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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쉬운 여행 마지막 날[5]
- 어젯밤에는 ‘이자카야’ 데이트 나갔던 아들, 며느리가 들어오는 걸 모르고 잠이 들었다. 팔짝거리며 뛰어다니는 아기들 때문에 잠이 깼다. 17개월 된 손자가 누나가 하는 대로 따라서 뒤뚱뒤뚱 쫓아다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웃음이 났다. 오늘도 역시 화창하고 환한 바깥 풍경이 감동을 준다. 베란다에서 내다보이는 풍경은 그림같이 예쁘다. 가끔 뎅 뎅 종소리가 울리는 하얀 교회당은 참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결혼식을 주로 한다는데 이곳에서 결혼한 부부는 평생 평화롭게 잘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 옆으로 수영장과 맞닿은 곳의 너르고 푸른 바다가 가슴을 시원하게 해줬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니 아쉽기만 하다. 여행을 할 땐 미리 다녀온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정보를 얻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호텔에서 외출할 때 문밖에 초록색 카드를 붙이면 방 정리만 원하고 청소는 안 하겠다는 에코 클린 표시라고 한다. 그러면 메이드는 방 정리만 해주고 호텔 측에서는 500엔짜리 쿠폰을 2장 준단다. 이 쿠폰으로 호텔 쇼핑센터에서 기념품 등 사고 싶은 걸 살 수 있으니 좋다며 며느리가 웃는다. 알뜰하고 현명한 며느리가 예쁘다. 600엔짜리 작고 귀여운 수호신 ‘시사’를 3개 사면서 쿠폰을 사용했다. 초록색 ‘시사’ 하나는 내가 가졌다. 그들의 이런 작은 서비스가 고객을 즐겁게 하고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하는 것 같다. 여행 마지막 식사로 일본 가정식을 먹은 후 짐을 챙겨 호텔을 나서는데 왜 그리 아쉬운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다음에도 여행을 한다면 이곳에 다시 오고 싶다. 오키나와에 와서 느낀 것 중 하나는 매우 작은 차들이 많다는 점이다. 또 관광지만 다녀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친절하고 거리는 깨끗했으며 도로 위의 차는 우리나라 티코 정도의 차들이 많았다. 본받을 만한 점인 것 같았다. 1시 반 비행기라 서둘러 나서서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채웠다. 렌트할 때 기름이 가득 차 있었던 만큼 돌려줄 때도 그만큼 채워서 반납해야 한다. 3박 4일 동안 300km 정도를 다녔고, 주유비는 3만원이 나왔다. 렌트비가 26만원이고 주유비가 3만원이니 교통비로 30만원밖에 안 드는 편리한 이동 수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차를 반납한 후 셔틀버스로 ‘나하’ 공항으로 가니 우리가 탈 아시아나 비행기가 바람 때문에 연착해 1시간 정도 늦어질 거라고 한다. 오히려 잘됐다며 우리는 느긋하게 면세점에서 선물과 초콜릿 등을 사며 기다렸다. 오키나와는 일본 내에서도 여러모로 독특한 지역이다. 과거 존재했던 독립국 류큐 왕국이 일본에 포함된 지 채 200년이 되지 않아서 류큐 왕국의 유산, 독특한 문화, 그리고 남국의 자연 풍경 등 볼거리가 많아 관광지로 인기가 많은 지역이다. 원래 류큐 왕국의 중심지는 ‘슈리’ 로 ‘슈리 성’이 있기도 한데 일본에 병합된 후에는 ‘나하’가 중심지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오키나와 전투의 아픔이 있기도 하고 주일 미군기지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도 한다. 어쨌든 오키나와에 대한 인상은 매우 좋았으므로 다음 기회에도 다시 찾고 싶은 생각이 든다. 특히 어린 손자 손녀와 함께 일본 여행을 계획하는 분들께는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오후 5시. 3박 4일 동안 주차비는 하루 9000원으로 36000원이 나왔다. 집에 왔는데도 여행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는다. 참 즐겁고 편안했던 가족 힐링 여행이었다. 벌써부터 다음 여행이 기다려진다.
- 2016-11-03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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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키나와 여행 셋째 날[4]
- 이날도 역시 쾌청하고 한낮은 31도의 무더운 날씨였다. 미리 알아봤던 여행 내내 흐리고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틀려서 너무나 고마웠다. 아침식사는 일본 가정식을 택했다. 김치 없이 하는 식사가 심심했지만 그래도 깔끔한 아침상을 받았다. 실이 죽죽 늘어나는 낫또를 보고 손녀가 거미줄 같다며 웃었다. 스케줄은 아기들을 위해 ‘해양 박 공원’에서 ‘오키짱 쇼(돌고래 쇼)’를 관람하고 ‘추라우미’ 수족관에서 커다란 고래상어를 보기로 했다. 사실 필자는 돌고래 쇼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살아야 할 돌고래를 훈련시켜 사람들 구경거리로 만든다는 게 마음 아프다. 돌고래는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이런 쇼는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아기들이 좋아한다니 어쩔 수 없이 관람하기로 했다. ‘해양 박 공원’에 가는 동안 점심시간이 되어 북부에 있는 100년 전통을 가진 음식점 ‘우후아(대가)’에 들렀다. 길 옆 숲속 깊은 곳에 자리한 고풍스러운 이 음식점은 규모가 매우 컸으며 마당이나 안쪽 어디에든 크고 작은 모습의 다양한 ‘시사’가 이곳을 지키겠다는 듯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구(흑돼지)구이 정식, 아구 우동, 돈가스 정식 등의 메뉴가 있는 정통 일본식 집이었다. 검은색 목조건물인 이 음식점은 마룻바닥이 넓은 대청으로 되어 있었고 2층으로 오르내리는 좁은 나무 계단이 아기자기했다. 곳곳에 숨어 있는 작은 다다미방도 흥미로워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 폭포가 흘러내리며 자연의 운치를 물씬 풍기는 일본식 구조의 집이었다. 이제까지 깔끔한 휴양지만 보았다면 이곳은 일본의 체취가 느껴지는 정감 넘치는 곳이어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우후아’에서 점심을 마치고 ‘추라우미’ 수족관이 있는 ‘해양박 공원’으로 갔는데 규모가 엄청났다. 쨍쨍 내리쬐는 햇볕 속에 유모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걷느라 땀깨나 흘렸다. 평일인데도 우리나라 제주도 같은 관광지여서 그런지 일본 사람들도 많았다. 돌고래가 안쓰럽긴 해도 손녀 손자를 안고 손뼉을 치며 쇼를 관람했다. 돌고래 쇼가 끝난 후 추라우미 수족관에 가니 지인 한 분이 생각났다. 코엑스 아쿠아리움 부사장이신 지인은 코엑스 수족관을 직접 설계하셨는데 아쿠아리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신 분이다. 규모는 비슷했다. 코엑스 아쿠아리움이 수만 마리 정어리 떼의 군무가 멋지다면 이곳 ‘추라우미’는 거대한 고래상어가 놀라웠다. 날씨가 너무 더워 좀 지쳤을 때 저녁식사로 ‘플리퍼’라는 유명 음식점에서 스테이크를 먹는다고 해서 기운이 번쩍 났다. 역시 여행은 식도락이 빠질 수 없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우리 나이가 되면 가장 맛있는 밥은 남이 해주는 밥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여행 동안 손 하나 까딱 않고 맛있는 음식을 매일 먹으니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숙소에 돌아와 아기들을 재운 후 아들과 며느리가 근처 ‘이자카야’에서 술 한잔 하고 오겠다면서 나갔다. 다정하게 나가는 모습에 나까지 덩달아 즐겁고 흐뭇했다.
