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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직업] “방 내어주고, 마음 얻어보세요”
- 부동산은 시니어들에게 늘 골칫거리다. 자녀들이 출가하고 나면 둘만 덩그러니 살기에는 너무 큰 집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평생을 피땀 흘려 마련한 재산인데 주택연금으로 은행에 넘겨주자니 아이들에게 죄 짓는 기분이 억누른다. 방을 세놔도 되지만, 낯선 사람과 한집에서 산다는 것이 영 부담스럽다. 이런 고민을 갖는 시니어들에게 최근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빈방을 활용해 바로 관광객들에게 방을 빌려주는 숙박공유서비스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숙박공유는 최근 각광받고 있는 공유경제 중 가장 대표적인 서비스로 꼽힌다. 말 그대로 집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돈을 받는 숙박업의 일종이지만, 내 집을 내어준다는 점에서 일반 숙박업과는 조금 다르다. 최근의 숙박공유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기반이 됐다. 집주인과 고객이 스마트폰을 통해 정보나 의견을 나누고 결재까지 그 안에서 이뤄진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손님이 돌아간 뒤에는 후기나 안부를 주고받기도 한다. 국내법 테두리 안에서는 외국인 관광 도시민박법으로 분류된다. 집을 빌려주는 대상이 외국인이어야 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물론 농어촌 지역의 민박사업이나 펜션 등과 같이 숙박업으로 지정된 숙소들은 내국인 고객 유치에 문제가 없으며 숙박공유 참여가 가능하다. 정부는 규제프리존 특별법으로 올 하반기부터 부산·강원·제주를 시작으로 도시민박업의 내국인 대상의 영업허가를 추진했지만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이런 숙박공유에 참여할 수 있는 기관이나 기업은 많지만, 에어비앤비(Airbnb)라는 기업을 빼놓고 숙박공유를 말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게 됐다. 에어비앤비는 2007년 설립된 미국 기업으로, 급성장을 거듭해 190개 이상의 국가에서 150만개의 숙소를 운영하고 있는 거대 숙박공유 플랫폼이다. 국내에서도 이제는 업계 표준으로 인정받아 각종 교육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시니어 대상 숙박공유 설명회 늘어 숙박공유서비스가 시니어들의 ‘제2직업’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하다. 시니어들의 요구와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내에서 활동하는 50세 이상의 시니어 호스트 숫자는 1500명에 육박한다. 에어비앤비코리아의 전현준 팀장은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의 모습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해외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어비앤비의 호스트 중에 시니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부동산을 기반으로 한 서비스이기 때문이죠. 남는 방을 활용하면서 고정 수입을 얻을 수 있으니 시니어들에겐 딱 맞는 서비스라고 생각합니다. 국내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지만 해외 시니어 호스트들 역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산층들이 많이 참여합니다. 이들은 집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얻는 인적 교류에 관심이 많아요.” 최근 국내에서는 시니어들 대상의 숙박공유 설명회가 속속 열리고 있다. 서울시 송파구는 지난 6월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외국인 관광 도시민박업 창업설명회를 개최했다. 해운대 여성인력개발센터도 지난해부터 도시민박 일자리 창출 사업을 진행 중인데, 참여자들의 상당수가 시니어들이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도 시니어를 위한 숙박공유 교육에 뛰어들었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은 지난 5월 에어비앤비코리아와 업무 협약을 맺고, 지난 8월 첫 번째 ‘시니어 호스팅’ 교육을 진행했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이광렬 대리는 참석자들의 반응이 좋아 전국적으로 확대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호스트 중에 60세 이상이 세계적으로 10%나 된다고 알려졌습니다. 숙박공유에서 시니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는 의미죠. 지난 8월 시범사업으로 교육을 실시했는데, 만족도가 높아 내년에는 전국적으로 교육을 확대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시니어들이 이메일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는 기본적인 IT 상식은 있어야 하고, 도시민박업, 사업자등록 등 행정적 절차가 뒤따른다는 점이 넘어야 할 숙제입니다.” 행정적 절차 걸림돌 되기도 에어비앤비에서 숙박공유서비스를 시작하는 것은 간단하다. PC나 모바일 기기를 통해 호스트 등록을 하고 손님을 받으면 된다. 자신과 집, 동네에 대한 소개와 사진을 게재하고 본인 인증을 받으면 호스트 등록이 된다. 이때 숙박비와 입금 방법 등을 설정해야 한다. 물론 영업 대상이 외국인이기 때문에 집 소개와 관광객과의 대화는 영어 등 외국어로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 에어비앤비코리아의 전현준 팀장은 “처음에 몇 번 손님을 상대하다 보면 연세가 있는 호스트들도 어렵지 않게 적응합니다. 외국인과 대화가 어려우신 분들은 자녀들의 힘을 빌리면 어렵지 않게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자녀들과 이런 일종의 동업을 하다 보니 유대관계가 더 좋아졌다고 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아요”라고 설명했다. 숙박공유서비스에 뛰어드는 호스트들에게 가장 큰 난관 중 하나는 도시민박업이다. 아직 대중적으로 활성화되지 않은 사업 분야이다 보니 각 지자체마다 조례나 운영 방식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만 하더라도 송파구같이 지자체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강남구나 서초구의 경우에는 허가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일부 지자체에선 아파트에서 도시민박업을 할 경우 동 전체 주민에게 동의서를 요구하는 등의 무리한 조건을 내걸기도 한다. 주변 주민과 경쟁 관계인 숙박업소 등의 민원이 골치 아픈 게 그 이유다. 서울 지역의 한 호스트는 “숙박공유서비스를 활용하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일부 관광객들의 무례한 모습이 주민들과 마찰을 빚어 민원이 증가했고, 이런 민원 증가는 지자체가 도시민박업 허가를 까다롭게 하는 데 한몫했다”고 설명했다. 수익만 좇다간 스트레스만 그렇다면 수입은 얼마나 될까? 당연히 집에 따라, 위치에 따라, 내부 장식이나 부가서비스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가격은 호스트가 정하는 것이니까 정하기 나름이지만, 주변 경쟁 호스트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싸면 손님이 찾을 리 만무하다. 만약 시세(?)가 궁금하다면 에어비앤비 웹사이트에서 비슷한 지역과 형태의 숙소를 바탕으로 한 예상 금액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울시 양천구 목동에서 개인실 하나로 고객 한 명을 대상으로 영업한다면 예상 주간 수입은 12만9029원이라고 에어비앤비는 설명한다. 현직 호스트들은 수익만을 목적으로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가는 제풀에 지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숙박공유가 수익이 나는 사업인 것은 분명하지만, 경제적 소득 이외의 보람을 찾아야 즐겁게 운영을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집을 고스란히 남에게 보여주고, 내어주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일이 아니라 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열린 마음으로 고객들을 맞을 수 있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 2016-10-21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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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성환의 똑똑한 은퇴] 주택연금과 부모님 생활비
