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옥임씨(鄭玉任·56)는 6년 전에 이혼하고 황홀한 돌싱(돌아온 싱글) 생활에 푹 빠져 있다. 데이트를 질리도록 하고 난 후 밤에 떨어지기 싫을 정도로 사랑하는 남자가 생겨도 앞으로 다시는 결혼 안 한다고 잘라 말한다. 지금처럼 뭇 남성들의 사랑고백을 받으면서 연애만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녀의 속내를 들춰보자.
이봉규 시사평론가
정옥임은 미녀 정치인의 대명사이자 베스트드레서로도 꼽힌 바 있는 매력적인 여인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날씬했다. 레스토랑에서 저녁 6시에 만났는데 나 혼자만 밥을 먹었고 그녀는 생맥주 한 잔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평소 저녁을 거를 정도로 필사적이다. 외모에 자신감이 충만해서일까 반지나 목걸이 같은 보석은 착용하지 않았다. 그녀의 외모 가꾸기는 “자기 자신의 관상용”이라고 항변하지만 아직도 뭇 남성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기에 자신의 외모는 가장 자랑스러운 자산일 것이다.
6년 전에 이혼하고 황홀한 돌싱(돌아온 싱글) 생활에 푹 빠져 있다. 그렇다고 방탕할 만큼 어리석은 여자는 절대 아니다. 자기관리에 충실하면서도 적당히 즐길 줄 아는 앙큼한 여인이다.
“마음에 드는 남성이 나타나면 먼저 대시할 용기 있다”고 말하면서도 상당히 재고 또 잰다. 알다가도 모를 그런 여자다. “여자들은 비밀스러운 스토리가 많아서 양파와 같다”면서 “알려고 파고들면 곤란하다”고 나에게 엄포를 놓는다. 그렇다고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내가 적당히 물러날 리 만무하다. 한량 이봉규가 느물느물하게 파고들어가니 그녀는 서서히 무장해제된다. 앙큼한 것 같으면서도 순진하고 순수한 여인이다.
10세 이상 연하의 남성에 매력이 끌린다고 고백한다. 최근 띠동갑 정도 어린 남자와 야릇한 감정을 교환한 적이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육체적 관계로까지 발전하기에는 겁이 덜컥 나서 적당히 밀고 당기는 정신적인 감정만으로 짜릿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볼은 어느새 붉어진다. 몇 년 있으면 환갑인 나이에도 소녀 같은 표정이 묻어 나온다. 띠동갑 연하의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지만 자칫 자신이 무너질까봐 겁이 나서 밀고 당기는 심리일까? 영화 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중년 남자(제레미 아이언스)처럼 주체할 수 없는 격정으로 치닫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처럼 보인다. “인생은 짧은데 후회하지 말고 저질러보라!”는 나의 도발에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일정 틀 속에 가둔다. 그런데 그 틀이 조만간 깨질 수도 있겠다는 조심스런 예감도 들었다.
정치토론할 때 터프하게 도발하는 그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본인의 입으로 여자는 양파와 같다고 말했는지 모른다. 정당하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나는 완전한 자유인이다”라고 외치면서도 이리저리 까다로울 정도로 재고 또 잰다. 정치인이자 세 명의 딸을 둔 엄마로서 띠동갑 연하의 남자와 대놓고 육체적 사랑을 하기에는 잃어버릴 것이 너무 많아서일까? 아니면 10년 후까지도 가지 못할 사랑이라서 미리 ‘손절매’(주식용어)라도 하는 걸까? 10년 후면 정옥임은 60대 후반인 데 반해, 그는 50대 중반의 팔팔하게 젊고 매력적인 남성이기에 자신이 추해 보일까봐 미리 겁을 먹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우려하는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는 곧바로 “어느 도사님이 그러는데 나는 늙어서도 남자들이 줄줄 따르는 타고난 남복(男福)이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본인 입으로는 말을 안 했지만 내 추측으로 띠동갑 연하의 남자와의 정신적인 밀고 당김은 현재도 진행형인 듯싶다. 틀려도 할 수 없고….
눈이 작고 쌍꺼풀이 없는 남자이면서 건강미가 있고 뇌섹남(뇌가 섹시한 남자)을 좋아한다고 하니 그의 모습이 대충 그려진다. 어린 남자를 좋아하는 심리는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누구에게 의지하기보다는 누군가를 보호해주고 싶고 포용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린 남자의 신선한 육체와 순수한 영혼이 늙은이들과 비교되어서 그럴까?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남자들 심리와 같은 것이겠지!
전 남편과 1983년 결혼해서 4년 만에 갑자기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버렸는데 그제야 남편과 안 맞는다는 불편한 진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불행을 타파하기 위해 내놓은 고육지책이 애들 데리고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이었다. 단단히 마음먹고 1995년 비행기에 올랐다. 늦은 나이에 공부하면서 아이 세 명을 키우는 일이 보통 어렵지 않았기에 스파르타식으로 살았다고 회상한다. 어릴 적 를 감명 깊게 읽었는데 어려운 시기에 큰 지침이 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아이들도 엄격한 생활을 잘 이겨내고 나름 멋지게 성장해주었다. 대견하게 생각하면서 스스로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남편과 떨어져 살면서 바쁘고 힘든 생활이었지만 오히려 행복감을 느꼈기에 6년 전 이혼하고 말았다.
“전 남편이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하니 돌싱으로 사는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뒤돌아보지 않는 그녀의 화끈한 성격 탓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옛사랑보다는 현재에 충실하다는 어느 심리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데이트를 질리도록 하고 난 후 밤에 떨어지기 싫을 정도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도 앞으로 다시는 결혼 안 한다고 잘라 말한다. 지금처럼 뭇 남성들의 사랑고백을 받으면서 연애만 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녀의 본심은 인생의 여백을 즐기기 위함일 것이다. 지금까지 처절하게 살아온 자신에 대한 보상심리일 수도 있겠다.
그녀의 인생은 최고를 향한 처절함의 연속이었다. 서울 성신여대부속여자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고려대학교 정경대학에 특차 수석 입학해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는 4년 내내 장학생이었고 정경대학을 수석 졸업했다. 결혼 후 딸 셋을 두고도 뒤늦게 고려대학교에서 1995년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 후 과정(Post-doc)으로 스탠포드대학에서의 강의를 시작으로 미국 후버연구소, 세종연구소,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CNAPS(동북아정책센터) 등 국내외 최정상의 연구기관에서 활동했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캠프에 참여했고 이후 외교·안보·통일 분야의 전문성을 인정받아 18대 국회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
이렇게 최고 전문가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은 늘 남는다고 한다. 국내 박사라는 이유로 우리 사회에서 차별도 많이 받았다.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최고 전문가를 지향했고 남다른 자존감이 있었기에 그녀 나름의 견디기 어려운 박탈감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국제정치 분야에서는 국내 박사보다는 미국 박사를 더 우대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상대적으로 차별을 당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도 자신이 제일 잘하는 일이 외교 분야이고 가장 하고 싶은 일도 외교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외교 전문가가 되겠다고 하니 그녀는 천직을 가진 행복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국내 정치 얘기로 화제를 옮겼더니 금방 표정이 달라지면서 흥분한다. “지금 새누리당이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고 날선 비판이다. “문재인이 집권하면 위험하다는 위기의식이라도 보여줄 수 있는 대권 후보조차 보이지 않아서 걱정”이라고 탄식한다.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그동안 스펙만 보여줬을 뿐 대통령으로서 역량과 결기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깎아내린다. 김무성 전 대표도 지난 총선 때 자신이 주장했던 ‘오픈프라이머리’를 지키기 위해 온몸을 던졌어야 하는데 대권 주자로서 기회를 놓쳤다고 애석해했다. 김무성 스스로의 대권 욕심 때문에 망쳤다는 진단이다. 당 대표까지만 생각하고 조율자로서 큰 그림을 그려야 했는데 자기 욕심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져 본인 지지율도 떨어뜨리고 당도 망쳤다고 강한 비판을 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지금의 난국과 새누리당을 이 꼴로 만든 것은 결국 대통령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그러면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자기반추 없이 정권 재창출을 노린다면 양심 없는 행위”라고 힘주어 말한다. 심지어 “지금의 정치를 보고 있노라면 조선시대 내시와 상궁들이 정치하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비판한다.
불과 30분 전에 연애 얘기 할 때와는 사뭇 다른 톤으로 거침이 없다. 정치 얘기에는 이리저리 재질 않는다. 이래서 정옥임은 정치를 하는구나!
“자기 자신의 일생에 대해 몇 점을 줄 수 있나?”는 질문에 주저 없이 “A플러스”라고 대답하면서 “자기 자신은 못 속인다”고 덧붙인다. 그만큼 자신의 인생에 당당할 수 있다는 자기 진단이다. 당찬 모습 뒤에는 여리고 순수한 모습도 어른거린다. 알 수 없는 앙큼한 양파 같은 여인과의 짜릿한 시간이었다.
