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탱글탱글한 블루베리 열매가 소담스럽게 익어가는 계절이다. ‘부지깽이라도 세워놓고 일 시키고 싶을 만큼’ 농장은 종일토록 분주하고 번잡하게 돌아간다.

“요즘은 꽃피는 순서도 읍써(없어). 예전엔 봄철 산수유 피고 다음에 개나리·진달래가 흐드러지나 싶으면 벚꽃이 활짝 올라왔는데, 꽃들이 계절을 잊었나 벼.” 한철에 모두 피어올라 꽃대궐을 이룬 봄이 지났다. 이웃 어르신들 푸념마따나 꽃만 계절을 혼동하는 것이 아닌 듯하다. 블루베리 열매 맺는 순서도 뒤죽박죽이 돼 농번기 일손 부족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으니 말이다.
15년 전 처음 블루베리 묘목을 심을 때 수확시기를 분산하기 위해 조생종·중생종·만생종을 골고루 심었다. 조생종인 패트리어트와 블루레이를 따고 나면 중생종 블루크롭과 토로를 따고 만생종 넬슨은 조금 시차를 두고 따면 되겠지 했는데, 웬걸 시간이 지나면서 조생·만생 구분 없이 한꺼번에 꽃이 피고 거의 동시에 열매가 익기 시작해 여간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다.
2년 전 아내와 사별한 백발의 안 씨 아저씨는 “그 쬐끄만 걸 쭈그리고 앉아 한 알씩 따는 거, 난 억만금을 준대도 못 할 것 같아” 하며 혀를 끌끌 차신다. 포도처럼 송이째 익지 않고, 같은 송이 안에서도 익는 속도가 다른 블루베리는 열매를 한 알씩 따야 하기에 품이 엄청나게 들어간다. 블루베리 500g 한 팩 값이나 웬만한 수박 1통 값이나 비슷한 이유가 그 품삯에 있다.

베테랑도 쉽지 않은 블루베리 수확
그 때문인가, 블루베리 수확철이 돌아오면 워낙 일손이 달리다 보니 자원봉사자의 손길을 은근히 기다리게 된다. 얼마 전엔 복숭아 농장에서 꽃 솎는 작업을 도와주는 자원봉사자들 덕에 한시름 놓았다며 활짝 웃는 농장주의 얼굴이 TV 화면을 가득 채운 뉴스를 보았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정신없이 바쁜 철에 우리 블루베리 농장을 찾아와 도움의 손길을 건넸던 고마운 얼굴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일머리를 몰라 쩔쩔매던 초보 농부 시절, 수확 첫해를 맞아 이웃 아주머니 두 분을 계절노동자(?)로 고용했다. 이장님 댁 8촌 형수뻘 되는 이 씨 아주머니는 당시 68세, 마음씨 고운 최 씨 아주머니는 66세로 늘 짝을 맞춰 일을 다니시곤 하셨다. 두 분에겐 ‘농사의 달인’이란 별명이 따라다녔다. 두 분은 오래도록 다닌 복숭아 농장까지 거리도 멀고 힘에 부치던 차에 “엎어지면 코 닿을 가차운(가까운) 블루베리 농장에 일거리가 있어 엄청 좋아유” 했는데 그만 첫날부터 문제가 생겼다.
블루베리는 토마토나 복숭아처럼 온도에 따라 후숙하는 과일이 아니다. 나무에 달려 있을 때만 열매가 익는 독특한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알맞게 잘 익은 열매를 적시에 따는 작업이 여간 까다롭지 않다. 더구나 패트리어트 같은 품종은 꼭지 부분이 잘 보이지 않아 자칫 방심하면 엉덩이 부분이 빨갛게 덜 익은 상태의 열매를 딸 때가 종종 있다. 제대로 익지 않은 블루베리는 양 어금니에 침이 고일 만큼 시큼한 맛이 강하게 올라온다.

