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을 꺾으니 갑자기 오른쪽으로 큰 틈새가 열리며 밝은 태양 아래 반짝이는 카즈베기의 만년설 봉우리가 눈에 들어왔다. 산과 만년설은 어느새 우리 앞으로 와 조용히 우뚝 서 있었다. 그것은 다른 세계의 생물이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내가 산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처럼….”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노르웨이 작가 ‘크누트 함순’(Knut Hamsun)이 자신의 소설에서 카즈베기 산과의 첫 만남을 표현한 문장이다.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품은 산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압도적인 풍광의 카즈베기 산에 깃들어 있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 때문에 3000년을 이곳의 바위에 묶여 고통 속에 지내야 했던 프로메테우스. 그의 어깨를 뒤에서 가만히 안아준 이는 코러스였다. 코러스처럼 진실의 따스한 울림통이 되고 싶은 염원을 안고 산 중간 게르게티 언덕의 ‘성 삼위일체(사메바) 성당’을 향해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랐다.
해발 1700m에는 작은 마을 ‘스테판츠민다’(Ste pantsminda)가 있다. 카즈베기 산을 비롯해 주변 트레킹 코스의 베이스캠프가 되는 곳이다. 여기서 출발해 ‘게르게티 사메바 성당’까지 걸어가면
2시간 정도 걸린다. 반대편 능선에는 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도로가 잘 닦여 있다. 하지만 편한 길보다는 아름다운 카즈베기의 숨결을 하나하나 느껴보고 싶었다.
가파른 능선으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에 맞춰 마치 윈드서핑을 타듯 하양, 노랑, 분홍색 야생화들이 춤을 추었다. 성당까지 펼쳐진 녹색 초원의 싱그러움은 꿈에 그리던 풍경이었다. 평범한 사람도 사진작가로 만들어주는 자연이었다. 어디를 찍어도 인생 최고 장면을 건질 수 있었다.
14세기에 지어진 사메바 성당은 해발 2170m 높이에서 카즈베기 산을 배경으로 웅장한 샤니(Shani) 산과 마주보며 소박하게 앉아 있었다. 그 자태가 너무 경건해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드렸다. 이곳의 풍경이 왜 조지아를 소개하는 사진에 많이 등장하는지 수긍이 갔다. 수많은 여행객이 그 사진을 보고 조지아를 찾는다고 한다.
신화와 종교가 공존하는 곳
마음 한편으로 ‘왜 이렇게 높고 외딴곳에 성당을 지었을까?’ 하는 궁금함도 있었다. 하지만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날 밤 숙소 테라스에서 올려다본 암청색 하늘과 흰머리를 이고 있는 카즈베기 산의 검은 실루엣, 그리고 성당의 숭고한 불빛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풍경에 답이 있었다. 성당의 불빛은 등대였다. 누구에게나 따스하고, 아름다운 진실의 희망이었다.
만년설이 덮여 있는 카즈베기 산 높이는 5047m. 조지아에서는 세 번째, 코카서스산맥에서는 일곱 번째로 높은 봉우리다. 조지아 사람들은 ‘얼음산’이라는 뜻을 지닌 ‘카즈베기’를 ‘하얀 신부’라고 부른다. 이 지역은 10월이면 눈이 오기 시작하고 1년의 절반 정도가 겨울이다. 마을에서 전망이 가장 좋다는 ‘룸스 호텔’ 테라스에서 일출을 맞이할 때도 여름이었지만 재킷을 걸쳐야 할 정도로 쌀쌀했다. 카즈베기 산의 일출은 벌겋게 물든 바위와 구름으로 시작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원했기에 아늑한 신의 세상을 버리고 참혹한 형극의 땅을 선택한 프로메테우스의 용기를 보는 것 같았다. 붉은 빛 용기는 제우스의 파란 하늘에 과감했다. 카즈베기 산은 대자연의 풍광 속에 신화와 종교가 공존하는 곳이다. 사람들이 조지아를 좋아하는 이유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야생화 천국
므츠헤타 혹은 트빌리시에서 출발해 스테판츠민다로 갈 때 이용하는 도로는 ‘조지아 군사도로’인데 ‘즈바리 패스’(Jvari Pass)라고 부른다. 계속해서 가면 러시아 블라디캅카스까지 이어진다. 주변국과의 물자 교류가 이 도로를 이용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트럭이 많이 다닌다. 때 묻지 않은 초원과 야생화 천국에 감동하면서 북캅카스 산맥으로 들어가는 이 도로에서 조지아 최고의 자연 경관을 만났다.
조지아의 알프스 ‘스바네티’
조지아에도 알프스의 스위스 같은 곳이 있다. 바로 ‘스바네티’(Svaneti)다. 이곳의 중심은 코카서스 산 중에서 가장 등반하기 힘든 ‘우슈바’(Ushba·4170m) 산이다. 스바네티의 베이스캠프인 ‘메스티아’(Mestia)까지는 승용차로 갈 수 있지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우슈굴리’(Ushguli) 마을로 가려면 반드시 사륜구동차가 필요하다. 메스티아에서 우슈굴리까지 데려다주는 영업용 차량을 이용해도 된다.
세계 장수마을로 소개된 메스티아는 해발 1500m에 위치한다.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동화 같은 산속 마을이다. 특히 탑 형태의 ‘코시키’(Koshiki)라는 가옥이 장관을 연출한다. ‘코시키’는 9~13세기에 만들어진 방어용 탑으로 1층엔 가축들이 살고, 2층은 주거용, 3층은 폭설과 침략자를 감시하고 방어하는 기능을 한다. 밖에서는 입구가 안 보이며, 사다리가 있어야 올라갈 수 있다.
메스티아에서 대부분 비포장인 길을 40여 km 더 깊숙이 들어가면 신이 허락해야만 올라갈 수 있는, 코카서스 산맥 서쪽 끝에 위치한 우슈굴리에 갈 수 있다. 해발 2100m에 옹기종기 있는 모여 있는 4개의 마을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하늘 아래 첫 마을이다. 마을에서 보이는 ‘슈카라’(Shkhara) 산의 높이는 5068m. 조지아에서는 가장 높고 유럽에서는 네 번째로 높다. 설산 계곡을 바라보며 초록빛 초원을 걷는 이곳에서의 트레킹은 조지아 여행의 핵심이라 할 만하다. 마을 북쪽 끝에서 찰리디 빙하까지 왕복 20km를 걷는 코스와 슈카라 빙하 기슭까지 8km를 걸을 수 있는 산책길이 있다.
설산과 고풍스러운 가옥들이 보여주는 환상적인 풍광에 넋을 빼앗긴 채 마을 뒷동산 풀밭에 한참 앉아 있었다. 길옆 한편에는 호텔을 짓는 공사장이 보였다. 앞으로 여행객들이 더 많아져도, 지금의 평화와 아름다움이 변함없기를 기원했다.
스테판츠민다 마을 트레킹 코스
조지아 여행의 장점 중 하나는 청정 자연에 흠뻑 빠져 트레킹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카즈베기국립공원은 야생화 천국. 낙엽수와 침엽수 숲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주타(Juta) 밸리 코스 카즈베기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지역으로 샤니 산 줄기의 초원을 따라 연녹색 길을 걸을 수 있다. 스테판츠민다 광장에서 차로 데려다주고 다시 데리고 오는 차량 영업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있다. 호수까지 두세 시간 걷다가 돌아오는 길이 가장 인기다.
트루소(Truso) 밸리 코스 카즈베기 산을 오른편에 두고 계곡을 따라 걷는 길이다. 승용차는 ‘트루소 골짜기’(Truso Gorge)까지만 들어갈 수 있다. 사륜구동차로 이동이 가능하지만 길이 험해 운전을 조심해야 한다.
즈바리 패스 따라 가볼 만한 곳
아나누리(Ananuri) 요새(교회) 에메랄드빛 호숫가에 위치해 산, 호수와 조화를 이루는 방어 성채.
구다우리(Gudauri) 스키장 해발 2100m에 위치해 있다.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 코카서스 산맥의 멋진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구다우리 전망대(우정 전망대) 조지아와 러시아 조약 200주년을 기념해 만든 모자이크 타일의 기념비. 절반은 조지아, 나머지 절반은 러시아의 역사와 상징을 파노라마로 그려놓았다.
코비(Kobi) 리프트 트루소(Truso) 트레킹의 시작점이 되는 코비 마을 입구에 곤돌라 타는 곳이 있다. 카즈베기 산의 웅장함을 배경으로 신화 속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누릴 수 있다.
“웰컴 투 시그나기(Sighnaghi)!”
예약한 숙소에 도착해 안내를 받으며 간 곳은 객실이 아닌 테라스였다. 파란 하늘 아래 짙은 녹음 속 밝은 산호 빛 마을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그림엽서 같았다. 포도밭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 의자에 앉으니 주인아저씨가 수박과 와인을 가지고 왔다.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면서 와인을 한 잔 따른 후 건배 제의를 했다. 트빌리시 동쪽의 카헤티(Kakheti) 주에 있는 ‘시그나기’. 인구가 3000명 정도 되는 이 작은 마을에서 본 첫 광경이다.
조지안의 크베브리 와인 사랑
조지아인들의 와인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와인을 마시느라 신이 부르는 자리에도 늦었다는 우화를 말하면서 신도 포기한 와인 사랑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래서 러시아는 조지아를 지배할 때 조지아 정교회에 대한 탄압뿐 아니라 포도나무를 자르는 정책을 펼쳤다.
이렇게 조지아인들의 정체성이자 자부심인 와인은 ‘성스러운 액체’로 불릴 정도로 그들의 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수도원에서도 와인을 만들었고, 아직도 몇몇 곳에서는 와인을 판매한다. 그레미(Gremi) 수도원에서 담근 레드 와인을 마셔보니 선입견 때문인지 일반 와인보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향이 마음의 무늬를 더 나긋나긋하게 해주었다.