흔히 삶이 단련되는 과정을 사람은 시련을 통해 강해진다고 표현한다. 평범하게 쓰이는 이 표현이 어떤 때에는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건강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곳저곳이 아픈데, 더 대범하고, 굳건한 태도를 가지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래도 그렇게 견뎌나갈 수 있는 것은 아픈 것을 낫게하고, 희망을 갖게 하는 의사라는 존재 덕분이 아닐까. 우리가 ‘라뽀’라고 부르는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소중한 것도 그 때문이다. 강동경희대학교병원에서 만난 기경도(奇炅度·43) 교수와 이은주(李銀珠·48)씨의 만남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지난 5월 6일 강동경희대학교병원의 한 수술실. 산부인과 기경도 교수는 자궁근종 수술을 집도하고 있었다. 자궁근종은 말 그대로 자궁 근육에 생긴 종양을 말하는데, 가임기 여성의 20~30%가 겪을 정도로 흔한 병이다. 기경도 교수에게도 그랬다. 1년에 300회 이상 수술을 집도하는 그에게, 자궁근종 수술은 출근을 위해 매일하는 운전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복강경 자궁적출술을 위해 수술 화면을 뱃속의 이곳저곳에 비추고 있을 때였다. 기 교수는 좋지 않은 기분이 느껴졌다. 자궁근종 때문은 아니었다. 비록 환자 이은주씨의 근종 크기가 6cm 정도로 복강경 수술로 해결하기에는 큰 크기인 것은 분명했지만,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자궁 뒷 쪽의 대장 때문이었다. 아무리 봐도 대장이 부어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기 교수는 바로 수술을 멈추고 소화기외과의 동료 교수를 호출했다. 숙련된 전문의에게 직접 확인하게 하고 싶었다. 정상적으로 수술을 마치고 별도의 검진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도 있었지만, 환자가 겪을 불편함을 생각하면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기 교수의 의견이 틀렸다면 동료 교수에게 핀잔을 들을 수 있고, 이런 일들이 쌓이면 평판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종의 모험이었지만 참을 수 없었다.
수술실에서 발견된 대장암
헐레벌떡 뛰어 온 전문의의 눈에 대장 내부에 자리잡은 대장암이 발견됐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그때 상황을 기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정확한 진단은 조직검사 결과가 나와야 알겠지만 수술에 경험이 많은 의사는 수술현장에서 이상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원래 수술을 하려 했던 장기 이외의 곳에서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이상을 눈으로 발견하는 거죠. 이 경우 본 수술 이외에 추가적인 조직검사 또는 수술을 시행하게 됩니다. 심각한 질환의 경우 시간이 지체되면 안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타과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어요. 덕분에 수술실에서 대장암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은주씨가 받을 충격을 생각해서 일단은 의심된다 했죠.”
이은주씨는 갑작스런 암 판정에 놀라고 당황했지만 이렇게 수술실에서 암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일종의 호사(豪奢)였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고 했다.
“같은 병실의 다른 환자들이 제 얘기를 듣더니, 기 교수님이 제 생명을 살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어요. 처음엔 수술하다 다른 병을 발견하는 것이 의사라면 모두 가능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감사한 일이죠. 평소에 보살펴 주시는 것도 고마운데 말이죠.”
이런 이은주씨의 얘기에 기 교수는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부끄럽지만 스스로 수술이 적성에 맞는 천생 외과의사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수술 중 이런 경우에도 대비할 수 있게 전공이 아닌 타 분야에 대해서 간접경험이라도 많이 쌓으려고 합니다. 저야 매일 수많은 환자를 만나면서 수술을 일상처럼 하고 있지만, 환자 입장에선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큰일이니까 함부로 대할 수 없죠. 산부인과 전문의인 제 입장에선 취재 섭외요청이 왔을 때 치료 후 출산한 ‘아름다운 환자’를 소개할 수도 있었지만, 은주씨를 떠올린 것도 그 때문이에요. 환자들의 투병 뒤에는 이렇게 노력하는 많은 의료진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기 교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익숙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은주씨’라는 호칭.
기 교수는 “환자를 ‘치료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한 명의 인격체로 대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환자의 질환이나 예후를 기억하기도 좋고요. 일단 제가 치료를 했으면 끝까지 책임지고 싶어서요. 주말에도 회진을 도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라고 설명했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이은주씨가 한마디 거든다. 회진시간에 환자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의사가 기 교수라는 것. 환자들이 이런 저런 ‘우문’을 솔직하게 던져도, 매번 ‘현답’을 지치지 않고 내어준다고. 지겨워하는 일도 없고, 환자끼리 하는 잡담에도 슬쩍 끼어들어 해답을 알려주기 일쑤라고 했다.
이씨는 “대장암 수술을 위해서는 비슷한 환자들이 있는 다른 층으로 병실을 옮겨야 했는데, 그러고 싶지 않아 사정했어요. 기 교수님이 계신 산부인과 병동에 남고 싶었거든요.”
평범한 삶 속에 들어온, 암
이은주씨가 자신에게 자궁근종이 있다는 것을 안 지는 10년 전 일. 종교재단의 요양원에서 요양보호사로 근무한 이씨에게 병원을 다니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산부인과에서 진단 받는 일 역시 부끄럽지 않았다. 점검을 위해 계속 정기 검진을 받아왔다. 그러다 지난해 11월부터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11월에 4cm 정도 크기였던 종양은 5개월만에 6cm로 자랐고, 바로 수술을 결정했다.
건강은 잘 지켜왔다 생각했던 그녀였기 때문에 암 선고는 더욱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암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처음엔 억울했어요. 이 나이에. 현모양처라고 자부하며 열심히 살았는데 암이라니. 꼬박 하루를 울었어요. 그렇게 눈물을 쏟고 나니, 걱정도 쏟아졌는지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더라고요. 기 교수님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하고. 그래서 용기를 내기로 했어요.”
용기를 내어 병마와 맞서기로 했지만, 그녀에게도, 가족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막내딸이였다. 가장 힘들어했던 막내지만 가장 힘이 됐던 것도 막내였다고 이씨는 이야기했다. 각자의 일 때문에 늘 곁을 지키지 못 하는 가운데, 대학생인 막내가 늘 곁을 지키며 그녀를 도왔다고. 물론 다른 가족들도 힘을 내는 데 도움이 됐던 것은 두말 할 필요 없을 정도였다.
요양보호사로 일해 온 덕에 병원 생활도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고 했다. 요양보호사는 거동이 불편하거나 치매에 걸려 보호가 필요한 고령의 환자들을 돕는 일이 주 업무인데, 그 일을 하던 사람이 병원에 왔으니 이름만 바뀐 일터였던 셈이다.
“어르신들 낙상 방지나 간호를 위해 간호조무사 수준의 교육을 받거든요. 병원에 있다가도 서투른 간호사들을 보면 참견하고 싶어 몸이 들썩들썩 했어요. 실제로 어르신들을 도울 상황이 되면 직접 나서기도 했고요.”
5월 6일 자궁근종 수술에서 대장암이 발견되고 기 교수는 이은주씨가 바로 암 수술을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사전준비를 해놓았지만, 정작 수술은 보름이 지난 후 이뤄졌다. 부신피질(신장 위의 호르몬 분비 조직)이 문제였다. 우여곡절 끝에 대장암 수술이 이뤄진 것은 5월 23일이었다.
산 넘어 산
그렇게 대장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고 이은주씨의 삶은 안정을 찾아가는 듯 했다. 가족들도 엄마라는 존재의 부재에 조금씩 적응이 되는 것 같았다. 다녔던 요양원에 병가 신청서를 사직서로 바꿔 놓아야 했지만, 직장이야 다시 찾으면 될 일이였다.
그러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번엔 위암이었다. 암조직이 크지 않았지만, 위치가 나빴다. 종양이 암의 머리 부분에 자리 잡고 있어 일부 절제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위 전체를 절제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장암 때는 딱 하루 울고 툭툭 털어 버릴 수 있었다면, 이번에는 며칠이 걸렸어요. 저도 저지만, 남편도 무척 힘들어했어요. 남편은 해병대 출신으로 전우회 활동도 열심일 정도의 씩씩한 남자에요. 그런데 위암 소식을 듣더니 하루는 술에 취해 들어와선 절 안고 펑펑 울더라고요. 제게 미안하다면서. 그렇게 서로를 위로했던 것이 평소의 제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한 힘이 된 것 같아요.”
이은주씨는 아직 위 절제 수술을 하진 않은 상태다. 아직 암을 안고 있는 것이다. 대장암의 항암치료가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씨의 상태에 따라 수술 일정이 결정된다. 지금 예정으로는 12월쯤 수술할 계획이다.
두 달 정도 휴가를 내서 잠깐 병원에 머무를 예정이었던 그녀의 계획은 완전히 어긋난 셈이 됐다. 지금 병원 의료진은 그녀가 완전히 치료를 마무리 하는 데 5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보람있는 삶 지속하고 파”
시련이 그녀를 강하게 할 것이라는 쓸데없는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어도 그녀는 씩씩하다.
“밝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살려고 하고 있어요. 징징대서 뭐하겠어요. 선생님들도 긍정적인 마인드가 치료에 도움된다고 하시고,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고요. 아직 젊으니까 전화위복이라고 생각하려고요.”
이은주씨의 희망사항 중 하나는 병이 나아 체력을 회복하게 되면, 예전처럼 남편과 함께 남을 돕는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장애인 특수학교 행정직 직원으로 해병대 전우회나 소방의용대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단다. 매년 정기적으로 산소통을 등에 메고 한강에 잠수해 수중정화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고, 경찰이 요청하면 수중 수색작업을 지원하기도 한다고. 행사가 있을 때 마다 아내들도 모여 단체로 음식을 하거나 별도의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앞으로도 그런 보람있는 활동들을 이어나가고 싶다고 했다.
대학생인 아들과 딸이 잘 자라 주는 것도 희망 중 하나다.
“어릴 때 고지식하게 키워서 남편과 저를 ‘아빠, 엄마’라고 불러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에요. 남들 눈에는 딱딱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바르게 키우고 싶었어요. 그 희망을 들었는지 둘 다 올곧게 자라 줬어요. 딸은 남을 돕는 모습이 보기 좋아 보였는지 특수교육학과를 다니고 있어요. 임용고시에 합격하면 교편을 잡게 되요.”
인터뷰는 예상보다 훨씬 늦게 마무리가 됐다. 이씨는 현재 치료 중인 상태였기 때문에 중간중간 검진이 있기도 했지만, 그간 만났던 의사들, 암 환자들의 조언을 ‘은주씨’에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기자가 말이 많아졌다. 물론 나쁜 치료 결과를 예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솔직하고 당당하면서, 가족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은주씨’와 이야기 나누다 보니, 단지 그녀가 더 빨리 일상으로 복귀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녀의 쾌유를 기원한다.
