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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회가 만난 CEO 스토리] 인생 3막의 장밋빛 인생, 이길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명예이사장
- 나이 듦은 원숙일까, 낡음일까. 누군가에겐 연륜으로 작용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고집불통의 외통수를 만들기도 한다. ‘불로초’를 찾아 헤매는 ‘영원한 젊음에 대한 집착’도 안쓰럽다. 또 ‘너희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로 나이를 계급장인 양 밀어붙이며 유세하는 것도 볼썽사납다. 여기 밥 잘 사고 젊은이들과 무람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지덕체의 균형을 이루며 사는 진정한 ‘어른’이 있다. 바로 이길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명예이사장이다. 영원한 현역으로 산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글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정보화 사회의 키워드인 사이버는 그리스어 ‘키베르니테스(kybernetes)’에서 유래했으며 ‘키’를 잡고 있음을 의미한다. 원로가 젊은이와 다른 것은 인생에서 ‘가상의’ 키를 잡고 저어갈 줄 아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이길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장(72)을 이 코너 인터뷰 대상자로 섭외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늘 젊은 친구가 모여들고, 일상을 놓지도 않고 꽉 움켜쥐지도 않은 채 여유롭게 ‘키를 제대로 잡고’ 지덕체의 균형을 이루며 사는 ‘어른’이라 생각해서였다. 처음 인터뷰 섭외를 청했을 때,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90까지는 활동해야 하는데 인생 은퇴가 어디 있느냐”며 “나는 영원한 현역이다. 단지 노는 물이 달라졌을 뿐이다”라고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지요. 저는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박수칠 때 새로운 것을 시작하라는 것으로요. 옛날에는 인생을 2막으로 나누었지요. 30세까지의 준비기와 60세까지의 활동기로 양분했습니다. 이제는 90세까지 사는 세상. 저는 인생을 3막으로 구분합니다. 태어나서 20대 후반까지가 준비기, 그 이후부터 60대까지가 활동기 그리고 90대까지가 서드 에이지(third age)입니다. 서드 에이지 시기에도 마음먹기에 따라 하고 싶은 것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이길원 이사장은 장년기에는 성질이 불같아 아내와 티격태격 싸움도 자주 하고 밖으로 나돌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드니 역시 배우자뿐이라는 생각이 든단다. 서로 등 긁어주는 배우자가 최고란 마음이 절로 들면서 부부금실도 좋아졌다고 털어놓는다. “건강이 최고로 중요하다”는 그는 아내에게 “아프면 범죄다.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 아프지만 말라”며 오후 4시엔 무슨 일이 있어도 손잡고 꼭 헬스클럽엘 간다. 아내 역시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절정기”라며 행복해한단다. 자녀들도 자립했고, 이제는 스스로의 삶에서 뭔가를 이뤄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없어 욕망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자유로워진다는 설명이었다. 회장님의 본업 내지 생업은 사업이십니다. 국제PEN클럽 이사장 등 활동을 활발히 하시면서도 시를 500편, 시집은 8권이나 발간하셨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시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제 본업은 시를 쓰는 일이고 생업이 사업이지요. 그런데 사업가와 시인은 모순된 것이 아닙니다. 사업이 인간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면, 시 쓰기는 인간을 탐구하는 작업입니다. 서로 통합니다. 제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쓰고 나면 짜릿한 쾌감을 느낀답니다. 시를 쓰면 사물이나 사람을 폭넓은 시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그런 것이 사업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국제PEN클럽 회장을 역임하셨지만 본래 특수인쇄업체인 스티커 회사 ‘태평양그랜드’를 창업, 38년간 운영해오셨지요. 오너 경영자들은 한결같이 스스로 현직에서 물러나기 쉽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던데요. “내가 죽고 난 후 회사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보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결론이 간단하더군요. 책상을 빼는 것이 회사 간판을 내리는 것보다 낫다.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성공한 기업이란 나 아니면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나 없이도 잘 굴러가는 기업이라고 다시 정의를 내려봤어요. 저는 단계적으로 후계자 교육을 시켰습니다. 제 시대 땐 경영자 혼자 장군 멍군 다 일을 했는데, 아들에게 일을 시켜보니 팀워크로, 시스템으로 일을 처리해 나보다 더 잘해낼 것 같더라고요. 내가 며칠 걸려 조사한 일도 반나절에 해내는 걸 보고 물려줘도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경영 승계 수업을 할 경우 아버지의 ‘질문’이 ‘심문’으로 변해 갈등을 빚는 경우도 종종 있던데요. “묻고 기다려준 것이 내 나름의 비결입니다. 일찍부터 ‘너라면 이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 상대라면 어떻게 할 것 같으냐?’라는 질문을 습관적으로 했어요. 직원들에게나 고객들에게나 경영자로서 얼굴이 서려면 물려받아 얻은 게 아닌 나름의 업적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부담을 준 말의 전부일 겁니다. 실패를 했을 때도 ‘네가 그러면 그렇지’ 하며 못미덥다고 전권회수를 하기보다는 ‘내가 방풍벽으로 있을 때 실수를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실수도 경영 수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들들과는 편하게 술친구도 하지요.” 삼성 이병철 회장―이건희 회장―이재용 부회장은 3대에 걸쳐 사업 교훈으로 ‘경청’을 물려주었다고 하는데요. 자제분들에게 강조하신 것은 무엇인지요. “한마디로 신뢰입니다. ‘영업이란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을 파는 것이다, 능력이 야 웬만한 사람들이 다 갖고 있지만 호감을 얻거나 신뢰를 받는 사람은 흔치 않다, 사업의 기초는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과 누가 사업 파트너가 되겠느냐, 사업의 핵심은 호감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임기응변으로 얼렁뚱땅 넘기려 하지 말고 솔직해져라, 한 가지 거짓말을 덮기 위해서 백 가지 거짓말을 하게 되는 법이다’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했지요. 사업을 한 지 10년쯤 되자, 아버지 말이 무슨 말인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알겠다고 하더군요.” 2선으로 후퇴해 이른바 ‘뒷방 노인’이 되면 심리적으로 외롭다고들 하십니다. 한 퇴직 오너분은 실무 경영에 참여하고 싶어도 ‘(현직 사장인) 아들이 부르기 전엔 절대 집무실에 들어가지 않는다며 피눈물 나는 맹세와 마음수련을 거듭했다고 합니다. “허허, 저는 할 일이 많아서인지 더 즐겁던데요. 일주일에 한두 번 회사에 나가면 직원들이 모두 좋아해요. 제가 수전노처럼 굴지 않기 때문이에요. 경영 승계를 한 후 부자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아버지가 손을 놓지 못하고 간섭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은 오히려 아들이 ‘너무 회사에 무관심한 것 아니냐’고 제게 불평할 정도입니다. 저는 문단활동, 국제PEN클럽 활동, 망명 북한작가 돕기, 시창작 강의 등 할 일이 많습니다. 돈 문제도 내가 버는 만큼이 내 돈이 아니라, 내가 쓰는 만큼만이 내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밥 먹고 술 마실 때 쓸 수 있을 정도면 되지, 뭘 더 바라겠습니까.” 흔히 나이든 분들은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싶은데, 그들이 어렵다며 피한다고 합니다. 젊은이들과 잘 어울리시는 비결이라도 있으신지요. “나이를 먹으면 남을 통해 행복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가 돼야 합니다. 스스로 행복해지는 방법도 찾아야 하고,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눠주기도 해야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외로움을 즐길 줄 알아야 사교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즐거워야 남도 즐겁지요. 안 그러면 주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거나 피곤하게 만듭니다. 나이 많다고 거들먹거리며 대우나 받으려 하고 폼만 잡으면 꼰대로 소외당하지요.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저는 모임에 나가면 대우받으려 하기보다는 사람들과 잘 적응할 방법을 찾습니다. 