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3일 은행연합회 2층 컨벤션홀에서 인간개발 연구원 장만기 회장의 출판 기념회가 있었다.
‘아름다운 사람, 당신이 희망입니다 ’
그는 모든 일에 있어 중심이 되는 것은 '사람'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좋은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든다."
확신을 가지고 그가 30대부터 시작한 사업이 '인간 개발' 사업이었다. 사회를 본 한비야씨도 “자신을 키워주신 분이 장만기 회장님”이라며 고마워했다. 그녀는 '바람의 딸 한비야, 지구 한바퀴를 돌다'라는 책으로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었다. '정말 거침없고 용감한 여성이구나!' 구석구석 지구의 오지를 돌며 그녀가 겪은 희안한 경험을 보며 나는 내내 놀라워했다. 겁이 많은 나는 꿈도 못 꾸는 일을 용감한 그녀는 거뜬히 해내고 있었다.
인생의 지혜를 공유하는 진정한 리더 커뮤니티(Human Development Institute)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 ‘공부하는 CEO모임’, ‘인간의 향기가 나는 곳’
인간개발연구원에 붙여진 자랑스러운 별칭이다. 인간개발연구원은 1975년 2월 5일 첫발을 내디뎠다. 나는 우리나라가 빈곤을 면치 못하고 있던 시절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인간개발연구원을 설립했다.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매주 목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인간 개발원 조찬 세미나'가 열렸단다. 모든 사업에는 기본적으로 자금이 들어가야 한다. 재정적인 면으로는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그였기에 어려움이 적지 않았을 텐데도 그는 묵묵히 한 길을 걸어왔다.
마지막에 내빈들께 감사 인사를 하신 장 회장은 조찬 세미나에서 강연하신 분 중에 네 분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셨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남겨야 할 유산은 돈이 아닌 지혜임을 강조하셨다. 5포를 넘어 9포세대인 젊은이들에게 멘토의 역할을 충실히 하여 그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함을 강조하셨다. 여러 사람들이 ‘지혜 나눔으로 건강한 가치들이 살아 숨 쉬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그의 신념이 빛났다. 당신이 소신을 갖고, 평생 해 오신 사업에 대한 확신으로 80세인 그의 목소리에는 기쁨과 열정이 넘치셨다. 어느 청춘보다도 푸르른 청년이 거기에 서 계셨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동년기자인 가재산 기자와 한국 시니어 블로거협회 김봉중 회장도 참석하여 축하해주셨다. 김황식 전 총리, 숙대 이경숙 전 총장, 양병무 교수, 도서 출판 행복에너지 권선복 대표, KGM의 최병헌 대표, 한국 콜마 주식회사 윤동한 회장 등 정치계, 학계, 재계에서 잘 나갔거나 잘 나가는 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축하해 주셨다. 이분들은 물심양면으로 장회장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는 친구 분들이다.
훌륭한 사람들이 갖추고 있는 기본 덕목 중 하나는 겸손함이다. 장 회장이 이분들의 신뢰를 얻은 바탕은 '겸손함'이라고 김봉중 회장이 얘기해주셨다. 김봉중 회장도 10년 전에 조찬 세미나에 참석했었다고 하셨다. 인간 개발원 '조찬 세미나'의 일원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잘 나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누구일까?"
"이분에게 물어 보세요"
바로 장만기 회장. 대한민국 오피니언 리더 중에서 그를 모르면 명사가 아니라고 할 정도로 그는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꿰뚫고 있다.
뛰어난 인재를 알아보는 장 회장의 레이다망에 포착됐다는 것은 그가 오피니언 리더라는 뜻이다.
우리 삶에 근간이 되는 사람.
그 사람에 촛점을 맞춰, 더불어 행복한 우리나라를 만들기 위해 오롯이 헌신하신 장만기회장께 박수를 보낸다.
우리 가족은 6·25 전쟁 납북 피해자 가족이다. 저의 시부모님은 일제 강점기 시절 동경 유학 생활 중에 만나서 당시로서는 드문 연애 결혼을 하셨다. 시어머님은 3남 1녀를 낳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시던 중 6.25 전쟁의 발생으로 시아버님이 납치 되신 것이다.
어머님은 6·25당시 34살의 젊디 젊은 나이에 혼자 되셔서 갖은 고생을 하시면서 자제분들을 대학까지 교육시키셨다. 어머님은 저의 결혼 후 평생 우리랑 함께 사시다가 5년전 95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얼마 전 6·25를 맞아서 정부로부터 를 받고 남편은 많은 감회에 젖었다. 남편은 아버님의 납치 후 직장 생활 초기에는 혹시라도 이북의 아버님과 접촉할까봐 출장 허가도 힘들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맞벌이로 직장에 다니던 필자는 어느 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 때는 지금처럼 건강 프로그램도 별로 없어 뇌졸중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가 회복은 했으나 후유증으로 지금까지도 몸이 불편한 상태이다. 내가 쓰러지자 가정 생활은 즉시 엉망이 되었고 또 남편은 곧 정년 퇴직을 하게 되었다.
서울의 모 방송국에서 30 년 넘게 근무하고 정년 퇴직을 한 남편의 퇴직금은 그 때로서는 많은 금액이었다. 그 때는 퇴직금도 미래가 어떨지 모른다며 매달 지급되는 연금으로 받지 않고 일시불로 받던 시대였다. 그리고 당시엔 은행의 이자도 상당히 높아서 이자로만 살아도 어느 정도 생활을 유지 할 수 있었다. 또 그 때만 해도 장수 시대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 은퇴 후의 생활 준비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어떻게 퇴직금을 관리 해야할 줄도 몰랐다. 그 때는 지금 유행하는 ‘은퇴 이후의 재무 설계’ 같은 말은 존재 하지도 않았다.
남편이 할 일을 못 찾아 힘들어 하던 어느 날 필자는 우연히 인터넷에서 찾은 주례 협회에서 직업적 주례사를 모집한다는 걸 보고 남편 몰래 응모를 했다. 남편이 방송국에서 방송 경험이 있으니 주례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실제로 주례 경험도 많았기에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믿고 남편 대신 응모 서류를 보냈던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을 할 정도로 궁핍하진 않았지만 하루 하루 똑같은 무료한 생활로 시간 보내는 남편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면 나름대로 활력을 줄수 있지 않을까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예상대로 합격 통지를 받고 남편에게 기쁜 마음으로 말을 했더니 엄청 화를 내면서 누굴 뭘로 보냐며 자기를 무시 했다고 몇 달 동안 나와 눈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가 그런 아르바이트를 하면 남이 자길 얼마나 궁하게 보겠냐며 자긴 앞으로 돈을 버는 일은 절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는 거였다. 사실은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남편 출근만 하면 하루 종일 온통 내 세상이었는데 갑자기 하루 종일 붙어 있기가 참으로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필자의 단순한 생각이 남편을 화나게 만든 것이었다. 요즘은 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요령이 생겨, 퇴직 초기처럼 싸우지도 않고 서로 각자 시간을 잘 보내고 있는 필자를 보면 대견한 생각이 든다.