손성동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 ssdks@naver.com
몇 년 전 모 대학 교수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평생교육원에 다니고 있는 남성에게 가장 인기 있는 여성은 누구일까? 옷 잘 입는 여성? 돈 많은 여성? 요리 잘 하는 여성? 셋 다 아니다. 가장 인기 있는 여성은 단연코 ‘예쁜 여성’이었다. 젊으나 늙으나 남자에게는 예쁜 여성이 최고다. 남자는 참 단순하다. 사람마다 미의 기준이 다른 게 그나마 다행일 정도다.
그럼 평생교육원에 다니는 여성에게 가장 인기 있는 남성은 어떤 사람일까? 잘 생긴 남자? 돈 많은 남자? 근육질 남자? 모두 아니다. 여성이 가장 좋아하는 남성은 ‘연금 많이 받는 남자’다. 잘 생기거나 근육질 남성은 온전한 내 남자가 되기 힘들고, 돈 많은 남자는 자식들 차지이거나 분란의 소지가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정경제를 꾸려온 사람들답게 여성들은 참 현실적이다.
상대적으로 이성을 지배하는 좌뇌가 발달한 남성은 감성에 휘둘리고, 감성을 지배하는 우뇌가 발달한 여성은 이성에 좌우되는, 남녀관계는 정말로 모를 일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실버파산, 노후파산이라는 단어가 사회적 화두로 등장했다. 노후에 생계를 꾸려갈 만큼 수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국 파산이라는 달갑지 않은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현실적인 여성들이 미리 냄새를 맡고 연금에 손을 들어 준 이유를 알 만하다.
연금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노후에 일정한 주기로 일정액의 현금이 내 통장에 꽂히는 것. 일정한 주기는 매달일 수도, 분기일 수도, 매년일 수도 있다. 물론 매달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연금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지만 사람마다 연금에 부여하는 의미는 다를 수 있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세계적으로 유명인사인 오 노레드 발자크(1799~1850), 한스 안데르센(1805~1875),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78)를 통해 연금의 다양한 의미를 에이브러햄 매슬로(1908~1970)의 욕구 5단계설에 비춰 살펴보도록 하자.
오 노레드 발자크 : 절대적 생존 수단으로서의 연금
19세기 전반의 프랑스 소설가로 사실주의 선구자로 알려진 인물, 나폴레옹이 칼로 시작한 일을 자신은 펜으로 완성하겠다는 포부를 지닌 나폴레옹 숭배자, 이라는 90여 편의 소설로 구성된 소설 위의 소설을 구상한 혁신자, 짓누르는 눈꺼풀을 커피로 녹여 낸 커피 중독자…. 오노레 드 발자크를 지칭하는 말들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에서 발자크를 ‘현대 문학의 가장 위대한 노동자’ ‘환상적인 작업 기계’로 묘사한다. 사흘에 잉크병 하나를 비우고 펜 10개를 닳아 없앨 정도로 많은 글을 썼기 때문이다. 필자는 여기에 색다른 별명을 하나 더 붙이고 싶다. 바로 ‘연금 애호가 발자크’다.
발자크의 소설에는 유독 ‘연금’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언어학에서는 작가가 특정 주제에 관련된 어휘를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그것이 곧 그 작품의 중심 테마일 확률이 매우 높은 것으로 본다. 발자크가 그의 소설에 ‘연금’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곧 ‘연금’이 소설의 중심 테마임을 의미한다.
발자크가 연금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잠시 엿보기로 하자. 에서 발자크는 연금을 ‘열심히 일한 사람들의 한가로움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묘사한다. 에서는 딸의 사교 비용을 대느라 연금증서까지 팔아 치운 나머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는 고리오 영감의 마지막 절규를 숨 막힐 정도로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연금에 대한 발자크의 생각이 가장 잘 녹아 있는 대목은 에 나오는 하녀 나농의 이야기다.
“160㎝가 넘는 큰 키 때문에 키다리 나농이라 불리게 된 그녀는 35년 전부터 그랑데 집에 살고 있었다. 1년에 60리브르밖에 받지 못하지만 그녀는 소뮈르 지방에서 제일 부유한 하녀로 통했다. 35년 동안 60리브르를 차곡차곡 모은 결과 최근에 크뤼쇼 집에 4000리브르를 종신연금으로 맡길 수 있게 되었다. 오랫동안 이루어진 나농의 끈질긴 저축의 결과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보였다. 하녀들은 그것이 고된 노역의 대가라는 사실은 생각지 않고 60대의 노파가 마련해 놓은 노후자금에 질투심을 드러내곤 했다.”
위 구절을 보면 연금에 대한 발자크의 생각과 당시 프랑스 사회를 읽어낼 수 있다. ①노후에 연금을 받으려면 오랜 기간 동안 차곡차곡 돈을 모아야 한다. ②연금은 고된 노역의 대가다. ③연금은 부러움의 대상이다. ④유력 집안이 금융회사를 대신해 연금을 지급한다. ⑤여자가 160㎝만 넘으면 큰 키로 인정받는다. ④와 ⑤번을 제외하면 요즘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발자크가 그의 소설 속에 연금을 자주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집안 내력과 극도의 경제적 궁핍을 겪은 경험에서 자연스레 나온 것이지 않을까. 츠바이크의 에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다른 누구보다도 오래 살려는 그의 의지는, 가입자가 죽으면 남은 사람에게 연금이 덧붙여지는 이른바 톤틴식 연금에 들었다는 사정을 통해서 더욱 강화되었다.”
발자크는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연금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발자크는 젊었을 때 인쇄업과 활자제조업에서의 연이은 사업실패로 평생 빚더미에 짓눌려 살았다. 다시 츠바이크의 말이다. “3년 동안의 사업가 활동에서 얻게 된 10만프랑의 빚은 그에게 ‘시시포스의 돌’이 되었다. 그는 평생 근육을 거의 망가뜨리면서 이 돌을 꼭대기로 굴려 올리곤 했지만, 언제나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생애 최초의 이 잘못은 그를 언제까지나 채무자로 남도록 운명지었다. 자유롭게 창작하고 종속 없이 산다는 어린 시절의 꿈은 절대로 실현되지 않을 것이었다.”
발자크에게 연금은 생존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딱 생존의 문제였다. 빚의 노예로 노동자처럼 소설을 써야 했던 그이기에 같은 사회성 짙은 소설이든 같은 연애소설에도 어김없이 연금이 등장한다.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에 접목하면 1단계인 ‘생리적 욕구’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안데르센 : 복합적 의미로서의 연금
한스 안데르센은 소개가 필요 없을 만큼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덴마크의 동화작가다. 하지만 안데르센과 관련하여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도 있다. 바로 안데르센이 그렇게도 연금 받기를 원했다는 점이다. 안데르센은 젊은 시절 엄청난 고통과 각고의 노력 끝에 정상에 오른 인물이다. 그가 정상에 오르고 나서도 마음 한구석에 빈 곳이 있었으니 바로 연금이다. 그의 경쟁자이면서 자신보다 역량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받는 사람은 연금을 받고 있는데, 국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자신은 연금을 받지 못하는 사실에 꽤 자존심도 상했던 모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안데르센의 에 매료된 덴마크 총리가 그의 거처를 방문한다. 물론 안데르센은 그가 총리인지 모른다. 방문 목적과 자신의 신분을 밝힌 총리는 안데르센에게 어려운 점이 없는지 묻는다. 이에 안데르센은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연금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국왕 면담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인 총리는 돌아가 덴마크의 유명한 물리학자인 외르스테드를 통해 국왕 면담을 주선한다. 국왕과 면담 후 안데르센은 그렇게도 원하던 연금을 받게 되었는데, 그 장면과 감정을 자신의 자서전인 에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프레데릭 6세 때 이미 몇 년 전부터, 문학청년이나 예술가들을 해마다 선발해 여행 경비를 주는 제도 외에도, 이들 가운데서 이렇다 할 소득이 없는 사람들을 골라 많지 않은 돈이지만 연금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 대부분의 유명한 시인들이 모두 이 보조를 받고 있었다. 욀렌슐레게르, 잉게만, 하이베르그, 카를 빈터 등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헤르츠도 얼마 전부터 이걸 받고 있어, 그의 미래는 생계가 탄탄하게 보장되어 있었다. 나도 그럴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이 내 희망이자 소원이었다. 그 꿈이 이루어졌다. 프레데릭 6세는 내가 1년에 200릭스달러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나는 기쁘고 고마운 나머지 펄쩍펄쩍 뛰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단지 살기 위해서 억지로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 몸이 아프거나 병에 걸려도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확실한 버팀목이 생긴 것이다. 늘 신세를 지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바야흐로 내 인생의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다.”
안데르센이 연금을 받고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던 장면을 상상하면 웃음이 나온다. 안데르센이 연금에 집착한 이유는 뭘까? 하나는 안정적으로 창작활동에 몰두하기 위한 경제적 토대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안데르센은 여행을 매우 좋아했다. 당시 여행비용은 꽤 비쌌다. 여행을 통해 자신의 정신과 사상을 깊게 하고 넓혀 나갔던 안데르센은 여행을 포기할 수 없었다. 영국 여행에서는 찰스 디킨스를, 프랑스 여행에서는 빅토르 위고와 발자크 등 세계적 작가들을 만나고 교류했다. 결국 안데르센에게 연금은 더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경제적 안정 수단이었던 셈이다. 매슬로의 욕구5단계설의 두 번째 욕망인 ‘안전욕구’였다.