나이 든 선배로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려고 하면 오히려 ‘식욕, 성욕 다 당신들 못지않다. 당신들보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더 젊다’고 농담을 하며 벽을 허물곤 한답니다.” 밥 잘 사고 젊은이들과 무람없이 농담을 주고받는다고 해서 그를 ‘세상모르는 팔자 좋은 금수저 출신 어르신’이라고 보면 오산이다. 이길원 이사장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사업이 잘나갈 때는 있는 약속도 취소하면서 만나던 사람들이 사업이 어려워지자 없는 약속도 만들어 핑계를 대며 피했다. 이런 인간의 온갖 행태를 다 경험하고 목격했기에 그는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며, 조변석개의 인심을 겪으며, ‘사람은 누구나 제 입에 밥알 털어넣기 바쁘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터득했단다. 사람들에게 기대지 않을수록 외로움을 덜 탄다. ‘자립심=사교심’이 그의 지론이다. 역설적이지만, 경제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혼자서 버틸 줄 아는 내(耐) 고독력이 사교력과 모임적응력의 바탕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플루트를 새로 배우신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지요?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음악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지요.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과학자가 되라고 강권하셔서 화학과로 진로를 정했는데, 막상 가보니 적성에 안 맞지 뭡니까. 또 사업을 할 때는 바빠서 악기를 배울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때 풀지 못한 원을 고희가 지난 지금 이루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 나이에 뭘 새로운 걸 배우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날씬한 플루트 몸매는 내 손놀림에 따라 음계를 달리합니다. 낮은 음으로 속삭이다가 높은 비음으로 유혹하면 저절로 감성에 젖게 되지요. 게다가 휴대도 간편해 노후에 배울 악기로 딱 안성맞춤이라 생각합니다.” 이길원 이사장을 만나는 날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댔는데 그날도 플루트 레슨을 받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은 초보 수준이지만 프로 수준에 이를 때까지 꾸준히 연습할 생각”이라며 “손자들 앞에서 데뷔 음악회를 여는 게 향후 목표”라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인생 3막, 서드 에이지에 대해 쓴 시가 있는지 물어보자 그는 노년의 관조와 여유를 다룬 자작시를 나직하게 암송하기 시작했다. 때론 강한 목소리로, 때론 부드러운 목소리로 시를 읽어나가는 그에게서 거친 파도와 싸우는 손마디 굵은 어부와 열정적으로 연기를 펼치는 배우의 모습이 느껴졌다. 낭만가객, 음유시인의 면모를 잃지 않고 고독하게 인생의 파도를 헤쳐 온 그에게 커튼콜의 힘찬 갈채를 보내고 싶어졌다. “브라보! 브라비시모, 유어 라이프!” 마침표 연습 2 이길원 내 연기(演技)가 비록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도 아이야 커튼콜하며 무대 비우는 배우에 갈채 보내듯 박수를 쳐라. 최선을 다한 나의 연기다 막이 내린다고 우는 사람 있더냐. 촘촘히 등 돌려 무대 내려오는 나는 박수를 받고 싶다. 내 서던 무대에 누군가 또 열정을 보일 것 이제는 너의 차례 신(神)이 누구에게나 한 번 주는 배역 비록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라 산다는 건 주어진 역할에 따르는 한 편의 연극 같은 것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 2017-01-23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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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방학 이야기] 긴 겨울방학은 우리들 세상이었다
- 필자가 중·고등학교 시절 유행했던 최고의 카세트는 ‘GOLD STAR’라는 영문이 크게 찍힌 금성사 제품이었다. 삼성전자가 나오기 전이었고 성능도 좋은 편이어서 많은 사람이 애용했다. “한 번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광고가 이 제품의 명성을 말해줄 만큼 신뢰도 또한 높았다. 1970년대에 필자는 고등학생이었는데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라 이 카세트 한 대만 있으면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겨울방학은 참 길었다. 밤도 낮보다 길었다. 그 무렵 친하게 지내던 10여 명의 친구는 자주 어울려 긴 밤을 지새우곤 했다. 우리는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전축에 틀어놓고 밤새 부르고 흔들며 춤을 췄다. 노래도 배호의 ‘안개 낀 장춘단 공원’ 등 어른들의 유행가를 잘도 따라 불렀다. ‘킵 온 러닝’과 ‘프라우드 매리’, ‘뷰티풀 선데이’ 등 템포 빠른 음악에 맞춰 고고, 트위스트, 개다리춤을 닥치는 대로 추었고 다이아몬드 스텝까지 밟아대며 밤새는 줄 모르고 놀았다. 학창 시절 긴 겨울밤에 자주 이런 기회를 갖긴 했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어른들이 학교 교실에 불을 따뜻하게 때주며 공부하는 환경을 만들어줬기에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렇게 친하게 놀던 친구들이 어느 날인가 졸업을 앞두고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는 졸업하고 헤어지더라도 “20년 뒤에 다시 만나자!”라는 약속을 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어느 날, 거짓말처럼 우린 다시 모였고 정식 모임을 만들었다. 그 모임은 지금까지 이어져 부부가 함께 만나고 있다. 지금도 만나기만 하면 당시 얘기들로 꽃을 피운다. 또 그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던 누님들의 안부를 묻기도 한다. 우리의 학창 시절 긴 겨울방학 이야기는 그래서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 2017-01-02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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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댓연금] 60대의 연금술
- 어느 60대 여성들의 대화 어느 화창한 주말 오후! 어린이 놀이터를 빙 둘러싸고 있는 벤치에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 두 분이 앉아 있다. 놀이터에서는 아이들이 할머니의 존재를 잊은 듯 신나게 노느라 여념이 없었고, 할머니 두 분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잠시 손주들의 존재를 잊은 듯했다. 우연히 그 옆에서 할머니들과 아이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정쩡하게 서 있던 필자는 어느 순간 벤치 쪽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시선을 고정했다. 남 이야기를 엿들은 것 같아 조금 민망하지만 직업병 탓으로 돌리며 그 내용을 여기에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할머니 한 분이 많은 돈은 아니지만 곗돈을 탄 모양이었다. 그 곗돈을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서로 의견을 나누는 중이었다. “요즘은 은행에 넣어둬도 이자가 얼마 붙지 않아 재미도 없는데, 곗돈을 어디에 쓸 거유?” “연금에 가입해 매달 연금으로 받으려고 해요.” “연금으로 받으면 몇 푼 되지도 않을 텐데, 차라리 여행을 다녀오거나 며느리에게 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얼마 되지 않는 돈이라도 매달 받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데…. 그리고 이제 우리 노후는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시대잖우.” 이 말을 들은 여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과 감정의 줄타기 게임 위의 대화는 오늘날 60대의 고민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돈이 좀 생기면 고민도 생긴다. 자식을 위해 써야 할지, 아니면 이기적으로 보이더라도 자신을 위해 써야 할지, 자신을 위해 쓴다면 어떻게 쓰는 게 과연 좋을지 판단이 잘 안 선다. 노후를 위해 연금에 가입하는 게 좋을까? 이성은 연금에 가입하라고 권하는데, 감정은 자식을 위해 쓰라고 부추긴다. 이성과 감정의 줄타기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감정의 힘에 굴복하고 만다. 하지만 위의 사례에 나오는 여성처럼 꿋꿋하게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사람도 있다. 그 결과는 어떨까? 감정적으로 내린 판단보다는 이성적 판단이 지혜로운 판단이었음을 곧 알게 된다. 2001년, 미국의 저명한 두 교수가 2001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 중 2150년까지 생존해 있을 가능성을 두고 내기를 걸었다. 미국 앨라배마 버밍햄대학교 오스태드 교수는 메트포르민과 라파마이신 등이 인간의 수명을 상당히 늘려줄 것이라며 생존 쪽에 내기를 걸었고, 시카고대학교의 올생스키 교수는 유전적 프로그램이 걸림돌로 작용해 아무리 오래 살아도 115세밖에 못 살 거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2001년에 각각 150달러씩 내어 300달러를 펀드에 투자했다. 