- 2016-11-03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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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키나와 여행 둘째 날 [3]
- 전날 밤 늦게 잠이 들어 아침 기상이 어려울 줄 알았는데 커튼을 여니 환한 햇살이 눈부시고 내다보이는 바깥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반짝 눈이 떠졌다. 그보다는 아기들이 먼저 잠에서 깨어 필자를 흔들어댔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 하루의 즐거울 시간을 상상하니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이번 여행은 아들, 며느리의 계획에 전적으로 따르기로 했기 때문에 스케줄을 물었더니 아침식사는 호텔에서 하고 오전엔 호텔 해변과 수영장에서 보내겠다고 한다. 호텔에 딸린 수영장은 해변처럼 물이 흐르게 해놓았고 뜀틀과 미끄럼 등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시설이 있어 손녀와 손자가 매우 즐거워했다. 수영장 바로 너머로 오키나와의 푸른 바다가 넘실대고 있어 신기하기도 했다. 호텔 입구와 안쪽에는 ‘시사’라는 신기한 동물 형상을 한 조형물이 많이 보였는데 오키나와를 보호해주는 수호신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해태상과 비슷한 모습으로 표정이 매우 다양하고 귀여웠다. 보통 한 쌍으로 되어있는데 입을 벌리고 있는 건 수컷이고 닫고 있는 건 암컷이란다. 닫힌 입은 안으로 들어온 복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열린 입은 복을 불러들이고 잘못 들어온 액을 내쫓는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작은 열쇠고리의 ‘시사’는 600엔 정도여서 떠나는 날 귀국 선물로 점찍어두었다. 아침식사 후 곧바로 수영장으로 내려갔다. 수영복 차림이 좀 민망했지만 여기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이니 주눅 들 필요 없이 당당하게 놀았다. 흰색 비치 의자에 누워 올려다본 하늘은 하얀 솜사탕 구름이 탐스럽게 떠 있는 너무나도 깨끗한 파란빛이어서 바라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풀장에서 수영도 하고 튜브 탄 아기와 놀아주며 어린아이처럼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 점심은 예정대로 미리 검색해온 유명 맛집 ‘류큐노우시’에서 ‘와규’를 먹기로 했다. 일본산 소고기인 와규는 가격이 비쌌지만 소문대로 입에서 살살 녹았다. 오키나와는 바다로 둘러싸였어도 생선회보다 와규 소고기나 스테이크가 더 유명하다고 한다. 호텔 주변에 있다 해서 유모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일본 동네도 구경할 겸 걸었는데 음식점이 보이지 않았다. 지나던 청년에게 보디랭귀지와 영어를 섞어가며 물었더니 메모를 보고는 따라오라며 앞장서 주었다. 어느 쪽인지만 알려주면 될 텐데 3~4분 거리에 있는 우리가 찾는 음식점 앞까지 안내해주고 가던 길을 갔다. 듣던 대로 매우 친절한 일본인이어서 고마웠다. 필자도 관광객이 길을 물으면 바쁘지 않은 한 친절하게 안내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메뉴판을 가져온 종업원은 “코리언? 차이니즈?”라고 물으며 국적에 맞는 언어의 메뉴판을 보여주었다. 일어 못한다고 걱정할 일이 하나도 없다. 숙소로 돌아와 호텔에서 제공한 무료 티켓으로 바다가 보이는 예쁜 창가에 앉아 케이크와 커피를 마시는 여유도 가졌다. 저녁에는 오키나와에 가면 꼭 들러보라는 ‘아메리칸 빌리지’에 가기로 했다. 아메리칸 빌리지는 1981년 미군 소유의 비행장이 일본으로 반환되면서 1988년 비행장 북쪽에 인접한 해안을 매립하여 미국 샌디에이고를 모델로 해서 지어진 도시형 리조트 형태의 대표적인 관광지다. 미국풍의 각종 편의시설과 음식점들이 있으며 커다란 관람 차는 아메리칸 빌리지의 상징물로 화려한 불빛을 뽐내며 돌고 있다. 이곳에는 줄 서서 기다려야 먹을 수 있다는 구르메 스시집이 있다. 회전 초밥집으로 우리 가족은 번호표를 받고 30~40분 기다리는 동안 동네를 둘러보았다. 네온사인이 화려하고 가게들이 예뻤다. 메인 광장에서는 무명가수들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어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구르메 스시 집에서 저녁을 먹은 후에는 관람 차를 탔다. 크기가 엄청나 맨 꼭대기에 매달렸을 때는 오금이 저려 아래를 내려다볼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했다. 어렸을 적 창경궁에는 ‘허니문 카’ 라는 이름의 관람 차가 있었다. 친구들과 관람 차를 타며 즐거웠던 추억이 떠올라 그리움이 밀려왔다. 100엔 숍에서 간식거리를 사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두 꼬맹이 아가들은 잠에 빠져버렸다. 즐거운 여행 둘째 날이 이렇게 지나갔다.