조지아 와인은 560여 가지가 넘는 다양한 포도 품종에서 생산된다. 3km마다 기후가 달라서 같은 품종이라도 재배 지역에 따라 맛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 어떤 와인을 선택해야 할지 모를 때면 ‘치난달리’(Tsinandali), ‘사페라비’(Saperavi), ‘킨즈마라울리’(Kindzmarauli) 라벨이 붙은 와인을 선택했다. 가격에 비해 맛은 일품이었다.
조지아 와인의 주 생산지는 카헤티(Kakheti) 주. 조지아 와인을 상징하는 지역이다. 코카서스 산맥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분지에 알라자니(Alazani) 강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다 보니 포도나무를 비롯해 과일나무들이 잘 자란다. 카헤티 주의 중심 도시 시그나기와 텔라비(Telavi)도 대표적인 와인 산지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는 지점 두물머리처럼 조지아에도 쿠라 강과 아라그비 두 개의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세워진 도시가 있다. 조지아 초기 왕조인 이베리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조지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므츠헤타’(Mtskheta)다. 지금은 수도가 트빌리시이지만 아직도 조지아 정교회의 총본산인 스베티치호벨리(Svetitskhoveli) 성당이 이곳에 있어 조지아 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장소다. 이 마을은 199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도시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즈바리(Jvari) 수도원 앞 언덕에 앉아 바라본 므츠헤타는 그리움이 안개처럼 차분하게 깔려 있는 도시였다.
“조지아 와인은 이렇게 마시는 거야”
오래된 역사만큼 와인을 마시는 조지아만의 전통문화가 있다. 술자리에는 반드시 덕담과 건배를 주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를 ‘타마다’(Tamada)라고 부른다. 타마다가 ‘가우마조스’(cheers)를 외치며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긴 덕담을 한다. 건배 제의 내용은 순서가 있다. 처음에는 신께 감사하고, 다음 잔에서는 평화를 기원하며, 그다음 잔에서는 성 조지를 위해, 그다음 잔에서는 가족의 안녕을 위해… 이런 식으로 계속한다. 이렇게 이어지다 보면 ‘옛날에 헤어졌던 애인을 위해’ 건배 제의를 하는 경우도 있다. 술자리에서 나온 건배 내용에 대해 질투를 하면 안 된다. 보통 기쁜 날은 26잔, 슬픈 날은 18잔의 와인을 마시며 술자리와 건배가 이어진다.
또 한 가지, 취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술을 그만 마시고 싶으면 타마다에게 말해 벌주를 받으면 된다. 이때 사용하는 잔이 ‘깐지’(Kantsi)다. 염소나 소의 뿔로 만든 전통 와인 잔으로 조지아 어느 곳에 가도 기념품 판매점에서 볼 수 있다. 이 잔은 뿔로 만든 잔이라 세워지지 않는다. 벌주를 받는 사람은 반드시 원샷을 해야 한다.
사랑에 빠지는 도시 ‘시그나기’
달콤한 포도 향이 바람에 실려 퍼지는 작은 도시 시그나기에 신의 물방울만 있는 건 아니다. 18세기에 지은 요새, 돌 성벽, 주황빛 마을은 해발 790m 높이의 자연과 함께 시그나기를 동화 같은 마을로 만들었다. 아무 목적 없이 마을 구석구석을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보내기에 딱 좋다. 이 마을에서는 누구라도 천사가 될 수밖에 없다. 누구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고풍스러운 시청 건물에서는 365일, 24시간 내내 결혼식과 혼인신고가 가능하다고 한다. 흔히들 시그나기를 ‘사랑의 도시’라고 말한다. 마음 예쁜 사람들이 사는 그림 같은 마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그나기에는 사랑에 얽힌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이곳 출신인 조지아의 국민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Niko Pirosmani)의 사랑이다. 그는 프랑스 출신 여배우 마르가리타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가난했던 그는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림과 집을 팔아 장미를 사서 그녀가 사는 집 앞을 꽃으로 장식했다. 하지만 그녀는 떠났고, 그에게는 그녀를 그린 그림만 남게 되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그가 죽은 후 세상에 알려졌고, 1980년대 러시아 가수가 ‘Million Alykh Roz’라는 제목의 노래로 그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줬다. 우리나라에서 가수 심수봉이 ‘백만 송이 장미’로 번안해 부른 곡이다.
시그나기에서 가까운 곳에 카헤티 주의 주도인 텔라비가 있다. 텔라비는 작지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다. 조지아의 자연을 즐길 수 있는 ‘튜세티 국립공원’(Tusheti National Park)으로 가는 전초 기지 역할도 한다.
감동의 폴리포니 공연
도로 양옆으로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싱그러운 포도밭을 보며 달리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조지아의 아름다운 연녹색 매력에 빠져버릴 것 같았다. 길가에 서 있는 와이너리 안내 간판은 여행자를 향해 손짓을 했다. 카헤티 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오래된 마을 크바렐리(Kvareli)의 ‘카레바’(Khareba) 와이너리로 갔다. 단순한 와이너리가 아니었다. 조지아를 종합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서의 규모와 콘텐츠를 잘 갖추고 있었다.
휴식공간으로 보이는 건물 앞 정원은 크베브리 황토 항아리를 비롯해 각종 소품과 조형물이 꾸며져 있었다. 건물 안은 와인 저장고, 시음 및 판매시설, 와인 관련 도구 전시실, 와인 제조 설명 프로그램 진행장, 기념품 판매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와인 체험을 하고 나오니 로비에서 5명의 남성이 환상적인 다성 창법의 폴리포니 공연을 했다.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조지아의 노래는 현대 음악보다 훨씬 관념적이다”라고 극찬한 이유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매혹적인 보컬의 다성 창법이 들려주는 하모니가 장엄하게 가슴을 울렸다. 목에서 나오는 소리라기보다는 영혼의 울림 같았다. 환상적인 조지아 와인만큼이나 황홀한 폴리포니의 벅찬 감동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시그나기에서 가볼 만한 곳
보드베 수도원(Bodbe Monastery) 조지아 왕비의 병을 치료하면서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녀 니노가 생을 마감한 수도원이다. 수도원 밑 돌담길을 따라 내려가면 ‘니노의 샘’이 나온다. 지금도 치유 효험을 믿고 많은 사람이 찾는다.
시그나기 성곽 길(Sighnaghi Wall) 마을 언덕 위에 있는 아치형 돌문을 지나면 성곽 위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아침과 저녁 시간에 성곽 길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환상적이다.
로라시빌 도로(Lolashvili St.) 시그나기 마을 정상부터 산을 타고 구불구불 내려가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 카헤티 지방의 광활한 평원을 조망할 수 있다.
알아두면 좋은 Tip
텔라비에서 트빌리시 혹은 므츠헤타로 갈 경우, 혹은 반대의 경우 ‘38번’ 도로인 ‘곰보리 패스’(Gombori Pass)를 이용하길 권한다. 해발 2000m의 산을 넘으며 한없이 맑은 공기와 파란 하늘, 야생화에 푹 빠질 수 있다.
서울 마포구, 용산구, 성동구 등 이른바 마·용·성 못지않게 핫한 지역이 있다. 강서구 ‘마곡지구’다. 마곡지구는 지금까지 드러난 호재에 최근 또 다른 호재가 겹치며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마곡지구가 품은 부동산 호재와 투자 가능성을 들여다봤다.
목동 뒤편과 상암동 건너편에 위치한 마곡지구는 지하철 5호선(마곡역)과 9호선·공항철도(마곡나루역)가 경유하는 트리플 역세권으로 서울 도심에서 20분(약 13㎞), 강남에서 40분(약 24㎞) 정도 걸리는 곳이다. 이곳은 인천국제공항과 김포공항, 수도권 광역교통망과 직결된 서남권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에 첨단산업, 주거, 자연, 문화가 어우러진 지속가능한 미래형 스마트시티로 조성되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마곡지구가 가진 호재들
마곡지구의 매력은 자족기능을 가진 마곡R&D시티에 들어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지속적으로 늘고 있는 점이다. 향후 약 16만 명의 근로자가 상주하는 서울 서남권 중심업무지구가 될 것으로 기대되는 만큼 탄탄한 배후수요를 확보했다. 여의도의 1.2배, 상암DMC의 6배 크기의 마곡R&D시티에는 현재 롯데건설 컨소시엄, LG사이언스파크, 이랜드 R&D센터, 에쓰오일 TS&D센터, 코오롱 미래기술원, 넥센타이어 중앙연구소 등 대기업 50여 개사와 중소기업 100여 개사가 들어섰고 앞으로도 많은 기업이 입주할 예정이다.
이대서울병원이 들어선 것도 호재로 꼽힌다. 지난해 5월 마곡지구에서 개원한 이대서울병원은 지하 6층, 지상 10층에 1014병상 규모로 건립된 강서구 최초 종합병원이다. 이 병원은 지하철 5호선 발산역과 맞닿았고 푸른색 유리건물이 인상적이어서 강서지역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대형 병원의 특성상 3교대로 일하기 때문에 직주근접 효과가 기대되고, 인근에 건강검진센터와 중소병원 등이 더 입주할 예정이다.
최근에는 마곡 마이스(MICE) 복합단지 개발 사업에 속도가 붙으면서 호재가 추가됐다. 마이스는 기업회의(Meeting)와 포상관광(Incentives), 컨벤션(Convention), 전시(Exhibition)가 융합된 산업이다. 이곳은 그동안 집값 상승 등의 요인으로 정부가 규제를 가해 사업이 정체된 지역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가 롯데건설 컨소시엄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하면서 다시 들썩이고 있다.
마곡 마이스 복합단지는 마곡 도시개발구역 특별계획구역 8만2724㎡ 토지에 약 3조3000억 원을 투자해 짓는 대형 개발 사업이다. 이곳에는 2만 ㎡ 이상의 컨벤션과 400실 이상의 호텔, 1만5000㎡ 이상의 문화 집회 시설 등이 들어선다. 롯데건설 컨소시엄은 인허가 등의 절차를 거쳐 내년에 착공해 2024년 하반기에 준공할 계획이다.