이 펀드는 2016년까지 연평균 9.5%의 높은 수익률을 보여 300달러가 1275달러로 늘어났다. 2016년 이들은 각각 300달러씩 또 내어 600달러를 이 펀드에 추가로 넣었다. 이 펀드가 2150년까지 연평균 9.5%의 수익률을 실현하면 2150년에는 약 2억 달러가 된다. 이 돈은 내기에서 이긴 사람의 유족이 다 가져가기로 했다. 지금의 60대가 150세까지 생존할 가능성은 없지만 앞으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수명이 더 길어질지도 모른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연금을 선택한 이성의 판단은 옳은 것이다. 60대 연금술의 핵심과 전략 60대 연금술의 핵심은 어떤 연금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진다는 점에 있다. 가진 돈을 모두 연금으로 전환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바로 여기에 60대 연금술의 전략이 있다. 모든 자산을 연금화한 뒤 매달 받는 연금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발생하면 대응할 수 없다. 연금은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계속 나오겠지만, 당장의 큰 지출을 감당할 수 없어 빚을 얻게 된다면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는 쪼들린 생활을 해야 함을 물론 최악의 경우에는 하류노인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 소개되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후지타 다카노리의 저서 는 연금으로 일상적인 생활은 그럭저럭 유지하더라도 여윳돈이 없는 상황에서 질병 등 추가로 돈 들어갈 일이 생기면 곧바로 하류노인으로 전락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현금이 흘러넘치는데도 경제 주체들이 돈을 움켜쥐고 풀지 않아 경기가 나아지지 않고 마치 경제가 함정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상태를 ‘유동성 함정’이라 한다. 은퇴자의 경우도 연금이 쉼 없이 나오는데도 일시적 지출에 대응하지 못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이를 ‘은퇴자의 유동성 함정’이라고 하자. 은퇴자는 이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결국 60대 연금술의 핵심은 연금화와 유동성의 적절한 조화라 할 수 있다. 정상연금이냐? 연기연금이냐? 60대가 연금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은 국민연금의 수령시기를 법에서 정한 시점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뒤로 미룰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있다. 2017년에 만 60세가 되는 1957년생은 만 62세가 되어야 국민연금을 신청할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국민연금은 정상 수령 연령부터 받는 것이 기본이지만 최대 5년간 앞당겨 받을 수도, 늦춰 받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앞당겨 받는 것을 조기연금, 늦춰 받는 것을 연기연금이라고 한다. 조기연금을 신청하면 정상연금보다 일찍 수령하므로 1년당 6%씩 수령액이 낮아지며, 연기연금을 신청하면 1년당 7.2%씩 수령액이 늘어난다. 1957년생이 62세에 연금을 신청할 경우 연간 1200만원(월 100만원)을 받는다고 해보자. 이 사람이 연금 수령을 5년 늦게 신청할 경우와 5년 빨리 신청할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 5년 늦게 신청할 경우에는 1년당 7.2%씩 급여액이 올라가므로 첫해 연금액은 36% 증가한다. 반면에 5년 빨리 신청할 경우에는 1년당 6%씩 급여액이 삭감되므로 첫해 연금액이 정상연금액보다 30% 줄어들게 된다. 첫해 받게 되는 월 연금액은 조기연금 70만원, 정상연금 100만원, 연기연금 136만원이다. 이렇게 보면 언뜻 연기연금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연기연금에 비해 조기연금은 10년 먼저, 정상연금은 5년 먼저 받기 때문이다. 어떤 수령 방법이 가장 유리한지는 누적연금액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에서 보는 바와 같이 누적연금액 곡선의 기울기가 가장 가파른 것은 연기연금이고, 그다음이 정상연금이다. 이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정상연금의 누적연금액이 조기연금의 누적연금액을 초과하지만, 연기연금의 누적연금액에게는 추월당함을 의미한다. 정상연금 월 100만원과 이 연금액이 매년 물가상승률(2% 가정)만큼 증가한다고 했을 때 76세가 되면 정상연금의 누적연금액이 조기연금의 누적연금액보다 많아지고, 80세가 되면 10년 늦게 시작한 연기연금의 누적연금액이 조기연금의 누적연금액을 추월하며, 84세가 되면 연기연금의 누적연금액이 정상연금의 누적연금마저 넘어서게 된다( 참조). 이는 84세 말까지 생존해 있을 경우 연기연금의 누적연금액이 가장 많음을 뜻한다. 2015년 완전생명표에 따르면, 62세 여성의 기대여명이 25.1세이므로 여성은 평균적으로 연기연금을 신청하는 것이 가장 많은 연금을 받는 방법이며, 남성의 기대여명은 20.6세이므로 연기연금을 우선으로 생각하되 상황에 따라 정상연금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많은 연금을 받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상황이란 가족력이나 본인의 건강상태 등을 말한다. 이 상황을 감안해 기대여명보다 오래 살 가능성이 낮으면 정상적으로 62세에 연금을 신청해야 가장 많은 연금액을 받는다. ‘은퇴자의 유동성 함정’ 피하기 이제 60대 연금술의 전략이라 할 수 있는 ‘은퇴자의 유동성 함정’ 피하기에 대해 살펴보자. 미래에셋은퇴연구소에 따르면, 사망할 때까지 연금이 나오는 종신연금의 적정비율은 은퇴 자산의 규모, 국민연금 수령액, 주택연금 가입금액 등에 따라 달라지는데, 은퇴파산 확률이 가장 낮은 종신연금의 비중은 24~42%라고 한다. 종신연금의 비율이 24% 이하로 떨어지면 장수리스크와 변동성리스크 때문에, 42%를 넘게 되면 구매력리스크와 이벤트리스크 때문에 은퇴파산 가능성이 높아진다( 참조). 모든 자산을 종신연금으로 전환해버리면 은퇴파산 확률이 90%로 올라가는데, 이는 일반 국민들이 이용하는 사적연금의 경우 연금액이 일정 금액으로 고정되어 있어 인플레이션에 취약하고, 이 상황에서 질병이나 사고 등 큰 금액의 지출이 생기는 일이 발생하면 대응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는 국민연금을 포함해 종신연금의 비중을 3분의 1 정도로 유지하고, 나머지 자산은 인플레이션 헤지와 유동성 확보를 위해 운용할 필요가 있다. 은퇴 후 인플레이션 헤지를 위해서는 투자형 상품을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저축 투자형 소비’가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 세대(1947~1949년생)가 은퇴 자산을 운용하는 새로운 패턴을 말한다. 과거의 은퇴자들이 저축한 돈에서 매달 생활비를 빼 쓰는 방식을 취했다면, 단카이 세대는 저축한 돈의 일부를 투자로 운용하는 것이다. 단카이 세대는 투자를 위험한 행위로만 생각하지 않고, 돈에게 일을 시켜 새로운 돈을 벌어들이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요즘 일본의 50~60대 남성들의 일상 대화 속에 건강 이야기 못지않게 ‘돈이 되는 금융상품’이 회자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새로운 어른 문화 연구소’의 소장인 사카모토 세쓰오는 저서 에서 아베노믹스가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일부 기관 투자가나 해외 펀드만으로는 불가능하며 많은 개인 투자가들이 참가했기에 가능했다고 주장하면서 “그 개인 투자가의 중심적 존재가 바로 단카이 세대였다”고 말한다. 투자를 통해 돈이 제대로 일을 수행하면 괜찮은데, 반드시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는 게 투자의 세계다. 이런 경우에 대비하고 아울러 유동성을 확보하기에 좋은 것이 주택연금이다. 주택연금은 만 60세 이상(주택 소유자 또는 배우자)의 고령자가 소유 주택을 담보로 맡기고 평생 혹은 일정 기간 동안 매월 연금 방식으로 노후생활 자금을 지급받는 국가 보증의 금융상품(역모기지론)을 말한다. 주택연금을 받으려면 우선 주택금융공사로부터 보증서를 발급받고, 이를 제휴 금융기관에 내면 그 금융기관에서 주택연금을 지급해준다. 주택연금에서 특히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연금지급방식이다. 주택연금의 지급방식은 월 지급금을 종신토록 지급받는 종신방식과 고객이 선택한 일정 기간 동안만 월 지급금을 지급받는 확정기간방식으로 나뉜다. 종신방식은 다시 인출한도 설정 없이 월 지급금을 종신토록 지급받는 종신지급방식과 수시인출한도(대출한도의 50% 이내) 설정 후 나머지 부분을 월 지급금으로 종신토록 지급받는 종신혼합방식으로 구분된다. 수시인출한도를 잘 활용하면 ‘은퇴자의 유동성 함정’을 피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주택연금을 신청할 때 무조건 종신지급방식을 고집할 게 아니라 국민연금 수령액, 퇴직연금 등 사적연금 수령액을 먼저 계산한 뒤 부족한 월 생활비만큼을 종신연금으로 수령하고 나머지는 수시인출한도를 설정해 유동성을 확보해둘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면 종신토록 안정적으로 생활비를 조달받으면서 갑자기 도래할 수 있는 예상외 지출 건에도 대응할 수 있어 은퇴파산에 빠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손성동(孫盛東)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 삼성금융연구소 수석연구원,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연금연구실장 역임. 현재는 ‘연금과 은퇴포럼 대표’로 있으면서 1인기업가를 꿈꾸고 있다. 공식블로그 ‘꿈꾸는 은퇴와 연금’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부산 동아대와 동서대에 출강하고 있다.