“여행은 마법의 물약처럼 마음을 정화하고 육체에 원기와 젊음을 불어넣는다. … 나의 내면에 보석 같은 소재들이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이 보석들을 제대로 다듬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이 보석들을 정력적으로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다듬어 종이에 옮겨 놓기 위해서는, 정신을 신선하게 재충전할 필요가 있다. 내게 있어서 여행은 정신을 정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나는 늘 더 젊어졌고 더 강해졌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연금을 통해 국왕으로부터 인정받는 명실상부한 명사의 반열에 오르고 싶은 욕구이지 않을까. 국왕과의 연결선이 없어 자신보다 못한 경쟁자가 연금받는 것을 부러워하고 시샘하던 안데르센이 드디어 자신도 그들의 리그에 속하게 된 것이다. 매슬로의 욕구5단계 중 3단계인 ‘사랑과 소속 욕구’를 쟁취한 셈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확실한 기반을 구축하는 덤까지 얻었다. 5단계 욕구 중 4단계인 ‘존경 욕구’를 충족하는 기쁨까지 누리게 된 것이다. 이처럼 안데르센에게 연금은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도구였던 것이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 정치 도구로서의 연금
비스마르크는 우리에게 독일의 철혈재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비스마르크가 철혈재상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당근과 채찍을 효율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리라. 그는 항상 한 손에는 채찍을, 다른 한 손에는 당근을 들고 다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78년 10월 9일 공산주의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사회주의자법’ 제정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여지없이 다음과 같은 당근책을 제시한다.
“나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적극적으로 개선하며, 노동자들에게 기업 이윤의 배당을 보장하고, 기업의 경쟁력과 시장상황을 고려한 범위 내에서 노동시간을 단축하려는 모든 계획들을 후원할 예정입니다. … 만약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성적인 방법으로 미래를 내다 보면서 노동자들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한 긍정적인 방안을 제안한다면 나는 국가부조라는 이념을 염두에 두면서 자구책을 강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방안을 호의적으로 검토할 것입니다.”
1881년 3월 8일 산재보험법을 제안하면서는 “국가란 오직 유복한 사회계급의 보호를 위해서만 창안된 것이 아니다. 무산계급의 요구와 이익에도 봉사하는 복지기구”라고까지 강조했다. 1881년 11월 17일 자신이 직접 작성한 황제교서에서는 “사회적 폐단을 단지 사회민주주의의 과격행위를 탄압함으로써만이 아니라, 노동자 복지를 적극적으로 도모함으로써 척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4대 사회보장제도인 건강보험, 국민연금, 산재보험, 고용보험 등은 사회주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비스마르크의 당근책의 일환으로 도입된 것이다. 비스마르크에게 연금은 5단계 욕구 중 가장 높은 단계인 ‘자아실현 욕구’의 실현 수단의 한 방편이었던 셈이다.
>> 손성동(孫盛東)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
삼성금융연구소 수석연구원,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금연구실장 역임. 현재는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로 있으면서 1인기업가를 꿈꾸고 있다. 공식블로그 ‘꿈꾸는 은퇴와 연금’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부산 동아대와 동서대에 출강하고 있다.
살고 있는 아파트에 유치원이나 유아원 버스가 오면 직장에 출근한 엄마. 아빠를 대신하여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서 원생들을 데리러 온 선생님에게 인계하고 빠이빠이 손을 흔드는 모습을 자주 본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행복한 함박웃음을 짓고 아이들은 재잘거리며 버스에 오른다. 조심스럽게 아이와의 관계를 물어보면 대부분 외손자. 외손녀라고 답을 한다.
자식들이 인근에 살면서 출근 전에 아이들을 할머니 댁에 맡기고 가기도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식들 집에 아침마다 오기도 한다. 어떤 집은 아예 딸이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집에서 숙식을 함께하며 산다. 어떤 할머니는 딸 식구들을 데리고 있는 것이 창피한지 속마음과 다르게 ‘딸년은 도둑년이야 사위 놈은 더 나쁜 놈이고’ 하고 웃지만 퍼줘도 기분 좋은 딸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보리쌀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처가에 얹혀사는 것이 남자들의 수치로 여겼다. 하지만 요즘은 아니다. 은퇴한 노인부모들이 의료, 간병이슈의 돌파구를 딸에게서 찾으려는 심리가 강하다고 한다. (은퇴위기의 중년 보고서, 전용수 지음에서 인용)
우리보다 고령화 사회에 먼저 진입한 일본의 예도 딸이 우선이다. 일본의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대도시 고령부부의 근거리에 살고 있는 자녀의 남녀 비율을 조사했는데 1시간이내 거리는 딸(75%)이 아들(55%)보다 많다 (2012년도 통계임) 30분이내도 각각 51%, 42%로 딸의 승리다. 딸이 가까이 살면서 부모와 일상을 공유하며 긴밀한 가족관계를 유지한다는 증거다.
또 다른 재미있는 통계도 있다. ‘곤란해 질 때 누구에게 의지하느냐’에 딸(86%)이 아들(76%)보다 높게 나왔다. 기억력, 판단력이 흐려진 것을 눈치 채는 것도 딸(86%)이 아들(76%)보다 먼저다. 돈독한 모녀관계에서 일상교류가 훨씬 잦다는 의미다. 2~3일 한번이상 대화한다는 응답자는 ‘딸+엄마(60)%)가 아들+엄마(26%)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딸+아빠(42%)도 아들+아빠(23%)보다 높다. 점점 모계사회로 흘러가는 것을 감지한다.
우리의 부모들은 딸은 출가외인 이라 하여 시집보내면 끝이었다. 재산을 물려주지 않는 것이 보편화 시대로 살았다. 지금도 결혼할 때 집을 구하는 쪽은 남자 쪽이니 비용부담이 아들이 크다. 아들은 가문의 혈통을 잇고 재사를 지내주고 집안의 기둥 같은 존재라고 인식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딸에게 쏠리고 있는 세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아들하고 살면 며느리가 좋아하나요. 딸하고 살려고 해요. 각종 통계가 이 말을 뒷받침 한다.
얼마 전 MBC TV의 에서 독특한 장면이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MC 전현무가 본인의 수면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전깃줄을 주렁주렁 달고 수면실에 들어가 잠을 청하거나, 방독면처럼 생긴 장비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었다. 이를 본 시청자들은 놀라움을 표시했다. 검사 방법도 독특했고, 질환 이름도 생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방송을 통해 소개된 수면질환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만큼 잠과 연관된 질환은 다양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상당수의 질환은 ‘노화’와 관련이 있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흔히 수면질환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불면을 생각한다. 잠자는 데 문제가 있다면 불면증과 수면제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이렇게 잠을 못 자는 것이 바로 수면질환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잠으로 인한 질환은 이보다 훨씬 다양하고 분야도 넓다.
수면과 관련해서 환자들이 가장 많이 병원을 찾는 질환은 불면증이 아니라 앞서 전현무가 앓았던 수면 무호흡증이다. 코골이가 심각해지면서 잠자는 동안 일시적으로 호흡이 중단되는 증상이다. 주변에서 자다가 코 고는 소리가 멈추면서 “컥컥” 소리를 내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면 수면 무호흡 환자를 만난 것이다.
이 수면 무호흡증은 보통 자는 도중 무호흡증상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에 따라 그 심한 정도를 나눈다. 1시간에 5회 이하로 무호흡증상이 나타난다면 정상이지만, 15회까지는 경증, 30회까지는 중등도로 구분한다. 30회가 넘어가면 심각한 중증이라고 진단된다. 이를 의료인들은 RDI(수면호흡장애지수)라고 부른다. 제대로 검사하려면 뇌파와 호흡, 안구의 움직임 등을 살피는 수면다원검사가 필수다. 대학병원이나 전문클리닉이 환자가 밤새 잠자며 검사받을 수 있는 수면검사실을 운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수면 무호흡 산소공급에 문제 일으켜
수면 무호흡이 문제가 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가장 큰 문제는 수면 중 뇌가 충분한 산소를 공급받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수면이 중단될 때마다 사망을 막기 위해 뇌가 잠에서 깨면서 호흡을 강요하기 때문에 건강의 필수요소라 꼽히는 렘수면, 즉 질 높은 수면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전현무의 치료를 담당했던 지앤지수면클리닉의 이비인후과 전문의 현도진 원장은 수면 무호흡의 원인 중 하나로 노화를 지목했다.
“대부분의 환자가 수면 무호흡을 코골이와 연관해서 코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 질환은 목과 기도가 문제예요. 입천장과 혀 뒤의 인두 부위가 잘 때 좁아지면서 호흡을 방해하기 때문인데, 나이가 많아질수록 점막이나 근육의 탄력이 떨어지면서 호흡할 때 음압이 걸리면 기도가 쪼그라들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죠. 뜻밖에도 여성분들이 많이 문제가 돼요. 중년 여성이 갱년기를 맞으면서 탄력을 잃는 현상이 급작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발병 소지가 급격하게 높아지는 것이죠. 이에 반해 남성은 완만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수면 무호흡증이 나타나면 증상은 다양하다. 깊이 잠들 수 없으므로 낮에 졸리기 시작하고, 머리가 무겁고 심한 경우 두통도 동반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산소 부족이다. 산소가 부족해지면 뇌가 교감신경을 자극해서 심장박동을 높이도록 명령을 내린다. 피가 많이 돌도록 해 산소를 확보하려는 반응이다. 이 과정에서 혈압이 높아지면서 뇌졸중 발병의 원인이 된다. 또 심장에 무리를 줘 심근경색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수면 무호흡의 치료는 보통 수술과 양압기의 사용 두 가지가 있다. 현 원장은 환자의 상태에 따라 치료방법을 결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과거에 잘못된 이론이 알려지면서 흔히 코골이 수술이라고 불리는 목젖 제거 수술이 남용됐어요. 결국, 이 수술은 재발이 가장 심한 수술로 낙인찍혔죠. 실제로 병이 재발해 저를 찾는 목젖 없는 환자들을 적지 않게 봅니다. 하지만 문제는 목젖이 아니에요. 또 무조건 수술로 혹은 양압기로 해결하려는 풍토도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환자에 따라, 생활 환경에 따라 적합한 치료방법은 분명히 있으니까요.”