졸업 이후 처음이다. 성당도 군부대도 있었지 아마? 큰길 맞은편엔 한때 어머니가 다니셨던 신발공장도 있었고. 지하철 역세권으로 탈바꿈한 지 이미 오래전이라니 제대로 찾을 수 있을까? 이젠 사라졌을 옛날 우리 집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면 대문 앞에서 찻길까지 그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서 아주 오랜만의 등교를 해보리라.
부산 지하철 2호선 문현역 2번 출구를 나오면서 필자의 발걸음이 미세하게 떨렸다. 헛기침 두어 번으로 호흡을 가다듬어본다. 마치 두 계절을 머금은 듯 선선하면서 차가운 바람은 얼굴을 어루만진다. 3분 정도 걸었을까? 믿기지 않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래 바로 여기야.”
오랜 기억 속의 동네 골목길이 여태 저리 버티고 있었다니. ‘딱지치기’와 ‘다망구’ 그리고 ‘오징어달구지’를 하던, 또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유행가를 따라 부르느라 항상 시끌벅적했던 바로 그곳. 그 시절의 주인공들은 지금 무얼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한구석 기억의 방에 쌓아두었던 옛이야기들이 여름날 분수대 물줄기처럼 솟구쳐 오른다. 필자가 살던 옛집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아마 일요일이었을 듯싶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고 나가보니 친구 녀석이 교회를 가자며 손짓했다. 귓속말로 비밀스러운 약속까지 했다. “오늘 교회 같이 가면 저애 소개시켜줄게.” 녀석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긴 머리의 여자아이가 나무 뒤에서 우릴 훔쳐보며 서 있는 게 아닌가.
세월 따라 빛바랜 골목 담벼락엔 여기저기 상처투성이, 그 흔적들 사이로 혹시나 남겨두었을지도 모를 깨알 낙서들을 찾아 이쪽저쪽 두리번거린다. 빠져나오기 싫은 어둠속 터널 같은 골목길을 나서자 바로 큰길에 이른다. 이젠 좌회전을 해야 한다. 대로변 K은행에서 학교까지 죽 이어진 신작로를 따라 제대로 등굣길에 오르는 순간이다. 기억보다는 가깝게 느껴진다. 여긴가? 좌측으로 키다리 소나무가 있었을 자리엔 브랜드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새로이 오픈한 듯싶은 삼거리 국수집 앞에서 잠시 서성거린다. “그래 맞아, 이 부근에 제법 큰 공터가 있었지.” ‘소차’ 자전거 빌려 타는 맛에 해가는 줄 모르던, 뭉쳐서 야구시합하느라 밥도 거르던 그를 기어코 만나고야 만다. 지금은 흑백사진 속에나 있는 유년의 필자를….
퀴즈 하나 내련다. 1970년대 대표 주전부리 중 하나는? 호주머니에 쏙 집어넣고 한 움큼씩 꺼내먹기에 그만이었던 것. 바로 배고픈 하굣길의 파란 봉지 ‘뽀빠이’, 빨간 봉지 ‘자야’다. 오물오물거리며 걸어가던 오르막을 지나자 학교 건물이 성큼 다가선다. 뒷산 황령산과 그 자락을 따라 조밀하게 들어선 집들을 배경으로 드디어 모교가 보인다. 높고 선명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너무나 깔끔한 외관의 부산 문현초등학교.
정문으로 바로 들어서지 않고 담장 따라 한 바퀴 천천히 돌아본다. 그 시절엔 없었던 색깔 예쁜 유치원과 두 팔 벌려 활짝 반갑게 맞이하는 후문. 때마침 지나가던 어린 후배가 찍어준 인증샷은 오래도록 남을 기념작이다.
그런데 시절이 하수상한 탓이라서 6학년 1반 교실을 둘러볼 수가 없어 두고두고 아쉽다. 책·걸상도 어루만져보고 싶고 게시판 그림들도 들춰보고 싶고 또 손가락으로 분필가루도 찍어보고 싶은데 말이다. 아쉽게 돌아나가던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본관 우측 앞에 있는 ‘책 읽는 소녀상’이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고 씌어 있는 기단석 위로 다소곳하게 앉아 무려 40여 년 동안이나 책을 읽고 있다. 요즘 말로 ‘심쿵’하게 하는 모습이다.
은근한 매력의 향나무 교정 아래로 내려서니 눈부신 햇살도 도리 없이 비켜가는 얽히고설킨 등나무 벤치. 휘감아 도는 바람결에 기꺼이 온몸을 맡기고선 살며시 눈을 감아본다.
6학년 체육시간, 한판 제대로 붙던 날. 운동장 모래판 씨름장엔 팽팽한 긴장감이 샅바 위를 감돌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리 모두는 ‘빵’ 터지고 말았다. 한 친구의 엉덩이, 그것도 하필 그곳에 그만 ‘빵꾸’가 나버렸기 때문이다. 평소 까무잡잡했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던 녀석.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혹여 이 글을 보게 된다면 함께 웃어나 보고 좋을 텐데. “야, 원래 구멍 난 바지를 입었던 거냐? 아니면 정말 용쓰려다 그리 된 거냐? 설마 기억조차 못하는 건 아닐 테지?”
잘 그려진 눈금 위로 색깔 선명한 인조 잔디 운동장. 모래먼지 흩날리던 지난날은 찾아볼 수 없는 트랙 주변을 어슬렁거려본다. 소꿉놀이하던 옛날의 모래밭은 오간데 없고 누가 저리 시퍼런 융단을 깔아놓았단 말인가.
그런데 정말 이상하고 말이 안 되는 게 있다. 이리도 무심한 사람이었나? 아니면 기억력이 떨어진 건가? 좀처럼 생각나질 않는다. 겨우 서너 명 정도의 이름만 생각날 뿐이다. 그나마 세월이 흘러 그들과도 연결이 끊겼다. 참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헛헛한 걸음으로 정문을 나서면서 다시 사진을 찍어본다. 언제라도 꺼내볼 수 있게 폰 속에 제대로 간직해놓고 싶다. 또 다녀갈 날을 쉽사리 기약하기 어려운 게 우리네 현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나오는데 문득 생각난 곳이 있다. 바로 학교 앞 문방구점. 단 몇 걸음 만에 마주한 그곳은 거의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다. 열린 듯 닫힌 창문을 혹시나 하며 두들겨보는데 잠시 후 인기척이 들려온다. 그분일까? 사실 얼굴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드르륵 창문이 열리며 맞아주신 분. 그 시절의 주인장이 분명했다. 졸업연도를 밝히니 이내 기억을 더듬으신다. 악수도 청하고 ‘무극노트’도 몇 권 기념으로 산다. 환하게 웃으시며 사진촬영에도 응해주시고 동기들 만나면 안부 전해달라며 사인펜 두 자루를 덤으로 넣어주신다. 마치 고향의 이웃 아저씨를 조우한 기분이다.