- 요즘 40~50대의 고민은 말 그대로 3중고(三重苦)라고 할 수 있다. 자녀들의 교육비가 만만찮은 가운데 부모님의 생활비 또는 용돈까지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나와 배우자의 노후까지 준비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40~50대, 심지어 60대까지도 3세대, 즉 3G(generation) 은퇴설계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나와 배우자만 챙기면 되는 선진국의 1G(generation) 은퇴설계와 비교할 경우 심적·물적 부담이 훨씬 더 클 수밖에 없는 게 한국적 상황이다. 그런데 내 자녀의 교육비는 나만의 문제여서 형편대로 줄이고 늘릴 수 있는 있는 여지가 있다. 반면 부모님에게 드리는 생활비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형제들이 모두 관련된 것이라 갈등의 소지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형제간에 사는 정도는 물론 자녀의 수, 사는 지역 등에서 적지 않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형제애가 돈독한 가운데 형편이 좋은 형제나 장남 등 누가 나서서 부모님을 보살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세상 일이 다 좋게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간의 차이를 따지고 들면서 혜택을 많이 받은 형제가 부모님 생활비를 더 내야 한다고 나서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대학원에다 유학까지 부모님께서 보태주셨으니 그런 형제가 부모님 생활비도 더 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또 뭐 하나 더 받은 것도 없는데 장남이니까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수도 있다. 필자가 직접 상담을 받은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A씨는 40대 후반으로 대기업 부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형제가 장남인 자신을 포함해 3명(2남 1녀)이어서 매월 50만원씩 150만원을 생활비로 부모님께 드렸다. 그러다가 남동생이 아이들 학원비가 많이 들어가서 1년을 봐 달라는 바람에 자신이 내야 하는 부모님 생활비가 100만원으로 늘어났다. 좀 있다가 여동생도 형편이 어렵다는 바람에 요즘 월 150만원을 혼자 부담하고 있다. 처음에는 1년만 봐 달라던 동생들이 1년이 지나도 돈을 낼 생각을 않고 있었다. 자신은 자식으로서 어쩔 수 없다지만 아내에게 면목이 안 서는 게 더 어렵다고 했다. 40대의 월급쟁이에게서 부모님 생활비로 월 150만원이 나간다고 해 보라. 당연히 생활이 쪼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모님은 누가 모시고 사느냐?”고 물었더니 부모님은 따로 사신다고 했다. “그럼 그 집은 누구 명의고 실제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냐?”고 했더니 부모님 명의로 되어 있고 부모님이 평생 벌어서 남은 유일한 재산이라고 했다. 가지고 있던 현금과 예금 등은 자식들이 결혼할 때 나눠서 다 물려주고 그 집 하나만 남은 것이라고 했다. 대부분 우리 시대의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예금 등 금융자산은 물론 가지고 있던 금 목걸이 등도 다 넘기거나 팔아서 준 다음 달랑 집 한 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60대 이상 가구의 가계자산 구성(2015년 통계청)을 보면 총자산 3억 6042만원 중 78.4%에 해당하는 2억 8259만원이 거주하고 있는 집 등 부동산이다. 반면 예금 등 금융자산은 6502만원으로 18%에 불과하다. 더욱이 60대의 부채가 4785만원에 달하고 있어서 당장에 갚지 않아도 되는 부채도 있겠지만 금융자산 중 부채를 빼고 나면 실제로 사용 가능한 현금과 예금은 1717만원 정도에 불과하다. A씨에게 부모님이 살고 있는 집이 어느 정도 하냐고 물었더니 시가가 무려 8억원이 넘는다고 했다. 그 비싼 집을 깔고 유지하기 위해 부모님들이 40대의 자녀 3명으로부터 생활비를 받아서 근근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자녀들은 부모님께 드리는 생활비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을 뿐 아니라 형제간의 우애마저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필자는 주택연금을 소개하면서 부모님과 자녀(배우자 포함)들이 모두 함께 모여 가족회의를 열라고 권했다. 부모님의 집을 주택연금에 가입해 매월 308만원(부모님의 연령 75세, 1억원 당 매월 39만4000원 수급)을 받아 그 돈으로 부모님이 편안하게 살자는 데 가족 모두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순 서는 자녀들과 그 배우자들이 모여서 합의를 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서 동의를 얻는 것이다. 일부 부모님들의 경우 이 집이라도 물려줘야지 하면서 반대를 하거나 자녀들이 이 집이라도 물려주셔야지 하면서 반대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A씨는 부모님과 형제들이 모두 동의해서 주택연금에 가입할 수 있었다. 매월 50만원을 못 내는 형제들 입장에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부모님 입장에서는 자녀들의 어려움을 덜어 주기 위해서라도 주택연금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후문(後聞). 한참 지난 후 A씨를 만났더니 가족의 은인이라면서 고마워했다. 갈등의 소지가 보였던 가족(형제)관계가 완전히 회복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자녀들로부터 월 150만원을 받아 쪼들리며 살던 부모님께서 308만원을 받으면서부터는 자녀와 며느리, 손자와 손녀들에게 후해지면서 그간 소원했던 부모님 댁의 문턱이 닳아 없어질 정도라면서 즐거워했다. A씨의 경우 상당히 고가의 주택이어서 매우 다행한 경우였지만 좀 작은 규모의 집이라도 주택연금은 주거 안정과 생활비를 상당 부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 또한 부모님 두 분 중 남은 한 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현재 사는 집에서 연금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두 분 부모님께서 남들보다 좀 일찍 돌아가시면 정산 후 남은 부분은 상속을 받을 수 있다. 주택연금은 60세 이상 고령층이 보유한 주택을 담보로 매달 연금을 받는 상품이다. 본인 또는 배우자가 만 60세 이상이면서 주택가격이 9억원 이하이면 가입할 수 있다. 얼마 전까지는 주택연금 가입 시 일시 인출 한도가 연금 지급 총액의 50%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택담보 대출금을 갚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4월부터는 일시 인출 한도를 70%로 대폭 확대하였기 때문에 대출금이 많은 경우에도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 MIT의 로버트 머튼 교수는 ‘한국의 주택연금은 은퇴자들에게 축복’이라고 극찬하면서 “주택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기보다는 노후소득을 창출하는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집 한 채 달랑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은퇴자들에게 이보다 더 훌륭한 권고는 없을 것 같다.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 2016-09-28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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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동 변호사의 이혼과 법률] 급증하는 사실혼, 쟁점도 많다
- 사실혼 배우자는 상대방이 자살하는 경우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할까? 그리고 사실혼 배우자가 의식불명인 상태에서 사실혼을 해소하는 경우 재산분할 청구를 할 수 있을까? 사례 1 60대 여성 A는 B와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B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A는 B가 갑자기 자살한 것은 악의(惡意)의 유기(遺棄)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면서 B의 상속인인 B의 자녀들을 상대로 사실혼 부당 파기를 이유로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였다. A의 청구는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사례 2 70대 여성 C는 D와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D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였고 의식불명 상태에 있었다. C는 D가 의식불명 상태에 있는 동안 사실혼 관계의 해소를 요구하면서 D를 상대로 재산분할 청구를 하였다. 그 후 D는 사망하였고, 소송은 D의 상속인들이 계속하였다. D의 재산분할 청구는 인정될까? 사실혼은 젊은 층보다는 노년층에서 더 문제가 되는 현상이다. 함께 살면서 부모를 봉양하는 자녀가 줄어들고 혼자 살기 원하는 부모세대가 늘어나면서 외로운 노인들이 결혼은 하지 않은 채 함께 사는 경우가 많아졌다. 자녀들이 싫어하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노인들의 사실혼은 인정받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다만 법은 일정한 범위에서 사실혼을 보호하고 있다. 사실혼 부당파기로 인한 손해배상의 인정, 재산분할 청구권의 인정 등이 그런 경우다. 법률혼의 경우에만 보호되는 것이 있는데 상속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공무원연금법, 군인연금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 등에서도 법률혼 배우자와 동등하게 사실혼 배우자도 연금 수령권자로 인정해 주고 있다. 또한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사실혼 배우자를 보호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사례 1의 경우 법률적인 측면에서는 B의 갑작스러운 자살이 A와의 사실혼을 부당하게 파기한 것이 되느냐가 문제이다. A가 소송을 제기한 배경으로는 B가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정신적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하였기 때문이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A의 청구에 대해 법원은 ‘사실혼 관계에 있는 부부 일방이 자살한 것을 가지고 다른 일방이 악의적으로 유기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이유로 A의 청구를 기각했다. 따라서 A의 청구는 인용되지 않는다. 사례2의 경우 의식이 없는 D가 C와의 사실혼 관계에 대한 의사 표시를 할 수 없는 경우에도 C의 의사 표시만으로 사실혼이 해소되는지가 법률적 쟁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1심과 2심은 D의 의사를 중요시하여 C와 D의 사실혼은 D의 사망에 의해 해소되었다고 보았고, C의 재산분할 청구를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그런데 대법원은 당사자 일방의 의사 표시에 의해서도 사실혼 관계는 해소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D가 사망하기 전에 C가 사실혼 해소의 의사 표시를 한 것으로 사실혼은 해소되었다고 판단하였다. 결론적으로 대법원은 C의 재산분할 청구를 인정하였다. (대법원 2009.2.9. 자 2008스105 결정 참조)