김포공항 주변 고도제한 완화 가능성도 현실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마곡지구에 고층 랜드마크가 등장할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다. 앞서 강서구는 2014년 마곡지구를 표본으로 고도제한 완화 연구용역을 진행한 결과 해발 119m까지 고도가 완화돼도 비행 안전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낸 바 있다. 강서구는 이를 근거로 2024년부터 김포공항 주변 고도제한이 완화되도록 추진 중이다.
함영진 직방 빅데이터랩장은 “고도제한이 풀리면 용적률이 달라지기 때문에 토지가격이 오르고 재건축 단지 호가 상승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며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안인 만큼 중장기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집값 상승 기대되는 마곡
이 같은 호재들로 인해 마곡지구는 집값 상승이 기대되는 상황이다. 실제로 마곡지구에 호재가 겹치면서 아파트 매매가격은 큰 폭의 상승세를 보였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따르면, 마곡지구를 대표하는 아파트 단지인 마곡엠밸리(1·4·5·6·7·10·12·14·15단지)의 지난해 10월 이후 매매가격(전용면적 84㎡)은 10억 원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6단지의 경우 지난해 12월 11억4000만 원에 거래됐으며 10월에는 7단지가 12억6500만 원에 매매됐다.
강서구 마곡동 A 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마곡엠밸리의 2014년 분양 당시 전용 84㎡의 분양가는 5억 원 안팎이었지만 현재 매매가는 10억 원대로 두 배가 올랐다”며 “호가는 12억~13억 원대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덧붙여 “최근 대기업의 입주와 마이스 복합단지 개발 사업에 속도가 붙으면서 이곳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했다.
오피스텔 거래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마곡지구 개발 초기 때만 해도 오피스텔 물량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면서 공실률이 치솟는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마곡R&D시티에 새로 들어선 대기업을 비롯해 중견기업, 중소기업들의 입주가 활기를 띠면서 현재는 오피스텔의 공실 우려가 사라졌다.
오피스텔 시세 역시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지하철 5호선 마곡역과 인접한 오피스텔인 힐스테이트에코마곡역(20㎡)은 지난 1월 2억950만 원에 매매됐고, 같은 달 힐스테이트에코동익(25㎡)은 2억1500만 원에 팔렸다. 마곡역센트럴푸르지오시티(24㎡)는 지난해 12월 2억 원에 거래됐다. 이들 오피스텔 매매가는 2017년 분양 당시보다 4000만~6000만 원이 올랐다.
B 공인중개사무소 대표는 “마곡지구 내 오피스텔 시세는 대부분 분양 당시보다 4000만~6000만 원이 올랐다”며 “마곡나루역보타닉푸르지오시티의 경우는 지난 1월 2억2500만 원에 팔렸는데 이 가격은 2017년 분양가 1억5400만 원에서 7000만 원 넘게 오른 금액”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최근 전세 수요가 늘어 매물이 귀해졌고 매매가격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귀띔했다.
권대중 명지대학교 부동산대학원 교수는 “그동안 마곡R&D시티에 입주한 기업들이 늘면서 직장인이 늘어난 효과가 인근 아파트와 오피스텔 시세에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며 “앞으로도 마곡 마이스 복합단지 등의 이슈가 있는 만큼 아파트와 오피스텔 수요는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데, 수요가 늘어나면 아파트와 오피스텔 시세가 더 오를 것으로 기대되는 상황”이라고 했다.
높은 공실률은 해결과제
반면 마곡지구 내 상가는 공실률 문제가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모양새다. 그동안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꾸준히 들어섰음에도 인근 상가 1층과 2층이 비어 있는 곳이 많다. 공실률이 높은 결정적인 이유는 비싼 분양가로 인한 임대료 상승이다. 마곡지구 내 상가의 평균 분양가는 3.3㎡당 5000만 원 수준이다. 상업용 부동산 전문 플랫폼 ‘상가의신’에 따르면, 서울 강남 3구(강남구·서초구·송파구)를 제외한 서울 시내 상가 1층 평균 분양가는 3.3㎡당 3300만 원대다. 마곡지구 상가의 분양가가 1700만 원가량 비싼 셈이다. 강남 3구의 상가 1층 기준 평균 분양가인 5200만 원과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결국 높은 분양가는 임대료 부담으로 이어졌다. 상권 분석 사이트인 우리 마을 가게에 따르면, 마곡지구 내 상가 1층 평균 임대료는 3.3㎡당 21만4000원 수준이다. 지난해 3분기 강서구 내 상가의 평균 임대료 3.3㎡당 약 13만1000원과 비교하면 크게 차이가 난다. LG사이언스파크 인근 상가에서 33.3㎡ 규모의 음식점을 운영하는 C 씨는 “매달 200만 원 가까이 월세를 내고 있는데 오가는 사람이 적어서인지 손님이 뜸한 편”이라며 “월세도 문제지만 마곡지구의 상권이 자리 잡으려면 적어도 5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상가정보연구소에 따르면, 지하철 5호선 마곡역과 발산역 사이 마곡지구 인근 상권의 유동인구는 지난해 9월 기준 일평균 35만 명이다. 상권 1000㎡당 94명가량이 오가는 셈이다. 강서구 평균인 55명보다는 39명이 많다. 하지만 110~120명인 화곡1동, 화곡6동, 등촌3동에는 못 미친다. 실제로 마곡지구를 둘러보니 생각보다 유동인구가 적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지난 2월 낮시간 지하철 5호선 마곡역에서 발산역까지 큰 대로변을 걷는 동안 기자와 마주친 사람은 20명이 채 안 됐다.
다만 LG아트센터를 비롯한 기업들의 입주가 예정돼 있고, 마곡 마이스 복합단지 개발 사업이 속도를 내고 있어 유동인구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게 되면 상가 공실률 상쇄도 어느 정도 기대해볼 만하다. 하지만 부동산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유동인구가 늘어도 공실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은 마곡지구의 유동인구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보면서도 “온라인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오프라인 시장 규모가 줄어드는 상황이라 공실 문제가 당장 해결될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아울러 “최근에는 소셜마케팅에 새벽배송 서비스까지 성행하고 있어 앞으로 상가 거래는 하향세로 갈 가능성이 높다”며 “이는 전반적인 상권에서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덧붙였다.
저출산∙고령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응하기 위한 현장전문가와 정책전문가로 구성된 제7기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닻을 올렸다.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부위원장 서형수)는 24일 정부 서울청사에서 제7기 출범식과 함께 제31차 회의를 열었다.
서형수 부위원장은 제31차 회의에서 신규 위촉된 민간위원 15명에게 대통령의 위촉장을 전달했다. 이로써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기존 위촉위원을 포함해 총 17명의 위촉위원과 정부 당연직 위원 7명 등 24명으로 구성됐다. 이와 함께 정책운영위원회 28명과 분과위원회 94명의 위원 위촉도 이루어졌다.
제7기 위원들은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인구구조 변화에 대한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정부부처와 지방자치단체, 전문가 등과의 소통과 협력을 통해 저출산•고령사회에 대한 실효적인 정책을 만들어갈 계획이다. 특히, 올해는 5년 단위로 수립하는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을 만드는 해인 만큼 다양한 핵심과제들을 적극 발굴해 나갈 예정이다.
이를 위해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내 분과위원회를 현재 5개에서 7개로 확대•개편했다. 7개 분과위원회는 미래기획, 세대공감, 일생활균형, 성평등노동권, 가족다양성, 아동돌봄, 지역상생 등이다.
한편 새로 위촉된 위원들은 김혜승 국토연구원 주택토지연구본부 선임연구위원, 김희삼 광주과학기술원 부교수, 박기남 강원여성가족연구원장, 변정희 부산여성단체연합 대표, 안지혜 이지앤모어 대표, 양난주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부교수, 오건호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오영나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 이윤석 계명대 행정학전공 부교수, 이철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최미화 경북여성정책개발원장, 김명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김동명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우태희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등 15명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마에스트로 금난새(73). 이제는 이름 석 자만 대도 모르는 이가 거의 없지만, 그도 한때는 ‘금수현의 아들’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젊어서는 그 그늘을 벗어나려 애써보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와 점점 닮아가는 자신을 발견한다는 그다. 어느새 일흔셋에 작고하신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버린 아들, 금난새는 아버지가 남긴 글을 악보 삼아 반세기를 초월한 앙상블을 이루고자 한다.
2019년은 금수현 선생(1919~1992)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존경하는 아버지를 기리는 마음을 담아 금난새는 최근 ‘아버지와 아들의 교향곡’을 펴냈다. 교향곡이라는 테마에 걸맞게 책 전체를 4악장으로 꾸몄고, 1~3악장은 아버지의 글을, 마지막 4악장은 자신의 글을 담았다. 특히 책에 담긴 금수현 선생의 글들은 특유의 상상력에 해학이 더해져 50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 읽어도 진부함이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교육자, 작곡가로서 음악 발전에 기여하셨죠. 1957년부터는 문교부 편수관으로 근무하시며 외래 음악 용어를 한글로 바꾸는 데 공헌하셨고요. 또 ‘한글 이름 짓기’의 선구자로, 성을 ‘김’(金)에서 ‘금’으로 바꾸고 자녀들 이름도 한글로 지으셨죠. 대외적으로도 훌륭한 일들을 해내셨지만, 집 안에서도 정말 매력 넘치는 분이셨어요. 약주를 하신 날이면 밤늦도록 우리 다섯 남매를 둘러앉히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곤 하셨죠. 어찌나 재미나는지 깔깔거리고 웃다가 잠들었던 기억이 선해요. 어른이 되고 아버지의 글을 읽어보니 당시 들려주셨던 이야기가 곳곳에 많더라고요.”