어느덧 기울어가는 해. 왠지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누군가 부르는 소리도 없는데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어디 근처에서 커피 한잔 할 수 있는 카페 없나? 어쩌면 그 긴 머리 소녀가 거기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지 모를 일이고.
지금 생각하면 발칙하기도 했고 직장 동료들이 괘씸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1978년 한창 젊은 나이에 미국 은행 (Bank of America)에 재직하던 시절이다. 아내와 필자는 사내 연애를 했다. 둘이 연애 중임을 알면 사람들이 놀려대서 피곤할 뿐 아니라 결혼하고 나면 둘 중 하나는 직장을 옮겨야 했으므로 비밀 연애를 했다. 그런데 갈 곳이 한정된 서울 시내에서 데이트를 하다 보면 사람들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직접 데이트 장면을 들킨 적은 없으나 연애기간이 길어지자 여기저기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편했다.
그해 크리스마스 파티는 늘 그랬듯이 기혼자들은 부부 동반으로 참석하고 미혼자들은 장래의 배우자를 데려 오는 자리였다. 미혼자들이 10여 명 있어서 젊은 사람들끼리 어울리기도 했지만 혼기가 다 된 사람들이라 대부분 결혼할 상대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만 사내 커플이라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발칙한 계획을 세웠다.
5세 연하의 여동생에게 도와달라며 SOS 신호를 보냈다. 여동생이 결혼할 상대와 사귀고 있을 때였다. 아내는 여동생의 남자 친구를 파트너로 데려가고 필자는 여동생의 절친을 파트너로 파티에 데려가기로 한 것이다. 사내 연애에 대한 입방아를 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파티장에는 시간 차이를 두고 필자 커플이 먼저 등장했다. 아내도 곧 파트너를 데리고 들어와 필자와 다른 테이블에 앉았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큰 관심을 보였고 언제 결혼할 것이냐고 물었다. 아직 사귀는 중이라고 둘러대기는 했으나 매우 불편한 자리였다.
그해 화제를 불러일으킨 댄스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에서 존 트라볼타가 춘 디스코를 추면서 젊은 커플들끼리 같이 어울렸다. 각자 다른 파트너를 대동해놓고 우리는 묘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나이 든 직원들은 춤판에 끼지도 못했다. 처음 들어보는 음악에 디스코 춤도 낯설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다음 해에 아내와 깜짝 결혼 발표를 했다. 사람들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몇 달 전 크리스마스 파티에 대동했던 각자의 파트너는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전말을 실토했으나 깜빡 속아 넘어간 사실에 불쾌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필자의 직속상관은 전혀 눈치를 못 챘다며 한동안 원망 섞인 소리를 들어야 했다. 데이트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가 사귀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지만 정식으로 알릴 때까지 함구한 사람도 있었다.
스케줄대로 필자와 아내는 1979년 결혼을 했다. 아내는 계속 미국 은행에 다니고 필자는 한국 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그 후로 미국 은행 크리스마스 파티에는 가지 못했다. 그리고 3년 후 여동생도 잠시 아내의 파트너가 돼주었던 남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여동생 결혼식에는 은행 사람들은 부르지 못했다. 필자의 파트너 역할을 했던 여동생의 절친은 지금도 크고 작은 집안 행사 때마다 여동생을 보러 와 필자와 가끔 마주친다. 그녀는 “그때 참 재미있었다”고 말하지만, 필자는 여전히 편하지 않다. 직장 동료들을 속인 것 때문이다. 요즘 연말 파티가 이어지다 보니 40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한참 지난 오래된 잡지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언젠가 사회연대은행 두드림 기자활동을 할 때 만나서 인터뷰했던 대표님의 ‘아름다운 유산’에 관한 기사가 실린 책을 펼치게 되었다.
‘아름다운 유산’은 파키스탄이나 중앙아시아 오지의 소외된 아동을 후원하는 모임이다.
‘아름다운 유산’ 대표는 원래 히말라야 정상정복을 꿈꾸던 산악인인데 다니다 보니 너무나 열악한 환경의 아이들이 많아 이들을 돕기로 했다고 하는데 돕는 방법이 독특했다.
아주 힘든 사막 마라톤이 있다. 사막 마라톤을 하면서 1km 걸을 때마다 일정액을 지인들로부터 성금으로 받아 기금을 마련해서 파키스탄의 어려운 고아에게 고아원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사하라 사막과 애리조나 사막 나미비아사막 마라톤을 완주하고 기금을 모았다고 한다.
인류애, 행복,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소중한 가치로 생각하며 활동영역을 중앙아시아로 확장하고 글로벌 자선단체를 지향하며 UN에 등록하는 것을 꿈꾸고 있다는 ‘아름다운 유산’ 대표님의 모습은 참으로 천진난만하고 소년 같은 순박함과 인자함이 느껴졌다.
좋은 일을 하면 다들 저렇게 해맑고 빛나는 모습을 갖게 되는 걸까?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당시 인터뷰에서 꿈이라고 하셨으니 지금은 당당히 UN에 등록되었는지 궁금하다.
설립취지문에서 ‘빨리 가고 싶으면 혼자 가고, 멀리 가고 싶으면 함께 가라, 그러나 빨리 가고 멀리 가려면 누군가와 함께여야 한다’ 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다.
좋은 일에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건 그만큼 든든하고 용기를 얻는 일일 것이다.
‘아름다운 유산’ 창립총회에 모이신 분들 모두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셨을 거라는 생각에 다들 훌륭해 보였다.
그동안은 지인의 도움으로 기부금을 받았지만 이제 사단법인으로 태어났으니 더 많은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움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기부가 그리 어려운 건 아니다. 큰 부자나 기업에서 많은 액수를 내놓기도 하지만 필자처럼 평범한 사람은 작은 마음을 보탤 수 있는 길이 많이 있다.
그러나 실은 필자도 그렇게 기부를 많이 하지는 못했다. 사는데 바빠서 남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는 변명을 마음에 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매스컴을 통해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어린이나 난민촌의 아이들 소식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전화 버튼을 누르는 정도였다.
예전에 우리 엄마는 적은 돈이지만 기부를 많이 하셨다. 돈암동 아리랑 고개 가는 길에 외방 선교회가 있었다.
외방 선교회는 다른 나라에 파견되어 나가서 선교활동을 하는 신부님을 후원하는 곳이다.
성당에 열심인 엄마가 후원금을 냈는데 그땐 직접 찾아갔다. 엄마의 심부름으로 대신 전달하러 몇 번 갔던 외방 선교회가 겉으로 볼 때엔 평범한 건물이지만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느껴지던 엄숙함과 경건함이 잊히지 않는다.
세계 오지의 어려운 여건에서 선교하시는 신부님들에게 아주 작은 보탬이 된다는 것에 엄마는 마음 뿌듯해 하셨다.
