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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더미 같은 자료, 손쉽게 관리하기
- 옛날에는 자료가 부족하여 어려움이 많았으나, 지금은 예쁜 사진이나 귀중하게 모았던 자료는 산더미처럼 쌓여간다. 관리하기도 어렵지만 다시 찾아보기 매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시니어는 ‘손에 들고 있는 숟가락을 찾는 경우’가 있다. 많고 많은 사진이나 자료를 손쉽게 관리하는 방법을 살펴보자. 디지털화하기 하지를 지나서 날마다 최고기온을 경신하고 있다. “올 여름 열대야가 처음 나타났다.”고 방송은 보도하고 있다. 산행을 같이하기로 약속한 친구에게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서 푹 쉬자.”고 연락했다. 이런 날 그간 생산하고 수집하였던 사진과 문서자료를 다시 한 번 정리하기로 하였다. 현대인은 간편·신속한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다. 많고 많은 사진이나 자료를 손쉽게 관리하는 방법으로 이를 관리번호를 부여하여 디지털화할 필요가 있다. 자료나 사진이 없어지기 전에 틈틈이 하나씩 디지털화를 권고한다. 한 번 보고 방치하면 나중에 다시 찾기 어려운 것이 모두의 경험이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중요한 것은 디지털화하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 자료정리의 한 방법이다. 연도별 관리번호 부여 사진, 문서 등 모든 자료에 관리번호 부여하기를 권장한다. 많은 종류의 자료를 장기간 관리하기 위하여 날짜순, 종류별, 일련번호 순서로 관리번호를 부여하고, 제목이나 주제를 기록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첫 8자는 연월일, 둘째 숫자는 종류구분, 끝으로 같은 날짜, 종류별로 일련번호를 부여한다. 예를 들면 ‘20151127.2.3 유치원 가는 길’은 2015년 11월 27일 쌍둥이 손주가 유치원 가는 사진이다. 이런 방식이다. 연도별 관리번호를 부여하면 다시 찾기에 매우 편리하다. 정확한 기억은 없더라도 대개 얼마 전은 추측하는 것이 모두의 경험이다. 종류별 파일관리 자료 건수가 많아지면 한 곳에서 관리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종류별로 파일을 관리해야 편리하다. 사진은 ‘가족, 친구모임, 자원봉사, 평생교육 참여’ 등으로 구분하여 별도 파일로 보관한다. 많은 양의 칼럼이나 주요자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으로 다시 분류한다. 기고기사나 자기작성 문서는 문서성격 등을 감안하여 분류한다. 예를 들어 ‘아들가족 2, 고교친구 모임 31,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동년기자단 95’로 부여한다. 문서도 같은 요령이다. ‘31’에는 고등학교 동창들의 모임이나 산행을 보관하고, ‘95’에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동년기자단 활동을 관리한다. 평생교육 파일에는 ‘한 방에 익히는 시니어 재무 설계’ PPT 자료를 보관한다. 일련번호 부여하기 일자별, 종류별로 구분한 자료에 끝으로 일련번호를 붙이면 모든 사진과 문서는 중복 없이 정리할 수 있다. 대개의 자료는 파일 하나로 관리할 수 있으나 가족사진과 친구모임 사진은 양이 많아 연도별로 별도 파일을 만든다. 예를 들면 ‘2015년 가족사진, 2016년 친구모임’ 방식이다. 편의상 종류별로 구분하였으나 자료의 분량이 적은 경우에는 파일 한 곳에 여러 종류를 통합관리하면 편리하다. 위에서 소개한 것은 필자가 사용하는 방식의 한 부분이다. 더욱 효율적인 방법이 많이 있을 수 있다. 조그만 참고가 되시기 바란다.
- 2016-07-11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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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 병법 PART4] 신종플루는 아니었지만 되살아난 내 보물 손녀
- 백외섭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 손녀, 손자 쌍둥이와 외손자가 있다. 그중 태어난 지 10일 된 손녀에게 신종플루 증상이 나타났다. 노약자와 영유아는 별다른 대책 없이 공포에 떨고 있던 때였다. 병원마다 “치료가 어렵다”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러다 한 병원에서 천사 같은 의사가 지극정성으로 치료하여 이를 극복하였다. 세 손주는 건강하게 자랐고 그때부터 행복 시작이었다. 살아 있는 천사를 만나다 2009년 10월 쌍둥이 손녀와 손자가 온 가족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다. 그런데 산후조리원에서 조리 중 손녀가 고열과 설사, 식음 전폐로 비상사태가 발생하였다. 토요일 오전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조리원에서 동네병원으로 데려갔으나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오쯤 모 대학병원으로 갔으나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아이는 힘이 없어 축 늘어져 있고, 몸은 불덩이 같았다. 대책 없이 내쫓김을 당하고 보니 자신의 무력감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아이가 출생한 ‘제일병원’으로 전화를 하였다. “신종플루 감염 위험이 크다. 빨리 데려오라.”는 천사의 음성을 들었다. 그때처럼 사람의 목소리에 감격해 본 적이 없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보통 때면 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왜 이렇게 차는 밀리는지 숨이 막혔다. 아내와 며느리는 눈도 뜨지 못한 아기를 안고 초주검 상태다. “내 생명이라도 바치겠소. 손녀를 살려주오” 무언가를 갈구하였다.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이 너무 길고 힘들었다. 이때보다 애탔던 기억은 없다. 토요일 오후 제일병원 응급실! 채혈하느라고 주사기를 찌를 때마다 아이는 아파서 자지러졌다. 당직근무 중인 여의사는 아기의 궁둥이에 코를 대고 대변의 냄새를 맡았다.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3일이 걸리는데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경험상 세균 감염으로 보이니 치료를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살아 있는 천사의 모습을 보았다. 병원 진료를 받아본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의사에 대한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지극정성을 다하는 담당 의사를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정성어린 치료로 열도 차차 내리기 시작하였다. 며칠 후 나온 검사결과도 다행이 신종플루가 아니라고 하였다. “세균에 감염되었으나 경과가 좋다”고 했다. 산후조리원에서 세균 감염이 자주 발생하여 사회문제가 되던 때였다. 이 일을 계기로 다섯 달 후에 외손자가 태어났을 때는 산후조리원 대신 필자의 집에서 6주간 딸의 산후조리를 하게 하였다. 한 주일 치료결과 체온도 정상으로 되고 젖도 잘 먹으면서 무사히 퇴원하였다. 퇴원 후 한동안은 손녀의 건강을 항상 걱정하였다. 다행히 별 이상 없이 건강하게 자랐다. 이제는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다. 손녀를 구해준 의사선생님에게 다시 감사드린다. 세 손주 보살피기 쌍둥이가 어렸을 때는 아침 일찍 아내와 함께 가까이 사는 아들 집으로 갔다. 잠에서 덜 깨 칭얼거리는 아이들 달래려고 목마가 되어 무동 태워주고 동화책을 재미있게 읽어 주고 씨름상대 되어 주면서 한바탕 즐겁게 논다. 아이들의 기분이 어느 정도 좋아지면 얼굴 씻기고, 밥을 먹여서 옷 입히고 등교 준비하는 과정은 한마디로 조그만 전쟁터다. 아침 이때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가족만이 할 수 있는 제일 어려운 어린이 보살핌이라고 본다. 쌍둥이는 길거리 간판의 글씨를 익히면서 질문하기 바쁘고, 지나가는 자동차를 재미있게 구경한다. 어린이 놀이터에서 그네, 미끄럼 타고, 술래잡기 놀이까지 하고 기분 좋은 상태로 어린이집에 도착한다. 외손자는 오후에 어린이집에서 데려오고 있다. 가끔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애교 떠는 모습이 귀엽기만 하다. 아이들 돕는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계속하고 있다. 쌍둥이는 올해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다. 이제는 독후감을 할아버지에게 이야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손녀는 그림을 선물하고 손자는 미니 야구를 하자고 한다. 외손자는 솜씨를 자랑하여 종이접기 작품을 선물로 내민다. 손주, 가슴으로 안아라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표정 하나에도 민감하다. 손으로만 만지는지 가슴으로 안아주는지 금방 알아차린다. 외가에서 산후조리를 하였던 외손자는 외할아버지 품에 안겨서 자는 걸 지금도 제일 좋아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려 하지 말고 아이들 속으로 들어가서 배우면 친해진다. 터닝메카드 놀이를 잘 모른다고 밀어내지 말고 하나씩 배우는 자세로 무릎을 맞대보라! 틀림없이 친구가 된다. 칭찬하라! 장래 귀중한 자산이 손주이다. 수만금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더 큰 보물이 된다. 사랑을 먼저 주면 행복은 저절로 돌아올 것이다. 씩씩하고 명랑한 아이들! 생각만 해도 입이 귀에 붙는다.