물론 너무 익어도 상품성은 제로가 된다. 블루베리 열매는 크기가 작은 만큼 한나절이나 하루 만에 푹 익어버리고 만다. 완숙과는 배송 과정에서 물러버릴 위험이 크기도 하거니와, 토로 같은 품종은 완전히 맛 자체가 사라지면서 무미(無味)의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니 단골에게 배송할 때는 80~90% 익은 걸 따야 하고, 로컬푸드에 출하할 때는 90~95% 익은 걸 따야 한다. 머리로는 이해가 될 듯도 하지만 말이 그렇지 그걸 맞추는 건 정말 쉽지 않다. 혹 마트에서 산 블루베리가 맛이 덜 들었다면, 그건 마트의 유통 구조를 고려해 70% 정도 익은 걸 출하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데 농사의 달인 두 분이 이구동성으로 “과일? 복숭아나 블루베리나 다 거기서 거기여. 복숭아 따는 것 맹키로 따면 되는 것 아니여?” 하더니 채 익지 않은 블루베리를 마구잡이로 따버리는 것이 아닌가. 보라색 반 빨간색 반이 뒤섞인 블루베리 열매 바구니를 보고, 눈물을 머금고 그날로 베테랑 농부 두 분을 칼같이 잘랐다. 블루베리 발음도 제대로 못 하는 분들에게 “내일부터는 새 일자리 알아보셔야겠어요” 하고 돌아서는데 참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음은 물론이다.
덜 익은 블루베리도 상온에 놓아두면 색이 보랏빛으로 변한다는 둥, 냉장고에 넣어두면 시큼한 맛이 부드러워진다는 둥 블루베리 농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주인장은 전문가가 집필한 블루베리 책자에 적혀 있는 내용 ‘블루베리는 나무에 달려 있을 때만 익는다’는 사실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

오가는 사람마다 들고 온 마음 보따리
돌아보니 꽤 다양한 방문객이 우리 블루베리 농장을 다녀갔다. 농사 초반엔 주인장의 중학교 동창들이 서너 차례 다녀갔다. 이분들은 ‘임도 보고 뽕도 딸 겸’, 그러니까 동창 모임도 하고 친구네 블루베리 수확도 도와줄 겸 오셨기에, 블루베리 따는 재미보다 점심 먹는 재미에 더 마음을 빼앗기곤 했다. 친구들이 오면 주인장은 고복 저수지 근방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메기매운탕이나 돼지갈빗집을 찾아 푸짐하게 점심을 대접하곤 했다. 블루베리 수확엔 딱히 마음이 없었지만 그래도 서울서 조치원까지 먼 길 마다 않고 와준 정겨운 마음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주인장의 대학 후배들도 몇 차례 와서 혼자 보기 정말 아까운 멋진 위문공연(?)을 하고 떠났다. 재담이 뛰어난 후배의 장기자랑 덕에 모두 배꼽 잡고 웃었던 기억이 새롭다. 역시 근처 맛집에 가서 근사한 점심 대접도 하고, 각자 마구잡이로 딴 블루베리를 예쁘게 포장해서 손에 들려 보냈다. 그럴 때면 고마운 마음 가득하면서도 ‘다음엔 농번기를 피해서 와주십사’ 부탁하고픈 걸 꿀꺽 삼키기도 했다.
한번은 농번기 과수 농장의 일손 돕기를 목적으로 하는 자원봉사자 모임에서 열 분 정도 우리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분들은 아침 8시 전에 도착해서 12시까지 반나절 도와주곤, 점심을 대접하겠다고 하니 그건 민폐라며 깔끔하게 사양하고 떠났다. 그때 정말 큰 도움을 받았기에 이듬해에도 오시려나 목 빼고 기다렸지만, 워낙 도움을 요청하는 곳이 많아 가능하면 골고루 도움을 주고자 매번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선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도 우리 농장의 단골 도우미는 역시 무급(?) 가족 종사자들이다. 가까운 친척이 비교적 큰 규모의 블루베리 농장을 운영하는 친구가 있는데, 그 농장도 수확철이면 미국에 유학 간 아들딸들을 불러들인다고 하니 농장 사정이 다 거기서 거기인 듯하다.
15년째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블루베리 수확철이 돌아오면 알아서 농장 문을 열고 들어오는 팀들이 있다. 첫 번째는 주인장의 남동생 부부팀. 블루베리 농장 건너편에서 사과대추 농사를 짓기도 하는 남동생네는 가끔 서울서 내려와 대추밭을 돌보곤 하는데, 특별히 블루베리 수확철이면 아예 3박 4일 일정으로 숙박을 함께하면서 화끈하게 도와준다.
두 번째는 주인장의 딸·사위팀. 최근엔 손자·손녀가 모두 대학생이 되면서 팀 규모가 두 배로 커졌다. 특히 사위의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미국엔 누가 누가 잘 따나 블루베리 수확 경연 대회가 있다는데, 출전을 권유하고 싶을 만큼 손끝이 여물고 빠르다. 한창 수확기엔 완숙과로 가기 전 싱싱할 때 따는 것이 관건이기에 사위처럼 손 빠른 일꾼이 최고다.