몇십 년 전 뉴스에서 서울대에 합격했는데 등록금이 없다는 학생의 기사를 보고 엄마의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똑똑한 젊은이가 너무나 안타깝다며 성금을 내고 오라고 하셔서 광화문의 조선일보사에 찾아가 엄마의 이름으로 성금을 맡겼었다.
필자보다 마음이 따뜻한 엄마의 심부름을 하면서 따라가지 못하는 필자 자신이 미안하고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기부는 쓰고 남아서 하는 게 아니라 어려운 중에도 작은 마음을 나누는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직 실천을 못 하고 있다.
‘아름다운 유산’이나 ‘바라봄 사진관’ 같은 좋은 일을 하는 단체가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가 더욱 따듯해질 것이다.
자신에 맞게 이웃을 돌아보는 작은 마음들이 불꽃처럼 일어나서, 기부문화란 작아도 괜찮고 어렵지 않은 평범한 일상이라는 관념이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날씨도 매우 쾌청해서 여행 떠나기 딱 좋은 날이다.
군산은 얼마 전 다녀온 곳이지만 두 번 세 번 가보아도 볼거리와 느낄 점이 많은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친구들과 군산의 밤을 체험하게 되어 이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역사적인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찾아보기로 했다.
군산은 한편으로는 슬픈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비옥한 우리 땅에서 나는 곡물과 물자를 자기네 나라로 수탈해 가는 통로로 군산을 발전시켰고 많은 일본인이 들어와 살았기 때문에 일본의 가옥이나 문화가 많이 남아 있기도 하다.
그런 근대화의 아픈 역사를 없애지 않고 잘 보존하여 더는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다짐한다는 의미로 일본의 잔재인 세관이나 조선은행 등을 근대건축관이나 역사박물관으로 탈바꿈하여 역사를 보존하고 잊지 않는다는 취지를 가졌다니 멋진 도시이다.
2017년 10월 28일~29일은 군산의 축제로 근대역사박물관과 월명동 일원에 '가을밤, 근대문화유산은 잠들지 않는다' 는 슬로건으로 군산 야행의 축제가 펼쳐지고 있다.
야밤에 본 문화유산의 모습들은 낮과는 또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해주었는데 곳곳에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밤 나들이 나온 군산시민의 모습이 매우 화목해 보였다.
여러 곳에서 음악콘서트의 흥겨운 노래가 들리고 광장에선 가족끼리의 투호 게임도 벌어지는 등 축제의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었다.
근대역사박물관과 구 군산세관, 조선은행 군산지점, 근대미술관이 된 일본 은행 건물이 아름답게 조명되었다.
뒤쪽으로 군산항의 뜬다리 모습도 예쁜 불빛으로 존재를 나타내고 있다.
필자와 친구들은 사람들이 몰려가고 있는 쪽으로 따라서 길 건너 축제 장소로 이동했다.
그쪽에는 잘 보존된 일본식 절인 동국사와 신흥동 일본식 가옥, 그리고 한석규와 심은하의 아름다운 동화 같았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인 초원 사진관도 찾아볼 수 있다.
지도를 보며 찾아가는 골목마다 이번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거리 축제가 진행되고 많은 관광객과 군산시민이 어울려 밤의 축제를 즐기고 있다.
긴 골목 끝까지 예전에 있던 학교나, 관공서, 병원, 정미소, 경찰서, 주막 등 여러 임시건물을 지어놓고 관광객에게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주는 이벤트도 하는 등 군산시에서 이번 축제에 매우 공들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편에선 '소리나무'라는 연주 팀의 고운 선율이 우리를 붙잡아 한동안 몇 곡을 감상하고 박수를 보내주었다. 참으로 낭만적인 밤이다.
일본가옥에 도착하니 실내를 보려면 줄을 서야 했고 긴 줄에도 우리는 기다렸다가 일본가옥의 내부도 돌아볼 수 있었다.
상당한 부잣집이었던 듯 규모가 매우 컸는데 일본인의 생활상도 엿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예전 어렸을 때 우리 외갓집도 일본인의 적산가옥이었다. 패망으로 돌아가는 일본인의 집을 외할아버지께서 매입하셨다는데 그 집은 지금 생각해도 나에게는 꿈의 동산이었다.
집안 구조도 재미있었지만, 앞쪽의 넓은 정원이 아름다웠다.
일본인 특유의 정원문화로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정도의 동산이 있고 돌다리가 걸쳐진 연못도 있었다.
돌로 만든 거북도 있고 쭉쭉 늘씬하게 피어 있던 보랏빛 난초도 잊히지 않는다.
군산의 일본인 가옥을 보니 옛 외갓집과 많이 닮아 불현듯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군산 야행의 밤이 깊어갔다.
이런 축제로 인해 군산이라는 도시를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여행 떠나기 좋은 가을이다. 모두들 문화가 있는 곳으로 한 번쯤 다녀오기를 권한다.
고요히 혼자 떠나 볼 수 있는 때다. 물론 둘이, 여럿이도 괜찮다. 온몸에 한기가 엄습하고 찬 이슬이 피부에 촉촉이 느껴지는 저수지의 새벽이다. 일출 이전의 어둠 속에 서서 물체를 확인하는 시간이 주는 혼자만의 충만함, 여럿이 함께 있다 해도 이럴 때는 혼자가 된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괴산의 문광저수지에 도착한 것은 새벽 여섯 시가 될 무렵이었다. 동트기 전 어스름 새벽안개의 정적을 느끼며 저수지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근처 자동차에서 커피를 꺼내 마시던 분들이 거리낌 없이 한 잔 건네 온다. 따끈한 차 한 잔의 고마움이 더 따스히 온몸에 스민다. 그 동네 사는데 이렇게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고 물안개가 신비할 때면 자주 나온다고 했다. 보온병에 커피 가득 담아서 나오는 그들의 새벽 나들이가 부럽고 순수하게 차 한 잔 나누어주는 인심이 고맙다.
저수지의 어둠이 조금씩 걷히고 낚시꾼들의 수상 좌대의 빨간 지붕들이 이쁜 반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꽂아놓은 듯한 고목들의 무수한 반영들이 저수지의 파문에 아른거리며 비구상 그림을 연상시킨다. 차츰 은행나무길도 노란 색감을 자랑하고 가끔 지나가는 차량들의 바퀴 사이로 은행잎이 회오리치듯 날린다.
마침 그 지역 사진작가협회 회원께서 나와 사진 찍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주고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시어 셔터를 누르는 즐거움이 더 컸다. 그리고 괴산만의 맛난 음식점으로 이끌어서 정갈한 나물반찬으로 시골 아침밥을 먹었다. 그런데 어딜 가나 각자 부담이 확실한데 그분께서 굳이 식사비를 계산하신다. 부담을 드릴 수 없어서 드리는 돈을 한사코 받지 않아 그분의 트렁크에 선물을 실어드렸다. 그리고는 또 다른 멋진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안내도 받는 멋진 수확에 감사할 따름이다. 연로하시지만 인자한 모습으로 차분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려는 그분의 순박하고 선한 마음씨가 훈훈하다.
