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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속의 영웅을 떠나보내며
- 필자는 41년 전인 1976년 군대에서 만난 한 장교와의 인연을 뒤돌아보려 합니다. 1979년 전역 후에도 2011년까지 35년 동안 만남을 이어오던 중이었습니다. 담도암이라는 재활할 수 없는 병에 걸려 일찌감치 삶을 마무리한 옛 전우와의 안타깝고 못다 한 아쉬운 인연을 추억해봅니다. 오늘 이 화창한 초여름에, 따뜻한 체온을 함께 나눌 수 없는 누군가와 영영 작별을 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이별의 섭섭함과 안타까움이 쓰나미처럼 가슴속을 덮쳐옵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이셨지만, 뿜어져 나오는 정기는 어느 누구도 당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셨습니다. 올곧은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셨습니다. 허스키한 음성에 호탕한 웃음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둘러앉아 같이 나누던 음식도 맛나게 드시며 아낌없이 나눠주곤 하셨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담소하며 함께 즐기던 시간들이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님은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에 직업군인으로 청춘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그즈음엔 누구나 어렵고 힘들은 시절이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남다른 학구열과 집중력을 발휘하시어 사병에서 영관 장교까지 진급하신 자수성가, 대기만성의 표본이셨습니다. 설악산 뒤편 깊숙한 골짜기에서 모래배낭을 메고 산악구보 훈련으로 체력단련을 해야만 했죠. 구보 후에는 배낭에 쓸려 전투복 등판에 배어나온 검붉은 핏자국을 개울가에서 같이 빨아 말려야 했습니다. 한여름 6·25를 전후로 하는 혹서기 천리행군과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진행했던 혹한기 천리행군도 생각납니다. 그때도 잰걸음으로 항상 선두에 나서서 팀원을 이끄셨죠. 고공낙하 훈련 시에는 팀원들의 무사 귀대를 기원하며 아내와 함께 성당에 나가서 기도를 드리기도 하셨다죠. 저희 팀원들은 전우애로 느끼기 전에 훈훈한 인간애로 함께했었습니다. 주도면밀한 전략과 반복적인 철저한 훈련으로 탁월한 팀 전투력을 평가받았습니다. 짧게나마 같이했던 힘겹고 즐거웠던 시간들을 이제 우리들 가슴속 깊이 서글픈 마음으로 묻어두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들끼리 모여 옛일을 얘기할 때마다 한 장씩 한 켜씩 꺼내 들춰보게 될 것입니다. 전역 후엔 인생의 선배로서뿐만 아니라 혈육으로 맺어진 친형제처럼 지내왔습니다. 계절마다 만나서 회포도 풀고 정분도 쌓으며 이승에서의 여정을 함께함이 즐거웠습니다. 퇴촌 산자락에 수십 개의 벌통을 줄 세워놓고 양봉을 하셨죠. 자나 깨나 망투를 덮어쓰고 따가운 벌침에 쏘여가며 돌보신 향긋한 꿀을 우리들과 주위 이웃들에게 나눠주시곤 하셨습니다. 꿀보다 더 달콤한 인간의 정을 건네주셨기에, 안타까이 보내드려야 하는 우리들 가슴이 더욱 메워져옵니다. 남들보다 더 투철한 사명감과 국가안보관을 가지시고 국방 업무에 30여 년 젊음을 받치셨습니다. 그동안 아내께서는 묵묵히 다정하신 손길과 따뜻한 미소로 손발이 되어주셨습니다. 아름다운 내조자로서 가시는 님에게 너무도 잘 어울리는 반쪽이셨습니다. 그 어떤 서방님이시고 그 어떤 애들 아버지이셨는데, 이렇게 먼저 떠나보내야 하시다니 억장이 무너지실 겁니다. 서글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누가 대신 알아줄 수 있겠으며 어느 누가 보듬어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제 젊고 건실한 두 아들과 함께 못다 이루신 님의 뜻을 받들어 이어가셔야 합니다. 기도드리며 님이 떠나가신 커다란 공간을 채워나가셔야 합니다. 속상하고, 처절하고, 불쌍하고, 안타까워 눈앞이 캄캄하시겠지만 앞으로도 저희들이 함께할 것입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시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우리들이 함께해왔던 것처럼 친근한 모습 이어가기를 먼저 가시는 님은 믿고 기대하고 계실 겁니다. 평상시 혈육의 정을 나눠오시던 일가친척분들과 이웃의 형제자매님들 모두 오셨습니다. 멀리 떠나시는 길을 배웅하며 우리들 모두 두 손 모아 빕니다. 하느님의 품에 따뜻하게 안기시어 연년세세 평안하시고 아름다운 곳에서 영면하시길 비옵니다.
- 2017-05-12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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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로 배우는 노년의 지혜 3
- 인생 황혼기에 맞은 손님 감독 토마스 맥카시 주연 리차드 젠킨스, 히암 압바스 제작연도 2007년 상영시간 104분 20년째 코네티컷의 한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는 장년의 교수 월터 베일(리차드 젠킨스). 단조롭고 열의 없는 나날을 무기력하게 이어가던 월터는 논문 발표를 위해 뉴욕 출장을 갔다가,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자신의 아파트에서 불법 체류자인 타렉 칼릴(하즈 슬레이만)과 자이납(다나이 거라이라) 커플과 마주친다. 월터가 갈 곳 없는 젊은 커플에게 잠자리를 제공하자, 타렉은 감사의 뜻으로 월터에게 자신의 생계 수단인 젬베(Djembe 혹은 jembe;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원추형 모양의 가죽 드럼) 연주를 가르쳐준다. 타렉과 함께 센트럴 파크에서 젬베를 연주하면서 이따금 미소를 짓게 된 월터는 타렉이 불법 이민자 단속에 걸려 수용소에 들어가자 타렉과 자이납, 그리고 소식 없는 아들을 찾아온 타렉의 어머니 모나 칼릴(히암 압바스 Hiam Abbass)의 운명과 얽히게 된다. 모든 좋은 영화가 그러하듯 의 초반부는 주인공 월터의 무뚝뚝한 캐릭터와 잿빛 삶을 이렇다 할 대사 없이 간결하게 전한다. 무거운 짐을 들고 밤거리를 걷는 월터의 처진 어깨, 귀가하여 홀로 와인을 마시는 월터의 쓸쓸한 표정. 얽은 얼굴에 안경을 걸친 반대머리 월터는 먼저 말을 걸어보고 싶을 만큼 호감 가는 인물이 아니다. 개인 사정으로 리포트가 늦었다고 사정하는 학생을 냉정하게 내쫓는 그의 유일한 관심은 피아니스트였던, 그러나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된 아내와 함께 듣던 클래식 음악 감상뿐. 아내의 피아노로 교습을 받아보기도 하지만 선생들 잔소리가 듣기 싫어 번번이 내쫓고, 마침내 네 번째 선생 바바라(마리안 셀데스)로부터 “당신은 재능을 타고 나지 못한 사람이다. 그 좋은 피아노를 팔려거든 내게 팔아라”는 말을 듣기에 이른다. 월터가 학회에서 발표한 논문마저 공동저자가 아닌, 단지 이름을 빌려준 것뿐이고 새 책을 거의 다 써가고 있다고 했지만 아직 손도 대지 못했고, 한 과목뿐인 강의도 성의 없이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월터의 지루하고 무기력한 삶이 전제로 묘사되었기에, 자신의 집을 점거한 불법 체류 외국인 커플을 다시 불러들여 잠자리를 제공하는 설정은 설득력을 갖는다. 또 타렉과 자이납이 채 챙겨가지 못한, 그들의 다정한 한때를 담은 사진, 그리고 월터가 창밖으로 내려다본 밤거리에서 초조하게 잠자리 구걸 전화를 거는 커플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공감을 얻어내는 세심한 연출력을 발휘했다. 월터가 젬베 연주에 금방 빠져드는 장면 또한 월터가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던 음악 애호가라는 초반의 설정 덕분에 쉽게 이해가 된다. 월터를 경계하는 진중한 자이납과 달리 낙천적이고 영리한 타렉은 월터에게 차근차근 연주의 기쁨을 가르치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똑똑한 사람이지만 젬베 연주 때는 생각하지 말고 두드려야 한다. 4박자 클래식에 익숙하겠지만 아프리카 리듬은 3박자다.” 시리아에서 왔다는 타렉이 아프리카 타악기인 젬베를 연주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건 자이납과 젬베뿐이다”라고 설명하는 대사에서 짐작되듯 타렉은 세네갈 출신인 자이납을 깊이 사랑한다. 이처럼 음악이 중동인 타렉과 아프리카인 자이납을 연결시켜주었듯, 백인 월터와 중동인 모나의 내적 교류에도 큰 몫을 한다. 학사 일정 때문에 코네티컷으로 돌아간 월터가 바바라에게 피아노를 주는 장면은 과거의 아내 혹은 그녀의 음악과 이제 거리를 두기로 했다는 결심으로 읽힌다. 반면 그가 뉴욕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모나가 청소를 하며 월터 아내가 연주한 클래식 CD를 듣고 있는 장면은, 음악이 이들을 연결시켜주고 있다는 은유로 읽힌다. 월터는 CD를 하도 많이 들어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는 모나를 위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브로드웨이의 마제스틱 극장에서 장기공연 중인 을 예매한다. 타렉이 수용소에 갇혀 있는 절박한 시점에 만난 낯선 장년 남녀가 뮤지컬 감상을 통해 웃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학교 수업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월터는 “책을 안 써본 사람과는 말이 쉽지 않다”며 모나의 관심을 일언지하에 끊어버리지만, 결국엔 자신이 “바쁜 척, 책을 쓰는 척했지만 일에서 손 놓은 지 오래다. 남의 논문만 읽고 똑같은 과목을 20년 강의했을 뿐이다”라고 고백한다. 모나는 진심을 말해줘 고맙다며 “교수가 아니면 뭐가 되고 싶었냐?”고 묻는다. 모르겠다는 월터에게 모나는 ”그래서 더 신나지 않나요?“라며 웃는다. 낙천적인 타렉의 어머니답게 모나 또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여성임을 드러내주는 대사다. 런던에 사는 아들이 있다는 대사만 있을 뿐, 월터 아들의 존재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아들과 살갑게 지내지 않는 듯해 보이는 그가 타렉에 대한 관심과 보살핌은 아들에 대한 속죄의 마음일 수 있고 이는 아들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기꺼이 포기하는 모나의 깊은 모성과도 연결된다. 