- 2016-09-08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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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
- 나는 1952년 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한 시골 마을 방앗간 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아들만 여섯인 아들 부자 집이다. 원래 어머니는 아들만 일곱을 나으셨는데 첫 째는 돌도 못 넘기고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집안의 귀한 첫 아들로 태어난 나는 태어난 후 사흘 동안 눈을 뜨지 않아 부모님의 애를 태웠고, 어릴 때 비행기만 떠도 놀라서 경기가 드는 아이였다고 한다. 우리형제들은 모두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일 년 씩 어리게 되어있다. 돌까지 살아남으면 호적에 올려주었다. 아마 첫째를 돌전에 잃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덕분에 나는 퇴직 시 명퇴금을 1년 치나 더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고향 마을에서 한집 사이를 두고 결혼을 하셨는데 그 중간 집에 사시는 분이 중매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동네에서 잉꼬부부로 소문난 금슬이 좋으신 분이셨다. 아버님은 엄격하시고 강직한 분이셨다. 반면 어머님은 따뜻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아들들을 한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시고 보듬어 주신분이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집안의 유일한 여자 분인 어머님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은 돌아가신 지가 15년이 지났지만 모이면 어머니 애기를 자주하고 다섯째는 대기업의 임원이지만 술 한 잔 되면 보고 싶다고 울곤 한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지극하셨다. 손자들이 많았기에 우리는 돌만 지나면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잤다. 할아버지는 손자들 이불을 덮어주시고 음식도 챙겨주셨다. 손자들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친구 분들이 오실 때면 언제나 불러 인사를 시키셨다. 우리형제들은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 형제들 모두가 급장을 다 하던 때라 자랑이 대단하셨다. 내가 나중에 취직이 되어 첫 월급을 새 돈으로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그 돈을 보관하고 계셨던 분이다. 우리 할머니는 연약하신 분이지만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할머니 등에 업혀 자랐다. 낳아주신 분은 어머니이고 키워주신 분은 할머니이다. 할머니 등은 손자들의 코 때가 지워지는 날이 없었다. 서울에서 방학 때 내려가면 맨발로 뛰어 나오시던 분이다. 나는 첫 손자로서 조부모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자랐다. 우리 집의 가훈은 우애(友愛)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어릴 때 귀가 닿도록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다. ‘조선팔도 다 다녀도 형제같이 화합할까’ 할아버지께서 항상 우리에게 하시던 말씀이다. 우리 형제들은 이 말씀을 어머님 돌아가신 15주기 때 고향 우리 집 정원에 비석으로 새겼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모범생 이었다. 한 학년에 두 반인 작은 시골 학교였지만 나는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6년간 급장을 했고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부모님도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소먹이기, 풀베기, 나무하기 등 집안일도 잘 도와드렸고 어머니가 가지 오이 등을 장에 갖다 팔아야 할 때는 리어카에 실어다 드리는 착한 아들이었다. 나는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가 청와대 담을 넘어 공격하던 해 서울 경기상업고등학교로 유학을 왔다. 경기상고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하지만 우수한 아이들이 많았다. 청운중학교와 같은 교정이어서 청운 중학교 출신도 많았다. 고향 초계중학교에서는 서울로 두 명이 유학을 왔는데, 친구는 배제고등학교를 가고 난 경기상고에 입학했다. 친구는 고모 집에서 다니고 나는 삼촌 집에서 다녔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나는 은행원이 되었고 친구는 고대의대를 나와 강릉의 유명한 외과의사가 되었다. 경기상고는 일제 강점기에는 경기도립상업고등학교로 도상이라 불렸던 학교로 일제 때부터 훌륭한 선배들이 많았다. 당시 정·재계에는 태완선 총리, 김종희 한국화약 회장님 등을 비롯한 분들이 포진해계셨고 특히 금융권에는 임원들이 많았다. 내가 경기상고를 선택한 것도 유연이다. 아버지와 서울에 올라와 어떤 학교를 가야할지 고심할 때 삼촌 이웃에 양정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퇴직한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도상을 추천해주셨다. 아버님은 대구상고를 나와 제일은행에 취직한 고향의 내 친구 형으로부터 ‘은행에 취직을 하니 당장 선생님의 월급보다 많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들을 은행에 취직시키고 싶어 하셨다. 양정고 퇴직 선생님은 상고 중에는 도상이 최고라며 당장 도상을 추천해 연희동에서 청운동까지 버스를 갈아타면서 먼 길을 삼년을 다녔다. 상고에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은 인문계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같았다. 매년 어느 은행에 몇 명이 합격했는지 통계를 내고 홍보하던 때였다. 우리학교는 한 학년이 7개 반으로 6개 반이 취직반이고 마지막 7반이 진학 반이었다. 취업반은 은행 취직을 위한 전략을 세워 공부했다.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은 한국은행, 산업은행, 외환은행 순으로 가고 다음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 등을 갔다. 나는 신설된 한국신탁은행을 지원 했다. 신설된 은행이 향후 전망이 나을 거라고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다. 그해 경쟁률이 높아 우리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해 두 명 만이 합격했다. 대졸 중견 30명, 상고 졸 초급 60명을 모집했는데, 대졸 중견은 서울 대 출신이 반이 넘고, 나머지는 연대, 고대 등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 전부였다. 71년 당시는 지금처럼 삼성, 현대, 엘지 같은 대기업이 성장하기 이전 이어서 공무원, 한전, 은행 등으로 인재들이 몰리던 시기였다. 그 당시 은행의 대우는 좋았다. 복지제도가 좋고 각종 수당이 수시로 나왔다. 그러나 입행을 하고나니 아무래도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야간 학부에 시험을 봐 합격했다. 그러나 말단 직원이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는 것이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이듬해 야간 전문대학인 서대문에 위치한 국제대학을 지원 해 입학했다. 이 학교는 야간만 있는 대학으로 저녁 6시에 수업을 시작해 그 당시 인기가 있었다. 나는 경영학과에 입학했는데 정원이 30명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 상고출신이 많았다. 적은 인원의 대학이지만 그 당시 매년 사법, 행정고시, 공인 회계사 등의 합격자들을 배출했던 시기이다. 내 친구도 산업은행에 다니면서 공인회계사 전국 수석 합격했다. 그때는 그야 말로 주경야독을 했던 시기이다. 은행의 업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동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만 했다. 상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저녁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라면으로 때우기가 일수였다. 4년을 그렇게 생활하니 위장병이 생길 것 같았다. 토요일도 근무하던 때라 일요일은 도서관에서 공부해야했다. 그래서 나의 이 시기는 다른 애들처럼 취미생활을 하거나 연애를 할 틈이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큰 짐이 있었다. 둘째 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중대 앞에서 자취를 하면서 같이 공부했다. 얼마 후에는 막내를 제외한 세 명의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 동생들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학비와 쌀을 올려 보내주시지만 아들들이 공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에 나는 힘을 보텔 수밖에 없었다. 나는 75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군에 입대를 했다. 나 혼자 만의 일이라면 대학 2학년 정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좋겠지만 동생들을 남겨놓고 입대할 수가 없어 4학년을 마치고 친구들이 다 제대를 할 즈음 입대를 해야만 했다. 내가 입대를 해도 은행은 본봉의 월급이 나오는 때라 그 돈으로 동생들은 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이야기 한다. 