- 2016-11-03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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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키나와 여행 첫째 날 [2]
- 여행은 언제나 즐겁고 마음 설레게 한다. 가족여행이면 더욱 좋다. 10월의 마지막 주 아들, 며느리, 손녀 손자와 함께 일본 오키나와로 휴가를 떠났다. 가기 전 그쪽 날씨를 검색해보니 우리가 가는 3박 4일 내내 계속 흐리거나 비가 내린다는 예보다. 한 달 전부터 계획하고 예약한 상태라 날씨가 흐리다고 안 갈 순 없었다. 흐리면 흐린 대로 즐거운 게 여행이다. 요즘 우리나라는 햇살이 뜨겁지만 아침저녁으론 좀 추운 날씨다. 그런데 오키나와는 10월의 막바지인데도 한낮의 기온이 30도를 넘는다고 한다. 그래서 한여름 옷과 카디건을 챙겼다. 9시 반 비행기라 우리 가족은 새벽 6시 좀 지나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 주차장에 자리가 없을까봐 우려했지만 마침 빈자리가 있어 주차 걱정 없이 산뜻하게 떠날 수 있었다. 아시아나 항공기로 일본 오키나와 ‘나하’ 공항까지 가는 데는 2시간이 채 안 걸렸다. 오키나와는 제주도처럼 남쪽에 있는 섬이라 본토 사람들이 우리가 제주도로 휴양가듯 찾는 섬이라고 한다. 원래 오키나와는 일본과 중국 사이의 독립적인 섬으로 일본이 아닌 류큐 왕국이었는데, 일본의 침략으로 일본 식민지가 되었다 또한 태평양전쟁 땐 미군이 점령해 지금까지도 곳곳에 미군 기지가 남아 있는 아름답지만 슬픈 섬으로 불리기도 한다. ‘나하’ 공항에 도착하니 하늘이 너무나도 파랗고 깨끗해서 여행 내내 비가 올 것이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일본 기상청의 틀린 예보가 좀 우스워졌다. 공항 밖은 정말 들은 대로 매우 더웠다. 한여름 옷을 입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찾아 나가니 도요타 렌터카 회사 사람이 팻말을 들고 있었다. 렌터카 회사로 가는 셔틀버스에는 많은 여행객들이 타고 있었다. 렌터카 회사는 공항 가까운 곳에 있었고 우리 가족은 예약한 대로 7인승 차를 빌렸다. 일본은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고 도로도 우리나라와는 달라서 좀 걱정되었지만 아들이 능숙하게 운전해서 다행이었다. 먼저 ‘나하’에서 꼭 사고 싶은 물건이 있다며 목적지를 ‘류보’ 백화점으로 잡았다. 마음에 든다는 예쁜 그릇을 고르고 오키나와 브랜드인 블루씰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며 여행은 시작되었다. 온통 바다로 둘러싸인 섬인 오키나와 남쪽 ‘나하’ 공항 중부 쪽에 있는 예약 숙소 몬테레이 호텔은 코앞에 바다가 멋지게 펼쳐진 곳에 있었다. 에메랄드빛 바닷물이 어찌나 맑고 깨끗한지 눈이 시릴 정도여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호텔은 모든 방이 바다 쪽으로 나 있었고 베란다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결혼식을 주로 한다는 하얀색의 교회당과 수영장 너머로 아름다운 바다가 끝없이 보이는 정말 예쁜 한 폭의 수채화처럼 보였다. 아직 어린 아기가 있어 잠자리가 편해야 한다고 고른 호텔이어서 모든 것이 안락하고 깔끔했다. 하루 한 끼는 호텔에서 제공하는데 뷔페와 일본 가정식 중에서 고르면 되었다. 그런데 숙소로 오는 도로가 엄청 막혔다. 지나다 보니 버스 한 대가 다 타버린 사고가 있었다. 좀 늦은 시각 도착한 우리는 방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내려갔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으니 맛이 있든 없든 귀부인이 된 듯 기분이 매우 좋았다. 아이들도 여행이 즐거운지 재롱을 부리며 늦도록 잠을 안 잤다. 이렇게 오키나와 여행 첫날이 지나갔다.
- 2016-11-03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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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여행 계획 [ 1 ]
- 생각과 계획만으로도 즐거워지는 게 여행이다. 한동안 집안에 우환이 있어 마음고생하는 엄마가 안쓰러웠는지 아들이 국외 가족여행을 제의했다. 한 달여 전부터 아들과 며느리는 열심히 여행지를 알아보고 예약하는 등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예쁜 손녀 손자와 함께여서 더욱 설레고 즐거운 기분이었다(그러나 젊은 시절과 달리 아기들 데리고 다니는 게 그리 쉽지는 않아서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아들이 어렸을 땐 한 손으로 번쩍 안고 다녀도 전혀 힘들지 않았는데 이제는 아기를 잠시 안고 있어도 힘에 부쳐 세월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필자에겐 국내, 국외여행을 함께하는 친구 삼총사가 있다. 필자와 달리 그 친구들은 평소 일어 공부도 열심히 해서 일본 정도는 자유여행을 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항상 여행사의 패키지를 선호했다. 여행사를 통한 여행과 다 알아서 해야 하는 자유여행은 각각 장단점이 있다. 가이드를 따라 하는 여행은 일단 여행비용이 적게 든다. 또한 그 나라의 어디를 보아야 할지 무엇을 먹을지 등을 전혀 고민할 필요 없이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되니 편하다. 그래서 패키지여행을 선택했는데 친절한 가이드 덕분에 여행한 나라의 볼 만한 곳과 역사 유적지를 돌아보고 새로운 지식도 얻을 수 있어 항상 즐겁고 보람이 있었다. 단점이라면 개인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과 하루 세 번 식사를 해결해주니 가보고 싶은 유명한 맛집을 따로 경험할 수 없어 아쉽다는 점이다. 자유여행은 어디라도 가고 싶은 대로 다니고 먹고 싶은 음식도 고를 수 있어 좋지만 항공권부터 숙소와 여행 장소까지 알아서 정해야 하니 번거롭고 언어도 잘 통하지 않을 것이어서 걱정스러운 점이 있다. 이번 가족여행을 패키지로 갈 것인지 물으니까 아기들이 어려서 패키지는 무리란다. 여행지는 일본이고 여러모로 알아보니 오키나와가 비행시간도 2시간 정도로 짧고 아이들 놀기에 적합한 휴양지라 한다. 벌써 저희끼리 3박 4일의 일정도 다 짜놓아서 따르기만 하면 되니 편했다. 필자와 나이가 비슷한 시니어들도 대부분 고만한 손자 손녀가 있을 것이므로 가족여행으로 일본을 선택할 경우 필자가 경험한 것들을 알려드리면 도움이 될까 해서 이 글을 쓴다. 며느리는 다섯 살 손녀와 17개월 된 손자 때문에 무엇보다 숙소가 편해야 한다며 오키나와 중부쯤에 있는 바닷가의 멋진 호텔 몬테레이를 선택했다. 1박에 40만원이었다. 