어차피 충청북도 지역에 왔으니 대청호를 들릴 일이다.
대청호는 넓다. 충북 청주 옥천, 보은은 물론이고 대전도 걸쳐져 있어서 대청호 오 백 리 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호수 주변에 작약이 필 때도 있고 자연의 풍광이 시시때때로 다르거나 위치에 따라 풍경이 다른 몇 군데가 있다. 현재 6구간까지의 길이 있어서 가을을 맛보고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이번에는 가을바람에 어울리는 갈대습지를 찾았다.
호숫가의 갈대가 반짝이며 바람에 일렁인다. 갈대가 배경이 되어주는 가을호수다. 거기서 조금 더 내려가니 호수를 중심으로 넓은 잔디밭이 있었고 한가로이 벤치가 누군가를 기다린다. 천천히 거닐며 호수에 풍덩 빠져있는 푸른 가을 하늘의 반영에 감탄했다.
그때 벤치에 조용히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두 여자분이 "우리 둘 모습 좀 찍어주실래요?" 하며 휴대폰을 내밀기에 가을 풍경에 잘 어울리도록 구도를 잡아 찍어줬다. 그리고 앞모습뿐 아니라 “뒷모습의 분위기가 더 좋아서 한 장 더 찍어드릴게요” 했더니, "어머, 고맙습니다. 우리 둘이 지금 환갑 놀이하는 거예요." 하면서 따뜻한 연륜의 미소를 보여준다.
갈대와 가을 하늘이 넓게 펼쳐진 호숫가 벤치에 앉아 친구와 살아온 시간을 자축하는 모습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환갑이나 무슨 기념일이면 해외로 여행을 떠나거나 멋들어진 잔치를 했다는 말들을 듣기도 하는데 이분들의 모습이 특별하고 이뻐서 몇 번씩 뒤돌아보곤 했다. 아름다운 정경이 아름다운 가을을 만들어 준다.
가을바람 따라 이름 모를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온 힐링의 시간을 더듬으며 그 분들처럼 따뜻한 차 한 잔이나 미소를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잘 나이 먹어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 세상은 흉흉한 뉴스가 연일 나오는데 가을은 이렇게 눈치 없이 이쁘기만 하다.
여에스더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으로 TV에도 많이 나오는 유명한 가정의학과 전문의라서 까다롭고 위엄이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만나보면 전혀 위압감이 없고 소탈하고 발랄한 소녀 같다. 게다가 인품도 훌륭해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참 괜찮은 여성이다.
지금도 그런데 서울대 의대 시절에는 얼마나 인기가 많았을까? 그런 그녀를 목소리로 사로잡은 이가 바로 홍혜걸이다. 여에스더는 당시 응급실 주치의였고 두 살 연하 홍혜걸은 인턴이었다. 당시에는 선생님으로 깍듯하게 불렀지만 이제는 ‘임마’라고 부른다. 당시 응급실 근무 교대하기 전에 홍혜걸이 전화로 여에스더에게 보고할 때 저음의 차분하고 감성적인 목소리는 그만 여에스더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말았다.
그 후 홍혜걸이 여에스더가 자기에게 호감을 가진 것을 눈치 채고 하늘 같은 의대 선배에게 사귀자고 도발했다. 마침 여에스더는 7년간 사귀던 남자와 막 헤어졌던 터라 홍혜걸이 행운을 잡을 수 있었다.
홍혜걸이 여에스더를 처음 유혹할 때의 말이 걸작이다. 세계 금연의 날 세미나에서였다. 여에스더는 “결혼할 사람이 담배를 피운다면 어떻게 하시겠나?”라고 물었고, 이에 홍혜걸은 즉흥적으로 “어린 사람이랑 결혼하면 되죠!”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녀보다 두 살 연하인 본인이 남편감이라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 머리 좋은 여에스더는 곧바로 알아듣고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사귀게 된 지 3주 만에 병원 뒤뜰에서 갑자기 홍혜걸이 여에스더의 손을 와락 움켜잡더니 “우리 결혼해요”라고 프러포즈를 했다. 그때 첫 포옹을 했는데 홍혜걸의 쿵쾅쿵쾅하는 심장 소리가 하도 커서 변태인 줄 알고 살짝 고민도 했다고 고백한다.
‘편지’와 ‘살색 팬티’가 결혼기념일 선물
가정의학과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의한 생리적 반응에 대해서는 무지한 소녀였다. 올해로 결혼 24년 차라서 “내년이 은혼식인데 뭔가 큰 선물이 있지 않겠냐?”라고 물었더니 “이제껏 한 번도 이벤트를 해준 적이 없다”며 입이 튀어나온다.
며칠 전에 결혼기념일이어서 남편에게 “뭐 없냐?”고 슬쩍 물었더니 “매일매일 잘해주는데, 뭐가 필요해?”라며 뻔뻔스럽게 반문하더라는 것. 그녀는 가끔 돈 안 들인 선물은 받아왔다고 웃는다. 다름 아닌 편지. 홍혜걸이 뭔가 잘못했을 때 편지로 쓰는 “다시는 안 그럴게~ 술도 안 먹고…” 등등의 다짐이다.
결혼하고 첫 번째 생일 선물로 촌스런 살색 팬티와 ‘효도 신발’ 같은 것을 받았다. 그때는 어이가 없었지만, 돌이켜보니 남편의 그런 성격이 귀엽다. 홍혜걸은 평소에 쓰다듬고 주무르고 스킨십하는 걸 좋아한다. 여에스더는 당하는 걸 좋아한다. 그래도 잠자리에 들면 등을 돌리고 자는 게 편해서 줄곧 그렇게 지내왔다.
그런데 작년부터는 갱년기라서 아예 트윈베드로 바꾸고 사이가 좋을 때는 침대를 가까이 붙이고 뭔가 틀어졌을 때는 멀리 떨어뜨려놓는단다. 남편도 갱년기라서 서로 고집도 피우고 투정도 부린다. 그래서 작년과 올해 초까지 힘들었는데 지금은 둘 다 의사이기에 생리적 현상을 서로 잘 이해하고 좋아졌다.
이제는 부부지간에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후라서 그럴까? 술자리 모임에서도 에스더와 홍혜걸은 서로 험담을 늘어놓으면서 재미있게 논다. 잘 삐지지도 않는다. 홍혜걸의 별명은 ‘홍수르(만수르에 빗댄 말)’란다. 남편이 경제관념이 없고 허술해서 그녀는 불만이다. “홍혜걸은 허당”이라고 대놓고 말한다.
“어떤 부분이 그렇게 허술하냐?”고 묻자 “한번은 저 몰래 강의료를 모아두려고 은행에 새 구좌를 개설했다가 저한테 딱 걸렸잖아요. 인터넷뱅킹을 안 하니까 로그인하면 계좌 목록이 쫙 뜨는 걸 몰랐던 거예요”라고 폭로하며 깔깔 웃는다.