- 2016-07-08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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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자서전] 60살에 배운 사진, 도랑치고 가재잡다
- 1, 지리산 청학동서 세상을 만나다 필자는 촌놈이다.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 계곡에서 세상을 만나서다.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일원을 이른다. 삼신봉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진 계곡을 돌고 돌아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하동읍까지 40리(약 15.7㎞), 진주시까지 100리(약 39.3㎞)다. 지금은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앞산 토끼와 뒷산 토끼가 서로 발맞출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정감록’을 비롯한 몇몇 옛 문헌에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청학이 노닐고 흉년, 질병, 난리가 없는 지상 낙원으로 신라 말기부터 전해오는 마을이다. 할아버지도 거창군 가조면 율리에서 그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유불선합일경정유도교"의 신자들도 196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한복을 입고 결혼 전에는 댕기 머리를 땋고 결혼 후에는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지은 머리에 비녀를 꽂는 풍습의 도인촌이다. 이곳으로 이주한 조부모와 부모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었다. 계곡 주위의 다소 반반한 터를 잡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어느 가을날 그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부역을 시키거나 총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소나무 둥치에 포박하여 둔 채로 그들은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손의 밧줄을 간신히 풀고 일궈놓았던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을 팽개친 채 빈 몸으로 10리(약 3.9㎞)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아랫마을로 소개하여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했다. 필자는 청학동서 배태하여 이곳에서 삼 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1950년 2월 초나흘 새벽닭이 울 무렵이었다. 배냇저고리에 쌓여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곳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 곁에서 딸처럼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드리기도 하고 들녘에서 나물을 캐기도 하였다. 닳고 닳은 놋쇠 숟갈로 감자 껍질을 벗겨드리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읍에 있는 하동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밤에 공부하고 나면 콧구멍이 까맣게 그을렸다. 등잔불에 넣을 기름도 40~ 50분 걸어가야 하는 면사무소 근처의 가게에서 기름때 진득하게 낀 됫병에 짚으로 꼰 새끼줄을 묶어 조심스레 들고 와야 했다. 어머니 나이 33세에 필자를 낳았다. 큰 형님과는 10세, 둘째 형님과도 6세 터울이다. 할아버지의 만류로 9세에 초등학교에 입학(1958)했다.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건너 신작로 고갯길을 돌고 도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암초등학교였다. 공부 잘하고 달리기, 웅변,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고 전교 학생회장도 했다. 중학교 역시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3년 동안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로 지역주민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같은 학년의 친구 집에 입주하여 공부를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다. 중학생이 가정교사로 일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한 특별한 경험이 있다. 동네 결혼식의 축사도 도맡아 했다. 2. “당신은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거창대성고등학교를 졸업(71)한 후 72년 곧바로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관제병으로 3년 만기 전역했다. 이후 77년 10월, 대학 졸업 직전에 쌍용그룹 고려화재해상보험㈜에 공채로 입사했다. 특종보험 언더라이팅 업무를 하다 기획조사부로 발령되어 신상품 개발 업무를 하여 국내 최초 골프보험, 낚시보험 등의 레저보험을 개발하였다. 79년 4월 15일, 다섯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보험감독원 등 외부기관 연수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재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83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보험연수소(SITC)를 수료(사진)했다. 중견 사원이 되었을 때는 운영상 문제가 있었던 제주지점, 대전지점, 동대문지점장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크게 올렸다. 그런 덕으로 96년 초 직장의 별인 임원으로 승진해 부산, 경남, 제주를 관장하는 본부장(부산 주재)을 지냈다. 3, 47세에 용도폐기 호사다마라 했던가? 임원으로 승진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97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충격이었다. 나이 47세 때다.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회사 일에 매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창 일할 나이였고 두 아들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필자에게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넥타이를 매고 정상 출근하듯 집을 나서 공원에서 배회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필자가 바로 그 처지가 되었다. 4. “당신 제 명에 살게 하려고” 해임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야 하나를 고민했다. 