비행기는 아시아나로 어른 셋에 아기 둘 포함 100만원이었다. 그리고 공항에 내리면 미리 예약한 렌터카를 여행 동안 이용하는 데 26만원, 반환하면서 기름을 가득 채워주면 된다고 한다. 우리는 300km 정도를 다녔고 3만원어치 주유를 해서 반납했으니 쇼핑과 식사를 제외한 여행 기본 비용은 250만원이었다. 호텔에서 아침은 뷔페나 일본 가정식을 골라먹을 수 있어 점심과 저녁만 사먹으면 된다. 미리 검색해간 유명 음식점을 빼놓지 않고 다녀볼 수 있어 좋았다. 이 모든 예약을 며느리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해결했다. 참 편리하기도 하고 스마트폰 기능을 잘 아는 며느리가 대견스럽고 한편 부럽기도 했다. 일본은 모두들 알다시피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다. 필자도 한 번 운전해보고 싶었지만 국제면허가 없어 아쉬웠다. 평소 운전을 잘하는 시니어라면 국제면허를 꼭 따서 오른쪽 운전으로 차를 달려보는 이색적인 경험을 해보면 좋겠다. 우리나라는 10월의 막바지여서 한낮의 태양은 뜨거워도 아침저녁으론 좀 춥다고 느껴지는데 오키나와는 제주도보다 더 남쪽이어서 지금도 기온이 30도를 넘는 한여름이다. 이렇게 미리 계획한 대로 즐겁고 행복한 가족여행이 시작되었다.
- 2016-11-03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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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이기수 예원실그림문화재단 이사장의 110세 프로젝트
- 17대 고려대 총장, 사립대총장협의회장, 대법원 양형위원회위원장, 중국연변과학기술대·러시아모스크바국립대·미국조지워싱턴대 등 국내외 유수 대학의 명예교수 및 석좌교수를 역임한 이기수(李基秀·71) 예원실그림문화재단 이사장의 경력은 법학자로서 얻을 수 있는 화려한 성공 사례들의 목록이다. 그런 그가 법학이 아닌 예술계의, 예원실그림문화재단의 이사장이 된다고 했을 때 모르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다소 돌출적인 행보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사장은 그 선택이야말로 확고한 기준을 갖고 이뤄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이사장이 예술을 접하는 시니어로서의 삶의 기준은 무엇일까? 아마도 평생 학자로 살면서 몸에 밴 버릇이자 의지일 것이다. 이기수 예원실그림문화재단 이사장은 요즘도 새벽 세 시에 일어나 공부를 한다. 그는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 갇혀 있을 때 한 말,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를 신봉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유한합니다.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에서만 살잖아요. 그런데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체험하는 거니까 책을 읽는 만큼 내 삶이 더 윤택해진다는 의미가 될 수 있죠. 나는 법학을 공부했으니 법학에 대해선 조금 알지만, 그 밖의 경제와 인류, 문학과 예술을 어떻게 알았겠어요. 모든 것은 책을 통해 다른 사람의 삶을 가져와서 내 삶에 녹여 삶을 좀 더 향상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예요.” 예술의 후원자가 되다 경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이사장은 그동안의 삶을 법 연구로 세운 대표적인 법학자다. 그런 그가 어떻게 예원실그림문화재단의 이사장을 맡게 됐는지 궁금했다. “이배영 이화여대 총장께서 가까이 지낸 사람들을 예원실그림문화재단에 초청했던 적이 있어요. 그때 손인숙(예원실그림문화재단 관장) 작가가 만든 를 보고 ‘어떻게 저런 작품을 직접 만들 수가 있었을까. 저건 사람의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싶었죠. 그런 걸 오천 점 정도 만들었다니까, 신의 경지여야 할 수 있는 거로구나 하며 감탄했습니다. 그렇게 작품에 매료되어 있는데 손 작가가 재단을 만들 생각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내가 갖고 있던 돈 삼십만원을 후원금으로 냈어요.” 이 이사장은 손 작가의 첫 후원자였다. 재단 통장에 첫 번째로 후원금을 넣은 첫 후원자로서 이 이사장은 손 작가의 요청으로 이사장까지 맡게 됐다. “한국의 예술이 파리를 침략했다” 올해는 한불수교 130주년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에서는 지난해 9월부터 올해 8월 말까지 작품 전시와 공연이 진행됐고 우리나라에서는 올해 1월부터 12월 말까지 130개의 작품을 전시 및 공연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으로 파리에서 3개의 작품 전시 및 공연이 이뤄졌는데 각각 종묘제례, 공예 작품, 그리고 손 작가의 실그림 작품이다. 실그림 작품 전시는 우선 프랑스 국립박물관인 기메박물관에서 했고 이어서 니스 동양박물관에서 콜을 받아 진행하고 있다. 8월까지 3개월 동안 8만 명이 관람하는 등 성황을 이루었다. 르몽드 지는 ‘한국의 예술이 파리를 침략했다’라는 카피를 내놓으며 두 번이나 지면에 소개했다. 이 이사장은 예원실그림문화예술로 한국 예술의 위대함을 유럽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며 흡족해했다. “지난 9월에는 플뢰르 펠르랭 전 프랑스 문화부장관과 만났어요. 이분이 여섯 살 때 프랑스로 입양을 가서 프랑스 부모님 밑에서 프랑스 사람으로 자랐거든요. 우리나라에서도 대대적으로 소개됐던 사실이죠. 그런데 손 작가의 작품을 만나면서 자신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과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떻다는 걸 자각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예원실그림문화재단에 와서 작품을 보고는 계속 감탄하시더군요. 전통과 모던의 조화라고요.” 이사장이 추구하는 ‘헌법에 입각한 예술론’ 이사장 역할까지 하면서 실그림을 알리는 데 열정적으로 뛰고 있는 이유는 그가 지향하는 가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예술에 조예가 깊다고는 할 수 없고, 예술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총장을 끝내고 난 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을 하던 때가 있었어요. 결론은 나머지 인생을 대한민국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 바치겠다는 거였죠.