바가지를 그렇게 긁어도 고쳐지지 않아 불만이었는데 지금은 이해한다는 것. 바둑의 단수를 올린다든지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이 많은 남편의 열정이 지금은 오히려 보기 좋을 정도로 너그러워졌다. 결혼 24년 차의 여유일 수도 있겠지만 에스더의 사업이 번창해서 과거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풍요로워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 같은 여유는 자신의 외모를 평가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홍혜걸은 허당 ‘홍수르’
여에스더는 최근 한 방송에 나와 “예전에는 홍혜걸씨가 왜 저렇게 못생긴 여자랑 결혼했냐는 말이 많았다”고 운을 뗀 뒤, 그런데 요즘은 “아이유랑 닮았다는 얘기를 듣기도 하고 수지랑 닮았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며 외모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케케묵어 익을 대로 익은 남편과의 사랑이 결실을 맺은 자신감의 표현이다. 그러면서 남편에 대한 불만도 과감하게 털어놓는다. “2년 만에 뉴욕으로 출장을 가게 됐을 때 원래는 밤 9시 비행기였는데 폭풍우로 밤 12시로 시간이 바뀌어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어떻게 하니, 폭풍우가 와서 위험하겠다. 조심해라’ 이렇게 말을 해야 하는데 그날은 뭔가 말을 제대로 못하더라! 남편이 집에 있어야 하는 시간인데 집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돌아와 우연히 영수증을 발견했는데 꽤 비싼 음식 값이더라. 그것도 추가 와인 두 잔에 코스요리 2인분. 이게 뭔가. 청담동에서 내가 없을 때 누구하고 먹었겠나?” 그녀는 남편을 다그치며 따졌다고 한다. 홍혜걸이 “회사 일로 알게 된 후배”라고 하자, 여에스더는 “아내가 외국출장가고 없을 때, 왜 하필이면 그 밤에 그것도 청담동에서 분위기를 내면서 와인까지 마시냐?”고 따져 물었다.
한량 이봉규는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도 같지만 굳이 이 대목에서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기로 했다. 홍혜걸도 한 방송에서 부인에 대한 불만인지 자랑인지 알쏭달쏭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나를 잘 이용하는 여우 같은 생각이 든다”고 포문을 열었지만 결국 “박사로 만들어준 아내에게 정말 고마운 생각이 든다”며 부인 자랑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신혼 시절 아내가 나에게 진지하게 박사 학위를 따라고 했다. 석사부터 박사까지 하려면 10년 정도가 걸리는데, 그 당시에는 ‘새삼스럽게 무슨 공부를 또 하나’ 했지만 지금은 아내에게 너무 고맙다”고 부연 설명했다. 그러면서 “예전에 MBN 에서 함익병 원장이 우스갯소리로 집사람 뜯어먹고 산다고 한 적이 있는데, 내가 벌어온 돈으로 아내가 병원을 개업하고 사업도 시작한 거다”라며 정색했다.
아마 2009년 설립한 회사에서 만든 이른바 ‘여에스더 유산균’이 대히트를 치고 각종 홈쇼핑에서 판매실적 1위를 달성하는 등 사업가로서 대성공한 아내에 대한 위축감으로부터 나온 자기방어의 발현일 수도 있겠지만, 아내를 존경하기에 자랑삼아 자기비하를 고급지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머리 좋은 사람의 고급 유머. 이를 반증하듯, 남편 홍혜걸이 아내 여에스더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내가 지금까지 만난 남자 중에 당신이 베스트다”라는 평가다. 여에스더가 결혼 전 7년 사귄 남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보다 빨리 두 배 이상 같이 살고 싶다”며 두 사람이 처음 맹세했었는데 어느새 세 배 이상 살고 있어서 행복에 겨운 부부다. 짓궂은 질문으로 반전을 노려봤다. “이혼할 생각 해봤나?” 에스더는 망설임 없이 “멋진 남자를 보면 눈이 돌아가지만, 남편을 사랑해서 이혼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홍혜걸과 결혼하고 싶어요”라고 말하며 부끄러움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다. 24년을 같이 살았는데도 에스더의 가슴은 여전히 소녀같이 뛴다. 처음 포옹할 때 홍혜걸 심장의 쿵쾅거림이 100미터 달리기 후의 느낌이라면 지금 여에스더의 심장소리는 마라톤을 완주한 후 내뿜는 안도감같이 들린다. 의사와의 인터뷰인 만큼 건강하게 사는 법에 대한 팁을 주문했다. “하버드대학의 음식 피라미드에 따르면, 건강을 위해 매일 잡곡밥, 올리브유로 만든 샐러드, 탁구공 두세 개 정도 크기의 껍질 벗긴 닭고기, 과일과 채소 다섯 접시 등을 먹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이렇게 먹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며 방법을 알려주는데 바로 자신이 일생을 걸고 매진하고 있는 여에스더 종합비타민과 유산균이라는 것. 이 대목에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눈이 빛난다. 천생 연구하는 의사 티는 어쩔 수가 없나보다.
2014년, 금융권의 유리천장을 깨고 최초의 여성 행장이 탄생해 한국에서 연일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때 다소 의아해했던 기억이 난다. 미주 한인 사회에서는 이미 2006년에 첫 여성 행장을 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당시 3명의 여성 행장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민 김(58·한국명 김민정) 오픈뱅크 행장. 그녀는 미주 한인 은행가의 대모로 통한다. ‘1호 여성 행장’ 타이틀을 얻기 전부터 최초 여성 지점장, 최초 여성 전무, 한인 여성 최고 연봉 등의 수식어가 그녀를 따라다녔다. 170cm가 훌쩍 넘는 키에 카리스마 넘치는 미모는 여전하다. 미국의 유력 경제지 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뱅커이자 여성 뱅커들의 로망. 민 김 행장을 LA 다운타운 오픈뱅크 본사에서 만났다.
그녀만의 ‘왕좌의 게임’
2010년 민 김 행장은 당시 한인 최대 은행이었던 나라뱅크의 행장직을 내려놓고, 폐업 위기의 FS 제일은행(현 오픈뱅크)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인 은행권은 술렁였다. 그야말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때였다. 은행원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최고의 자리에서 미련없이 내려온 그 일을 두고 사람들은 아직도 ‘왜’냐고 묻는다.
“행복하지 않았어요. 늘 가면을 써야 했고 책임감과 의무감만이 나를 짓눌렀죠. 이러다가는 나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생각에 사표를 던졌어요. 집에서 놀고 있을때 FS 제일은행 쪽에서 연락이 왔어요. 행장을 맡아줄 수 있냐고. 내 조건을 들어준다면 그러겠다고 했죠. 내가 좀 황당한 제안을 하기는 했는데…(웃음).”
민 김 행장이 제안한 것은 수입의 10% 사회 환원, 전 직원의 사회봉사 의무였다. 일반 기업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사회는 이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은행이 문을 닫느냐 마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해답은 민 김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10% 사회 환원도 일단은 수익을 내고 볼 일이었다.