하지불안증후군 환자도 늘어
최근 수면장애 중 새롭게 주목받는 질환 중 하나는 하지불안증후군이다. 잘 때 다리에 벌레가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다리가 저리거나 움직이려는 현상이 일어나는 증상이다. 사실 이 증상은 꽤 많은 환자를 고통받게 했는데, 외과적 질환으로 오해 받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불안증후군이 문제가 되는 것은 환자의 수면을 방해해 깊은 잠에 들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
학계에서는 하지불안증후군의 원인을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의 부족으로 보고 있다. 도파민 부족은 철분 결핍이 원인이 될 수 있으므로 고용량 철분제를 투약하면서 치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외에도 극히 드물지만, 기면증(嗜眠症)도 수면질환에 속한다. 느닷없이 잠에 빠지는 것은 심한 기면증에 속하고, 충분히 잠을 잤는데도 심한 졸음을 느낀다면 기면증 초기증세로 볼 수 있다. 심하면 가위눌림이나 잠꼬대, 발작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와 함께 수면 중 이상행동이 많아지는 것도 수면질환의 하나다. 예를 들어 잠꼬대를 심하게 한다든가 몸을 뒤척이고, 심한 경우 몽유병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몽유병은 수면 중 ‘수면 간질’의 가능성도 있다. 꿈이 많아지거나 반복적으로 안 좋은 꿈을 꾼다면 우울증 증상의 하나일 수 있으므로 정확한 진단을 받아야 한다.
시니어를 괴롭히는 대표적인 수면질환을 꼽자면 역시 불면증이라 할 수 있다. 불면증의 원인은 너무나 다양하다.
최근 불면의 새로운 원인으로 등장한 것은 스마트폰이다. 밤에 불을 끄고 스마트폰을 보면 뇌가 활성화돼 쉽게 잠들 수 없게 만든다. 특히 동영상은 뇌를 가장 활성화하는 콘텐츠로 꼽힌다. 그래서 전문의들은 잠자기 전 스마트폰으로 영화나 방송 등을 시청하는 것은 반드시 피해야 할 행동으로 꼽는다.
대표적 수면질환 불면증
스트레스는 불면의 대표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가족관계나 일, 사회활동 등에서 쌓인 스트레스는 계속 교감신경을 자극해 쉽게 잠들지 못하게 만든다. 걱정거리가 많을 때 불면에 시달리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불면증의 해결책으로 일반적으로 수면제 처방이 이뤄지지만 수면제의 약효가 듣지 않아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만약 수면제를 먹어도 계속해서 잠을 제대로 청하기 어렵다면 대학병원이나 전문 수면클리닉에서 전문적인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불면증 역시 노화와 관계가 있다. 정형외과 전문의인 분당바른세상병원의 박성준 원장은 노화와 함께 다양한 통증이 찾아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노화와 함께 여러 관절질환으로 인한 통증이 불면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오십견으로 불리는 동결건이 대표적 증상이죠. 뒤척일 때마다 어깨 통증으로 잠을 깨게 합니다. 때문에 불면으로 다른 합병증까지 발생하기 전에 통증을 유발하는 관절질환을 빨리 치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면자세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목 아래에 받치는 베개는 높이가 10cm를 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옆으로 누워 자는 자세도 척추 건강에 나쁘지 않은데 이때는 적당한 높이의 베개를 받쳐 목이 꺾이지 않도록 하고 무릎과 무릎 사이에 베개를 하나 더 끼워 골반 높이와 맞추는 것이 좋습니다.”
불면을 이기기 위해서는 잠드는 시간과 기상 시간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침에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저녁에도 비교적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야 망가진 신체 리듬을 회복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전문의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는 햇볕이다. 햇볕을 충분히 쬐는 것만으로도 뇌의 송과선에서 숙면을 유도하는 멜라토닌 호르몬 분비를 자극한다. 이렇게 낮에 햇볕을 쬐며 1시간만 걷는 습관을 지녀도 2~3주 후 뚜렷한 불면증 개선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특히 새벽에 일찍 잠에서 깨 다시 잠들지 못하는 시니어들에게 효과적이다.
수면은 7~8시간이 적당
그렇다면 잠자는 시간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2014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유근영 교수팀이 발표한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가장 권장할 만한 수면시간은 7시간에서 8시간이다. 조사에 따르면 수면시간이 5시간 이하일 때는 사망률이 21% 증가했고, 9시간 이상일 때에는 사망률이 36%나 증가했다. 너무 많이 자는 것도 건강을 해치는 셈이다.
잠을 부르는 음식, 잠을 쫓는 음식도 따로 있다. 강남 자생한방병원의 유한길 원장은 음식에 따라 숙면을 위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우유, 치즈, 상추, 쑥갓, 양파, 둥굴레, 두충 등 몇몇 음식들은 잠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됩니다. 특히 호두는 불면증에 시달리던 서태후가 애용했다 할 만큼 불면증에 효과가 있어요. 반대로 수박처럼 수분이 많은 음식, 자극적인 음식은 잠을 내쫓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음식이든 과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과식하면 음식을 소화하기 위해 위장이 활발하게 운동을 하게 돼, 당연히 잠을 이루기가 힘듭니다. 술도 마찬가지죠. 한두 잔의 와인은 좋지만, 그 이상은 오히려 잠을 못 이루게 합니다. 그렇다고 술에 곯아떨어져 자 버릇하면 알코올 중독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프랑스 작가 플로리앙 젤레르의 대표작 와 가 한 무대에 오른다. 두 작품은 노령화, 치매, 빈 둥지 증후군, 우울증 등 현대사회 중·장년이 겪는 사회적, 심리적 증상들에 대해 다룬다. 다른 해에 발표됐던 작품이지만 닮은 부분이 많은 점에 착안해, 하나의 무대에서 주중에는 번갈아가며 공연하고 주말에는 연이어 상연한다. 독특한 점은 는 박정희, 는 이병훈이 연출을 맡아 여자가 바라본 아버지, 남자가 바라본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다는 것이다. 두 연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연출하며 아버지/어머니가 가장 생각났을 때
[이병훈] 어렸을 때 효자상도 받고 해서 그런지 어머니의 마음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를 연출하면서 그동안 내가 과연 어머니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이 작품을 통해서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동물적 사랑도 느낄 수 있었고, 자식을 향한 집착이나 다 큰 자식을 품에서 떠나보내야 하는 어머니라는 존재의 비극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무서운 박탈감, 집착 그리고 사랑의 한계를 생각하며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진다.
[박정희] 작품 후반부에 아버지 앙드레와 안느가 얘기하면서 간병인 로라를 기다리는 장면이 나온다. 앙드레는 로라를 만난다는 기대감에 즐거워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며 아버지가 생각났다. 여행을 많이 다니셨던 내 아버지는 출발하기 전이면 큰 기대감으로 즐거워하셨다. 여행에서 돌아올 때면 가족과 만난다는 생각에 즐거운 마음으로 문을 열곤 했는데, 그러한 아버지와 앙드레의 즐거워하는 모습이 많이 겹쳐졌다.
의 윤소정/의 박근형 두 배우와의 호흡이 어땠는지
[이병훈] 연습 초반에는 윤소정 선생님과 서로 스타일이 달라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작품을 하며 서로를 맞춰가는 과정은 필수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연습이 진행될수록 윤소정 선생님은 소탈하고 겸손한 분이라고 느꼈다. 자신의 약점을 듣고도 감정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소위 ‘쿨’하게 받아들인다. 뿜어내는 감정의 스펙트럼이 다양한데 그것은 지적인 이해보다는 본능적인 감각과 즉흥적인 에너지에서 나온다. 그런 선생님의 연기술을 이해하며 좀 더 서로를 잘 이해하게 됐다.
[박정희] 박근형 선생님과의 호흡은 좋았다. 코멘트를 받으면 꼭 실행하고 더 발전하기도 했다. 앙드레라는 역할에 대해 창조적으로 해석하며, 능동적으로 연습에 참여했다. 원로배우이시지만 영리한 배우라고 느꼈다.
중·장년 관객이 공감할 만한 부분
[이병훈] 중년에 찾아오는 ‘빈 둥지 증후군’을 겪는 어머니의 삶의 비극성을 그려낸 작품인 만큼, 어머니 자신들의 사랑과 좌절을 통해 의타적 삶에서 주체적 삶으로 바뀌어 가기를 희망한다. 남편과 자식에게 헌신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가족들에서 발견하는 우리 어머니들이 자식을 떠나보내고 삶의 허망함에 맞닥뜨렸을 때 보면 공감할 수 있는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 우리는 살면서 ‘나’를 주장하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해 타인들과의 관계도 자기중심적으로 맺는다. 하지만 ‘나’라는 정체성은 ‘기억’이라는 모래 기둥처럼 부실한 발판 위에 세워진 건물과 같다. 기억은 뇌가 노화되거나 병들면 점차 사라지고 기억을 잃는다는 건 한 사람의 역사가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바람이 있다면 관객들이 공연을 통해 ‘정체성’이라는 허상을 깨닫고 가족과 함께 사랑으로 채워지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작품이 치매를 다루긴 하지만, 공연의 메시지는 충분히 철학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다.
일정 8월 14일까지 장소 명동예술극장 연출 박정희, 이병훈 출연 박근형, 윤소정 등
박원식 소설가
귀촌이란 단순히 도시에서 시골로의 이주라는, 공간적 이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삶의 꿈과 양상, 지향까지 덩달아 변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익숙했던 거주지에서 전혀 다른 장소로 주저 없이 옮겨 간다는 점에서는, 귀촌이란 안주하지 않는 정신의 소산이기도 하다. 충북 괴산의 산골에 사는 박미향(58)·엄팔수(61) 부부는 귀촌으로 인생 제2막을 시원하게 열어젖혔다.