믿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그날로 아내에게 사실을 알렸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알렸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어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시간을 보낸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 잘 됐어요. 당신 제 명에 가게 하려고 하늘이 도왔나 봐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어디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우리 세대들이 다 그러했듯 나 역시 목표달성을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다. 거래처 접대와 직원 격려를 위한 회식 자리로 자정 무렵에야 겨우 혼자 살던 사택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가 제 명에 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을 수차례 하였을 것이다. 5. “설상가상”,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한 다음 해 IMF 위기가 닥쳤다. 먹고 사는 일이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재취업하려 발버둥 쳐봤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단계 모집 광고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런 현실은 분노를 부추겼고 속이 더 상했다. 분노를 일간신문 독자 투고란에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을 가장 잘 가라앉혔던 생각은 “나의 직장 운이 거기까진 데 어이하겠어”라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기 시작했다. 6, 마당쇠가 되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퇴직 6개월이 지나서야 고용노동부 고양시고용센터에 들러 실업급여를 청구했다. 처음엔 쑥스럽고 창피하여 신청을 미루고 있었다. 국민연금을 해지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다른 보험도 모두 해지하였다. 그 후 별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만화방을 창업했다. 누워서도, 엎드려서도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도입으로 좋은 호응을 얻어 사업이 잘됐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하여 라면을 직접 끓여 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대조류였던 PC방이 성업하면서 이 업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사업을 접고 경기 부천시 상동에서 부대찌개 음식점을 창업해 운영했다. 90%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누누이 들으면서도 많은 퇴직자가 덤벼드는 것이 요식업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사 다닐 때 몸에 익힌 고객서비스 정신이 도움되어 친절한 음식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괜찮아졌다. ‘이런 맛에 음식점을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몸이었다. 계속 아팠다. 특히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맞았다. 때마침 가게를 욕심내는 사람이 나타나 적정한 가격 협상 끝에 가게를 넘겼다. 그 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다양한 일을 이어갔다. 월 40만 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의 조경관리사로 취업하여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쓰레기봉투를 치우는 일도 하였다. 마당쇠가 된 셈이다. 대형 고깃집 일산한우마을 점장도 하였고 일당을 받기 위하여 MBC 드라마 ‘주몽’ 엑스트라 출연도 해보았다.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 되었다. 강의 콘텐츠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7, 친구의 비명횡사, 인생의 전환점 되다 57세 때 가까운 친구를 비명횡사로 잃었다. 두 살 아래의 직장 친구였다. 평소 술은 하지 않았고 담배도 수년 전에 끊어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석 전날 다른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행 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급 차량을 불렀으나 고향 가는 차량 행렬에 막혀 늦게 도착한 119차량에 실려 가까운 성남시의 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정말 황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퇴직 후 보낸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내로라할만한 일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도 친구와 같이 무의미한 생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100세 장수시대를 맞아 보람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는 필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8, 60살에 사진 배우다 직장생활과 생업으로 잊고 있었지만, 은퇴하면 햇살 좋은 언덕에 캔버스를 세우고 수채화를 그리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필자가 사는 고양시에서 무료로 하는 사진강좌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를 운영하면서 사진을 곁들인 글을 쓰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때여서 강좌에 참여했다. 화필 대신에 카메라를 잡은 셈이다. 2010년 7월부터 한 달에 3회 6개월 강좌를 들었다. 필자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사진에 특별한 재능이나 솜씨를 갖고 있지 않은 초보자였다. 카메라도 소형 디지털카메라 한 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감성과 초등학교 때 수채화를 그렸던 경험, 전 직장에서 맡았던 홍보 관련 일과 사보편찬 업무가 도움돼 일취월장했다. 사진 취미활동은 여가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건강도 챙기고 여러 사람이나 자연과 함께함으로써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했다. 때로는 작품으로 부가적 소득과 재능기부도 하면서 평생을 현역처럼 살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뒤인 2010년 10월부터 공인 사진작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에서 입선 이상을 하여 획득한 점수가 50점을 넘겨야 했다. 입선하면 2점을 받는다. 일 년 동안에 28회 출품해 절반 이상 낙선하였으나 어쨌든 15회의 수상으로 사진작가 명함을 달았다. 첫 번째로 출품했던 제1회 너브내전국감성사진공모전에 ‘형상II’이 동상의 영예를 안겨주어 출발이 순조로웠으나 다른 공모전에선 잘 뽑히지 않아 포기할 생각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재미있었다. 꾸준하게 찍으며 관련 서적을 사서 공부하고 기회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재능기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년 만인 2013년 7월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 질주’라는 작품이 입선했다. 2013년 10월에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서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공모전’의 사진 부문에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다. 11월에는 부산일보 주최 제21회 ‘부일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닭장’이 1,166점 중에서 좋은 심사평으로 2위인 우수상 영예를 안았다. 