동생들이 형의 월급을 받으려 은행에 갔던 시절을… 둘째 동생은 중앙대 법대에 나왔다. 졸업 후 삼성생명에 입사해 항상 전국에서 일등의 업적을 내는 유능한 직원이 되었다. 신한생명 초기에 스카우트되어 신한그룹 최연소 임원이 되어 부사장 까지 승진해 8년이나 임원생활을 하고 지금도 퇴직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 때 동양중학교 학생으로 다니던 다섯째 동생은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와 지금은 롯데 칠성의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필리핀 펩시콜라 사장을 5년 동안 역임했고 우리 동생 중 아직도 떠오르는 별이다. 나머지 두 동생도 대구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다. 힘든 시기를 넘겨 좋은 결과가 있어 보람은 있는 일이었다. 79년 제대를 앞두고 아버지의 권유로 첫선을 보았다. 휴가 중 서울의 작은 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는데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평생의 배필을 선택 했는지 신기하다. 서로의 가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부모님께서 미리 선을 봐 합격점을 준 상태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면장님의 둘째 딸이라 자라면서 큰 힘든 일은 해본 적 없이 곱게 자란 규수였다. 그 당시 나는 장남으로서 결혼 후에도 동생들을 데리고 있어야 할 형편이어서 아내를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나를 따르는 여자도 있었고, 은행에서 자취집에까지 찾아온 여자도 있었지만 결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79년 6월 제대를 하고 11월에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장남이라 전통혼례식을 올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신부 집에서 아내는 족두리를 쓰고, 난 사모관대를 쓰고 혼례를 올렸다.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멍석을 펴놓고 상위에는 살아있는 닭이 퍼덕 거렸다. 첫날밤은 신부 집에서 보내기로 하는데, 그 날 밤 신랑을 짓궂게 장난을 거는 사람 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나와 아내는 저녁에 해인사로 피신하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밤중에 택시를 타고 해인사로 향하던 신혼 여행길에 노루가 튀어 나와 놀라던 추억이 새롭다. 내가 아내를 단한번의 선을 보고 선택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내 일생의 가장 잘 한 선택이었다. 아내는 검소하고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지금 형제들이 성공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은 대부분 아내의 공로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을 꼽으라면 신혼초기 아내가 힘들 때 너무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이들 키우기 힘들 때 연탄불 한번 갈아준 적이 없고, 아이들 한번 제대로 봐준 적이 없다. 아내는 밤중에 아이가 깨어 울면 남편 잠 못 자 직장생활에 지장을 줄 까봐 아이를 다른 방으로 대려나가 밤새 혼자 방을 새우곤 했다. 아내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오직 나를 위해 정성을 쏟은 그런 여자였다. 그 당시에는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은행에 입행해 퇴직을 하기까지 만 38년을 다녔다. 지나고 보니 나는 직장 운은 좋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은행이란 직장은 안정되고 복지가 훌륭하고 좋은 직장이었다. 아이들 대학까지 등록금을 주고 집을 마련하도록 사원주택 아파트를 주고, 월급날 하루도 늦은 적이 없고 지점장 시절 억대가 넘는 연봉에 퇴직금도 적지 않은 직장이다. 재직 시에도 지점장 명함이면 누구나 신뢰하고 인정을 해주는 곳이다. 나는 초년 시절부터 성실했고 열심히 노력했다. 언제나 상사의 인정을 받았고 지점에서 언제나 대부계 같은 요직을 담당했다. 자기계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88년에는 해외 OJT연수를 미국 시애틀 은행으로 다녀왔다. 그 후 은행의 중요 부서인 종합기획부에 과장으로 근무하고, 카드 사업부, 개인금융부 등에서 차장으로 근무했다. 1998년 지점장으로 나갈 때 까지 황금기의 시절을 보냈다. 카드사업부에 근무할 때는 해외여행의 기회가 많았다. 일본 JCB카드사, 미국 비자사, 마스터 카드사, 유럽 유로페이 등 카드사를 매년 연수를 다니면서 여행할 수 있었다. 특히 시애틀 연수 후 미주, 유럽, 하와이, 동남아, 핀란드, 스페인, 지중해 해협 등 유럽 전역을 장기간 여행한 경험은 좋은 기회였다. 은행 승진도 남보다 늦지 않게 진급했다. 지점장 진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IMF 덕분에 빨랐다. 선배들이 명퇴를 하고 서울은행, 제일은 행이 매스컴에서 회자될 때 오히려 해택을 보았던 셈이다. 하나은행과의 합병 시에도 많은 직원이 퇴직을 했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십년이 넘도록 지점장 생활을 하고 임금피크제 까지 일 년을 하고 퇴직할 수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은행원의 천수를 다한 셈이다. 지점장 생활은 10년 동안 시흥남, 관양동, 수원, 서빙고, 부천, 성남 등 6개 점포를 거쳤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점포는 처음으로 부임한 석수역 앞에 위치한 시흥남지점 이다. 첫 지점장 발령을 받고 휴일 혼자 점포를 찾아가 어떤 전략을 구사할 것인가 많이 고심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내는 많은 걱정을 했다. 사교성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 점포영업을 잘 할 수 있을 까 걱정을 많이 해, 지점장으로 승진을 했는데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듯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점 실적이 부진하여 평가에 하위 성적을 받으면 명퇴의 우선대상자가 되어 퇴사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예상외로 난 지점장으로서의 점포경영을 십년이상 훌륭히 잘 수행했다. 내가 부임한 점포는 전임 점포장이 실적 부진으로 불명예 퇴진한 곳이 많았지만 나는 훌륭히 점포를 잘 부활시켰다. 나는 점포 경영의 핵심은 직원들의 관리와 경영 전략에 있다고 믿는다. 점포장의 철학과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그 핵심은 사람의 관리에 있다고 확신한다. 2009년 1월 은행을 퇴직했다. 재직 시에 시간이 없어 못했던 골프를 학교친구들이나 동생들과 같이할 수 있어 좋았다. 5월에는 홀인원을 하는 행운도 누렸다. 양재천과 대공원을 몇 년을 걸으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퇴직 1년 전에 과천어울림 남성합창단에 입단했다. 매주 화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연습해서 매년 연말에 시민회관에서 정기공연을 한다. 벌써 정기 공연을 일곱 번을 넘겼다. 7년이 지난 셈이다. 단원이 30명이 넘어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알게 되었다. 플루트는 퇴직 후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아들결혼식 때 연주하고 퇴직직원 모임 등에서도 연주했다. 지금은 동호회를 만들어 매주 목요일 부림동 문회센터에서 연습하고 레슨도 받는다. 퇴직 후 5년을 쉬고 나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4년 새로운 준비를 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유통관리사를 3개월 동안 과천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해 합격을 했다. 그리고 경영지도사 공부를 시작해 지난해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호서대글로벌창업대학원에 입학해 이제 졸업을 위해 논문 준비 중이다 2014년에는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에서 시니어플래너 과정을 공부하고 같이 공부한 동료들 5명이 KSP교육협동조합을 만들고 나는 이사장직을 맡았다. 다음해는 도심권이모작센터의 열린강사에 선정되어 평생 처음 강사로서 강의를 3차례 해보았다. 2015년에는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과정을 공부하고 시니어블로거협회에 참여하게 되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머니투데이 방송에 시니어 악기배우기라는 주제로 방송에도 출연했다. KBS 시니어토크쇼 ‘황금연못’의 패널로도 출연하고 한겨레신문 시니어통신에 기고도 했다. 2016년 3월에는 공무원연금공단 미래설계교육 여가 주거부문 강사로 선정되었다. 매달 2회 제주, 설악산, 수안보, 천안 등에서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원 동문들과는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24명의 동문들이 참여해 컨설팅프렌즈라는 컨설팅회사를 창업했다. 졸업을 하면 이 멤버들과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 퇴직 후 만 7년의 세월이 지났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의 속도는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고, 인생이란 직접 경험해보아야만 알게 되는 것이 많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지금부터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 아내와 내가 건강하고 아들과 딸은 독립하여 제 몫을 잘하고 있다. 손녀의 재롱이 귀엽고 한 때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던 동생들과 할아버지의 가훈처럼 화목하게 지낸다. 이러한 가족 간의 사랑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주변의 사람들도 돌아보고 작은 재능이지만 나누는 삶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 2016-08-19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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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2막 강의 내용 수정