금수현 선생은 1962년 모 일간지에 썼던 칼럼 100편을 모아 ‘거리의 심리학’이라는 책을 펴냈다. 근래 들어 당시의 글들을 읽으며 금난새는 새삼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을 더듬었다. 위트가 넘치는 문장이지만, 일면 그 속에 담긴 교훈이 꽤 묵직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반세기 넘도록 묻혀 있던 글들을 다시 세상에 내놓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너무 옛날 책이라 세로쓰기에 한자도 많았어요. 그런 부분을 다듬는 과정에서 75편의 글을 추렸죠. 나머지 25편은 아들인 제가 써서 본래 책처럼 100편을 채우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두 사람의 글로 구성하니 출판사에서 제목에 ‘교향곡’이라는 말을 집어넣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참 마음에 들었어요. 그렇게 좋은 테마로 한 책에서 아버지와 만날 수 있어 기쁘고 행복합니다.”
아들아, 실패는 귀한 경험이란다
물론 가족에게 각별한 책이지만, 금난새는 이번 기회로 아버지 이야기가 일반 대중에게도 즐거움과 지혜를 선사할 수 있길 바랐다. 그의 바람이 통했던 걸까. ‘금수현’보다는 ‘금난새’가 더 익숙한 요즘 독자 몇몇은 ‘금수현 선생의 재발견’이라는 반응을 보이며 아버지의 이야기를 감명 깊게 보았다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독자들이 그렇게 읽어줬다니 정말 뿌듯한 일이죠. 특별히 이 책을 통해 나누고 싶었던 메시지는 아이디어의 중요성과 그것을 실천하는 도전정신이라 할 수 있어요. 한마디로 표현하면, 아버지는 돈키호테 같은 분이셨습니다. 구태의연함을 싫어하셨고 변화무쌍한 걸 좋아하셨죠. 자녀들도 그런 삶을 살길 바라셨기에 늘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일’을 하라 말씀하셨고요. 그런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저도 남들이 안 하는 일에 도전하는 걸 즐깁니다.(웃음)”
도전을 마다치 않을 수 있었던 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일 테다. 그런 배포를 지니게 된 것 역시 아버지의 영향이 컸단다. 실제 금수현 선생은 ‘실패도 귀중한 경험’이라는 글에서 “자식을 기를 때 사랑하는 것과 편안하게 해주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며 “아이에게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모든 문제를 어른이 풀어주면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하니 실패하더라도 스스로 해결하는 힘을 길러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런 아버지의 이유 있는 방관(?) 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동시에 자생력을 키울 수 있었던 금난새다.
“제가 창단한 ‘뉴월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창단 당시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금 없이도 20년 넘게 이어오고 있죠. 오히려 남의 돈에 의존해왔다면 유지하기 어려웠을지도 몰라요. 지원이 끊기는 즉시 위태로웠을 테니까요. 오롯이 우리의 힘으로 지켜온 덕분에 오랜 세월 생존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에 대한 자부심은 이루 말할 수 없고요.”
그는 아버지에게 역시 어떤 물질이나 금전이 아닌 정신적인 유산을 물려받았기에 현재의 자신에 이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책의 4악장에 드러난 금난새의 진취적인 면모만 보아도 그 유산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아버지의 긍정적인 모습만이 그에게 교훈을 준 건 아니다. 때론 아버지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인생의 지혜를 터득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너무 시대를 앞서가신 게 아닐까 싶어요. 지금 보면 높이 살 행동인데도 당시엔 외면을 받곤 했으니까요. 한때 정치에 뜻을 두고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셨는데, 그 여파로 가세가 기울었죠. 그걸 보면서 아무리 좋은 생각도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당시 아버지는 괴로움을 술로 달래셨는데, 그 모습을 기억하며 술을 자제하는 버릇도 지니게 됐고요.”
영원히 가슴에 남을 유산
좋든 싫든 아버지의 특정 면모만을 가려서 물려받긴 어려웠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해하지 못했던 모습까지 닮아가는 자신을 통해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린다는 그다.
“평생 자기 소신과 낭만을 잃지 않고 사신 분이에요. 그런 점은 아버지라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본받고 싶습니다. 한편으론 이런저런 일을 펼치시느라 다사다난했던 상황을 지켜보며, 나는 지휘자의 길만 걷겠노라 다짐했었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글도 쓰고 싶고, 노래도 부르고 싶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지고… 어느새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더군요. 유전자의 힘이랄까, 어찌 못할 천성인 거죠.(웃음)”
금난새는 아버지가 그랬듯, 두 아들에게 물질적 유산보다는 삶을 개척하는 용기와 자유로운 영혼을 물려주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의 선물 같은 추억을 많이 남겨줄 수 있길 바랐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아침이면 집 앞 계단에 선물 다섯 개가 놓여 있었어요. 도·레·미·파·솔 순서였는데, 둘째인 저는 ‘레’가 선물이었죠. 지금도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면 그 장면이 생생히 떠올라요. 저도 아버지처럼 우리 아이들에게 보물 같은 시간을 많이 남겨주고 싶어요. 어쩌면 먼 훗날 또 한 권의 책을 통해 나와 아들이 그런 추억을 이야기할 날이 오지 않을까요?”
바쿠의 구도시를 걷다 보면 누군가 옆으로 다가와 근교 일일투어를 권한다. 사실 택시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자유여행으로 바쿠의 근교 투어를 하는 건 시간 면에서 비효율적이다. 가격을 좀 깎아달라고 하니 여행사 사무실을 안내해줘 그곳으로 갔다. 결국 1인당 20AZN(한화 약 1만4000원)을 할인받아, 다음 날 4만9000원짜리 일일 투어를 했다.
아침 9시, 구시가지 성문 앞에서 가이드와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 6명을 만나 일일투어를 시작했다. 준비된 미니버스를 타고 아름다운 카스피해를 바라보며 남쪽으로 한 시간 정도 달려갔다. 고부스탄(Gobustan)에 도착한 뒤에는 대기해 있던 여러 대의 낡은 승용차로 갈아탔다. 왜 차를 바꿔 타야 하는지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곳에서 목적지인 머드 볼케이노(진흙 화산)까지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을 10여 km 더 가야 했기 때문이다. 운전기사는 그 길을 ‘사파리 투어’라 표현했다. 그러나 마케팅 목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 동물 구경은 할 수 없었다. 억지스러웠지만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 차창 밖 풍경은 영화에서 봤던 모습과 비슷했다. 미국의 텍사스나 어느 사막 지역처럼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땅이었다.
전 세계 700여 개의 진흙 화산 대부분이 아제르바이잔에 있다고 한다. 그중 일부가 이곳에 있었다. 용암 대신 진흙이 흘러내리는 화산 가까이 다가갔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화산 분화구에서 진흙이 끊임없이 부글거리며 기포가 부풀어 올랐다가 터졌다. 피부에 좋은 효과가 있는지 남자 몇 명이 머드팩을 즐기고 있었다.
진흙 화산에 오기 전 미니버스에서 내렸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선사시대로 여행을 갈 수 있는 관광지가 있다.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부스탄 암각화 문화경관구역’이다. 공원 입구에는 박물관이 있었고, 암각화 구역은 입구에서 1km를 더 가야 했다. 탐방로를 따라 걸으면 넓은 사암지대에 흩어져 있는, 약 5000년에서 2만 년 전에 원시인들이 돌에 그린 그림을 불 수 있다. 지나온 시간의 무게가 주는 중량감 때문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 모습, 사냥하는 모습, 바다에서 고기 잡는 모습, 춤추는 모습 등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풀, 돌, 바위만으로 구성된 암각화 공원을 본격적으로 탐방하기 전 앞서 가던 가이드가 넓고 평평한 바위를 만나자 갑자기 타악기처럼 두드리기 시작했다. 돌에서 맑은 소리가 났다. 이 지역의 타악기 ‘가발 대시’(Gaval Dash)를 만들 때 사용하는 석재라고 했다.
조로아스터교 사원의 꺼지지 않는 불
불을 접하기 쉬워서 그랬는지 바쿠의 동쪽 외곽에 조로아스터교 성지인 ‘아테시카 사원’(Ateshgah Temple)이 남아 있다. 사원 안에는 470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꺼지지 않고 타고 있는 불이 있다. 불을 숭배해서 배화교로 알려진 고대 페르시아 종교 조로아스터교. 현재는 신도 통계가 없을 정도로 사라져가는 종교다. 하지만 최근 이슬람 극단주의에 환멸을 느낀 쿠르드족들이 개종하면서 그쪽 지역에서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한다. 또 얼마 전 한국에서 신드롬을 일으켰던 록 밴드그룹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조로아스터교의 후손인 파르시(Parsi) 출신이기도 하다. 수도원이었던 사원 내부는 박물관으로 개조됐다. 방마다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설명과 모형,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다. 교세는 미약하지만 조로아스터교를 경험할 수 있는 건 바쿠가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이었다.
이외에도 바쿠 외곽에는 불과 관련한 ‘야나르 다그’(Yanar Dag)라는 이름의 불타는 언덕도 있다. 지하에 어마어마한 양의 천연가스가 매장돼 있어 가스가 나오는 분출구에서는 계속 불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자원 개발로 지하 압력이 내려가 과거에 비해 불꽃이 많이 약해졌다고 한다.
아제르바이잔 여행을 해야 하는 이유
현재와 과거의 절묘한 조화, 손님과 이방인에게 친절한 문화, 동서양의 경계선 위에서 유럽을 향해 있는 도시, 맛있는 음식과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사람들. 바쿠 여행을 하면서 받았던 인상이다. 아직 구 소련 치하의 흔적도 남아 있고,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등 여행 인프라가 부족한 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 관광청이 글로벌 캠페인으로 선정한 ‘기대, 그 이상의 아제르바이잔’(Take Another Look)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그들 사회에 내재돼 있는 역동성과 경계를 넘나드는 수용의 문화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트빌리시행 야간 특급열차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이 주황빛으로 바뀌면서 나란히 뻗어 있는 녹슨 철길 위로 떨어졌다. 검은색 섞인 파란 하늘이 배경이 될 무렵 그림자도 사라져가는 플랫폼 앞으로 둥근 쇳덩이가 슬며시 발을 들이밀었다. 흰 수증기를 내뿜으며 거친 숨을 내쉴 것만 같은 짙은 암녹색 기차였다.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브론스키’와 ‘안나 카레니나’를 운명처럼 만나게 했던 그 기차다. 조지아의 고리 시(市)에 전시돼 있는 스탈린 전용 열차도 같은 색이다. 소설 내용처럼―창 너머로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전송하고 있는 사람들이 마치 뒤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 규칙적으로 덜커덕덜커덕 흔들리면서 플랫폼을 지나고 (…) 열차는 점점 신나고 매끄럽게 경쾌한 소리를 내며 레일 위를 미끄러져 갔다―그렇게 바쿠와 이별했다.