- 2016-12-30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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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을 즐겁게 하는 가족밴드
- 며칠 지나면 크리스마스이고 다음 날은 아버님 기일이다. 형제자매와 조카들에게 "아버님 기일 오후 4시에 메모리얼 파크에서 모이자“고 ‘가족밴드’에 올렸다. 형제자매들은 가족들의 소통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가족밴드를 이용한다. 의사소통의 변천사 통신수단이 발달하기 전에는 직접 대면하여 소통하였다. 어른이나 상사를 찾아뵙고 말씀을 나누고 지인을 직접 만나서 의사소통하는 방법이다. 지금도 이 방법이 최고의 예절로 자리하고 있다. 우편제도가 발달하면서 편지를 애용하였다. 정성이 제일 많이 들어가는 이 방법은 중장년이면 꼬박 밤을 새운 경험이 있을 것이다. 글재주 좋은 사람은 ‘편지대필’로 친구의 연애를 돕기도 하였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는 거의 사라졌지만 비싼 요금에도 불구하고 빠른 전보가 이용되었던 시대도 있었다. “만원속히송금요불효자" 10자 기본요금이 적용되던 50여 년 전 도시에 유학하던 친구가 시골 부모님께 학자금을 이중으로 보내달라는 전보내용이다. ”직접 찾아가서 설명하는 것은 거짓말이 되어서 싫고, 편지는 한 장을 다 채우기 귀찮다.“고 너스레를 떨던 친구가 생각났다. 통신수단과 의사소통의 발달 80년대 전화사용이 보편화 되면서 세상이 전화기 속으로 다 들어오는 것 같았다. 시골 이장 집에서 전화를 기다리던 일이 추억으로 남고, 공중전화, 삐삐를 거치면서 주요 통신수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난 세월 풍미했던 전보처럼 휴대폰의 발달에 따라 메시지문자도 많이 이용되고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SNS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중에서 ‘가족밴드’가 가족들과 서로 소통하면서 정보를 하나의 장에서 공유할 수 있어서 매우 편리하고 효율적이다. 밴드의 소식은 모두가 공유할 수 있어서 좋다. 자유토론을 하고 합의 결과를 착오 없이 실행할 수 있다. ‘아버님 기일 공지’를 마치고 올해를 회상했다. 여름에 어머님이 소천하셔서 내년에는 두 차례 ‘추모모임’이 예정되었다. 부모님 덕분에 건강하게 살고 있는 나이 든 형제자매 세대보다 아들ㆍ딸ㆍ조카와 손주들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다음세대 아이들은 서울에서 나서 자라고 학교도 마쳤지만 전문 직업인이 되어 세종ㆍ대전에 멀리 울산까지 사는 곳은 전국구다.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매우 슬펐지만, 막내 동생의 딸의 교사 취임 등 좋은 소식이 많아 ‘40년 가족모임’ 중에서 제일 기분 좋은 날이 될 것 같다. 문명의 이기를 활용한 가족밴드 요즘은 길거리에서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누구든지 기쁘거나 급한 소식을 전하고 축하와 격려를 한다. 밴드가족이 소식을 공유하여 언제나 쌍방소통이 가능하다. 댓글로 참석가능 여부까지 다 알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가! 형제자매와 온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부모님의 기일을 가다린다. 가족밴드를 기다린다.
- 2016-12-2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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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녀의 취업은 부모의 성공
- 몇 년 전 2월이다. 아들의 대학 졸업식에 참석을 했다. 취업도 하지 못하고 졸업을 하는 아들 어깨도 무거웠지만 이를 바라보는 애비의 마음도 찬바람 불고 황량했다. 아들은 어떡하든 졸업하기 전에 취업해보겠다고 노력했다. 학교 근방에 방을 얻고 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몇 군데 원서를 넣었는지 필자는 묻지도 않았지만 말이 없는 걸 보니 결과는 낙방이었다. 아들은 휴학을 하고 대학생 신분을 유지하는 것이 취업에 도움이 될지 졸업생 신분이 취업에 도움이 될지 잠시 망설였지만 정도를 걷겠다며 졸업의 길을 택했다. 백수가 뭐 별것인가. 취업하지 못한 젊은 놈이 백수다. 아들은 취업한 후 대학 문을 나서겠다고 했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하자마자 취업을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세월에 떠밀려 백수 신분으로 졸업장을 받게 됐다. 밤낮으로 도서관에도 다니고 인터넷으로 이곳저곳 조회하며 취직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아들보다 내가 더 초조해져갔다. 이러다가 내 아들이 영영 백수인 채로 캥거루족이나 빨대족이 되는 것은 아닌가 덜컥 겁도 났다. 신문에서 취업을 못해 절망한 젊은이가 자살했다는 내용을 읽고 얼마나 섬뜩했는지 모른다. 어느 날 술에 취해 필자는 속마음을 아내에게 토해냈다. “백수인 아들을 보니 애비로서 마음이 답답하다. 너무 힘들다.”라고 넋두리를 했는데 아들이 제 방에서 귀동냥으로 애비의 말을 들었던 모양이다. 다음 날 아들은 내게 편지를 건네주고 도서관으로 나갔다. 내용은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아버지 실망시켜드려 정말 죄송해요. 지금까지 25년이나 저를 믿고 기다려주셨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궁하다고 아무 곳이나 들어가면 안 되잖아요? 곧 좋은 소식 드리려고 저도 노력하고 있어요.” 자식의 마음고생을 느끼고 있었지만 어떤 위로의 말도 하지 못했던 필자는 그저 눈물이 핑 돌았고 아들의 마음고생이 더 심할 텐데 술 마시고 그런 말을 한 자신이 어른스럽지 못해 많이 미안했다. 4월의 어느 날, 아들은 기다리던 합격 전화를 받았다. ‘합격’이란 말, 얼마나 듣기 좋은 소리인가. 전화기 너머로 아들의 씩씩한 음성을 들으며 생애 최고의 순간처럼 기뻤다. 아들의 인생은 아들의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라는 생각을 평소 해왔지만 그건 생각일 뿐이었따. 아들의 합격소식에 필자가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마침 아들의 학교에서 졸업생 취업 실태를 조사하기 위한 전화가 합격 통지를 받은 당일에 온 모양이었다. 당당하게 취업했다고 하니 조사원이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었단다. 청년 백수인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 마음은 모두 타들어갈 것이다. 우리가 젊었던 시절에는 공장도 많고 자동화도 덜되어 인력이 많이 필요했고 취직도 잘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상의 은덕이 있어야 취직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취업이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 예전에 100명이 하던 일이 기계화, 자동화하면서 인력은 불과 3~4명이면 충분하다. 그나마 있는 공장도 경제성을 따져 해외로 이전시키고 있다. IT 산업과 서비스 업종은 늘어났지만 굴뚝산업의 인력 감소는 막아내기 어렵다. 직업의 종류는 늘어나도 직장은 줄어든다. 고용 없는 경제성장이 오늘의 현실이다. 아들이 군대에 갔다 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도 했으니 애비의 성공, 필자의 성공이라고 외치고 싶다.