- 이번 부산 중장년 취업 아카데미 과정에서 ‘인생 2막’ 강의를 하면서 강의안을 수정할 필요를 느꼈다. 지금까지 써 먹었던 강의 내용은 우리은행 고급관리자 용이었기 때문에 이번처럼 블루칼라 수강자들에게는 안 맞는 내용이 많았다. 은행 퇴직자들은 최소한 아파트 한 채는 있고 연금도 나오고 저축액도 꽤 되는 편이지만, 블루칼라들은 모아둔 재산도 변변치 않고 당장 수입을 만들어야할 처지들이었다. 연금도 아직 나이가 덜 되어 못 타거나 자격이 안 되어 연금을 아예 못 타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너무 돈돈 하지 마라”, “여유 있게 여가 생활을 즐기라”는 내용이 먹혀들 리 없었다. 우리은행 퇴직 예정자들도 5년 전에는 당장 수입이 끊긴다는 것에 초조한 눈빛이었으나 그간 사회적 학습효과 덕분인지 이젠 많이 여유로워 보였다. “초조해봤자 별 뾰족한 묘안도 없고 사실 모아둔 재산이면 밥은 굶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이번 수강자의 대부분인 블루칼라들은 5년 전 은행 퇴직예정자들처럼 당장 수입이 없다는 사실에 초조한 빛이 보였다. 당장 수중에 돈이 없으니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어렵다고 했다. 맞는 얘기이다. 한두 번 얻어먹었다면 이쪽에서도 한 번은 사야 하는데 마냥 얻어먹을 수만은 없다. 당당히 아내에게 용돈을 달라고 권했다. 평생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다 준 사람이므로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했다. 스스로 기가 죽어 그런 말을 못하는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했다. 먹는데 들어가는 돈은 사실 돌아가면서 돈을 내거나 나눠서 내면 그리 큰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안주 하나 놓고 소주나 막걸리 먹어봐야 일인당 1만원 꼴이다. 그래도 집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집 없는 서러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집은 사둔 것이다. 그렇다면 주택연금을 신청하라고 했다. 집을 담보로 어느 정도의 돈을 매달 받게 되면 용돈 걱정은 크게 덜 수 있는 것이다. 집은 왜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나중에 자식들에게 상속해줘야 한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식들도 장성하면 제 밥벌이는 하게 되고 상속이 없어도 잘 살아간다. 자신이 노력해서 장만한 집이니 당연히 권리가 있다고 했다. 앞으로는 집값도 떨어질 것이고 사회적 연금도 선진국처럼 늘어나면 최소한 밥은 안 굶는다는 위안도 필요한 것 같다. 일단 아침에 집을 나서라고 했다. 구민회관 교양 강좌를 나가든, 자기 계발 프로그램에 나가든 무료 강좌가 많고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정보도 얻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전문가가 되어 제2의 직업이 되기도 한다. 현역 때 벌던 수입에 비해 퇴직 후 버는 돈이 너무 약소하다며 취업을 꺼리는 사람들도 많다. 1억 원을 은행에 넣으면 일 년 이자가 200만 원 정도인데 한 달로 나누면 20만원이 안된다. 본인이 월 100만원 수입을 원한다면 은행에 5억 원 이상을 둬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퇴직 후 수입에서 한 달에 50만원을 준다고 해도 과거와 같은 기준으로 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현역 때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고 장래를 위해 저축도 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회사에서도 돈을 꽤 준 것이다. 이제 그때와는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업체 임원 출신이지만 음식점 서빙을 하는 사람이나, 경찰 공무원으로 있다가 퇴직하고 건물이나 아파트 경비 일을 하는 사람들의 예도 필요할 것 같다. 실패담도 중요하다. 강사들은 수강생들 앞에서 제 잘난 자랑이나 늘어놓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하면 강의 효과도 떨어지고 거리감만 생긴다. 우선 내가 전세로 살다가 자칫 전세금을 날릴 뻔 했다는 실화를 들려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전세라니까 일단 비슷한 처지로 볼 것이다. 등기 상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내가 계약한 집 주인이 소유권 이전 원인 무효 소송에서 져서 세입자들이 전부 쫓겨날 뻔 했던 얘기이다. 승소 요구 금액이 3억 원이라는 것을 알고 세입자들이 전세를 자가로 매입하고 그 차액으로 3억원을 맞춰 줘서 일이 잘 해결된 경우이다. 임원으로 모신다 해서 취업 했더니 인감도장으로 멋대로 장난해서 낭패를 보게 한 사례도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세무서에서 올바른 판단을 해서 해결되기는 했으나 약자는 어디서 어떻게 이용당할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는 내용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자신이 실직자가 되었다고 아내가 돌변했다며 원망하는 경우도 많은 모양이다. 물론 원인 중 하나이겠지만, 마침 갱년기 호르몬 변화가 오면서 생기는 현상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겠다. 인생 이모작 강의는 적당히 시간만 때우려는 것보다 실질적으로 수강생들에게 경험을 전수해주고 정보를 제공해줘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하는데 중점을 둬야 한다. 단 한 사람이라도 강의 내용에서 중요한 포인트를 잡아 살려 나가게 한다면 큰 보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2016-08-11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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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철무료 지공거사, 오히려 요금폭탄
- 인생 65세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어르신, 노인으로 호칭되는 ‘고령자’의 대열에 편입된다. 국민연금 수급자가 되고 ‘지공거사’가 된다. 하지만 전철무료 지공거사! 요금 면제커녕 폭탄을 맞는 경우가 많다. 한국전쟁 와중에 출생신고가 몇 년 늦어 이제 65세가 되었다. 기초연금신고와 전철 무임승차권에 대한 안내문을 받았다. 고령자가 되었다는 실감이 났다. “전철을 무임승차하면 어떨까?”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설렜다. 주민의 일상으로 찾아가는 복지행정! 얼마 전 관악구 미성동 복지담당 공무원과 보건소 간호사의 방문을 받았다. 봉지형 복지사는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현장을 찾아가는 복지행정을 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전철무료승차권과 기초연금신청안내, 주택연금 활용방법 등 손에 잡히는 주제를 설명하였다. 김상희 간호사는 “사회은퇴 후 활동이 축소된 어르신의 건강이 문제된다.”고 하였다. 폐렴예방무료접종, 골밀도검사, 암 검진, 임플란트 치과지원도 설명하였다. 폐렴예방접종이 일생에 꼭 한번 해야 하는 것인 줄 처음 알았다. 치매검사, 우울증검사는 이상 없이 통과하였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찾아 친절하게 설명해준 복지사와 간호사에게 감사한다. 환승기능 없는 전철무임승차권 전철 무임승차 시행초기 춘천막국수, 온양온천 등 원거리 무임승차가 화젯거리가 되었다. 퍼주는 복지라고 야단났었다. 한편에서는 집안에 머무를 고령자를 밖으로 이끌어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긍정론도 있었다. 즐거움은 여기까지였다. ‘어르신 우대용 교통카드’를 받으면서 ‘지공거사’에 대한 기대는 산산이 조각났다. 문제는 시민이 통상 버스타고 전철을 바꿔 타는 ‘환승’에서 발생한다. 전철무임승차권에는 환승기능이 없다. 대중교통 환승제가 시행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환승기능 없는 교통카드가 아직도 존재하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버스와 전철을 한번 환승하면 가까운 거리는 1250원 남짓이면 된다. 전철요금은 무료이나 버스요금은 내야한다. 전철요금은 면제로 알았으나 실제 면제요금은 50원, 한 달 왕복하더라도 3000원이다. “눈 가리고 아옹이지, 누가 전철요금 면제라고 하겠는가?”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지공거사 오히려 요금폭탄! 시민은 보통 버스타고 전철로 환승하여 다시 버스를 타는 경우가 많다. 이럴 경우 대체로 요금이 1500원 안팎이었다. 그런데 지공거사가 부담하는 요금은 2400원이 된다. 면제요금 합한 총 요금은 2150원 1.43배 많은 3650원이 된다. 교통요금 면제커녕 오히려 폭탄이다. 이만큼 예산도 낭비하고 있다. 많은 시민이 실질적으로 전철요금 면제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현장이다. 이 대목에서 무료승차권 무용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전철무임승차가 노인에게 오히려 부담을 늘리는 기막힌 현실이다. 무임승차권 환승기능 부여하라 왜, 전철요금 전액 부담자와 면제자의 요금계산이 달라야 하는가? 지공거사의 무임승차카드 환승기능부터 부여하여야 한다. 환승기능도 없는 무임승차 교통카드 발급을 특정은행에 전담시키는 것도 큰 문제다. 계좌이동제, 인터넷 전문은행 출현 등 은행 간 벽이 허물어진지 이미 오래되었다. 모든 은행에 개방하여 시민이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하여야 한다.