7월의 성성한 초록 숲이 바람에 술렁거린다. 숲 사이 오솔길을 걸으니 나무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향훈이 상큼하다. 저 멀리 칠칠하게 늘어선 산봉우리들은 비안개의 희롱에 취해 아련하다. 계곡에선 솰솰 냇물이 흐르며, 머잖은 곳엔 호수가 있다. 사방팔방으로 멋들어진 풍광이 펼쳐진다. 박미향 부부의 시골집은 이 모든 수려한 자연경관을 한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계곡 쪽 둔덕에 자리 잡았다. 터를 잡은 눈썰미가 예사롭지 않구나.
박미향 부부가 산골에 둥지를 튼 건 13년 전의 일. 원래는 청주 시내 아파트에서 살았다. 도회의 아파트생활은 나름대로 안전하고 쾌적했기에 딱히 불만이랄 건 없었단다. 그러나 사람에겐 못 말릴 취향이라는 게 있는 법. 중년 나이에 접어들던 즈음, 박미향씨는 자신의 내부에서 자글거리는 어떤 갈증을 느꼈던 것 같다. 그녀는 유심히 자신을 관찰한 끝에 소녀기 때 경험한 시골살이에 관한 향수가 강렬하게 들끓는 걸 알아차렸다. 산골에서 꽃과 나무, 새소리와 물소리를 벗 삼아 사는 게 자신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길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게 귀촌이라는 사건의 단초였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올드 뉴스가 있지만, 그건 진부한 소식에 불과하다. 아내는 동쪽으로 냅다 뛰는데, 남편은 서쪽으로 쌔앵 돌아서기도 하는 게 부부관계이지 않던가. 귀촌의 경우에도, 부부가 의기투합할 확률은 매우 낮다. 대체로 남정네들이 먼저, 가자, 산골로! 그렇게 선창을 하며 나서는 수가 많지만, 웬걸, 마누라들은 십중팔구 단박에 반기를 들게 마련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자들은 원래 남자보다 영리하고 영악한 고등생물이다. 그녀들은 모기에 뜯기고 뱀에 시달리기나 할 뿐, 자칫 따분하고 답답해질 가능성이 높은 시골살이라는 걸 입문할 일이 아님을 이미 눈치 채고 있는 것이다.
부부가 귀촌에 의기투합
그러나 박미향 부부는 달랐다. 박미향이 먼저 말을 타고 귀촌의 깃발을 드높이 들었고, 수더분하고 너그러운 남편 엄팔수는 뒤따라오는 수레처럼 선선히 따랐다. 빈틈없는 의기투합과 일심동체의 힘으로 산골살림을 착수하였으니, 그 시발도 과정도 결산도 자못 오붓한 것이었다. 박미향의 얘기를 들어볼까?
“일단 귀촌하기로 합의를 본 뒤로는 일사천리로 추진했어요. 남편은 직업군인이었어요, 정년을 채우고 전역한 다음 귀촌을 하기로 했으나, 굳이 뜸들일 게 뭐 있겠나 싶어 서둘렀어요. 정년 5년을 남긴 시점에 후다닥 이 산골로 들어온 거예요.”
“남편에게 감사패라도 드리진 않았나요?(웃음)”
“어쩌면 매우 공정한 합의였죠. 결혼 뒤 긴 세월 동안 저는 오직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공들여 기르는 일에 전념하며 살았거든요. 그건 좀 억울한 거 아니에요?(웃음) 이제는 남편인 당신이 나를 외조해주소서, 제가 그런 요청을 했어요. 그러자 남편이 조용히 수긍해줬어요. 고맙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대목이죠.”
“부부가 튼튼한 유대감을 갖고 귀촌을 했을 경우에도, 막상 실제로 촌살림을 시작하고 나서는 예상치 못했던 애환을 겪는 걸 흔히 봅니다. 매우 단기간에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심지어 이혼을 하고 갈라서는 부부도 있더군요.”
“맞아요. 우울증을 앓다가 결국은 도시로 되돌아가는 사례를 저도 많이 봤어요. 그런데 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저는요, 귀촌 초기부터 모든 게 다 좋았어요.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귀촌을 로망으로 삼은 분들이 많을 텐데,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해요. 과연 내가, 우리 부부가, 생소한 산골 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정서가 맞는지, 재미를 느낄 수 있을지, 그런 걸 우선적으로 점검해야 해요.”
“마을 원주민들과 융화하는 일도 쉽진 않았겠죠?”
“저희 집이 마을과 떨어진 외딴집이라서 주민과 교류할 일도 없었지만, 사실 초기엔 심한 소외감을 느꼈어요. 그러나 이젠 살갑게 사촌처럼 지냅니다. 도시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듯이, 저도 처음엔 시골 인심이 사나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전혀 사실과 달라요. 문제를 일으키는 건 늘 도시인들 쪽이죠.”
마음을 활짝 열지 않고서는 즐겁게 살 수가 없다. 반면에, 즐겁게 살지 않고서는 마음을 탁 열어 헤칠 수 없다. 소소한 애환과 갈등이 왜 없었으랴마는, 박미향 부부는 산골 생활에 매우 적극적으로 적응했으며, 그럴 수 있었던 기반은 산촌살이의 즐거움이라는 명품을 신속하게 얻었다는 데에 있다.
자연의 제전에 늘 감동과 갈채를
그렇다면 귀촌의 무엇이 즐거움을 주는 것일까? 우선은 도시의 메마른 풍경과는 다른 산골의 자연 풍치가 주는 심미적 만족감과 정서적 위안이 이 부부를 즐겁게 하는 것 같다. 철따라 옷을 갈아입는 나무와 숲, 황홀하게 피었다가 상처처럼 시드는 온갖 들꽃들이 전하는 철학의 표정, 사람이 곤충이나 풀꽃과 하등에 다를 게 없다는 벅찬 상념들, 조화롭게 저 알아서 흘러가는 생태계가 전하는 유유함…. 박미향은 자연이 펼치는 제전에 매번 갈채를 보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 무엇보다 막대한 즐거움은 박미향이 귀촌의 나날들을 통해 꽃차 전문가로 변신했다는 데에서 비롯한다. 산골에서 풀이나 뽑고 살 수는 없었던 그녀는, 평소에 좋아하던 꽃들로 꽃차를 만드는 취미생활을 일삼아 거듭했다. 그러다가 노하우가 쌓이고, 이름이 알려지고, ‘꽃차연구소’라는 것 까지를 차리게 되었다. 아마추어적 취미를 밀어붙여 프로의 대열에 올라선 것. 요즘의 그녀는 꽃차 강의를 다니느라 부산하다.
“아이들 키우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 알았는데, 이제 저는 더 진정한 행복을 찾았어요. 산과 들에 가득한 들꽃들로 꽃차를 만들어 도시의 친구들에게 나눠주던 취미생활이, 꽃차 전문가로 성장할 계기가 될 줄은 저 자신도 미처 예상치 못했어요.”
“근래에 꽃차 붐이 분 것도 행운이었겠어요?”
“맞아요. 인생이란 정말 오묘한 것이에요. 제가 원래 꽃을 좋아해서 청주에 살 때에도 미장원이나 옷가게를 가기보다는 틈나면 꽃집을 드나들었어요. 그런데 귀촌을 계기로 꽃차 전문가로 거듭 태어난 셈이에요.”
“그걸 제2의 인생이라 하겠죠?”
“돈을 벌려고 시작한 일도 아니었고, 그저 내가 좋아서 해온 일이었을 뿐인데, 이젠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오거나 멀리 외지에서 강의 요청도 많아요. 물론 수입도 쏠쏠합니다. 남편의 연금보다는 많으려나?(웃음) 요즘은 세상살이가 참 재미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아 산다는 것, 그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생이지 않을까요?”
“꽃차의 매력은 뭐라 생각하시는지?”
“우선 시각적으로 아주 예뻐요. 덖어진 꽃차가, 찻잔 속 뜨거운 물에서 풀어지며, 다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걸 바라보면서 향과 맛을 음미하는 즐거움. 그게 사람들을 매료하는 거 같아요.”
산골에서 별다른 일이 없는 채로 한가하게 노는 것도 행복이자 도락이다. 텃밭 농사건 약초 채집이건, 소규모로나마 몸을 쓰는 일을 찾아내 귀촌생활의 생기를 불러 넣는 것도 현명하다. 또는, 내가 좋아하고 원했던 일을 드디어 찾아내 몸과 정신을 온전히 쏟을 수 있다면 그건 최상의 복락이겠지. 매우 신중하거나 내향적인 성품의 소유자로 여겨지는 박미향의 안면에 정착한 미소를 보노라면, 귀촌을 통한 자기 변신과, 그에 따른 만족의 크기가 자못 오롯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면민들과 함께 밴드를 만든 남편
귀촌 직후 한동안, 박미향의 도시 친구들은 후미진 산골에 박혀 사는 박미향을 걱정하고 염려하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산골의 자연과 긴밀하게 교류하는 우정, 또는 일을 찾아 투신하는 열정은 고독하기 십상인 인생을 보완하는 질료라는 걸 간과한 것이다. 물론, 친구들의 태도는 이제 싹 바뀌었다. 오히려 박미향을 선망한다는 게 아닌가.
“친구들은 처음엔, 미향이가 산골에서 얼마나 견디겠는가 하며, 너 언제 나올 거니? 산골에 살아보니 무섭고 외롭지? 그렇게들 걱정을 했지만, 지금은 그런 소리들이 쑥 들어갔어요.(웃음) 오히려 저를 부러워해요.”