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가치를 어떻게 높일까 또 고민하고 있는데 헌법재판소에서 만든 헌법 소책자가 눈에 띄었어요. 헌법을 지키는 게 대한민국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죠.” 그는 대한민국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근거를 헌법에서 찾았고, 그 텍스트에 입각해 자신을 설명했다. “헌법에 따르면, 국가가 성립되려면 주권, 국민, 영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입니다. 이는 통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죠. 그리고 해야 할 게 9조입니다.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제 남은 인생을 대한민국 헌법 가치 제고와 통일, 문화가치 창달에 투신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러니 예원의 작품들을 보고 내 나머지 인생을 위한 이사장직을 흔쾌히 수락할 수 있었던 거죠.” 실그림에 담긴 민족문화 창달 기자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이라는 빨간색 소형 책자. 그는 기자에게 헌법 제9조와 69조를 읽어보라고 했다. “9조에는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는 내용이 있고, 69조는 대통령 취임 선서문인데, 여기에도 대통령으로서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한다’라고 적혀 있지요.” 현재에 만족하는 삶이 되기까지의 역사를 정리 중 이 이사장은 1945년생이다. 이제 70이 넘어가는 시니어로서 젊을 때보다 나은 점이 무엇이 있는지 물어봤다. “나이 들어서 좋은 점은 정년을 했기 때문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죠(웃음). 명예교수로서의 생활이 참 좋습니다. 시간을 내 마음대로 활용하는 게 가능하니까요. 시간이 있어 국선도를 배우기 시작해 건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주가였는데 이제는 반주 정도로 줄였어요,” 이 이사장은 최근 자신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그가 쓰면 손녀가 정리해주고 있다. 이 이사장으로서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기회이고, 손녀에게는 할아버지의 삶을 체험하는 독특한 경험일 것이다. “쓰면서 ‘초등학교, 중학교 때가 이렇게 잘 기억이 나네’ 하고 마누라한테 얘기하니까 마누라가 ‘당신이 술을 안 먹으니 머리가 맑아져서 그런 거잖아’라고 하더라고(웃음).” 이 이사장의 경력은 대부분의 사람이 부러워할 만큼 화려함을 자랑한다. 그런데 그 자신은 잘살아왔다고 생각할까? “아들 하나, 딸 하나인데 둘 다 시집 장가 잘 갔어요. 친손녀가 대학 3학년, 친손자가 대학 1학년, 외손주 중에 가장 큰 녀석이 대학 1학년이고 둘째가 고3, 셋째가 중3이죠. 제 처가 오십 될 적에 가족들 전부 모여 가족사진을 찍었는데, 이번에 칠순잔치 때 다시 모여 사진을 찍었어요. 그렇게 온 가족이 모여 즐거운 마음으로 찍으니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에게는 즐거운 일이 또 있었다. 올해 3월 1일, 그의 제자들 중에서 마흔 번째 교수가 탄생한 것이다. “학문을 하는 학자 입장에서 제자가 마흔 명이나 4년제 대학 교수로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목적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삶이라고 말하는 그는 확실히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사실 총장 재임 때보다 지금이 더 좋습니다. 그때 사진보다 지금 사진이(웃음) 다들 좋다고 그래요. 그때는 아침, 점심, 저녁 모두 시간에 쫓겼고 저녁에도 두세 군데 들러 인사해야 하고 그랬으니까. 지금은 자유를 느껴요.” 열심히 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스스로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이 이사장에게도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 대답은 천생 학자다웠다. “독일에서 공부할 때로 돌아가고 싶죠. 공부할 때가 가장 좋았어요. 가장 행복했고. 논문만 쓰면 되니까(웃음).” 그는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정리하는 일과 함께 진행하는 작업이 또 있다. 30년 동안 교수생활을 하면서 그의 제자들 중 조교가 스물일곱 명, 교수가 마흔 명이 나왔다. 그 제자들이 그와의 인연을 원고로 만들고 있다. 이제 제자들과의 인연을 정리한 원고는 책이 되어 그의 삶을 타인의 시선을 통해 회고하는 증거로 남게 될 것이다. “2010년 12월 30일은 제가 만으로 예순다섯 살 되던 날이었어요. 정년퇴임 논문집을 만들어 롯데호텔에서 기증식을 가졌는데 그때 말했어요. 내 인생 20년은 준비기간이었고, 45년은 고대 법대, 독일 박사, 회사법·공정거래법·지식재산권법·국제거래법 갖고 먹고 살았는데 예순다섯 살부터 45년간은 다른 나라들에서의 인연과 대한민국의 가치를 제고하면서 살겠다고. 그럼 110세예요. 그런데 왜 하필 110세냐. 고려대가 1905년에 만들어졌는데 2055년이 고려대 150주년이에요. 그해가 마침 제가 110세 되는 해고. 그래서 고려대 150주년이 되는 5월 5일에 17대 고대 총장을 한 사람으로서 축사하는 게 마지막 내 꿈이에요.” 그는 호탕하고 섬세한 사람이다. 사실 이 이사장과의 인터뷰 기사를 쓰면서 가장 쓰고 싶어 안달이 났던 내용은 그의 섬세한 친화력에 관한 것이다. 인터뷰 당일 약속시간보다 좀 늦었다. 자식뻘 되는 기자인데 늦어도 괜찮다며 마음씨 좋은 아저씨처럼 웃었다. 며느리에게도 이름을 불러주는 시아버지다.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가 110세까지 발굴에 나설 민족문화의 정수로서 마르지 않은 깊은 샘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깊은 연구와 후덕한 인품으로 기라성 같은 제자를 길러내고 학계에서 우뚝 섰던 그가 요즘 부단히 자신에 관한 기록물을 만들면서 스스로 정한 가치에 열렬히 투신하고 있다. 이런 이사장은 과연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을까? 그 대답은 단순했으나 여운이 길었다. “저는 전주 이씨 경남 하동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람들에게 ‘열심히 산 사람이다’라고 기억되고 싶어요.”