는 아무런 사건도 인연도 없이 생의 끝점에 이를 것 같던 월터의 삶에서, 음악을 매개로 한 이국인들과의 만남이 얼마나 큰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9·11 사건 후의 미국 정부(는 2007년 작품이다) 태도가 다인종 국가인 미국의 정체성을 얼마나 훼손하고 있는지를 간접, 직설적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타렉이 지하철에서 경찰의 불심 검문을 받고 끌려갈 때 월터가 경찰에게 진정하라며 신음하듯 내뱉던 외침, 퀸즈의 불법 체류자 수용소 외관을 창고처럼 보이게 의도했다는 월터와 모나의 대화, 모르겠다고만 하는 수용소 직원들에 대해 “시리아와 똑같다”(저널리스트였던 모나의 남편은 반정부 글 때문에 7년을 징역살이하다 죽었고, 그 때문에 모나는 아들 타렉을 데리고 미국으로 왔으며, 본국 귀환 명령서를 받고도 이를 무시한 채 타렉을 키웠다고, 시리아로 떠나기 전 날 밤 월터의 품에 안겨 고백한다)고 하는 모나의 탄식, 타렉이 강제 송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월터가 외치는 절규 등이 그러하다. 거리, 관공서, 공항에서 인물 뒤로 보이는 거대한 성조기. 수용소 벽에 쓰여 있던 구호 ‘미국의 힘은 이민자들로부터’도 그렇고, 자유의 여신상 그림도 마찬가지다. 모나는 “까매도 너무 까맣다”며 놀랐던 아들의 연인 자이납을 만나 아들이 좋아했던 장소로 데려가 달라고 한다. 자이납, 모나, 월터가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볼 수 있는 페리를 타게 된 연유다. 그때 모나는 월터에게 묻는다. 자유의 여신상에 올라가본 적 있냐고. 월터는 한 번도 꼭대기에 올라가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미국을 대표하는 주인공 월터는 이민자들이 미국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들, 즉 자유의 여신상이나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전혀 관심 갖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그랬던 월터가 세 사람과 만나면서 국가를 대신해 사과까지 하게 된다. “저들이 나를 테러범 취급한다”며 불안해하는 타렉에게도, 추방된 타렉을 따라 시리아로 돌아가기로 한 모나에게도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는 월터(하필 그의 세미나 발표 주제는 ‘개발도상국 경제’란다). 국가를 대신한 월터의 사과는 통상적인 할리우드 영화처럼 해피엔딩에 이르지 못한다. 수용소로 면회 갔을 때 유리벽을 마주하고 탁자와 가슴을 두드리며 협연을 할 만큼 음악을 사랑하고 마음이 통했던 월터와 타렉. 타렉이 “손님이 많은 저기서 연주하고 싶다”던 지하철 바로 그 공간에서 월터는 홀로 젬베를 연주한다. 이 마지막 장면은 여운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인정케 한다. “월터가 우리를 경찰에 고발할 거야”라며 두려워했던 자이납의 경계심은 우려로 그쳤지만, 그 불안의 정체는 월터 개인이 아닌 미국이라는 국가였음을 알게 해준다. 엄혹한 현실을 인정하며 절제된 감정으로 긴 여운을 남기는 는 뉴욕대학의 케보키안 센터, 킴벨 센터, 헌드레드 에이커스 레스토랑, 그리고 타렉이 연주하는 이스트 빌리지의 뱀부 하우스와 줄스 비스트로, 자이납이 직접 만든 액세서리를 파는 소호의 길거리 시장 등을 뉴욕의 명소가 아닌, 시민권자도 불법 체류자도 함께 살아가는 공간으로 묘사한다. 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안정적인 카메라(올리버 보켈버그), 음악, 그리고 연기다. 클라식과 젬베 연주가 화답하는 영화답게 베토벤의 ‘Sonata No. 21 in C Major’가 흐르는가 하면, 타렉으로 분한 하즈 슬레이만이 직접 협연에 참여한 ‘Darius Blues’와 ‘In Memory of the Dead’와 같은 재즈풍 연주가 청각을 만족시킨다. 연기 앙상블이 빼어난 것은 감독 토마스 맥카시가 배우 출신이라는 것과 무관해 보이진 않는다. (2005), (2005), (2006) 등에 출연해온 조연 배우 토마스 맥카시는 2003년 직접 각본을 쓴 독립 영화 로 선댄스, 산세바스티안, 스톡홀름 등의 영화제에 초대되었다. 역시 직접 각본을 쓴 와 (2011)도 데뷔작과 마찬가지로, 소외된 중장년층의 소통을 담백하게 그려내 잔잔한 감동을 안겨줬다. 세 작품 모두 톱스타가 아닌, 그러나 연기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배우들을 캐스팅하여 아카펠라 화음을 이끌어냈는데 그 솜씨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전 세계 영화제에서 18개의 트로피와 17번의 후보 지명을 받은 는 로버트 젠킨스에게 2009년 아카데미영화제 남우주연상 후보와 2008년 모스크바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주는 등 네 명의 주연 배우와 조연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 각본과 연출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 1953년생 리차드 젠킨스를 주연으로 캐스팅한 건 미국판 리메이크 실패작인 (2004) 촬영장에서, 젠킨스의 부드러운 음성과 눈빛을 확인한 후라고 한다. 리차드 젠킨스는 “나를 주연으로 하면 제작비 조달이 어려울 텐데”라고 우려했다고 한다. 토마스 멕카시 감독은 "의 아이디어는 베이루트를 여행했던 나의 경험에서 가져왔으며, 한 사람의 삶이 우연한 짧은 만남으로도 영향받을 수 있음을 그리고 싶었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21세에 미국으로 이민 온 레바논 출신의 하즈 슬레이만과 미국으로 이민 온 짐바브웨 출신 부모에게서 태어난 다나이 거라이라 모두 로 연기력을 인정받았지만 아직은 TV가 주 무대다. 이 두 젊은이보다 더 오래 시선을 사로잡는 기품 넘치는 여배우들이 있으니 히암 압바스와 마리안 셀데스다. 1960년, 이스라엘 나사렛 출신인 히암 압바스는 에란 리클리스의 (2004)와 (2008), 아모스 기타이의 (2005) 등에 출연해온 이스라엘 대표 여배우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2005) 등에도 출연하며 반경을 넓히는 한편, 연기 지도까지 병행하고 있는 재원이다. 단 두 장면 출연으로 위엄을 보인 마리안 셀데스는 1928년생. 토니상 수상에 빛나는 ‘브로드웨이의 디바’로 무대와 브라운관, 스크린을 넘나들며 멋있게 늙어가고 있다. 히암 압바스가 더 나이 들면 마리안 셀데스처럼 따뜻한 위엄이 더해지지 않을까 싶다.
- 2017-05-11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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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로 배우는 노년의 지혜 1
- 아름다운 동반자 감독; 제임스 아이보리 주연; 조안 우드워드, 폴 뉴먼 제작연도; 1990년 상영시간; 126분 명망 있는 변호사 월터 브리지(폴 뉴먼)는 한여름에도 조끼와 넥타이를 갖춘 정장 차림을 고집하고, 행진곡풍 음악만 들으며, 극장에 가면 잠을 자고, 태풍이 시속 75마일로 불어와 모두 지하실로 대피하는 상황에서도 꿈쩍하지 않고 풀코스 정식을 마치는 고지식한 인물이다. 젊은 여성과 재혼한, 자유분방한 정신과 의사 친구 알렉스 사우어(사이먼 캘로우)는 성적 농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브리지에게 “정열이라는 단어를 알아?”라고 다그친다. 20년을 근속한 노처녀 여비서는 무심하다고 원망한다. 브리지의 아내 인디아(조안 우드워드)는 남편 의견이 곧 내 의견이라 여기며 남편 그늘 아래서 곱게 살아왔다. 주변 친구들의 진보적 의견과 자식들의 자기주장에 소외감과 혼란을 느끼며 정신과 상담을 받아볼까 생각해보지만, 브리지는 “나한테 얘기하면 되오”라며 일축한다. 장녀 루스(카이라 세드윅)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배우가 되겠다며 뉴욕으로 떠난다. 차녀 캐롤린(마가렛 웰시)은 대학도 마치지 않고 배관공 아들과 결혼한다고 난리를 피우더니 이제는 도저히 못 살겠다며 툭하면 친정을 찾는다. 아들 더글라스(로버트 숀 레오나드)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끔찍하게 싫어하며 남몰래 누드집을 본다. 전 세계 중·상류층 가정에서 누구나 겪을 것 같은 이야기 는 에반 S. 코넬l의 소설 (1959)와 (1969)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브리지 부인과 브리지의 입장에서 본 가정생활을 그린, 100여 편의 삽화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두 소설을 통합하여 1930년대 말 미국 캔자스 시의 상류 가정사를 안정적으로, 재치 있게 시나리오화한 이는 ‘인도의 찰스 디킨스’로 불리는 루스 프라워 자브발라다. 에피소드 중심의 산만하고 지루한 이야기로 전락시키지 않고, 유머 감각과 인물 성격을 잘 살려낸 점이 돋보인다. 는 브리지 부인의 세상 인식, 남편과 자식을 대하는 생각의 변화와 자각을 조심스럽게 그린 온건한 영화다. 일상과 감정 묘사가 섬세해서 쉽게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브리지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고지식하고 완고한 성격 탓에, 아내가 그토록 원하는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지 못한다. 심장에 이상을 느낀 그는 만일에 대비하기 위해, 아내를 은행 금고로 데려가 보험증과 증권 서류를 설명해준다. 물질적 기반보다는 남편과의 정신적 교류를 원했던 인디아는, 결혼 전 시를 읊어주었던 남편을 상기시키며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나요?”라고 묻는다. “사랑하니까 은행 금고까지 데려오지 않았소”라고 말하는 브리지. “그럼 가끔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세요”라고 아내가 말하자 그는 “나는 변호사지 시인이 아니요”라고 답한다. “보상받지 못하는 사랑은 싫어요”라고 말하며 이혼하겠다고 앙탈을 부리던 인디아는 남편의 뜨거운 키스에 그만 모처럼의 용기를 잃는다. 자식들은 엄격한 아버지보다 어린아이같이 순진한 어머니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어머니가 의존적인 삶을 살아와 시대에 뒤떨어진 보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엇이든 참견하고 돌봐주려 하자 불편해한다. 남편과 다투고 친정으로 쫓겨온 둘째 딸에게 “여자가 참아야 한다”고 말하는 인디아는 “어머니처럼 당하고 살지 않겠어요”라며 쏘아붙이는 딸의 말에 상처 입고는 기껏 “핫초콜릿 타줄게”라는 말밖에 하지 못한다. 보이스카우트가 된 아들은 “어머니에게 감사 키스를 해드려라”는 단장의 말에 머뭇거리고, 아들로부터 키스를 받지 못한 인디아에게 브리지가 대신 키스를 해준다. 인디아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왜 사는지 모르겠다”며 끝내 자살을 택한 친구 그레이스 바론(블리드 대너)이다. 은행가 남편의 앞날을 위태롭게 만들 정도로 파격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그레이스에게 인디아는 “나도 인생이 무언지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 그러나 잘 모르겠어. 그러나 우리는 많은 혜택을 받았으니 그걸 생각해봐”라고 말한다. 그레이스의 죽음에 오열하는 인디아를 브리지는 이렇게 달래준다. “그녀 남편은 무엇이든 해주려 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주변 사람을 힘들게 했소. 그녀가 남편이나 아이들을 생각이나 했는가?” 