“시골 생활의 단순한 패턴은 자칫 귀차니즘을 불러올 수도 있을 거예요. 부부가 날마다 24시간 같이 붙어산다는 게 때로 지겹진 않나요?(웃음)”
“왜 안 지겹겠어요?(웃음) 때로 충돌 직전까지 가기도 해요. 그럴 때면 제가 묵언수행이나 해야지, 하고선 아예 입을 봉합니다. 그게 제가 자제하는 방식이며 최선책에요. 덕분에 저희 부부는 싸움다운 싸움을 한 번도 해보질 못했어요. 참. 남편은요, 드럼을 쳐서 스트레스를 신나게 날려 버립니다. 면민 12명과 어울려 밴드도 만들었는데, 경로잔치 같은 곳에 위문공연을 다니곤 해요.”
“귀촌을 원하는 시니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팁을 주신다면?”
“귀촌은 실패할 확률도 많다는 걸 아셔야 해요. 현실은 녹록지않으니까.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야만 해요. 요즘은 ‘귀촌교육’을 행하는 기관이 많아요. 미리 수강을 해두는 게 좋겠죠. 무엇보다 본인의 성향이 산골과 조화할 수 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점, 이웃 원주민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는 점도 중요해요. 그쯤이면 인생 2막을 성공적으로 누릴 수 있을 거예요.”
공자나 맹자를 길잡이로 삼은 인생도 근사할 수 있지만, ‘웃자’나 ‘놀자’와 동행하는 삶은 한결 경쾌하고 유쾌하다. 박미향은 귀촌을 계기로 매우 만족스러운 인생을 누린다. 꽃차를 통해 평온하게 웃을 수 있는 삶을, 안락하게 노는 일상을 구현하고 있다. 이를 쾌거라 일컬어도 무리가 없으리라. 인생의 쓸쓸한 황혼녘에, 오히려 환하게 생동하며 밝아오는 아침을 다시 맞이한 셈이니까.
>>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유경 프리랜서 사회복지사
저는 노인복지를 전공한 사회복지사로, 20년 넘게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노인복지관과 노인대학 등에서 어르신들과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인생의 선배인 어르신들께 배운 ‘나이 듦의 기술(Art of Aging)’을 함께 나누기 위해 ‘시니어’라고도 부르는 중년 세대, 즉 베이비부머들과도 자주 만납니다.
시니어들과 수업을 하면서 각자가 꿈꾸는 노년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사실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건강하고, 먹고살 걱정 없고, 소일거리가 있었으면 좋겠고, 그러면서 그동안 맛보지 못한 여유와 한가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모든 것의 바탕에는 ‘관계’가 들어 있고, 관계의 중심에는 ‘친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돈 있고, 건강하고, 심심하지 않을 만큼 일거리가 있고, 그래서 눈으로 보기에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 해도, 인간관계에서 아무런 행복과 기쁨도 느끼지 못하고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 한 명 없다면 과연 우리가 꿈꾸는 노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인생의 후반에 접어들면서 다시 한 번 친구 관계를 살펴봐야 하는 까닭은 친구야말로 남은 인생길을 같이 걸어갈 동행이고 동지이고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수업 중에 나온 앞의 네 분 이야기를 중심으로 시니어의 친구 관계를 몇 가지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길동무가 좋으면 먼 길도 가깝다!”
무엇보다 먼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친구의 중요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가족이나 일가친척들이 좋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서로 돌봐 주었지만, 핵가족을 넘어 1인 가구 시대인 요즘은 더 이상 가족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자녀들마저 독립해 떠나고 나면 홀로 남게 마련이고, 그렇기 때문에 소소한 일상을 나누면서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걱정과 즐거움을 나눌 친구가 더더욱 소중합니다. 길고긴 노년의 시간, 갈수록 힘에 부칠 인생의 마지막 고갯길을 앞서거니 뒤서가니 함께 걸어가는 친구는 범상치 않은 인연이며 그 누구보다 고마운 존재입니다.
둘째, “길이 멀면 말의 힘을 알고, 날이 오래면 사람의 마음을 안다!”
친구 관계에도 구조조정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간직하되, 맞지 않는데 억지로 붙잡고 있을 일은 아닙니다. 친구라는 이름만으로 모든 것이 용서되고 아름답게 포장될 수는 없습니다. 일방적이거나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 시간과 함께 관계의 질에도 변화가 와서 허울만 남아 있는 관계는 정리가 필요합니다. 새롭게 다시 시작하든지 아니면 거리를 둔 채 떨어져 있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나이 들면, 너무 늦지 않게 내 손으로 생활을 간소화하고 삶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해야 하는데 우정도 예외는 아닙니다. 포용력 못지않게 옥석을 가려내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 이유는, 친구와 함께 걸어갈 길이 아직 생각보다 훨씬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물이 깊어야 고기가 모인다!”
좋은 친구를 얻으려면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오랜 친구들의 끈끈한 정에 새로운 친구들의 신선함까지 더해진다면 생활이 풍성해질 것은 분명합니다. 흔히 가까운 친구 열 명 중 세 명 이상이 나이 차가 10년 이상이면 그 사람은 세대 차이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은 나이는 물론이고 성별도, 사는 지역도 친구를 사귀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와 다른 배경을 갖고 있는 친구를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정성을 기울이는 일입니다. 물이 깊어야 물고기들이 모여드는 것처럼 품이 넓고 속 깊은 사람이 되도록 나부터 먼저 노력해야겠습니다.
넷째, “정에서 노염난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소홀히 했던 친구가 있습니다. 우정의 담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린 것도 미처 모른 채 살아왔습니다. 후회막급이지만 그래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 친구 관계의 재건을 위한 절호의 기회입니다. 시니어는 바로 그런 나이입니다. 친구는 원래 가깝기 때문에 서운하고 기대가 있기 때문에 실망도 합니다. 남이라면 다시 안 보면 그만이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속상하고 또 칼같이 끊어낼 수도 없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그러지기 시작했는지 찬찬히 살펴보고 내 잘못부터 인정하고 사과하는 게 먼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과의 타이밍입니다. 우정을 포함한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는 데는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내일이면 늦으리. 그래서 모든 관계를 아우르는 이 말은 우정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니 있을 때 잘하자고요.
>> 유경(劉暻)
CBS 아나운서로 노인 대상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진행하다 노인 복지에 뜻을 세우고 프리랜서 사회복지사가 됐다. 저서로는 , 등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배려와 성의'는 어쩌면 기본이다. 가깝게 오래 사귄 친구 관계에서는 더욱 그 기본을 지켜야 한다. 어느 날인가 오래도록 간직된 깊은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참아왔던 앙금의 감정이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어 폭발을 한 것이다. 조금도 더 참을 수 없는 너그럽지 품성을 뒤늦게 후회도 했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필자는 10여 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수소문 끝에 연락이 끊겼던 옛 친구를 찾았고, 그 친구는 당장이라도 만나자고 보챘다. 지난날의 추억과 못 보고 살아온 날의 궁금함으로 마냥 들떠 있었다.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친구는 흘러간 수많은 시간 속에서 모습이 전혀 달라져 알아볼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 조금은 서먹했으나 그래도 옛 때묻은 추억들과 각기 다른 삶의 진한 이야기들로, 삶의 풍파를 넘어선 중후한 아줌마들로서 수다를 이어갔다.
이런저런 삶의 안타까운 사연과 함께 가끔씩은 눈물도 글썽거렸고, 잘 나가는 아이들 얘기까지 끝이 없었다. 친구는 어느덧, 긴 시간 속에 많은 재산을 축적하였고 이제는 제주 땅부자까지 되었다며 자랑을 쏟아냈다. 커다란 얼굴에는 어딘가 힘들어 보이는 그늘이 서려 있기는 했지만, 필자는 있는 그대로를 기쁨으로 다 경청해주었다. 대단하다며 축하와 격려도 해주었다.
시간이 점점 흘러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는데도 친구는 밥 먹자는 소리가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 필자가 먼저 식사하러 가자고 하니 친구는 대뜸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황당한 대답에 말문이 막히고 무슨 일인가 싶었다. 필자는 배가 많이 고팠지만 하는 수 없이 참아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지나간 옛이야기들을 해야 했고,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로 가서 커피값을 내야 하는데 어디로 갔는지 친구가 보이지를 않았다. 필자가 먼저 계산을 했지만 조금 기분이 그랬다. 그럴 수도 있다며 일단 이해를 하기로 했다. 얼마 지난 후 또 만나자고 그 친구가 연락했다.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자기 집으로 오라고 했다.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해서 선뜻 가겠다고 대답을 했다.
친구는 잘 사는 동네, 50평이 넘는 고급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점심으로는 달랑 자장면을 시켰다. 그때부터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친구를 먼 곳까지 자기 편한 곳으로 불러놓고 소박한 된장찌개는 고사하고 도대체 성의가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가 되어 친구는 함께 쇼핑을 가자고 했다. 근처에 있는 백화점에서 세일을 한다며 그리로 필자의 차를 타고 나갔다. 백화점에 도착하자 갑자기 지갑을 놓고 왔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가방 속에 아무것도 없다며 돈을 빌려 줄 수 있느냐고 했다. 할 말도 없고 어이가 없었지만 순진하게 카드로 빌려주겠다고 했다. 무조건 안 된다고 하기가 좀 그랬다.
우선 지하 마켓으로 갔다. 싱싱하게 잘 말려진 꼬들꼬들한 굴비가 값이 싸고 맛이 있어 보였다. 필자는 손가락질을하며 어떠냐고 했더니 친구는 너무 좋아하며 아무 생각 없이 엉뚱스럽게도 남아 있는 것들을 자기가 몽땅 다 사겠다는 것이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말문이 딱 막혀 입이 벌어졌고 양심이 없는 인간으로 너무 뻔뻔해 보였다.