부산일보는 2013년 12월 26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변용도 씨의 우수상 '닭장'은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닭의 붉은 머리 부분을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하게 보여 주어, 닭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하는 듯한 표현이 출중했다는 평을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9. 사진취미,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다 필자는 사진을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포토스토리텔러’라 자칭한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가 37만 장이다. 카메라는 가장 아끼는 친구다. 늘 함께한다.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다. 사진 활동이 바탕이 되어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다용도(多用途)로 후반생을 바쁘고도 보람 있게 산다. 사진이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었다. 필자는 그 텃밭에 글솜씨, 강의 솜씨를 추가로 뿌렸다. 그런 씨앗에서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미역국’ 외 다수의 작품으로 ‘순수문학지’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 명함을 달았다. 2012년에는 필자의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가 대한민국 100대 우수블로그로 선정됐다. 사진작가, 사진 칼럼니스트, 수필가, 저자, 강사(은퇴준비, 생애 재설계, 변화관리, 사진), 방송인(KBS 1TV ‘아침마당’, SBS라디오 ‘유영미 마음은 언제나 청춘’ 시니어리포터, 머니투데이 행복특강, 토마토TV 강연, 아리랑TV, CBS라디오, 한국직업방송), 기자(시니어조선 사진명예기자, 사회연대은행 KDB시니어브리지센터 두드림기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리더 겸 시니어리포터, ‘디카와 놀자’와 세화포토클럽 운영자다. 최근엔 경제신문 이투데이 자매지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동년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 2016년 1월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를 출간하여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와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고려대 평생교육원 액티브시니어전문가과정 전임강사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우면청춘대학의 사진강좌를 2년째 맡아오고 있다. 사진이 근간이 되어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다. 10. 도랑 치고 가재 잡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경기 고양시 외곽의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자그마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아니하여도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일상을 즐긴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라고 한 어느 노부부 여행가의 생활 철학을 닮아가려 한다.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하였던 보람을 느끼며 산다. 전반생보다 후반생을 더 바쁘고 활기차게 보낸다. 그 바탕에 사진이 있다. 많지는 않아도 용돈도 번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형국의 삶을 산다. 2차 성장을 한 셈이다.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 윌리엄 새들러 교수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2차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제2의 절정기를 만들기 위해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변함없는 도전이다. 필자의 이름을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로 풀이해본다. 그런 덕분에 누구나 한 번쯤 출연해보고 싶은 KBS 1TV의 ‘아침마당’(2014, 11, 24)에 섭외를 받아 출연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나의 두 번째 직업을 소개합니다’란 주제였다. 사진작가로, 은퇴준비강사로 안사람과 함께 출연해 삶의 정점을 새로 찍었다. 11,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세계적 사진작가 프랑스의 마크 리부가 있다. ‘에펠탑의 페인트공’, ‘꽃을 든 여인’ 등 유명한 작품을 만든 현존하는 사진작가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 리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 찍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세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가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얻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겠다는 꿈을 꾼다. 희망으로 산다. 진정한 대 작가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과 자세가 새로운 경지로의 작품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려는 삶의 철학이, 남이 넘볼 수 없고 흉낼 수 없는 작품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여겨진다. 미래를 향해 또 다른 꿈을 꾼다. 필자 또한 늘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도전의 발길을 멈추지 않으련다. 또한 하늘이 인생의 구석구석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경험과 지혜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다 쓰고 가리라.
- 2016-07-04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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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주 병법 PART2] 문화가 변해도 손주 돌봄은 역시 격려와 인정이 최고
- 장영희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 요즘 ‘손주 얼굴을 보는 값’을 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만남에 식사값을 내야 하고, 데리고 나온 자녀에게 차비를 쥐어주기도 한다. 이런 시대에 손주의 교육에 참여한다는 것은 감히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없다. 외할머니가 손자를 아기 때부터 다섯 살 때까지 보살폈다. 왕자 기르듯 받들면서 길렀다.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뭐든지 가져다주었다. 여섯 살 아이를 밥도 먹여 줬다. 외동딸에 손자가 태어났으니 오죽한가. 거기에 아들 내외는 맞벌이를 하니 미안한 마음에 벌벌 떨었다. 나는 못마땅했지만 내가 맡아 키우지를 않으니 손자교육에 간섭하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몸이 안 좋아져 손자를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 손자에게 말했다. “성범아, 아파트에 동네친구들 있지? 이 사탕 좀 친구들에게 나눠 줄까?” 무슨 좋은 생각이 있을까. 길에서 만나거나 집으로 갖다 주든지 그렇게 해보자고 했더니 쟁반까지 가지고 온다. 냅다 밖으로 나갔다. 강아지도 따라 나선다. 그때 네댓 살 여자아이가 엄마와 걸어온다. 얼른 다가가서 망설이지 않고 반지사탕을 준다. 그런데 손자는 처음 해보는 일이라 내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일단 처음에 성공을 했다. 