- 2016-11-0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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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성환의 똑똑한 은퇴] 중·장년들의 세 가지 오해
- 요즘 은퇴 강의를 할 때 빼놓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강의를 들을 때 다들 웃어넘기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찬바람이 부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바로 ‘우리나라 중·장년들의 세 가지 오해’ 때문이다. ‘나는 100세까지 못 살 거야, 내 자식은 다른 집 자식과 다를 거야, 내 배우자는 다른 배우자와 다를 거야’라는 생각은 오해 또는 착각일 수 있다. 위의 세 가지 오해가 정말 오해로만 끝난다면 이보다 더 행복한 인생도 없을 것이다. 80세를 건강하게 훌쩍 넘기고 자녀(손자 손녀 포함)들이 자주 찾아와 안부를 물어주고 배우자와 오순도순 살다 죽으면 더 이상 바랄 게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한두 가지 또는 세 가지 모두가 오해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100세까지 살지 못할 거라면서 허랑하게(?) 살다가 병들어 누워보라. 자식도 배우자도 없이 썰렁한 방에 혼자 누운 인생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일본에서 시작된 고독사(孤獨死)는 결코 남의 나라, 남의 일이 아니다. 어쩌면 중·장년들이 자주 하는 세 가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일 수도 있다. 그 오해들을 좀 더 살펴보자. 첫 번째, 나는 과연 100세가 되기 전에 죽을 것인가? 기대수명(期待壽命, 2014년 기준)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지만 평균 82.4세로 남자는 79.0세, 여자는 85.5세다. 혹자들은 그런데 왜 100세까지 살 거라고 협박(?)을 하냐고 따질 수 있다. 기대수명은 0세의 출생자가 향후 몇 년을 더 생존할 것인가를 통계적으로 추정한 기대치를 말한다. 같은 연장선상에서 60세 남자가 향후 몇 년을 더 생존할 것인가를 통계적으로 추정한 기대치는 기대여명(期待餘命)이다. 통계청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성별로 각 나이의 기대여명을 구할 수 있다. 60세의 기대여명은 몇 년일까. 남자는 22.4년, 여자는 27.4년이다.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평균적으로 보면 현재 60세의 남자는 앞으로 22.4년을 더 살다가 82.4세경에, 60세의 여자는 27.4년을 더 살다가 87.4세경에 생을 마감할 것이라는 얘기다. 현재 70세의 기대여명은 남자와 여자가 각각 14.5년과 18.3년이므로 남자는 84.5세, 여자는 88.3세까지 산다는 추정치다. 의학발전 등을 감안하면 앞으로 기대여명이 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60대 남자들은 85세 안팎까지, 60대 여자들은 90세 안팎까지 살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이 추산도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100세까지 사는 이들도 적잖을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5년 11월 현재 우리나라의 100세 이상 고령자는 3159명으로 남자가 428명, 여자가 2731명에 달하고 있다. 인구 5000만 명 중 3159명이면 그리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문제는 늘어나는 속도에 있다. 2010년의 1835명과 비교할 경우 5년 만에 1324명, 72.2%나 증가한 것이다. 이에 따라 인구 10만명당 100세 이상 고령자는 6.6명으로 2010년 3.8명에 비해 2.8명이나 늘어났다. 일본의 경우 100세 이상 인구가 6만5692명으로 인구 10만 명당 51.7명이나 된다. 일본 정부는 장수사회를 기념하는 취지로 1963년부터 100세 노인에게 기념 은잔을 선물해왔다. 당시만 해도 153명에 불과했던 100세 고령자가 53년이 지나면서 무려 420배로 늘어난 것이다. 작년까지 순은(純銀)으로 만든 잔을 선물했지만 올해부터는 도금한 은잔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2050년에는 100세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할 것이라는 추산이 나오는 가운데 은잔에 들어가는 예산을 감당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두 번째, 내 자식은 과연 다른 자식과 다를 것인가? 오해가 아니면 얼마나 좋을까. 효자 효녀를 둔 부모들은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복 받았다 생각하며 고마워하면서 살면 된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다. “이번에 얼마만 해주시면 부모님을 평생 잘 모시겠습니다.” 물론 이런 약속을 잘 지키고 부모를 잘 모시는 자식도 있다. 하지만 재산 다 털어주자 찾아오지도 않는 자식 때문에 후회하는 부모들도 적지 않다. 자식에 대해서라면 유난스러운 우리나라 부모들 아닌가. 최악은 재산을 다 넘겨준 부모도, 넘겨받은 자식도 생활이 어려운 경우다. 처음부터 부모에게 불효하고 싶은 자식은 없을 것이다.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불효자가 되는 것이다. 자식은 젊기라도 하지만 부모는 나이가 들어 회복 가능성이 전혀 없는 막다른 골목 앞 상황일 수 있다. 재산을 다 주고 나서 후회하는 기간이 이전처럼 10년 안팎이라면 그나마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30~40년 동안 가난 속에서 후회하며 살아야 한다. 세 번째, 내 배우자는 다른 배우자와 다를 것인가? 물론 믿고 사는 게 편하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생각해보자. 남편이 90세, 아내가 87세인데 남편이 병들어 눕게 되었다. 지금까지 남편에게 지극정성이었던 아내는 당연히 수발도 직접 들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87세의 여자가 90세 남자를 어떻게 돌볼 것인가? 