은행 이름도 새로 내걸었다.‘오픈뱅크’.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민 김 행장의 신앙과 기업관이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있는, 아주 특별한 은행의 탄생이었다.
고층 빌딩 행장실에서 하이힐을 신고 일했던 민 김 행장은 운동화로 갈아 신고 다시 필드로 내려와 뛰기 시작했다. 부와 명예의 왕좌 대신 택한 것은 순수한 열정과 자유였다.
“가장 먼저 부실대출부터 정리했어요. 막대한 부실대출을 1년여에 걸쳐 과감하게 정리하고 나니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죠. 부실한 은행이라는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서는 발로 뛰며 투자자들을 만나 우리의 비전을 어필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신뢰를 회복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별수 있나요. 그저 최선을 다해 달릴 수밖에 없었죠.”
민 김 행장 취임 이듬해였던 2012년, 오픈뱅크는 창립 후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고 1100만 달러 증자에 성공하면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
2012년 2억 달러였던 자산은 2013년 3억 달러, 2014년 5억 달러, 2016년 7억 달러로 뛰어올라 2017년 2분기 말 현재 8억3500만 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그녀가 경영을 맡은 7년 동안 자산이 무려 800%나 증가한 것이다.
돈이 아닌 사람을 생각하는 경영
이사진은 점점 고민에 빠져갔을 터다. 민 김 행장이 내걸었던 조건, 10% 사회 환원은 수익이 커질수록 부담도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이다.
“100만원에 10만원은 기분 좋게 기부할 수 있죠. 그런데 점점 기부하는 돈이 늘어나 1억이 되고 10억이 되면… 이건 선뜻 내놓기 힘든 액수가 돼요. 참 감사하게도 이사회에서는 변함없이 저와의 약속을 지켜주고 있어요. 뿐만 아니라 이제는 나누는 기쁨을 알고 함께 즐기고 있습니다.”
오픈뱅크는 올해 말이면 100만 달러(약 10억원)를 사회에 환원하게 된다. 민 김 행장은 전문 부서를 따로 두고 이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다.
민 김 행장은 모든 일에서 ‘사람’을 우선시한다. 처음 은행을 맡을 때도 인재를 영입하는 일에 주력했다. 단 ‘건강한’ 인재라는 단서를 붙였다.
“스펙보다는 오픈뱅크의 비전을 이해하고 함께 뛰어줄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고집하고 있어요. 같이 일하면서 같은 기쁨을 맛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직원들에게 한 달에 6시간 사회봉사를 의무로 하고 있는데 하루이틀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억지로 하겠습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직원들의 표정이 점점 행복한 얼굴로 바뀌고 있다는 겁니다. 은행에 대한 자부심도 크고요. 이런 것들이 영업실적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경영자로서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이지요(웃음).”
민 김 행장은 소형 은행의 장점을 십분 발휘한 것을 오픈뱅크의 성공 비결로 꼽는다. 의사결정의 신속성, 고객밀착형 마케팅 등이 그것이다. 고객을 만날 때도 대형은행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은 과감히 포기하고 그 대신 오픈뱅크의 비전과 기업의 이미지를 전하라고 교육한다. 이웃과 커뮤니티에게 좋은 기업이 되고 싶은 ‘진심’을 말이다.
“한인들과 한인 은행과의 관계는 특별하죠. 한인 은행은 한인들의 땀과 눈물로 성장했어요. 밤새워 투잡, 쓰리잡 뛰어서 모은 돈을 들고 은행으로 오셨으니까요. 조그만 비즈니스라도 해보려 할 때 미국 은행들의 문턱이 얼마나 높았겠어요. 영어가 서툰 이민 1세대에게 한인 은행은 막힌 숨통을 틔워주는 곳이기도 했죠. 저 또한 중3 때 부모님을 따라 이민을 왔고 이곳 LA 한인타운에서 자라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한인 은행은 어르신들이 영어로 된 편지를 가지고 와도 기쁘게 읽어드릴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최근 오픈뱅크는 바쁜 이민생활에 한 번도 가족여행을 해본 적이 없는 30가구를 선정, 멕시코 크루즈 여행권을 선물했다. 기업 이벤트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3박 4일간 동행한 민 김 행장은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고.
“배 안에서 그분들과 함께 먹고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일단은 너무나 즐거웠고요. 저희 스테프까지 120여 명이나 되는 인원이었는데 돌아올 때는 모두가 가슴에 묵직한 것을 하나씩 담아왔습니다. 가족, 친구,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커뮤니티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었어요. 얼마나 친해졌는지 형님, 조카가 많이도 생겼어요.”
‘늙어감’이 즐거운 이유
USC를 졸업하고 윌셔은행(현 뱅크오브호프)에 입사했던 때가 1982년. 벌써 35년 전의 일이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그것도 보수적이기로 손꼽히는 한인 은행가에서 최초로 여성 행장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드라마틱한 일이 많았을까 싶지만 정작 그녀는 덤덤하다.
“사실 한인 사회 첫 여성 회계사가 꿈이었는데 다른 분이 되셨지 뭐예요. 급히 선회한 것이 은행장이었어요(웃음). 주위에서 남성 위주의 직장에서 어렵지 않았냐 하시는데 저는 그곳에서 꿈을 이뤄가는 과정이 무엇보다 행복했습니다.”
심각한 취업난 속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민 김 행장은 ‘남들 보기에 멋있는 일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즐기라’고 조언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은행에 입사하려고 했지만 줄줄이 다 떨어졌어요. 로컬의 한인 은행에 겨우 붙었는데 제가 할 일은 창구에서 손님을 맞는 텔러였죠. 솔직히 자존심이 상했어요. 그러나 나중에 은행장이 될 건데 뭐 어때 하며 생각을 바꿨죠. 요즘 젊은 친구들을 보면 시작부터 뭔가 폼이 나지 않으면 안 하려고 하더군요. 남 보기에 그럴싸한 일을 하려니 더 그렇고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해요. 애정이 있으면 열심히 일하게 되고 열심히 일하면 능력을 발휘하게 되고, 그럼 인정받는 거죠.”
민 김 행장은 신입사원 시절의 자신을 기억한다. 출근길은 늘 설레었고 은행에서 일하는 순간순간이 즐거웠다고.
남에게 화려하게 보이는 삶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더라는 값진 경험을 한 그녀는 많은 것을 내려놓은 현재의 삶이 그저 귀하고 감사하다. 민 김 행장은 65세가 되면 아름다운 은퇴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은퇴를 하면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신앙인으로서 또 경영인으로서 겪었던 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세상에서 성공하는 법이 아닌, 가치 있게 행복하게 사는 법을 말해주고 싶어요. 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내가 손녀만 셋이랍니다. 우리 딸과 아들이 어렸을 때는 많이 놀아주지 못했는데 사실 그게 너무 아쉬워요. 미안한 마음에 대신 손녀들하고는 틈만 나면 같이 놀아줍니다(웃음).”