자아가 뚜렷한 아내를 둔 보통 남편 바론의 심경을 대변해준 셈이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해도 사랑, 존경, 인격은 바뀌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브리지. 뭔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혼자서는 남편 그늘과 자식들에게로 향한 맹목적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인디아. 부모의 품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그토록 갈망했지만 세상이 녹록지 않음을 알고 결국 부모 곁으로 돌아오는 자식들. 브리지 가족의 옛날 흑백 기록 필름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여, 가족사와 이후 이야기를 자막으로 처리하면서 끝나는 는, 이상적인 혈연 공동체를 희구한다. 이상의 구심점은 결국 아내와 어머니라는 것. 거친 세상을 휘젓고 다녔어도 마음 내키면 언제나 돌아와 쉴 수 있는 아내와 어머니의 품. 그래서 그 아내와 어머니는 세상의 세파를 맞받지 않고 순결한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아내와 어머니를 지켜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속삭인다. 여권 운운하는 입장에서는 성에 안 차는 영화이겠지만, 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 속에서도 장수 프로로 자리 잡았던 것처럼 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크게 비난할 거리가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 같은 주제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눈이 몹시 내리던 날, 인디아는 외출을 위해 차고에서 자동차에 시동을 건다. 시동이 걸리지 않아 밖으로 나오려 하지만 차고 문이 자동차 문을 꽉 막아 밖으로 나올 수가 없다. 배기가스가 가득 차 호흡이 곤란해지자 도움을 청하는 그녀의 음성은 너무나 가냘프다. 차창 위로는 눈만 가득 쌓인다. 혼자서는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없는 아내와 어머니를 상징하는 듯하다. 브리지가 시간 맞춰 와준 덕분에 인디아는 무사했지만 화가 난 브리지는 그 자동차를 폐기처분시킨다. 불안이 없지 않지만 남편과 아이들 속에서 행복한 노년을 맞이한, 세파를 모르는 귀여운 어머니상을 연기한 조안 우드워드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폴 뉴먼의 아내인 조안 우드워드는 에서처럼 아까운 배우 인생을 산 것이 아닌가 싶다. 그녀의 연기력이 나무랄 데 없는데,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영화 출연이 뜸했기 때문이다. 1958년에 결혼한 두 사람은 폴 뉴먼이 200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았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감독 제임스 아이보리는 미국 출신이지만, 인도인 제작자 이스마일 머천트와 인도인과 결혼한 독일 출신 작가 루스 프라워 자발라와의 협업으로, 300만 달러 내외 제작비로 품격 높은 작품들을 내놓은 것으로 유명했다. 인도의 거장 사타야지트 레이와 프랑스 고전 영화계를 대표하는 장 르누아르의 영향을 받은 초창기 작품들은 영국과 인도를 배경으로 한 이질적 문화 충돌을 다뤘다. (1965), (1970), (1893)이 이에 속한다. 고전문학 작품을 우아한 시대극으로 재창조하는 데 남다른 열정과 재능도 발휘했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이 원작인 (1970)와 (1984)와 (2000),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 소설이 원작인 (1985)과 (1987)와 (1992), 일본계 영국인 이시구로의 소설을 각색한 (1993), 가 그러하다. 예술가를 꿈꾸는 현대 뉴욕 젊은이들 이야기인 (1989), 여성 편력을 중심으로 한 피카소 일대기 (1996), 미국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의 파리 대사 시절을 그린 (1995), 다이앤 존슨의 베스트셀러가 원작인 (2003)도 삼인방의 필모그래피에서 처지지 않는 작품들이다.
- 2017-05-11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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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잊었던 어머니의 음성
- 지난 4월 14일 이투데이 신문사에서 자매지 제2기 동년기자단 발단식이 있었다. 1기 때보다 더 체계적이고 철저한 준비로 보다 성숙된 모습을 보여준 이 자리에는 지난해 4월 선발되어 활동해온 1기 기자들과 2기로 선발된 40여 명의 기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투데이 총괄 대표 및 이투데이PNC 대표, 브라보 편집국과 임직원 모두는 따뜻하고 친절하게 동년기자들을 맞이해주어 분위기가 훈훈했다. 지난해와 달리 의자 배열도 회의식으로 배치해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해 화기애애한 시간을 만들어줬다. 총괄 대표님께서는 축사를 시작으로 글쓰기에 관해 조언을 해주셨다. 글쓰기는 특별히 잘 쓰려고 애쓰는 것보다는 일상의 이야기를 평범하게 쓰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시는 말씀에 많은 공감이 됐다. 특히 대표님이 하신 말씀 중에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는데 그것은 요즈음 나이 드신 어머님을 만날 때마다 녹음을 하신다는 말씀이었다. 순간 필자의 귀가 쫑끗 서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표님이 어머님을 만날 때마다 녹음을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어머님의 삶을 알아가기 위함이고, 두 번째 이유는 어머님의 음성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며 필자의 어머니가 생각났다. 애써 어머니의 음성을 기억해보았지만, 들려오기는커녕 아득히 먼 이야기처럼 아스라한 느낌만 몰려왔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고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필자는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정신없이 바쁜 삶을 살았다. 가게를 비울 수 없어 아침 새벽에서부터 저녁까지 일만 했다. 그러던 중에 한국에 계신 어머니가 운명하셨다는 통보를 받았다. 때마침 비자 문제로 한국을 드나들 수도 없을 때였다. 딸이 비보를 전해줬다. "엄마! 놀라지 말아요. 진짜 놀라지 말고 차분하게 들어요. 외할머니, 그러니까 할머니가 오늘 아침에 돌아가셨어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두 다리의 힘이 풀렸고,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저 멍하니 앉아 달려갈 수 없는 처지를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이 치러지는 4일 내내 필자는 전화통만 붙잡고 있었다. 국제전화로 생중계 듣듯 어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을 전해 들어야 했다. 이제 영영 헤어져 뵙지 못할 어머니께 인사도 못 드린 불효자가 되어 몇 날 며칠을 눈물 속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저 혼자 무례하게도 흘러갔다. 필자의 어머니는 팔십 평생을 병원에서 사셨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지독한 정신적 충격으로 사시는 내내 고달픔의 연속이셨을 것이다. 우리 집 다섯 자식, 작은집 네 자식을 어머니는 자신의 호적에 올려야만 하셨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는 요양원에서 생활하셨고 우리 집 5남매는 그곳에서만 엄마를 만나야 했다. 돌아가시기 5년 전, 한국에 잠깐 방문했던 필자는 엄마에게 거의 매일 찾아갔다. 어머니는 실내에서만 생활을 하셔서 그런지 얼굴은 하얬고 약물에 중독되어 퉁퉁 부어 계셨다. 몸은 날로 여위어갔지만 만날 때마다 둘째 딸인 필자의 두 손을 꼭 잡고 자식들 걱정에 여념이 없으셨다. 그러고는 마지막에는 꼭 " 나 좀 살려다오! 나 좀 데려가줘!" 하셨다. 그 말씀은 가슴에 꽂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하필이면 기억하는 게 어머님의 슬픈 음성뿐이다. 필자는 마음이 아팠지만 고개를 숙인 채 엄마를 자리로 조용히 안내하고는 살금살금 도망치듯 요양원을 빠져나왔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창문 너머로 엄마의 모습을 훔쳐봤다. 어머니는 어느 날 필자가 사다 드린 새 옷을 갈아입고 챙 달린 흰 모자를 쓰신 채 자리에 누워계셨다. 몸이 불편하신지 얼굴을 찡그리신 채 인상을 쓰고 두 눈만 껌뻑거리고 계셨던 어머니. 필자는 무거운 마음으로 독하게 돌아섰는데 그때 그 모습이 영영 마지막이 되고 만 것이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죄책감을 안고 필자의 고향인 충남 부여, 엄마를 모신 곳으로 달려갔다. 엄마의 다정했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누워 계셔서 외롭지는 않을 것이라고 애써 위로하며 눈물만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나왔다. 그때만 해도 엄마의 여린 음성이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했다. "괜찮다. 나는 이제 편안해. 걱정 말아라. 아버지가 영원히 내 곁에 있으니까." 대표님의 말씀을 듣다가 왜 필자는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어머님의 음성을 녹음해둘걸 후회가 되었다. 늘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를 잊고 산 세월이 죄인처럼 느껴졌다. 이제라도 가끔씩은 어머니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하늘 어딘가에서 필자에게 건넬 착한 우리 어머니의 음성을 어렴풋이나마 느끼며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고 비까지 내리는 날이었지만 동년기자단 발단식에 참석하기를 참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2기 기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지난 1년 동안 서로의 글을 보며 삶을 공유하고 정을 쌓아온 1기 기자들과도 얼굴을 마주하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더불어 필자의 감성을 일깨워주신 총괄 대표님의 감동적인 말씀에 감사드린다. 임직원분들의 친절함에도 고맙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다. 저 하늘에서도 영원히 내 삶의 주춧돌이 되어주실 우리 엄마를 기리며….