마음이 있어도 신체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배우자를 끝까지 지켜주고 싶어도 현실적으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무리하다가는 건강한 아내가 먼저 세상을 뜰 수도 있다. 극단적인 사례라고 생각하겠지만 곧 중·장년들에게 다가올 미래임은 틀림없다. 이쯤에서 내려야 할 결론은 긴 말 필요 없이 ‘거안사위와 각자도생’이다. 거안사위(居安思危)는 ‘편안할 때 위기를 대비하라’는 뜻으로 유비무환(有備無患)과 같은 말이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은 제각기 살길을 찾으라는 말이다. 중·장년들은 이제 100세 인생을 예상하고 은퇴 후 60대, 70대, 80대, 90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계획해야 한다. 가족, 친구들과 어울리며 건강하고 재미있게 살려면 필자가 늘 강조하는 5F를 챙겨야 한다. 즉 ‘Finance(돈), Field(할 일), Friend(가족과 친구), Fun(재미), Fitness(건강)’를 연령대별로 설계하고 챙겨놔야 한다. 누구든 배우자 혹은 가까운 사람을 떠나보내고 혼자 남는다. 그게 인생이다. 오해와 착각은 자유이지만 그 결과는 내가 지고 가야 할 무거운 짐이다. 그래서 끝까지 믿어야 할 존재는 자식과 배우자가 아닌 내 자신인 것이다. ‘9988 234’라는 말이 있지만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3일 앓다가 세상 뜨는 일이 마음대로 될까. 내가 먼저 갈 때 혼자 남은 배우자가 끝까지 품위를 지키며 살다 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이다. 특히 남편이 아내보다 3~4세 정도 더 많을 때 남편이 가고 난 뒤에도 아내는 10년 정도 더 살아야 한다. 남아 있는 아내가 고충 없이 잘 살다가 뒤따라오도록 자산을 남겨둬야 하는 것이다. 이때 먹고 사는 것뿐 아니라 치료비와 간병비도 충분히 챙겨야 하는 것 잊지 마시라.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 2016-10-26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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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에게 행동으로 대답할 차례
- 얼마 전 유치원에 다녀오는 외손자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 “훌륭한 아빠·엄마가 사랑해 주시니 좋겠다.”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아빠·엄마가 무엇을 하는지 줄줄 말하면서 기분 좋아하였다. “그럼, 할아버지 할머니도 훌륭하지?”라고 너무 앞서고 말았다. “응, 그런데 할아버지는 무엇을 하시는 줄 모르겠어!” 뭔가 궁금한 것이 폭발하였다. 행동으로 대답하여야 할 차례가 되었다. 무엇을 하는가 딸 가족이 근무관계로 세종시로 이사한 지 한해가 되었다. 덕분에 아내와 교대로 가끔 그곳에 가서 유치원에서 하교하는 외손자를 마중한다. 오후 6시가 지나자 여느 때처럼 태권도학원 버스가 앞에 섰다. 손자 녀석이 반갑게 품에 안겼다. “왜 정장 입었어?” 할아버지의 평소와 다른 복장모습이 낯선 모양이었다. 이 녀석이 세 살이 되던 때 사회를 은퇴하였다. 할아버지의 모습은 간소복이나 운동복 차림을 대부분 기억할 터이다. “오늘은 정장 입고 자원봉사하였어!” 설명을 하였으나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오전에 창업 멘토 활동현장에서 정장 차림으로 찍었던 사진이 생각났다. “할아버지 무엇 하시는지 보여줄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진을 쳐다보았다. “알았어! 할아버지도 훌륭한 사람 맞아!” 비로소 손자에게 인정받는 것은 사진을 통한 실체 확인이었다. 아는 것이 무엇인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쌍둥이 손녀·손자는 학교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아파트에 산다. 아내와 함께 아이들의 어린이집·유치원 등원을 종종 도왔다. 목마가 되어 무등 태워주고 동화책을 재미있게 읽어 주었다. 씨름상대가 되어 넘어져 주기에 땀을 흘렸다. 하지만 초등학생이 된 올해부터 그것은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아이들이 책 일기를 좋아한다. 폭풍처럼 늘어나는 독서량에 따라 질문도 엄청 늘었다. 어느 누가 대답할 수 있겠는가? 넉 달 반 차이인 세 녀석이 모이면 어린이의 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자라면서 자기들의 세상이 더욱 넓어질 것이다. 아는 것이 궁색해진 할아버지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멀어질 터이다. 요사이 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치면서 체스를 배우고 있다. 늦기 전에 아이들과 이야기할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 말보다 행동으로 대답하라 가까이 사는 쌍둥이의 등교를 돕고, 세종시를 왕복하면서 외손자의 유치원 하교를 돕는 일이 매우 즐겁다. 어릴 적 조부모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회상하면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여야할까 많은 생각을 하였다. 아이들의 등하교 보살피는 일을 누가 하면 좋을까? 부모가 제일 좋겠지만 현실은 이를 감당하기 어렵다. 차선책으로 손주에 대한 사랑이 깊은 조부모가 맡는 것이 좋다. 조부모의 건강, 사는 집과의 거리 등 고려해야 할 문제점도 많다. 하지만 손주 보살핌이 조·손이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의 하나이다. 조부모의 건강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가족관계를 화목하게 하는 효과도 크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할아버지·할머니를 보고 배운다. 훈계하지 말고 솔선수범하여야 한다. 책 읽으라고 다그칠 필요가 없다. 조용히 책을 읽으면 된다. 조그만 잘못을 나무라지 말아야 한다. 칭찬을 자주하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더 따뜻한 가슴으로 몸소 실행을 보여라.