민 김 행장은 늙어가는 것이 너무나 즐겁다고 한다. 주말이면 할 일 없이 집에서 손녀들과 뒹구는 것이 가장 재미있고, 막역한 친구들과의 수다가 웬만한 철학서보다 낫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끔 남편과 팝콘 먹으면서 하는 영화관람도 예전엔 몰랐던 재미다.
생애 가장 행복했던 때를 꼽으라니 주저 없이 ‘지금’이라고 말하는 민 김 행장.
은퇴 전까지, 오픈뱅크를 커뮤니티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기업의 롤모델로 만들고 싶은 것이 그녀의 마지막 꿈이다.
아마도 민 김 행장의 출근길이 다시 설레어진 이유일 것이다.
시절이 하 수상하다. 북한이 핵실험을 단행할 때마다 국내 증시가 빠지고 원화 가치가 추락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 경고음이 울린다. 북핵 외에도 미국 금리인상, 중동 불안, 유럽 부채 등 정치·경제 이슈들이 수시로 국내 자산의 가치를 위협한다. 경제·금융 전문가들은 “자산의 일부(10~30%)는 외화(달러)로 가져가라”고 한목소리를 낸다. 위기 시 자산을 지키기 위한 차선의 방어책이다.
# 제약회사 임원을 지낸 뒤 정년퇴임한 지모(62)씨는 요즘 북핵 관련 뉴스를 들을 때마다 걱정이 앞선다. “혹여나 전쟁이 발발하면 집과 주식의 가치가 사라질까 두렵다”며 “위기를 대비해 안전자산인 금과 달러 매입을 서두르고 있다”고 말했다.
# 중견기업에 다니는 김모(51)씨는 매월 급여일마다 가슴을 졸인다. 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송금해야 하는데 환율에 따라 금액이 크게 변동되어서다. 김씨는 “연초에는 5000달러 송금에 약 600만원이 필요했는데, 지난달에는 원·달러 환율이 1130원 수준으로 내려오면서 대략 550만원이 들었다”며 “환율이 떨어질 때마다 꾸준히 달러를 사서 적립해놓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따라 환율이 널뛰기를 하고 있다. 연초 1210원까지 치솟았던 원·달러 환율은 9월 11일 현재 1130원 수준으로 밀렸다. 우리나라는 ‘신흥국의 자동인출기(ATM)라고 불릴 정도로 유독 조그만 충격에도 자금이 크게 출렁이는 특징이 있다. 작은 폭격에도 충격파가 매우 큰 국내 금융환경에서 생존 자산, 가치보존 자산으로 외화(달러) 자산이 주목받는 이유다.
위기 때 강한 ‘가치보존 자산’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7월 개인 달러화 예금잔액은 105억2000만 달러로 역대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전월보다 5억3000만 달러가 증가했다. 이 중 달러화 예금이 48억4000만 달러가 증가했고, 엔화 예금이 4억7000달러 늘었다.
박해영 하나은행 Club 1 PB센터 PB팀장은 “전쟁을 경험한 어르신 세대는 가격(환율 등)에 상관없이 금과 달러에 관한 매수 문의가 많다”며 “대한민국에 위기가 오면 달러가 제값을 한다는 것을 경험상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전쟁과 같은 극단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국내 자산 가격이 폭락하고 달러 가치가 치솟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은 수시로 반복 재현되고 있다.
실제 북한의 핵실험이 단행될 때마다 코스피지수는 어김없이 하락했다. 환율도 크게 요동쳤다. 6차 북핵 실험이 단행된 9월 3일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영업일 대비 달러당 10.20원 상승했고, 코스피는 전 거래일 대비 28.04포인트 내려앉았다. 뿐만 아니라 (금리가 오를수록 가치가 떨어지는) 국고채 3년물의 금리는 0.04%포인트 상승 마감해 주식과 원화, 채권 가치가 동시에 하락하는 ‘트리플 약세’를 기록했다.
비단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만이 국내 자산의 가치를 위협하는 요인이 아니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과 유럽 부채 문제, G2(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 등 끊임없이 불거지는 대내외적 불안 요인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한국 경제가 구조적으로 위기에 취약한 허약체질이어서 국내 주식, 채권, 부동산 등의 분산투자뿐 아니라 ‘통화분산이 필수’라고 강조한다.
장호준 SC제일은행 자산관리본부 전무는 “홍콩이나 싱가포르 등 금융 선진국 투자자들은 자산의 40% 정도를 달러 등의 해외 통화로 보유하지만, 국내 투자자들은 대개 연수나 여행 목적으로 외화를 매입하는 수준으로 그 비율이 자산의 5% 이하에 그치고 있다”며 “자산 포트폴리오의 통화 다변화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달러화 등을 자산 포트폴리오에 넣으면 위기상황에 급락할 위험이 있는 원화 자산의 실질적인 가치를 상당 부분 보전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 수익을 낼 수 있다. 오세준 알펜루트자산운용 펀드매니저는 저서 에서 원·달러 환율의 높은 변동성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오히려 ‘축복’이라고 강조했다.
대한민국에 보릿고개가 찾아왔던 1997년 외환위기(IMF)로 되돌아간다고 가정해보자. 코스피지수는 역대 최저치인 280선까지 밀렸고, 부동산시장도 폭락했다. 원·달러 환율은 종전 900원을 밑돌다 순식간에 1900원대 중반까지 치솟았다. 만일 이때 달러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가치가 급등한 달러를 팔아 국내 주식과 부동산을 헐값에 사들여 경제 회복 후 막대한 차익을 얻었을 것이다.
통화분산, 달러 외에는 대안이 없나
부침이 심한 국내 자산의 국제적 실질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통화분산은 다양한 통화에 이뤄질수록 효과적이다. 그러나 통화시장에서 미국 달러화는 기축통화로서 단연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달러의 역습이다.
이민구 한국씨티은행 WM상품부 부장은 “전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위기의 원인은 미국에 있었지만 미국 달러화의 가치는 더 치솟았다”며 “불확실한 금융환경에서는 안전자산으로 금이 우선 주목받지만, 진짜 위기가 오면 달러가 상승한다”고 말했다.
미국 달러 외 통화분산 차원에서 주로 고려되는 통화는 현재 일본 엔화, 유로화, 중국 위안화 등이다. 신동일 KB국민은행 대치역 PB센터 부센터장은 “자산가들이 통화분산 차원에서 주목하는 통화는 단연 미국 달러화로, 외화 거래의 70~80%가 미국 달러화에 집중되고 있으며 일부 위안화나 엔화 등도 매입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중국이 미국을 위협하는 강대국으로 빠르게 성장 중이지만, 위안화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게 중론이다. 이민구 부장은 “미국 달러화의 가치는 시장에 의해 결정되지만, 중국 위안화는 펀더멘털(기초체력)에 상관없이 중국 정부의 정책에 의해 움직이는 경우가 많아 안전자산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달러화에 비해 위안화나 엔화, 유로화 등으로 투자할 곳은 제한적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