- 2016-08-05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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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자서전] 60살에 배운 사진, 도랑치고 가재잡다
- 1, 지리산 청학동서 세상을 만나다 필자는 촌놈이다.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 계곡에서 세상을 만나서다.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일원을 이른다. 삼신봉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진 계곡을 돌고 돌아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하동읍까지 40리(약 15.7㎞), 진주시까지 100리(약 39.3㎞)다. 지금은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앞산 토끼와 뒷산 토끼가 서로 발맞출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정감록’을 비롯한 몇몇 옛 문헌에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청학이 노닐고 흉년, 질병, 난리가 없는 지상 낙원으로 신라 말기부터 전해오는 마을이다. 할아버지도 거창군 가조면 율리에서 그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유불선합일경정유도교"의 신자들도 196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한복을 입고 결혼 전에는 댕기 머리를 땋고 결혼 후에는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지은 머리에 비녀를 꽂는 풍습의 도인촌이다. 이곳으로 이주한 조부모와 부모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었다. 계곡 주위의 다소 반반한 터를 잡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어느 가을날 그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부역을 시키거나 총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소나무 둥치에 포박하여 둔 채로 그들은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손의 밧줄을 간신히 풀고 일궈놓았던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을 팽개친 채 빈 몸으로 10리(약 3.9㎞)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아랫마을로 소개하여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했다. 필자는 청학동서 배태하여 이곳에서 삼 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1950년 2월 초나흘 새벽닭이 울 무렵이었다. 배냇저고리에 쌓여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곳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 곁에서 딸처럼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드리기도 하고 들녘에서 나물을 캐기도 하였다. 닳고 닳은 놋쇠 숟갈로 감자 껍질을 벗겨드리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읍에 있는 하동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밤에 공부하고 나면 콧구멍이 까맣게 그을렸다. 등잔불에 넣을 기름도 40~ 50분 걸어가야 하는 면사무소 근처의 가게에서 기름때 진득하게 낀 됫병에 짚으로 꼰 새끼줄을 묶어 조심스레 들고 와야 했다. 어머니 나이 33세에 필자를 낳았다. 큰 형님과는 10세, 둘째 형님과도 6세 터울이다. 할아버지의 만류로 9세에 초등학교에 입학(1958)했다.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건너 신작로 고갯길을 돌고 도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암초등학교였다. 공부 잘하고 달리기, 웅변,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고 전교 학생회장도 했다. 중학교 역시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3년 동안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로 지역주민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같은 학년의 친구 집에 입주하여 공부를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다. 중학생이 가정교사로 일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한 특별한 경험이 있다. 동네 결혼식의 축사도 도맡아 했다. 2. “당신은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거창대성고등학교를 졸업(71)한 후 72년 곧바로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관제병으로 3년 만기 전역했다. 이후 77년 10월, 대학 졸업 직전에 쌍용그룹 고려화재해상보험㈜에 공채로 입사했다. 특종보험 언더라이팅 업무를 하다 기획조사부로 발령되어 신상품 개발 업무를 하여 국내 최초 골프보험, 낚시보험 등의 레저보험을 개발하였다. 79년 4월 15일, 다섯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보험감독원 등 외부기관 연수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재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83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보험연수소(SITC)를 수료(사진)했다. 중견 사원이 되었을 때는 운영상 문제가 있었던 제주지점, 대전지점, 동대문지점장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크게 올렸다. 그런 덕으로 96년 초 직장의 별인 임원으로 승진해 부산, 경남, 제주를 관장하는 본부장(부산 주재)을 지냈다. 3, 47세에 용도폐기 호사다마라 했던가? 임원으로 승진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97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충격이었다. 나이 47세 때다.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회사 일에 매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창 일할 나이였고 두 아들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필자에게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넥타이를 매고 정상 출근하듯 집을 나서 공원에서 배회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필자가 바로 그 처지가 되었다. 4. “당신 제 명에 살게 하려고” 해임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야 하나를 고민했다. 믿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그날로 아내에게 사실을 알렸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알렸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어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시간을 보낸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 잘 됐어요. 당신 제 명에 가게 하려고 하늘이 도왔나 봐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어디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우리 세대들이 다 그러했듯 나 역시 목표달성을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다. 거래처 접대와 직원 격려를 위한 회식 자리로 자정 무렵에야 겨우 혼자 살던 사택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가 제 명에 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을 수차례 하였을 것이다. 5. “설상가상”,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한 다음 해 IMF 위기가 닥쳤다. 먹고 사는 일이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재취업하려 발버둥 쳐봤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단계 모집 광고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런 현실은 분노를 부추겼고 속이 더 상했다. 분노를 일간신문 독자 투고란에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을 가장 잘 가라앉혔던 생각은 “나의 직장 운이 거기까진 데 어이하겠어”라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기 시작했다. 6, 마당쇠가 되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퇴직 6개월이 지나서야 고용노동부 고양시고용센터에 들러 실업급여를 청구했다. 처음엔 쑥스럽고 창피하여 신청을 미루고 있었다. 국민연금을 해지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다른 보험도 모두 해지하였다. 그 후 별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만화방을 창업했다. 누워서도, 엎드려서도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도입으로 좋은 호응을 얻어 사업이 잘됐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하여 라면을 직접 끓여 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대조류였던 PC방이 성업하면서 이 업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사업을 접고 경기 부천시 상동에서 부대찌개 음식점을 창업해 운영했다. 90%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누누이 들으면서도 많은 퇴직자가 덤벼드는 것이 요식업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사 다닐 때 몸에 익힌 고객서비스 정신이 도움되어 친절한 음식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괜찮아졌다. ‘이런 맛에 음식점을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몸이었다. 계속 아팠다. 특히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맞았다. 때마침 가게를 욕심내는 사람이 나타나 적정한 가격 협상 끝에 가게를 넘겼다. 그 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다양한 일을 이어갔다. 