그러더니 옆 라인으로 간다. 현관문에서 ‘딩동’ 누르고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힘차게 내려왔다. 이제 두 번째도 성공했다. 이번에는 어린애를 안은 남자군인을 만났다. 이미 탄력이 붙은 손자는 다가가서 “이 사탕을 드리고 싶어요” 웃음까지 띠고 상냥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현관문을 쾅 닫고 들어간 그 집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났다. 왜 울지? 그 집에는 아이가 둘이니. 사탕이 하나밖에 없어서 우는 것은 아닐까. 손자는 금세 알아듣고 다시 문을 두드렸다. 사탕을 주고 보무당당하게 내려온다. 울음소리는 그쳤다. 마치 온 동네를 돌아다니라고 해도 다닐 기세다. 마지막으로 1층을 두드렸다. 손자 이름을 아는 걸로 봐서 아는 집인 듯했다. 그 집안으로 들어오라 하니 신발을 벗고 강아지와 함께 들어선다. 그 집 할머니와 딸과 주고받는 소리가 들린다. “너 혼자 왔니?” 이렇게 묻는 소리가 들리고, “바래다줄까?” 5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밖에서 기다렸다. 드디어 손자는 나왔고, “이야, 우리 범이 최고다. 할머니도 못하는 일을 네가 해냈구나.”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며, 마치 개선장군처럼 집으로 왔다. 아들에게 전화로 이야기했더니 며느리에게 전해졌다. 아들은 “엄마 잘했어요” 며느리는 퇴근해서 하는 말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입이 쩍 벌어졌다. 손자가 밖에서 놀고 있는데 또래의 아이가 집으로 들어오고 싶어 해서 들어오라고 했다. 그래서 집에서 놀다가 그 집으로 손자는 다시 놀러갔다. 그랬더니 며느리가 퇴근해서 하는 말이 “어머니 그러시면 안 돼요” 이런다. 퇴근길에 돼지고기 한 근을 사서 그 집에 갖다 주고 왔단다. 약속을 해서 가야 하고 불쑥 아이만 보내는 것이 아니란다. ‘내 생각은 그럴 수도 있지’ 인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요즘 문화가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우리 손주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기나 혀’ 이 생각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남의 집을 혼자 방문해서 1시간 정도 머물렀다. 내가 데리고 나올 때 그 집 주인은 “아이가 정리정돈을 잘 하네요” 기분 좋은 소리를 한다. 남의 집에 혼자서 오랫동안 머물다 오는 일도 손자가 처음 해본 일이다. 새가 둥지를 떠나 날기를 연습하는구나 ! 상봉역에서 전철을 타고 춘천역에 내려 놀이방에 도착했다. “우리 집까지 걸어갈까?” 손자에게 의견을 물으니 좋다고 한다. 집까지는 1.5km정도 되는 거리다. “그런데 할머니가 집으로 가는 길을 모르는데 너 혹시 아니?” 그랬더니 앞장을 선다. 고사리 손으로 내 손을 잡고, 혼자서 설명을 한다. 나무가 많은 집이 나오고, 그 다음에 닭을 기르는 집이 있다고 했다. “할머니가 닭 구경하고 싶다” 했더니 조금 기다리라며 닭장 앞에서 수탉이 몇 마리, 모이를 쪼아 먹는다느니 싸움을 한다느니 하며 이야기한다. 빵집에서 손자가 좋아하는 오징어먹물 빵도 샀다. 길을 건너 방앗간에서는 한참 동안이나 기름을 짜는 풍경, 자루에 담긴 고추를 구경했다. 김을 구울 때 바른 들기름을 여기서 샀다고 했다. 통닭집을 지나 손자의 얘기를 들으면서 기웃거리며 왔다. 아침에 놀이방에 갈 때 배웅하는 이가 있어야 된다. 오는 시간에도 마중하는 이가 있어야 한다. 아니면 버스가 그냥 아이를 태우고 놀이방으로 간다. 그래서 오후 4시 버스를 정확하게 기다려야 한다. 잠시 잠이 들거나 하면 일이 커진다.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도 손자가 올 때까지 일부러 기다렸다. 분리수거한 몇 개의 백을 들고 손자에게 말한다. “너 쓰레기장 어디인 줄 아니?” 씽씽카 고리에다 그중 하나를 걸더니 앞장을 선다. 한참을 가야 했다. 며느리가 퇴근해서 왔다. “오늘 범이 일 좀 시켰다”했더니 “어머니 잘하셨어요” 속으로 별일이네 했다. 아이에게 천천히 이야기로 설명하면 된다. 할머니생각은 이런데 어때? PX매점에 갈 때도 할머니가 이것을 사고 싶어. 달팽이크림이 필요해. 너는 뭘 고르고 싶은데. 분명한 의사표현을 하고 이것을 사야 하는 이유를 말한다. 좀 시간이 걸릴지라도. 새로운 과자가 나왔는데 사볼까. 지금 콧물이 나기 때문에 아이스크림을 사지 않아야 된다는 것도 스스로 결정하도록 기다렸다. 아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다른 아이들보다 1년이 늦는다고 조바심쳤다. 내가 3개월 동안 춘천을 다니며 내 교육방법대로 아이와 자연스럽게 지냈다. 며칠 전에 아들이 와서 하는 말. “엄마 이제 범이가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고, 정상이래요.” 결국은 아이가 ‘혼자서도 잘해요’가 되었다. 이런 행동은 내가 두 아들을 길러 봤고, 지금 현재 제 몫을 해내는 어른으로 성장시킨 체험이 있어서다. 문화가 변해도 아이들을 키우는 근본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 2016-06-29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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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삶의 노을이 지기 전에
- 밥만 해 먹는 여자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폐업 하고나서 꼭, 10년! 집에서 밥만 해먹고 사회활동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밥만 해 먹으면서 가정 살림만 한다고 하면 누구든지 한심하게 본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사회활동을 해야만 훌륭하고 대단하게 여겨 주는 것이 요즘 사회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집에만 있다. 그렇다고 살림살이를 반짝반짝하게 닦아 빛이 나게 하며 살아가는 주부도 아니고, 요리솜씨가 뛰어나 특별하게 내세울 나만의 ‘필살기 메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살림도 대충하고, 청소도 대충하면서도, 남들처럼 취미하나도 계발하지 못하고 무취미로 살아가는 ‘게으른 은둔자’다. 게으른 은둔자 사람들은 동호회다, 친목계다, 동창회다 해서, 갖가지 모임을 만들어 가며 사람들을 사귀고, 만난다. 그러나 필자는 집에만 있어도 세상 편하고 좋다. 밖에 나가는 일은 꼭 필요 할 때만 나간다. 병원갈 때, 은행이나 관공서에 볼 일이 있을 때, 가끔 언니들이나 지인을 만날 때, 교회에 갈 때, 그리고 대부분 반찬거리 사러 대형마트에 갈 때뿐이다. 집에 화수분이라도 하나 있어서 반찬거리가 저절로 생겨난다면 외출 할일도 없을 터이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화수분이 내게는 없다. 그래서 주 1회 정도, 반찬거리 사러 할 수 없이, 사람이 북적거리는 대형마트엘 간다. 사람 많은 곳에서 휘둘리다가 오면, 너무 피곤해 초주검이 되곤 한다. 집에만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필자에게 묻는 말은 하나같이 ‘심심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천만의 말씀! 그것은 사람들이 몰라서 하는 말이다. 이렇게 살아도 하루 24시간이 항상 모자란다. 재미있는 영화보기, 다양한 프로의 TV시청, 그리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책들을 읽기에 하루는 너무나 짧다. 그러니 살림을 대충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필자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것보다 책이 더 좋고, 영화나 TV가 더 재미있다. 이렇게 은둔자가 된 것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답답해하는데, 이런 은둔을 반기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다. 필자에게 마음 놓고 밥을 시켜 먹으려는 사람, 바로 남편이다. 구석기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하루는, 오전에 야쿠르트 영업사원이 우리 집의 벨을 눌렀다. 문을 열고 나가니 깜짝 놀란다. 벨을 눌렀기에 나간 것뿐인데 왜 필자를 보고 놀라는 것인지 물어 보았다. “이 시간에 집에 계시네요?” 마치 신기한 뭔가를 보듯 한다. 내가 물었다. “이 시간에 우리 집에 내가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해요?” 