- 2017-04-17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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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철 전 원주시 부시장과 아내 안춘희씨, 바이크 보헤미안 부부의 수상한 두 바퀴 여행
- ‘정해진 둥지도 없어 아무 데나 누우면 하늘이 곧 지붕이다. 코끝에 스치는 바람, 흔들리는 풀잎 소리, 흐르는 도나우 강물이 그저 세월이리라. 우린 자전거 집시 연인이다.’ 최광철(崔光撤·62) 전 원주시 부시장이 유럽 자전거 횡단 중 자신의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자유로운 영혼의 감성이 물씬 느껴지는 그의 여정에는 빠질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아내 안춘희(安春姬·59)씨다. 자전거의 두 바퀴처럼 언제 어디서나 나란히 함께하는 두 사람의 유유자적 여행기를 들어봤다. 최광철 전 부시장이 50세가 되던 해의 어느 날, 부부는 여느 때처럼 한강변을 거닐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잠시 쉬는데, 한 청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흙으로 범벅된 청년의 자전거를 본 남편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자전거가 흙투성이라 물어보니까 산악자전거라는 거예요. 어? 왜 위험하게 자전거를 산에서 타지? 이상하게 생각했죠. 조금 이따가 그 청년이 다시 자전거를 타고 터널로 달려가는데, 그 뒷모습이 참 터프하고 멋져 보였어요. 그러고 조금 지나니 뭔가 아쉽더라고요. 우리는 그런 것도 못 누렸는데 나이가 들어버렸잖아요. 근데 아내도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길로 아내랑 같이 가서 자전거 두 대를 질러버렸죠.” 인생 2막의 ‘도전’, 인생 1막으로부터의 ‘도피’ 우연한 기회로 취미를 찾은 부부는 전국 방방곡곡을 달리며 부지런히 페달을 밟았다. 그리고 10년 후, 남편은 은퇴를 앞두고 인생 2막에 대한 고민에 휩싸였다. “은퇴를 하고 나면 어떨까? 나름 부시장이라는 직책으로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모든 환경이나 생활리듬이 바뀌면 적응할 수 있을까? 하릴없이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직장 동료라도 만나면 우울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이곳(원주)에서 그대로 지내는 게 영 가시방석처럼 불편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고민 끝에 그가 찾은 돌파구는 ‘자전거 세계일주’였다. 영혼의 동반자이자 자전거 파트너인 아내도 함께 가기로 했다. 은퇴 후 무력감에 빠지지 않도록 최대한 일찍 떠나고 싶었다. 퇴직일은 2016년 6월 30일, 그로부터 보름 후인 7월 16일을 디데이(D-day)로 잡았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발해 독일, 룩셈부르크, 프랑스, 영국을 가로지르는 3500km 횡단 종주를 목표로 하고, 여행 기간은 3개월로 정했다. 부부가 자전거 여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그들의 도전에 감탄하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도전’보다는 ‘도피’에 가까웠다고 말하는 남편이다. “여행을 다녀와서 인터뷰도 많이 했지만 아직도 그 계기에 대해 스스로 되묻곤 해요. 남들은 은퇴하고 크루즈를 타고 지중해도 가고, 더 편하고 고상하게 여행을 즐기는데 난 왜 그 험난한 여정을 택했을까? 그동안은 누가 물어보면 도전이나 열정처럼 그럴싸한 이유를 댔는데, 사실 그보다는 현실도피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공무원 생활을 하며 평탄하게 지내왔는데, 뭔가 새로운 환경에 나를 던져보고 싶었어요. 그런 담금질의 기회를 얻고 나면 용기와 자신감이 생기고, 막연하게나마 새로운 희망이 보이리라 생각했죠.” 남편에게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아내에겐 ‘남편’ 그 자체가 이유가 됐다. 오랜 시간 자전거를 취미로 삼았지만, 유럽 횡단은 꿈도 안 꿨다는 아내다. 낯선 환경에 장기간 해외여행이라는 점도 우려스러웠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아내의 건강이었다. 떠나기 3개월 전, 허리에 통증이 와서 병원을 찾은 아내는 척추협착증 진단을 받았다. 자전거를 무리하게 타지 말라는 주의를 받은 터라 무작정 일정을 강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어렵겠다는 판단을 내리려던 그때, 아내는 병원에서 두 달 치 진통제를 처방받아왔다. 체념 섞인 비장함으로 그렇게 무리수(?)를 던진 부부는 예정대로 여행을 떠났다. 부부가 함께 쓰는 명함 유럽 자전거 여행을 성공리에 마친 그들은 다음 해에 동북아 자전거 횡단 길에 올랐다. 첫 여행의 두려움과 낯선 자신감과 희망으로 채워졌다. 점점 탄력이 붙어 최근에는 ‘달려라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뉴질랜드를 누비고 왔다. 당시 기자와의 첫 통화에서 “뉴질랜드에서 아내와 자전거 타고 있어요!”라고 말하던 최 전 부시장의 건강한 음성이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만난 부부의 건강한 미소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똑같은 헬멧에 똑같은 점퍼, 똑같은 아웃도어를 입은 부부는 똑같은 명함을 내놓았다. ‘수상한 여행, Bike Bohemian 최광철·안춘희’라고 쓰여 있는 부부명함이다. “영화 를 보면 칠순 할머니가 우연히 청춘사진관에 들어갔다가 20대로 변하거든요. 다시 젊음을 만끽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우리 여행이랑 콘셉트가 맞더라고요. 그래서 ‘수상한 여행’이라고 지었어요. 직장이나 직함 대신 자전거 집시 ‘바이크 보헤미안(Bike Bohemian)’, 그리고 나와 아내의 이름을 넣었죠.” ‘소박하고 쾌활하게 유랑생활을 하면서 삶의 고통을 이해하고 아름다움의 근원을 찾아가는 자전거 여행 부부’라는 의미가 담긴 명함이라고. 새 명함으로 은퇴 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는 남편처럼, 아내 역시 명함이 생기면서 이전과는 다른 생동감을 느끼며 산다. “잠깐 직장생활을 하긴 했지만, 30년 넘게 전업주부로 살다 보니 명함이 익숙하지는 않았어요. 필요성을 못 느끼기도 했죠. 남편 덕분에 명함이 생겨서 요즘엔 어디 가면 나도 내 명함이라고 주기도 하고 그래요. 그러다 보니 뭔가 더 의미부여도 되는 것 같고, 남편이랑 함께 쓰는 명함이라 그런지 더 좋더라고요.” 그런 아내의 모습에 가슴이 뿌듯해지는 남편이다. 최 전 부시장은 다른 이들에게도 자신들처럼 부부명함을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얼핏 이런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한 건데, 막상 만들고 보니까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들이 들으면 주책없다 할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동행할 사람인데 같은 명함 쓰면 좋잖아요. 직장생활 할 때도 상무든 대표든 그의 아내 누구 이렇게 써놓으면 어때요. 그게 뭐 나쁜가요? 부부는 일심동체인걸요.” 시간이 지배하던 일상을 벗어나다 명함에 적힌 ‘보헤미안’이라는 수식어처럼, 해외여행을 다니며 그야말로 집시의 삶을 살았다는 그들이다. 가고 싶은 곳으로 달리고,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쉬고 싶을 때 쉬고. 미션은 단 하나, 90일 안에 최종 목적지인 영국 서쪽 대서양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유유자적하고 낭만적인 모습에 부러움을 사는 그들이지만, 이러한 생활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고 한다. 특히 38년 공직생활에 몸담아온 남편에게 자유란 출퇴근보다도 낯선 존재였다. “9시에 출근하고, 9시 반에 회의하고, 10시에 기관 협의하고…. 그렇게 30분, 1시간 단위로 하루를 살았어요. 내가 시간을 관리한 게 아니라 시간이 나를 관리했던 거죠. 특별한 게 없는데도 6시엔 호텔에 도착해야지, 8시엔 저녁을 먹어야지. 그런 시간의 강박관념 같은 게 있는 거예요. 6시에 호텔에 가면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나? 누가 나를 기다리나? 아직 배가 안 고픈데 저녁 좀 늦게 먹으면 어때?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조금씩 시간의 틀에서 벗어나 편안해지더라고요.” 그는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내 의지대로 사는 것이 바로 보헤미안의 삶’이라며 아직은 온전히 그 자유를 누리지는 못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그 과정에 있으니, 점점 더 좋아지리라 희망한다. 일상에서의 탈피는 또 다른 변화를 불러왔다. 익숙했던 배우자의 새로운 면모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새벽에 잠을 푹 자고 일어나서 아내 얼굴을 봤는데 ‘어? 이 사람이 누구지?’ 깜짝 놀랄 정도로 새롭고 낯설 때가 있어요. 여행을 하다 보면 ‘여기가 어디더라?’ 그런 생소함이 들기도 하고요. 내 환경이나 의식이 완전히 탈태됐다고 할까? 직장생활 할 때는 나는 나대로 일하느라 바쁘고, 아내는 아내대로 혼자 집에서 뭔가를 했잖아요. 우리는 텐트생활을 많이 했는데, 텐트는 혼자 개고 펴기가 쉽지 않아요. 서로 마주보고 양쪽 귀퉁이를 잡아야 접을 수 있고, 다시 펴는 것도 함께해야죠. 그렇게 함께하는 것들이 많아지니 전보다 더 가까워진 기분이에요.” 아내 역시 “때론 남편이 멋있어 보이기도 한다”며 알콩달콩 장단을 맞췄다.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이국에서 남편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고, 낯선 레스토랑에서 즐기는 와인 한 잔은 연인들의 데이트처럼 로맨틱했다. 제발 그 말만은 하지 마오! 모든 순간이 그렇게 낭만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텐트에 비가 들어 눅눅한 채로 잠들어야 하는 날도 있었고, 밤늦게 길을 잃어 경찰이 출동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무더운 날씨에 오르막길을 오르며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남편은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우격다짐해서 온 건데 아내가 후회하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드니까 오히려 ‘집에 가고 싶지 않냐, 힘들지 않냐’ 못 물어보겠더라고요. 나도 힘든데, 아내는 얼마나 더 힘들겠어요. 내가 그렇게 물어보면 대번에 돌아가자 할 것 같은 거예요. 그럼 내 마음도 약해지니까, 더 못 물어봤죠.” 애써 힘든 줄 알면서도 마음을 감춘 남편의 마음을 아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남편이 나에게 ‘돌아갈까?’ 이렇게 묻지 말아 달라고 속으로 바랐어요. 그렇게 물어보면 정말 가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그이가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왔는지 잘 아는데, 나 때문에 포기하게 할 수 없었어요. 만약에 내가 집에 가자고 했으면 다 접고 왔을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힘들어도 절대 그런 나약한 소리는 하지 않았죠.” 부부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했던가. 함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꾹꾹 감춰뒀던 속마음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졌다. 보헤미안 부부처럼 행복한 여행을 꿈꾸는 이들이 있을 터. 그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은퇴하고 배우자가 여행을 가자고 하면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어요. 40~50대부터 함께 취미생활도 하고 시간을 보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여행을 떠나는 게 쉽지는 않을 거예요. 시간이 나면 배드민턴을 하든 탁구를 하든 작은 취미활동이라도 함께하길 권해요. 그리고 자유여행을 가게 된다면 너무 완벽한 계획을 세워서 가지 않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거기에 맞추느라 재미가 없거든요. 큰 흐름을 갖고 함께 겪어가면서 즐거운 흔적, 또 조금 힘든 흔적을 남겨가면서 추억을 만들다 보면 더 자유롭고 신선한 여행이 될 거예요.”