친구가 어떻게 그 모양으로 변해 버렸는지 앞서가는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얄밉기도 하고 도통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차 있는데, 또 팥빙수가 먹고 싶다며 태연하게 함께 먹자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참을 수가 있었다. 차라리 필자가 사주겠다고 먼저 제의했다. 기분이 안 좋기는 했지만 돈이 없다니 도리가 없었다. 마음을 상하게 한 친구와 함께 마주 보며 먹으려니 영 불편해서 옆자리로 옮겨 앉아 횡설수설 이상한 얘기만 늘어놓은 것 같았다.
문제는 결정적으로 빵집에서 일어났다. 백화점은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 반값 세일을 하기 시작했다. 베이커리에서 빵을 사려고 하는데, 마지막으로 남은 것 중에 필자가 골라 놓은 것을 자기가 사고 싶다며 얼른 자기 쟁반으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때,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가 참을 수가 없었다. 소리를 질렀다. 아주 큰소리로 “뭐 하는 거야! 네가 친구냐? 네가 사람이야?” 있는 대로 화를 내고 얼굴이 빨개져서 씩씩대며 그 자리를 거침없이 떠나왔다.
흥분해서 창피함도 무릅쓰고 핏발을 세워가며 소리를 질러대긴 했으나 주차장으로 내려와 운전대에 올라앉았을 때는 약간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그때까지도 따라 내려 오지 않았다. 정상의 사람이라면 잠시 만나 스치는 사이에도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은 있어야 했다. 하물며 가까운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배려는 고사하고 나이를 먹은 중년의 성품에는 고얀 욕심만 가득 남아 있었다. 어디까지 참아 줘야 할까 싶었다.
그후로는 그 친구로부터 연락이 와도 받지 않았다.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그렇게 사람이 변해버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젊었을 때는 착하기만 하고 순수했던 친구가 나이를 먹으면서 어떻게 그리도 당돌하고 얌체처럼 달라질 수가 있는지 필자의 머리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를 않았다.
시간이 가면서 가끔씩 그 친구 생각에 마음이 아련하게 슬퍼왔다. 오래된 우정이었기에 미련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미 흔들려버린 우정을 더 이상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이가 든 탓 일수도 있겠지만 필자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이제 단순하고 명료하게 싫었다.
좋은 사람만 만나고 살아도 남은 시간이 짧기만 한 것 같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 해도 상대를 위한 배려와 최소한의 성의는 있어야 한다. 이제는 고민하고 이해하며, 애써서 만나야 하는 관계의 삶은 심신을 피곤하고 지치게 한다.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삶의 가치관이 다른 이상한 친구들은 멀리하고 싶었다.
필자에게도 전혀 상상치 못 했던 일, 아주 오래된 우정이 마음이 상해 흔들리고 있었다.
중년 이상의 세대에게 한 가지 낯선 현상이 있다. 바로 아토피란 질병인데, 심하면 온몸을 뒤덮으면서 정상적인 생활마저 어렵게 하는 이 질병을 40대 이상의 세대는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만난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언제인가부터 이 질병이 떡하니 풍토병처럼 우리 사회에 자리를 잡은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과학자들은 위생가설(Hygiene Hypothesis, 衛生假說)이라는 이론으로 설명한다.
이 이론은 ‘미생물 공생체 결핍 이론’ 또는 ‘잃어버린 친구 이론’이라고도 불린다. 한마디로 어렸을 때, 흙바닥에서 놀면서 각종 감염성 세균과 기생충 같은 기생체들에게 노출되면서 자란 아이들은 면역계가 이들과 투쟁하면서 자신의 신체조직에 대해서는 면역 관용(Immune tolerance)을 만들어 지켜주는 역할을 하고, 자신의 몸이 아닌 다른 생명체에 대해서는 구별을 확실히 하면서 싸울 수 있는 준비를 갖추기 때문에 정체성이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반면에 어릴 적부터 너무 깨끗한 환경에서 자라난 요즘 아이들은 이런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했기 때문에 면역계도 특별히 외부 물질과 싸울 일이 많지 않다 보니 피아구분을 잘 하지 못하고, 면역력이 남아돌면서 오히려 민감해진 면역계가 자신의 조직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을 가져볼 필요는 있다. 면역력이 강하다는 것은 외부 감염에 대해 저항력이 높기 때문에 인체에 유리한 것 같은데, 왜 면역력이 과도해지는 것이 오히려 자가면역질환을 가져오는지 궁금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면역을 담당하는 세포 중에 T세포라는 것이 있다. 이 T세포가 외부 이물질에 대해 직접 독성물질을 분비해서 공격하는 작용을 주로 하는데, 이 과정에서 염증이 일어나는 것이다. T세포는 염증을 일으키는 물질뿐만 아니라 염증을 가라앉히는 물질도 같이 분비하는데, 면역계가 필요 이상으로 민감해지면 염증을 일으키는 물질의 생성이 훨씬 증가하기 때문에 만성적으로 우리 몸에 염증을 일으키는 자가면역질환이 되는 것이다. 이 자가면역질환 중에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환자가 발생하는 크론병(Crohn’s disease)이라는 것이 있다. 만성 난치성, 염증성 장질환으로 분류하는데 구강에서 항문까지의 위장관 전체에 염증을 일으킬 수 있는 심각한 자가면역질환이다. 복통, 체중 감소, 설사를 끊임없이 일으키며, 한 번 발생하면 평생 동안 지속되면서 장관 협착, 천공(장관에 구멍이 생기는 것) 등의 합병증도 일으킨다. 그동안 이 질환은 서구에서만 흔한 것이라고 알아왔는데,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얼마 전, 싱어송 라이터이자 방송인인 윤종신이 이 병으로 인해 장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으면서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 현재의 치료법은 염증이 일단 발생하면 소염제나 스테로이드제제를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약물 부작용도 심하다. 면역 억제제를 사용하면 다른 감염증에 대해 취약해지면서 나중에는 결국 장의 상당 부분을 잘라내야 하는 수술을 받는 경우가 많아진다.
결국 이 자가면역질환들은 인류가 자연 그대로를 멀리하면서 생겨난 부적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이 자가면역질환을 치료하기 위해서 다시 자연 속에서 답을 찾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중 크론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선택된 것이 바로 돼지 편충이다. 돼지 편충은 돼지 장내에만 특정적으로 기생하는 기생충인데, 돼지의 맹장이나 대장에서 피를 빨아 먹으면서 3년 정도 머물다가 죽는다. 이 돼지 편충의 알을 한 번에 2500알 정도씩 2주에 한 번 정도 복용하는 것이 치료법이다. 편충 알이 사람 몸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위장에서 부화해 껍질을 깨고 나온 성충이 대장이나 맹장에 머문다. 약간 피를 빨기도 하지만, 결국 전혀 낯선 숙주의 환경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고 2주 만에 대장 내에서 파괴되어 배설 된다.
그 2주 동안 돼지 편충은 계속 장벽을 자극하고 면역계를 긴장시키면서 면역계와 싸우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면역계는 새로운 침입자에 대해 총동원령을 내리고 침입자를 몰아낼 때까지 다른 곳에 전혀 신경 쓸 여력이 없어진다. 이 과정에서 크론병의 증상이 사라지는 효과가 나타난다. 아직 정식 치료법으로 채택되지 못하고 실험적인 방법이지만, 24주 동안 투여한 결과 80%의 사람들에게서 효과가 있었고, 73%가 완치판정을 받았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이다. 돼지 편충은 사람 장속에서는 별로 힘을 못 쓰면서 별다른 부작용이나 합병증도 없어서 안전한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단점도 있다. 편충의 알이 부화되고 자라나는 기간이 길기 때문에 충분한 양을 조달하기 어려운 관계로 2주에 한 번 먹는 비용만 수백만 원에 달하는 것이다. 그래도 다른 치료법으로 특별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가뭄에 단비가 아니랄 수 없다.
2016년에 들어와서는 또 다른 희소식이 크론병 환자들에게 찾아 들었다. 그 중 하나는 국내 연구진에 의해 개발되고 있는, ‘애기뿔 소똥구리’라는 곤충에서 추출한 물질이 크론병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 물질은 코프리신이라는 것으로서 일종의 항생물질이다. 쥐를 이용한 실험에서 이 코프리신이 장질환으로 손상된 대장 점막세포를 회복시키는 것이 관찰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대장 상피세포를 이용한 실험에서도 정상세포를 증가시키면서 장점막의 회복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결과는 미국 하버드대 의대의 검증을 거쳐 미국의 유명 학술저널에도 게재되었다.
물론 임상실험을 거쳐 신약으로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길고 지난한 것이다. 하지만 자연 속에서 답을 찾았다는 또 다른 희망을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자연 속에서 찾은 물질들은 비교적 인체에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재생의 효과를 나타낼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국내 연구진도 특정 바이러스를 이용해서 대장 안에서 면역세포가 염증을 줄여주는 물질을 분비하는 것을 관찰했다. 이런 연구결과들은 기존의 화학적 치료법에서 발생하는 모순에 대한 해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장질환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투여되는 항생제 등이 오히려 장내에서 사람과 공생하고 있는 좋은 균들을 죽이면서 상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 따라서 인체와 잘 조화되는 치료법이 발견된다면, 이런 위험도 줄여주어 다시 장 건강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와 과학의 발달로 인류는 자연과 동화되는 방법을 점점 잃어가고, 그 잃어버린 자연과의 관계에서 자가면역질환같은 부작용이 나타났다면, 이제는 그 잃어버린 자연들이 다시 인간에게 손짓하며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 최혁재(崔爀在) 약사 경희의료원 약제본부 예제팀장
경희대 약학대학 객원교수, 한국병원약사회 법제이사, 서울시 약사회 병원약사이사, 대한약물역학위해관리학회 총무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