오래된 열차이지만 2인 1칸인 1등석은 불편한 점이 전혀 없었다. 새것으로 바꾼 하얀 침대 시트가 마음에 들었다. 바쿠를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전 시추공에서 나오는 가스 때문에 큰 불꽃이 타오르는 공장들이 창밖으로 스쳐지나갔다. 때맞춰 창틀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모음곡 2번 ‘왈츠 Ⅱ’가 흘러나왔다. 출발 전 역에서 산 와인으로 영혼을 적셨다. 그렇게 떠나는 아쉬움과 새로운 풍경을 만나러 가는 길의 떨림을 가라앉히며 수없이 꿈꿔왔던 침대열차에서의 밤을 보냈다. 기차는 쉬지 않고 트빌리시를 향해 달려갔다.
저녁 9시에 출발한 기차는 꼬박 12시간을 달려 다음 날 아침 9시경 트빌리시에 도착했다. 도착하기 전 새벽 5시쯤 조지아 입국 절차가 한 차례 있었다. 카메라가 연결된 노트북을 들고 조지아 군인들이 열차로 올라왔다. 입국신고서 작성, 여권 제출, 사진촬영, 그리고 이어진 간단한 가방 검사로 국경 통과 절차가 끝났다. 조지아는 한국 여권 소지자의 경우 무비자로 360일 체류할 수 있는 나라다.
미국 조지아가 아니고 ‘조지아’
“조지아? 미국 조지아?” 이번 여행 목적지는 ‘조지아’라고 하니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한결같았다. 몇몇 사람은 구 소련이 지배하던 시절의 ‘그루지야’는 알고 있었다. 1991년에 독립하면서 국명을 ‘조지아’로 바꿨다고 설명하면 미국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이름이 그러냐는 반응들을 보였다. 정말 그랬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는 ‘농부’를 뜻하는 그리스어 ‘게오르기오스’에서 빌려왔다는 설과 트빌리시의 핫플레이스 ‘자유광장’에 황금동상으로 우뚝 서 있는 조지아 수호성인 ‘성 조지’에서 따왔다는 이야기가 가장 많다.
조지아에는 스위스처럼 아름다운 자연이 있고, 프랑스처럼 풍요로운 와인, 이탈리아처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스페인처럼 정열적인 춤과 음악이 있다.
트빌리시는 재즈다
종착역이 가까워지면서 기차 속도가 느려졌다. 트빌리시는 BC 4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해 AD 5세기 말에 조지아의 수도가 된 오래된 도시다. 창문 밖으로 트빌리시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폐쇄된 기지창에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는 녹슨 객차와 화차들, 네모반듯한 현대식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신도시, 트빌리시의 랜드마크인 나리칼라 요새와 ‘조지아 어머니 상’이 있는 구도시가 줄지어 얼굴을 드러냈다. 마치 한 곡의 재즈를 듣는 것 같았다. 이곳 사람들은 ‘재즈적’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연결될 때 주로 사용한다. 그만큼 조지아 사람들은 뭐든 잘 받아들인다. 혼합에 익숙하다. 트빌리시라는 도시도 그랬다. 색소폰의 끈적한 느낌과 와인의 나른한 분위기가 뒤섞여 있는 듯 보였지만 퇴폐적 숨결이 느껴지지는 않는 골목의 모습이 그랬고, 클래식함과 모던함이 서로 뒤엉켜 하나가 된 도시의 풍경이 그랬다.
올드 트빌리시가 보여주는 것들
트빌리시는 도시를 관통하는 ‘므츠바리’(Mtkvari) 강(쿠라 강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을 중심으로 남쪽의 ‘올드 트빌리시’(구도심)와 북쪽으로 나누어진다. 잘 알려진 관광지 대부분이 구도심에 몰려 있어 걸어 다닐 만하다. ‘아블라바리’(Avlabari) 전철역에서 내려 강 언덕에 있는 ‘메테키 교회’(Metekhi Church)로 먼저 갔다. 13세기에 세워진 이 교회는 서른일곱 번이나 다시 지어진 사연으로 수많은 전쟁에 시달렸던 조지아의 얼굴이 됐다. 구 소련 시절에는 감옥과 극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최근에서야 교회 역할을 하고 있다. 교회 옆에는 수도를 트빌리시로 옮긴 ‘바흐탕 고르가살리’(Vakhtang Gorgasali) 왕의 기마상이 도시를 바라보고 있다.
기마상이 있는 곳에서 북쪽을 보면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강 오른쪽으로 ‘리케 공원’(Rike Park)이 있다. 시민과 여행자들에게 은은한 꽃향기로 피로를 풀어주는 곳이다. 강변에는 1200개의 LED 전구가 빛을 내는 ‘평화의 다리’가 있어 므츠바리 강의 밤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2GEL(한화 약 810원)을 내면 ‘메테키 다리’를 건너 므타츠민다 산 정상에 있는 나리칼라 요새까지 케이블카로 올라갈 수 있다.
도시 전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 요새는 4세기에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요새 바로 옆 능선에는 왼손엔 와인 잔, 오른손엔 칼을 들고 있는 ‘조지아 어머니 상’이 있다. ‘친구에게는 와인 잔을 건네지만 적에게는 칼을 든다’는 의미로 건국 1500년을 기념해 만든, 높이 20m의 대형 석상이다.
트빌리시를 사랑한 작가들
러시아의 문호들은 조지아를 사랑했다. 막심 고리키는 이곳에서 일하며 처녀작 ‘마카르 추드라’를 썼다. 이때 사용한 필명이 ‘고리키’다. 그는 “코카서스 산맥의 장엄함과 낭만적 기질을 지닌 이곳 사람들 덕분에 방황에서 벗어나 작가가 됐다”고 회고했다. 톨스토이도 이곳에서 주둔군으로 4년을 복무한 후 조지아를 배경으로 몇 편의 소설을 썼다. 푸시킨의 시 제목을 그대로 가져다 쓴 ‘코카서스의 죄수’가 대표적이다. 누구보다도 조지아의 와인과 음식을 사랑한 푸시킨은 대표적인 친조지아 인사였다. 그래서인지 구도심 자유광장 옆에는 ‘푸시킨 공원’이 있다.
구도심 중앙에 위치한 ‘자유광장’은 주변의 아름다운 건축물과 교통의 요충지로 트빌리시의 시작이자 끝이 되는 장소다. 마치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광장 같은 곳이다. 레닌 동상이 있던 광장 중앙에는 조지아 수호성인 ‘성 조지’의 황금동상이 있다. ‘자유광장’에서부터 ‘루스타벨리 메트로 역’까지 이어지는 거리를 걸었다. 러시아 간섭에 저항하는 조지아인들의 데모가 토요일마다 열리는 국회 앞 광장, 조지아 국립박물관, 루스타벨리 극장, 트빌리시 오페라·발레 극장, 트빌리시 현대미술관들이 이 거리에 있다. 중간중간 보이는 작은 카페와 거리의 화가들 작품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트빌리시의 숨결을 애써 들으려 하지 않아도 트빌리시의 과거와 현재의 눈부신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행복했다. 아무리 걸어도 질리지 않는 하염없이 걷고 싶은 길이다
므츠바리 강을 건너는 ‘사브뤼켄’(Saarbruecken) 다리 옆 ‘데대나’(Dedaena) 공원에서는 트빌리시 최대 규모의 벼룩시장이 열린다. 구 소련의 군용 제품에서부터 은식기, 오래된 카세트테이프 등 온갖 물건들이 거래된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랜 세월이 빚어낸 추억의 물건들이 과거를 되돌아보게 한다. 지치지 않고 무언가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조지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찰나에 그들의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희망과 그리움, 설렘도 봤다.
“그 사람들 아직도 골프 칩니까?”
우스갯소리이지만 뼈가 있었다. 그것도 굵은 뼈가. 2013년 개리 플레이어(Gary Player)가 한 말이다. 플레이어는 1935년에 태어났다. 2013년이면 그의 나이 78세 때였다.
독자들 중 플레이어가 말한 ‘그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맞히면 진정한 골프 애호가로 인정하겠다. 잘 모르겠다고? 그러면 힌트를 주겠다. ‘그 사람들’은 플레이어가 전성기 내내 도전했지만 넘어서지 못한 벽이다. 이쯤 되면 웬만큼 골프를 아는 사람은 짐작이 될 것이다. 그렇다. ‘그 사람들’은 바로 잭 니클라우스(Jack Nicklaus)와 아놀드 파머(Arnold Palmer)다.
2013년에도 플레이어는 필드에서 강력한 드라이버 샷을 날렸다. 에이지 슈팅(자기 나이보다 더 적은 타수로 18홀을 마치는 기록)을 밥 먹듯 한 것은 물론이다. 60대 타수도 수시로 기록했다.