- 2017-03-27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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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조부모가 되기 위한 노력
- 맞벌이가 대세인 요즘 손자녀들의 양육과 교육의 절반이 조부모 몫이다. 예전에도 손자녀의 돌봄이 있었지만 밥이나 챙겨주는 소극적 양육이었다. 아이들은 골목에서 또래 아이들과 떠들고 장난치고 밤이 깊어 가는지도 몰랐고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부르면 그때 달려서 엄마 품에 안기면 끝이었다. 과외공부도 없었고 고작 학교 숙제가 발목을 잡는 그야말로 숙제였다. 지금의 아이 양육은 먹이고 씻기는 일은 기본이고 시간 맞춰 과외수업 현장으로 내 몰아야하고 교통사고나 유괴의 우려가 없는지 늘 매의 눈으로 아이를 살펴봐야 한다. 금쪽같은 내 손주 누구나 다 잘 기르고 싶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잘 기르는 방법은 모른다. 아이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어떤 놀이를 해줄까? 어떤 이야기를 해주면 좋아할까? 늘 궁금증은 있었다. 그러던 차에 건강가정 지원센타에서 "3가지로 좋은 조부모 되기"강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참가하게 되었다. 3가지는 "마음이 통하는 조부모, 신체 놀이가 통하는 조부모, 구연동화가 통하는 조부모" 가 가되기 위한 교육이었다. 손자녀의 마음을 읽고 유아의 눈높이에 맞춘 조부모의 구연동화는 장차 손자녀가 살아가는데 마음속에 커다란 원동력이 된다고 강사가 강조한다. 할머니 무릎에서 들었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는 지금도 가슴에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을 봐서 틀린 말이 아니다. 피아제(스위스출생, 아동발달심리학자 1896~1980)의 인지 이론에 의하면 유아기의 심리는 돌멩이를 비누로 상징하고 모래로 밥을 짓고 풀잎으로 나물을 만들어 소꿉놀이를 한다.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보고 듣는 직관적 사고로 무생물도 살아서 숨 쉬고 느끼고 자란다는 물활론적 판단을 갖고 있다. 더구나 자기가 꾼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믿으며 사물이나 현상을 한 방향으로만 생각하고 자기중심적이어서 사물의 여러 측면을 동시에 고려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이와 어른은 다르다. 내 아이를 키울 땐 거창한 이런 걸 모르고 못 느끼고 가슴의 사랑으로만 키웠다. 나이 들어서 사회복지사 공부를 하면서도 피아제의 인지 이론을 공부했지만 감동 없이 그러려니 했다. 잊고 있던 유아기의 심리상태를 선생님 말씀과 그동안 손자녀의 행동을 견주어보니 아이들 마음이 이런 마음 이었구나 하고 이해가 가고 배우고 안다는 것이 즐겁다. 유아원에서 첫 아이에게 아빠 직업을 물었더니 도둑 잡는 경찰관이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이 "너희 아빠 참 훌륭하시다. 우리 친구들 여기 봐요! 누구 아빠 대단해요 우리 박수 한번 쳐줘요"한 후 다음 유아에게 아빠 직업을 물으면 경찰관 이라고 대답 한단다. 그 다음 유아도 또 그 다음 유아도 모두가 자기 아빠가 경찰관이라고 대답 한단다. 유아에게 거짓말 한다고 야단 칠 필요가 없다. 이것이 유아의 심리 상태란다. 아이들끼리 소꿉놀이 하는 걸 유심히 보면 모래로 밥을 하고 풀잎을 뜯어서 김치를 담근다. 아이들 세계는 그것이 정상이다.구연동화를 위해서는 작품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동화를 익힌 후 거울을 보면서 연습하고 녹음을 해서 듣고 고쳐가며 많은 실연을 해야 자연스러운 동화구연이 된다. 시니어에게도 봉사활동이나 직업으로도 구연동화가는 매력적임에는 분명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풍부한 인생사가 들어있으니 자연스럽게 실감나는 구연동화가 가능하다. 원래 구연동화는 어떠한 소품도 사용하지 않고 교육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의 동화를 입으로 연기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정에서 다양한 교재를 활용하거나 집에 있는 간단한 소품들을 이용하면 더욱 실감나는 연기를 재미있게 할 수 있다. 음의 높낮이 와 등장인물에 적합한 음성을 모방하고 가끔 효과음을 넣는다면 아이들은 행복하고 놀라운 가상의 세계에 빠져든다. 좋은 조부모되기 위해 노력하고 아이의 마음 상태를 알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노인도 유아의 심리상태로 돌아간다. 얼굴과 목소리는 녹슬었지만 마음만은 유아가 된다. 회춘이 따로 없다. 생각이 젊으면 몸도 젊어진다. 유아의 눈높이에 맞는 종이접기, 구연동화 실제 해보기로 서툴지만 한바탕 웃음으로 끝이 났다. 배움은 끝이 없고 배워야 산다.
- 2017-02-28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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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나가는 사람에게는 이유가 있다 PART6] 올바른 습관 신통방통! 운 좋아지는 습관에 도전하다
- 운에 관한 이야기를 논하다 보니 정말 어떻게 하면 운 좋은 사람 대열에 들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성공적 삶을 살고 있는 분야별 대가, 아름다운 가정에서 근심 걱정 없이 사는 이들을 만나다 보면 공통점이 느껴진다.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임에도 이구동성 하는 말과 행동이 있다는 것. 일본의 정신경영 대가 니시다 후미오의 저서 과 , 미국의 에리카 J. 초피크와 마거릿 폴이 함께 쓴 , 지금까지 만난 취재원의 인생이야기를 바탕으로 ‘운 좋은 습관 만들기 5일 행동강령’을 구성해보았다. ◆1일차◆ “긍정적인 말과 표현을 하자” 2014년 개봉된 시니어 본격 로맨스 다큐멘터리 영화 를 보면서 긍정적 표현과 말의 힘을 느꼈다. 영화 속에서 소녀 감성 89세 강계열씨가 남편과 대화할 때 사용되는 단어와 문장은 긍정적인 표현으로 이뤄져 있다. 행동 또한 사랑이 넘쳐난다. 운이 좋아지는 습관을 만들어주는 31일간의 행동강령으로 구성된 의 3일 차에서 주목하는 것이 바로 ‘긍정적인 말’이다. ‘말은 마음(혼)을 만들기 때문에 무섭다.’ 책에서 인용한 이 말은 일본인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말이다. 부정적인 말을 사용함과 동시에 안 좋은 이미지가 떠오르고 나쁜 감정으로 빠져버리기 쉽다. 마치 불쾌한 경험을 했거나 어디선가 그 일이 이뤄진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있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결과는? 당연히 좋을 리 없다. 차가운 분위기가 흐르고 말을 못 걸 뿐 아니라 며칠을 지속하다 보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하나 고민스럽다. 장난처럼 들리겠지만 정말 한 끗 차이다. 더 많은 문장을 생각해보길. 일상생활에서 내가 쓰는 말이 어떤지 말이다. 무엇보다 긍정적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안정적이다. 흔들리지 않고 자신감이 넘친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 취재원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이 선택한 말을 손으로 옮기면서 그 사람의 인상, 심상 등을 생각하게 된다. 안정적인 목소리와 함께 긍정적인 단어 사용은 상대방에게 신뢰와 믿음을 주고 다시 만나고 싶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은가? 긍정적인 표현이 첫 번째 단추가 될 것이다. ☞솔루션 부정적인 말, 긍정적인 말로 바꿔 말하자. 입버릇처럼 부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훈련이다. 말을 내뱉기 전에 자기가 할 말을 곱씹어 보고 천천히 말을 한다. 밉다, 싫다, 짜증, 아니다. 불쾌하다, 재수 없다 등만 일상에서 쓰지 않도록 주의하자. ◆2일차◆ 상대방을 감동시키자 니시다 후미오의 책 의 내용은 정말 간단하다. 하루에 한 번씩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행동이 일상에 좋은 기운을 불어넣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삶을 개선해나가는 성공 법칙이라고 소개한다. 성공을 위해 뭘 배우고, 어떤 사람을 찾아가는 것 말고 먼저 남을 위하는 습관을 들이라는 것. 배려하고 좋은 행동을 하려는 마음은 소소한 변화에서 집단적 실천까지 불러일으킨다. 선한 일을 생각하거나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안정되고, 인체 면역력이 높아지는 효과를 ‘테레사 효과(The Mother Theresa Effect)’(하버드의대 보고서·1988)라고 부른다. 테레사 수녀가 명상록에서 밝힌 일화, 즉 9000명분의 식사가 똑 떨어졌을 때 빵을 한 가득 실은 트럭이 오는가 하면, 죽어가는 아이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약이 기증 품목에 들어 있었던 사례는 너무 유명하다.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가능했을까? 테레사 수녀의 헌신적인 봉사와 사랑이 불러온 긍정적인 효과다. 최근 식품업체 ‘오뚜기’에 대한 국민적 성원도 테레사 효과의 일면이다. 시식사원 전원 정규직 전환, 심장병 어린이 돕기 사업, 1500억원의 상속세 완납 약속 등으로 ‘갓(God)뚜기’라는 별칭까지 얻고 ‘이젠 오뚜기만 먹겠다’는 소비자들도 늘어났다. 이들은 결코 어떤 효과를 생각하고 한 행동이 아니다. 한결같은 선행을 이어나갔고 시간이 흘러 긍정적인 효과로 다가온 것일 뿐이다. ☞솔루션 1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던 사람의 장점을 생각해볼 것. 2 진심을 다해 인사할 것. 3 연애하라. 그리고 더욱 사랑하려고 노력하라. 상대에 대한 좋은 마음이 쌓여 행동으로 옮겨지면 운 좋은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3일차◆ ‘부정적 생각이 엄습할 때 3초의 룰’ 사람이 살다 보면 실패도 있고, 기분 나쁜 일, 견디기 힘든 일도 당하게 된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풀이 죽고, 화를 내고, 한숨을 내쉬고, 눈살을 찌푸린다, 그리고 심지어는 운다. 니시다 후미오는 에서 이런 동작과 표정은 뇌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욱 각인시킨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힘든 상황이 닥치더라도 의식적으로라도 부정적인 표정과 동작을 취하지 말기를 조언한다. 그 비책이 바로 ‘3초의 룰’이다. 불쾌한 일이 있어났을 때 그 일을 잊기 위한 신호를 정해두는 것이다. 최면에서 깰 때 ‘레드선’ 하면서 일어나는 것과 비슷하다. 표정, 동작 또는 말도 좋다. ‘3초의 룰’은 부정적으로 흘러갈 감정선을 긍정의 에너지로 변환해준다. ☞솔루션 : 에잇! 물러꺼라~! 나쁜 생각, 나쁜 상황이여!! 나만의 스타일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밟고 지나갈 수 있는 룰을 만들어 사용하라. 행동, 말, 동작 뭐든 좋다. 예) 손뼉을 친다, “아무 일 아니야!”라고 말한다. 또는 발을 구른다든지, 물을 마신다든지 한다. 가능한 한 간단한 것이 좋다. ◆4일차◆ 당당하고 씩씩하게 걷자 20대 초, 한 연극배우가 연극배우와 뮤지컬 배우를 구분하는 방법을 알려준 적이 있다. 뮤지컬 배우는 딱 봐도 ‘내가 배우야’라는 걸 강조하듯 세련된 옷을 입고 구름 위를 통통 튀듯 당당하게 걷는다, 머릿결을 찰랑거리면서 누군가를 만나면 ‘솔’ 음에 목소리를 맞춰 리듬감 있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넨다, 연극배우는 잦은 연습으로 트레이닝복을 입고 무대가 아닌 이상 화려함은 내려놓고 걷는다. 한 사람의 의견이었지만 납득이 가는 내용이었다. 