월 40만 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의 조경관리사로 취업하여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쓰레기봉투를 치우는 일도 하였다. 마당쇠가 된 셈이다. 대형 고깃집 일산한우마을 점장도 하였고 일당을 받기 위하여 MBC 드라마 ‘주몽’ 엑스트라 출연도 해보았다.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 되었다. 강의 콘텐츠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7, 친구의 비명횡사, 인생의 전환점 되다 57세 때 가까운 친구를 비명횡사로 잃었다. 두 살 아래의 직장 친구였다. 평소 술은 하지 않았고 담배도 수년 전에 끊어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석 전날 다른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행 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급 차량을 불렀으나 고향 가는 차량 행렬에 막혀 늦게 도착한 119차량에 실려 가까운 성남시의 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정말 황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퇴직 후 보낸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내로라할만한 일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도 친구와 같이 무의미한 생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100세 장수시대를 맞아 보람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는 필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8, 60살에 사진 배우다 직장생활과 생업으로 잊고 있었지만, 은퇴하면 햇살 좋은 언덕에 캔버스를 세우고 수채화를 그리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필자가 사는 고양시에서 무료로 하는 사진강좌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를 운영하면서 사진을 곁들인 글을 쓰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때여서 강좌에 참여했다. 화필 대신에 카메라를 잡은 셈이다. 2010년 7월부터 한 달에 3회 6개월 강좌를 들었다. 필자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사진에 특별한 재능이나 솜씨를 갖고 있지 않은 초보자였다. 카메라도 소형 디지털카메라 한 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감성과 초등학교 때 수채화를 그렸던 경험, 전 직장에서 맡았던 홍보 관련 일과 사보편찬 업무가 도움돼 일취월장했다. 사진 취미활동은 여가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건강도 챙기고 여러 사람이나 자연과 함께함으로써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했다. 때로는 작품으로 부가적 소득과 재능기부도 하면서 평생을 현역처럼 살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뒤인 2010년 10월부터 공인 사진작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에서 입선 이상을 하여 획득한 점수가 50점을 넘겨야 했다. 입선하면 2점을 받는다. 일 년 동안에 28회 출품해 절반 이상 낙선하였으나 어쨌든 15회의 수상으로 사진작가 명함을 달았다. 첫 번째로 출품했던 제1회 너브내전국감성사진공모전에 ‘형상II’이 동상의 영예를 안겨주어 출발이 순조로웠으나 다른 공모전에선 잘 뽑히지 않아 포기할 생각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재미있었다. 꾸준하게 찍으며 관련 서적을 사서 공부하고 기회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재능기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년 만인 2013년 7월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 질주’라는 작품이 입선했다. 2013년 10월에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서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공모전’의 사진 부문에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다. 11월에는 부산일보 주최 제21회 ‘부일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닭장’이 1,166점 중에서 좋은 심사평으로 2위인 우수상 영예를 안았다. 부산일보는 2013년 12월 26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변용도 씨의 우수상 '닭장'은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닭의 붉은 머리 부분을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하게 보여 주어, 닭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하는 듯한 표현이 출중했다는 평을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9. 사진취미,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다 필자는 사진을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포토스토리텔러’라 자칭한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가 37만 장이다. 카메라는 가장 아끼는 친구다. 늘 함께한다.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다. 사진 활동이 바탕이 되어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다용도(多用途)로 후반생을 바쁘고도 보람 있게 산다. 사진이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었다. 필자는 그 텃밭에 글솜씨, 강의 솜씨를 추가로 뿌렸다. 그런 씨앗에서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미역국’ 외 다수의 작품으로 ‘순수문학지’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 명함을 달았다. 2012년에는 필자의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가 대한민국 100대 우수블로그로 선정됐다. 사진작가, 사진 칼럼니스트, 수필가, 저자, 강사(은퇴준비, 생애 재설계, 변화관리, 사진), 방송인(KBS 1TV ‘아침마당’, SBS라디오 ‘유영미 마음은 언제나 청춘’ 시니어리포터, 머니투데이 행복특강, 토마토TV 강연, 아리랑TV, CBS라디오, 한국직업방송), 기자(시니어조선 사진명예기자, 사회연대은행 KDB시니어브리지센터 두드림기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리더 겸 시니어리포터, ‘디카와 놀자’와 세화포토클럽 운영자다. 최근엔 경제신문 이투데이 자매지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동년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 2016년 1월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를 출간하여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와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고려대 평생교육원 액티브시니어전문가과정 전임강사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우면청춘대학의 사진강좌를 2년째 맡아오고 있다. 사진이 근간이 되어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다. 10. 도랑 치고 가재 잡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경기 고양시 외곽의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자그마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아니하여도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일상을 즐긴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라고 한 어느 노부부 여행가의 생활 철학을 닮아가려 한다.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하였던 보람을 느끼며 산다. 전반생보다 후반생을 더 바쁘고 활기차게 보낸다. 그 바탕에 사진이 있다. 많지는 않아도 용돈도 번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형국의 삶을 산다. 2차 성장을 한 셈이다.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 윌리엄 새들러 교수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2차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제2의 절정기를 만들기 위해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변함없는 도전이다. 필자의 이름을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로 풀이해본다. 그런 덕분에 누구나 한 번쯤 출연해보고 싶은 KBS 1TV의 ‘아침마당’(2014, 11, 24)에 섭외를 받아 출연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나의 두 번째 직업을 소개합니다’란 주제였다. 사진작가로, 은퇴준비강사로 안사람과 함께 출연해 삶의 정점을 새로 찍었다. 11,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세계적 사진작가 프랑스의 마크 리부가 있다. ‘에펠탑의 페인트공’, ‘꽃을 든 여인’ 등 유명한 작품을 만든 현존하는 사진작가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 리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 찍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세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가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얻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겠다는 꿈을 꾼다. 희망으로 산다. 진정한 대 작가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과 자세가 새로운 경지로의 작품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려는 삶의 철학이, 남이 넘볼 수 없고 흉낼 수 없는 작품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여겨진다. 미래를 향해 또 다른 꿈을 꾼다. 필자 또한 늘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도전의 발길을 멈추지 않으련다. 또한 하늘이 인생의 구석구석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경험과 지혜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다 쓰고 가리라.