- 2016-12-1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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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영화감독 김동원, 다시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 요즘 젊은 세대가 가장 관심을 갖는 아이템인 피규어. 그런데 시니어 대부분은 잘 모를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그런 선입견을 비웃듯, 기자가 3000여 점의 피규어가 전시된 마니아들의 성지 피규어뮤지엄W를 방문하게 된 것은 한 시니어 독자의 제보 덕분이었다. 그만큼 시니어들의 감식안이 일반적인 생각을 뛰어넘어 젊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피규어뮤지엄W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피규어와 그리고 피규어에 친숙한 아이들과 함께하며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영화감독이기도 한 김동원(金東元·54) 피규어뮤지엄W 관장을 만나 피규어 가치에 대해 그리고 캐릭터 문화에 대한 식견을 물어봤다. 몸은 중년, 마음은 초등학생. 어릴 적 좋아했던 캐릭터 피규어를 모으며 동심에 빠져 사는 오타쿠적 기질의 아재들이 늘고 있다. 구매한 피규어를 개봉하지 않고 박스째로 나란히 차곡차곡 쌓아둘 정도로 피규어를 모으고 즐기는 이들은 자신이 자신에게 선물을 하듯 살뜰히 챙긴다. “평소 그다지 대화가 없던 부자가 함께 와 캐릭터를 매개로 ‘말문’이 터지는 경우도 있고, 손주 손잡고 온 시니어가 오히려 키덜트족이 돼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피규어를 좀 안다는 분들이 이곳 뮤지엄에 와서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며 저마다 탄성을 터뜨리죠.” 피규어 소장의 즐거움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라고 여기는 김동원 피규어뮤지엄W 관장은 지난 10월 마니아들의 감성을 채워주는 일에 합류했다. 그에게 피규어 마니아들 사이에 부의 상징인 레어 아이템, 즉 희소성 있는 피규어가 있냐고 짓궂게 물었다. “어지간한 피규어는 다 구경해봤는데 여기 뮤지엄에 와서는 제가 아는 피규어는 빙산의 일각이었어요. 사실 피규어 가격은 크기에 따라, 희소성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건담 시리즈를 진열했더니 사무실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지더라고요. 간혹 사람들이 놀러 와서 호기심을 보이기도 해요. 장난감 하나만으로 사무실 공간이 위트 있고 재미있게 변한 것 같아 좋아요.”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피규어뮤지엄W는 피규어와 토이를 통한 테마파크를 지향하며 만들어진 새로운 개념의 공간이다. 전시공간은 6층의 총 6개 테마로 구분되어 있으며 온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놀이공간, 카페가 있는 그랜드홀, 직접 피규어를 구입할 수 있는 마니아 숍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장품은 프라모델, 히어로 액션 피규어, 자동차 다이캐스트 등 3000여 점에 달하는 막대한 숫자를 자랑한다. 영화 촬영에 실제 쓰인 자동차 모형, 에 출연한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실제로 입었던 가죽 의상, 리샤오룽 타계 40주년 기념 특별 피규어 등 진귀한 수집품으로 가득하다. ‘감정가 2억원을 호가하는 건담 모형’, ‘순금으로 만들어진 나이트 오브 골드’까지 눈이 호사를 누리는 동안 누군가에게는 아련한 추억, 누군가에게는 보물창고, 누군가에는 꿈과 희망이 되는 곳이다. 피규어뮤지엄W는 예상치 못했던 그 시작처럼 기존 뮤지엄과는 다른 발상과 사고로 사업을 전개할 계획을 갖고 있다. 대중문화적 취향을 가진 영화감독 김동원 감독을 관장으로 기용한 것도 그러한 계획의 일환이다. 김동원 관장은 , , 등의 영화들을 감독한 바 있다. 피규어를 처음 접했을 때 받은 충격 “주변에서는 의아스럽다는 반응이죠. 그런데 사실 저는 방향을 튼 게 아니라 감독으로서 또 하나의 파트너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피규어의 상당수가 미국의 마블, DC코믹스에서 나오는 히어로를 소재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런 피규어들은 전 세계의 마니아들을 대상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감독으로서 김동원 관장이 피규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한국 영화계의 현실과 관련이 있다. “현재 한국 영화는 수익을 관객으로만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캐릭터 산업을 병행해 나 처럼 관객 동원에 캐릭터 판매가 플러스돼서 거기서 창출할 수 있는 수익이 있다면 영화 산업의 규모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시리즈는 영화 관객을 통한 수익보다 몇백 배 더 많은 저작권 수익을 가져가고 있고 거기서 또 다른 고부가가치들이 창출되는 상황입니다.” 김 관장은 처음 피규어를 접했을 때 개인적으로 굉장히 부러운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무엇보다도 영화 속 캐릭터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과 기꺼이 돈을 지불하면서 그 피규어를 보며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아이언맨이 피규어 시리즈로 나오고, 각 피규어들이 노멀 버전, 파이팅 버전 등등으로 다양하게 만들어지는 걸 보면서 우리나라도 이런 걸 갖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 은 1930년대부터 시작됐는데 캐스팅이 바뀌어가면서 영원히 존재하잖아요? 이제 우리도 그런 한국적 캐릭터가 있어야겠다 싶었습니다.” 감독과 관장 그리고 나 김 관장은 피규어뮤지엄W이 문화예술계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색다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지금까지 놀이와 문화를 함께 담은 박물관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피규어뮤지엄W는 피규어를 테마로 다양한 콘텐츠를 접하도록 하여 즐거움을 줌으로써 박물관의 개념을 확대시켰다고 봅니다. 문화예술을 종합적으로 보 여주는 박물관인 만큼 전시, 교육뿐만 아니라 캐릭터 발굴과 개발을 넘어 그래픽 노블, 영화 등 콘텐츠를 생산하는 주체로서 새로운 문화를 이끌고 다양한 시도를 할 것입니다.” 그는 감독으로서의 역할과 뮤지엄 관장으로서의 역할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결국 피규어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재현입니다. 기억 속에 있는 걸 다시 만들고 추억 속에 있는 걸 끄집어내는 작업이죠. 저로선 영화감독의 길을 가면서 피규어라는 좋은 재료를 영화에 접목시켜 하나의 콘텐츠로 발전시킬 수 있겠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피규어가 결합된 한국의 마블 스튜디오를 꿈꾼다 영화와 캐릭터 산업을 보다 밀접하게 연결시켜 확장시키고 싶다는 그의 생각은 한류 관련 콘텐츠 사업의 차원으로까지 넘나들고 있다. “일부에서는 피규어를 단순히 아이들 장난감, 키덜트만으로 생각하는데 그보다 더 큰 하나의 콘텐츠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와 예능과 애니메이션을 아울러서 기존의 한류 문화처럼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 만들어내는 거죠. 이제는 예능도 처럼 미국에 수출하게 됐습니다. 그런 걸 보면 우리가 어린 시절에 봤던 , , 등도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이미 피규어뮤지엄W에서 과거 심형래 주연의 인기 시리즈물이었던 영화 의 판권을 구매했다는 소식도 있다. 그런데 과거 우리가 가졌던 캐릭터를 현대에 더 발전시켜 만들자는 생각은 왜 아직까지 구체화되지 못했던 걸까? “한국적 캐릭터가 미약해요. 미국은 오래전부터 슈퍼맨, 배트맨 등의 캐릭터를 만들었고 TV가 활성화되자 TV드라마 시리즈로 만화 원작인 히어로 물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 경험을 가진 이들이 성장해서 이제는 헐리우드에서 정교하게 만든 히어로 물을 만들고 시리즈로 만든 거죠. 그러면서 히어로 물이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원작조차도 남아 있지 않고 판권을 가진 분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그런 것들을 찾아 재조명하면서 디테일하게 작업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런 시도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그걸 한번 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물론 매우 어려운 시도가 될 것입니다.” 캐릭터 산업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고 싶다 김 관장이 토로하는 우리나라 캐릭터 제작 현실의 후진성은 놀이문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문화적 현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캐릭터를 소중하게 만들고 소중하게 취급했다면 그토록 많은 것들이 모호하게 방치되어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한국적 캐릭터를 만들어 세계적인 보편성을 갖기 위한 문화적 기반이 만들어지려면 어떤 노력들을 해야 할까. 현장에 있는 김 관장의 의견을 들어봤다. “흔히들 하는 ‘정부 차원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 ‘문화적인 계기가 있어야 한다’, ‘대기업에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들은 기본적인 얘기들이에요. 저희들의 구상이 잘 맞아떨어져서 하나의 시도가 성공을 거두면, 위의 얘기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구자적 역할을 하는 누군가가 책임감을 갖고 돌파하면 된다는 거죠. 피규어뮤지엄W와도 그런 부분에서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겁니다.” 시니어 중에서도 동심이 그립거나 상상의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피규어뮤지엄W는 그런 사람들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시니어들이 손자와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 “시니어들은 피규어뮤지엄W에서 과거 추억의 캐릭터를, 아이들은 자신이 어른이 됐을 때의 모습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디자인해보고 컬러링해서 완성해보는 ‘피규어아티스트’ 체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프라모델, 석고, 클레이 등 다양한 재료로 피규어를 접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만화가, 캐릭터디자이너, 큐레이터, 피규어아티스트 등 다양한 직업을 체험해볼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활발히 운영 중입니다.” 나이 들면서 깨달은 것들 히어로 물을 제작하고 싶다는 그에게 인생에서 언제가 가장 즐거웠는지, 젊게 늙어가는 비법은 뭐냐고 물어봤다. “저는 그냥 막 놀 때가 행복했어요(웃음). 작품을 만드는 건 일이죠. 고등학교 때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얘들하고 사고나 치고 다니고… 굳이 재밌었던 시절을 말하라면 그때가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아요. 젊게 늙어가는 비법이요? 비법은 전혀 없고 캐릭터 좋아하고 철없이 살다 보니(웃음) 어렵게 생각 안 해요. 긍정적으로 사는 게 덜 노화되는 비결인 듯해요.” 그는 향후 계획을 중국이나 홍콩 등에 진출할 수 있는 프로젝트들을 구상하는 데 두고 있다. 당장은 피규어뮤지엄W를 태국에 개관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사실 좀 더 진행이 되어야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을 듯해요. 이곳과 같은 규모로 생각하고 있는데 파트너가 중요하겠죠. 그 과정 중에 캐릭터 산업으로서 하는 시도들이 영글어져야겠고요.”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충무로 감독이라는 명함이 주는 인상과는 달리 소박하다는 느낌을 연거푸 받았다. 그는 자신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를 만들다 보면 영화에 제 인생까지 다 담게 됩니다. 그래서 나이에 따라 작품을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져요. 30대, 40대 때는 선배님들 인터뷰를 보면서 멋있는 말만 하시네 했어요. 그런데 제가 나이가 들어보니 그때 그분들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알 것 같더라고요. 그게 나이가 드는 것이겠죠. 예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을 잔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제가 그런 말을 하고 있고, 이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것도 보게 되는 거죠.” 시간은 철없는 사람도 어른으로 만들어준다. 그에게 자신이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는지 물어봤다.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거 아닌가요? 누가 날 기억해주냐가 중요하겠죠. 매순간 열심히 살다 보면 그렇게 된다고 생각해요.” 김동원 관장은 피규어뮤지엄W가 얼마 전 판권을 구입한 영화 버전을 기획 중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피규어뮤지엄W의 전시를 볼 수 있도록 전시장 오픈도 계획 중이다. 현재 태국 파타야에 ‘피규어뮤지엄W 파타야점’ 오픈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 청담동(84-9번지)에 위치한 피규어뮤지엄W는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되며, 관람료는 성인 1만5000원, 청소년 1만3500원, 어린이 1만2000원이다.