노래와 춤을 추고 큰 무대에서 관객을 아우르는 공연을 주로 하는 뮤지컬 배우와 대사를 통해 섬세한 연기를 해내는 연극배우의 표현 방식 차이에서 오는 행동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실생활에서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뮤지컬 배우의 걸음걸이를 권하고 싶다. 어깨를 쫙 펴고 턱도 좀 살짝 올리고 웃으면서 당당하게 걷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치유를 느낀다. 심각하게 힘든 일이 있었다면 더 어깨를 펴고 걷는다. 이 또한 의식적으로 해야 한다. 무엇보다 당당하게 걷는 사람은 폼도 나고 다른 사람에게 신선한 느낌을 준다. ☞솔루션 : 당당하게 걷기 전에 할 일 어깨와 등, 무릎을 쫙 편다. 목도 크게 한 번 돌려준다. 얼굴 표정도 중요하다. 한껏 당당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내 몸 구석구석에 말한다. “컨디션 최고!”라고. ◆5일차◆ ‘내면아이’ 존중하고 사랑하기 최근 등 인간의 심리를 소개한 다양한 책들이 출간되었다. 그중 공감하면서 실생활에 적절히 대입해봤던 것이 에서 말하는 실천이었다. 책 한 권의 내용을 짧게 설명하는 데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인간 누구에게나 내면아이와 내면어른이 존재한다. 내면아이가 내면어른으로부터 방치되거나 혹은 억압당했을 때 분노나 고통의 표현은 과격해질 수 있고 피해의식으로 표출될 수 있다. 반면 내면아이를 사랑으로 보듬고 훈련시키면 놀라운 능력과 자기 발전의 원동력을 주기도 한다. 내 안의 또 다른 나가 아니라 둘 다 나라는 것. 둘의 관계가 좋으면 좋을수록 살아가는 데 무리가 없다. 간혹 말을 내뱉기 전 ‘이 말을 하면 실수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는 말이 있지 않았나 생각해보자. 그런 일이 없다면 다행이지만 혹 그랬다면 이는 내면아이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해 생기는 일일 수 있다. ‘내면아이’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면 이에 관한 책을 꼭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내면아이가 가진 순수하고 맑은 정신은 ‘막돼먹은 아이’로 혹은 ‘창조적이고 획기적인 실천성’으로 표출된다. 가장 어려우면서도 반드시 알아야 할 나. 내 안에 꿈틀거리는 아이가 있다고 느껴지면 말을 걸어보길 바란다. ☞솔루션 내면아이 깨우는 세 가지 방법 1 글을 써서 대화한다. 그것이 부정적일지라도 글로 써서 뭐가 문제인지 생각해본다. 2 혼자서 역할놀이를 하듯 내면아이와 큰 소리로 대화한다. 이상한 짓이라고 생각하지 말 것. 말도 안 되는 투정처럼 일을 그르쳤던 상황이 있었다면 꼭 필요한 과정이다. 3 그리고 마음껏 말하도록 내버려둬라. 음성언어로 내뱉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운 좋아지는 습관에 대해 찾아보고 글을 쓰다 보니 느끼는 것은? 운이 좋고 나쁜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이나 현상이 혼자만의 생각으로 한순간에 부정적이거나 또는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다. 너무 의미심장하게 운 좋은 습관을 만들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 어제 에스컬레이터를 탔으면, 오늘은 계단으로 가보자. 내게 가까운 작은 선택과 실천이 어느새 반짝반짝 빛나는 운을 가져다줄 것이다. 힘든 상황이 닥치면 의식적으로라도 부정적인 표정과 동작을 취하지 말기를 조언한다. 그 비책이 바로 ‘3초의 룰’이다. 불쾌한 일이 있어났을 때 그 일을 잊기 위한 신호를 정해두는 것이다
- 2017-02-20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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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나가는 사람에게는 이유가 있다 PART5] 나쁜 인상 VS 좋은 인상, 대선 후보 중 누가 가장 잘나갈 관상일까
- 박정희 혜담(慧潭) 인상코칭 연구원장 iliseo80@naver.com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정국으로 인해 19대 조기 대선이 가시화되고 있다. 대통령의 탄핵은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무너진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선거철이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대통령 상(相)이 따로 있나요?’이다. 인상학을 공부하면서 배운 군주의 상은 이렇다. 첫째는 눈이 맑고 빛이 나며 자애로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둘째는 관골이 잘 싸주면서 코의 기운이 우람해야 한다. 세 번째는 수주(귓볼)가 두툼하고 풍윤해야 한다. 넷째는 이골(턱 주변)이 강하고 힘이 있어야 하고 탄력이 있어야 한다. 다섯째는 음성에 힘이 있어야 한다. 맑고 빛이 나는 눈은 명석함과 현명함을 나타내며 자애로움은 사랑을 담아 사람을 바라본다는 의미다. 관골이 잘 싸준 코는 재물에 대한 힘이 강해 부를 가져다주고 신의 또한 굳건하다. 두툼한 귓불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능력이 있으며 세상을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지혜가 있다. 턱의 힘이 강하면 상하 간의 조화로움을 중요시할 것이다. 음성에 힘이 있어야 내면의 힘과 상대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느껴진다. 이 모든 조건들을 다 가진 후보자가 과연 있을까. 지금부터 대선 후보들의 인상을 들여다보자. 우선 최근에 가장 많이 거론되는 4명의 인상을 비교해보자. 먼저 눈을 살펴보자. 반기문 후보의 눈은 가로로 길고 눈동자에 강한 힘이 담겨 있다, 반면 안철수 후보의 눈은 쌍꺼풀이 짙지 않아 부드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어떤 것을 직시할 때는 강한 불꽃이 튀는 듯한 매서움이 느껴진다. 문재인 후보의 눈은 짙은 쌍꺼풀에 검은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 있어 강렬한 기운이 느껴지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 같은 면모가 드러나 보인다. 박원순 후보의 눈은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가 조용하고 편안하게 보이지만 감추어진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고 기회가 주어지면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강인함이 느껴진다. 눈은 정신을 담는 그릇으로 그 사람의 인상을 좌우하는 대표적인 부위다. 대화를 나눌 때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것은 그만큼 강력한 소통 욕구가 있다는 의미다. 반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상대의 눈을 회피한다. 다음은 코를 살펴보자. 코가 가장 잘 발달된 후보는 안철수 후보라고 할 수 있다. 산근(눈썹과 눈썹 사이)의 힘이 좋고 콧대가 반듯하고 힘이 좋다. 명예를 중요시하며 자신이 가진 명예가 재물이 되는 코다. 반기문 후보는 자신의 삶에서 두 번째 행운을 만날 수 있었던 시기가 코의 나이, 즉 40 이후라 할 수 있다. 치밀하고 계산적이며 자신에게 온 행운은 절대로 놓치지 않는 코다. 문재인 후보는 욕망은 강하지만 그것을 담을 수 있는 창고(콧방울)가 다소 약해 보인다. 박원순 후보의 코는 창고가 잘 발달되어 있지만 창고 문이 커서 실속이 부족해 보인다. 코는 재산 관리 능력과 욕망, 지위 등을 나타내주는 부위로서 특히 대통령의 코는 국가 경제와 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직 대통령 중 한 분은 콧구멍이 너무 크고 콧방울(준두)에 힘이 없어 취임 초기부터 경제가 어려워질 것이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과연 우려했던 것처럼 많은 사건과 사고가 나서 국민들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매우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대통령의 코가 힘 있게 반듯하게 잘 내려가 있고 콧방울이 튼실한데다 관골까지 잘 발달되어 있으면 금상첨화여서 자신의 위상이나 재물운도 좋지만 나라의 경제도 튼튼하다. 입은 우리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부위로서 먹고 말하는 문제가 담긴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대선을 치를 때마다 입을 중요하게 보라고 한다. 특히 입술이 안으로 말려들어가 있는가를 잘 보라고 주문한다. 입술이 안으로 말려 들어간 사람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자신감이 부족하고 현재 속이 타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으로는 입술이 뒤집어지지 않아야 하는데, 입술이 활짝 뒤집힌 사람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 성향이 있다. 이러한 해석은 여자에게 더 해당되는 말이지만 남자 역시 비켜갈 수 없는, 얼굴이 주는 언어다. 19대 대선 후보들의 입은 잘생겼다고 할 수 없다. 다행인 것은 대부분 턱이 강하고 늘어져 있지 않아 하극상을 당하지는 않을 관상들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하늘이 낸다는 말이 있다. 결국에는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과 다가올 시간들이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따라 그에 맞는 적절한 인물이 선택될 것이다. ◇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인상 71세 트럼프의 강경 성향을 얼굴에서 살펴보려면 이마와 코부터 봐야 한다. 잘생긴 이마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넓고 반듯한 이마와 곧게 잘 다듬어진 콧대. 좋은 가정에서 자신이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금수저의 전형이지만 그는 돈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 신문배달을 하며 용돈을 마련했다고 한다. 트럼트의 경제관념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현재 트럼프의 모습은 그의 살아온 시간들의 이면을 정확히 보여준다. 그의 재산이 100억 달러라고 하니 실로 어마어마하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자신의 사업적 역량으로 키운 것이 아니라 잘 지켜서 자산 가치가 더 커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두 번의 이혼에도 재산을 잃지 않았다. 그의 콧방울은 사업가로서 부를 축적하는 코라기보다는 가진 것을 잘 지키는 코라 할 수 있다. 자신의 부동산을 이용해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견고해진 턱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지구력과 자신감의 소치가 아닐까. 트럼프의 얼굴에서는 타인에 대한 동점심이나 나약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치밀하고 계산적으로 보이는 눈, 넓고 잘 발달되어 있지만 각이 지고 단단한 이마는 냉정해 보이는 코와 함께 그의 면모를 강인하고 냉정한 사람으로 각인시키고 있다. 사진에서 보이는 그의 입은 크고 잘 발달되어 있다. 법령(입가의 주름) 또한 턱까지 잘 발달되어 있다. 이러한 그의 모습들을 관찰해볼 때, 작은 주변국들을 지원해줄 것이란 기대는 내려놓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나마 작은 희망이라도 가져볼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트럼프가 명예를 중요시하는 강한 인상을 가졌다는 것이다. >>박정희(朴正姬) 전 동방대학원대학교 문화교육원 인상학 교수 혜담 인상코칭연구원 원장으로 기업체와 대학에서 특강을 하고 있다. tv조선 인상학자 패널, 관상학 전문가 패널로 밝고 아름다운 인상미학에 대해 전파하고 있다. 저서로 , 등이 있다.