야쿠르트 판매사원이 대답했다. “아니요, 요즘은 이 시간엔 집집마다 주부들이 나가고 집에 없거든요. 돈을 벌기 위해 나가든지, 취미활동을 하러 나가든지, 다들 나가고 없는데, 그런데 집에 계신 분도 있네요” 그녀는 집에 있는 필자가 마냥 신기한가보다. 마치 구석기사람이라도 본 듯이 그런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렇게 이상한가?’ 하긴 요즘은 모두들 바쁘게 살아가는데, 혼자서만 한없이 늘어져 있다는 생각도 가끔 하긴 했으니까, 야쿠르트 판매사원의 말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들의 건강을 위해서 밥을 열심히 했다는 것이 자랑스러울 것 까지는 아니라도, 당당한 일임엔 틀림이 없다. 그런데도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야쿠르트 판매사원의 말에 필자는 은근히 민망하고 부끄러운 생각까지 든다. 경제활동을 꿈꾸며 며칠을 두고 은둔생활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나이가 더 많아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오기 전에, 어서 털고 일어나 경제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인들은 취득하기 어려운 자격증을 묵혀 두는 것이 너무 아깝다고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다시 개설하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건 부동산 중개업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많이 걸어 다녀야 하고, 누군가 에게는 전 재산일 수도 있는, 고객의 큰 재산이 오가는 일을 해야 하므로 순발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 직업이지, 시니어들이 할 수 있는 직업은 절대 아니다. 또, 멀지 않아 대기업과 외국기업들이 부동산 법인을 만들어서 부동산 중개업시장에 진입하는 날이 다가 올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부동산중개업의 경기가 좋지 않을 때이고 보니, 더더욱 사무소 개업은 할 수가 없다.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인터넷에 들어가 ‘서울시일자리플러스센터’에 구직 신청을 했다. 취업교육을 받다 하루는 ‘서울시어르신취업훈련센터’에서 취업교육을 받으라는 문자가 왔다. 취업교육을 받으러 가보니까, 여러 가지 교육이 다양하게 있어서 그때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들꽃 가드닝 교육, 동년배 상담가 교육, 도슨트 교육, 취업설계아카데미 교육등 그 외에도 다수의 교육을 더 받았다. 교육을 받고나서 그걸로 취업을 해보려고, 내게 맞을 것 같은 교육만 골라서 받았다. 그러다보니, 1년이 어느새 꿈결같이 흘러갔다. 취업을 못해 크게 실망 교육을 받고나면, 처음에 내가 그 교육을 선택 했을 때와는 결과가 달랐다. 필자가 직업으로 가지기에는 힘들고, 자신도 없고, 취업할 분야를 선택할 수가 없었다. 실망도 많이 되고,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교육 받을 때, 강사들이, 정말로 재미있고, 취미로 즐길 수 있는 분야를 직업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이 재미있어야 싫증 내지 않고 오랫동안 할 수 있을 테니까, 뭘 잘 할 수 있을지 꼭 취미부터 찾으라는 것이다. 나는 맞는 취미를 못 찾아서 지금까지도 취미생활을 못하고 있다. 그래서 취업도 어려운가보다. 취업을 포기할까? 아니면 진로를 바꿔 볼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 결과, 진로를 ‘상담’ 쪽으로 바꾸어 보려고 굳게 마음먹었다. 적성 진로검사를 받다 센터에는 그만 다니려고 상담분야의 교육기관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였는데, 센터 강사님이 ‘취업설계아카데미교육’을 받아 볼 것을 적극 권유 하셨다. 뿌리칠 수가 없어서 이번 교육만 한 번 더 받아보고 그만 둬야겠다고 생각하고, 교육을 받았다. ‘취업설계아카데미교육’은 직업상담 분야의 프로그램이 들어 있어서 ‘진로검사’도 받게 되었다. 이때는 이미 상담 쪽으로 마음이 많이 기울어 있어서 결과가 상담관련분야로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예술적, 진취적, 탐구적’ 뭐 이런 단어만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상담분야로 전환 하려던 계획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갑자기 앞이 캄캄하고 막막해졌다. 지금 까지는 예술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해 온 사람인데, 예술이 왜 별안간 튀어 나오느냐 말이다. 상실감에 허탈해하는 이 모습을 본 담당 복지사가 ‘본인이 좋아하는 교육만 받지 말고, 관심 없는 분야도 골고루 받아 보면, 의외로, 관심 없던 분야에서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을 수도 있다’고,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었다. 생각해보니 복지사의 조언이 정말 맞는 말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교육을 골고루 다 받아 보기로 결심 했다. 방송인 교육을 받으며 ‘취업설계아카데미교육’을 마치고 났을 때, 마침 ‘방송인교육’의 교육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복지사의 조언대로 평소엔 전혀 관심조차 없었던 ‘방송인교육’을 신청했다. 방송인 교육은 시니어 연기자, 모델, 리포터와 같은 방송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전문직 교육이다. 연기엔 관심 없지만, 커리큘럼을 살펴보니 방송기사작성과 리포터교육은 글쓰기가 있어서 받아보면 좋을 것 같았다. 리포터교육을 받으면서, 자기 소개하는 글을 발표했을 때와 리포터 기사작성을 했을 때 두 번 모두 강사에게 칭찬을 들었다. 고칠 것이 하나도 없고, 지금 바로 현장에 가서 리포터를 해도 되겠다고 했다. 큰 박수도 두 번이나 받았다. 도슨트 교육과 시니어 기자교육을 받을 때도 같은 칭찬을 받았다. 이렇게 여러 번 강사들에게 칭찬을 듣고 보니, 교육생들 사이엔 필자가 글을 잘 쓴다고 소문이 났다. 시니어 잡지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기자가 되다 시니어기자교육이 끝날 무렵에, 마침 경제신문 ‘이투데이’에서 만들고 있는 시니어잡지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서 시니어기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그 모집광고를 보고, 필자는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바로 이거다. 여기서부터 시니어의 새 삶을 시작해야지!” 필자는 그 길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시니어기자 지원서를 냈다. 운이 좋게도 합격되어서, ‘기자’가 되는 어릴 적 꿈은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시니어기자인 ‘동년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글쓰기로 삶을 꽃 피우리라! 글을 잘 쓴다고 소문이 나고 보니, 소문 난대로 정말 글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데 글쓰기를 해볼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이유가 하나 또 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문예반은 아니지만, 방과 후에 집에서 원고지를 묶어놓고, 혼자서 취미로 틈틈이 시를 썼다. 그 덕분에 중학교 3학년 때는 학교 대표로 뽑혀서 대학교 백일장에 나가 장려상도 탔다. 상을 타고 보니, 시인이 되어서 기자를 해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건 언니들이 보던 여성월간지를 보고서 부터였다. 시인인데, 유명 인사를 인터뷰하러 다니는 걸 읽어본 후로는 필자도 ‘시인이면서, 기자가 되면 얼마나 멋질까!’ 하고 생각했다. 그 티끌만한 작은 경험을 움켜지고, 지금부터라도 ‘글쓰기’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시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또, 시인이 되지 못하면 어떤가! 글쓰기를 하는 순간들이 행복한 날들이 될 것이고, 필자의 남은 삶을 아름답게 꽃피워 낼 것이다. 이 화려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삶의 노을이 지기 전에, 서둘러야겠다.