- 2016-12-09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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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세 장인어른의 아주 특별한 여행
- 장인어른은 올해 연세가 아흔이시다. 자식들이 하나둘 둥지를 떠나 도심에 살림을 차리고 여든다섯의 장모님과 두 분만 남아 시골집을 지키신 지 수십 년이 되었다. 막내 처제가 오십이 넘었으니 30년 가까이 된 셈이다. 두 분이 텃밭에 참깨며 고구마, 그리고 배추를 심으셔서 가을엔 김장도 함께 모여서 하곤 했는데 몇 해 전부터는 자식들의 만류로 겨우 배추 몇 포기 먹을 것만 심으셨다. 서울보다는 시골에서 사시는 편이 마음이 편하신지 서로 의지하며 잘 지내셔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한두 해 전부터 장모님이 기력이 쇠하면서 건망증이 심해지고 약간의 우울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종갓집에 시집와서 조그만 체구에 10남매 모두 출가시킨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총명하시고 당당하셨는데 눈도 어둡고 몸도 약해 옛날 같지 않으니 우울하실 만도 했다. 당당하셨던 자신의 몸이 이렇게 망가지자 허무하고 한탄스러운 원망을 종종 장인어른에게 쏟아 부으시는 듯했다. 표현이 좀처럼 없으신 과묵한 장인어른은 안 되겠는지 가끔 딸들에게 전화해 다녀들 가라 해서 번갈아가며 시골에 다녀오곤 했다. 딸들이 내려가 말동무가 되어주면 장모님의 끊임없는 잔소리가 조금은 잦아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장모님의 원망이 더 심해지셨는지 엊그제는 바람 좀 쐬고 싶다고 의사를 내비치셨단다. 급기야 4남매 중 3남매가 의기투합했고 휴가를 얻어 2박 3일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장인어른이 여행하는 동안 장모님은 장녀인 아내가 모시기로 해 필자의 집으로 오셨다. 그렇게 장인어른을 위한 특별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여행지는 장인어른이 젊은 시절 10여 년 동안 사셨던 강원도 어느 시골 마을이었다. 그곳은 장인어른에게는 특별한 곳이었다. 광산을 따라 젊은 시절을 보냈던 곳이어서 제2의 고향 같은 마을이었다. 장인어른은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가끔 젊은 시절에 대해 이야기할 땐 그곳 이야기를 많이 하시곤 했다. 여행 첫날, 장인어른은 충청도에서 출발해 강원도 어느 시골 마을을 찾았다. 여느 시골 마을과 다름없는 그곳을 90이 다 되어 찾아보는 장인어른은 감회가 새로운 모습이셨다. 옛날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고 몇몇 기억나는 지인들을 찾으니 나이가 몇 살 아래인데도 모두 다 돌아가시고 아시는 분이 없으셨단다. 반겨줄 사람이 한두 명은 있을 거라 기대를 했던 장인어른은 이방인의 모습으로 추억의 고향을 떠나셨다. 그 모습이 참 안타깝고 쓸쓸해 보였다고 한다. 일행은 동해안으로 방향을 잡고 속초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횟집에서 푸짐하게 회를 시켜 소주 한잔 기울이고 밤바다를 둘러봤다. 이튿날은 낙산사를 들려 절이며 바닷가의 풍경을 감상하고 좋은 음식을 찾아 즐겼다. 마지막 날은 설악산 온천에 들려 온천욕을 하고 귀향길에 올랐다. 장인어른이 동해안을 여행하시는 동안 필자의 집에서는 장모님을 모시고 오랜만에 불고기며 족발을 시켜 만찬을 즐겼다. 이제 다시는 가보지 못할 수도 있는 추억의 장소를 방문한 것은 매우 의미 있어 보인다. 나이가 드셔서 혼자서는 엄두도 못 냈던 장소를 90이 되어 자식들과 찾아본 장인어른은 감회가 깊었던 것 같다. 또한 힘든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단풍이 곱게 물든 설악산과 푸른 동해를 보시고 참 만족해하시는 장인어른의 사진을 보면서 진즉 이렇게 모실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란다 너머로 노란 은행잎과 울긋불긋한 단풍이 마치 꽃 천지 같다. 두 분도 남은 삶을 저렇게 곱게 사시다 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 2016-11-18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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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기심이 있으면 마음은 늙지 않는다
- 경제학 용어에 ‘한계효용(marginal utility)체감의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가 추가될 때마다 얻는 효용(만족감)은 줄어든다는 경제 용어입니다. 경제학자들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첫 번째 빵을 먹을 때는 큰 만족감을 느끼지만 2개3개 4개를 계속 먹어 갈수록 만족감이 줄어든다고 합니다. 배가 불러 올수록 더 이상 빵에 대한 호기심이나 갈구하는 마음이 줄어듭니다. 그러나 세상은 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배우고 채워도 질리지 않는 신기한 것들이 많습니다. 세상은 호기심을 유발하는 진기명기한 일들이 즐비합니다. 나이를 먹으면 원만한 것은 보고 듣고 느끼고 해도 어지간해서는 감동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새로운 것을 늘 보니 기뻐서 하루 800번을 웃지만 어른은 하루 8번 웃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궁금한 것이 많아서 어른들에게 계속 질문 합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어지간해서는 그러려니 하고 스스로 답을 얻고 말지 궁금해서 또는 호기심으로 질문하지 않습니다. 알고 싶은 욕망이 강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여주 신륵사에 선배님을 모시고 갔습니다. 선배님은 다리가 아프신지 “신륵사 절이라고 뭐 다르겠어. 절 다 그렇지 뭐 나 여기서 쉴 테니 자네들끼리 다녀오게 ” 하면서 벤치에 주저앉습니다. 불과 300m만 가 면 절 구경을 할 거리에서 멈추어 버립니다. “선배님 나와 함께 천천히 올라가시지요.”했더니 손사래를 칩니다. 표정을 보니 확실히 가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절 구경이 궁금하지도 않고 흥미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선배님이 착실한 기독교신자 여서 절은 싫어하나보다고 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선배님의 마음에는 사찰의 대웅전이나 부처님에 대한 호기심이 없습니다. 호기심이 없어지면 생각은 고루해지고 마음은 늙어가고 몸은 움직이는 것을 멈추려합니다. 물론 모든 사찰의 부처님은 대동소이합니다. 크게 보면 같지만 쪼개어 살피면 다 다릅니다. 누워있는 부처도 있고 받침대의 모양이나 앉은 위치 크기도 다 다릅니다. 나이 들면서 그러려니! 그럴 거야! 하고 질문을 닫아버리는 순간 우리의 뇌는 이미 늙어 감을 인정해야 합니다. 소녀들은 돌 굴러가는 것을 보고도 까르르 웃습니다. 하지만 나이 들면 바위가 굴러가도 겁만 먹을 뿐 즐거워 웃지 못합니다. 개그맨이 직업적으로 웃겨도 팔짱을 끼고 ‘웃기려면 웃겨봐라’ 노려보며 시큰 둥 합니다. 필자는 스스로 호기심을 만들어 냅니다. 카톡으로 자식들한테 문자나 그림을 날리면서 이놈 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 합니다. 예상한 반응을 보이면 재미있습니다. 오늘만 해도 도서관에 유지송님이 쓴 ‘은퇴달력’이라는 책이 철학 분류기호인 100번을 달고 있습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왜 틀린 분류표 명찰을 달았는지 궁금합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전문가인 사서 도서관 직원에게 300번 대의 사회분류표를 달아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금방 알아듣고 잘못을 시인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수로 잘못한 것일 뿐입니다. 사람들과 이야기 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과거 이야기도 궁금하고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오늘 커피를 나눈 분은 젊어서 건설업에 종사했는데 시골에 한옥 황토방을 만들어 귀향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흥미진진한 건설현장 이이야기도 듣고 황토방의 좋은 점을 터득합니다. 책에 없는 호기심을 채워주는 좋은 이야기는 경험한 사람에게 직접 듣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려면 상대방에 대한 호기심이 있어야 합니다. 늙어가는 잣대는 바로 호기심이 얼마나 있느냐 입니다. 궁금하지 않고 알고 싶은 것이 없으면 즐거움도 없습니다. 공자님 말씀에도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현대판 평생학습입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온통 호기심 천국입니다. 우리에게 호기심이 있는 한 우리는 영원한 청춘입니다.