반면 그보다 여섯 살 많은 파머는 골프 행사에 얼굴만 내밀다시피 하는 처지였다. 참고로 파머는 2016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세. 플레이어보다 나이가 더 많은 파머는 그렇다 치자. 그럼 니클라우스는? 니클라우스는 1940년생으로 플레이어보다 다섯 살 적다. 그런 니클라우스도 당시 플레이어에 비하면 기량이 훨씬 떨어졌다. 물론 파3 콘테스트 같은 이벤트 대회에 나와 샷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그렇다면 왜 플레이어는 그 사람들이 “아직도 골프를 치느냐?”고 물었을까? 세 사람의 스토리를 훑어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플레이어와 니클라우스 그리고 파머는 전성기가 상당 부분 겹쳤다. 그래서 ‘라이벌’로 불리긴 했다. 하지만 플레이어는 니클라우스와 파머를 제대로 넘어본 적이 없다. 성적이 단적으로 이를 보여준다. 미국프로골프협회(PGA) 투어에서 플레이어는 24승을 올렸다. 니클라우스는 73승, 파머는 62승을 거뒀다. 물론 플레이어가 다른 투어에서 우승한 것까지 합쳐서 무려 100승 이상을 기록한 걸 폄하하려는 게 절대 아니다. 그는 메이저 대회만 아홉 번이나 우승한 위대한 골퍼다. 다만, 플레이어는 동시대 두 거장에게 끊임없이 도전하고 좌절하기를 거듭했다.
“아직도 골프 치느냐?”는 말은 그가 마음속으로 꼭 꺾고 싶었던 라이벌을 나이가 들어서야 마침내 제쳤다는 ‘한풀이’성 발언 아니었을까?
플레이어가 그 말만 툭 내뱉은 건 아니었다. 말의 속뜻을 절감하게 하는 ‘다른 어떤 것’도 함께 보여줬다. 바로 ‘바디 이슈’(The Body Issue)라는 잡지에 상반신 누드 사진을 실은 것이다. 그것도 표지모델로 ‘보란 듯이’. 사진을 봤을 때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팔순이 다 된 몸이 그렇게나 탄탄할 수 있다니. 그는 식스 팩을 자랑했다. 아무리 운동선수 출신이라지만 대단했다. 나도 모르게 내 배를 내려다봤다. 그 해 나는 마흔이 살짝 넘은 나이였다. 플레이어 ‘영감님’ 배와 비교했을 때 내 기분이 어땠을까? 흑. 독자 상상에 맡기겠다.
잡지에는 “플레이어가 매일 1000개씩 윗몸일으키기를 한다”는 내용도 실렸다. 아침저녁에 각각 500개씩 한다는 것이다. 하루에 1000개라니! 내가 평생 한 윗몸일으키기는 그가 한 달 동안 한 숫자에도 못 미쳤다.
플레이어가 얼마나 단단한 복근을 갖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얘기는 나중에 다른 곳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 투어에서 뛰는 미셸 위(Michelle Wie)가 한 말이다.
“내가 열여덟 살 때 개리 플레이어 할아버지를 만났다. 플레이어 할아버지가 자기 배를 쳐보라고 했다. 주먹으로 힘껏 배를 쳤다. 그런데 바위를 치는 느낌이었다. 주먹이 너무 아팠다.”
미셀 위는 1989년생이다. 그가 플레이어를 만났을 때가 18세였다면 2007년이다. 플레이어가 이미 칠순이 넘었을 때다. 키 182cm에 운동으로 다져진 장타자 미쉘 위가 주먹으로 내 배를 힘껏 친다면? 아! 상상만 해도….
이 정도면 플레이어의 몸은 ‘타고난 것 아닐까’ 하고 지레짐작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키가 168cm로 단신이다. 반면 니클라우스와 파머는 장대하다. 플레이어는 작고 약한 몸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10대 때부터 꾸준히 피트니스를 했다고 한다. 그가 평생 흘린 땀의 보상을 황혼기에 톡톡히 받고 있는 셈이다.
그는 지난해에도 84세의 나이로 여러 이벤트 대회에 참가했다. 얼굴만 비친 게 아니라 진짜 경기를 했다. 내가 PGA 시니어 투어 중계 해설을 맡으면서 그가 하루 경기를 다 소화하는 걸 봤다. ‘배스 프로샵 레전드 오브 골프대회’였다. 그는 등이 예전보다 살짝 굽기는 했다. 두어 해 전 아들이 구설수에 휘말리면서 속을 썩이더니…. 안타까웠다. 그래도 여전히 시원하게 아이언을 뿌렸다. 유머감각도 넘쳤다. 골프와 마찬가지로 인생 승부도 장갑을 벗어봐야 안다. 개리 플레이어 선생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올해도 그가 경기하는 모습을 해설할 수 있기를 바란다.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제법 큰 사업을 하다가 아예 골프의 길로 나섰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경기위원 교육과정 최고단계 타스(TARS, Tournament Administrators and Refree’s School)를 최우수 성적으로 수료했다. 그때 한 공부를 밑천으로 현재 KPGA 경기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평소 말이 앞선다고 욕을 먹는가 싶더니 그 재주를 살려 방송인으로도 변신했다. 골프채널코리아에서 골프 중계 해설을 맡고 있다. 골프쇼 ‘필드 위의 사냥꾼’에 출연해 예능 기질도 뽐내는 중이다.
세상에서 제일 먹기 싫은 것이 있다면 바로 나이가 아닐까? 시니어기에 접어들고 나이 앞자리가 무거워지면 모든 것이 억울하고 슬퍼지는 상황을 맞기도 한다. 그런데 어차피 먹을 나이 좀 맛있고 멋지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세상 모든 이가 맞이하는 그 나이 듦에 당당해져보자.
도움말 전수경 남서울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생애주기에 있어서 50대 이후에 겪게 되는 정신적 스트레스의 요소는 다양하다. 갱년기 우울증을 비롯해 자식들의 독립으로 인한 빈 둥지 증후군, 이혼, 사별, 부모의 죽음 등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가질 수밖에 없는 외부적 요건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전수경 남서울대학교 교수는 “에이징, 즉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외로움, 소외감, 박탈감, 허무함 등을 시니어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년기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건강한 정체성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른바 ‘웰에이징’이란 아름답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신체적 건강만큼 정신건강도 중요하기 때문에 “마음의 근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의 표현을 빌리면, 성인후기(노년기) 마음의 근육은 ‘자아통합감’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그대로 수용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조화롭고 균형 잡힌 견해를 가지는 성숙한 인격을 의미합니다. 성공적인 노화(successful ageing)와 심리적 안녕(psychological wellbeing)에 도달하기 위한 단계인 것이죠. 이를 갖지 못하면 우울감과 타인에 대한 원망, 인생에 대한 불만이 가득 찰 수 있습니다.”
동화작가 겸 극작가인 설용수 씨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각종 불안감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환갑을 넘기고 나니 새로운 삶이 열린 것처럼 즐거운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아들의 결혼으로 인한 빈 둥지 증후군은 자전거 타기와 독서로 조금씩 이겨내기 시작했다. 집은 작은 평수로 줄여서 이사했다. 2년 전부터는 사교댄스를 배워 한 달에 한 번은 춤을 추기 위한 모임에도 간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싱글라이프를 즐기고 있다고.
“아무런 부담이 없어요. 자식을 키워야 한다는, 부모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내가 직장을 다니고 뭘 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습니다. 남자 여자라는 성(性) 구분이 없는 것도 해방에 가깝습니다. 다들 나이가 있으니까 누구를 만나도 사람 그 자체로 만날 수 있어요. 시간도 돈도 마음도 뭐든지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것도 좋습니다. 혼자 사는 것에 적응하니 지금 정말 행복해요.”
빈 둥지의 허탈감과 늙어간다는 부적정인 생각을 밟고 더욱더 성숙하고 완전한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을 설용수 씨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너무 깊은 우울감 대신 좀 더 나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한다면 누구든지 신나고 당당하게 나이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 셰릴 샌드버그와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스쿨 심리학 교수 애덤 그랜트는 ‘옵션 B’라는 공동 저서를 통해 ‘상실과 역경으로 마주하게 된 삶을 ‘옵션 B’라는 말로 설명했다. ‘옵션 B’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회복탄력성’이 요구되는데, 이는 “절망감 속에서 빠져나오는 심리적 근육”을 말한다. 자아통합감과 회복탄력을 지니려면 마음을 단단히 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전 교수는 이를 위해 “무엇이든지 인정하고, 긍정적이며, 과도하게 의존적이지 않아야 하고, 스스로 홀로서기를 하면서, 타인을 배려하고, 자기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레이스 리보와 바버라 케인이 쓴 ‘나이 든 부모와는 왜 사사건건 부딪힐까?’라는 책을 보면 시니어기에 접어들어 정서적,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었을 때부터 그러한 인자(요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니어가 되어 갑자기 고집스러워진다거나, 독단적이고 의존적인 성향으로 변한 게 아니라는 것. 전 생애에 걸쳐 원래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니어기에 부각되거나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많다고 했다. 물론 나이 들면서 더욱 문제가 도드라지기도 한다. 그레이스 리보와 바버라 케인은 나이 듦으로 해서 겪는 6가지 문제 성향을 책을 통해 열거해놓았다. 이를 반대로 생각해서 “자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돌아보고 개선하고자 노력한다면 나이 먹는 스트레스 없이 긍정적이고 멋진 시니어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전 교수는 조언했다.
시니어의 문제적 성향
❶ 홀로서기가 불가능한 유형이다.
❷ 흑백의 세계에 있으며 나쁜 면만 보는
유형이다.
❸ 자기밖에 모르는 유형이다.
❹ 만사를 자기 뜻대로만 하는 유형이다.
❺ 자기학대를 하는 유형이다.
❻ 두려움에 빠진 유형이다.
전수경 교수의 어드바이스
❶ 홀로서기를 연습해야 한다.
남에게 과도한 의존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❷ 좋은 면을 보는, 긍정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 관점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❸ 자기중심적이어서는 안 된다. 타인을
배려하고 타인의 입장에서 현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❹ 자기 뜻대로 사람이나 상황을 조정하려고 하는 통제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
❺ 자기를 사랑하고 보듬어야 한다.
❻ 두려움과 걱정을 떨쳐버리고 생산적인
일에 몰두할 수 있어야 한다.
신과 신화, 인간들의 이야기가 풍성한 코카서스 3국의 첫 번째 여행지는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Baku)다.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첫 여행지가 됐다.