- 2016-06-2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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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6월에 생각하는 어느 소녀의 기억 1. 2. 3
- 소녀가 어렸을 때 살던 곳은 대구시 삼덕동이었다. 그곳 삼덕동의 중앙초등학교에서 4학년까지 다니다가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와서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교동초등학교로 전학하던 그때가 소녀에게는 서울 사람의 시작이었다. 어린 시절 삼덕동 소녀의 집에는 동네에서 제일 큰 마당이 있었고 여름에는 그 마당 한가득 형형색색의 이름 모를 꽃이 피고 졌던 기억들이 어렴풋하다. 밤중에 화장실 가는 일이 큰일 중 큰일이었던 기억, 화장실에 가기 위해 누군가를 깨워서 같이 대청마루를 지나칠 때 발바닥에 닿았던 얼음장 같았던 마루 촉감의 기억도 아직 남아 있다. 또 겨울 어느 날 밤 소녀의 집에서 그리 가깝지 않다고 생각했던 성당의 뾰족지붕이 겨울밤 투명한 마루 유리창을 통해 한눈에 들어왔던 기억도 뚜렸하다. 뾰족지붕에 돌려져 있는 색등 때문에 선명한 삼각형이 된 성당 지붕은 심지어 반짝이기까지 하면서 어린 소녀의 눈에 요지경처럼 들어왔다. 소녀의 집과 성당 사이 아무것도 가릴 것이 없던 시절 반짝이는 삼각형 지붕은 소녀에게는 까만 밤하늘의 디즈니월드 이상이었다. 발이 시린 줄도 모르고 오래오래 서서 바라본 반짝이던 성당 지붕 크리스마스 불빛의 황홀했던 환상도 뇌리에 깊이 박힌 추억이다. 싸인지라고 불렀던 파스텔톤 빛의 색 도화지를 두 살 위 언니를 졸라 겨우 얻어냈을 때의 기억. 아마 소녀는 죽을 때까지 이 보잘 것없는 기억들의 불씨를 마음속 깊이 살려 둘 예정이다. 소녀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하시던 일을 서울로 옮기면서 소녀의 어머니, 아버지는 1년 이상의 원조 주말 부부를 하시다가 아버지의 인솔 하에 대식구 모두가 소녀가 4학년이 되던 해 서울로 이사 왔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하여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기를 원하신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을 소녀는 나중에야 해본다. 아버지가 서울에 가셨던 어느 여름날 삼덕동 시절. 소녀는 할머니, 고모, 어머니가 대청마루에서 대수롭지 않게 하는 지나간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된다. 소녀가 우연히 들은 그 얘기는 이랬다. 엄마가 소녀의 언니를 막 뱃속에 가질 때 한국전쟁이라는 것이 일어났다. 당시 군대 사정은 잘 모르지만 소녀의 아버지는 3대 독자여서 전쟁터로 나가는데 면제를 받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1.4후퇴 이후 인민군이 부산까지 내려오면서 전황이 매우 급해졌다. 장소 불문하고 아무 준비 안 된 사람이라도 눈에 띄는 민간인 남자는 군복도 없이 삼엄한 감시하에 무조건 전쟁터로 차출됐다는 것. 그런데 그즈음 외출 중이던 소녀의 아버지도 영문을 모르는 채 그 대열에 끼게 된다. 군인도 아닌 오합지졸 민간인 행렬은 전쟁터로 향하는 첫발을 떼면서 삼덕동 집 앞을 지나가게 된다. 그곳을 지나가다 소녀의 아버지는 윗옷 호주머니에 단단히 꽂아뒀던 ‘보물 1호’ 파카 만년필을 집 담장 안으로 던져 넣었다. 담장 밑에 던져진 소녀 아버지의 만년필을 발견하고 사태를 짐작한 남은 식구들은 모두 패닉에 빠진다. 낮에 붙들려 걷기 시작한 행렬은 만 하루 이상을 걷다가 자정이 되어갈 무렵 이름 모를 곳에서 잠시 쉬게 된다. 잠시 후 곧장 전쟁터로 가서 군복도 없이 인민군의 총알받이가 되든, 잘못되면 국군에게 총살당하더라도 이 대열에서 빠져나와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 선택이 둘뿐인 찰나의 순간 수많은 생각을 했을 소녀의 아버지는 후자를 선택한다. 칠흑 같던 밤 행군을 잠시 멈춘 사이 아버지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다 다음날 밤 마침내 불빛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퉁이마다 총을 들고 보초 서고 있는 군인을 만나게 된다. 아무 결정권이 없는 처음 만난 군인은 소녀의 아버지를 미군에게 데리고 간다. 모든 각오를 하고 있던 아버지는 있는 그대로 얘기하게 된다. 당시 영어가 신통치 않았을 아버지와 미국 사람이 어떻게 대화가 통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버지는 자신의 민간인 신분과 산달이 가까운 아내 얘기를 미군에게 하였다. 아버지와 뜻이 통한 미군은 아버지를 통과 시키고 집으로 돌아가는 곳곳에서 만나게 될 보초를 통과할 수 있는 메모까지 써준다. 군인이 아니었던 아버지는 난생처음 만난 외국 군인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소녀의 가족은 건재할 수 있었으며, 소녀도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갓 여고를 졸업했던 20세 남짓 된 소녀의 고모는 어느 날 외출에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뜬금없이 붉은 완장을 두르고 집으로 들어와 식구들을 기겁시켰던 얘기도 소녀는 곁들여 듣게 된다. 생각해보면 당시 사람들은 모두 2년 전에 상영했던 영화 ‘국제극장’의 주인공인 것만 같다. 이데올로기가 뭔지도 몰랐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몰랐을 시대의 사람들이 겪었던 역사의 환란. 초등학교 시절 ‘상기하자 한국전쟁'의 달을 맞아 글짓기, 포스트 그리기 시간이 돌아오면 호국 영웅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듣는다. 