- 2017-02-16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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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박시룡 前 한국교원대학교 생물교육과 교수
- 인터넷 기사를 뒤적거려봤다. 박시룡(朴是龍·65) 前 한국교원대학교 생물교육과 교수의 기사는 그저 황새복원의 역사다. 읽다 보면 ‘박시룡’이 아닌 ‘황시룡’으로 읽힐 정도다. 한국에서 멸종된 황새 복원을 위해 살아온 세월만 20년. 황새들의 안녕을 잠시 뒤로 하고 사회에서 허락한 현역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고별 강연 준비에 여념이 없던 1월의 어느 날, 교원대 교정에서 박시룡 교수를 만났다. 한 분야의 대가를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인생에서 그 분야의 것을 빼면 어떤 얘기를 하게 될까? 박시룡 교수와의 인터뷰가 궁금했다. 그래서 황새 복원에 관한 이야기는 최소화해보려 노력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말 그대로 ‘기 승 전 황새 복원’. 박 교수가 교원대에서 한 마지막 강연 제목도 ‘황새를 부탁해’였다. “고별 강연 주제는 제가 정했어요. 제2권역인 충북을 통해서도 황새 야생 복귀를 실현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제가 떠나고도 교원대를 중심으로 황새 복원 사업이 계속돼야 하기 때문이죠.” 은퇴를 앞뒀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박 교수는 여전히 바쁘고 할 일이 많았다. 황새를 한반도 땅에 다시 날게 한 사람으로서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황새 복원 男, 알고 보니 박쥐 박사? 박시룡 교수는 원래 박쥐 연구로 공부를 시작했다. 경희대학교 학부와 석사과정을 통해 박쥐의 유전과 관련한 연구를 했고, 독일 유학 시절 박쥐 행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마쳤다. 그것도 흡혈박쥐에 관한 연구였다. “독일 유학 당시, 본 대학교에서 지도교수를 만나 박쥐를 연구하겠다고 했습니다. 마침 그분이 흡혈박쥐를 연구하는 분이셨어요. 세계보건기구(WHO) 파견으로 흡혈박쥐 주 서식지인 남미 코스타리카에서 연구하고 돌아온 전문가셨습니다. 흡혈박쥐를 독일로 옮겨 실험하고 있었죠. 저는 박쥐의 감각, 생리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초음파를 이용한 일상적인 박쥐의 음성학적 소통에 대한 학위 논문을 쓰고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교원대 동물학 분야 교수가 됐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보니 교육환경이 독일에 비해 매우 열악했다. 독일에서 썼던 초음파 녹음기는 당시만 해도 몇천만원 되는 고가 장비여서 살 엄두를 못 냈다. 교육부에서 기자재 지원 비용을 얻어냈지만 필요한 장비들이 너무 많았다. “소리를 분석하는 분석기가 필요해서 그걸 먼저 샀어요. 초음파 녹음기는 비싸서 포기하고 가청음이라고 있어요. 릴 테이프로 녹음하는 건데 그건 얼마 안 비싸더라구요. 가청음은 어디다 쓰냐면 새소리 녹음을 할 수 있었어요. ‘파라볼라(우산 모양의 극초단파 중계용 안테나)’라는 집음기를 들고서 새 가까이 가서 소리를 녹음해 수집하는 거죠. 그런데 저는 파라볼라가 없어서 TV안테나 뽑아서 썼어요(웃음). 조잡하다고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그런 식으로 연구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황새 복원 사업이 중요하다고요? 왜죠? 굳이 다른 얘기를 해보자고 해놓고 뜬금없이 물었다.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드러났다. 황새 복원은 멸종된 동물을 복원해 이 땅에 살게 하겠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였다. 그러면서 박 교수는 유학길에 올랐던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때가 1981년이었는데 광주 민주항쟁 바로 직후였어요. 외국에 처음 나가본 거죠.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르푸트한자를 타고 이동하는데 프랑스 대학생 무리가 한쪽 좌석에 무리 지어 앉아 있었어요.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데 그게 그렇게 부럽더라고요. 그 당시 우리가 많이 못살았어요. 저애들은 여유 있게 왔다 갔다 하는데 나는 지금 이 나이에 뭘 배우겠다고 유럽이라는 곳을 가고 있나. 눈물이 나더라고요.” 유럽에 가보니 모든 것이 풍부했다. 대형 마트가 넘쳐났고 사람들은 활기차 보였다. 문화충격이었다. 당시 한국은 모두가 급물살을 이겨내며 살던 시절이었다. 시국을 의식한 듯 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도 조심스럽게 꺼냈다. “박근혜 대통령하고 저는 1952년생 동갑입니다. 대학 시절 학생들이 데모한다고 계엄령을 내리고 학교 문을 닫아버렸어요. 공부를 못했어요. 저는 주동자가 아니었지만 경찰에 끌려들어갔다가 훈방조치됐고, 장발족 단속에 걸려 또 경찰서에서 하루 있다 나오고요. 통제당하고 어려운 시대에 박 대통령은 세상 물정 모르고 학교만 다녔어요. 나라의 아픔도 느끼고 성장했어야 하는데….” 또다시 유학생활의 단상이 이어졌다. 6년 동안 유럽 친구들과 허물없이 지내면서 그들의 ‘배려’하는 국민성에 놀랐고, 과거·현재·미래와 함께하는 장묘문화가 새롭게 느껴졌다. “독일의 경우 우리와 정말 다릅니다. 묘소가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데 화단으로 돼 있어요. 더 충격인 것은 30년이 되면 법적으로 없어집니다. 제한된 곳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는데 그걸 다 놔둬버리면 지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황새 복원 사업은 근본적인 상생운동 박 교수는 독일 유학생활 이야기를 통해 황새 복원 사업의 가치를 전하려는 듯했다. 배려를 기본 바탕으로 자연과 마주하고 미래 세대를 걱정하는 독일인들의 삶이 귀감이 됐다. 황새가 대한민국 땅에 뿌리를 내리고 개체 수를 늘려간다는 것은 상생과 순환의 근본을 잡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황새 복원 사업은 자연이 살고, 나라가 살고, 우리가 잘사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국민의 배려가 밑바탕이 돼야 합니다. 사람도 생태계의 한 구성원입니다. 사람은 숫자가 많으므로 표면적으로 잘 몰라요. 그런데 멸종 위기종, 한 개체의 멸종은 100년 200년 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겁니다. 그 종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요. 황새의 멸종은 결국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넘어 우리 사회의 문제를 보여줍니다. 가령 ‘농약을 얼마나 많이 썼기에 개체의 멸종을 가져왔을까?’ 예를 들어 일고여덟 쌍 중 한 쌍이 불임이라고 해요. 1960~1970년대에는 1cc당 1억 마리 정도 정자가 생성됐다면, 요즘 젊은이들은 1cc당 5000만 마리밖에 안 된답니다. 4000만 마리 밑이면 불임이라고 말해요. 우리가 알게 모르게 화학 물질에 어려서부터 노출되어 왔다는 거죠. 우리 생애는 너무 짧아요. 황새를 복원하기에는요. 황새를 넘어서 결국 우리 인간의 삶에 부메랑이 돼 어떤 형태로든 드러날 것입니다. 제가 말했던 것처럼 사람을 포함한 생태계와 우리 생활, 사회 전반에도 영향을 미칠 거로 생각합니다.” 황새는 현재 한국교원대 사육장에 96마리, 예산에 67마리가 있고 자연 방사로 서식하는 개체 수는 14마리다. 작년에는 자연 번식을 했던 암컷 두 마리가 전신주에 걸려 죽으면서 어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전반적인 시스템 재고의 필요성도 황새 복원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법적인 정년퇴직을 맞은 저는 겨우 20년 했는데 이 사업이 앞으로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꼭 좀 이어져 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품은 것은 40년, 그림 그린 것은 1년 박 교수는 은퇴를 앞두고 있던 작년 말,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황새와 자연을 주제로 한 수채화 전시회를 가졌다. 손사래를 치면서도 “유년 시절 미술 선생님이 ‘수’는 꼭 줬다”며 청문회식 답변(?)으로 본인의 소질을 인정했다. “유학 시절이 외롭더라고요. 독일 본은 흐린 날이 많아요. 그래서 가끔 스케치를 하고 그랬어요. 수채화의 대가 에밀 놀데(1867~1956)의 수채화 책을 보고 난 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 속앓이를 했습니다.” 독일 유학 시절 그림을 팔아서 학비를 벌 정도였다고 하니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본에서 유럽 박쥐학회가 있었어요. 그때 박쥐를 그려 액자에 넣어 30점 정도를 전시했는데 다 팔렸어요. 그림 팔아 번 돈으로 몇 개월 생활비로 썼습니다.” 그는 황새복원사업의 홍보를 위해 그림 재능을 활용하고 있다. 시중에 본격적으로 판매하는 것은 아니지만 컵이나 텀블러, 홍보용 티셔츠 등에 직접 황새를 그려넣었다. 글씨 디자인에도 관심을 갖고 있어 틈틈이 연습해 다양한 제품에 적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박 교수가 그린 황새 그림 100점은 질소 처리돼 고별 강연 이후 타임캡슐에 저장됐다. 이 캡슐은 100년 후인 2096년에 열게 된다고. “몇 작품은 학교 박물관에 기증했고 100점은 타임캡슐에 넣었습니다. 100년 후에 결국 황새가 복원됐는지 안 됐는지 알 수 있게 되겠죠. 이 그림과 함께요. 사람들이 그림을 보면서 생각할 겁니다. 우리 후손들이 되겠죠.” 은퇴 후 박 교수는 예산황새공원(충남 예산군 광시면) 쪽에 사무실을 얻어 황새 복원을 위해 다시 뛸 계획이다. 살면서 다른 길을 가본 적이 있냐는 질문에 단 한 번도 없다는 듯 멀리 시선을 둔 채 미소만 짓는다. “그래도 자연에 대해서 경외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인생을 살면서 감동 아닌가요? 황새와 상생할 100년 후를 상상해봅니다.”