- 2016-11-15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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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연극 연출가 김정숙, 연극은 결국 사랑이다!
- 연극 연출가 김정숙(金貞淑·56)에 대해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들었다. “그녀를 존경해”, “멋있어”, “사랑해”. ‘김정숙’이란 이름이 거론되면 하나같이 천사를 만난 경험담(?)을 쏟아내곤 했다. 한 번쯤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기회가 없었다. 새뮤얼 베케트의 연극 에서 끝까지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씨처럼. 만나보자. 예전 같으면 대한늬우스에 나올 만한 국위선양(?)도 하고 돌아왔다. 그럼 한번 소리 소문 좀 내볼까? 김정숙 연출가는 ‘극단 모시는 사람들’(이하 모들)의 대표로 28년째 장기집권(?) 중이다. 스물두 살에 극단 에저또에서 연극을 시작해 스물아홉에 극단 모들을 창단했다. “운명이죠. 고등학교 때 연극을 보고 나서 ‘저 무대에서 평생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극단에 들어간 첫날, 연습실 바닥을 붙잡고 ‘아! 이제 도착했다. 여기서 절대로 떠나지 않겠어’라고 서원처럼 의식을 치르듯 속으로 말했죠. 제자리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 후 단 한 번의 한눈도 팔지 않고 오로지 연극만을 바라보고 살았다. 연극을 뺀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그녀는 24시간이 늘 아깝고 모자라다. 그런데도 인터뷰 날 자정 전에 책상에서 일어난 일을 제일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뿌듯해한다. “제가 몸 생각하지 않고 연극 생각만 하니까요. 어쩌다 12시가 넘어버리면 4시까지 잠을 못 자더라고요. 그런 날은 다음 날 스케줄에 무리가 있으니까 될 수 있으면 진짜 그러지 말자 해요.” 그녀의 또 다른 이름 ‘극단 모시는 사람들’ 김정숙 연출가의 분신과도 같은 극단 모들은 창단 이후 대중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관객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연극을 굳이 몰라도 아이부터 어른까지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다. , , , 등이 모들의 대표작. 특히 은 토종 창작 뮤지컬 중 최고라는 호평을 들으며 각종 시상식을 휩쓸었다. 뮤지컬로 성공적인 삶의 반열에 오른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브로드웨이 식의 뮤지컬을 꿈꾼 건 아니었어요. 나는 음악의 비중이 크고 내용에 영향을 주는 소리극을 하고 싶었어요. 당시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나타나서 편리하게 이용했던 것뿐이죠. 그런데 마치 우리가 브로드웨이를 지향해서 가야 할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내가 원했던 소리극의 형태가 아니어서 음악에 대한 마음이 많이 닫혔어요.”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모들의 창작 뮤지컬을 보기 어렵다. 화려함 대신 소박한 사람 이야기, 고전 속 주변 인물들에 주목하는 연극이 주류를 이룬다. 행복한 연극을 아는 예쁜 사람 모들은 지난 2003년부터 과천시민회관 상주 공연단체로 입주해 있다. 시민극장을 열어 시민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고 있고, 모들의 대표 연극인 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프로그램 ‘신나는예술여행’에 선정돼 전국 8개 교도소를 돌며 공연하고 있다. “저는 대학로나 대극장 공연에 연연해하지 않아요. 그보다는 시골학교나 교도소에 가서 평생 연극을 본 적 없는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행복해요. 얼마나 기쁜지 제 마음에서 사랑의 샘이 퐁퐁퐁 솟는 거 같아요. 진짜로요(웃음). 내가 가지고 있는 레퍼토리, 내 보물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최근 2~3년 동안 노력을 많이 했어요. 예를 들어 ‘우리 고향 초등학교에 연극 보여주기’ 이런 걸 하고 싶어 해요. 공연하는 데 300만원이 들면 출신 동창회에 도움을 청하고, 3만원씩 100명이 내주시면 고향 초등학교 어린아이들에게 공연을 보여줄 수 있다고요. 화려하게 신문에 오르내리는 그런 일 말고 진짜 일을 하고 싶어요.” 에든버러를 넘어 케냐까지 한국 연극을 알리다 지난 8월, 김정숙 연출가는 모들 단원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이하 에든버러 프린지)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세계 공연예술 축제의 백미인 에든버러축제는 공연 예술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꿈의 무대. 축제기간이 되면 전 세계에서 7000여 단체, 3만여 명의 공연자와 관객이 몰려와 도시를 가득 메운다. 에든버러 방문은 이번이 다섯 번째. 좋은 공연이건 나쁜 공연이건 집중해서 볼 수 있는 기회라 김정숙 연출가는 에든버러 프린지를 사랑한다. “2008년에 처음 에든버러 프린지에 이라는 작품을 가지고 갔어요. 당시 단원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연극을 해왔는데 뭐했지? 내가 명예를 얻었나, 물질을 얻었나? 나는 연극 안에서 얼마나 행복하지? 하는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세계 연극 속에서 우리를 한번 비춰보자. 놓아보자’라는 심정으로 그곳을 가게 됐어요. 처음인데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좋아해줬어요. 매진에 객석 점유율 80%를 넘었고요.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였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순식간에 입소문을 타더니 사람들이 티켓 박스 앞에 줄을 섰습니다. 그때 ‘아!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구나’ 하는 확인을 서로 하게 됐죠.” 올해 모들은 어린이극 과 그리고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를 가지고 에든버러를 다시 찾았다. 이번 에든버러 프린지 공연은 김정숙 연출가의 치밀한(?) 계산으로 진행됐다. “케냐에서 이 초청을 받았어요. 그래서 예술경영지원센터에 항공권을 지원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더니 두 곳은 가야 받을 수 있다더군요. 그래서 에든버러 프린지와 케냐 공연을 엮은 거죠. 그런데 공연만 가지고 가는 게 아까웠어요. 케냐는 처음이지만 에든버러는 벌써 세 번째였거든요. 그래서 후배가 연출한 과 를 에든버러에서 공연해보자 했습니다. 4월까지 필요한 서류를 내야 했는데 그때 는 정말 시놉시스와 사진 한 장밖에 없었어요.” 에든버러축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축제다. 전쟁이 끝나서 이런 페스티벌도 생겼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상처, 바로 위안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사진 한 장과 시놉시스밖에 없었지만 에든버러 프린지 극장측은 흔쾌히 모들에게 공연장 문을 열어주었다. “이전 축제에 참가했을 때 작품으로도 인정을 받았지만 저희가 거리쇼라든지 홍보 면에서 기여를 많이 했어요. 극장에 우리가 바로 그 팀인데 를 공연할 수 있는 무대를 줄 수 있냐고 물었죠. 바로 OK 하더군요. 그 한마디로 정말 에든버러에 가게 됐어요.” 딱 시놉시스 한 장이었다. 공연에 관한 정보가 적어 일반인 대상의 홍보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관객이 를 찾아왔다. “가 위안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있잖아요. 하와이와 뉴질랜드에서 이 공연을 보러 오신 분이 계시더라고요. 80 노구를 이끌고 2차 세계대전을 실제 겪으신 분들이 오신 거예요. 하와이에서 오신 분은 이곳에서 볼 첫 작품으로 를 선택했다고 했어요. 4월에 공연 예매를 미리 해놨다면서 수첩까지 꺼내 보여줬어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김정숙 연출가는 다섯 번의 에든버러 페스티벌 참가 중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인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 것이 소중했다고 말한다. 모들 단원과 김정숙 연출가는 낮에는 , 저녁에는 를 무대에 올리고, 밤에는 다른 팀의 공연을 보러 열심히 뛰어다녔다. 케냐에서 기립박수 받은 에든버러에서의 한 달 일정을 마치고 케냐 나이로비로 떠났다. NGO의 천국 케냐에는 NGO 활동가와 선교사 자녀들이 다니는 70년 된 국제 학교 로슬린 아카데미(Rosslyn Academy)가 있다. 이곳에서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700여 명의 학생이 관객이었는데 이런 공연을 자주 접하는 아이들이 아니었어요. 물론 영어로 공연을 했지만 ‘어떻게 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지?’라고 느낄 정도로 완벽한 시점에 쿵, 짝을 맞추는 겁니다. 공연을 완벽하게 만들어준 최고의 관객을 케냐에서 만났어요.” 게다가 학생들의 자율적인 행동이 몹시 감동스러웠다. “교정 한 곳에서 쿠키를 팔고 있었어요. 먼 나라에서 공연 팀이 왔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요. 그런 기획을 어린이들이 했다는 말이죠.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전 세계 아이들이 모여 편견 없이 대화를 할 수 있는 학교였어요. 에든버러에서는 뛰어다니고 정신없었다면 케냐에서는 큰 위로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관록이 묻어나는 시니어 배우들 모시겠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김정숙 연출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공연(11.25~26 과천시민회관 소공연장)을 준비 중이고 교정시설 공연도 다녀야 한다. 과천 시민과 함께하는 연극 준비에도 여념이 없다. 시민극장에 시니어 층이 많다는 얘기에 시니어의 연극 참여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시민극장에 60대 이상의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아요. 