먼저 한국엔 코카서스 3국으로 가는 직항 노선이 없다. 모스크바, 이스탄불, 카타르 혹은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국제공항을 경유해서 가야만 한다. 둘째,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적대국이기 때문에 두 나라 간 국경 통과가 불가능하다. 셋째,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운행한 침대열차 1등 칸에 타보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이 실크로드 서쪽 끝에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세계에 몇 곳 없는 동서양 문화의 완충지대에서 출발해 유럽 문화의 변방을 향해 서쪽으로 가는 여정이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기 때문에 ‘바쿠’라는 도시를 제대로 처음 본 것은 다음 날 아침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식사를 할 때였다. 흐린 하늘 옅은 구름 아래로 반듯하게 서 있는 황갈색 사각형 빌딩들, 민트색 둥근 아치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는 고풍스런 정취의 건물들이 창밖으로 보였다. 동유럽의 어느 도시에 와 있는 듯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서서히 구름이 걷히고 하늘이라는 거대한 캔버스가 희미한 푸른 잉크로 물들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여행이 시작됐음을 깨달았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 솟아 있는 바쿠의 상징, 플레임 타워(Flame Tower)도 눈에 들어왔다.
바쿠는 구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세의 고건축과 현대 건축물들(플레임 타워,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 등)이 잘 어우러져 있다.
저마다의 사연을 담은 사유의 길
12세기에 지어진 벽이 둘러싸고 있는 유서 깊은 ‘이체리 셰헤르’(Icheri Sheher)는 바쿠의 구도시다. 커다란 성문을 통과해 성 안으로 들어서니 오랜 세월 밟히고 마모되어 반짝이는 돌로 포장된 길이 열렸다. 서유럽의 도시처럼 위대한 건축물이나 예술작품을 볼 수 있는 광장은 아니다. 사람과 시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길들이 성 안에 그물망처럼 촘촘히 엮여 있다. 골목은 관광지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한적하지만 저마다의 사연을 담은 사유의 길이 도시 구석구석 실핏줄처럼 퍼져 있다.
큰길가 양쪽으로는 상점과 식당들이 죽 늘어서 있다. 그중 눈길을 끈 것은 과거 실크로드를 오가던 대상들이 묵었다는 ‘카라반세라이’(Caravanserai)다. ‘물탄 카라반세라이’를 비롯해 16세기에 지어진 ‘부카라 카라반세라이’ 등 역사적 건축물들이 이곳이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 옛날 이토록 먼 길을 어떻게 이동해 여기까지 왔는지 상상이 안 되지만, 곳곳에 실크로드의 흔적들이 보인다. 시간이 흘러 그 카라반세라이는 기념품 판매점과 고급 레스토랑으로 바뀌었다.
바쿠의 중세를 만나다
바쿠의 구도시 중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12세기에 지어진 ‘메이든 타워’(Maiden Tower)다. ‘처녀의 망루’라는 뜻을 지녔다. 바쿠 왕의 딸 메이든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이곳에 감금당하자 탑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삶을 마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바쿠 왕이 감금한 여동생이 수치심으로 투신했다는 전설도 있다. 아무튼 지금까지 성벽이 부서지거나 외부 세력에 정복당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한다. 탑은 직경 16.5m, 높이 29.5m 규모의 원통형. 성벽의 두께는 5m나 된다. 탑 꼭대기는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다. 탑 위에 올라서니 구시가지와 카스피해가 한눈에 들어왔다. 카스피해를 넘어온 바람의 숨결을 느끼면서 다음 일정을 위한 휴식을 가졌다.
미로 같은 골목을 헤매다 도착한 곳은 ‘시르반샤 궁전’. 15세기에 지어진 이 건물은 아제르바이잔 건축 양식의 진주로 불린다. 왕궁과 건물들이 균형감 있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궁전으로 가는 골목을 걸을 때 어디선가, 신을 부르는 듯한 애절한 소리가 들렸다. 한여름의 열기 속에 길게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아잔’(이슬람 사원에서 기도시간을 알리는 소리)을 따라가 보니 이슬람 사원 ‘무하마드 모스크’(Muhammad Mosque)가 나타났다.
성의 바깥 서쪽에는 성곽길을 따라 바쿠에서 첫 번째로 조성된 ‘필라모니야 공원’(Filarmoniya Park)이 있다. 주변에는 노란색 건물의 ‘클래식 음악 전문 공연장’, ‘예술 박물관’, ‘음악 재단’이 있다. 클래식 음악 전문 공연장은 100년 전 유럽풍 스타일로 지어진 극장으로 운치를 더해준다. 오래된 성벽에 기대어 숲을 안고 있는 공원은 언제든 지친 여행자의 등을 쓰다듬어줄 것만 같다. 곳곳에서 공연을 하고, 한 레스토랑에서는 탱고 파티가 한창이다. 사랑에 취해, 춤에 취해 있던 커플이 카메라를 든 여행자를 보고 포즈를 취해준다. 계획에 없었던 장면들. 여행하면서 만나는 득템이다. 닫힌 마음을 열어주고, 생의 피로를 씻어주는 경험이다.
예술을 존중하는 나라
아제르바이잔은 페르시아인을 중심으로 코카서스인과 튀르크족이 병합되는 과정을 거쳐 11세기에 셀주크 튀르크에게 정복당했다. 이때 아제르바이잔은 튀르크족에 동화돼 완전히 튀르크화됐다. 현재 아제르바이잔 언어의 80%는 터키어다. 그래서 터키와는 ‘한 민족 두 나라’로 불리고, 아제르바이잔 언어를 ‘아제르바이잔튀르크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아제르바이잔은 언어와 문자, 문학작품을 매우 존중한다. 도시 곳곳에 시인의 동상이 있다. 특히 성의 주 출입구인 동쪽 성문 밖에는 아제르바이잔의 국민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니자미 간자비’(Nizami Ganjavi)의 동상이 세워진 기념 공원이 있다. 다섯 편의 서사시 ‘하므사’(Khamsa)를 발표하면서 페르시아를 대표하는 시인이 됐다. 기념 공원 바로 앞에는 ‘니자미 문학 박물관’도 있다. 이슬람식 문양과 디자인을 주로 사용한 건물이다. 건물 2층에는 유명 문인 6명의 동상이 있다. 이들 동상 때문에 박물관은 마치 성전 같은 분위기다.
바쿠의 로데오 거리는 이 박물관 앞에서 시작된다. 바쿠의 현재로 들어가는 길이다. 가성비 좋은 고급 레스토랑과 블링블링한 카페, 유명 브랜드 숍들이 이어지는 보행자의 거리다. 저녁이 되면 수많은 사람이 나와 밤을 즐긴다. 이곳에서는 인종, 국적, 나이, 언어가 달라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타인의 결을, 사물의 결을, 세상의 결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다른 영혼의 결을 안아줄 줄 안다. 이곳에는 여행자를 긴장하게 만드는 소매치기, 강도, 도둑질 같은 경직된 단어도 없었다.
바쿠의 속살들
구 소련 치하에 있었던 영향 때문인지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영어를 잘 못한다. 하지만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젊은이는 많았다. 영어를 하든 못하든, 나이가 많든 적든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친절’이다. ‘28 May 광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한 아가씨가 도와줄 일 없냐고 먼저 물어왔다. 예약한 숙소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만난 할아버지는 200m 정도를 걸어 숙소 앞까지 우리를 데려다줬다. 이곳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졌다.
코카서스 3국 중 아제르바이잔의 물가가 가장 비싼 편이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의 2분의 1 수준밖에 안 된다. 커피 한 잔은 3.0AZN(약 2100원), 슈퍼에서 파는 와인은 4.0AZN(약 2800원)쯤 된다. 지하철이나 버스(0.2AZN, 약 140원) 등 대중교통비는 놀랄 정도로 싸다. 전철은 2개 노선에 정류장도 많지 않아 이용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바쿠의 속살을 보려면 전철역에서 파는 충전식 바쿠 카드로 대중교통을 이용해봐야 한다.
바쿠의 로데오 거리 끝으로 지나가는 큰 대로를 건너면 카스피해를 끼고 바쿠만을 따라 엄청 길고, 넓은 공원이 펼쳐진다. 바로 ‘불바르 공원’(Bulvar Park)이다. 공원 한쪽 끝에서 반대쪽까지 걸으면 2시간 정도 걸린다. 카스피해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나뭇가지가 한 방향으로 치우쳐 있다. 공원 안에는 여객선 터미널, 요트 정박장, 대형 쇼핑몰, 국립 카페 박물관, 아즈네프 광장, 대형 회전 관람차인 ‘바쿠 아이’, 대규모 고급 호텔 등 새 시설들이 호화롭게 자리를 잡고 있다. 첫눈에도 공원 조성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음이 짐작된다. 하지만 뭐가 문제일까? 바로 앞 바다에서 원유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데….
카스피해 보석에서 유럽 보석으로
카스피 해변과 근해에는 영화나 사진에서 많이 본 석유시추 시설이 곳곳에 있다. 지하를 뚫기만 하면 기름이 나온다고 한다. 이렇게나 많이 매장돼 있는 석유를 처음 유럽으로 가져가 막대한 부를 쌓은 이가 있다. 바로 노벨상으로 유명한 스웨덴 사람 ‘노벨’의 형이다. 그가 이 지역에서 석유를 발굴하고 정유소, 송유관, 원유소 등을 개발해 바쿠의 석유산업이 발전했다. 바쿠의 경제기반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인지 바쿠 시는 1884년 비잔틴 양식으로 지은 ‘노벨형제석유사’(브라노벨)의 복지시설 건물을 ‘노벨 박물관’으로 바꿔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다.
현재는 이곳에서 생산된 석유를 바쿠에서 시작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1769km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유럽에 보내고 있다. 이 파이프라인은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를 거쳐 터키의 제이한 항구까지 이어진다. ‘Baku’, ‘Tbilisi’, ‘Ceyhan’ 세 도시의 약자를 따서 ‘BTC 파이프라인’이라 부른다. 카스피해에서 생산된 원유가 BTC 파이프라인을 거쳐 지중해로 가고 이곳에서 다시 유럽으로 공급되는 것이다.