농활이 그저 일손 돕기가 아닌 까닭은
작년인가, 대학에 입학한 주인장의 손녀가 학교에서 주관하는 농활(농촌활동)을 신청하겠다고 해서 아빠에게 한 소리 들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농활 갈 시간 있으면 할머니 블루베리 농장 가서 도와드려라”고 했단다. 그 아빠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이야길 한 셈이다.
77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한 나는 1학년과 2학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이대생과 서울대생 연합 동아리에서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10박 11일 농활을 다녀왔다. 농활 장소는 강원도 춘천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부귀리라는 마을이었다. 당시 부귀리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깡촌이었기에, 밤이면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사를 연발하곤 했다. 와중에 낮엔 콩밭에서 잡초 뽑고, 오후엔 동네 아이들 모아 여름방학 간이학교를 열고, 저녁이면 농촌의 암울한 현실을 주제로 세미나를 하는 빡센 일정을 소화했다. 농활을 끝내고 돌아올 때마다 여러 쌍의 연인이 탄생했음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그 인연으로 결혼에 골인한 선배가 두 쌍에, 평생을 농촌 활동가로 헌신하기로 결심한 선배도 세 명에 이르렀으니 농활 수확이 제법 쏠쏠했던 셈이다. 사위는 그것도 모르고 손녀를 다그쳤으니….
또 하나의 드림팀은 나의 제자팀이다. 함께 나이 들어가는 제자 두셋이 수확철만 되면 농장을 찾는다. 처음엔 너나없이 농사 경험이 없는지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오전 11시쯤 농장에 도착해 곧바로 점심 먹고 오후 5시 기차로 서울에 올라가곤 했다. 두어 해 경험이 쌓이면서부터는 자신들만의 루틴을 만들어냈다. 일단 6월 말~7월 초 주말을 이용해 택일한 후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첫 기차를 타고 온다. 조치원역에 도착하면 20분 정도 걸리는 농장까지는 주인장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이동한다.
패셔니스타란 별명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멋쟁이인 한 친구는 현란한 꽃무늬 몸뻬 바지에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 한 켤레를 마련했다. 제자들의 블루베리 따는 솜씨는 해를 거듭하면서 일취월장해 지금은 가장 일손이 필요한 시기에 정말 요긴한 도움을 준다.
농사지으며 흘리는 땀이야말로 세상에 공짜가 없음을 일깨워주는 징표 아니겠는지. 땀 흘리는 동안은 물론 고생스럽지만 땀 흘린 후의 뿌듯한 개운함 속엔 뜻밖의 중독성이 있다. 주위에 농사짓는 지인이 있어 도움의 손길을 나누고 싶다면, 무늬만의 농활이 아닌 진정성 있는 농활을 해보길 권한다.
농부의 하루는 해 뜨면서 시작한다는 것, 더불어 농번기엔 민폐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를 마음에 새긴다면 어디서든 환영받는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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