그러나 겪어보지도 못한 소녀 가족 환란의 이야기는 소녀에게 혼자만의 비밀이 되어 시시때때로 그 비밀과 싸워야 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사회의 규칙에 조금씩 눈 떠가며 민간인이었던 아버지의 상황이 이해된 소녀는 비로소 혼자의 비밀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이제 할머니가 된 그때 그 소녀는 지금 루마니아 작가 콘스탄틴 게오르규가 쓴 장편 소설 ‘25시’를 생각해낸다. 소녀는 중학생 어린 나이에 명동성당 앞 중앙극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이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었을 때 읽어본 소설 ‘25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었다. 게르만도, 유대인도 아니고 아무런 이데올로기도 가지지 않은 루마니아 시골의 순박한 농부 요한 모리츠와 그의 가족이 역사 속의 희생물로 바쳐져 버린 슬픈 비극의 운명이 떠오른다. 요한 모리츠는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유대인, 연합군, 다시 미ㆍ소의 소용돌이 속에 끝없이 갇혀버린 어이없이 허무한 인생의 이야기지만 요한 모리츠, 그의 이름은 온갖 강대국 사이에 끼어 고난의 운명에 처하는 약소민족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지금 할머니가 된 그때 그 소녀는 또다시 돌아온 6월에 이제 모두 돌아가시고 안 계신 소녀의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엄마, 철없이 붉은 완장을 차고 들어와 식구를 놀래게 했던 고모, 그들이 60년도 훨씬 전에 걸어왔던 그 길과 혼자 간직했던 비밀들이 아주 오랜만에 생각이 나 아무도 몰래 그 시절 그 소녀의 해맑은 웃음을 다시 한 번 만들어 본다.
- 2016-06-15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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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머리 자르는 날
- 필자는 남편과 한 달에 한 번 실갱이하는 날이 있다. 바로 머리 깎는 날이다. 남편은 그날이 오면 지루하게 앉아 있을 접이 식 조그만 의자, 싹싹 갈아 보관한 날렵한 가위, 미국에서 사온 100V짜리 전기 바리 깡, 주섬주섬 주어 모은 각양각색 못 생긴 빗들, 한국의 220V에 끼우려면 다운 트렌스까지 좁아 터진 목욕탕 변기뚜껑 위에 늘어놓는다. 총 출동한 도구들은 필자의 손길을 기다린다. 백인 동네 미용실은 겁이 난다고 가기를 꺼려했다. 미국 살 때부터 화장실 한쪽 구석에서 치뤄 지던 행사가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다. 제발 미용실 좀 가라고 해도 한 손 번쩍 들어 손 사래를 절레절레 친다. 무조건 당신이 최고라며 엄지 손가락 번쩍 들어 힘차게 한눈을 찡긋거리면 가라 앉았던 마음도 슬슬 꿈틀거려 온다. 필자는 마지 못해 무거운 몸 추슬려 무기를 찾아 놓고 다시 실갱이 전쟁터로 나갈 채비를 차린다. 어느 새 수북하게 자라버린 머리 잡초들 사이로 나이 먹어 처져버린 어깨 위에 커버를 씌운다. 넙적한 등 한 대 툭 때리고 물을 뿌려 곱게 빗질을 한다. 서툰 솜씨로 손가락 꼬물꼬물 가위질에 혼신을 다하면 등 짝에는 어느새 땀이 흘러 내린다. 허리 세워 거울을 바라보며 긴장하던 남편은 그새 고개가 꾸뻑질을 한다. 이때다 싶어 선무당 미용사는 머리 위로 한 방을 쥐어 박는다. 힘 들어 죽겠는데 잠이 오냐며 속 시원하게 또 한 방을 때려본다. 깜짝 놀라는 남편은 치사하다고 내려 앉았던 두 눈을 흘겨 뜨며 힘껏 노려 본다. 그러게 나가서 하라니까 말을 안 듣는다고 짜증을 내면 다소곳이 자세를 낮춰 머리를 번쩍 들어 준다. 피식 웃어 대는 초보 기술자는 오늘만큼은 대장이 따로 없다. 20분 남짓 걸려 이리 돌려 대고 저리 돌리고 하다 보면 아수라장 작품은 기막힌 새 사람으로 아무리 봐도 그럴듯하다. 어느덧 십 여 년 세월에 서툰 고수가 됐다. 최고의 손 놀림으로 덥수룩하던 노인이 머리가 청년처럼 훤 해졌다. 맘에 드냐고 물으면 거울 속으로 요리조리 돌아 보다 그냥 좋다고 한다. 며칠 있으면 또 자라는데 무슨 대수냐고 걱정 말라며 뒷 거울에 한 눈 찡긋 또 다음을 기약한다. 하얗게 쉰 머리가 싱글벙글 웃음으로 입을 쪽 내민다. 미용실 가는 게 귀찮아서 일까. 진짜 미숙한 손 맛이 좋은 걸까. 아님 마누라와 실갱이가 싫지 않은 걸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툭툭 털어 끝내고 난 뒤 아이고 허리야 엄살 떨면 아수라장 남은 뒤처리는 완전히 그 사람 몫이 된다. 그래, 이제 한 달이나 남았다. 조금 힘은 들지만 좋다는데 또 어쩌겠는가. 혼자 지껄인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 준다는데 그 까짓 것 못해 주랴. 함께 늙어 가면서 오로지 등 기대고 사는 데 그 무엇은 못해주랴.
- 2016-06-14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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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단 1기 워크숍] '열공' 중인 기자단들
- 2016-06-10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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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단 1기 워크숍] 장영희 동년기자 자서전 작성법 강의
- 2016-06-10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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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단 1기 워크숍] 임철순 주필 강의
- 2016-06-10 1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