불바르 공원의 중심인 ‘무감 센터’(Mugam Center) 건너편에는 ‘업랜드 공원’ 정상까지 올라가는 푸니쿨라 승강장이 있다. 공원으로 올라가면 바쿠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보았던 플레임 타워가 보인다. 3개의 타오르는 불꽃 형상을 한 건물의 높이는 190m. 6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2013년에 완공했다. LED조명을 설치한 건물 외곽은 형형색색의 불꽃을 보여주며 화려한 쇼를 한다. 이제 바쿠는 ‘바람의 도시’에서 ‘불의 도시’가 되었다. 그 랜드마크가 플레임 타워다. 타워 옆 바쿠만과 카스피해가 한눈에 보이는 공간에 ‘순교자의 길’이 있다. 우리나라의 현충원처럼 전쟁 때(주로 소련이 붕괴할 때 일어난 독립운동) 희생된 사람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공원이다. 공원 안에는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 분쟁’ 당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순교자의 탑’도 있다. 도시의 랜드마크 옆에 추모 공간을 마련한 깊은 뜻을 헤아리며 카스피해와 바쿠의 야경을 감상했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의 정신
여행이 끝나면 바쿠는 어떤 도시로 기억될까? 아름답거나 시각적인 즐거움만 제공한 도시로 남을 것 같지는 않다. 고개를 돌려서 보니 신을 향해 인간이 엎드리는 곳, 자그마한 모스크가 있다.
바쿠의 현재를 상징하는 게 또 하나 있다. 여성 건축가로서는 처음으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디자인한 ‘헤이다르 알리예프 센터’(Heydar Aliyev Center)다. 우리나라 서울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도 그녀가 디자인했다. 그래서일까. 친숙한 느낌이다. 건물의 경이로운 비정형성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사각형 건물이 가득한 도시의 삭막함 속에서 바람에 흐르듯 우아하게 굽이치는 곡선이 숨통을 트이게 했다. 물결도 연상됐다. 멀리서 비탈진 광장의 초록과 물을 배경으로 놓고 봤을 때는 연체동물의 패각이 떠올랐다. 그 껍데기 집에 인간과 세계를 따스하게 감싸는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의 정신이 담겨 있는 듯했다.
창밖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있는 겨울밤에 따뜻한 솜이불 속으로 몸을 담그는 순간 느껴지는 행복감. 그 포근하고 편안한 느낌이 겨울 여행의 맛이다. 뻔한 새해맞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겨울 여행에 갈증을 느꼈다. 그때 하나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지중해는 푸른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황금빛 방울처럼 딸랑딸랑 울리던 곳…”
레몬 향 실린 따스한 바람과 지중해가 반사한 겨울 햇살이 내 영혼을 포근하게 적셔줄 것 같았다. 오렌지빛 겨울 노을을 가슴 속에 슬그머니 담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크레타섬’이다.
겨울에 만난 크레타 섬
크레타(Creta) 섬은 그리스 본토와 아프리카 대륙으로부터 각각 300km 떨어진 정확히 중간 지점에 있다. 그리스에서 다섯 번째 큰 섬으로 제주도 면적의 4.5배 크기다. 아테네의 피레우스(Piraeus) 항구에서 밤 페리선을 타고 크레타 섬으로 향했다. 밭이랑을 세우듯 하얗게 물이랑을 일으키는 파도를 밤새도록 넘어 이른 새벽에 크레타의 이라클리온(Heraklion) 항구에 도착했다.
지중해의 겨울은 날씨를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바람과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세찬 바람이지만 찬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겨울바람이다. 살갗을 쓰다듬어주는 바람이 피부에 착착 달라붙었다. 나도 모르게 한 마디가 나왔다. “아! 바람 좋다.” 잠시 후 새벽 여명과 함께 나타난 야자수와 파릇파릇한 나무들은 멀리 동쪽에서 찾아온 여행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라클리온의 중심지는 베니젤로(Venizelos) 광장이다. 광장 가운데 있는 1600년대에 만든 사자분수를 중심으로 수많은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주변에 있다. 비수기여서인지 문을 닫은 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밤이 되자 광장 주변은 물론 골목길에 있는 작은 카페와 바까지도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다가 어두워진 후에서야 이렇게 나타나는지 놀라웠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밤이 하얗게 새도록 이야기를 나눈다. 이곳 사람들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은 긴 겨울밤 내내 공감과 소통을 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중해의 겨울밤은 하얀색 이야기의 성(城)이다.
겨울 석양을 맞이하기 위해 바닷가 길을 걸었다. 해안가를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예쁜 카페 거리가 아니라 황갈색 바위의 방파제 길을 걸었다. 길 중간에서 1500년대에 만들어진 ‘베네치아 요새’를 만났다. 크레타 섬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지어진 군사시설이다. 겨울 지중해는 해 질 녘 주황색 하늘을 나에게 선사하지 않았다. 아마 겨울이 오면 여름을 기다리는 섬사람들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에게 선사하기 위해서 참았을 것이다. 방파제에 앉아 한숨을 쉬며 파도로 해변을 핥는 겨울 바다를 지켜보았다. 바다를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바다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바다가 나를 지켜주는 것 같은 포근함이 밀려왔다.
미노스 문명의 크레타 섬, 크노소스 궁전
크레타 섬은 고대 그리스 문명에 영향을 준 미노스 문명의 중심지였다. 시내에 있는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에는 놀라울 정도로 발달한 청동기 시대 미노스 문명의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앞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크노소스 궁전’으로 갔다. 겨울이라 관광객도 거의 없이 한산해서 여유롭게 궁전을 둘러볼 수 있었다. 크노소스 궁전은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그리스 전설 속의 반은 인간, 반은 황소였던 ‘미노타우로스’가 살았다는 전설로 유명한 곳이다. 미로 같은 건물로 지었다는 이야기가 충분히 나올 만한 규모와 구조였다. 서로 연결된 방이 무려 1,400개라고 한다. 벤치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궁전에 얽힌 인물과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꿰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만나다
크레타섬 출신으로 유명한 사람을 꼽는다면 화가 ‘엘그레꼬’, 가수 ‘나나 무스끄리’와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뽑을 수 있다.
이라클리온을 둘러싼 성벽 위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가 있다. “최후의 유혹”이라는 작품으로 인해 그리스정교회와 로마가톨릭으로부터 파문을 당했기 때문에 공동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성벽 위에 있었다. 바람 부는 성벽 위, 그의 묘는 소박했다. 묘비의 글처럼 죽어서도 욕심내지 않은 모습이었다. 평평한 돌과 묘석 그리고 나무 십자가 그것이 모두였다. 묘비에는 그의 소설에서 따온 유명한 문장이 새겨져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욕심과 욕망을 버리고, 자유롭게 삶을 즐기라는 그의 외침이 바람에 실려 귓가를 맴돌았다. 자유를 갈망하며 거칠고 힘든 삶을 살았지만,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지금의 자리가 그의 영원한 안식처로 선택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 것이다. 고개를 돌리면 조금 떨어진 곳에 니코스 카잔차키스 문학의 동료이자 사랑을 알려 준 두 번째 부인 엘리니의 묘가 있다. 그녀의 묘 역시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묘 주변을 둘러볼 때 벤치에 앉아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여인을 만났다. 파리에서 프랑스 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페르(Ferr)’였다. 한국에서 교환학생으로 1년 동안 공부했었다는 그녀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크레타 섬을 정말 좋아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그의 문학과 그의 외침 ‘자유’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유롭지 못해서 더 자유를 열망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과 시간, 사연이 오가는 겨울의 항구
크레타 섬에서 이라클리온 다음으로 큰 도시는 하니아(Chania)다. 이곳 역시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받았었다. 여러 문화가 공존하는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분위기의 작은 예쁜 항구다. 하니아는 이라클리온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3시간을 가야 하는 거리에 있다. 하니아로 가는 도로는 해변을 따라가는 풍경이 아름다운 길이다. 가는 내내 올리브 나무가 지천에 깔려있는 구릉지들이 바다와 함께 길옆으로 함께 달린다. 크레타 섬에는 30,000그루의 올리브 나무가 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올리브 관련 상품들이 특산품으로 많이 판매되고 있었다.
하니아 베네치아 항구의 작은 카페에 앉아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지중해의 겨울 햇살이 내 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항구는 배만 오가는 곳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과 시간, 사연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 안에 나의 시간도 있었다. 지금까지 나를 지키는 것조차 버거워 얼마나 많은 것들을 외면해 왔는지 크고 작은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조르바의 말처럼 매사를 정밀하게 재는 저울 한 벌을 내 안에 가지고 있었다. 이제 저울을 버릴 때다. 필요한 건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다.
△ 지중해 섬 여행 정보 Tip (아테네에서 크레타 섬 가는 방법 중심으로)
- 아테네 피레우스 항구에서 페리를 타면 된다. ‘미노안 라인’과 ‘블루 스타 페리’ 두 개 노선이 있으며 크레타 섬까지는 9시간 정도 걸린다.
- 피레우스(Pireaus) 역까지는 지하철(Metro) M1 노선을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 피레우스 항구 입구에는 배를 타는 각 게이트로 가는 무료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
- 예약서를 페리 타는 게이트(Exit)에 있는 부스에서 탑승권으로 교환하면 된다. 혹은 직접 구매해도 된다.
▪ 미노안 라인 예약 홈페이지 www.ferries.gr/
▪ 블루 스타 페리 예약 홈페이지 www.bluestarferries.com
※ 크레타 섬 외에 산토리니 등 다른 섬을 가기 위한 예약과 승선도 동일한 방법으로 하면 된다.
※ 겨울철에는 숙박비, 렌트비 등 모든 요금이 절반 정도로 싼 편이다. 하지만,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으면 배가 출항을 못 해 발이 묶여 있을 수도 있다. (물론, 비행기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겨울철 지중해 섬 여행은 반드시 시간적 여유가 있는 일정이어야 한다.
△ 크레타 섬 추천 먹거리
베니젤로 광장 꼬치구이 전문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