배우 중에 저와 어렸을 때 같이 연극하던 선배가 오셨어요. 연극을 하다가 도중에 그만두신 분인데 은퇴하고 나서야 돌아오신 거죠. 오디션 때 너무 멋있었어요. 인생이라는 공부를 열심히 하셔서 이제 진짜 배우가 될 거 같아요. 시니어들은 인생을 다 겪으신 분들이라 어떤 이야기든 무대에서 제대로 표현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들이 무대로 돌아온다면 100% 환영하고 지원할 겁니다. 잘하실 수 있도록 적극 도와드릴 거예요. 내년에 무대에 올릴 작품에는 등장인물과 같은 나이의 배우들을 참여시킬 계획입니다.” 시간이 흘러 연극 일을 안 하게 되면 무엇을 할 건지 물어봤다. 돌아온 답변이 누룽지를 눌러 파는 누룽지 할머니가 되고 싶단다. 누룽지 한 컵에 1000원, 한 평짜리 가게를 얻어서 누룽지를 팔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마냥 철없고(?) 청순한 소녀 같다. 미래의 모습을 이야기하는데 마치 연극 한 편을 보는 느낌이다. 들을수록 맛있고 찰지다. 영락없는 이야기꾼. 아직은 우리 연극을 위해 할 일이 많아 보인다. 마지막으로 연극이 뭐냐고 물었다. 거침없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딱 하나인 거 같아요. 어쨌든 작업 안에서 마지막 선택은 항상 사랑이었어요. 일을 하다 보면 나한테 어떤 이득이 될까를 고민하잖아요. 가끔은 흔들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사랑을 선택했어요. 연극을 향한 사랑. ‘세상에 어떤 것도 사랑을 이기는 것은 없다’는 사실, 제가 늘 생각하는 것입니다.” 에든버러축제(Edinburgh Festival)란? 에든버러축제는 1947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시작된 공연 축제다. 전쟁으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의 정신을 치유하려고 만들어진 이 축제는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축제(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와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Edinburgh fringe Festival)로 나뉜다. 인터내셔널의 경우 100여 개의 공연을 전 세계에서 엄선하기 때문에 초청되는 것 자체가 영광. 프린지는 1947년 채택되지 못한 공연 팀이 축제가 열리는 주변에서 공연한 것이 지금의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로 정착됐다. 올해 ‘극단 모시는 사람들’을 비롯해 한국의 14개 공연 팀이 참여했다. 2011년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축제에 극단 목화의 가 최초로 초청됐으며 ‘헤럴드 에인절스’ 상을 수상했다. 김정숙 극단 모시는 사람들 대표 1982년 극단 에저또 입단 1984년 연출 데뷔 1989년 5월 극단 모시는 사람들 창단 주요 수상경력 -뮤지컬 스포츠조선 뮤지컬 희곡부문 대상, 1996 서울연극제 현대소나타상, 1996 백상예술상 대상, 작품상, 희곡상. 1996 희곡작가협회 올해의 작가상 수상, 2003 -연극 희곡협회 올해의 희곡작가상, 2003 대한민국 국회대상 올해의 연극상, 2011 대한민국 클린콘텐츠 국민운동본부 선정 클린콘텐츠상, 2015
- 2016-11-1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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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늦은 참회 일기
- 어느 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그동안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던 일들의 해답이 문득 찾아왔던 것이다. 필자는 반가운 마음에 고양이 세수를 서둘러 서재로 가서 컴퓨터를 켰다. 글로 남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필자의 생활을 바로잡기 위해 이 글을 꼭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있었다. 필자의 잘못된 습관이 필자 인생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필자를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 특히 사랑하는 가족, 그중에서도 두 아들에게 죄를 짓게 되는 일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큰아들에게 게임을 지나치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이야기하였더니 큰아들은 아버지가 바둑 두는 것을 중단하면 자신도 게임을 중단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필자의 취미인 바둑을 중단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필자에게는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한 습관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떤 일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 거기에 몰입되어 잘 빠져 나오지 못하는 습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습성은 이제 고질적인 습관이 되어버렸다. 안 좋은 상황일 때는 필자의 인생에 심각한 영향을 주기도 한다는 생각에 고쳐보려고도 했지만 잘 안 되었다. 물론 그 집중력이 필자의 오늘을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말이다. 필자는 평일 아침이면 하루 일과를 정리한 뒤 중요한 것부터 하나하나 실행해나간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필자를 보면서 굉장히 성실하게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주말이나 퇴근 이후에는 마음이 느긋해져 성당을 다녀오거나 급한 일만 처리한 후 바둑에 빠지는 데 있다. 이제라도 필자의 잘못된 습관을 하나씩 고백하면서 참회하고 싶다. 첫째, 필자는 평일에 하던 것처럼 주말을 잘 지내지 못했다. 계획을 세워 주말에도 제대로 생활했더라면 필자와 아들의 인생이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가장으로서 당연히 모범을 보여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 아들들이 더 잘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들어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다. 예를 들어 바둑은 나 혼자 즐기는 취미다. 필자의 즐거움 때문에 가족들은 필자와 함께하는 즐거움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을까? 우선 아내에게 미안하다. 그리고 아들들이 어렸을 때 좀 더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화하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 장성한 아들과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는 아버지를 보면 부럽고 필자의 잘못된 삶이 반성된다. 둘째, 필자는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라는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습관도 바꾸려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가끔 주위 사람들에게도 강조해왔다. 그런 필자가 자신의 고질적인 습관은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르키메데스가 욕탕에서 진리를 발견했듯 갑자기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아내는 필자가 취미생활 혹은 다른 일에 몰두해 있을 때 가끔 다가와 “여보, 심심해”라고 말하곤 했는데 필자는 그런 아내를 혼자 내버려두곤 했다. 시니어 교육을 받으면서 함께하는 생활을 하겠다는 계획서까지 만들어놓고도 이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만일 아내가 치매라도 걸리면 필자는 얼마나 뒤늦은 반성을 하려고 그러는 것일까. 셋째, 필자는 나폴레옹의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말에 공감하고 지금도 아침이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끔 필자는 신문이나 방송에서 필자보다 더 많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몇십억대의 엄청난 연봉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 “왜 나는 저런 연봉을 받을 수 없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원인은 필자의 잘못된 습관 같다. 분명히 필자는 그들과 똑같이 부모님으로부터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고 태어났는데 왜 필자의 연봉은 그들과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일까? 필자는 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것을 통회하고 있다. 넷째, 필자는 가끔 핑계를 대는 습관이 있다. 아들들이 필자가 원하는 만큼 공부를 하지 않아 힘들어서 이를 견디기 위해 취미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스스로 핑계를 댔다는 자책이 든다. 지금 생각하니 참 유치한 핑계였다. 어른인 필자가 문제해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그런데 필자는 회피하고 핑계를 대면서 무책임하게 행동했던 것이다. 핑계는 나약한 사람들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서도 삶은 여전히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이 조심스럽다. 오늘의 참회는 여기서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다. 앞으로는 계획된 생활로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아들들도 변화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줘야겠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진리를 실천해야겠다. 요즘에는 가끔 주말에 아내와 영화를 보러 간다. 함께 영화 보러 가자고 하면 아내는 너무 행복해한다. 필자의 참회 일기가 점점 더 두꺼워지면 아내는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 2016-11-03 17:14