- 2016-07-04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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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후경제] 기초연금 제대로 받자
- 기초연금은 65세 이상 소득하위 70% 이하 노인에게 국가에서 소득에 맞게 차등 지급되는 연금이다. 전 국민에 지급하겠다는 당초 계획이 축소, 시행되고 있으며 상당수 국민은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65세가 되면 동 주민자치센터에 신청하여야 한다. 국민연금 노령연금은 60세까지 소득 있는 업무 종사 시에 의무적으로 국민연금을 납부한 뒤, 10 년 이상 납부했을 경우 본인이 납부한 기간과 보험료에 따라 연금으로 받는다. 기초연금은 예산은 국가가 부담하고 국민연금공단의 업무협조로 동 주민자치센터에서 매월 지급한다. 2016년 1월부터 개정 시행하는 기초연금 수급자격은 다음과 같다. 65세 이상 대한민국 국민으로 다음 ‘소득인정액’이 단독가구 100만 원, 부부가구는 160만 원 이하자가 신청자격이 있다. 단 공무원연금, 사립학교교직원연금, 군인연금, 별정우체국연금 수급자는 제외한다. ‘소득인정액=1.소득평가액+2.재산의 소득환산액’이다. 소득인정액 산정은 배우 복잡하므로 해당기관에 문의하거나 홈페이지에서 확인이 필요하다. 1.소득평가액=(근로소득-52만 원)*0.7+기타소득 1)근로소득->일용근로, 공공일자리, 자활근로소득 제외 2)기타소득=사업소득+재산소득+공적이전소득+무료임차소득 무료임차소득=시가표준액 6억 원 이상 자녀주택에 거주->연0.78% 2.재산의 소득환산액= {(1+2-부채)*4%+3 }/12 1)일반재산-기본재산(대도시: 1억3500만 원, 중소도시: 8500만 원, 기타지역: 7250만 원) 2)금융자산-2000만 원 3)고급자동차(3000cc 이상) 회원권(4000만 원 이상)의 가액 국가에서 국민을 위하여 시행하고 있는 기초연금! 월 10~20여만 원이 작은 금액이 아니다. 시니어 30년을 재설계해 보면 그 크기를 실감할 수 있다. 월 10만 원이면 원금으로 3600만 원, 20만 원이면 7200만 원이 된다. 국가예산으로 지급을 보장하는 기초연금은 시니어에게 제일 확실한 수입원이 된다. 엄청 큰 재산으로 인식하여야 할 이유이다. 65세가 되면 ‘지공거사’ 신청은 잘하고 있으나, 기초연금에 대하여는 대부분 무관심하다. 기초연금 수급자에 해당되는지 국민연금공단이나 동 주민자치센터에 문의하고 신청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보건복지부 기초연금 홈페이지 www.basicpension.mohw.go.kr
- 2016-06-0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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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후경제]주택연금 바로 알고 활용하기
- 주택연금은 국민연금 등 다른 연금과 달리 은퇴 후 가입할 수 있는 연금이다. 가입자가 집을 소유한 고령층의 1%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집을 상속하겠다.’는 인식이 변하면서 가입자가 증가하는 추세다. 정부가 주택연금 활성화 대책을 시행하고 있다. 주택연금은 다른 연금과 차별화했다. 가입자와 배우자 모두에게 담보가치를 초과하더라도 연금지급을 국가가 보장한다. 확정형의 경우 기간이 만료 후에도 ‘평생거주’를 보장한다. 가입자 사망 후 연금액 감액 없이 배우자도 동일 금액을 지급한다. 집값보다 덜 받으면 자녀들에 상속하고 더 받아도 청구하지 않고 국가가 부담한다. 연금인출한도 50% 내에서 의료비 용도로 목돈 인출이 가능하고, 주택 재산세 25% 감면 혜택도 주어진다. 주택 소유자 또는 배우자 중 60세 이상으로 신청자격을 확대하였다. 연금지급은 부부 중 연령이 적은 사람을 기준으로 계산하고 부부가 모두 사망할 때까지 지급된다. 이사를 가는 경우에도 새로 이사한 주택을 담보로 제공하면 주택연금을 계속 이용할 수 있다. 신규 주택 가격이 높으면 월지급금이 늘어나고 반대일 경우엔 월지급금이 줄어든다.담보주택을 재건축하더라도 재건축 완료된 주택에 가입자가 계속 거주하면 주택연금 계약을 유지할 수 있다. 재건축 사업 기간 중 월지급금을 계속 받을 수 있으며, 재건축 주택가격이 상승한 경우에는 그만큼 월지급액도 상향된다. 주택연금은 주택의 소유권 변동 없이 담보를 설정한다. 한방에 훅 날리는 위험을 덜 수 있다. 은퇴자는 국민연금 등 다른 연금은 새로 가입할 여지가 없으나 주택연금은 은퇴 후 가입이 가능하다. 주택의 가치 산정은 한국감정원 인터넷시세→KB 인터넷시세→국토교통부 주택공시가격→한국감정원 감정평가액 순으로 적용한다. 주택연금 가입 예정자가 희망하는 경우 한국감정원 감정평가액을 최우선 적용할 수 있다. 일반 주택담보대출처럼 담보인정비율(LTV)을 적용하거나 소액임차보증금을 차감하지 않고 주택가격의 100%를 전부 인정한다. 주택가격이 많이 올라 연금 중도해지를 희망할 경우 그동안 수령한 월지급금과 이자, 보증료를 납부하면 별도의 중도상환수수료 부담 없이 해지할 수 있다. 시니어는 ‘주택’이 재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주택은 거주, 재산증식 수단에서 연금활용으로 발전하고 있다. 주택연금을 바로 알고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 시니어가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소중한 방법이다.
- 2016-06-02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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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니어의 안락한 삶
- ‘복지’라고 하면 우리는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다. 무상급식과 기초생활수급, 그리고 기초노령연금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행하는 일련의 수단에 불과하며, 삶의 질을 높이는 것들을 통틀어 ‘복지’라고 한다. 삶의 질을 높이려면, 좋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건강관리를 해야 하고,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집이 있어야 하고, 영혼의 즐거움을 채우기 위해 문화생활도 활발하게 해야 한다. 또한, 이런 것들을 모두 갖추려면 경제활동을 빼놓을 수가 없다. 우리는 생활이 안정 되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으며, 이를 넓은 의미의 ‘복지’라고 한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안락하게 사는 것이 복지다. 시니어도 예외는 아니다. 시니어들도 남은 삶을 위해서 복지에 더욱 더 힘써야 한다. 먼저,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집에 대해 생각해 보자. 옛날에 한 때는 ‘판잣집이라도 내집이 최고’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옷을 아무렇게나 입어도 상관없고, 자세가 흐트러져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고, 그냥 누워서 뒹굴뒹굴 해도 간섭받지 않으니 집이 최고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삶의 무게가 저마다 다 다르듯이,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집의 규모 또한, 모두 다를 수 밖에 없다. 예를 들면, 60평 아파트에 거주해야 많이 행복하고, 10평 아파트에 거주하면 불행한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규모는 개개인의 차이일 뿐, 행복은 그 집 속에 담아내는 내용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집은 그냥 편안하게 쉴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다음, 영혼을 채우기 위한 문화생활을 우리는 보통 취미생활로 한다.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것이나, 하고 싶었던 것들, 또는 배우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채워 나가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누리는 일이다. 누구는 여행으로, 누구는 음악이나, 미술로, 그리고, 누구는 텃밭 정원을 가꾸는 일로, 스포츠로, 등산으로, 그 외에도 수없이 많다. 이런 것들을 하면서 새로운 사람들과 소통하며 지내는 일도 행복한 일이다. 그러므로 취미생활을 위한 모임 하나쯤은 꼭 갖도록 권하고 싶다. 필자도 모임을 하나 하고 있는데, ‘단역배우’모임이다. 함께 방송인교육을 받고 난 후, 교육생들 끼리 모임을 갖게 되었는데, 재미가 쏠쏠하다. 그 모임을 하면서 회원들 모두가 행복해 한다. 노인복지법의 기본이념을 보면 ‘.....그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여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 되어있다. 그렇다. 취미생활을 자기 혼자만의 것으로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취미를 함께 하고,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여 즐거움을 나누고 행복을 나누는 것이다. 필자가 하고 있는 ‘단역배우’ 모임도 사회에 봉사 할 계획을 갖고 있다. 소외된 노인들을 위해 연극을 하는 것이다. 회원들이 시간을 내어 연습을 하고 있는데 무대에 올릴 실력이 되면, 그때에 봉사활동을 하기로 하였다. ‘좋은 건강을 유지하려면 꾸준한 운동, 규칙적인 운동은 필수다.’ 이 말은 의사들이 항상 하는 말이다. 그러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운동을 지나치게 하다가, 오히려 병을 부르는 사람들도 가끔씩 본다. 필자의 지인 중에도, 건강을 위해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1시간 30분씩 ‘빨리 걷기’로 운동을 했는데, 6개월도 못되어서 무릎 연골을 수술한 적이 있다. ‘노인은 노령에 따르는 심신의 변화를 자각하여 항상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고.....’라는 노인복지법의 기본이념 중에서 특히 ‘노령에 따르는’이라는 말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나이 많아 기운 떨어 진다고 집에만 있으면 안 되지만, 우리 시니어들은 과로 할 정도로 활동을 지나치게 많이 해서도 안된다. 그냥 보통 걷는 걸음으로 하루에 1시간 정도 걸으면 족할 것 같다. 사실 이것은 필자의 유일한 운동법 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경제활동에 대해 생각해보자. 필자는 전 재산이 집 한 채 밖에 없는, 서민들의 복지가 될 수 있는 다른 경제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소유주택을 팔아서 자가주택의 규모를 줄인다. 그 차액으로 미래 가치도 좋고, 교통 좋은 곳에, 1인 거주용 오피스텔이나 아파트를 매입하여 임대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매달 임대료를 받는 것도 훌륭한 경제활동이다. 나중에 목돈이 필요 할 때는 임대하던 소형 주택을 매매해서 사용하면 어려움도 겪지않게 된다. 이런 경제활동은 노후의 삶을 안락하게 해준다. 바로 이런 것이 복지다.
- 2016-05-30 1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