- 2016-10-24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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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느리가 고맙다
- 아들이 퇴근길에 아버지랑 술 한잔 하고 싶다고 전화를 해왔습니다. 시간과 장소는 필자더러 정하라고 합니다. 둘이 만나기 편한 장소와 시간을 정했습니다. 잠깐 생각해보니 며느리와 손자 손녀를 불러 내가 저녁을 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들네 집 가까운 전철역 쪽으로 갈 테니 식구들 모두 부르고 저녁 값은 필자가 내겠다고 역제안을 했습니다. 아들네는 여섯 살짜리 손녀와 네 살 손자, 두 살 손녀 등 모두 5명입니다. 전철역에 도착하니 아들이 필자를 마중 나와 기다립니다. 좀 있다가 며느리가 아이들 셋을 차에 태워 예약된 음식점 앞으로 옵니다. “할아버지~” 하고 먼저 큰손녀가 뛰어와 안깁니다. 뒤이어 네 살짜리 손자가 뛰어옵니다. 막내둥이 손녀는 뭔지도 모르고 제 엄마 품에 안겨 손뼉을 치며 “아빠, 아빠” 합니다. 한 번씩 안아주고 식당 안으로 들어갑니다. 메뉴는 며느리에게 일임합니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이 메뉴 선택도 잘하고 식당에 요구할 것도 당당히 말합니다. 역시 내 예측대로 아이들 의자를 달라 하고 아기 숟가락도 주문합니다. 필자 같으면 대충 아이들도 옆자리에 앉히고 어른 숟가락으로 먹도록 했을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라 밥 먹는 것은 뒷전이고 식당에 설치된 놀이터로 뛰어갑니다. 큰손녀가 뛰어가니 네 살 손자도 달려갑니다. 얼마 안 있어 손자의 울음소리가 납니다. 아이 아빠가 금방 자식의 울음소리를 알아듣고 뛰어갑니다. 손자는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면서 누가 자기를 밀어서 넘어졌다고 합니다. 달래면서 눈물을 닦아준 뒤 밥을 먹으라고 하니 몇 숟가락 먹다가 또 놀이터로 달려갑니다. 며느리는 연신 고기를 구워 필자 접시에 올려줍니다. 아이들 셋에게 밥 먹이랴 고기 굽느라 참 바쁩니다, 옆에서 아들도 고기 굽는 것을 거들면서 쌈으로 고기를 싸서 아내에게 줍니다. 우리 세대에는 부모님 앞에서 아내에게 고기쌈을 싸서 준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 느끼면서 그런 아들이 참 멋있어 보입니다. 손녀와 손자는 지긋이 한자리에 앉아서 밥을 먹지 않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유치원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재잘거립니다. 다 알아듣지 못해서 통역 겸 며느리가 대화에 끼어들어야 합니다. 그러다 또 뛰어 돌아다니고 이것저것 달라 하고 주면 안 먹는다고 하고 변덕이 죽 끓듯 합니다. 아이들의 그런 모습도 필자 눈에는 참 귀엽습니다. 마지막에 누룽지죽을 시켰는데 두 살짜리 손녀가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습니다. 손녀의 입맛에 맞나봅니다. 한 번 더 먹이겠다고 남은 것은 싸달라고 말하는 며느리가 대견합니다. 며느리는 현재 아이들 양육을 위해 육아휴직을 냈습니다. 첫째는 유치원에, 둘째는 유아원에도 보내고 발레 학원도 보냅니다. 병원에도 자주 가야 합니다. 혹처럼 붙어 있는 두 살짜리는 업고 동동걸음을 하기도 하고 승용차로 운전도 해야 합니다. 물론 아들이 적극 돕지만 아이의 양육은 대부분 엄마의 손이 필요합니다. 며느리가 참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도 아내의 손을 잡고 고맙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며느리가 카톡으로 항상 감사한 마음이라고 글을 보내옵니다. 필자도 고맙다고 답글을 달았습니다.
- 2016-10-21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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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가 될 자격이 있을까?
- 손녀가 태어난 지 6개월이 지났다. 남들은 손녀 보고 싶어 자주 가는 줄 안다. 그러나 동네도 좀 멀고 자주 가는 것이 아기에게 좋을 것 같지 않아 자제하다 보니 등한시 하게 된 것이다. 태어났을 때 병원에서 보고 그 다음 산후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 왔을 때 가본 것이 전부였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아기는 대개 비슷하고 아직 소통이 안 되니 그냥 보기만 할 뿐이라 별다른 생각은 안 들었다. 남들은 손주가 태어나면 귀엽다며 손주 자랑에 열을 올리는데 나는 아기에 대한 정이 없는 편이다. 아들딸이 고만할 때 나는 중동에 나가 있는 바람에 아기에 대한 정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아들이 사는 사당동 근처에 갈 일이 있었다. 산행을 하고 뒤풀이로 저녁도 먹었고 술도 거나해서 바로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 무심한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까봐 아들에게 연락을 했다. 마침 집에 있다고 했다. 동네가 주택가라서 그런지 가게가 안 보였다. 제 철 과일이나 사려고 했었다. 편의점은 있는데 마땅히 사들고 갈 것도 없어 또 만만한 화장지 한 뭉치를 사 들고 갔다. 그리고 아들과 마실 막걸리 두 병을 사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손녀가 앉아 있었다. 늘 보던 바퀴보행기가 아니고 바퀴 없는 보행기 같이 생겼다. 정면으로 나를 보고 있는데 카메라를 들이 대니 금방 울상이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통한 순간이다. 내내 누워 있다가 오늘부터 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검은 색 재킷을 입었으니 무섭게 느껴졌을 것이다. 여자들은 자주 드나들었으나 남자는 내가 처음 이라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개를 좋아하는데 어느 별장에 갔을 때 그 집 개가 나를 문 적이 있다. 개가 임신 중이라 예민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그보다는 내가 어두운 색 옷을 입고 정문이 아닌 계곡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경계심으로 그랬다고 추측해본다. 경험상 개들은 복장을 보고 사람을 차별한다. 우편배달부나 청소하는 사람에게는 짖지만 하얀 드레스셔츠에 정장을 한 사람에게는 짖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손녀가 느낀 할아버지의 이미지는 어두운 색 옷을 입고 나이 들어 무섭게 생긴 남자였던 것이다. 거기에 막걸리를 마셔 술 냄새가 풍풍 나니 그걸 할아버지 냄새로 기억할 것이다. 장차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기회는 많겠지만, 일단은 그런 모습으로 상면한 셈이다. 요즘 다행히 전처가 일주일 간격으로 드나든단다. 퇴직 하고 나서 할 일도 없던 차에 귀여운 손주 보러 오기도 하고 육아 경험도 들려준단다. 두 자녀 키울 때 맞벌이를 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다. 처음엔 동네 할머니들에게 맡겼으나 할머니들은 책임감이 크지 않아 늘 노심초사했다. 출근할 시간은 되었는데 할머니가 사정이 있어 못 온다고 하면 발만 동동 굴렀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나마 어느 해 겨울인가 유난히 추워서 고령의 할머니들이 돌아가셨다. 새로 사람을 구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회사 일에 바빠 어떻게 해결했는지 조차 모른다. 그때의 애로를 생각하고 며느리가 출산휴가를 마치고 곧 출근하게 되면 손주를 돌봐준단다. 다행이다. 무엇보다 아기가 좋아할 복장부터 표정, 말씨를 어느정도 다듬어야겠다. 할아버지가 되려면 일정한 훈련을 통해 자격을 갖춰야 하지 싶다.
- 2016-10-17 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