟁은 영화보다 현실이 훨씬 더 비극적이었고 독했다. 아버지가 이 영화를 봤다면 뭐라 말씀하셨을까? “포로수용소에서 탭댄스를 춰?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언성을 높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여전히 포로수용소에서 겪었던 잔인한 일들을 줄줄이 꺼내놓았을 테고, 나는 언제 이야기가 끝나나 지루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올해로 70년. 이제 아버지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포로수용소도 대부분 철거되었다. 아버지는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다 떠나버리면 혹독했던 역사가 잊힐까 걱정했다. 죽는 날까지 통일에 대한 소망을 놓지 않았던 건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고향집 때문이었을 거다.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름다운 날이 성큼 다가왔다가 저만치 달아나버렸을 때 아버지는 마음속으로 울었다. 나는 그걸 안다. 전쟁기념관 평화의 광장 중앙에는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기억하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전쟁의 참혹함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 말의 참뜻을 안다. 그러나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도 평화는 안다. 두 번 다시 전쟁이 없는 평화의 한반도를 만드는 것은 그래서 우리 모두의 의무가 되어야 한다.
- 2020-06-26 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