- 2017-01-2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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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봉규의 心冶데이트] 16세 연상 남편과의 추억으로 먹고사는 아름다운 미망인 고은아
- 72세에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또 있을까? 연보라색 머릿결이 눈부신 고은아는 지금도 매력 발산 중이다. 여성의 미를 탐닉할 줄 아는 뭇 남성들이라면 그녀를 보는 순간 심장이 몇 초간이라도 멈출 수밖에 없으리라. 고은아와 띠동갑(46년, 58년 개띠)인 한량 이봉규도 사무실(서울극장 7층)에서 그녀를 만난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고은아의 우아하고 기품 있는 아름다움에 놀란 표정을 감추기 급급했다. 필자의 이런 속내를 들킬까봐 재빨리 질문했다. “머리는 염색하신 겁니까? 연보라색 머리 색깔이 너무 잘 어울리십니다.”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염색은 전혀 하지 않고 그냥 컬러린스를 사용하는데, 남대문 시장에 가면 살 수 있다”고 나름 비법을 공개한다. 머리를 감을 때 컬러린스로 행구기만 하면 된다는 것. 그러면 사람에 따라 갈색이나 짙은 회색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녀는 신비하게도 연보라색으로 나온다니 머릿결마저도 축복받은 미인이다. 지금도 매력을 발산 중인데 하물며 꽃다운 22세 그녀를 사로잡아 결혼에 골인한 곽정환 감독은 최고의 행운아다. 나이도 16세나 많고 결혼했던 경력이 있었기에 더욱 그렇다. 2013년 하늘나라로 먼저 간 곽정환 감독 일생일대 최고의 성공 작품은 고은아와의 결혼일 것이다. 지금도 남편과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먹고산다는 그녀의 세세한 증언으로 미루어볼 때 고인 생전에 부부 금실이 얼마나 좋았을지 대충 짐작이 간다. 곽 감독은 친한 후배 김기덕 감독(1934년생, 대표작 의 결혼식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는 대학생 고은아를 처음 본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때부터 곽 감독은 결혼 시나리오를 썼을 것이다. 그 후 자신이 대표로 있던 ‘합동영화사’의 작품에 여주인공으로 그녀를 발탁하고 ‘키다리 아저씨’ 역할을 충실히 했다. 합동영화사 사무실에서 개런티 협상을 할 때 그녀의 태도가 불만이었던 영화사 측 고위층은 당시 신인이었던 고은아에게 고성을 지르면서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신인인 주제에 너무 터무니없이 비싼 개런티를 불렀기 때문이다. 그때는 매니저 없이 배우가 직접 협상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그녀는 배우를 천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배우생활도 하기 싫어 이판사판으로 높게 불렀다고 한다. 그때 갑자기 사무실 문이 열리고 또 다른 아저씨가 들어오더니 “그냥 고은아가 달라는 대로 줘!”라며 방금 전 자신을 윽박지른 남자에게 명령을 하더라는 것. 알고 보니 협상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은 전무였고 문 열고 나중에 들어온 사람은 사장 곽정환이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키다리 아저씨의 보살핌은 계속되었고 어느새 고은아의 마음도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곽 감독의 다음 작전이 펼쳐진 것은 그 무렵. 느닷없이 고은아의 집을 방문해 어머니에게 “따님과 결혼하겠습니다”라고 선전포고를 했다는 것이다. 얼핏 봐도 나이가 많은 중년 신사가 느닷없이 찾아와 22세밖에 안 된 딸과 결혼하겠다고 하니 어머니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멍하게 있던 어머니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 거야?” 딸이 진정으로 이 남자와 결혼하기를 원하는지, 둘 사이가 어디까지인지 알아보기 위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고은아는 한참을 고민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어머니와 그 사람 둘 다 상처를 받지 않을까. 결국 그녀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할게요!”라고 대답했다. 고은아의 지혜롭고 영특한 대답에 어머니는 금쪽같은 딸의 결혼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곽정환이 이미 수차례 프러포즈한 것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툭하면 밤샘 촬영을 해대는 고된 생활에 지쳐서 집에 들어와 잠자리에 누우면 어김없이 곽정환에게 전화가 왔다. 화술이 좋았던 곽정환은 그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이런저런 얘기를 했고 고은아는 듣다가 그만 피곤해서 잠이 들곤 했다. 그런데 한참을 자다가 깨도 수화기 속에서 그의 음성이 계속 들렸다. 그럴 때면 비몽사몽간에 추임새처럼 “네~”를 연발하다가 또 잠이 들곤 했다. 당시 통화를 하면서 곽정환이 결혼하자고 여러 번 한 말을 그녀가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잠결에 “네”라고 했는데, 곽 감독이 이를 프러포즈에 응한 것으로 알고 정식 허락을 받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갔던 것. 결국 그의 진심에 하늘도 감동한 듯 첫 대면에 어머니의 마음까지 녹였다. 고은아의 어머니는 경기여고를 졸업한, 당시로서는 엘리트 신여성이었다. 이런 어머니였기에 딸의 사랑을 존중해주고 16세나 나이가 많고 재취자리인 결혼을 흔쾌히 허락하지 않았을까? 결국 어머니의 판단은 옳았고 부부는 행복하게 살았다. “부부 금실이 좋을수록 한쪽이 먼저 가면 남은 사람은 금방 새살림을 차린다”는 어설픈 구전을 믿고 도발 질문을 던졌다. “100세 시대이고 아직도 아름다우시니까 다른 멋진 남성분과 제2의 인생을 살아도 되지 않나?”라고 따지듯 물으니, “남편은 여러 역할자로서 이미 제2, 제3, 제4의 인생을 살게 해주었다. 때로는 오빠로서, 때로는 친구로서, 낮에는 직장 상사로서, 밤에는 연인으로서 매순간 버라이어티하게 행복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이성으로부터의 사랑은 필요치 않다”고 힘주어 말한다. 인터뷰하면서 그녀 사무실 벽면을 보니 각종 감사패와 트로피가 가득하다. 그동안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온 것을 여러 단체에서 알아준 결과다. 2003년부터 생명창고(현 행복한나눔) 대표로 활동하면서 기독교 나눔 문화를 확산하는 데 앞장서 왔다. 또한 파키스탄, 북한, 인도, 아프리카 등 해외 긴급구호 봉사활동을 해왔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정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전부 하나님의 간섭이었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아버지가 기도하다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만큼 독실한 신자인 어머니를 둔 모태신앙인 고은아. 그러나 대체로 모태신앙인이 부모 따라 마지못해 교회에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그랬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와 언니들의 성화에 못 이겨 기도원에 따라갔다. 그때 고은아는 대낮에 산속에서 벌어지는 기도원의 일련의 행태를 보고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다. 실망감에 기도원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런데 그 순간 목사님이 반말로 “너 왜 가니?”라고 소리쳤다. 그녀는 당시 꽤 유명한 영화배우였기에 “나를 몰라보는 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고 의아해했다. 그녀는 이런 사람에게 자신의 머리를 내주고 기도를 받을 수가 없어 기분 나쁜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몇 분이 흐른 뒤 어머니와 언니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할 수 없이 기도를 받았다. 그런데 그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번개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아! 내가 교만했구나! 내 인생 전체가 교만으로 얼룩졌구나!” 그러고는 처절한 반성과 함께 참회의 기도를 올렸다. “앞으로 저의 ‘인기’라는 것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녀의 맹세에 하나님께서 응답해주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몇 달 후 기독교방송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받자마자 직감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시작한 방송이 공개신앙고백 프로그램 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6년 정도 그 방송에만 몰두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충무로 영화계와는 멀어지게 되었다. 지금은 남편의 유업인 서울극장 대표와 행복한나눔 이사장으로서 봉사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몇 달 전부터는 첼로를 배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72세에도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발산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녀의 인생이 신앙과 봉사로 다져졌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의 본명은 이경희인데 영화계에 들어오면서 예명을 고은아로 지어준 분이 “일생을 내가 지어준 이름대로 살아줘서 고맙다”고 했단다. ‘고은 아이’라는 의미의 이름처럼 앞으로도 그녀의 인생은 곱고 아이처럼 순수할 것이다.
- 2017-01-20 1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